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顯)은 일(日), 사(絲), 공(頁)의 합성자다. 평소 실[絲]은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화창한 햇살[日]아래에서는 선명하게 보이게 된다. 그래서 현(顯)은 '분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頁이 있으므로 '머리를 분명하게 한다'는 뜻이 되어 본디 머리에 꽂았던 '장식물'을 뜻했다. 즉,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함으로써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 그래서 顯은‘드러내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조그마한 것을 크게 드러내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현미경(顯微鏡)이며, 자신을 드러내어 과시하는 것이 현시(顯示),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 현저(顯著)이다.
한편 忠은 中과 心의 합성자다. 곧 '한가운데의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바른 마음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변치 않는다는 뜻과도 같다. 그것은 곧은 마음이기도 하다. 옛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 그러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마음이 中心, 곧 忠인 것이다.
따라서 顯忠이라면 '충성심을 드러내다'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무엇보다도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조되었다. 혹 충성을 다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충성심을 드러내어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곤 했는데, 현재 충남 아산에 있는 현충사(顯忠祠)가 그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국가에 대한 충절을 드러내기 위해 지은 사당인 것이다.
현충일(顯忠日)은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는 기념일. 매년 6월 6일이며,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국가가 존재하는 데에는 상당한 전란을 거치게 되어 있고, 모든 국가는 그 전란에서 희생된 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2년도 채 못 되어 6·25동란을 맞았고 이에 40만명 이상의 국군이 사망하였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된 뒤 3년이 지나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자 정부는 1956년 4월 대통령령 제1145호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을 개정하여 매년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여 공휴일로 하고 기념행사를 가지도록 하였는바, 현충기념일은 통상적으로 현충일로 불리다가 1975년 12월〈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어 공식적으로 현충일로 개칭되었다. 국가보훈처가 주관이 되어 기념행사를 행하는데 서울에서는 국립묘지에서 행해진다. 추모대상은 6·25동란에 전사한 국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의 넋을 기리고 있다.
현충일이 단순히 선열의 넋을 기리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켜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이 각자가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행하여야 할 사명을 새롭게 하고, 국민 전체의 화합을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국립현충원(국립묘지)을 참배할 분을 위해 현충원의 주요 시설과 묘역 등의 내력에 대해 적어본다.
▲ 국립 현충원의 주요 시설
(1) 현충문
현충문은 현충탑으로 들어 가는 문이다. 현충문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사당전과 극락전을 본 떠 세워졌으며, 충신과 효자는 호랑이가 지켜준다는 전설에 따라 호국영령을 지켜줄 것을 기원하는 뜻에서 입구 좌우에 호랑이상을 건립하였다. 현충탑을 참배하려는 사람은 우선 현충문에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집례자의 안내로 참배를 하게 된다. '70. 6. 22.에는 북한의 무장간첩이 참배요인 암살을 위해 현충문을 폭파하려고 시도하다가 조작 미숙으로 미수에 그친 채 폭발물을 설치하던 1명의 괴한은 시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폭사하고 나머지 1∼2명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국립묘지 창설이래 가장 큰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던 사건이다.
(2) 현충탑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충의와 위훈을 추앙하고자 세워진 탑으로 민족의 성역인 국립묘지를 상징하고 있다. 탑 내부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당시의 전사자중 시신을 찾지 못한 10만 3천여 호국용사들의 위패와 시신은 찾았으나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5천 7백여 무명용사 유해를 모시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 나라를 공식 방문하는 외국 원수와 귀빈들도 이 곳을 참배하게 되며 호국영령의 얼을 기리는 국민들의 참배 행렬은 그치지 않고 있다.
또한 탑 앞에는 이은상 선생께서 지으신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는 내용의 헌시가 있다.
(3) 충렬대
충렬대는 애국지사묘역, 임정요인묘역,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진 선열의 얼을 포괄적으로 추모하는 제단이다. 이곳에는 구한말의 의병을 위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항일무장투쟁이나 계몽운동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 순국선열 350여 위가 봉안되어 있다. 충렬대는 '71. 11. 17. "후손 없는 선열의 제단건립위원회"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영령들을 수호하는 뜻으로 높이 5.13m, 가로 4.84m, 폭 1.5m의 화강석에 용의 모습이 조각되었고 그 좌우측 전방에는 높이 2.12m의 마신상(馬神像)이 세워져 있다. 제단 전면 상단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민족의 얼" 이란 글이 오석에 새겨져 있으며 제단 후면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이은상 시인의 헌시가 있고 제단 앞에는 청동 향로가 놓여 있다.
