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레위인들은 율법서를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느헤미야기의 말씀 8,2-4ㄱ.5-6.8-10>
그 무렵
2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3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4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5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6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레위인들은
8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9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제2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2,12-30>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습니다.
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복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 1,1-4; 4,14-21>
1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2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3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나의 행복이다>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파견된 사절단 가운데
박지원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비록 벼슬은 없었어도 성리학에 빠져 있던 다른 사절단들과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성리학을 숭상하던 양반들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만주족 사람들을 오랑캐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절단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사람들은 물론 자신들을 맞아들이는 만주족 한인들에게까지도 무시하는 행동을 자주 하여 미움을 샀습니다.
공부에 대한 맛을 잃고 과거시험을 포기한 박지원은 오히려 청나라를 여행하며 놀라움과 기쁨에 ‘열하일기’라는 책을 씁니다.
당시 건륭황제가 열하라고 하는 곳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하까지 가기 위해 청나라를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쓴 기행문입니다.
우선 청나라에 들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집을 짓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크기의 벽돌과 기왓장을 구워 빈틈없이 집을 지었습니다.
튼튼한 것은 당연하고 조선의 가옥처럼 뱀과 쥐가 드나드는 구멍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선 짚과 섞은 진흙으로 벽과 지붕을 만들어 비가 오면 무너지기 쉬웠고 갈라짐이 심해 쥐와 뱀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청나라식의 집짓기를 조선에도 들여야 한다고 열하일기에 썼지만,
조선 양반들은 무식한 되놈들의 집짓기를 양반의 나라가 왜 따라야 하느냐고 다들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가 또 놀랐던 것은 ‘길’이었습니다.
청나라는 길이 매우 잘 닦여 있었고 마차의 사용이 매우 편하게 되어 있어서 문물의 이동이 원활하였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어느 지역에서나 어렵지 않게 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길이 거의 닦이지 않아 각 지역의 특산품은 거의 그 지역에서 소비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것들을 다른 지역에서 사려면 엄청난 가격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국경지대에 사는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의 안 좋은 도로 사정을 이용해
자신들 나라의 물건들을 싼 값에 사서 조선에서 비싸게 팔며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박지원은 빨리 조선도 길을 닦아 문물교환이 쉬워져야 돈이 청나라로 빠져나가지 않고 국고도 튼튼해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길을 내면 외적의 침입만 용이하게 만들뿐 다 소용없다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문체가 너무 천박하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하여 사람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참조: ‘금서가 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써에이스쇼, 유튜브]
청나라에서 함께 다닐 때 박지원과 그가 동행한 양반이나 학자들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명에 놀랐고 더 많은 것들을 보기 원했습니다.
사절단이 청나라를 깔보는 행위에 건륭황제가 화가 나서 이들을 귀향 보내려 했을 때
박지원은 오히려 더 많은 청나라 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내심 기뻐했다고 합니다.
더 머물고 싶었다면 행복했다는 말입니다.
반면 양반들은 아예 청나라를 깔보면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거만한 자세로 당시 조선에 비할 바가 안 되는 엄청난 부와 문물을 소유했던 청나라 사람들을 깔보며 자신들을 들여 높이려 하였습니다.
기분이 나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야만적인 만주족들이 세운 청나라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누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일까요?
바로 기쁜 소식을 접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뻐야 전하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전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기쁘면 기쁜 소식을 전하게 돼 있고,
내가 우울하면 우울한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그 복음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짜증난 표정으로 복음을 전해봐야 짜증을 전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이는 반드시 기뻐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기뻐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기뻐야 그 안에 기쁜 소식을 품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아픈 사람입니다.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면서도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픈데 더 아플까봐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기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행복하면 “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이 함께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저는 여기 누군가 때문에 행복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아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괜히 불안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하고 어떤 사람은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바로 나의 행복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의 행복이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주위 사람들이 나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이란
바로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기술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기도할 줄 알면 성령으로 행복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가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기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마치 빵장사를 하는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하여 허기진 것과 같습니다.
누가 그 빵을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 마음 안에 기쁨이 솟구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나의 행복입니다.
이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교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치르는 다양한 행사들, 오십 주년, 백 주년 기념식, 금경축, 은경축 행사, 결혼식, 장례식 등등
실속도 없으면서 외양만 거창하고 화려하길 꿈꾸는 우리에게,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행보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결말은 너무나 초라하고 졸속적인 우리들,
언제나 용두사미격인 우리들에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거창한 우리들의 시작과는 달리 예수님의 출발은 너무나 소박하고 단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제일 잘 나가던 도시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장 변방이요 초라했던 지역,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나자렛은 전체 인구 400여명밖에 안되던 작은 촌락이었습니다.
기본 인구만 해도 4만 5천여명에 축제 기간에는 수십 만명의 순례객들이 왕래하던 수도 이스라엘과는 게임이 전혀 안되는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변방에서 시작해서 중심으로!
‘변두리 중심주의’ ‘외곽 중심중의’가 예수님의 기본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눈여겨봐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가장 변방에서 더없이 소박하게 시작하셨지만,
가장 실속있고 충실하게 시작하셨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가 적힌 두루마리를 장엄하게 낭독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께서 함께 동반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복음 1장 18~19절)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성공리에 마칠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성령의 충만한 현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성령은 마치 신선한 한줄기 바람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미성숙과 어줍잖은 권위주의로 혼탁해진 교회 공기를 말끔히 환기시켜줍니다.
