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마인드사띠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경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작성하였습니다.
다만 주장이 있기에 옳고 옳지 않음에 대한 논증입니다.
제 주장 또한 경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으면 해당 경을 인용하여 반박하여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1). 마인드사띠의 주장 - 갈애가 짓는 연기된 법의 성품에 대한 질문과 대답, 1. //정신[名]과 물질[色]과 알음알이[識]를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지요?//에서는, 정신[名]과 물질[色]과 알음알이[識]은
느낌 인식 의도行 촉 작의 등 과 같은 정신들의 식별名(초선정에서 경험함)과 사대에서 파생된 감성물질色의 삼특상과 혐오스럼의 경험 등을 통쳐서 묶은 식별들을 名色의 識에 말씀합니다.
이렇게 名色을 정의한 M9<바른 견해경>을 참조바람니다. 이처럼 경전이 곧 축약된 가르침이구나!라고 마음에 와 닿지요?
viññāṇa의 큰 두 가지.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와,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에는 에너지가 있다..
12연기 식은 kamma viññāṇa이고, vipāka viññāṇa는 감촉phassa에서의 식 삼사화합에서의 식이다.
정리
1). 갈애taṇha의 뜻은 식별되는 대상 속에서 ‘붙잡혀서 소진되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갈애가 짓는 연기된 법의 성품에 대한 질문과 대답, 1. //정신[名]과 물질[色]과 알음알이[識]를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지요”의
정리는 식viññāṇa이 여러 조건들로 연하여 명색(이때 색은 볼 수도 없고 부딪힘도 없는 물질
anidassanāppaṭighaṃ rūpaṃ)로 붕괴된다. 이는 무색계처의 공무변처에 해당된다. 인간의 구성요소는 사대와 공,식 여섯 요소인데 이때 공간은 정보와 에너지로 가득한 ‘공空’이며 이는 텅빔이 아닌 에너지 체이다. 밖의 우주의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이 명색/namarūpa나마루빠는 색계로 하강하면서 명과 색으로 나눠지게 된다.
그래서 이를 경험하는 기능과 기관/인드리아가 발현되며, 색계의 물질은 소리와 빛으로 구성되어 색계 존재의 기능은 눈과 귀가 주로 작용한다.
상윳따 1권, 데와 품에서 명/nama나마, 갈구, 마음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을 이해한다면 명색과 명과 색을 분별하는 지혜가 생겨난다.
자료 : 디가 33 - “tividhena rūpasaṅgaho — sanidassanasappaṭighaṃ rūpaṃ , anidassanasappaṭighaṃ rūpaṃ, - anidassanāppaṭighaṃ rūpaṃ. - 세 종류의 물질의 조합(rūpasaṅgaha) - 볼 수도 있고 부딪힘도 있는 물질, 볼 수는 없으나 부딪힘은 있는 물질, 볼 수도 없고 부딪힘도 없는 물질
정리 2). “식별名(초선정에서 경험함)”이라고 마인드사띠님께서 주장하시는데 여기에 대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초선.이선.삼선.사선을 마음의 해탈 또는 마음이 해탈, 마음을 해탈로 규정되어 있다.
이는 내입처와 외입처가 결박(상요자나)들로 묶이어 탐진치가 일어난다. 탐진치를 일시적으로 멈추는 방식이 색계선jhāna인데 그 기반이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이다. vivicceva kāmehi는 욕계에 대한 kama와 rāga를 일시적으로 그친다는 것이며, vivicca akusalehi dhammehi’는 여리작의/요니소마나시카가를 통하여 불선법을 일시적으로 멈추면, 정신작용인 보편쩨따시카의 vitakka,vicāra가 안목/ ñāṇadassana냐냐다사나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때 보편쩨따시카의 일곱 요소 중에서 느낌과 인지가 대상들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선에서의 대상은 즉 사마디의 대상은 느낌과 식별이 되어 사띠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마인드사띠님께서도 아래 경에서 느낌과 인지의 생멸(참고 2)을 인지하면 사띠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 2 : 장 로히땃사 품 Rohitassa-vagga 삼매 경 (A4:41) ♦ “katamā ca,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i? idha, bhikkhave, bhikkhuno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saññā ... pe ... viditā vitakk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ayaṃ,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i.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는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느낌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인식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머물고 꺼진다. 비구들이여, 이런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게 된다.”
정리 3 : ‘사대에서 파생된 감성물질色의’이라 하였는데 파생된 의미는 upādāya rūpa(upāda-rūpa)이고, 이때 upādāya는 일으키게 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감성물질이란 육내입처가 인드리아인 안이비설신의로 정보가 들어올 때 반응되는 물질을 칭한다.