"조국과 겨레는 나의 사랑
나의 영광
나의 힘
나의 생명
그를 위해 짧은 일생을 바쳐
그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
(4) 육탄10용사 현충비
이 비는 하단의 기단석 위에 5층의 탑을 쌓은 듯한 형상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데, 제일 하단에는 비문, 그 위에는 THE TEN BRAVE WARRIORS라는 영문표기, 그 위에는 10용사의 계급과 성명 그리고 제일 상단에는 '육탄10용사 현충비'라는 비명이 각각 새겨져 있다. 비의 높이는 6m, 폭은 상단 0.5m, 하단 2.3m, 바닥면적 89.8㎡이다. 이 비는 육탄10용사가 산화할 당시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이 앞장서고 개성 독지가, 일반유지 등이 "10용사 현충비 건립위원회" 를 조직하여 건립한 비로서 1955년 3월 중순 국방부의 지원으로 기초 공사에 착공하여 동년 4월 하순 준공하고 5월 4일 전몰일을 기하여 제막하였다.
(5) 유격부대 전적 위령비
유격부대 전적 위령비는 한국전쟁중 북한지역 곳곳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유격작전을 전개하다가 산화하신 유격 부대원들의 고귀한 희
생과 빛나는 업적을 기리고 그 영령들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국방부 주관 하에 1977. 5. 30. 준공하고, 동년 6. 2. 제막한 비로서 동쪽 순환도로 입구(솔냇길 끝)에 세워져 있다. 비의 중앙에는 유격 부대원들의 투쟁 모습을 그린 조각이 있고 조각 위로는 당시 유격 부대원들이 쓰던 것과 같은 철모와 소총이 걸려 있다. 비의 전면 좌측에는 유격부대 약사, 우측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한국 반공유격대 참전부대명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철근 콘크리트 골조에 화강석과 판석을 붙여 건립했으며 높이 4.2m, 폭 8.4m, 화강석 바닥 면적은 165㎡로 남산미술원 이일영 원장이 설계 제작한 것이다.
(6)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6.25전쟁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김춘식 등 48위의 무명용사 유해가 반구형 석함 분묘에 안장되어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여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자 약 5만 명으로 추산되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자진 구국전선에 참전하여 포항지역을 비롯한 각 지구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그 중 7,000여명이 전사하였으나 무덤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 곳에 안장된 48위는 당시 포항전투에서 중대급 규모의 학도의용군이 공산군 전초대와 분투하다가 전몰하여 당시 포항여자중·고등학교 부근에 가매장되어 있었으나 '63. 9. 24. 국무회의에서 이들을 국군묘지에 안장할 것을 의결하여 '64. 4. 25. 대한학도의용군 동지회 주관 하에 국군묘지 서쪽1번 묘역에 안장하였다가 68년 4월 현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 이장하게 되었다.
이 탑은 3개의 아치형의 문형으로 구성되어 중앙의 큰 문형 속에 무명용사탑이 세워져 있고 탑 뒤쪽 중앙에는 사각의 화강암 석함으로 된 반구형의 분묘가 설치되어 있다. 이 탑의 석재는 오석이고 그 표면은 황등석이며 아치형 문형은 화강석이다. 탑의 높이 3.6m, 폭 8m, 중앙 문형의 높이 5.5m, 좌우 문형의 높이 3m, 화강석 바닥면적 165㎡이다.
탑의 전면에는 "무명용사영현,"후면에는 "이곳에 겨레의 영광인 한국의 무명용사가 잠드시다"
단기 4288년 7월 15일 대한민국
단의 앞쪽 제단 전면에는
"학도의용군의 묘" 라고 각각 새겨져 있다.
