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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우리시 여름학교 진행 메모 민구식
일시:2013. 8. 24~25
장소 구룡포 청소년 수련원
인원: 81명, 협조10명 합 91명
(본 내용은 진행 중 받아 적거나 스스로 한 메모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사용하시고 근거로 사용하실 수 없음을 밝힙니다)
1. 국민의뢰
2. 학교장 인사 - 이재부 시인 (우리시 청주 지부.)
부탁- 시혼이 우리 구룡포에 인도하기 위해 아홉의 용이 승천을 못 했었는데 오늘 개교 선언을 하면 용들이 승천할 수 있도록 박수를 우뢰처럼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시 여름 자연학교 개교를 선언 합니다. 와아
환영사 - 학교를 찾아 주신 우리시 가족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기 구룡포 청소년 수련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명지인 이곳에 오신 여러분들은 충천하고 역동하는 정기를 발아 하실 것입니다
모두 우리시 한 가족입니다 우리시의 시정을 나누고 공유하는 분들이십니다.
시인님들을 중심으로 후원회와 독자, 행사 때마다 흥을 돋아 주시는 음악, 낭송 모든 예술인들도 가족입니다. 이렇게 대 가족으로 형성된 것은 86년부터 지금까지 단절 없이 가꾸어 오신 원로 시인님들의 열정과 시 정신에 호응하신 여러분의 시상 정신에 기인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정상 참가 하지 못한 분들도 오늘만은 자연학교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9번째로 펼치는 이번 학교는 더욱 의미가 깊은 소통의 광장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더욱 특별함이 잇는 이곳이라고 생각한다, 감성이 고루 갖춘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산과 호수와 바다가 어우러진 3해 양후의 지정학 좋은 곳입니다. 환경은 창조의 힘을 준다. 대망하고 소통하는 장소라고 여겨집니다.
밤새워 나누고 넓히면서 정이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자연의 호연지기를 마음껏 담아 가시기 바랍니다 1박2일은 시 창작은 물론 삶의 새로움을 받아 가실 것을 믿습니다.
섹스피어는 마음이 유쾌하면 종일 걸을 수 잇고 마음이 불편하면 십 리 길도 못 걷는다고 했습니다
생명과 자연과 시가 소통하고 순화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시상이 모두 우리들 것입니다 들뜬 마음으로 여기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15:15
3. 내빈 소개 순서
외부에서 오신 분부터 소개
13 우리시 후원 포항 문협 회장님 김일광 회장님 소개합니다
이사장 홍해리 시인님
우리시 명예 회장 임보 시인님
부산 원로 시인 이상재, 김석규 시인님. 박근 전 유엔대사, 김대구 시인님
포항 가족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포항 가족 기립 인사
나머지 우리 가족들입니다. 서로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4. 백일장 시제 발표 - 임보 시인님
13년도 우리시 진흥회 여름 자연학교를 구룡포에서 개최되게 된 것을 반갑게 ...
전국 각지에서 이 먼 곳까지 찾아 와 주심에 감사
특히 포항 문인회 회원들과 포항 시인들의 협조에 감사합니다
문학 강좌를 비롯한 여러 행사가 있습니다만 가장 하이라이트는 백일장 행사가 아닌가 합니다. 글을 쓰는 문인들이 모인 행사에서 시제를 가지고 모인다는 것은 뜻있는 것이다. 거기에 입석을 한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고 뜻있는 일이다
좋은 기량으로 성과를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욕심 같아서는 더 많은 기회를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상금이 적어 그렇지만 명예를 위해 노력 바랍니다
입선하신 작품은 10월 호쯤에 게재 될 것입니다. 회원이든 아니든 등단 했던 아니든 참여를 바랍니다
시제 발표 - 파도, 손. 입니다
이 고장이 바다와 관련이 있고, 호미곶에 상생의 손이 있다
오늘 밤 12시까지 제출 해주시기 바랍니다 준비된 함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4. 휴식 1625~ 1645 까지
5. 포항 문협회장 김일광 회장 인사말씀
외진 곳까지 오셔서 감사 다산 선생이 유배 왔던 곳, 김옥균의 왼팔을 호미곶 끝에 묻었다
시인은 고래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누가 적어 두었습니다만 동해바다를 경유한다는 고래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다물포, 이곳의 이름이었다,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는 이름이다
낮에 놀던 고래들이 들어와서 잠을 자고 갔다는 곳, 고래 생태 축제를 열기도 했던 곳
이 수련관의 뒷 길로 올라가면 해봉사라는 절이 있디, 보통 절 같으면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지만 신라 때부터 말의 안녕을 기원하는 절이었다 신라 때부터 말 중에서도 군마를 먹이던 목장이 뒤에 있다 1906년에 일본군 말을 징벌 해 가기 전까지 말들이 있었던 곳이다
시적 상상력이 우리 지역의 자연을 만나 더 많은 작품으로 우리 고장이 소개 되었으면 좋겠다.
