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백편의자현
학문에 왕도(王道)나 첩경(捷徑)이 있을까. 우매한 속단일지 모르지만 ‘없다’가 정답이지 싶다. 그럼에도 입신양명의 방법으로서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던 때문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한 부질없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여태까지 되풀이 되고 있다. 오늘날은 말할 것 없거니와 까마득한 그 옛날에도 샛별처럼 우뚝한 학자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학문 즉 공부를 잘 하는 비법을 전수해 달라고 집요하게 매달렸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발군의 학자였던 동우(董遇)가 아니었을까.
동우는 후한의 효헌황제(孝獻皇帝) 시절 학자로서 황제에게 발탁되어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임명되어 왕에게 경서(經書)를 강론했으며 훗날 대사농(大司農 : 호조판서에 해당)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의 뛰어난 학덕과 인품을 흠모했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제자 되기를 자청하거나 학문을 잘하는 비법을 알려달라고 목을 매는 경우가 숱하게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가 답하는 말은 나에게 배우려고 하거나 비법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이르면서 항상 판박이 같은 이런 대답을 되풀이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완곡하게 거절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이런 동우의 사연에서 ‘백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義自見)’이라는 성어가 탄생한 유래이다.
/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讀書百篇義自見 : 독서백편의자현) /고 하는 말에 대하여 묻던 이가 / 사는데 급급해 책을 읽을 겨를이 없다(苦渴無日 : 고갈무일) /며 토를 달면서 항변하자 동우는 다시 / 세 가지 여가만 있으면 됩니다(當以三餘 : 당이삼여) /라고 답해줬다.
‘독서백편의자현’이라는 성어에 대해 전하고 있는 책 즉 출전(出典)은 사마천의 삼국지(三國志)(卷十三) 위지(魏志) 왕랑전(王郎傳)에 부기되어 있는 왕숙전(王肅傳)을 비롯해서 주자(朱子)의 훈학재규(訓學齋規)이다. 실제로 이 성어가 생겨난 배경에 대한 줄거리를 왕숙전에 따라 정리한 대강이다.
마음 속 깊이 동우를 따르고 싶었던 이들이 그를 찾아가 학문을 배우기를 청하거나 학문의 비법을 알고 싶어 간곡하게 청할 때 한결같은 태도와 대답이었다. 내게 배우려 하지 말고 편안하게 자기 집에서 이렇게 하라고 말했다. “반드시 우선적으로 (책을) 백 번씩 읽어라”라고 말하면서 “백 번 읽으면 뜻이 자연적으로 드러난다(讀書百篇自義見 : 독서백편의자현)”고 강조했다.
동우의 말을 듣고 있던 이가 “먹고 사는데 급급해서 책을 읽을 겨를이 없는데요(苦渴無日 : 고갈무일)”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말에 동우가 “세 가지 여가만 있으면 충분하답니다(當以三餘 : 당이삼여)”라고 말하자 곧바로 그게 무엇입니까 라고 되물었다. 그에 동우가 친절하게 답했다.
‘삼여(三餘)’란 첫째로 ‘겨울(冬)’, 둘째로 ‘밤(夜)’, 셋째로 비 내릴 때(陰雨)를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겨울’은 한 해의 나머지(餘)(冬者歲之餘 : 동자세지여)이고, ‘밤(夜)’은 하루의 나머지(夜者日之餘 : 야자일지여)이며, 비 올 때는 한(旱)할 때(맑을 때)의 나머지(陰雨者時之餘 : 음우자시지여)라고 설명했다. 대충 이런 내용을 왕숙전에서 전하고 있다.
대학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일까. 이따금 공부를 잘하는 방법을 물어 와서 난감했던 경우가 수월찮다. 보통을 벗어나지 못했던 때문에 기껏해야 친구들을 따라가는 처지였는데 말이다. 학문 혹은 공부를 하는데 왕도나 첩경인 지름길이 있을까. 미욱해서 단언키 어렵지만 ‘없다’가 정답이라고 믿고 있다. 만약 솔로몬의 지혜 같은 특별한 비법이 존재할 경우 특허를 낸다면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거부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겠다는 뚱딴지같은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그럴지라도 꼭 말부조를 할 자리에센 “꿰뚫을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하라”는 게 고작으로 따지고 보면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는 내가 어이없어 실소를 머금을 때가 더러 있다.
최근 글을 쓰겠다고 다부진 결기를 다지고 덤비는 이들 중에서 글을 잘 쓰는 비법을 조언해 달라며 벼랑 끝에 몰렸던 경우를 심심치 않게 겪었었다. 열심히 피할 궁리에 골몰하다가 막다른 궁지로 몰리면 마지못해 입을 열고 ‘삼다(三多)’를 추천한다. 그 첫째가 ‘남의 글을 많이 읽어라’ 즉 ‘다독(多讀)’이고, 둘째가 ‘많이 생각해라’ 즉 ‘다고(多考)’이며, 셋째로 ‘글을 많이 써봐라’ 즉 ‘다작(多作)’ 등을 주문한다.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얘기지만 그 옛날 동우가 이른 ‘독서백편자의현’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한맥문학동인사화집, 제24집, 2024년 5월 20일
(2024년 3월 7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