그래서 마인드 사띠님의 규정 ‘사대에서 파생된 감성물질色의’의 출처를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는 육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필수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정리 4 : ‘삼특상과 혐오스럼의 경험’ 이는 맥락의 오류다.
삼특상 아니짜둑카아나타는 혜해탈에 쓰이는 개념이고 혐오스러움은 아래 경에서처럼 사물량심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심해탈에 관계되는 것이다.
마인드 사띠님께서는 범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삼특상을 꿰뚫는 명상의 지혜(ti-lakkhaṇa-paṭivedha-sammasana-ñāṇa)라 불리는 조사의 통달지를 통해서 철저히 안다.”
이 인용은 초불에서 가져온 것인데, 삼특상은 ‘법Dhamma’와 연관된 개념이다. 즉 혐오는 마음이나 감정인 존재에 관련어이며 삼특상은 법과 관련된 용어인 것이다.
참고 3 : 자애가 함께 함 경 (S46:54) Mettāsahagata-sutta 에서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문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피한 뒤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온하게 머무르리라.' 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온하게 머문다. 혹은 그는 깨끗함을 통한 해탈에 들어 머문다.
정리 5 : “이렇게 名色을 정의한 M9<바른 견해경>을 참조바람니다”
정견 경에서 명색은 nāmarūpaṃ pajānāti, paṭipadaṃ pajānāti, rāgānusayaṃ pahāya, paṭighānusayaṃ paṭivinodetvā, diṭṭhimānānusayaṃ samūhanitvā 등과 관련하여 명색을 설하셨다. 마인드사띠님께서 12연기에서 무명-행-식-명색의 차제를 옳으나, 식에 대한 규정은 옳지 않다.
12연기에서 식은 상카라되어 존재를 내포하는 식viññāṇā인 것이다.
그리고 명색을 알고보기 위해선 오근오력의 pajānāti가 필요한 것이다. 이 pajānāti는 사띠빳따나로 계발된다.
특히 명색을 바로 아는 것은 ‘욕/선택 rāga ’에 대한 잠재성향/저류anusaya의 버림과,
paṭighānusayaṃ paṭivinodetvā에서 드러나듯이 paṭighānusaya를 제거하고,
diṭṭhi-māna-anusayaṃ 자아과 관련된 잘못된 견해를 파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참고 4 : sabbaso rāgānusayaṃ pahāya - 욕망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paṭighānusayaṃ paṭivinodetvā - 적대감의 잠재 성향을 제거하고(X), 대상들과 함께일어나는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paṭighā - [pati–√ghaṭ–a]
paṭivinodetvā - abs. of paṭivinodeti, having dispelled; having removed; having gotten rid of. paṭivinodeti - pr (+acc). drives out; dispels; removes; gets rid (of) [pati–vi–√nud–*e–ti]√ nud 누르다, 충돌하다, √ nud 밀다, 추진하다, 쫓다
diṭṭhi-māna-anusayaṃ(삿된 견해인 자만의 잠재성향)을 옮긴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cakkhu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rūpā aniccā vipariṇāmino aññathābhāvino. itthetaṃ dvayaṃ calañceva byathañca aniccaṃ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3.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눈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형색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이처럼 이 쌍은 움직이고 흔들리고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diṭṭhimānānusayaṃ samūhanitvā – 완전히 파괴하면서,
samūhanitvā - abs (+acc). having uprooted; having eradicated; having exterminated; having utterly destroyed [saṃ–ud–√han–itvā] √,√ud / und 용출하다, 적시다
samūhanitvā < saṃ ud √han (strike, kill)
*동명사/절대분사(absolutive 절대사, gerund 연속체, indeclinable불변사) - 동사인데 명사화 된 것. ( ger.) ~을 하고, ~하고 나서, 한 후에, ~하면서
어미 : (i)tvā, (i)tvāna, (i)yana, (i)tūna, cca, aya, āya, (i)ya, tu, tuṃ
√kar(하다)>katvā, karitvā, katvāna
♦ “yato kho, āvuso, ariyasāvako evaṃ nāmarūpaṃ pajānāti, evaṃ nāmarūpasamudayaṃ pajānāti, evaṃ nāmarūpanirodhaṃ pajānāti, evaṃ nāmarūpanirodhagāminiṃ paṭipadaṃ pajānāti, so sabbaso rāgānusayaṃ pahāya ... pe ... dukkhassantakaro hoti — ettāvatāpi kho, āvuso, ariyasāvako sammādiṭṭhi hoti, ujugatāssa diṭṭhi, dhamm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āgato imaṃ saddhamman”ti.