6, 강의 전 국악 창 공연 : 백솔이 국악가, + 장미화 낭송가 1550~1600
김영랑 시 '내 마음을 아심이'
7. 이하석 시인 특강 1600
71년 등단 여러 상 수상, 영남 건설 퇴직 대구 문화재단 이사장
주제 - 시인은 제 삶을 어떻게 들어내나
(참조 유인물 책에 특강에 대한 글이 있슴)
결국 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최근 참 더웠다, 대구, 재가 사는 곳이 덥기로 유명한 곳인데 올해는 포항이 많이 더웠다. 가의 38도를 넘는 더위였다 더운데 고생 많이 했다,
제가 드린 paper는 참고로만 하시고 제가 산 시의 곡절을 밝힌 것일 뿐이다 짜집기도 하고 약간 현학적인 옹호한 면도 있는 읽어만 보시고 오늘은 그동안 제가 시를 써왔던 이야기를 약 한 시간 동안 말씀 드리겠다
우선 시를 읽겠다 유인물 책자 참고 '뒤쪽 풍경 1', 전문 참조
80년 첫 시집 문학과 지성에서 나온 첫 시집에 실린 시이다.
지방에 있는 나의 시를 책으로 내어 준다고 해서 기뻣다. 서울 갈 일이 있어 문학과 지성사에 들렀더니 시집을 내 준다고 하시던 000 선생님(?) 을 만나 시집을 못 내겠다고 다시 가지고 내려왔다 일년 뒤에 내겠다고 했는데 그 시들은 묻어 놓고 새로운 시를 쓰기 시작했다. 비슷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고 ... 다시 모아 첫 번째 시집을 내기 위한 것 [투명한 속] 시집이 나왓다
전 시를 쓴다고 안 하고 만든다고 한다 시를 쓰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하고 환경을 정리 한 다음 시를 섰다 젊기도 하고 개인적인 모습이었다 내 시는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잘 만들어야 한다고 지금 생각하면 건방진 태도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시에는 관념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뭐라고 말 할 수 없다 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답이 없다, 말 하는 순간 죽어 버린다, 문학은 영원히 현재 진행형이고 동시에 질문이다 라고 생각 한다
70년 대학 3년 때 등단했다 시집은 80년에 나왔다 10년 뒤에 그 시집을 통해서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던 것으로 생각을 했다,
묻는다는 것은 젊은 세대의 특권이다 지역에 가면 가장 큰 문제가 젊은 문학인이 없다, 대구만 해도 40대 문학인이 없는 편, 그것은 질문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문학에 대한 질문이 없으면, 젊음이 없으면, 과거의 문학을 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질문이며 현실 인식에 대해 새롭게 질문되고 해석되어지고 동시에 과거 문학에 대해 반성케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한다 그래서 젊은 문학인을 만나면 겁도 나고 설레임도 생긴다. 그래서 젊은 시인의 시를 많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첨단이고 과거 문학에 대한 강력한 질문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궁금한 것,
한때 젊은 문학인에 대해 장악된 적이 있었다, 자체 내에서 미래시 라고 이름 붙여서 2000년대에 활동하는데 문지, 창비 세계문학사, ,,, 우리 문학의 거점들을 장악 점령해서, 지금은 달라 졌지만 기세가 등등 했던 때, 윗 세대들은 저게 무슨 문학이냐 라고 말을 할 뿐 도전하지 못하는 기세였다
근래에 일본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야기 중에 미래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본에도 70년대 무렵에 젊은 세대들에게서 강력한 질문이 나왔는데 그 질문이 언어의 본질적이 소통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그게 일본 문학이 그것을 거치면서 난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통이 안되니까. 그 친구들이 일본 문학을 장악하면서 독자를 잃어 버린다 소통이 끊어지는 상황이 된 것이다 소설은 소통이 되지만 시는 독자가 없어지는 현상이 된 것이었다 우리 시도 90년 대부터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고 그렇다면 우리도 곧 독자와의 소통 부재가 생기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본다, 시인들끼리 만나고 소통할 뿐이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끌어와서 '하이꾸; 라는 장르가 생겨 2700 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작업하는 인구인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늘어 낫다고 한다.
내가 만났던 시인들도 하이꾸를 쓰고 있었다,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 해석 좀 해 댈라 하니까 나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 이야기는 너무 소통에 대해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새로운 세대들이 쓰는 언어의 시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들끼리도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알겠다고 하면 실망하는 느낌을 준다. 차라리 모르는 것을 위해 쓰는 시, 과거의 통념이 많이 흔들리는 시의 흔들림이 보인다
80년대에 시집을 낼 때 질문이 '과거의 시에 대한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 졌었기 때문에 소통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좀 전에 읽은 시는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한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이 시를 쓰면서 한 생각은 어릴 때부터 시를 써 왔던 모습들 떠 오르고 자꾸 되돌아 보는 느낌을 받았다 고향이 고령이다. 합천하고 고령이 닿아 있는 군 단위로는 가장 적은 군이다, 가야산 북쪽 편에 위치한 골짜기, 거기서 태어나서 6.25를 거기서 치르고 54년에 6살 적에 대구로 이사, 학교 다니면서 성장 이 시를 쓰면서 느낀 것은 유년 시절의 정서는 지금 애들과 달라 전쟁 직후의 전쟁 잔해더미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기억, 당시의 인형이나 완구는 전쟁의 유산들 포탄 껍질이나 고철 들이었다. 그런 것이 기억에 있고, 또 하나는 폐허 위에 있었던 유년의 기억이다 이런 기억들이 70년대를 살면서 생긴 감정의 원형이었다. 박정희 새마을 운동을 일으킨 60년대와 산업화의 조국 근대화의 바람이 불던 20여 년 간의 도시화 와 농이 피폐해 지는 시기와 관계가 된다. 공터나 풀숲에 가면 과거에 보이지 않던 물건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리조각 빈 병 못, 산업의 쓰레기 들이 보였다. 70년대에 다른 환경이고 변화였다. 폐허의 풍경이 보이던 것, 우리 삶에 굉장한 변화를 줄 것이다. 비닐 타이어 우리조각 치약 껍질 통조림 깡통 등 그런 것들을 사진을 찍었다, 흑백 사진을 찍어 그 사진들을 제 방에 붙이기 시작했다 첫 시집이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거기에 관련되는 말을 모으고 다시 구성을 하고 억지스럽게 만든 시들이 첫 시집에 실렸다. 그 때의 느낌은 폐허의 풍경을 그려 내는 것이고 동시에 어릴 때 놀았던 폐허의 풍경과 흡사한 풍경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이고 변화를 나타낼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공포를 느끼며 시를 만들어 냇던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였고 다른 사람이 머라고 하면 이런 것도 시가 된다고 우기곤 했었다.
