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桐溪) 정온(鄭蘊)
樂民 장달수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신하 500여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로 향하고 있다. 그때 삼전도에는 청태종이 높은 단 위에서 조선 국왕 인조를 기다리고 있다. 단아래 도착한 인조는 얼어붙은 맨 땅에 눈을 밟고 엎드려 네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사배구고두(四拜九叩頭)의 항복 예를 올렸다. 이때 조선의 충신들은 피눈물을 삼키며 치욕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보다 앞서 남한산성에선 인조의 항복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끝까지 싸우자는 쪽과 화친을 하자는 쪽이 서로 주장을 앞세우다,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여 결국 항복하기로 정했다. 이때 이조참판 동계 정온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라 하고 곧이어 의대(衣帶)에 맹서하는 글을 지었다. 얼굴엔 비장함이 서려 있다.
군주의 치욕 극에 달했는데(主辱已極)
신하의 죽음 어찌 더디나(臣死何遲)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려면(舍魚取熊)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此正其時)
임금 행렬 따라가 항복하는 것(陪輦投降)
나는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余實恥之)
한 자루의 칼이 인을 이루나니(一劍得仁)
죽음 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視之如歸)
시 짓기를 마치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찔렀다. 선혈이 낭자하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재빨리 동계를 발견하고 치료하여 다행히 중상만 입고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틀 후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성을 나서자 동계는“신이 자결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전하의 오늘날의 일을 차마 볼 수 없어서인데, 실오라기 같은 목숨이 3일 동안이나 그대로 붙어 있으니, 신은 실로 괴이하게 여깁니다. 최명길이 이미 전하로 하여금 신이라 일컫게 하고 나가서 항복하게 하였으니, 군신(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신하라고 해서 임금 명령을 잘 받드는 것만으로 공손함을 삼을 것이 아니라 간쟁할 일이 있으면 간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의 목숨이 거의 다하여 이미 대가(大駕)를 호종할 수도 없고 또 길가에서 통곡하며 하직할 수도 없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을 체직하시어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주소서.”란 글을 남기고 홀연히 가마를 타고 고향 거창으로 내려갔다.
동계는 고향 땅으로 내려오며, 멀리 서울을 떠나오는 날/끝없이 고향을 바라보았네/ 충효 모두 이룬 것이 없으니/임금과 부모 섬김 이미 일그러졌네. 기나긴 길에 빙설이 가득하고/해질 녘엔 말을 달리네!…//라고 시를 읊조렸다. 조정에 나가서 임금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 오랑캐들에게 항복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오랜 벼슬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섬기려고 해도 섬길 부모가 없으니 탄식이 절로 나온 것이다.
거창군 북상면 농산마을 모리재(某里齋). 인조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자 동계가 홀연히 가마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낸 곳이다. 찾았을 때도 동계가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오는 날처럼 지나는 길에는 빙설이 가득했다. 안내하는 사람은 산길을 차가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북상면 사무소에서 월성계곡 쪽으로 1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신선이 내려왔다 전해지는 강선대 마을이 나온다. 강선대 마을에서 산길로 2킬로미터 쯤 올라가면 모리재가 나온다. 동계가 낙향한 후 죽을 때까지 은거했던 곳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이 건립한 재사(齋舍)다. 사당·모리재 등과 유허비(遺墟碑) 1기로 이루어져 있다. 1995년에 도유형문화재 제 307호로 지정된 이곳은 흡사 폐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수선했다. 찾는 이 없는 산속 건물이 관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동계가 이곳에 내려와 청나라 조정을 섬기는 나라의 백성이 무슨 이름이 필요하겠느냐 란 뜻으로 ‘모리(某里)’라고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곳이라, 초가 한 칸 정도 있을 것으로 짐작을 하고 찾았는데, 의외로 사당이 있는 등 서원 형태를 갖추고 있다. 모리재에 올라서니 동계의 서릿발 같은 기상이 몸속에 배여 오는 것 같다. 이곳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소리는 선생의 충절을 제대로 기리지 못한 후손들을 나무란 소리로 귓가를 세차게 때리는 듯 했다. 거창 수승대 조금 못 미쳐 위천면 강천리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엔 국가중요민속자료 제205호 동계 종택이 있다. 동계의 사당을 모시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종택으로 대문채, 큰 사랑채, 중문간과 중사랑채, 곳간채, 안채, 안사랑채, 사당, 토석 담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 대문에 ‘文簡公桐溪鄭蘊之門(문간공 동계 정온지문)’이란 정려(旌閭) 현판이 걸려 있다. 문간은 효종 8년(1657년)에 나라에서 내린 시호다. 붉은 바탕의 현판은 대문을 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절로 여미게 한다.
