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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자룡(趙子龍)의 부음(訃音), 공명(孔明)의 출사(出師) -
손권(孫權)은 조위(曹魏)를 크게 이기고 나자 촉(蜀)에 사신(使臣)을 보내 그 사실(事實)을 알렸다. 손권(孫權)이 싸움에 이긴 것을 촉국(蜀國)에 굳이 알린 것에는 두 가지 목적(目的)이 있었다. 첫째는 자신(自身)들의 위세(威勢)를 과시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촉(蜀)과 오(吳)의 화친(和親)을 더욱 굳게 하자 것이었다.
공명(孔明)은 손권(孫權)에게 이같은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공명은 가정(街亭)에서의 뼈아픈 패배(敗北)를 극복(克復)하고자 군사를 재정비(再整備)하여 머지않아 위(魏)를 다시 칠 계획(計劃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와중(渦中)에 오(吳)가 위(魏)를 유인(誘引)하여 위(魏)의 대도독(大都督) 조휴(曺休)마저 죽이고 양주(揚州)를 점령(占領)하였다는 소식(消息)이 당도(當到)하자 공명(孔明)은 기쁨을 금치 못하여 측근(側近)의 장수(將帥)들을 불러 축하연(祝賀宴)을 베풀기까지 하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돌연(突然) 동북(東北)으로부터 불어온 일진 대풍(大風)이 뜰에 서있던 늙은 소나무 가지 하나를 와지끈 부러뜨린다. 많은 장수(將帥)들은 주연(酒宴)에 흥(興)이 겨워 아무도 그 일에 신경(神經)쓰지 않았으나, 공명(孔明)만은 불길(不吉)한 기분(氣分)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바로 그때 시중이 들어와 조자룡(趙子龍)의 아들 조통(趙統)과 조광(趙廣)이 찾아왔다고 아뢴다.
공명(孔明)은 그 소리를 듣고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무심 중(無心中)에 떨어뜨리며 소리쳤다.
"아아! 자룡(子龍)이 세상(世上)을 떠났구나!" 그의 예감(豫感)은 틀리지 않았다.
공명(孔明) 앞에 부복(俯伏)한 조통(趙統)과 조광(趙廣)은 통곡(痛哭)을 하면서,
"부친(父親)께서 지난 밤에 세상(世上)을 떠나셨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공명(孔明)은 즉시 축하연(祝賀宴)을 파(罷)하고 소리내어 울면서,
"조운(趙雲)은 선제(先帝 : 유비) 때부터 촉(蜀)의 동량(棟樑 : 기둥과 들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었는데, 그가 세상(世上)을 떠나다니... 이는 국가(國家)의 큰 손실(損失)이오, 나로서는 나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만 같구나!" 하고, 애달파한다. 축하연(祝賀宴)에 참석(參席)한 모든 장수(將帥)들은 공명(孔明)과 함께 마지막으로 남았던 오호 상장(五虎上將) 조운(趙雲)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였다.
그 사실(事實)은 곧장 후주(後主)에게도 알려져, 후주(後主) 유선(劉禪)도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면서,
"당양(當陽) 장판교 대전(長坂橋 大戰)에서 나를 품에 안아 구해 준 그 어른이 돌아가셨다니, 세상(世上)에 이렇게 슬플 수가 없구나!" 하고,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후주 유선(後主 劉禪)은 조운(趙雲)을 순평후(順平侯)에 봉(封)하여 국장(國葬)을 지내고 금병산(金屛山)에 사당(祠堂)을 지어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四季節)에 제사(祭祀)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맏아들 조통(趙統)을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으로 삼고, 둘째 아들 조광(趙廣)은 아문장(牙門將)으로 삼아서 분묘(墳墓)를 정중(鄭重)히 지키게 하였다.
*인물평
조운(趙雲) ? ~ 229년
유비(劉備)의 맹장(猛將), 자는 자룡(子龍)으로 진정현(眞定縣) 출신(出身)이다.
처음에는 공손찬(公孫瓚)의 휘하(麾下)에 있다가 나중에 유비(劉備)의 측근(側根)이 되어 용맹(勇猛)을 떨쳤다. 유비가 장판(長板)에서 조조(曹操)에게 쫓겨 아들 유선(劉禪)과 감부인(甘夫人)을 버리고 달아날 때에 조운(趙雲)은 단신(單身)으로 이를 구출(救出)했다. 214년에는 성도(成都) 공격의 일익을 담당하여 출전해 공을 세웠고, 219년에는 한중(漢中) 공방전(攻防戰)에서 위(魏)의 주력부대(主力部隊)를 물리쳐 유비(劉備)의 찬탄(讚歎)을 받았다. 221년 유비(劉備)가 손권(孫權)을 공격할 때에 반대(反対)를 무릅쓰고 강주(江州) 수비(守備)를 하여 공(功)을 세웠고, 228년에는 제갈량(諸葛亮) 기산(祁山)으로 출전(出戰)할 때 등지(鄧芝)와 함께 양동작전(陽動作戰)으로 기곡(箕谷)에 진출(進出)해 있다가 위(魏)의 대군(大軍)을 만나 적은 수(數)의 군사(軍事)로 잘 싸웠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그는 충의(忠義)의 화신(化身)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공명(孔明)은 조운(趙雲)의 국장(國葬)을 치르고 난 직후(直後)에 후주(後主)에게 두 번째의 출사표(出師表)를 쓰기 시작(始作)하였다.