이 탑은 1954. 10. 30. "무명용사비" 로 건립하였으나 1956. 1. 16. 대표 무명용사 1위를 이 비에 안장하면서 "무명용사탑" 으로 개칭하였다가 1968년 4월 대표 무명용사 1위를 납골당으로 이장하고 무명용사탑을 현 위치로 이설한 후 학도의용군 무명용사 영현 48위를 이 탑 뒤쪽 반구형 석함에 이장함과 동시에 제단도 이곳으로 옮겨 "학도의용군의 묘" 라 표기하고 명칭도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으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7)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
이 비는 재일학도의용군의 고귀한 희생을 추모하고 그들의 넋을 위무코자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에서 '77. 6. 6. 건립, '90. 12. 15. 개축한 높이 160㎝, 폭 200㎝, 바닥면적 112㎡의 비로 서쪽 11번 묘역(재일학도의용군 묘역)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헌시가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이곳에 안장된 재일학도의용군 50위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 내나라 구하려고
피를 뿌리신 젊은이들
역사의 책장 위에
꽃수를 놓으셨네
조국의 포근한 흙속에
웃으며
잠드옵소서 "
(8) 경찰충혼탑
이 탑은 탑신 중앙으로부터 양쪽으로 두 팔을 벌린 듯한 날개를 두어 민주경찰의 따뜻한 보호를 나타내고, 탑신 하단에는 경찰 활동의 상징인 신, 의, 용의 3인상을 세워 경찰의 충성과 봉사정신을 나타내었다. 탑 좌측에는 애민상, 우측에는 호국상을 새겼으며 양쪽 날개 벽면에는 조국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해 온 경찰의 위대한 업적을 조각으로 부각하였다. 또한 입구 양측에는 전설의 수호신인 호랑이상을 세워 영령들을 보호하게 하였고, 탑신 내부에는 위패를 모실 수 있는 봉안실을 두었다. 이 탑은 바닥면적 112㎡, 중앙 화강석 탑 높이 13m, 3인상 높이 3.5m, 좌우 동상 높이 3m, 벽면 폭 3.5m이고, 탑 하단 전면에는 이은상 선생이 지은 헌시가 새겨져 있으며 탑신 중앙에 "경찰 충혼탑" 이란 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다. 원래 이 탑은 부평 경찰전문학교 교정에 건립하였던 것을 1967. 5. 30. 현 위치로 이설 하였다가 1979. 5. 22. 중건한 것이다.
(9) 충혼승천상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위훈을 기리며,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은 유한한 인생을 무한한 영광과 안식에 이르게 함을 상징하는 탑으로 1992. 10. 10. 준공되었으며 바닥 화강석 원둘레석의 직경이 13m이며 높이가 15m인 동상이다.
(10) 현충선양관
가. 현충관(영화관)
1980. 12. 31. 현충관으로 건립 사용하던 이 건물은 1988. 3. 29. 현충선양관 개관 이후 국립묘지 소개를 겸한 교육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건물은 연건평 445평의 철근 콘크리트 기와조 2층 건물로 기둥, 주춧돌, 지붕 등은 고전 한국식이고 기타 부분은 현대식으로 된 절충식 건물이며 건물 내부에는 410(1층 318, 2층 92)석의 좌석이 설치되어 있다.
나. 사진전시관
사진전시관은 조국수난의 역사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활동상이 담긴 사진과 북한물자를 전시한 곳이다. 1991. 11. 30. 건립된 이 건물은 연건평 421평의 철근 콘크리트 기와조 2층 건물로 기둥, 주춧돌, 지붕 등은 고전 한국식이고 기타 부분은 현대식으로 된 절충식 건물이다.
다. 유품전시관
유품전시관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생존시 사용하던 유품과 전리품이 전시된 곳이다. 1990. 8. 31. 건립된 이 건물은 연건평 437평의 철근 콘크리트 기와조 2층 건물로 기둥, 주춧돌, 지붕 등은 고전 한국식이고 기타 부분은 현대식으로 된 절충식 건물이다.