주변에 건설을 하던 친구들 하고 토의를 많이 했었는데 가령, 친구가 정호승씨인데 그 친구가 사람이 여리고 우리 문학의 핵심인 연민의 풍성함이 있는 친구인데 그 친구가 와서 눈물 겨운 말한 적이 있었다 육교를 오는데 눈먼 거지가 깡통을 두드리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돈을 깡통에 넣어 주고 왔다고 했다. 물었다 돈을 정말 넣었냐고? 그래서 넣었다고, 그걸 어떻게 믿느냐, 사진을 찍어 와라, 그렇게 토론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의 사회는 말이 많았던 시대 자기가 옳다고 이야기 하며 떠들던 시대 말이 꼭 진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던 느낌을 가지던 시대.
누군가가 이렇게 하자라고 한다면 그것을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말의 과장, 정직하지 못한 요소가 팽배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가 말하려면 어떻게 말하면 믿어주고 알다 주겠는가 그래서 사진을 찍기 시작 내가 보여 줄 수만 있는 것을 보여 주며 진실을 전하고 내 시는 보여 주는 것이다 라고 하여 만들어 진 시였다. 감정이라는 것, 틈만 있으면 흘러 내리는 것이니까 내가 사물을 접근 할 때도 자칫 가정이 드러날 수 잇기 때문에 그 중간에 매카니즘 적인 사물을 설치 했는데 그것이 사진기 이다 기계적 장치로서 사물과 직접적인 만남을 피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술을 먹고 하면 안 된다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좀 웃기죠? 그 때는 그런 고집을 밀고 나갔다
그리고 묘사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묘사의 방법적인 문제, 그 담에 시가 가지고 있는 관념적인 것에서 거추장스러운 것을 어떻게 거두어 내는가를 생각했다 대구의 이성보 시인과 80년대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시라는 것은 헬리콥터와 같은 것이라서 지상에 내려오기 위해서 최대한 지상에 가까이 내려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다. 지상으로 내려와 앉으면 폭발하니까 추락하니까 내려 오지는 않고 최대한 지상에 접근 하려는 것 이상보 황지우 등 시인들이 그리고 장정희 시인이 시의 그러한 이상을 생각하였다, 그전에는 이상보다 더 높은 고매한 것의 추구였지만 80년대엔 그런 것이 없어지고 사물을 나열하는 시가 맞아 떨어지게 되엇던 것
시를 쓰려고 노력을 한 것은 아닌데 초등학교 때 교생 선생이 왔는데 가을에 백일장이 열리는데 네가 대표로 나가라고 해서 5학년 때 못 쓴다고 했는데 가르쳐 준다고 해서 방과 후애 글 쓰는 방법을 배웠다 일주일 동안 직유법에 대해 배웠다. 컵은 00와 같다. 라는 것을 배우면서 비교하는 것 중에서 직유에 관한 공부를 하고 백일장에 나갔는데 덜컥 상을 받게 되었다 '국화'라는 제목에 국화를 어린애 손가락에 비유해서 시를 만들었는데 덜컥 뽑혀 나도 시를 쓸 수 있겠구나 하여 글을 써 보고자 했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문예반에 들어가서 글을 썼고 당시 학원이라는 잡지에 기고도 해서 문학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을 안가고 고졸 후 어쩌다 해인사에 '일타' 스님을 만나게 되어 불교 공부를 하게 되어, 해인사에 출가를 하려면 행자기간을 생략하고 바로 강원에서 공부 할 수 있게 해 주겟다 한 10년만 썩어라 해서 모르겠다 하고 짐을 쌌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었다. 영장이 떨어져 쌌던 짐을 풀게 되었다 군대 가기 전에 빨리 등단부터 해야겠다 하여, 연기하려면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 뿐이 없어 부랴부랴 공부하여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교수하고 인터뷰를 면접을 하는데 자네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왜 사회학과를 왔느냐고 묻길래 글 쓰려고 사회학과 왔다고 건방 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게 군대를 연기하고 또 연기하고, 현대시학이라는 잡지가 잇었는데 거기에 시를 모아 보냈는데 한 반년이 지났는데 연락이 없다. 건방지게 내 시가 푸대접을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친구가 야 네 시가 현대시학에 실렸더라 해서 가보니 추천시로 실렸는데 그때의 느낌, 울렁 거리던 느낌 아 이제 내가 시인이 되는 구나 그리고 편지를 받았다. 바로 작품 두 편을 보내라 해서 원고를 보내 2회 추천이 되었고 대학 3학년 때 추천이 완료되었다. 당시 추천 3회로 등단이 되던 시대. 전봉근 선생님의 추천으로, 충정로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그 때 선생님 집에 가서 수제비 끓여 먹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 서울가면 만나 뵙고 했다. 전봉근 선생님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시인이 되게 되었다