동계는 어려서 아버지 정유명(鄭惟明)으로부터 공부를 배웠다. 정유명은 일찍이 학문이 뛰어났는데 벼슬길에 나가기보다 고향에 있으며 지금의 강천리 일대에 역천서당을 열어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아깝게 전사하고 말았다. 동계는 어릴 때부터 남명 제자들이 주도하던 지역의 학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남명의 학문 요체인 ‘경의(敬義)’를 숭상함은 물론 실천 위주의 학문을 연마하게 된다. 이는 그 자신이 ‘남명조선생학기유편후발(南冥曺先生學記類編後跋)’에서 “남명은 이미 성현의 경지에 이르렀다”라 한데서도 동계가 남명의 학문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는가를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퇴계와 남명의 제자인 한강 정구를 스승으로 섬겼으니 퇴계의 학문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계는 퇴계보다 남명의 학문을 더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남명의 실천 위주의 학문을 익힌 동계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42세 때 벼슬길에 나간 이후로 광해군 때 대북파(大北派)의 전횡을 막으려다 유배 등 고난의 세월을 보냈고, 인조반정 후에는 집권 세력인 서인과 의견이 대립하였고, 호란 때는 임금께 청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강력히 말하다가 자결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삶은 이처럼 파란만장 했다. 1613년(45세) 영창대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동계는 당시 실권자 이이첨을 찾았다. “여덟 살 먹은 아이가 어찌 역모를 알겠소. 또 대비께서도 아예 수라를 들지 않으시고 함께 죽으려고 하신다 들었소.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그대들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소”라 하며 영창대군을 죽여서는 안 된다 강력히 주장했다. 영창대군을 살리기 위한 동계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폐돼 그 이듬해 2월 강화부사 정항에게 무참히 피살되었다.
이 사실을 안 동계는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려 영창대군을 대군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강화부사 정항의 목을 벨 것을 요청했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이이첨이 주도하는 대북파의 위세에 눌려 감히 바른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계는 광해군을 비롯한 당시 집권자들의 비리를 과감히 밝히고 시정을 요구한 것이다. 이로 인해 광해군이 진노하고 동계는 삭탈관직을 당하고 1,000리 밖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게 되었다. 이때 사형을 면한 것은 이덕형 등 원로대신들이 동계의 충절을 아껴 그를 위해 변호했기 때문이다. 대정현 동문 쪽에 위리안치된 동계는 자신이 어리석고 혼미하므로 항상 깨우쳐야 한다는 뜻에서 고고자(鼓鼓子)라고 이름을 짓고 살았다. 고을의 수령이 동계를 위해 공부방 두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 그곳에 서책 수백 권을 다락 위에 올려놓고 10년의 유배 기간 동안 날마다 가서 밤늦도록 글을 읽었다. 자신의 공부 뿐 아니라 제주 사람들에게 글을 깨우치기도 했는데, 제주 사람들은 지금껏 동계를 ‘제주오현(濟州五賢)’의 한분으로 받들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중종 29년(1534)에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과 함께 동계를 ‘제주오현’이라 부르고 오현단을 만들어 이들의 공을 기렸다. 지금 제주도 기념물 1호인 제주시 이도 1동 오현단이 바로 그곳이다.