(11) 충성분수대
충성분수대는 국가의 자유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밑거름이 된 영령들의 위훈과 그 정신을 상징하여 1976. 11. 5. 건립된 것으로 화강암 좌대를 상·중·하단으로 구분하고 그 밑에는 두 마리의 청룡 동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단의 태극기를 받쳐들고 한 손으로 횃불과 월계수를 들고 있는 남녀상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국가를 상징하고, 중단의 남녀노소상은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노력하며 애국 애족하는 국민을 상징하였고, 하단의 육·해·공군, 해병대, 예비군 등 6인의 동상은 국가와 국민의 수호에 충성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위훈과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이 분수대는 높이 13m, 원형직경 31.2m에 60개의 노즐로 구성되어 있다.
(12) 육사7기 특별 동기생 추모탑
이 탑은 6.25전쟁 중 구국전선에 뛰어들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육사7기 특별동기생 전몰용사의 숭고한 넋과 거룩한 희생을 위무, 추모하고자 생존한 동기생들이 1963. 8. 17. 세운 탑으로 1986. 10. 12.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개축시 탑안에 동기생들의 유품과 기념품, 사진 등을 함께 봉안하였다. 이 탑은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뒤편 공원에 위치하고 있는데 오석기단(높이 1.3m)위에 화강석 좌대(높이 0.6m)를 쌓고 좌대 위로 철근 콘크리트에 화강석 판석을 붙인 탑신(높이 6m)을 세운 후, 탑신 꼭대기에 원형의 고리를 밟고 양팔을 벌린 채 늠름하게 서 있는 군인동상(직경 3m)을 세웠다. 탑 하단 전면에는 6.25때 쓰던 철모가 놓여져 있고, 탑 후면에는 육사7기 특별동기생 203명의 명단과 다음과 같은 헌시가 새겨져 있다.
"오랑캐 무찌르며 돌진하던 그대들
이 나라는 건져 놓고 저는 정작
못 돌아오고 충혼이 한 줌의 흙으로
이 기슭에 누었나
그대들 푸른 넋이 가슴마다 살아
있네 못이룬 그 바램을 오늘도
되새기며 아쉽고 그리운 정으로
돌 하나를 세운다."
(육사7기 특별 동기생 추모탑)
(13) 포병장교 충혼비
6.25전쟁중 포화를 뿜어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전몰 포병장교가 340명에 이르렀으나 이들중 88위만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 252위는 그 유해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이들의 충의와 위훈을 추앙하고자 "충혼비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포병 출신장교의 찬조를 얻어 '64. 6. 25. 포병장교 충혼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 비는 가로 2.8m, 세로 0.7m, 높이 1.6m이며 비위에 포를 얹고 비 전면 중앙에 동판을 두어 여기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포화를 뿜어 조국을 지킨
포병 용사들
고요히 잠드시라"
(14) 50년도 현지임관 전사자 추념비
6.25전쟁이 발발하자 창군 초기 지원 입대하여 군에 복무 중이던 많은 군인들이 현지 임관되었다. 이들은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으나 이들 중 377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순직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의 값진 희생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차 잊혀져 갔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50년도 현지 임관 생존 회원들은 전쟁중 순국한 동기 회원들을 영원히 추모코자 비를 건립키로 하고, 생존 동기생과 유족들의 성금을 접수하는 한편, 동 비를 국립묘지 내에 세울 것을 추진하였다. 1971. 9. 1. 동비의 건립에 착수하여 동년 10. 20. 준공하고 현지 임관 전사자 추념비라 명명하였으며, 91. 9. 26. 개축하였다. 이 비는 높이 7m의 철근 콘크리트 2개로 된 아치형으로서 각 아치형 날개의 높이가 1.7m이고 비 아래쪽 기단은 폭이 6m이며 바닥 면적은 21.5㎡ 로 이 비는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좌측 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임들은
나라의 부름을 입어 창군하고
순국으로
침략을 막아
청사에 그 충의를 새기니
오늘은 겨레의 번영
내일은
조국의 통일을 보리라"
(15) 호국종
이 종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1973. 5. 8. 재향군인회에서 회원들의 성금으로 제작하여 국립묘지에 기증한 종이다. 이 종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호국종" 이라 명칭하고 썼다. 이 종은 현충문 오른쪽 아람길 입구에 있는 6각형 종각 내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 종각은 국방부에서 건립한 건물로 6개의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지붕에는 기와를 얹은 고전 한국식 건물이며, 종각의 면적은9.2㎡이다. 이 종은 매년 6월 25일 재향군인회에서 실시하는 추념행사 후에 타종하는데 타종 횟수는 1950. 6. 25.를 기준으로 경과한 햇수만큼 타종하다 1995년 부터는 6.25 참전 16개국, 의무지원 5개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22개국을 상징하는 의미로 22번 타종을 하고 있다.