도 한편이 문학의 스승은 김춘수 스승이다,
경북대 사회학과 다닐 때 국문과에 김춘수 선생이 있엇다 김 춘수 선생을 통하지 않으면 등단이 어렵다는 소문이 떠 돌고 잇었다 오기로 외면을 했다. 국문과 중심의 문학 서클이 있었는데 그 서클에 들어가지 않고 인사도 안하고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 황혼 무렵의 캠퍼스의 잔디 밭에 앉아 잇으면 인문대 앞을 지나는 김춘수 선생을 보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덜컥 등단을 하니까 물어 봤는가 보다 한번 오라고 해라. 일학년 때 문학 개론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번도 뵙지 않고 시험을 쳐서 학점을 땄으니 모르실 것, 그 때 이동성 친구가 동아일보 73년에 신춘으로 등단했고 지금 영남대 교수로 잇는대 대구 다방에서 그 친구하고 시화전을 했다, 그때 김춘수 선생이 불쑥 오셔서 인사를 드렸는데 그 다음 날부터 김춘수 선생님의 연구실에 들날 날락을 맨날 했다. 밥도 사주시기도 하고 영화 구경도 시켜 주시고, 가난한 저에게, 그 때 [처용단상] 이라는 시작 작업을 했던 때이다. 그 때 가면 읽어 보라고 해서 읽어 본 느낌을 기억하면 제가 어찌 선생님의 글에 대해 얘기 할 수 있습니까 하면서 일년 정도를 그 작품을 보았다 그때 선생님을 통해서 한 수 배웠다
그 때 문제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 등에 대해서 한 수 깊게 배운 기회였다.
그렇게 두 선생님이 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신 선생님이시다.
그 담에 군에 갔다 와서 대학 들어 갈 이유가 없어서 대학을 접고 떠돌이 생활을 10년간 거지 생활처럼 살았다. 그러면서 엘리어트의 시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김소월 선생 시를 다시 읽고 정지용 만해의 시 다시 읽으면서 70년대를 보냈다. 대구에서 활동했던 우리 또래의 시인들과 자유시 동인을 만들어 활동했다. 대구의 김연희 시인이 어제 와서 만났는데 그 때 반시인, 자유시 동인,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유시 활동 하면서 반시와의 갈등이 있었던 그 때 이동순 정호승 등이 같이 있었는데 정호승은 서울에 있었고 아동순은 대구에 있었는데 그 때 반시운동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몇시이죠? 얼마나 남았나?
천상병 시인과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분 살아 있었을 때 그때 천 시인이 남의 욕을 그렇게 하더라고 그때 시간을 묻더라. 지금 몇시고? 하면서 웃던 이야기
그리고 그 담에 내가 강연을 했는데 충격을 받았다. 자기 자신을 발가벗겨서 보여 주는 것이다. 이거 강연료 주나? 하시더니 에이 나 안 해 하면서 강단을 내려가시던 모습, 시간을 때우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그대로 보여 주고는 끝내 주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감동이었다.
저도 그렇게 따라 하려고 해도 할 수 는 없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문학 개론 같은 것은 서점에 가서 사 보면 되고,
박경일이 자기 친구인 장정일을 데려 왔엇다, 중학교 때 여호와의 증인으로 군대도 거부하고 소년원에 들어가기도 한 친구인데 한국의 마약코프스키 입니다.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 나중에 그 친구가 권총 자살을 하는데 늘 고조된 감정으로 길을 가면서 시를 읊은 사람. 장정일은 나의 스승은 박경일이다 고 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 나의 길에 멘토가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내가 만난 스승과 친구들의 이야기가 된다
조금만 더 하겠다.
시 한 수를 읽겠다. [김씨의 옆 얼굴] 자료에 시를 많이 넣어 둔 것은 많이 접하라고
두 번째 시집의 표제이다, 광물질적 상상력, 이 시는 사물들을 인간으로 보아서 내 동댕이 쳐진 삶들을 그려 보기 시작한 것. 두 번째 시집이 나오고 나서 시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피로감이 오면서 자연스럽게 시를 써 보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안 세계에 집중했다면 이젠 밖을 내다 보면서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세 번째 [ 우리 낯선 사람들] 이라는 시집의 [밖] 이라는 시이다. 책 참조
이 밖이라는 시를 통해서 제 시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연, 생태, 등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80년대 후반에 생태관련 엔소리지가 나오는데 중요한 것으로 90년대 오면 여성, 생태 문제가 대두 되곤 했는데 이런 생태의 문제가 문학에 깔리고 있던 때이다.
