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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1월 16일 주일 오전 예배
사도행전 설교
성경낭독 : 사 62:1-5; 요 2:1-11
본문 : 행 10:1-16
제목 :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48편 1,3,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95편 4,5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05편 15,18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2편 3,4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베드로가 본 환상의 의미
가이사랴에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곧 ‘카이사르’에서 이름을 딴 이 도시(헬라어로는 ‘카이사레이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요새 도시로, 유대 지방의 행정도시였고 헤롯 대왕이 건설한 화려한 항구를 자랑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들었던 욥바, 곧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린 곳과는 약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요즘에야 60킬로미터면 금방이지만, 성경 시대에는 이 정도면 하루를 꼬박 걸어도 도착하기에는 힘겨운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이사랴에 살고 있던 고넬료는 2절 말씀에 의하면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 2절 말씀은 해석해야 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잠깐 생각해 보자면, 그가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했다”라는 말은 그의 정체를 설명하는 것인지, 그의 영적 상태나 태도를 설명하는 것인지를 분별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말은 그저 일반적으로 “경건한 사람이었다”라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예수님 당시 혹은 그 이후 사도들이 활동하고 있던 이 초대교회 시대의 소위 ‘경외자’라는 이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이때 정체나 지위로서의 ‘경외자’라는 말은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그래서 이 2절의 말씀은 고넬료가 일반적으로 경건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경외자’로서의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이방인이었다는 것인지를 확정하기는 힘듭니다. 아마 저는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2절에서 고넬료에 대한 특징을 서술한 것을 보면 당시 교회, 당시 유대인들이 ‘경건’을 정의하는 것이 어떤 판별기준에 의한 것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고넬료는 “경건하다”고 말해지면서 두 가지가 언급되었습니다. 즉 “구제”와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경건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구제’와 하나님께 정기적으로 (아마도 회당에 나와서) 드리는 ‘기도’ 생활을 꾸준히 하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고넬료는 분명히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에게 임한 환상
그런데 어느 날 이 고넬료는 하나님의 천사가 자신에게 와서 이야기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3절에 의하면 이때 시각은 약 9시, 그러니까 지금 시간으로는 오후 3시 정도 쯤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각을 밝히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본문에서는 사실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것은
첫째, 오후 3시라는 시간은 그가 새벽 미명의 비몽사몽 중이라던가, 밤늦은 시간에 술에 취해서 겪은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해 줍니다. 오후 3시는 활발히 활동하는 시간이고, 따라서 고넬료는 정신이 말짱했습니다.
둘째, 그리고 이 오후 3시라는 시간은, 좀 있다가 그가 사람들을 베드로에게 보냈을 때 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한 시각과 비교해 볼 때 사실성을 더 강화해 줍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는 시간이 두 번 나오는데, 고넬료가 환상을 본 것이 9시, 곧 오후 3시이고(3절), 이 고넬료가 사람들을 보내어 욥바에 도착하여 베드로를 만난 시각이 다음날 6시, 곧 정오(12시, 9절)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읽거나 듣던 당시의 회중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부산에서 경주까지 가려면 차로 1시간 반은 걸리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 맞아, 오후 3시에 바로 사람들을 보냈으니, 욥바까지면 다음 날 정오에는 도착했겠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두 개의 시각 서술은 이야기의 신빙성을 매우 강화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쨌든 이 고넬료는 환상을 보게 되는데, 이 환상에서 천사의 말을 듣습니다. 천사가 전한 메시지의 내용은 4절부터 6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4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피장 시몬의 집에 있다. 그리고 그 집은 해변에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어” 고넬료가 하나님께 선택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청해 이제 닥치게 될 일, 곧 이방 세계로 교회가 확장되게 될 역사적인 사건을 펼치시려고 할 때, 그 기념비적인 사건을 맡을 인물을 ‘아무나’ 선택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실 고넬료는 사도행전에서 아주 주변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교회가 이방에로 확장되는 데 첫 번째 사람으로 사용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넬료가 사도행전 전체에서 무슨 대단한 역할을 하는 인물인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로 이 일에 사용될 사람을 ‘아무나’ 정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는 가끔 마태복음을 읽을 때, 마태복음의 첫 머리에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마 1:19)라는 말씀이 왜 필요했을까를 생각하곤 했는데,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속 역사를 성취하실 예수님을 보내실 때, 아무나 부모로 삼으시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매우 경건한 사람들을 예수님의 육체의 부모로 