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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46
입후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두 황후의 인상은 사람들의 뇌리에 점점 극명한 대비를 이루게 되었다. 역대 황후의 절반 이상을 배출해 온 가문의 출신으로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의 덕망을 받았던 소홍과 다르게, 은은 계속되는 악재를 끌어안고 모든 사람들의 입방아를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럼에도 한 가지 방패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은이 황실의 후손을 잉태하고 있다는 ‘거짓’ 사실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함께 점점 덩치를 불려 은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황후마마, 괜찮으시겠습니까.”
“........”
하루 한 번, 아무것도 없는 빈속을 게워내는 일은 이제 예삿일이 되었고 그 때마다 유난을 떨던 아랫것들도 익숙하다고 까지 하게 되었던 날들 중 어느 하루. 장 상궁에게서 수건을 받아든 은이 지친 얼굴로 입가를 닦아냈다. 손님이 찾아든 것은 그 때였다.
“황후마마, 지원입니다.”
대답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멈칫, 하고만 은의 손. 장상궁의 시선이 그런 은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은은 수건을 다시 장 상궁에게 건네고 바삐 손을 움직인다. 머리, 옷매무새, 얼굴 등을 분주히 오가는 손이 자신을 단정히 보이도록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 상궁에게로의 눈짓. 이내 장 상궁이 방을 빠져나가고, 열린 문 사이로 우겸이 들어선다. 꾸벅, 하고 건네오는 형식적인 인사에 은은 잠시 말을 잊었다.
“앉으세요.”
“황제 폐하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겸은 멀찌감치 선 채로 말을 잇는다.
“폐하께서는 조금 전 정전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럼 내가 가지 않을 수 없겠군요.”
오늘 있을 정전 회의에서는 분명 소란의 자결과 은의 혐의에 대한 내용들이 오갈 것이었다. 자신이 나서서 뭔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생각들을 읽었다는 듯이 우겸이 은의 말을 가로막는다.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모든 일을 처결 할 것이니 정전에 올 필요는 없으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폐하께 모든 짐을 맡길 수는 없어요.”
은 역시 단호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선 은이 한 발자국 내딛던 찰나, 현기증과 함께 휘청이는 몸을 우겸에게 의지하고 만다. 우겸은 천천히 은을 부축했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이럴 것을 아시고 오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될 일이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 황후가 된다면 그 어떤 고난과 악재들이 덤벼와도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겠다던 다짐. 스스로 홀로 일어서 보이겠다던 굳은 결심을 저버리고 여기서 또 황제의 말대로 멈춰버린다면, 자신은 황제의 울타리 안에서만 기생할 수 있는 나약한 여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둘 수는 없다. 지켜보고 있는 우겸 때문에라도.
“황후마마.”
발을 붙잡는 우겸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은은 다시 걸음을 뗀다.
“그렇게 서서 지켜보지만 말고, 어서 나를 정전으로 호위하는 것이 지원의 임무일 것입니다.”
...
은의 갑작스런 등장에 정전 안의 모든 재상들이 기립한다. 이미 회의의 시작점에서 황후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황제의 발어가 있었지만,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등장을 의아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 황제를 제외하고는.
일어섰던 모두가 은을 향해 예를 표했고, 그것은 은 스스로가 어떤 권력을 지니며 군림하게 되었는지를 상기시켜주며 긴장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재상들이 모두 다시 착석했고, 자신감을 되찾은 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무례를 용서하소서. 다만 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밝히고자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들에게 하고픈 말은 딱 한 가지뿐, 그 이상도 이하도 없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은은 재상들을 향해 섰다.
“나는 결백합니다.”
은의 단호한 한 마디가 정전 안을 울리고 그 밖에 선 사람들의 귀에까지 닿았다. 은이 정전으로 갔다는 소식에 화급히 달려온 언주 역시 정전 밖에서 안의 상황들을 듣고 있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요. 태중에 있는 황실의 혈맥에 맹세코, 나는 이 손에 피를 묻힌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저를 의심한다면 그것은 뱃속의 황제의 후손마저 부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마치 으름장을 놓는 것과도 같은 은의 주장에 돌아온 것은 뜻밖에도 한참 누그러진 웃음이었다.
“하하, 그야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그간 황후마마의 심려하심이 이토록 크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발언보다 앞서 당도하신 황후마마시니 아뢸 도리가 없었지요.”
재상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영문을 몰라하는 은을 두고 또 다른 재상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조사하는 과정에 있어, 의심이 가는 궁인 하나를 찾게 되었습니다. 소용 마마의 자결이 확실치 않은 지금으로썬, 그 아이를 추문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게 누구란 말이냐.”