생태문학은 서구적 입장을 보이고 잇다는 말도 잇는데 과찬이고 사회학을 하면서 환경관련 기사들을 스크랩을 하기 시작했었는데 60년대 말 무렵인데 전국 신문의 환경관련 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조국 근대화의 입장에서 환경문제는 도외시 되던 때, 공업지역에서의 환경에 대한 기사화 하면 기자들이 끌려가서 혼나기도 했던 당시 동아일보가 많이 그랬는데 그 때 경제가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유보해 달라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는데, 그래서 기사가 별로 없고 짧고, 그 당시 귀한 기사를 모아 놓았었다 나중에 아주 요긴하게 쓰였던 자료였다
이 문제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잇는 현실을 언어로 반영하는 것의 하나이다. 김소월과 만해 한용운이 30년대 중요한 시인으로 꼽히는데 두 사람을 30년대의 어두를 말하는 시인으로 화두는 '님이 없는 시대'로 이야기 하게 되는데 님이 부재하는 시대로 탁월하게 본 것이다 그런데 김소월 같은 경우는, 님이 가시는데 꽃을 뿌리는 좀 모자라는 사람처럼, 진달래 꽃을 발인제를 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당시 상황을 그렇게 본 것, 만해는 님이 부재하지만 다시 만난다는 희망을 본다 낙관적 절망을 본다. 같은 현실이라도 두 사람의 관은 차이가 있다. 현실을 언어화 시키는데도 똑 같이 그려 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각자의 삶을 그대로 그려 내는 것이 그대로 라는 것은 생각 그대로를 말함이다
우리 시대의 독특한 시를 쓰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문학개론 집어 던지고 자기 이야기를 써라. 자기 삶이야 말로 가장 개성적이고 독특한 것이다.
선배 시인들 중 독특한 시들은 주로 자기 이야기이다. 남의 이야기는 오류이거나 관념적일 뿐이
내가 살아가는 삶을 내 발로 밟아서 들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그렇게 살아왔다고 하면서도 미흡함을 느낀다.
최근에 쓴 시를 한번 일고 마치겠다
[연어] 11페이지 참조
이 시는 초기의 시하고 많은 차이가 난다. 말을 풀어, 억지로 만들지 않은 언어였고 시를 만들지 않고 쓴 노력이 있다. 나이 탓인지? 한편 긴장이 떨어진 것 아닌가 하는 반성도 있고 리듬감을 더 자연스럽게 풀어 놓은 가능성을 가져 본다
지금 그런 입장이다.
질문? 없슴. 마침 1720
8. 최형보 바리톤 성악가 1720~
중앙대 성악과 졸, 포항 음악 연구회 활동 동지고 교사. 멜라환타지아, 외1
임승박 - 경희대 음대 졸, 포항 청소년 음악 ? 회장. 포항 음악연구회 초대 회장 역임.
마이 웨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색스폰 연주, 앵콜 -나의 사랑 내 곁에.
9 휴식 및 석식
10. 석식- 석식이 늦게 도착하였다
11. 시 낭송 및 발표 - 사회 민구식
1900~2030
가. 오지원 씨의 춤 테라피
인터뷰 - 춤 테라피에 대해서, 음악- 유레즈미 업.
(음악이 필요하면 사전에 협의하여 기기를 준비하거나 시설측에 문의하여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음악을 메모리에 넣어 오셨는데 제 컴에 옮겨서 시설의 앰프로 방송했는데 용량이나 음질이 별로였다)
주제- 춤으로 드리는 시 낭송을 위한 기도
나. 박승류 시인
다. 김 순 시인(여) - 시 낭송을 많이 해 보신 분임
라. 박은우 시인의 하모니카 연주
마. 장미화 씨의 시 낭송- 김석규 시인의 시
바. 이복연 시인님 - 시 낭송을 많이 해 보신 분, 서울
사, 이명희 시인
아. 백숙희 씨(포항)
자. 이환 시인과 이동훈 시인
차. 김대구 시인의 낭송
타. 김봉구 시인의 팬푸릇 연주
백일장에 대한 안내를 한 후 마침
12. 여흥의 시간 - 식당에서 나눔 소통 대화 그리고 친교
너무 많이 마신 분들의 새벽은 늦게 뜨고
일찍 잠든 사람들은 시제 숙제를 하느라 밤을 새우고
소통을 위한 술과 노래와 대화는 친교와 정과 내일을 위함이다
13. 24시 잠들다
8월 25일 일정 메모
1. 0630 기상, 산책을 하고 바다를 보고 영일의 아침을 맞았다
날씨는 좋았고 바람도 시원했다. 많은 시인들이 일찍 일어나 바다로 산으로 산책을 나갔고
어제 늦게까지 마신 분들은 늦게까지 잠들었다
고래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셨던 분들이 이야기를 들었다
2. 조식 0800-0840
조식이 늦게 배달 되었다. 08시 정각에 도착하면 늦다
배식을 하기 위한 준비도 좀더 세심해야 한다. 시설 측의 상황을 미리 점검해서 배식을 위한 도구 식기 그릇 설거지, 지원 유무, 식수 준비, 음식물 처리, 쓰레기 처리, 식당과의 협약을 통해 해결하던지 특히 잔반 처리는 어려운 문제이다. 미리 협의를 잘 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은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4. 특강 - 이종암 시인. 유인물 참조.
대부분의 시인들은 비슷한 과정으로 시에 접근한다
선천적 언어 능력의 돋보임- 모방- 습작- 발탁- 스승의 만남- 약간의 공부를 거쳐 당선- 가치인정으로 인한 공부 시작 - 습작 - 등단 - 자각 - 타 시인들과의 교분 및 성장 - 시집 발간
그리고 지속적인 시작으로 유명세.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이 종암 시인도 비슷하게 시작 오늘에 이른다.