삼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도행전적 교회의 역사, 곧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역사를 세상 역사 속에 투영하는 교회 건설의 역사 속에서, ‘아무나’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사람,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있는 이들을 들어서 사용하심으로써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주변 인물, 곧 “행인 3”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되더라도 굉장히 영예로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고넬료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 혹은 “신약 교회의 탄생과 확장”이라는 엄청난 대작의 ‘행인 3’ 정도의 역할이었지만, 그가 여기 이름이 기록되고 대본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게 된 것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매우 경건한 사람, 곧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설교의 주제와 상관이 없지만, 잠깐 생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
이제 본격적인 주제로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고넬료가 사람들을 보냈을 때 베드로는 베드로 편에서 또 환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시각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 6시(우리 시간 정오) 직전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환상을 다 보고 끝내는 시각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는 시각을 정확하게 일치시켰습니다. 17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밖에 서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마침”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보라!”(헬. 이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때!” 이런 식으로 읽으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환상 보는 것을 딱 끝냈을 때, 바로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나님께서 세심하게 신경을 쓰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본 일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일이 서로 매칭되게 하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렇게 시간을 맞추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추신 환상은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환상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봅시다.
베드로가 본 환상의 요약
1) 먼저,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한 그릇을 보았습니다.
“그릇이 내려왔다” 하니까 좀 이상할 수 있는데, 어쨌거나 여기 ‘그릇’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릇이 “큰 보자기 같다”라고 되어 있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그릇’ 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보자기’는 ‘아마포’ 혹은 ‘세마포’를 가리키는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좀 더 익숙한 단어는 ‘린넨’입니다. 쉽게 생각하시면 ‘베옷’의 그 재질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네 귀퉁이가 묶여서 하늘로부터 베드로를 향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2)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은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입니다.
주석을 보니까 “‘각종’이라는 형용사는 전체 동물군의 모든 표본이 보자기 안에 있었음을 의미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 보자기 안에는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있었는데, 이 짐승들이 온갖 것들을 포괄하기 위해서는 일반 육상 동물들도 물론이거니와, 새들도 있고, 땅에 기어 다니는 류의 동물들도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고기가 있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3) 베드로가 이 짐승들을 보았을 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이 명령은 이 짐승들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 그러니까 그저 짐승들인지 어떤 목적을 가진 짐승들인지를 현저하게 보여줍니다. 즉 각양 종류의 짐승들이 있었던 것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 하면,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러니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안 되고, 1세기 베드로의 입장, 당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정결법에 비추어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을 수 없는 짐승이 막 뒤섞여있었고, 지금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시고 계신 이유 자체가 바로 이 ‘먹는 것의 문제’, ‘정결법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이 명령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당연한 이야기지만 베드로는 먹는 것을 거부합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정결법을 잘 준수하고 있는 일반적인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레위기에서 금하고 있는 부정한 짐승들은 먹지 않고 자라왔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14절,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베드로의 이 이야기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고, 먹는 것에 대해 정결법 같은 것이 없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것이 쉽게 연상되지 않을 수 있지만,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오늘날에도 음식을 가리는 ‘할랄’ 같은 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할랄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수 없는 돼지고기 같은 음식과 할랄 음식이 막 뒤섞여 있는 보자기가 내려왔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당연히, 먹을 리가 없겠죠.