두 번째 출사표(出師表)의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았다.
《선제(先帝)께서는 한(漢)나라 황실(皇室)의 기강(紀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신(臣)에게 역적(逆賊) 토벌(討罰)을 명(命)하셨습니다. 신(臣)의 보잘 것 없는 능력(能力)을 높게 평가(評價)하시어 강(强)한 상대(相對)인 위(魏)를 능(能)히 칠 것으로 여기신 것이지요. 신은 막중(莫重)한 임무(任務)에 대한 부담감(負擔感)이 컸으나 속(速)히 역적(逆賊)을 치지 아니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멸망(滅亡)할 것은 자명(自明)한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判斷)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봄에 북정(北征)의 준비(準備)로 먼저 남만(南蠻)을 평정(平定)했던 것이옵니다.
최근 위(魏)가 동오(東吳)에게 크게 패(敗)했다고 하니 이는 우리에게 큰 기회(機會)가 아닌가 하옵니다. 우리의 약(弱)한 힘으로 강(強)한 군대(軍隊)를 깨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겠으나 선제(先帝 :유비)의 뜻을 이루는 것이 사명(使命)일진데, 어찌 안위(安慰)만을 바라고 있겠사옵니까. 백성(百姓)과 군사(軍事)가 고달프나 대사(大事)는 포기(暴棄)해서는 안 되는 일이옵기에 신(臣)은 이제 북벌(北伐)에 나서려 하오니 바라옵건데 폐하(陛下)께서는 이를 허락(許諾해 주소서.》
공명(孔明)은 직접(直接) 두 번째 출사표(出師表)를 후주(後主)에게 바쳤다.
유선(劉禪)이 공명(孔明)의 출사표(出師表)를 모두 읽어 보고, 시선(視線)이 공명에게 향하자,
공명(孔明)이,
"폐하(陛下), 위(魏)의 대도독(大都督) 조휴(曺休)가 석정(石亭)에서 대패(大敗)하여 위(魏)의 손실(損失)이 크옵니다. 문무백관(文武百官)들과 병사(兵士)들이 겁(怯)을 먹었으니 북벌(北伐)을 시도(試圖)하기 가장 좋은 기회(機會)이옵니다." 하고, 아뢰니,
후주(後主) 유선(劉禪)이 한숨을 쉬면서 걱정을 앞세운다.
"아... 자룡(子龍) 장군(將軍)마저 세상(世上)을 떠나 나라의 큰 기둥 하나를 잃어 마음이 아프오. 이것이 혹여(或如)라도 북벌(北伐)의 흉조(凶兆)가 아닐 지 걱정이 되오."
공명(孔明)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흔들며 대답한다.
"심려(深慮)치 마십시오. 제가 밤에 천문(天文)을 살펴 보았는데 제왕(帝王)의 기운(機運)이 남(南)으로 이동(移動)하여 북극성(北極星)이 어두웠으니 이것은 우리가 위(魏)를 칠 수 있는 좋은 때가 도래(到來)했다는 것입니다." 공명은 어디까지나 자신(自身)의 출사(出師)를 굽힐 기세(棋勢)가 아니었다.
유선(劉禪)이 그런 분위기(雰圍氣)를 느끼고 조심(操心)스레 입을 열었다.
"아...! 승상(丞相), 한마디 하겠으니 듣고 혹시(或是)라도 노여워 하지 마시오."
"말씀하십시오."
"우리 촉(蜀)이 개국(開國)한 뒤 지금까지 위(魏)는 우리를 먼저 공격(攻擊)한 적이 없으나 승상(丞相)은 계속(繼續)해 위(魏)를 공격해 왔소. 승상이 거병(擧兵)하지 않으면 촉(蜀), 위(魏), 오(吳)가 싸울 일이 없으니 천하(天下)가 태평(太平)하지 않겠소?" 후주 유선(劉禪)은 이렇게 말하면서 공명(孔明)의 대답을 기다렸다.
공명(孔明)이 적이 걱정스러운 웃음을 웃어 보이며 대답(對答)한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폐하(陛下)께서는 올해 춘추(春秋)가 어떻게 되시지요?" 공명(孔明)이 느닷없이 유선의 나이를 물었다.