(16) 옥외 전시장
옥외 전시장은 90년에 411평의 녹지에 조성하여, M-47탱크, 수륙양용차 T-6(택산), F-86D(쎄이버) 등 6.25전쟁 당시 사용하던 장비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T-6 항공기는 1950. 5. 14. 국민의 헌납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10대의 건국기 중 하나로 6.25 직후에는 전투기 겸 조종사 훈련기로 사용되다가 1962. 12. 1. 퇴역한 항공기이다.
▲ 묘역
(1) 사병묘역
이곳에는 하사관·병, 6급 이하의 군무원 등 48,488위가 안장되어 있다.
6·25 전쟁 이전의 전사자는 270여 위이고, 6·25 전쟁중 전사 순직자는 4만여 위로 동서측 묘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최초 안장자는 1957. 4. 2. 서쪽 8번 묘역에 안장된 육군하사 강덕수 등 192위이다. 휴전 이후의 대간첩작전 전사자와 순직자는 8천여 위이며 파월 전사자는 4,341위로 주로 동쪽 5, 8번묘역, 서쪽 3, 4, 14, 16, 21, 23번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들은 64년부터 73년까지 십자성부대, 비둘기부대,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의 용사로 파월, 젊음을 바쳐 6·25 참전국에 대한 보은을 하였고 자유와 평화수호에 크게 기여한 분들이다. 이곳 사병묘역에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6·25 전쟁 당시 백마고지 3총사였던 강승우 소위, 안영권 일병, 오규봉 일병을 비롯하여 양병수 상사, 이상득 하사, 훈련중 자신을 희생하여 부하의 생명을 구한 이원등 상사 등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는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2) 장교묘역
이곳에는 대령 이하의 장교, 5급 이상의 군무원 등 4,518위가 안장되어 있다. 6·25 전쟁 이전인 1949. 9. 26.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중 적탄에 전사한 육군중위 양백호(서쪽 5번 묘역)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6·25 전쟁 전후와 월남전(305위) 당시 순직한 분들이 모셔져 있다. 이곳 장교묘역에는 월남전의 영웅인 이인호 소령을 비롯하여 강재구 소령, 김경진 소령, 권영주 중위 등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는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묘역에는 월남전 때 종군기자였던 백광남 기자와 6·25 때 피난민을 구출하다 순직한 김재현 철도기관사도 안장되어 있다.
(3) 장군묘역
장군묘역은 제1, 2, 3 묘역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군 장성 355여 위가 안장되어 있다. 군별로 보면 육군 265위, 해군 51위, 공군 39위이다. 6.25전쟁중 전사자는 '50. 9. 27. 경남 하동에서 전사한 채병덕 육군중장, '50. 11. 2. 함흥상공에서 적기추격 임무 수행중 전사한 박범집 공군소장, '50. 10. 29. 북진중 평안북도 묘향산 전투에서 전사한 박광혁 육군준장 등 14위이다. 제1묘역에는 육·해·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바 있는 채병덕 장군을 비롯하여 288위의 원로 장군들이 모셔져 있고, 제2묘역에는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장군, 전 국방부장관 임충식 장군, 전 육군참모총장 김종오 장군, 전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전 국방부장관 신태영 장군, 전 총무처장관 심흥선 장군 등 6위가 모셔져 있으며, 제3묘역에는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이종찬 장군을 비롯하여 김홍한 육군대장 등 61위가 안장되어 있다.