성령의 신선한 바람 없이 우리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기 참으로 힘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도록 안내하십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당신 입김을 불어 넣어주지 않으시면,
우리 교회는 자신의 좁은 울타리 안에 갇힌 폐쇄된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교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등을 떠밀어 변방을 향해, 세상 끝으로 파견되도록 등을 떠미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전달하라고 외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주시도록 우리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좀 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이끌어가시도록 성령의 바람에 우리를 온전히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현존하실 때,
그분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역사하실 때,
마치도 순풍에 돛단듯이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백년 전경에 이스라엘은 암흑기였습니다.
네브가드네사르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유배는 단지 나라를 잃은 것만이 아니라
그들 삶의 지주가 되었던 율법과 성전과 사제를 모두 잃어버린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에 의해 유다인들은 이스라엘로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율법에 충실했던 사제 에즈라와 왕의 술 시종관이었던 느헤미아에 의해 성전재건과 종교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성전이 재건되고, 사제 에즈라에 의해 모세의 율법서가 읽혀지고, 그들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감격스런 장면입니다.
이처럼, 모세의 율법이 구약시대의 민족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면,
신약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백성의 구심점이 됩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1코린 12,12)
우리가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 어떤 차별이 없는 한 형제임을 말합니다.
곧 성령께서는 각자가 고유한 가치를 가지면서도 하나를 이루어 일치를 이루는 풍요로움을 주셨습니다.
곧 서로의 다름은 잘못되었거나 틀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를 드러낼 뿐이며, 오히려 상호보완과 풍요로움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마치 눈과 손이 서로 필요 없다고 할 수 없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의 지체들을 각각의 용도에 맞게 한 몸 안에 만들어 놓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걸맞은 품성을 유지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데는 중요한 두 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성제의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성체), 곧 교회입니다.
“백성은 모두 울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느헤 8,3)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1코린 12,27)
이처럼,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루카 4,21)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포하신 “이 성경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렸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이는 오실 메시아, 곧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될 메시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루카 4,21)고 하자,
달리 말해 당신이 바로 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그분이라고 하자,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하고 맞서 돌아섰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수님께서 배척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다음 주일에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시는 이 “은혜로운 해”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는지요?
이 “오늘”은 <루카복음> 전체를 통해 일관된 구원의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자렛 성전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루카 4, 20)고 선언하시지만,
사실, 그보다 앞서 주님의 천사는 목동들에게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루카 2,11)“고 선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 (루카 19,9) 하시고,
십자가에서 도둑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라고 선언하십니다.
곧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이 시간을 하느님 면전에서 대면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의 때로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은 하느님의 전령입니다.” (171항)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시편 95,7-8)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능력의 말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의 은혜로움 속에 살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은혜로움’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옛말에 “영지와 난이 자라는 곳에 절로 길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참된 권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누가 모여 들고 있나요?
오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 가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읽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고 선포했던 해방과 구원을 약속한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읽으신 후 한마디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4,21)
결국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영육으로 가난하고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은총이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억압 받는 이들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를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성경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히브4,12)으로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성경말씀을 통하여 물리치셨고,
말씀 한마디로 악령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라 해서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지혜서에는
“그들을 고쳐준 것은 어떤 약초나 진통제가 아니었고,
만물을 고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며
사람을 지옥문까지 데려 가실 수도 있고 데려 내오실 수도 있다.” (지혜 16,12)
며 능력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맛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귀들이 인간을 유혹해서 파멸시키려고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을 접수하였는데
1) ’하느님이 없다고 소문을 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기에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2) ‘지옥이 없다고 선전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갈 줄 알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3) 그렇다면 차라리 ‘그리스도인을 적극적으로 죽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오히려 더 큰 신앙의 씨앗이 된다’ 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4) 지혜를 짜내 ‘예수를 믿게 하자. 열심히 기도도 하게 하자. 전교도 적극적으로 하고 사랑도 많이 하게 하자. 그러나 무슨 일이든 내일 하도록 만들자.’
하고 결론을 내렸답니다.
하느님의 달력은 오늘이요, 마귀의 달력은 내일입니다(스펄전).
그러므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언제 어떻게 변할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코린 6,2)
그러므로 한 순간도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느 날 강론을 통해 성경 읽기를 권고하면서
‘눈이 안 좋아 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눈이 더 나빠져서 못 보게 되기 전에 한자라도 더 읽겠다고 마음을 먹고 읽으라’
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께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안보이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는 말씀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육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이 뜨여 그 기쁨은 날로 더 커갔습니다.
만약 할머니께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성경 읽기를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육적인 눈도 영적인 눈도 뜨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 행하는 데서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이 구원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은혜로운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50년마다 경축한 희년을 말합니다.
기쁨의 해입니다.
그 희년의 목적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게 되어 가족의 소유와 자유까지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풀어주고 잃어버린 권리를 무상으로 되찾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억눌린 어둠의 상태를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밝혀 주시고,
죄의 용서와 한없는 사랑을 통해서 자유를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새 삶과 해방의 기쁨을 어떻게 누릴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귀한 능력의 말씀으로 다가오셔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권고를 듣지 않아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세가 세워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
그러나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결국 향기가 있고 꿀이 있어도 내가 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주님의 은혜로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십시오.
능력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빛이 생겨라 하면 빛이 생기고’,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 사탄이 물러가는 힘을 지녔습니다.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야고 1,21)
그리고 성체를 자주 모시기 바랍니다.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요한복음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1,14)
고 적고 있습니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말씀과 하나가 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2코린 9,8)
주님과 늘 함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슬플 때면 성경을 펴십시오.
그대를 위로할 구절이 나와 있을 것입니다.
의혹과 두려움이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성인들은 불확실하거나 걱정이 있을 때마다 이 은총의 샘을 찾았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말씀을 통해 매일을 은총의 순간으로 엮어 가시고 그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