"열 일곱이오." 유선(劉禪)은 의문(疑問)의 눈을 뜨며 즉시(卽時) 대답(對答)하였다.
"폐하(陛下)께서는 촉(蜀), 위(魏), 오(吳) 중에 가장 젊은 군주(君主)이십니다. 앞으로 남은 날이 제일 많지요. 그럼 혹시(或是) 신(臣)의 나이를 아십니까?"
"승상(丞相)께선 쉰이 다 되시지 않으셨소?"
"그렇습니다. 신(臣)이 안일(安逸)함을 탐(貪)한다면 위(魏)를 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편안(便安)히 조회(朝會)만 들락거리며 태평(太平)히 지낼 수 있겠지요. 촉(蜀)은 천연(天然) 요새(要塞)이니 앞으로 이십 년은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십년 후에는요? 분명(分明) 위(魏)가 촉(魏)을 치려 할 것인데 그때가 되면 신(臣)은 저세상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고 폐하(陛下)께서는 겨우 서른 일곱이 되겠지요. 우리 촉(蜀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오래가지 못합니다. 먼저 공격(攻擊)하지 않으면 망(亡)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가지고 있지요. 그렇기에 신(臣)이 살아있는 동안 중원(中原)을 손에 넣고 천하(天下)를 차지하기 위해 다시 북벌(北伐)을 감행(敢行)하려는 것입니다. 성공(成功)하기만 한다면 폐하(陛下)께서는 남은 날들을 편안(便安)하게 보내실 수가 있게 됩니다."
후주(後主) 유선(劉禪)은 공명(孔明)의 이같은 말을 듣자 더이상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다고 판단(判斷)하고 이차(二次) 북벌(北伐)을 윤허(允許)하는 칙령(勅令)을 내렸다.
이리하여 공명(孔明)은 가정(街亭)에서 패(敗)한지 반 년(半年) 만에 다시 정예부대(精銳部隊) 삼십만(三十万)을 거느리고 위연(魏延)을 선봉장(先鋒將)으로, 강유(姜維)를 후군(後軍)으로 삼아 진창(陳倉)으로 진격(進擊)하기 시작하였다.
공명(孔明)의 이차(二次) 북벌(北伐)의 출병(出兵) 소식은 은밀(隱密)히 성도(成都)에 잠입해 있던 조위(曹魏)의 세작(細作)에 의해 즉각(卽刻) 보고(報告)되었다.
조예(曺叡)는 비밀리(祕密裡)에 대장군 조진(曺眞)을 불러들였다. 조진(曺眞)은 지난번 사마의(司馬懿)가 불려 들어오던 천자(天子)의 비밀(祕密) 전용 도로(專用道路)에서 중상시(中常侍)의 영접(迎接)을 받았다.
"아, 오셨습니까? 폐하(陛下)께서 아까부터 대장군(大將軍)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중상시(中常侍)가 앞장서 길을 안내(案內)하며 말했다.
그러자 조진이 중상시(中常侍)의 뒤를 따라가며,
"며칠 전 폐하께서 사마의(司馬懿)를 불렀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하고, 불만(不滿) 어린 소리로 물었다.
"아, 네. 그랬습죠." 중상시(中常侍)는 조진(曺眞)의 물음에 즉각 대답했다.
"폐하의 부름을 받고 입궁(入宮)한 사마의(司馬懿)가 천자(天子)의 수레를 타고 이 전용 도로(專用道路)로 들어와서 옥계단(玉階段)으로 올라갔다고 하던데 맞는가?"
"아, 그러하옵니다." 중상시(中常侍)는 조진(曺眞)이 지난번 사마의)司馬懿)가 불려올 때의 상황(狀況)을 소상(昭詳)히 알고 묻는 바람에 사실(事實)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대답하였다.
그러자 조진(曺眞)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그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앞서가던 중상시(中常侍)는 뒤에서 따라오던 조진(曺眞)의 동향(動向)이 멈춘 것을 느끼고 뒤로 돌아섰다.
"아니? 대장군(大將軍). 어서 가시지요." 중상시(中常侍)는 불만(不滿) 어린 얼굴로 뒷짐을 지고 그 자리에 서있는 조진(曺眞)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러자 조진(曺眞)은,
"음! 나는 천자(天子)의 황숙(皇叔)이자, 병권(兵權)을 쥐고 있는 대장군(大將軍)인데! 그런데 나는 여기까지 걸어와야 하는 것이냐!" 하고, 사마의(司馬懿)와는 전혀 딴판인 영접(迎接)에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화를 내는 것이었다.