황제가 재촉하자 재상이 답한다.
“‘언주’라는 궁인입니다.”
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언주가 이 자리에서 언급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기에, 황제도, 고 환관도, 우겸 역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마마께서 후궁에 가 계실 그 즈음, 언주라는 아이의 행방이 불확실합니다. 같은 방을 쓰는 궁인의 말로는 그 밤, 늦도록 자리를 비웠다가는 한밤중에야 다시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
“황후마마, 외람된 말씀이오나 과거 황후마마와 그 아이의 관계로 짐작했을 때,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없을런지요.”
“말을 삼가라.”
황제가 재상의 무례한 발언을 꾸짖고 나서야 장내는 조금 더 엄숙해졌다.
“하오시면 당장 그 아이를 불러다 추문해 보시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 사료됩니다.”
재상은 정전 한 켠을 지키고 있던 병사를 향해 눈짓한다. 마치 모든 것이 계산되고 예측된 일인 것처럼, 병사는 밖으로 나가 그곳에 서 있던 언주를 붙잡아 데리고 들어왔다. 모두 순식간의 일이었다. 언주는 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칠게 바닥에 꿇어 앉혀졌고, 고개를 들었다가는 황제의 모습을 발견하고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조아렸다.
“네 이년, 감히 궁인 따위가 정전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렷다.”
“........”
“모두 듣고 있었을 터, 그 밤 어디에 있었는지를 사실대로 고하거라.”
재상의 채근에 언주는 숙인 고개를 들지도 못했고, 입을 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 날 언주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우겸만이 유일했다. 그 시간, 언주가 덧대어 꿰매준 관복을 입고 있는 우겸으로서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을 알면서도 도와줄 수 없는 우겸을 대신해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짓궂으시구려. 황후마마께서 그 자리에 계셨고, 또 소용 마마 스스로 자결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는데도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게다가 저 아이가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면 어째서 태연히 정전 밖을 서성이고 있었겠소이까.”
“좌승상께서 끼어드실 상황이 아닌 듯싶습니다만.”
“일이 돌아가는 순서가 영 답답하여 그렇소.”
진 대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폐하, 신의 불충이 크옵니다. 그 날 밤, 저 아이는 제가 시킨 심부름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을 것입니다.”
“심부름이라니.”
“실은 서궁에 계신 황후마마께 사가에서 직접 약을 지어올리고 싶은 마음에 저 아이의 힘을 조금 빌었습니다. 늙은 아비의 노파심이 결국 일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폐하.”
진 대인의 입에서는 태연히, 있지도 않았던 일들이 사실처럼 흘러나온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언주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진 대인이 다시없을 자애로운 눈을 하고선 언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니, 저 가여운 아이는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폐하.”
//貢女 奇皇后//
“그딴 건 모두 거짓말이야.”
동궁으로 돌아온 은이 옷자락을 움키며 의자에 앉는다. 이마에 잔뜩 주름을 그려 넣고는 그렇게 한참 심각하게 앉아만 있는 것을 우겸이 지켜보고 있었다. 정전에서의 진 대인의 말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은은 생각했다. 아니, 반대로 언주가 설령 진 대인에게 그런 부탁을 받았어도 고분고분히 들어주었을 리조차 없었다. 자신이 서궁과 진 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아는 언주가. 그렇지만 진 대인은 어째서 자신에게 득이 없는 일을 막아준 것일까.
“정말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건지..”
그러나 한편으로 제 안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동궁에만 박혀있었던 주제에, 가령 오늘 진 대인의 말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몰랐던 건 당연했을테니. 가능성이 없는 얘긴 아니었다.
“혹시.. 정말 진 대인과의 교통이 있었을지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우겸의 존재를 잠시 잊었던 은이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불안의 말에, 그가 차분히 답했다.
“그런 아이는 아니니까요.”
조금은 원망스러운 얼굴로 은은 가만히 우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째서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나 즉각적으로 언주를 감싸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첫댓글 아싸! 저 첫번째에요 ㅎㅎ 오랜만에 오신거라 정말반가워요 ㅎㅎ 근데 예전에 진맥한의관은 회임의 여부를 불분명하게말했는데 은이 자꾸 확실하게 못박아두네요 나중엔 어쩌려고 그러는지....
정말 오랜만이네요^^ 다시 은을 보게되니 너무 기뻐요 그렇게 기뻐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런 긴장감들이야 irene님 소설의 묘미니 저는 즐기겠습니다 ㅎㅎㅎㅎ
젬있게 보고가요~~
잘보고갑니다~
진대인이 저리 나오는게 더 무섭습니다...대체 무슨 꿍꿍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