5) 그러자 이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하늘에서 다시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목소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뒤에서 다시 살피겠지만, 그냥 우리말 번역으로만 생각하자면 두 가지 방향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말은 “네가 잘못 안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깨끗하다 했는데 왜 너는 더럽다 하느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제까지는 그랬지만 이제 변경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깨끗하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이라는 말이 ‘원래 깨끗한 것이었다’는 말일지, 아니면 시점상 ‘지금 깨끗하게 하셨다’는 말일지에 따라서 의미가 나뉘어지게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그릇은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그리고 곧바로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납니다.
환상의 의미 : 정결법의 상세
베드로가 본 환상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또 하나님께서 마침 이 타이밍에 이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주제를 살피기 위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정결법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파악이 근본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17절과 19절에서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해 생각했다”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는데,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 환상을 보여주신 다음에, 별도로 다른 해석을 주셨던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살피겠지만 28절 말씀을 보면(이것이 맨 마지막의 결론이다), 베드로는 이 환상을 정확히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들이야 유대인들의 정결법/음식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단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으로만’ 여기지만, 사실은 당시의 유대인들, 베드로와 같은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정결법/음식법을 단지 겉으로 이행만 했을 뿐 아니라, 그 정결법/음식법에 담긴 의미까지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해석의 계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혼자서 곰곰이 숙고하는 일 만으로도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애초에 하나님께서 정결법/음식법을 주셨을 때의 그 의도, 함의’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여기 베드로가 본 환상을, 우리도 베드로의 입장에서처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렇다면 베드로가 어떻게 추가적인 해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닥친 이 일, 곧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맞물려서 이 환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정결법/음식법의 함의
이스라엘의 정결법
레위기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정결법은 크게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들을 네 가지 상태로 구분합니다. 네 상태는 “거룩함과 속됨”, 그리고 “정함과 부정함”입니다. 우리가 보통 ‘거룩’과 ‘정함’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속됨’과 ‘부정’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데, 구분해서 보셔야 합니다.
‘거룩’은 ‘속됨’과 반대말이고, ‘정함’은 ‘부정함’의 반대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라는 측면에서 거룩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정하든 부정하든 ‘속됩’니다. 한편 ‘정한’ 것은 특별하게 따로 구분된 것을 말하고, ‘부정한’ 것은 그렇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속된 것, 곧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들은 정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지만, ‘거룩한 성전’은 절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정결법이 세상을 이렇게 나누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단지 ‘먹거리’에 관한 법일 뿐일까요?
이스라엘의 정결법, 곧 음식법이 단지 먹는 것에 관한 규례가 아니었음이 레위기 20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먹는 것에 대한 법이 어떻게 다른 요소와 연결되는지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 레위기 20장 22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방의 더러운 행위들을 따르지 말 것을 명령하시면서 “이렇게 하여야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 그리고 23절과 24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23절과 24절의 말씀이 이어지는 25절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하고, 더불어 이 25절 말씀이 다시 26절과 연결되어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23절과 24절에서 땅을 주실 것을 말씀하신 후에, 그들이 그 땅을 받게 되는 것을 25절의 “짐승의 정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것”, 곧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가리는 것과 연결시켰다는 것이고, 이 25절의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하는 것이 26절에서 “너희가 거룩하고, 나 하나님이 너희를 세상과 구별하였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시니까 좀 정리가 되실 것입니다.
분명히 레위기 20장은 ‘먹거리에 대한 법’을 먹을 것에 대한 것으로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먹는 것의 법은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들의 정결과’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분명히 ‘그 땅의 거룩’과도 동시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레위기 20장은 이 셋이 한꺼번에 다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먹거리 – 사람 – 땅
이 셋이 모두 ‘정함이나 부정함’, ‘거룩이나 속됨’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레위기 20장의 이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음식법, 곧 정결법이, 오늘날 사람들이 비건, 즉 채식을 하겠다거나, 할랄, 곧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음식만을 먹겠다거나, 이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엮여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무슨 음식을 먹느냐’의 문제, 곧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는’ 문제가, 곧 ‘그들이 정하냐 아니냐’, ‘그들이 부정하냐 아니냐’의 문제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법의 문제는 ‘사람의 정결’을 관장하고, ‘그 땅의 정결’을 결정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눈 것이, 사실은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에 대한 나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정결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없는 짐승’은 정결한 사람, 정결한 땅, 부정한 사람, 부정한 땅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자면 이렇게 됩니다.
