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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의 지평 원문보기 글쓴이: 토란잎
정세기 시인님... 몸은 비록 훌쩍 이승을 떠나셨어도
아름다운 시들 속에 시인님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눈에 밟히는 사랑하던 모든 것들 뒤로한 채
차마 발걸음 안떨어지더라도,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시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눈물은 둥글다
꼭두서니는 앉은뱅이꽃의 고민을 모르고 할미꽃은 며느리밥풀꽃의 아픔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이곳 햇살은 휘어져 붉나무의 그리움에 이르지 못하고 달빛도 스러져 달맞이꽃의 기다림을 적시지 못하누나 개불알꽃의 한숨 속에 각시패랭이들 울음 없는 자식을 낳고 무성한 안개 속으로 소문만 번져가는 곳 조뱅이 얼굴 일그러지고 사랑도 모나고 마음들 찌그러져 울퉁불퉁 제멋대로인데 누구의 것일까 말똥구리 경단 굴리듯 그리운 그곳으로 끌고 가는 저 눈물의 바퀴는
- 시집<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에서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은 피어 흐드러지지요
은어 떼는 팔딱팔딱 튀어오르지요
바윗돌 엉덩짝에 물살이
찰싹찰싹 달라붙지요
왕대숲엔 죽순이 쑥쑥 뻗어오르지요
살랑살랑 부는 실바람을 휘감고
능수버들 가지는 자지러지는데요
아 요 미칠 것 같은 봄날에 마주친
어느 흠 많은 생인들
서로의 눈에 설레는 꽃빛으로
눈부시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 시집 <겨울 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에서 -
( 선생님, 아시지요? 제가 이 두편의 시를 얼마나 이뻐하는지를...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맛갈지고 뭉클한 시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시들이랍니다. )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
슬픔이 끌어 산으로 간다
살 저미는 아픔에 겨워 산도
어디론가 떠날 채비 중이다
바람에 갈무리한
견고한 영혼의 무게를 지니고
거리에서 쫒겨난 햇살과 별빛을 품고
맑은 물소리로 나를 씻어준다
산도 나도 상처는 깊어
서로의 상처에 기대면
내 가슴에도 새겨지는 나이테
아픔이 내게로 가는 길을 연다
나무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누구도 넘보지 않고 육탈한 몸
슬픔을 끌고 따뜻한 겨울잠에 든다
상처만이 푸르게 깨어 있다
- 시집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에서
(제작년 겨울, 선생님이 뇌종양으로 쓰러져 병원에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을 무렵 이 시를 읽게 되었지요. 나의 생일날 이 시를 놓고 시 감상을 쓰는 내내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리던 시... 나의 상처를 들쑤셔 따뜻한 햇살에 뽀드득 뽀드득 말리게 해준 시... )
가지 않은 길
무심코 오가던 길가에
피어난 한 송이 꽃 너를 보았다
목마를 때 물 한번 준 적 없고
크고 작은 아픔에 울 때
손길 한번 준적 없어
어느 날 갑자기 내 눈에 띈 너를
나는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만큼의 쓰라림
그 생각만큼의 안타까움을,
가지 않은 길도 삶의 일부라고
은은한 미소로 너는 내게 속삭였다
- 시집<겨울 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에서 -
사랑 노래 열
나의 병은
내 사랑의 상처
그대에게로 가는
마음의 길 어딘가 막혀
나 깊이 병들었다네
사랑이여
그대를 잃고
나 오랫동안 헤매었으나
끝내 그대 찾지 못했네
누군가는 부질없다 하고
오랜 벗들도 다 지난 일이라지만
나 그대 향한 기다림 식지 않았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끝 행은 조용필의 노래 제목에서 빌어 옴
- 시집 <그곳을 노래하지 못하리>에서
(잘 알려진 시는 아니지만 위 두편의 시는 개인적으로 아주 뭉클하답니다. )
평범한 시어들이 통째로 새로운 이미지로 비상하는 시... 시 속에 나의 지나온 삶과 사랑이 그대로 들어있는 시... 아린 가슴으로 읽던 시...