많은 시인들과 만나며 그 시인들의 시에 감동하면서 반성하고 시샘과 질투로 나를 채찍질하며
장석남(인천 덕적도 생) 시인의 시를 보면서 충격을 받고 자신의 길을 다시 닦는다. 장석남 시인을 모방하면서 공부. 장석남 시인은 23세에 시집을 발간하면서 유명세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를 섭렵한 장석남을 닮기 위해 미당의 시를 섭렵하기도 했고
미당 - 장석남- 이종암으로 시상이 이어진다고 보임
지금도 무식하게 시를 베끼고 빨간 연필로 줄 치며 공부하며 노트에 시를 씁니다 그렇게 노트가 13권이 된다. 보여 줌.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미당에 대한 감동과 공부,
저마다 꽃
1030
질문 -
5. 김경하 시인님의 시 낭송
포항 신광 출신의 기업가
맨날 왔다가 바람같이 가곤 했는데 한편 낭송해 보고 싶었다. 한번도 우리시에 작품을 낸 적도 없어서 존재감이 없어서 ...
나름대로 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미학 보다는 사물을 볼 때 사물에 대한 감정이입을 하는 편이다. 사물이 현재까지 성장하는 과정, 내 과거의 아픔이나 기쁨의 한 부분을 사물에 빗대어 쓰는 편이고 요즘은 바뀐 게 약 2년 동안 양자 물리학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이해와 감정에 야자 물리학적인 시각이 동원 되기도 한다
제목 - 어머니의 편지
아들아
어제도 너는 내 몸에 침을 뱉었다
가끔씩 '담배 불을 구겨 끄기도 하고 그러나 괜찮타
너의 똥도 달게 받은 에미다
너는 나의 소망이며 분신이다
나가 조금씩 커가는 것이 기쁨이며 용서이다
거센 파도를 박차며 창공으로 비상하는 갈매기를 바라본다
나의 소망은 하챦으나
너의 성장에 바라는 소망일 뿐[
에미가 죽는 날 갈매기처럼 온 우주를 훨훨 날아서 이 에미 보다 더 큰 별에서 둥지 틀기 바라
양자와 중성자처럼 파동만 있을 뿐
냇가의 조약돌처럼 너희 형제란다
마음이 슬픈 날은 000(?) 로 가라
작은 풀꽃을 만나거든 그 꽃에 안겨봐라
그것은 너의 침 뱉음에 대한 00(?)이니라
1040 - 10분 휴식
6. 백일장 시상식 - 사회 사무차장
오늘 아침 7시까지 연장해서 마감을 했다
수 십 명이 제출을 했다
심사를 맡아 주신 김석규 선생님이 평을 해 주시겠습니다
에너지를 너무 과다 방출을 해서 힘드시겠습니다
저에게 심사를 맡겨서 편치 못했다
임보, 홍해리 선생이 하라고 해서. ㅎㅎㅎ
잘 아시겠습니다만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언어가 없으면 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시를 쓰는 시인은 언어의 소비자이다
소비를 줄이는 바람에 전반적으로 물가가 경기가 떨어지는데 시인은 언어의 건전한 소비 생활자가 되어가지고 살아야 본보기가 될 것이다
건전한 소비라는 것은 언어를 쓰는데 그 언어를 과용 남발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언어의 가장 정수, 핵심, 요체, 이런 것들을 추출하고 정련하고 그 작업 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이 언어 이전에 불리 문자로서 전달이 되는 것이 있다 군인들이 고대 전투에서 깃발을 올려서 알리는 방법 북을 쳐서 사기를 돋구던가 하는 방식의 뜻이 전달되는 것처럼 시인은 언어 이외에 감추어진 파상의 효과를 알고 운용 구사하며 가져다 놓는 사람이 시인이다
언어의 마술사 연금술사가 되는 것이다. 언어의 폭발력을 잘 구사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가지고 어떤 제제나 주제에 접근하면서 비유나 상징이나 그 외 형이상학적인 시학 이론에 보면 양극화 낯설게 하기 칼시에이트(기발한 생각), 수사적 기법으로서 유머 위트 아이러니 등이 동원되면 금상첨화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제재에 접근하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고 접근되며 진정성 있는 효과를 보는 관점으로 심사를 했다
번호를 보고 심사했기 때문에 누구인지는 모른다
상을 받으시는 분은 서두에서 말하는 부분을 충분하게 발휘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장원 차상 입상하신 분에게 축하하고 상에는 들지 못했지만 여름 학교에서 백일장에 참가했다는 것을 긍지로 삼기 바란다
입상작 발표
총 6분이 입상, 가작부터 발표
가작 - 파도- 김정후(여)
가작- 손,- 박희상.
가작 - 손- 박원혜 시인
차상- 파도- 이재부 여름학교 교장 선생님
차상 -손- 호미곶 김혜숙
장원- 파도 민구식
시 낭송 - 차상 김혜숙 호미곶, 꼬리에 대해 곶에 대해 연구를 하고 왔는데 ..
