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인구 5만의 작은 공업도시로서, 유태인 집단학살의 대명사로 더 알려져 있다.
이 강제수용소는 최초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만들어 진 것인데
그후 집시, 사회주의자, 유태인, 동성연애자 등 소위 멸종 대상들을
그 수용대상으로 하였고,그중 유태인이 가장 많았다.
제2차세계대전시 사망자는 쏘련이 2,000만명, 폴란드가 600만명
그리고 유태인이 400만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명으로,
이 중에서 약 250만명이 유태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주장이며,
총 사망자는 110만 ~ 150만명이고 그 중 유태인이 제일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유럽 각지역으로부터 열차로 이곳 수용소까지 이송되는 과정에서도
( 80명이 타는 화물칸에 400명이 탑승)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질식사 했다고 한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노동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
즉,노약자, 어린이 및 대부분의 여자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되었고,
그밖에도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으로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한다.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7,650명의 생존자를 구하고, 수용소 시설과 막사의 일부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 곳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이스라엘정부의 후원으로 입장료를 받지 않고 관람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안내 비문
FOREVER LET THIS PLACE BE A CRY OF DESPAIR
AND A WARNING TO HUMANITY WHERE THE NAZIS MURDERED
ABOUT ONE AND A HALF MILLION MEN, WOMEN AND CHILDREN.
MAINLY JEWS FROM VARIUS COUNTRIES OF EUROPE.
AUSCHWITZ - BIRKENAU
1940 -1945
BIRKENAU는 아우슈비츠(1수용소)보다 10배규모의 2수용소(50만평)를 말함.
(독일군의 증거인멸로 인해 거의 다 파괴되었음)
수용소 정문에는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라는 기만적 문구가 있다.
(ARBEIT MACHT FREI)
일터로 나갈 때는 악대의 나팔에 발맞춰 이문을 나갔다 한다.
정문 안쪽에서 악대가 연주하던 장소
4미터 높이의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물
붉은 벽돌 단층건물로 전체 28동이 3열 횡대로 열 지어 있는데,
이는 원래 폴란드 군대막사 였었다 한다.
현재는 박물관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가스 샤워실 건물
일할 능력이 못되는 사람은 모두 가스샤워실에 보내진다.
목욕탕인 줄 알고 들어간 건물에서 한방에 오백명씩 죽었으며,
가스실은 의외로 좁아서 죽어도 쓰러질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가스 샤워실 내부
가스실에서 고통에 못이겨 벽면을 할킨 손톱 자욱
아우슈비츠 희생자를 상징하는 조각품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그 삶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교훈
1000명 규모의 강제 수용소는 독일내 및 점령지역에 수없이 많이 있었는데
수용소 내에서의 살인 및 강제노동 등이 국제여론의 도마위에 오르자,
이를 하나의 시설로 통합하고자 1941년에 아우슈비츠의 시설을 대폭 확대하고
1942년부터는 전유럽에 있는 유태인을 아우슈비츠수용소로 이송하였다.
1수용소와 2수용소의 규모비교(3수용소도 있음)
지클론 B가스통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며,
시체 태울 때 나오는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었다 한다,
죽은 사람들의 머리카락
가스샤와실에 가지전에 모두 머리를 깎였다 한다.
머리카락으로 직조한 천과 카페트
입소할 때 가지고 온 가방들
1인당 소지가능한 가방크기를 제한 하여 가방속에는 가장 귀한 것들만 넣었다 한다.
나중에 돌려준다고 해서 각자의 가방에 이름을 표시하게 하였다.
입소할 때 입고온 옻들
입소할 때 신고 온 신발들
칫솔들
구두약
안경 및 안경테
밥그릇들
희생자들 명단
입소일자와 사망일자가 적혀 있다.
그래도 초창기에는 치밀한 행정력을 발휘한 모양이다.
굶주림에 피골이 상접한 유태인들
당시 남자들의 평균체중은 27Kg이었다 한다.
굶어 죽어가는 유태인 조각상
추운 겨울에도 이런데서 모포한장 덮고 잤다 한다.
시체 화장실
화장터 굴뚝
총살 집행장소
수용소장 헤스가 처형당한 교수대
독일군 막사
그런데 모든 악행들은 독일군의 앞잡이인 유태인들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한다.
일본인 보다도 친일파가 더 악랄했던 것과 같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물내 전망대 (아침 점호하던곳 )
제 2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이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 덜 알려졌지만 훨씬 면적이 크다(10배인 50만평)
원래 300개의 동이 있었는데 거의 불타거나 파괴 되었고,
단지 45개의 동, 22개의 목조 건물만 남아있다.
어찌나 넓은지 한눈에 안들어 온다.
제 2 수용소 가는 기찻길
기차로 바로 수용소 안까지 닿을 수 있었던 제 2 수용소 모습이다.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손가락 하나의 지시에 의해 노인이나, 여자, 어린이들은
바로 가스실로 보내졌고, 오른쪽으로 지명 당한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막사에
들어가 많은 노동, 혹독한 추위와 질병, 기아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아래 사진은 여자들이 수용되었던 곳인데 농가의 마굿간을 개조한 것이라 한다.
아우슈비츠의 벽돌 건물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다.
여자들의 공동 화장실
제 2 소용소 부근의 아름다운 풍경
단체관람온 이스라엘 학생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태인이 학살당한 것에 대해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왜 모든 나라가 유태인을 싫어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연합국이 좀 더 일찍 이 지역을 폭격하여 유태인들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연합국은 모른체 했다고 한다.
쉰들러리스트 테마곡
첫댓글 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의 제물이 되어 죽어 갔음 에도, 젊은 외과의사 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으로 매일 면도를 해 삶의 의지가 넘치는 아주 쓸모 있는 사람 이라는 인상을 줘 목숨을 건질수 있었네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것이다" 그의 말 이 여운을 남깁니다.
왜 모든 나라가 유태인을 싫어하는지 궁금 했어요.끝에 이런 말이 있네요. (유태인들의 이런 역사적 배경때문에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지역의 상권을 좌지우지 하면서도 결코 남을 배려하거나 베푸는 일 없이 대부분 샤이로크와 같은 수전노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주변국들로부터 동정을 받지 못하고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지옥이 따로 없네요.이 이상의 더 비참함은 없을것이라 생각해요.보기실치만 잘봤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