망초꽃
꽃 피네
숙직실 옥상에 망초꽃 피네
좀체 보이지 않는 자리에
버려진 씨앗 하나 싹터
저 홀로 하얗게 피네
새 가슴에 발육 부진으로
1학년 아이만한 열세 살 종식이가
아이들 놀림에 말 못하고 속상해
냉가슴 앓다 바라보는 창밖
오후의 햇볕 잠시 머물다 가는 곳에
피는 꽃이 눈부시네
꽃 피네
키 작은 아이의 꿈처럼
망초꽃 피네
- 시집 <그곳을 노래하지 못하리>에서
(단정하고 정갈한 맛... 그 속의 시인만의 뜨거운 가슴이 느껴지는...)
그 곳을 노래하지 못하리
낮은 산과 작은 강 사이
칡넝쿨 같은 길 따라 가면
울바자 머너 저 홀로 키 큰
팽나무 아래 남새밭
거기 거두지 않은 고추대처럼
갈 곳 없는 사람들만 남아
햇살과 바람과 별빛 속에
들꽃 같은 목숨 피었다 지는 곳
- 시집 <그곳을 노래하지 못하리>에서
(시인께서는 하늘나라에서도 '그곳을' 노래하실 테지요... 상처많은 가슴들이 서로의 아픔을 부비며 슬픔을 맞대며 내일의 희망을 일구는 곳을...)
슬픔의 힘
시를 쓰는 힘은 슬픔에서 나온다던 선배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그 아이를 생각하네
아홉살의 어린 제자
봉천동 판잣집 단칸 셋방에서
외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아이
영특하고 구김살 없이 말도 잘해
똑순이로 통하는 그 애가
엄마 아빠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을 줄이야
쓰기 시간에 부모님을 글감으로 주었더니
풋콩 두어되 깻잎 서너단을
시장 바닥에 놓고 앉아 계실
할머니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한다는
그의 글을 통해 나 비로소 알았네
도무지 어린애 같지 않은 조숙함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착한 마음이
슬픔이 키운 심성이란 것을
일찍 경험한 불행이 때로는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은 전학 가고 없는 아이와
인정 많고 언제나 다사롭던 '슬픈 눈'의 시인*을 그리며
나 오늘 눈물로 쓰네
*정영상 시인: 전교조 복직 투쟁 중 심근경색으로 죽은 시인
- 시집『그 곳을 노래하지 못하리』에서
(슬픔의 힘으로 시를 쓰고 시대와 싸우고 사랑을 하던 시인이여....!)
성당부근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
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소리없이 젖어 잠들고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읽다만 성경 구절을
성에 낀 창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
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
연줄 걸린 전봇대가 함께 울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퍼지면
저녁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장작더미 위로
쌓이던 달빛도 지고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
그레고리오 성가의 앉은 음계를 밟고
양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
- 1996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공들여 쓴 시... 아름다운 시! 내 영혼을 맑게 고양시키는 시...)
초승달
아가가 잃어버린 신발을
누가 하늘 시렁 위에 올려놓았나
아가는 울다가 깜뿍 잠이 들어
별꽃을 따러 꿈길을 자박자박
- 근간 동시집 <해님이 누고 간 똥>에서
(이 시 정말 이쁘고 사랑스러워라... 나의 조카 이솔아, 너도 읽어보렴.
아이들처럼 장난기 많고 눈물 많은 시인이 낳은 동시들은 내 마음도 맑게 닦아주곤 한다네...)
모락모락
아파트 뒷마당에 갔더니
어떤 개가 방금 누구 갔는지
누런 똥에 김이 난다
개나리 가지에도
덕지덕지 붙어 있는
해님이 누고 간 똥.
긴 겨울 웅크리고 있던
땅이 더운 입김을 내쉰다.
