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아차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언론에 일제히 실렸습니다. 기사 내용을 잘 뜯어보면 현대-기아 그룹의 '기아차 띄우기' 의도가 쉽게 읽힙니다.
기사 핵심은 간단합니다. 기아 쏘렌토가 올해 상반기 국내생산 차량중 가장 높은 매출액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는데요. 10월1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쏘렌토가 상반기에 내수와 수출을 합쳐 1조5705억원어치가 팔려 1위를 차지했다는 겁니다. 판매대수는 현대 쏘나타가 1위이지만, 쏘렌토 대당 가격이 쏘나타보다 높기 때문에 매출액에서 쏘렌토가 1위라는 거죠. 또 톱 5에 스포티지(3위), 카니발(5위) 등 기아 SUV 미니밴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도 기사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됐습니다. 지난 6년간 매출 1위를 기록해 온 현대 쏘나타는 1조4526억원어치가 팔려 2위로 내려갔고, 현대 아반떼 XD가 1조2747억원어치로 4위를 기록했습니다. 쎄라토 클릭 렉스턴 베르나 옵티마가 각각 6~10위를 차지했더군요.
이 기사의 '팩트'는 문제될게 없지만, 이를 해석하고 기사화하는데 있어서 잘 모르는 이들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자동차 업계에서 순위를 매길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판매대수입니다. 이는 우리뿐 아니라 전세계 공통이지요. 올해 수입차 시장점유율이 3%대를 돌파했다는 기사를 읽으셨는지요. 3% 돌파라는 것은 판매대수 기준입니다. 매출액 기준으로만 하면 아마 10% 가까이는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디서도 매출액 기준으로 10% 넘었다고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쓰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습니다만) 판단기준으로 대수가 통용되기 때문이지요. 어떤 홍보자료든 내용을 잘 파악해보면, 통계중 어떤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겁니다.
또 기사에서는 국내시장 판매가 아닌 수출포함 매출액을 써놓고도 그 사실을 간단하게 처리해, 마치 이 순위가 국내소비자들의 선호도인것처럼 오도될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거의 내수에만 의존하는 르노삼성차 전 모델과 소형차 위주인 GM대우도 당연히 10위권내에서 빠졌고요. 현대-기아차 외에는 쌍용차 렉스턴 하나가 8위에 겨우 턱걸이했지요. 통계 해석에 문제가 있어보이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요. 이 기사에서 이보다 강력하게 주장하는 메시지는 물론 '현대가 아닌 기아를 좀 봐달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기사가 나간뒤 2주일 쯤 뒤인 11월1일에는 기아차 정의선 사장이 기아차 지분의 0.98%를 매입, 자기지분을 1.99%로 늘렸다는 보도가 났습니다. 매입자금으로는 무려 650억여원의 '개인 자금'을 썼다고 합니다. 정 사장은 이미 지난 2월초 기아차 지분의 1.01%에 해당하는 350만주를 취득해 놓은 상태입니다. 기아차는 책임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이라고 밝혔지만, 후계구도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겠지요. 결국 정 사장이 기아차 지분을 확대해 기아차를 발판으로 그룹 지배권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여기서 문제되는게 정사장의 경영능력입니다. 정몽구 회장의 외아들로 1970년생인 정 사장은 1999년 현대차 자재본부 이사로 입사해서, 2001년 상무, 2002년 전무, 2003년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렸습니다. 오너경영체제를 감안했을때, 수긍할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현대-기아 그룹 같은 거대 글로벌기업에서 경영능력이 검증 안된 사람이 수장에 앉는다는건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겠지요. 도요타의 경우도 조만간 도요타 가문 사람인 도요다 아키오 현 도요타 부사장 체제로 간다는 관측이니, 오너체제 자체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발빠른 의사결정과 강력한 추진력이 요구되는 세계 자동차업계에서는 오너체제의 장점도 많으니까요. GM같은 전문경영인 체제의 경우 단기실적에만 집중하느라 장기적인 성장동력을 찾는데 실패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전문 경영인 체제인 혼다의 경우는 잘 해나가고 있으니 어느 한 잣대로만 보는 것은 무리라 봅니다. 여하튼 오너세습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너세습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정사장의 경우 능력 검증 기간을 충분히 거치지 않고 너무 빨리 부상했다는 점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논의해 볼만하다고 봅니다. 도요타의 차기 CEO로 점쳐지는 도요다 아키오의 경우는 1984년 도요타에 입사했고 현재 나이도 49세입니다. 그동안 중국시장 개척에서 어느정도 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올해초 부사장 자리까지 오르는데 20여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지요.