• 짐승들은 세 가지 카테고리로분류됩니다.
1) 거룩한 짐승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입니다.
2) 정한 짐승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짐승들’이었습니다.
3) 부정한 짐승, 혹은 속된 짐승은 ‘이스라엘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들’이었습니다.
• 이것이 똑같이 사람에게 적용되어 사람도 세 가지 카테고리로분류되었습니다.
1) 거룩한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2) 정한 사람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이들입니다.
3) 부정한 사람, 혹은 속된 사람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 이것은 다시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카테고리를가집니다.
1) 거룩한 곳은 ‘성전’입니다.
2) 그리고 정한 곳은 ‘이스라엘 땅’입니다.
3) 마지막으로 부정한 혹은 속된 곳은 ‘세상’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막연하게 오늘날의 무슬림들처럼, ‘그저 돼지고기만 안 먹으면 그만’인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무지하게 섬겼다고 막연히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음식법 안에 담긴 의미’들도 말씀을 통해 충실하게 배웠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음식법의 내용 속에는 일종의 ‘세계관’이 들어 있었던 셈인데, 이들은 이렇게 음식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과 또한 ‘세상과는 구별되는 자신들의 정함’, 그리고 ‘일반적인 세상의 속됨과 부정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음식법과 관련된 환상을 보고서도, 또 다른 계시가 없었어도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그에게 이미 ‘음식’과 ‘사람’, 혹은 ‘땅’과의 연관성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 한 음식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환상에서 들은 베드로가 이것을 어떻게 적용하여 말하는지를 보십시오. 28절입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아멘! 놀랍지요!
베드로는 이해했습니다.
무엇을 이해했습니까? 베드로는 ‘음식법’의 문제가 단순한 음식법의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조금 전에 보았던 환상, 곧 정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라고 하신 문제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분명히 방금 자기가 보고 들은 환상의 내용은 ‘음식의 문제’였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라고 말합니다. 즉 이것을 즉시 ‘사람에게’ 적용하여,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이해하는 과정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음식법의 참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지 식단을’ 짜 주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통합된 세계관’을 주셨습니다. ‘거룩함과 속됨’, ‘정함과 부정함’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전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세계관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을 통해서 이 세계관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이 기준의 파괴
왜 구분을 주셨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 때 왜 ‘구분’이라는 것을 주셨고, 또 이제 사도행전, 곧 교회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구분’이라는 것을 없애버리시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니 왜 구분하셨고, 또 폐기하셨습니까?
1)
우리는 창세기에서 범죄 이전의 세계가 ‘두 영역’이었음을 배웠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범죄 이전의 세계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영광을 뿜어내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밭에 나가서 밭고랑을 쟁기로 매는 행위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범죄 이전의 세계는 그야말로 아무 곳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찾을 수 없는 곳이 없었던, 그야말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 동시에 발산되고 있던, 그런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창 2:8), 그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신 후에 그들에게 ‘전체 세계를 향한 명령’(창 1:28)과는 구별되는, ‘에덴에만 국한되는 명령을’ 따로 주신 것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에 아담과 하와를 두시면서 그들에게 “섬기고 지키게”(창 2:15) 하셨는데, 우리는 창세기 설교에서 이것이 ‘성전 직무’라는 점을 살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전체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성전’을 따로 지정하셨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체 삶이 예배’였어도, ‘예배를 위한 특별한 공간과 시간’을 따로 마련하셨습니다. 특별한 공간인 성전은 ‘에덴동산’이었고, 특별한 시간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제아무리 거룩해지더라도, 여러분의 직장의 일이 제아무리 거룩으로 화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직접적인 예배의 일’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죄가 없던 세계에서조차, 하나님은 ‘일상의 일’과 ‘예배의 일’, ‘일상의 공간’과 ‘예배의 공간’, ‘일상의 시간’과 ‘예배의 시간’을 구별하셨음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 이전의 세계에도 ‘두 영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의 영역과 ‘정함’의 영역입니다. 온 세계는 하나님의 선택 속에서 정결했습니다. 하지만 그 온 세계가 모두 예배의 거룩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공간으로 말하자면 죄가 없는 가장 정결한 세계 속에서도 ‘거룩의 영역’이었던 성전이 따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2)
그리고 이제 ‘타락’이 일어납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죠.