- <해님이 누고 간 똥>에서
(이솔아, 참 이쁜 눈을 가진 시인이지? 노란 개나리꽃을 보고 '해님이 누고 간 똥'이라고 표현하다니... 멋지다. 똥도 모락모락 봄기운도 모락모락... 동심의 세계에선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다 경계를 허무는구나. )
눈이 쌀이라면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내린 눈이 하얗게 쌓였다
동생이 제일 먼저 일어나
나를 깨웠다.
산에 들에
온통 흰쌀이 덮였다고 한다.
휴전선 저쪽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산다는데
쌀이 없어
굶는 아이들이 많다는데,
동생의 말대로
눈이 쌀이라면
가난한 북쪽 마을에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 <해님이 누고 간 똥>에서
(이솔이도 이런 마음이 들은 적 있을거야... )
만복상회
고양이가 주인처럼 앉아 있다.
할아버지는
문턱에 앉아 졸고 계시다.
가는귀 먹어서 불러도 모르신다.
백 원짜리 두 개 놓고
껌을 가지고 나온다.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선 뒤
손님 뚝 떨어진
절름발이 할아버지 가게
엄마가 심부름 시키면
나는 꼭 만복상회로 간다.
- <해님이 누고 간 똥>에서
참새들
달동네 골목길에
참새들이 모이를 쫀다.
고 조그만 부리로
빵 부스러기를 먹는다.
부릉부릉 오토바이 소리에 놀라
푸르릉 날아올라
전깃줄에 앉아 눈치를 본다.
고 조그만 눈 속에
별이 뜨고 달이 뜨면
일을 마치고 오는 사람들
무거운 발걸음 소리 쌓이고,
달동네의 어둠 속에
쌀 씻는 소리
고 조그만 귀로 듣는다.
- <해님이 누고 간 똥>에서
아기 햇살
손이 작아서
작은 것만 어루만져요,
개나리 가지에 꼬물꼬물
시골집 울타리에 살살
강아지 눈에 곰실곰실.
발이 작아서
작은 것만 디뎌요,
아가 신발에 사뿐사뿐
젖먹이 머리칼에 살짝
개미 허리에 조심조심.
귀가 작아서
낮은 소리만 들어요,
씨앗들 싿 트는 소리
땅속 깊이 아무도 못 듣는
봄이 오는 소리.
- <해님이 누고 간 똥>에서
( 이솔아... 위 몇편 다 참 멋지구나. 너는 어떻게 읽었니?
느낌이 절실하지 않는데도 어른 시 흉내내면서 멋부리면서 써낸 동시들은 별 감동을 못 준단다. 그렇다고 일기 쓰듯 그대로 솔직히 써낸다고 다 좋은 동시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구나. 너만의 눈으로, 너만의 느낌과 생각을, 너만의 호흡으로 써낼 때, 좋은 동시가 되겠지...
정세기 선생님의 동시들을 읽는 동안 마음 가득 따뜻함이 고이고 주변 모든 이들이 사랑스러워보이는 구나. 선생님이 동시로 담아내는 세상은 슬픔과 아픔, 따뜻함과 어두움이 다 어우러져 있단다. 그러면서도 환한 세상이지. '매향리 매화나무', '상년이', '코 고는 엄마' 등등의 시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담겨있는 동시들이란다. 너도 <해님이 누고 간 똥>꼭 읽어보렴.)
토란잎에 쓰다
수경
미안하다 사랑한다
(선생님이 쓰신 시 중에서 저는 가장 눈물로 읽었던 시랍니다........
"토란잎에게 주는 시 썼는데 어여 와서 댓글 달아줘요..."
작년 일월 중순 경, 퇴원하신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지요.
'... 아픔만 드린 제가 감히 이 시를 받아도 될런지요..... 다시, 잎사귀 실핏줄들은 요동치고 토란잎 가슴 한복판엔 맑은 슬픔 영롱히 고였습니다. 그날... 휠체어에 앉으셔서 제게 노트를 달라고 하셨지요. 펜을 쥔 손 떨려와 한참만에 꼬불텅꼬불텅 간신히 적어주신 한마디...'토란잎에 쓰다'! ......저 시를 다 완성해주실 날 올까?....꼭 올거야! ... 올거야! ...
