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새벽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술래가 해질 녘 공기를 가르며 고래고래 외치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이 숨을 때까지 여러 번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며 신호를 줍니다.
술래를 혼란시키려고 여기저기서 “아직 아니다!”를 서로 외쳐주며 들키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술래가 도저히 찾기 어려운 곳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볏단이 쌓여진 곳의 빈구석에 기어들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친구, 외양간에 들어가 혹여나 소가 인기척에 놀라
울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가슴 졸이는 친구들이 떠오릅니다.
숨 쉬는 소리마저 들킬까 호흡을 고르며 혼자 숨어있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술래의 발자국은 가까이 조여오고,
그때 슬쩍 눈을 들어 바라보았던 밤하늘의 별들은 촘촘히 빛났습니다.
순간의 아찔함과 흥미로움은 그때 뿐,
잠시 후 술래는 친구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친구들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이 짜릿한 숨바꼭질의 묘미는 무엇입니까?
못 찾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숨기가 아니라 ‘찾기’입니다.
회개는 숨겨진 자신의 부끄러움, 어둠, 부조리, 뻔뻔함, 약함을 찾고 발견하여,
궁극에는 ‘자기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꾸만 무엇을 재어보고,
따져보고, 머뭇거리며 체면 때문에 주위를 살피기만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바르티매오처럼 해야 한다고 외치십니다. 자기인식이 되어 있기에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어둠을 볼 줄 아는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르티매오가 살았던 시대는
자신의 어둠을 볼 줄 아는 영혼조차 철저히 억압했던 시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 빛이 아니라 어둠을 자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빛에 눈이 멀지 않고, 그 속에서 그림자의 몫,
그 내밀한 어둠을 식별하는 사람만이 동시대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기득권층은 바르티매오와 동(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숨기는 것을 목표로,
들키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만 사실은 아주 손쉽게 들키는 구조입니다.
들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우리의 어둠, 부끄러움, 부조리를
우아하게 읽어 줄 근사한 품격 있는 술래들을 만났으면 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숨겨져 있는 어둠을 들키고 싶습니다.
내가 들킬 어둠은 얼마나 많을지 궁금합니다.
술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문득 놓여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술래와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집으로 가고 싶습니다.
눈을 뜬 바르티매오가 주님을 따라나선 것처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는 술래의 노랫가락이 아련한 가을밤입니다.
글 : 윤창신 (루치아노) 신부 – 광주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