반면에 정사장의 경우는 경영능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채 책임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직 논의가 이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가 앞으로 현대-기아 그룹을 맡는다고 가정했을 때 아버지보다 더 잘 이끌어나가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습니다. 정몽구 회장 역시 처음 현대차의 수장에 올랐을때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불안한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이 많았는데도, 현재의 현대차 품질 신화를 이루었으니까요. 최근의 현대 부흥을 되짚어볼 때, 정몽구 일가 내부에 자동차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궤뚫지 못한 어떤 역량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사장이 만들어낸 실적은 자력으로 이룬게 아닙니다. 정사장 스스로의 경영능력을 발휘한 것은, 한때 인터넷 관련사업을 벌인 것이 유일한데요. 결국 그룹에 부담만 안긴채 사업을 접었습니다. 2001년에 설립된 현대차그룹의 비상장 물류 계열사 글로비스, 건설회사 엠코, 카오디오업체 본텍은 현대차 관련사업을 독점해 매출액과 순이익 모두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는데요. 글로비스·엠코·본텍 모두 정의선 사장이 최대주주입니다. 특히 글로비스는 작년 매출만 9000억원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현대차그룹은 내년 글로비스의 상장을 추진 중이라고 하는데요. 그럴 경우 최대주주인 정의선 사장은 엄청난 현금 동원능력을 갖게 될테고 이를 기반으로 기아차 등의 지분 추가매입에 나설 것으로 관측됩니다. 애초에 정사장이 출자한 금액은 수십억원대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정몽구회장의 맏딸 정성이씨가 최대주주, 정의선 사장이 2대주주로 참여해 올해 설립한 광고대행사 '이노션'도 약간의 문제소지가 있습니다. 현대와 기아는 작년 국내외 매체 광고비로 2000억원 가량을 지출했다고 합니다. 이노션이 두 회사의 광고만 전량 수주해도 엄청나겠지요. 오너일가라고 해서 이렇게 손쉽게 장사해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현대차그룹이 직접 투자하지 않고 정성이씨와 정의선 사장이 개인적으로 출자한 것 역시, 글로비스 건과 마찬가지로 증여세 부담 등을 줄이고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기위한 장기포석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당장은 문제없다 해도 주주들에 대한 책임경영 측면에서 정석이라 보긴 힘들겠지요.
현대관련 기업들의 출자상황이나 최근 계속되는 기아 홍보성 기사 등을 볼때, 현대의 기아차 띄우기는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군대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대의 기업문화에서는 차기오너가 있는 회사에 임원 이하 임직원들이 알아서 충성 경쟁하는 풍토도 없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증권가에서는 현대차보다 기아차를 더 유망하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차 그룹내의 이러한 분위기를 간파한 것이겠지요.
전력을 다한다 해도 5~10년뒤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자칫 그룹내에서 기아 눈치보기 기아 밀어주기 등의 풍토가 생겨나 현대-기아의 기업활동의 핵심역량이 분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또 현대 신형 베르나나 곧 등장할 기아 로체 등의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현대-기아 그룹에서 기아의 확실한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각각의 브랜드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그룹 내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현대-기아가 장기적인 비전수립에서 방향감각을 잃고있지는 않은건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오너가 있는 거대기업의 동향에 대해 제가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정 사장이 앞으로 현대-기아라는 글로벌기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려면 확실한 경영능력을 보여주어야 할것입니다. 지금처럼 그룹이 전사적으로 밀어서 만들어내는 실적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실적 말입니다.
기아차는 현재 슬로바키아 질리나에 공장을 짓고 있고요. 중국에도 연간 생산량 30만대 규모의 제2공장 건설에 착공했습니다. 미국 미시시피에 독자공장도 곧 착공할 예정입니다. 의욕적인 확대경영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만, 최근 세계 자동차시장 위축이 기아의 확대경영 전략에 큰 부담이 될지도 모릅니다. 최근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CEO 카를로스 곤이 도쿄 모터쇼에서 "중국시장이 황금알을 낳던 때는 끝났으며, 미국시장 규모도 축소될 것"이라는 암운이 깃든 전망을 내놓은 것도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 당장 도요타 혼다의 하이브리드카 공세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연료전지차 등 차세대 자동차 개발을 놓고 세계 자동차업계의 합종연횡 구도에서 어떤 길을 갈 것인지 현대-기아로서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기도 하지요. 산적한 문제가 많아보이지만, 현대의 기아 띄우기가 현대-기아 그룹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