찢어지고 군데군데 구멍 뚫린 제 잎사귀 어루만지며 한땀한땀 꿰매 주셨군요. 가만 그림을 그려보아요. 연초록 둥그런 토란잎에 새겨진... '미안하다 사랑한다'... 글자 위로 퍼붓는 햇살 눈부셔 온 들판이 출렁입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겨울 나무처럼 선, 아무 치장없는 이 단순한 시어들. 생략된 무수한 언어들 사이로 별빛은 흘러, 오롯이 너와 나로만 존재하던 세상의 온갖 대립과 상처와 통증은 이제, 한시절 추억이구나. 그 여백, 쓰라렸던 상처 고름자리마다 향그런 거름 냄새 풍겨와, 얼어붙었던 대지도 새움을 돋워올린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두 마디라면, 내 걸어갈 길 무엇이 걱정일까. '너와 나' 사이에 숨 턱턱 막히는 높은 산맥이 우뚝 선들, 무엇이 두려울까. 칼바람 불어오는 한겨울 산길을 걸어간들... 겨울가지 몸속에선 이미 봄꽃망울들 준비하고 있는데, 섬벅 내 가슴 베어오던 너의 서늘한 등엔들 자목련 한송이 못 피워낼까.................... ' 저는 이렇게 댓글을 올렸지요.
저로서는 제일 뭉클한 이 시... 나의 남은 인생길 걸어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관계의 한복판으로 꼬여들어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를 먼저 돌아보게 하는 시가 될 것입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두 마디라면 넘지 못할 관계의 벽이 어디 있으랴! 너나 없이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가슴들, 녹이지 못할 오해와 아픔이 어디 있으랴...!
봄밤
너도 잠못들고 있구나
꽃샘바람 물아치는 봄밤
홀로움에 불밝히고 있구나
너도 힘든 날을 보내고 있구나
산수유 노란 흐느낌으로
세월의 발치에 엎드려 있구나
네가 부른 노래는
내 머리맡에 달빛으로 쌓이는데
유리창에 입김불어 썼다가 지우는 이름
너도 병들고 지쳐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고 있구나
(선생님, 작년 초봄에 동인창작시 방에 올려주신 이 시 기억나시지요...토란잎에게 주는 시라며 댓글 많이 달으라시던. 한참을 댓글로 대화나누던 시간들이 이젠 추억 속에 묻혀버렸네요.
나의 모습이 담겨있는 시... 그리고,
모든 생명이 새로이 발돋움하는 봄날, 죽음과 싸우며 시를 쓰며 고독을 이겨내던 시인의 모습이 담겨 있는 시...)
겨울의 집
폐허가 황홀해서 가는 섬이 있다
끝이라고 생각할 때
열리는 마음의 뱃길
바다의 푸른 능선을 넘으면
겨울이 먼저 와 있다
바람의 뼛속까지 보인다
수평선을 끌어올린 용마루가
하늘에 닿아 있는 빈집이다
몰락한 가문처럼
바람의 지문으로 서 있는
저 앙상한 나무들
그러나 그들은 즐거운 표정이다
지붕을 구름에 매달고
바람의 몸을 입은 집이
한 오리 연기로 사라진다
대지의 고요한 숨소리가 들린다
별들이 돋는다
별은 하늘의 상처라고
상처에서 빛나는 삶이 있다고
한 사람을 용서하러 왔다가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
- <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
( 동인창작시 방에서 분명히 읽었는데 그 시가 어디로 갔을까... 처음 이 게시글 올릴 때부터 한참을 찾던 시랍니다. 창비에서 읽었던게 뒤늦게 생각나 올리고 보니 애송시 방에 있었네요. 빼어난 시적 정취 속에 빛나는 화해와 성찰...! )
휠체어를 타고
공원묘지 사이로 한 아이가 달려온다
자세히 보니 딸이다
황사주의보가 딸의 손에 매달려
침침한 눈을 찔러온다 빠르고 높고 멀리 날아야 할 세상에서
나는 앉은뱅이가 되어
딸아이가 황사 속으로 숨어버릴 것 같아 불안하고
딸은 아빠가 공룡 발자국같이 움푹 들어간 자운영꽃 논 속으로 처박힐까봐 노심초사다
"아빠 여기서만 기다리세요" 딸아이는 말했다
"그래 너무 멀리 가지 말아라"
어디선가 경보 싸이렌이 울인다
딸아이가 다급하게 손짓을 한다
하늘의 창이 깨지고
지하의 물이 쏟아진다. 소란이 지나간 잠시
계엄령 내린 거리처럼 공원이 침묵의 화관을 쓰고 있다.