20.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정신 · 물질을 꿰뚫어 알고, 정신 · 물질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고, 정신 · 물질의 소멸을 꿰뚫어 알고, 정신 · 물질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 때,
그는 욕망의 잠재 성향을 완전히 버리고,
적대감의 잠재 성향을 제거하고, '
내가 있다.'는 삿된 견해와 비슷한 자만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 · 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이렇게 하면 성스러운 제자가 바른 견해를 가지고, 견해가 올곧으며, 법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정법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정리 6 : ‘마음에 와 닿지요?’ 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어떤 내용을 주장하고 내용을 드러 낼 때는 작의manasikāra라는 용어사용이 적합하여 보인다. 즉 대상에 정신을 기울이고 주장하다. 경전에 의하면 어떤 대상을 드러낼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이와 같다.
‘ācikkhati deseti pañña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 설명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 ‘
다시 표명하자면, 마인드 사띠님 주장에 是非가 아니라 마음citta의 바른 사용은 부처님 법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점하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라는 용어 사용은 사띠빳따나의 16가지 용례나 사무량심, 청정한 등에서 참고될 수 있다.
--------------------------------------------------------------------------
마인드사띠님 두 번째 주장 : 2. //육내외입처가 알음알이[識]//에서는,
안의 감각장소와 밖의 감각장소가 2가지 종류의 결박이라는 안이비설신의 오문五門과 의문意門전향을 포함한 인식과정에 대한 알음알이(육식)를 의미한 것이지요.
정리 1 : 결박은 오하분결 오상분결을 의미합니다.
정리 2 : 결박은 식별을 매개로 합니다. 여기서 오문전향과 관계는 여러 차제가 있습니다.
즉 잠재성향 - 성향gati – 여러 결박들의 식별/알음알이/viññāṇa의 맥락 속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오문전향은 아비담마가 아닌 아비담마 상가하에서 다뤄집니다. 그 논모나 개요는 참조와 같습니다. 오문전향으로 설명되는 어휘는 ‘paccanubhoti - pr (+acc). experiences; shares the experience; partakes in the experience [pati–anu–√bhū–a–ti] 함께 이어서 존재한다(생성된다)’ 입니다.
참조 1 : 운나바 바라문 경(S48:42) Uṇṇābhabrāhmaṇa-sutta ♦ “pañcimāni, brāhmaṇa,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i. katamāni pañca? cakkhundriyaṃ, sotindriyaṃ, ghānindriyaṃ, jivhindriyaṃ, kāyindriyaṃ.
4. “바라문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눈의 감각기능, 귀의 감각기능, 코의 감각기능, 혀의 감각기능, 몸의 감각기능이다.
imesaṃ kho, brāhmaṇa, pañcannaṃ indriyānaṃ nānāvisayānaṃ nānāgocarānaṃ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ānaṃ mano paṭisaraṇaṃ, manov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각각 다른 대상과 각각 다른 영역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노[意]를 의지한다. 마노[意]가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마인드사띠님 주장 3. //알음알이와 정신-물질이 서로를 조건 짓는 관계이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정신-물질의 중간이라고 설했다고 합니다.//의 조건 짓는 관계에서는, 알음알이識의 有無에 따른 조건으로써 識을 연유로 함께 생겨난 정신-물질의 일어남과 그침滅이라는 '이것에 조건성'의 연기관에 의해서 연기된 법(정신-물질)의 확립을 아는 알음알이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6:61<중간경>도 역시 연기관입니다. 이처럼 정신들의 식별을 그침滅의 중에 의해서 연기된 법의 확립에 설명(S12:15 가전연경)하시는 것이죠. 즉, 중도를 연기된 법의 예시로써 6가지 중에 풀어 쓴 경문입니다. 그래서 6번째의 중간이라는 유신견의 멸滅이 곧 수다원과 이지요.
선정 사마타를 항상 공부하시면 경전속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사실에 체득됩니다.
정리 1 : “선정 사마타를 항상 공부하시면 경전속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사실에 체득됩니다”
먼저 선정이란 정신이 욕계의 다양함에 대한 작의를 멈추는 과정들이다. 이는 단계적 해탈을 증득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
사마타란 마음이 대상들에 동요 없음을 의미한다.
------------------------------------------------------------------------------------
ㅡㅡ인도철학 5단 논법 ㅡ
<초전법륜경>에서는
"고통과 쾌락의 양 극단을 따라가지 않는 중도를 (팔정도에 의해서 연기를) 완전히 깨달았으니(3단 논법),
(연기된 법에 대한)안목과 (사성제의 연기관에 대한)앎과 탐진치에 대한 고요함으로써 (위빠사나 앎을 )최상의 지혜에 갖추고 (사성제를) 바른 깨달음하셨다." 라고(5단 논법 완성).
정리 1 : “고통과 쾌락의 양 극단을 따라가지 않는 중도”
마인드 사띠님께서는 중도를 잘못 정리하셨습니다.
아래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고락을 가까이 하지 않고,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성스러운 팔정도를 중도라 하셨다.