(4) 육탄10용사 묘역
남과 북이 38선을 경계로 대치된 상황에서 '49. 5. 4. 북한 공산군에게 불시에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탄을 안은 채 적 진지에 뛰어 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산화한 10명의 용사가 잠들어 있다. 10용사는 서부덕 소위,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박창근 상사로 서쪽 5번 묘역 맨 앞줄에 안장되어 있다. 이들은 '48. 11월 국군 제1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 제11연대(연대장 최경록 대령)는 수원에서 문산으로 이동, 미군으로부터 고랑포에서 청단에 이르는 38선 경비구역을 인수해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김종훈 소령의 2대대는 38선 전면인 청단, 연안, 백주, 송악산 일대에 분산 배치되어 진지구축과 경비를 맡고 있었다.
북한은 49년 4월 남천점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제1사단 제3연대 병력 1천여 명을 송악산 후방에 집결시켰다가 5월 3일 미명을 기해 송악산 능선
을 따라 기습 남침, 38선 남방일대의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아군은 실지(失地) 탈환을 위해서 10개소의 토치카에 대한 파괴가 무엇보다도 시급하며 이를 위해서는 육탄 공격만이 최선의 길이라 판단했다. 이에 따라 사단 시설장교인 박후준 소위의 고안으로 81미리 박격포탄에 폭약을 장치하여 이를 갖고 육탄 공격을 감행토록 작전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성훈 소위의 제1소대는 소대장을 비롯한 전원이 특별 공격에 가담하겠다고 자원했다. 그러나 인원 제한이 불가피하여 지원순으로 선발, 서부덕 이등상사를 공격대장으로 김종해, 윤승원, 이희복, 박평서, 황금재, 양용순, 윤옥춘, 오제룡 9명의 용사가 선발돼 목표 지점을 향해 출발했다.
용사들은 분담된 고지를 향해 3백미터 지점까지 포복으로 접근하는 한편 대기하고 있던 부대에서는 영등포에서 급히 올라온 노재현 대위의 포병 제6대대를 비롯한 모든 화력이 동원되어 지원 엄호사격을 가했다. 이에 힘입은 특공용사들은 적의 완강한 저항과 기관총 사격으로 입은 총상에도 불구하고 목표 지점까지 기어이 접근, 몸을 던져 적의 진지로 뛰어들었다. 순간 하늘을 뒤덮는 폭음·포연과 함께 적의 토치카는 박살나고 말았다. 곧 이어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김종훈 소령의 공격부대는 공격을 감행, 비둘기고지, 유엔고지 등 주요 고지를 무난히 탈환했다. 이에 앞서 중화기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가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해 단신으로 수류탄 7개를 들고 돌진하다 전사, 앞의 9용사에 박창근 하사를 합해 "육탄10용사"라 부르게 됐다.
(5) 재일 학도의용군 묘역
6.25전쟁 당시 자진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전사자 52위가 안장되어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거류하는 청년학도들은 동경, 대판, 구주, 북해도 등 각 지방에서 조국의 방위를 위한 의용군을 조직하는 한편 당시 미 극동지구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도움을 받아, 동경 및 대판지역은 미 제1기병사단에서, 구주 및 기타 지역은 미 제3사단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50. 9.15부터 10.18일까지 641명이 5차에 걸쳐 현해탄을 건너와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남긴 채 135명이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곳에 안장된 52위는 전쟁 당시 일본 동경 대행사에 일시 안치되어 있었다가 그후 재향군인회 주일지부로부터 이들 영현의 국군묘지 안장 요망이 있어, 국방부 주관 하에 '62. 11. 8. 서쪽11번 묘역에 안장하고 당시 찾지 못한 83위는 위패로 봉안하였다.
(6) 경찰묘역
서쪽 23, 26, 27번 묘역에는 전사 순직한 경찰관 808위가 안장되어 있다. 6.25전쟁 이전의 전사자는 '48. 10. 20. 여수·순천사건 당시 전사한 한문경 총경 등 69위이며 6.25전쟁중 전사자는 '51. 9. 19. 전남 구례에서 토벌 작전중 전사한 김기옥 경위 등 439위이고 6.25전쟁 이후의 전사자는 '75. 6. 28. 전투 경찰대 소속 이무석 경사 등 300위이다. 경찰관으로 최초 안장자는 무장간첩과 교전중 전사한 계용훈 경위와 진덕수 경사로 '65. 7. 21. 서쪽 27, 23번 묘역에 각각 안장되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바친 경찰관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경찰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7) 임시정부요인 묘역
대한민국 임시정부 총장급(현 장관급) 이상을 역임한 순국선열 16위가 안장되어 있는 묘역이다.