집에 와서 텔레비젼을 켜니 어린이대공원을 뛰쳐나온 코끼리가 짓밟은 집들을 보여주고 있다.
밤하늘의 별들이 자운영꽃처럼 그윽하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
( 시의지평에서 주욱 시인의 시들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시세계의 변모를 예감케 하던 색다른 맛...
중년 가장의 불안하고 스산한 내면이 잘 와닿습니다. '빠르고 높고 멀리 날아야 할 세상에서/ 나는 앉은뱅이가 되어', '어린이대공원을 뛰쳐나온 코끼리가 짓밟은 집들을 ... ' ... '집'이란, 아버지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끝내 지켜내야 할 최후의 보루이건만 제 역할을 못하게 된 병든 아버지는 티비를 통해 '코끼리가 짓밟은 집들'만 보아도 가슴이 무너져 내릴 듯 허한 마음이 되었나 보아요.
무너져 가는 육신을 보며 자주 '폐허'의 서정을 느꼈을 시인의 가슴이여, 이제는 '자운영꽃처럼 그윽한' 별이되어 총총 빛나기를...!
방
진눈깨비 들이치는 늦가을
어머니의 방 창문을 닫으려다 보니
창살을 감고 올라
전봇대까지 걸친 호박넝쿨이
말라 비틀어진 채 허공을 붙들고 있다
방 한켠에
속을 다 파인 채
펑퍼짐하니 앉아있는 늙은 호박 한 덩이
단풍
추석절 넘기고 상강은 여즉 먼 이즈음이었을레
제수로 장만해오던 생선 등때기에 빛나던 햇볕이야
과수댁 엄니,울엄니 얼굴에 어리던 근심빛이었을레
바람도 이쯤이었을 내 어린날,어머니는 궁시렁거리고
나는 나대로 골이 나서 눈물 콧물로 따르며 맡던 비린 생선 내음
비싼 고기는 아니고 흔한 전어쯤이었을레
점심약속을 콩나물국밥으로 때우고
섭섭해 전어 몇 마리 사가는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아내의 저 눈빛 쯤이었을레 마중 나온 아들놈 얼굴에 물들기 시작한
저 단풍이었을레
달개비
아파트 옹벽에 달개비가 매달려
저러이 싱싱하게 자랄 수 있다니
지독하군, 나는 생각했다
시멘트 틈에 뿌리내린
작은 풀의 생명력에 대해서
이방에서 날아온 풀씨 하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태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실비아 가난한 농가의 맏딸로 태어나 어린 동생들 뒷바라지하려고 다니던 학교도 관두고 코리안 드림에 뿌리내리려는 달개비 줄기같이 여린 여자 70년대 흑백사진 속의 누이와도 같은, 옹기공장으로 식당으로 봉제공으로 옮겨다니며 맞기도 하고 임금도 못 받고 쫓겨나도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혀 호소할 데도 없이 고향으로 쉬 돌아갈 수도 없는, 맑고 큰 눈에서 달개비꽃 같은 눈물 떨구던
나는 이제 고쳐 쓴다
달개비 이파리가 싱싱한 것은
뿌리뽑히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라고
시멘트의 균열을 막아주는
풀 한 포기의 위대함에 대해서
개미떼
처음에 나는 그들에게서 욕심을 읽었다
벌꿀 담은 병을 깜박 잊고
뚜껑을 닫지 않고 출근했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 왔더니
개미떼가 꿀병 속의 꿀에 붙어 죽어 있었다
단맛을 좇는 저 맹목의 식탐이라니,
그러나 또한 그 식탐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들을 살아있게 했을 것인가
밥벌이가 시 쓰기에 방해된다고 늘 불만이었던
나여, 그러면서도 노동은 신성하다고 쓰고
인간해방을 위한 시를 쓰노라는
허위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구나