성스러운 팔정도란 출세간의 정견, 정정진, 정념을 단일 체계로 수행하여 정정을 증득하고 이후 칠각지와 빤야를 통한 해탈을 의미한다.
정견이 이를 항상 견인하는데, 이때 정견은
“♦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8.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인가?
yā kho, bhikkhave, ariyacittassa anāsavacittassa ariyamaggasamaṅgino ariyamaggaṃ bhāvayato paññā paññindriyaṃ paññābalaṃ dhammavicayasambojjhaṅgo sammādiṭṭhi maggaṅgaṃ —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8.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마음을 가졌고 번뇌 없는 마음을 가졌으며 성스러운 도를 구족하여 성스러운 도를 닦는 자가 있으니, 그가 가진 통찰지, 통찰지의 기능, 통찰지의 힘,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 바른 견해, 도의 구성요소 이것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의 것이고 도의 구성요소인 성스러운 바른 견해이다” 이다.
출세간의 정견의 요소들은 1). ariyacittassa 2). anāsavacittassa 3). ariyamaggasamaṅgino 4). ariyamaggaṃ bhāvayato 5). paññā 6). paññindriyaṃ 7). paññābalaṃ 8). dhammavicayasambojjhaṅgo 9). sammādiṭṭhi 10). maggaṅgaṃ 이다. 이 용어와 개념 각각의 설명은 참으로 상당한 지면을 요구한다. 인연되면 다음 기회에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단지 짧게 정리한다면, 우선 세간을 떠나는 마음과 육근으로 유입/번뇌/유루가 없는 마음을 갖춘 성스러운 감각기능을 개발한 성스러운 제자가 지혜와 칠각지를 개발하고, 정견(맛지마 9번 16가지 요소)를 갖추면서 37조도품을 원만하게 함을 의미한다.
참고 1 : 상윳따 56.11 초전법륜경
“dve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katame dve? yo cāyaṃ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ṃhito, yo cāyaṃ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ṃhito.
3.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254)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ṃ —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ṃ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고[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
근데, 저는 대승불교 학자입니다^^
바르게 함께 지속적으로 공부하기를 기원하며 잘못된 부분 알려 주시면 적극적으로 고쳐 나아가겠습니다.
|
첫댓글 viditā의 뜻은 지각보다는 알려지는 known 뜻입니다.
//사대에서 파생된 감성물질色//은 M9 에서 말 한것입니다.(눈이 감성물질은 아비담마)
그리고 인용하신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마노[意]를 의지한다. 마노[意]가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에서 /5가지 감각기능은 마노를 의지한다./라고 말하는데 이들
각각은 안이비설신 5가지 문(오문)과 마노의 의문 이랍니다..
//중도를 (팔정도에 의해서 연기를) 완전히 깨달았으니//에서 중도=팔정도이지요. 그러한 팔정도(정견...정정)에 의해서 연기를 완전히 깨달았으니...
이렇게
질문하신 문장을 답해드립니다.
혹시 대답을 못해드린 게 있는지요?
마인드 사띠님, 제가 님의 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니까야에서 용례를 찾아서 해석과 함께 올려주십시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그 밑에 보시면, 제목 "연기, 명색의 알음알이와 인식(과정) 용어"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러면 팔정도(=중도, 대념처경)로써 실참에 접근한 연기에 대한 정의를 찾아 볼수가 있고요. 욕내외입처가 왜 오문과 의문 인지를 풀어 두었습니다.(/\)
@붓다명상mindsati 님의 글이 부처님 교법과 정합성이 없어 니까야 인용을 부탁한 것입니다.
님의 주장이 부처님 교법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부탁 드린 것은 부처님 법에서 그 용례를 인용하여 님의 해석을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말법시대에 부처님 법을 자기 사고층이나 수준에 가둬버리는 오류를 범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붓다명상mindsati 어지럽힘 경(A2:2:10) Sammosa-sutta
♦ 20. “dveme, bhikkhave, dhammā saddhammassa sammosāya antaradhānāya saṃvattanti.
katame dve? dunnikkhittañca padabyañjanaṃ attho ca dunnīto.
dunnikkhittassa, bhikkhave, padabyañjanassa atthopi dunnayo hoti.
ime kho, bhikkhave, dve dhammā saddhammassa sammosāya antaradhānāya saṃvattantī”ti.
1.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이 있어, 그것은 정법을 어지럽히고 사라지게 한다.
무엇이 둘인가? 단어와 문장들이 잘못 구성된 것과 뜻이 잘못 전달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단어와 문장들이 잘못 구성될 때 뜻도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법이 정법을 어지럽히고 사라지게 한다.”
@형성의 바탕을 초월한다 마인드 사띠님 위 경을 잘 사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법에 대하여 신중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님의 사유와 주장이 부처님 법 안에서 그 영역을 찾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