"아이고... 대장군(大將軍) 고정하십시오. 대장군(大將軍)처럼 고귀(高貴)하고 대범(大凡)하신 분이 어찌 그런 사소(些少)한 일로 이처럼 역정(逆情)을 내십니까? 대장군 가시지요..."
중상시(中常侍)는 조진(曺眞)의 노여움을 진정(鎭靜)시키려고 그의 비위를 맞춰주는 소리를 이뢰었다.
그러나 조진은,
"고귀한 사람이라...?" 하고, 말을 내뱉고는 못이기는 척 중상시(中常侍)를 따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진(曺眞)이 들어선 황제(皇帝)의 내실 바닥에는 많은 죽간(竹簡)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조진은 문득 사태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불려왔다는 판단이 들어 바닥에 엎드리며 입시(入侍)를 고하였다.
"폐하(陛下)! 찾으셨습니까?"
그러자 황제(皇帝) 조예(曺叡)는 화(火)가 동(動)한 쌀쌀맞은 어조(語調)로 대꾸한다.
"숙부(叔父), 옹양(壅凉)에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任命)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한데 어찌 아직까지 임지(任地)로 떠나지 않은 것입니까?"
조진(曺眞)은 채근(採根)을 받자 두 손을 맞잡아 올려 보이며,
"고정하십시오. 집안 일만 처리되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하고, 옹색(壅塞)한 말로 둘러대었다.
"처첩(妻妾)을 맞이하거나 가무(歌舞)를 즐기는 것 말입니까?" 조예(曺叡)는 조진(曺眞)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이 반문(反問)했다.
그러면서 조진(曺眞)이 차마 대답(對答)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진을 향해 돌아서며,
"숙부(叔父), 즐기는 사이에 변장에 큰 일이 났습니다." 하고, 노기 띤 소리를 내뱉었다.
"엇? 무슨 일이옵니까?" 조진(曺眞)은 금시초문(今始初聞)인 듯이 반문(反問)하였다.
그러자 조예(曺叡)가 죽간(竹簡) 하나를 조진(曺眞)의 앞에 내던졌다.
"직접(直接 )보십시오." 조진(曺眞)은 즉시(卽時)로 죽간(竹簡)을 펴 보았다.
그러자 조예(曺叡)가 문밖을 가리키며 말한다.
"촉(蜀)의 제갈량(諸葛亮)이 삼시만(三十万) 대군(大軍)을 이끌고 진창(陳倉)으로 가고 있습니다."
"제갈량(諸葛亮)이 미쳤군...!" 죽간(竹簡)을 손에 든 조진(曺眞)이 놀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어서,
"정말 미쳤어. 가정(街亭)에서 대패(大敗)한지가 얼마나 됐다고 다시 공격(攻擊)해 온단 말인가?" 하고, 주절대자,
자리에 좌정(坐定)한 조예(曺叡)가 정색(正色)을 하며 말한다.
"사실 가정(街亭) 전투는 사마의(司馬懿)가 공(功)을 세운 것이지, 숙부(叔父)와는 무관(無關)한 일이 아닙니까?"
조예(曺叡)는 이어서,
"숙부(叔父)는 사마(司馬) 가문(家門)을 경계(警戒)하라고 말만 했지 뭐 하신 것이 있습니까? 이런 상태(狀態)가 계속되면 사마(司馬) 가문(家門)을 저지(底止)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천하는 제갈량(諸葛亮)에게 넘겨주게 생겼습니다. 숙부(叔父), 옹양(壅凉)이 척박(瘠薄)한 곳이라서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알겠습니다. 안 가시겠다면 숙부(叔父)의 모든 권한(權限)을 사마의(司馬懿)에게 넘기겠습니다." 하고, 벼락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조진(曺眞)의 눈이 커지면서.
"폐하(陛下)!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지금 당장(當場) 옹양(壅凉)으로 가겠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촉군(蜀軍)을 몰아내 공(功)을 세우겠습니다." 하고, 놀란 소리로 부르짖었다.
"좋습니다. 사흘 안으로 옹양(壅凉)에 당도(當到)하여 촉군(蜀軍)과 맞서 싸우십시오. 그리고 또 다시 패한다면 이번에는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조예(曺叡)의 말은 그야말로 폭탄(爆彈) 주문이었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조진(曺眞)은 마지 못해 머리를 조아리며 명(命)을 받잡았다.
"아들 조상(曺爽)도 데려 가십시오. 이제 전장(戰場)을 누비면서 경험(經驗)을 쌓아야지요."
조예(曺叡)는 한 술 더 뜬 주문(注文)을 하였다.
"따르겠습니다...." 조진(曺眞)은 더 이상의 말문을 닫고 황제(皇帝) 조예(曺叡)를 향(向)하여 머리를 조아려 승복(承服)의 절을 하였다.
삼국지 - 371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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