시상을 얻는다고 시간만 나면
여행갈 궁리에 골몰했구나,
방바닥에 아직도 남은 개미들을 위하여
사과 한쪽을 슬며시 내려 놓는다
젖
숲 속으로 갔지
해남 달마산 자락
황토방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
여자의 육감이 나를 끌었지
숲은 어떤 기억을 더듬거리게 했지
숲 속을 헤매다
풋풋한 땡감을 보았지
탱탱한 젖 망울 같은 그것을
마냥 만져보고 싶어서
가지 하나를 뚝 끊어 와서
내 방 거울 위에 걸어두었지
나는 아침마다 숲으로 가는
정한 마음이 되곤 했는데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어느 저녁
문득 수액 빠져나가
쭈그러진 땡감을 보았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보았지
목욕탕에 대한 추억
어머니 따라 처음으로 갔던
목욕탕은 우물 속처럼 깊어서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밖에서 바가지로 물이나 끼얹다가
거웃으로 가린 아래가 궁금해서
뚫어져라 쳐다보던
내 눈길에 당황하던 젊은 아낙들
출렁이는 젖가슴이 만져보고 싶어서
그 희고 고운 살결에 손댔다가
나는 그만 쫓겨났던 것인데
따뜻한 여자의 우물에
나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
죄인 줄만 알아서
나의 동정(童貞)은 꽤나 오래갔는데
웬걸 한번 통과한 그 문은
너무나 황홀한 구역이어서
온탕을 넘어 열탕에 들어 가렸다가
기실 냉탕으로 들어가서
하 그 차가움에 정신 바짝 들어서
뜨뜻미지근한 욕탕에서 얼쩡거리며
반숙의 계란 두 개 얻었던 것이다
아버지로 산다는 것
잠든 아이를 보며
눈물 짓는 때가 있으니
어느덧 나도 내 아버지가 저승길 간 나이
세상에 아버지란 직함보다 성스러운 것 없어라
오늘은 직장 상사에게 꾸지람 받고
네 네하고 굽신거리며 돌아오는 길
도랑가에 앉아 생각느니
또랑또랑한 물소리가 아이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던들
나는 도랑물에 돌이라도 하나 주워 던졌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젊었더라면 술이라도 거후르고
달보고 짖는 개처럼 헛된 큰소리라도 쳤을 것
그러나 아버지가 된다는 것
도랑가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
도랑물 위에 내리는 달빛처럼이나 고요해지는 것이어라
아이들아 내 아들 딸아
아버지라는 직업은 굴욕이 훈장이구나
밥그릇을 던져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구나
밥상에 둘러앉은 너희들의 재잘거림이
비굴마져 받아들이게 하는구나
애비가 오늘 도랑가에 한참이나 앉았다가
별빛처럼이나 맑아져서 돌아가고 있단다
무거운 발길로 밟는 비탈길도 아름답다 여기면서
더러는 눈물 반 웃음 반으로 달을 보고 허허로이 걷고 있는 것이다
휴직, 부재중
아빠 학교 잘 다녀오겠습니다
아침밥 꼭 드시고 오늘 하루 아프지 마세요
딸내미가 잠든 내 머리맡에 놓아둔
글을 보는 아침이 있다
내가 집 떠나 산중에 있을 땐
전화기 속의 울먹임
숲의 정적 속에
속울음 스며들게 하던,
그냥 그 존재만으로 살아가는 힘이 되는
딸이나 아들이 한 집의 가장이면 누구나 있지
파업중인 공장 앞을 지나며 임시천막에
복직투쟁 170일 붉은 글자를 보며
울컥 목까지 뜨거움 치미는 것은
아버지가 부재중인 그들 자식의 슬픔이
가슴을 적셔오는 때문
한 가족의 단란한 행복을 앗아간
일자리 잃은,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하는
아이의 아픔을 헤아리게 된 것이다