차상 이재부
장원 민구식 - 파도, 말보다 손보다 비싸다
시 낭송 - 민문자 - 홍해리 시인의 '방짜 징'
노래 - 김대구.시인 박목월 시인을 좋아한다
경상도 사람, 구만리 포구, 박목월이 좋아하는 노래. 노래를 함
7. 강평 & 폐교선언
강평 - 이재부 교장선생님
우리시 가족 여러분 고맙습니다. 초저녁 잠이 많아서 11경부터 잤습니다 0340에 잠이 깨어 옥상에 올라가서 하현달이 빛을 잃고 태양이 떠 오르는 것을 2시간 3분을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짧은 일박이지만 임원들은 물론 우리시 가족들이 마음 하나하나 합쳐 주시고 계획해 저는 복도마다 다니면서 깨끗한가 확인했다. 깨끗했다.
시를 통해서 마음을 정화 시키고 마음을 통해서
민구식 시인님의 정성과 노력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래하고 춤... 사진 악기 여러 장기를 보여주신 분들에게 감사하고 번영하도록 단합하고 좋은 시를 써서 우리시가 발전하고 출판사 웅(?) 출판사도 잘 돌아가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홍 선생님에게 시를 배우고 아직도 충북 대학교에 나가서 시를 배우고 있습니다.
시집을 하나 내가지고 학교장을 시켜 준다고 하는데 부랴부랴 시집을 내서 웅 출판사에서 내 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도와 주신 홍 선생님과 출판사에 감사 드립니다.
명예회장님 강평 - 임보
이사장님이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일박의 짧은 기간이긴 합니다만 참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이하석 시인이 와서 초창기 자기 시 쓰는 태도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길 해 주셨고
사물을 바라보는 냉철한 자세, 사진기로 사물을 찍어 대듯이 사물을 보는 눈으로 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진지한 태도로 시를 공부했다는데 나는 적당히 시를 썼구나 하는 반성을 했다
오늘 이종암 시인의 강의에서도 두 시인을 들추면서 장석남 시인의 모방에서, 미당 시인에게서 감명을 받은 공부에 대해 들었다
평소에 나는 이렇게 시를 뽑아내고 공부를 하고 진지하게 공부를 하고 잇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반성을 했다 저렇게 노력을 하여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시가 무엇인가. 다양 하게 생각할 수 가 있겠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와 세계에 대한 탐구이다, 내가 누구이며 내가 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 하는 탐색의 작업이다 라고 생각한다
좋은 시가 되려면 소통이 가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소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하석 시인도 현대시 이야기의 소통부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고 일본에서는 일반적인 소통 부재의 난해한 시가 발달하여 시인들만 시를 가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우리시에 모여있는 멤버들은 시에 대해 그래서는 안되겠다 하여 우리시 월간지에서 시의 선언을 싣고 있듯이 모토가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시' 로서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야 한다. 역시 시도 예술이므로 아름다운 글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시속에 담긴 시인의 정신 시 정신은 고매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것을 소중히 여긴다. 감동성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한다. 이런 것을 가지고 한국 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는 거이다
우리시의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이 안된 상태인데 어떤 집단에서는 해야 한다. 수 많은 문예지 단체가 있지만은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 수립을 모색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가 없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우리시 진흥회 월간지가 해 나가자고 선언을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연 학교도 열고 한다. 앞으로 작품을 쓸 때에 이런 정신을 생각하면서 소통이 되는 작품을 쓰기를 요구한다
멀리서 오신 분들 고맙고, 포항의 문인들 준비하시느라 고생했다. 감사드립니다
이사장님 강평 - 홍해리
이번 행사 백미가 적혀 잇는 시제 파도와 손, 파도는 임보가, 손은 제가 추천한 시제이다
백일장 선정 후 정말 잘못 선정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항에 유리한 제목이었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불리했다고 생각한다
그랬으면 민구식 시인이 장원 못했을 것이다 두 편을 썼는데 다 장원감이었다.
세상 만사 하나하나 모두가 감사 고맙다는 생각이 나이 들어 자꾸 든다.
2013년도 우리시 자연학교에서 이것을 위해서 준비하신 많은 화원님들과 동참 해 주신 여러분들 눈물 겹게 고맙다. 특히 포항에서 준비를 정말 잘 해 주셨다. 내년에도 또 한번 오자고 농담처럼 했다. 내년에 다시 한번 하면 절래 절래 흔들 것이다.
유진시인, 김봉구 시인, 차영호 시인, 민구식 시인 모두 고생했습니다
이번 행사를 해서 기획하고 모임 가지고 했던 집행부 임원들 정말 고맙고, 준비를 하느라 고생한 모든 분 고맙다 이런 작은 희생과 봉사 노력과 생각들이 우리 나라의 시단이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시를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잇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이하석 시인, 오늘 바다의 바위처럼 보였다, 명찰을 달고 이야기 하는 이종암 시인
또 내년에 떠나는 것을 다시 준비하면서 힘을 모으고 작은 정성을 보여주고 희생과 참여와 시작을 위해 노력하고 독자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 주는 시인이 되자
어제 오늘 모든 행사 일정을 마치는 것으로 하겠다
박수
9. 기념 사진 찍기
10. 반성
가. 접수는 버스로 오시는 분은 미리 버스에서 접수를 하면 어떻지
나. 현지 접수는 현지 시인들이 미리 하면 좋겠다
접수 방법과 양식, 거출 방식 등에 대해 메일이나 전화로 상의를 해서, 그러면 시간이 절약될 것
다. 방 배정도 참석 예정자 대상으로 미리 해서 메일이나 공지로 발표하고 바뀌는 사람만 넣고 빼는 방법으로 하면 좋겠고, 머뭇거리는 시간이 줄어 들것임.