대정읍 추사 기념관 근처 초등학교 앞에 한주 이진상이 지은 동계 유허비가 서 있다. 오래 전 찾아가 이 마을 노인들에게 동계가 살았던 고장 근처인 진주에서 왔다는 말을 하니까, 노인들이 반가운 기색으로 맞이하며 동계가 옛날 이 마을에 유배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던 기억이 난다. 동계는 귀양지 제주도에서 고향과 어머니를 보고 싶어 했다.
나이 많으신 우리 어머니(有母年期모)
문에 기대어 얼마나 기다릴까(門閭幾何望)
아이를 낳고도 힘을 얻지 못하고(生兒不得力)
자식과 이별한 뒤 가슴만 태우시리(別子但煎腸)
태수 되어 봉양도 하지 못하고(未遂專城養)
고향 가서 효성 다할 기약도 없네(還迷負米鄕)
언제쯤 성대한 은덕 입어 풀려나서(何時蒙패宥)
다시 색동옷 입고 재롱 피워 볼거나(重攬彩衣長)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하는 시다. 동계 부친 역양이 효성으로 이름이 드러나 마을에 정려까지 있으니, 동계 역시 가풍을 그대로 이은 것이리라. 유배 10년만인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풀려나 사간원 원납의 벼슬로 있다가 남원부사, 이조참의를 거쳐 1624년 10월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후 동계는 조정에서 남인의 영수로 활약하며 남명의 실천 중심의 학문을 충실히 따랐다. 즉 동계의 삶은 명분과 절의 그 자체였다. 우리는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김상헌, 삼학사 등만을 국사 시간에 배워 왔다. 동계는 잊힌 인물이었다. 제주도에서 오현 중 한분으로 받들고 있는데, 동계의 고장에 사는 사람들 조차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우유맥의 한 ‘봉우리’라고 할 수 있는 동계 정온은 우리가 기억해야 될 인물 중 한 분이다.
정온의 금관 조복, 조선조 最古자랑
거창 박물관에 동계 정온이 입었던 금관 조복이 전시돼 있다. 이 금관조복은 1630년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조 조복이다. 조복은 경축일 임금을 뵐 때 입는 관복이다. 빨간색 조복인 적초의, 청색 제복인 청초의, 제복 안에 받쳐 입는 옥색의 중단, 그리고 신하가 쓰는 금관인 오량 금관이 있다. 금관은 양관이라고도 하며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서 마치 갓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모자를 짜서 일부분은 종위로 바르고 그 위에 금물칠을 했다. 뒷부분에는 당초문에다 봉황을 새겼고 앞에는 세로로 몇 가닥의 줄을 넣었다. 이 줄은 양이라고 하는데 양의 숫자에 따라 벼슬 품위가 달랐으며 이 금관은 5줄이 있는 5양관에 해당한다. 중요 민속자료 제218호로 지정돼 있으며, 소매통의 넓이 장식 형태 등에서 조선 후기의 것들과 차이를 보이며 복식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약력
1569년(선조 2년) 안음현 역동리(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서
초계(草溪) 정씨(鄭氏) 역양 정유명의 아들로 태어남.
1583년(15세) 아버지의 스승 갈천 임훈을 찾아뵈었다.
1610년(42세) 별시 문과에 급제함.
1612년(44세) 영창대군을 옹호하다 제주도에 유배감
1627년(59세)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함.
병조참판, 대사간, 도승지, 이조참판 대사헌 역임
1636년(68세)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에 항복 결정하자 자결시도
청에 항복하자 벼슬 사직하고 낙향.
1638년(70세) 덕유산 골짜기 모리(某里)에 은거.
1641년(73세) 별세. 인조가 예관 보내 애도. 용문서원 남계서원 배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