이렇게 되면서 우리는 이제 세상이 이 두 개의 영역에서 새로운 다른 분화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앞서 말한 유대인의 정결법의 구분으로 말해보자면, 이제 세상에는 참으로 ‘거룩과 속됨’, ‘정함과 부정함’이라는 개념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세계는 이제 세 구도로 나누어집니다. 거룩한 성전, 정결한 이스라엘, 그리고 바깥세계로서의 부정한 세상입니다.
사람도 세 구도로 나누어집니다. 거룩한 제사장, 정결한 유대인, 그리고 속되고 부정한 이방인들입니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 짐승들도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거룩한 제물, 정결한 음식, 부정한 음식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분’이라는 것을 왜 주셨는지 곧바로 깨닫게 됩니다.
‘구분’이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 주의 백성들을 가르치시기 위한 거대한 학습공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일상의 영역’과 ‘예배의 영역’이 따로 있고, 더불어 ‘택함 받은 자의 공간/시간’과 ‘부정한 공간/시간’이 따로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들/사람들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바깥쪽에 있어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이 ‘구분’이며, 이것이 ‘구분의 세계관’입니다. 구약의 오랜 역사는 이것을 유대인들에게 먹을 것에 대한 법을 통하여 오랫동안 가르쳐 왔고, 이것에 익숙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의 원리, 이 세상에 대한 가치관을 습득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파괴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바깥에 있던 세계를 향하여, “이제 더 이상 너희를 바깥이라 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즉 ‘구분’을 통하여 과거에는 ‘하나님의 밖에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던 것조차, 하나님께서 자기 속으로 끌어들여오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음식법의 파괴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새 시대를 열어가시는 징후임을 알고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음식법의 파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제 새 시대에는 부정한 자들조차 정하게, 심지어 거룩하게 만드시겠다는 의지를 역사 속에 쓰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더럽혀 부정하게 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이리들의 먹잇감으로 주심으로써! 그리하여 자기 안에 들어오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정함으로’, 심지어 ‘거룩함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일로부터의 새 시대로의 진전이며,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오래 참아오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분하시던 벽을 철폐하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아무에게도 그가 정한지 속된지를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구약이 이 비전을 오래 전부터 기다려 왔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합시다.
1) 스가랴서는 구약 성경에서 언제나 이스라엘의 적으로만 나타났던 애굽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초막절을 지킬 것이라......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그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식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 14:16-21)
2) 우리가 일전에 이사야서 말씀을 통해서 “고자”에 대한 예언의 말씀도 들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3-7)
3) 미가서 4장도 말씀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미 4;6-7)
4)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방인들을 향하여 갈라디아서가 선포하고 있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5) 로마서 9장이 호세아 말씀을 인용하면서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롬 9:25-26)
는 이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4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음식법의 파괴를 통해 구분을 철폐하신 하나님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애초에 세계의 구성을 시작하시고 기다려오셨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골 1:16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는 말씀의 성취이며,
로마서 11장의 말씀,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 모든 ‘세계의 완성’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었으며,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분의 교회가 설립되는 이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