라. 준비물에 대한 통보는 시설에 기본적으로 있는 것을 알려 주면 나머지는 개인이 알아서 챙겨 오도록 하면 좋음
마. 협찬, 지원, 물품, 노력봉사 등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이 있으면 다음에도 지원하는 회원이 많아 질 것임
바. 음식에 대해서 - 가장 문제가 컷던 부분으로 잔반 처리였다. 상식적으로 시설측에서 해결해 주지 않으므로 멘붕이었다. 사전에 협의를 잘 하여야 할 것이다. 음식을 배달 해 주는 식당에서 처리해 주도록 계약을 하면 좋겠다. 그 지역마다의 특징이 있어서 쉽지 않으므로 사전협의는 필수로 보인다
바. 소개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명찰 만으로 소통을 하기에는 부족하고, 적당한 프로그램으로 팀을 만들어 행동을 통일하고, 경쟁심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팀원들끼리만이라도 소속감을 만들어 주는 기회가 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려면 좌석을 팀을 만들어 앉게 하는 방법,(라운드 식, 팀별로 등) 강의실의 좌석도 다른 방법으로 배치하는 안도 연구할 필요
사. 음향 시설에 대한 연구 - 스피치 용으로 설치된 강의장의 일반적 음향은 강의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음악, 동영상 등의 시청에는 한계가 있다. 필요하면 대여 또는 지참 등의 방법을 연구 할 필요도 생각
아. 소속감을 부여하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
이름을 붙여 주는 방법은 소속감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어느 모임이나 낯선 장소에 가게 되면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과 설레임과 눈치를 보게 되는 심리적 반응이 있다 그럴 때 자기 이름이 있거나 자기를 픽업하는 존재가 있다거나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안심을 한다. 즉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신속하고 지속적인 안내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시 여름학교의 형편은 그렇게 안내를 할 수는 없으므로 이름이 게시 된 것을 보고 다음 행동을 인식하게 되며 소속감을 가짐으로써 안정감을 빨리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런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구는 누구와 한방을 쓰게 된다, 방은 어디어디 몇 층 몇 층 등의 안내가 있으면 바로 행동으로 들어가고 다음 진행에 준비가 늦어지지 않는 것이다.
자. 사회자의 연구
• 리크레이션 부분이 미흡
웃음과 편안함은 상관관계가 크다
spot 타임은 필요하다. 매 프로그램 실시 전에 한 5~10 분 정도의 spot time을 넣는 것을 연구
노래, 춤, 마술, 영상, 레크레이션, 등등
이 때 반드시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좋다. 손동작이던, 일어나서 하는 것이던, 자리를 바꾸는 것이던 환기를 위한 액션이 좋다 그러기 위한 시간과 예산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 상품과 상금
상품의 종류나 양도 중요하지만 주는 방법도 중요하다
퀴즈나 선행, 추천, 진행에 도움을 준 낭송자, 음악, 춤 등을 한 사람, 기여도가 큰 사람을 먼저 챙겨 주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중에 다 주는 방법 등은 참여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상금은 많을 필요는 없겠지만 꼭 있는 것이 좋겠다. 대외적으로 홍보 효과와 함께 수상자의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수상자는 돌아가서 향응의 대응을 하게도 되기에 어차피 경비가 발생하는데 상금을 탓다고 하면 핑계의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 음주 등에 대하여
시설의 위치나 형편에 따라 다르겠지만 음주는 정해진 시간을 지켜 달라는 부탁이 필요
사실 그런다고 지켜지지는 않는 문제이지만 집행부의 의지가 보여야 함.
술이 과하면 진행에는 반드시 역효과가 나타남
인간 관계에서도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음주의 제어가 필요한 것임. 실수가 발생하면 소통에도 영향이 있음.
• 남녀 문제- '각자 알아서' 하는 식의 입장이지만 집행부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할 것임, 멀리 떠나 올수록 해이해지고, 평소 관심이 있던 이성간에 대화를 많이 하게 되는데 술과 어우러져 장소이동이 되거나 2차등을 논하고, 지나친 스킨 십으로 주변에서 눈총을 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어른들이 통제를 해 주어야 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집행부는 가끔 순찰식의 통제성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 차량 주차 및 안내 - 현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필요 시 주차 안내를 해 달라고 하면 좋겠다. 장소가 넓고 문제가 없으면 상관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다. 사전 답사를 하기 때문에 미리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 저녁에 마당이나 공연 장소 등이 확보되어 캠프 화이어나 씽 얼롱 등의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 여름이기도 하고 전체적인 소통도 되고... 노래방을 곁들이면 좋기도
이상은 민구식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혹시 문제가 된다면 전체 또는 일부 삭제해도 무방합니다)
첫댓글 와 완전 좋습니다 내일 7월낭송회전에 오전에 임원들 모여서 이번 문경에서 치룰 여름시인학교에 관한 의논들을 할예정입니다
아주 훌륭한 참고 자료사항입니다
내일 시수헌에서 인쇄해 놓고 의논들 하면 좋을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민구식 시인님의 열정과 관심에 심심한 경의를 표합니다^^
민 시인님, 작년 포항 행사가 그대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올해 준비하는 집행부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내일 이제까지의 진행 과정을 점검하는 모임을 갖게 됩니다.
그때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으로 사료됩니다.
고맙습니다.
아 글씨체가 간결하게 바뀌었군요 읽기가 좋습니다 이런체를 뭐라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