-임정요인 역임 직책
박 은 식 (2대 대통령)
홍 진 (국무령, 법무총장)
이 상 룡 (국무령)
양 기 탁 (국무령)
신 규 식 (외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 백 린 (군무총장)
김 인 전 (학무총장, 의정원장)
김 동 삼 (의정원의원, 서로군정서 참모장)
오 영 선 (법무총장)
박 찬 익 (외무총장, 법무총장)
이 유 필 (내무총장, 재무총장)
황 학 수 (생계총장, 의정원의원)
지 청 천 (군무총장, 정의부총사령)
조 경 한 (의정원의원)
손 정 도 (의정원의장)
이 강 (의정원의장)
(8) 애국지사 묘역
애국지사 206위가 안장되어 있는 묘역이다. 이중에 의병전쟁과 무장투쟁에 주력한 선열은 관동창의 대장으로 13도 의병사령관이 되어 서울 탈환작전
을 진두 지휘한 이인영,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를 두려워 하지 않고 필마 단창으로 적진을 누빈 서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지청천, 김경천 등과 함께 삼천으로 불리웠던 신팔균 등 96위이다.
그리고 의열투쟁에 주력한 선열은 20년 상해 의열단에 가입 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한국인의 의기를 높이고 순국한 김상옥, 노인동맹단 대표로서 19년 9월 3대 총독 사이또오 부임시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 05년 노령으로 건너가 안중근과 같이 천여 명의 의병을 양성하였고 이등박문 주살사건에 직접 참여하였던 우덕순, 한국정부의 친일 외교고문 미국인 스티븐스가 본국으로 귀국하자 동포들의 울분을 대신하여 암살한 장인환, 전명운 의사 등 26위이다.
또한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은 이종일, 이필주, 권병덕, 라인협, 유여대 등 민족대표 15분을 포함하여 30위이며,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한 선열은 독립협회를 창설, 만민평등을 주장하였고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서재필 박사,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민족 자존을 내세웠던 주기철 목사 등 8위이며,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23위도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묘역에 있는 무후선열제단은 독립운동중 순국하고 후손이 없거나 시신을 찾지 못한 선열 131여 위를 위패로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는 기미년 3.1독립운동의 횃불을 전국 방방곡곡에 비추었던 유관순 열사, 고종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였던 이위종, 이상설 열사,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던 홍범도 장군과 정의부 총사령 오동진 장군, 정인보, 엄항섭, 조소앙 등 납북된 독립유공자 15위도 있다.
이 제단은 '75. 8. 15. 광복 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후손없는 선열의 건립위원회"(대표 이은상)에서 묘소도 없고 후손도 끊어진 선열의 위패를 안치하고자 국고 보조를 받아서 건립하였다. 이 제단은 철근 콘크리트 슬라브조 단층으로 가로 19.6m, 세로 4m, 높이 4.5m, 내면적 85.14㎡이다. 위패는 3층 계단에 모셔져 있으며 중앙에는 선열을 추모하기 위한 제단과 향로가 설치되어 있고 후면 벽에는 피리를 불면서 승천하는 선녀상이 입체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제단의 문은 79년도에 설치되었으며 청동제 미닫이 식으로서 십장생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이 묘역에는 외국인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에 공로가 현저한 프랭크.W.스코필드 박사도 안장되어 있다.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계 캐나다인으로서 1916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 '19. 3. 1. 기미 독립선언이 있자 파고다 공원에서 한국인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는 광경을 촬영하여 국내외에 알리는 등의 활약으로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기까지 하였다.
박사는 학생과 죄 없는 부녀자들까지 마구 잡아가는 일본 경찰을 보고 일본 경찰국장을 방문하여 수많은 제자와 시민들을 석방시키기도 하였으며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의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하는 등 음양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어서 여러 차례 구속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다시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68년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임종시에는 "생전에 정든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이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박사의 유언을 존중하고 생전의 업적을 추모하며 의결하여 '70. 4. 16.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9) 국가유공자 묘역
나라의 발전과 민족중흥을 위해 몸바친 국가유공자 61위가 제1, 2, 3묘역으로 나뉘어 안장되어 있다.