세상의 아침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면서 열어야 함을,
토요일 오후 공원에 나온 사람들
손잡고 산책하는 연인들보다
자전거를 타고, 배드민턴 치는 이들보다
혼자 노는 아이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도
신병으로 휴직 중 딸내미의 글을 보며
기어코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그 아침 이후의 일이다
봄날 사랑노래
어쩌자고 꽃은 저리도 곱게 피어
이 봄날 당신 생각에 젖게 하는가
저 언덕 저 푸른 나무의 육향은 어찌하여 또
잠시나마 살의 죄를 생각하고
다시 고해성사를 하게 하는가
어쩌란 말인가
어쩌란 말인가
그냥 그 살아지는 세상의 일들이
내 뜻대로가 아님만을 알겠네
젖먹이는 여자
산을 오르다 무덤 곁에서
젖먹이는 여자를 보았다
아파트 공사로 시끄러운
산아래 소음이 순간 뚝
사라지고 꽃피는 소리 들릴 듯,
내 마음 어둔 구석에 햇살 든다
뗏장 벗겨진 무덤 위
듬성한 잔디가 팽팽하다
인기척에 흠칫 놀라
돌아앉은 여자의 몸에서
훅 끼쳐오는 내음에
마른 가슴이 젖는다
바람의 젖을 먹고
숲도 푸른 광휘로 출렁인다
젖가슴에서 무덤까지 한 생애가
산 위로 솟구친다. 숭엄하다
새봄
내 몸에 손님으로 와서
어느덧 주인이 돼버린 병이여
너에게 빌붙어 건너온 겨울이 가고
꽃잎 진 자리의 흔적마다 상처처럼
꽃은 그렇게 피고
꽃 구경하러 나온
휠체어를 탄 소년은 항암치료로
빠진 민둥머리에 햇살이 빛난다
내가 실눈을 뜨고 쳐다보자
병실 밖은 또 다른 병실
누가 달아 놓았나 저 색색의 눈물방울들
죽음과 신생이 함께하는
대책없는 싸움의 날들이야 굳세어라
새봄
삶
내 가슴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 들린다
문을 연다
창밖은 시퍼런 겨울 아침
베란다 옹기에 쇠별꽃 피었다
엄정하여라
엄정하여라
생이 팽팽해진다
(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써낸 시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비장한 대결의식이 느껴집니다... )
終詩
나 없는 날
시여
너는 와서 놀아라
( ........! )
故 정세기 시인
61년 전남 광양에서 출생하여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1989년『민중시』5집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함
1996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성당부근>당선
시집『어린민중』(1992년)
『그 곳을 노래하지 못하리』(1994년)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2002년)
2003년부터 『어린이 문학』, 『창비 어린이』 등에 동시 발표,
2004년 겨울 뇌종양 발병. 투병 중에도 시혼을 불태워 시를 써냄
2006년 1월, 동시집『해님이 누고 간 똥』펴냄
2006년 9월 11일, 2년여 투병 끝에 45살로 타계. 용인 묘지공원에 안장됨.
정세기 선생님을 생각하며 선생님의 시들을 읽다가 몇 편 골라보았습니다.
더이상 아픔과 고통 없는 그곳에서 고단한 몸 편히 누이시길 기도합니다... .
첫댓글 토란잎님이 작성한 글을 옮겨왔습니다.
너무도 예쁜 글들이 조각조각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가는듯 합니다...선생님이 노래하신 그곳에서 누구보다도 달콤한 숙면에 드셔계실꺼라 믿습니다...!!! 잘 보았습니다...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