제1묘역에는 '83. 10. 9. 북한의 만행으로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에서 산화한 순국 외교사절 17위와 장택상, 허정, 이은상, 이선근 박사 등 39위가 안장되어 있으며, 제2묘역에는 망국의 원한에 불타 이역만리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민족의 혼을 일깨운 철기 이범석 장군, 항일 독립운동과 건군 및 국가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홍일 장군,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등 14위가 안장되어 있고, 제3묘역에는 '68. 1. 21. 청와대를 폭파할 목적으로 잠입한 북한의 무장공비를 격퇴하다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과 북한의 항공기 납치 기도에 자신의 몸으로 폭탄을 덮쳐 승객을 구출하고 순직한 대한항공 전명세 기장과 6.25당시 베티고지 전투의 영웅 김만술 대위 등 4위가 안장되어 있다.
이중 민족시인 이은상은 충무공의 일대기를 연구 보급하여 한국인의 긍지를 찾게하고 '무상', '민족의 맥박', '봄처녀', '가고파' 등 시와 저서를 통하여 민족혼을 불러 일으켰으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까지 우리말, 우리글 지키기에 일생을 바쳤다. 조만식 선생은 항일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국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물산장려운동 등 애국 계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해방후 조선민주당을 창당, 통일국가 건설을 위하여 김일성 공산당과 맞서 싸운 민족 지도자였다. 주시경 선생은 우리말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조선어문 동지회를 조직, 일생동안 오로지 우리말 연구에 몸바쳐 문법과 맞춤법을 가다듬고 한글 보급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외국인으로 대한민국에 공로가 현저한 강혜림, 위쉬팡 종군화교 두분도 국가유공자로 안장되어 있다. 강혜림(姜惠霖) 열사는 중국 화교로서 평양에 거주하여 오던 중 50년 11월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자 자진하여 우리 육군 제1사단 제15연대에 종군, 적정수색과 포로심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51. 2. 2. 경기도 과천지구에서 전사하였다. 열사의 유해는 동지들에 의해 부산 화교 소학교에 임시 안치되어 있었는데 중국 대사관과 전우 화교들로부터 국군묘지에 안장해 줄 것이 요청되어 정부는 '64. 11. 13. 제110회 국무회의에서 안장할 것을 의결, '64. 12. 12. 서쪽 19번 묘역에 안장하였다. 열사는 생전의 공적으로 '59. 6. 1. 은성화랑무공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화교의 사기 앙양과 우방국 유대 강화를 위하여 우리 전몰 용사와 같은 대우로 안장하게 된 것이다.
위쉬팡(魏緖舫) 열사는 신의주에 거주했던 화교로서 45년 중국 안동성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자유중국군 대위로 근무하던 중 48년 국공내전에서 자유중국이 본토를 철수하여 대만으로 퇴각하고 만주지역이 공산화되자 신의주에 귀향후 평양근처 장산탄광 광부로 취업, 한·중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50. 10. 국군 평양 진격시에는 보병 제1사단 수색대에 편입, 적정수색과 첩보활동을 하고 중공군 포로심문 등을 실시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휴전 후에는 한의사로서 극빈 환자 무료진료, 장학사업 등 국가사회발전에 기여하다 '89. 6. 29. 세상을 떠났으며, '89. 12.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90. 3. 20. 서쪽 24번 묘역에 안장되었다.
(10) 국가원수묘소
가, 리승만 대통령 내외 묘소
리승만 대통령은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사상과 민족 계몽에 투신하다가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투쟁 외교활동을 하다가 광복과 동시에 귀국하여 초대 대통령이 된 후 정부 수립과 반공체제 확립에 많은 공헌을 남겼으나 4.19학생의거로 하야(下野)하고 미국으로 망명 '65. 7. 19. 하와이에서 서거하여 동년 7. 27.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고 이 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92. 3. 19. 서거하여 3. 23. 가족장으로 이곳에 합장되었다.
나. 박정희 대통령 내외 묘소
박정희 대통령은 '79. 10. 26.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는 '74. 8. 15.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의 흉탄에 서거하여 8. 19.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