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을 무공방(無孔房)이라고도 한다. 4면이 모두 벽인 방에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최소 3개월부터 3년 내지 6년 동안 면벽참선하는 것을 ‘무문관(無門關) 수행’이라 한다. 무문관(無門關)은 말 그대로 ‘문 없는 선방’을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문은 있으나 스님이 수행하는 동안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다. 무문관에서 바깥세상과 통하는 문은 밥그릇을 넣고 빼는 공양구가 유일하다. 스스로 약속한 수행기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모든 일상생활을 선방 안에서 해결한다. 불가의 전통인 무문관 수행은 생사를 넘나드는 혹독함이 특징이다. 독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벽참선을 계속한다. 묵언은 필수로, 꼭 필요한 의사소통은 하루 한번 공양이 들어올 때 필담으로 한다. 무문관 수행은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과 함께 불가에서 가장 어려운 수행법으로 꼽힌다. ‘무문관’이란 중국 남송 중기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가 쓴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책이름에서 비롯됐다. <무문관> 책의 원명은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다. 혜개 선사에 의해 1228년 씌어진 <무문관>은 고인(古人)들 선록(禪錄)에 있는 공안 가운데 잘 알려진 48칙(則-항목), ― 48개의 공안(화두)을 가려 뽑아서 해설한 것으로 <벽암록>과 함께 선문의 대표적 저서로 꼽힌다. 이 책은 경전과 부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교학의 가르침 대신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독창적인 수련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공안을 알기 쉽게 풀이한 선 입문서로 그 간결함과 명료함으로 인해 선서(禪書)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무문관>에는 무문 선사 자신이 말했듯이 전혀 군말이 없다. 골수를 찌르고 가슴에 파고드는 짤막한 언구 속에 부처님 정혼이 넘쳐 있고 생명력이 팽팽하다. 이에 백장야호(百丈野狐), 조주구자(趙州狗子), 구지수지(俱肢竪指),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등 유명한 공안이 실려 있다. 무문관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집착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결단을 내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집착을 한순간에 끊어버리는 결단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고, 집착이 사라진 그 자리에 자신의 자유로운 생각을 마음대로 펼치라는 것이다. <무문관>의 첫 문장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 : 큰 길에는 문이 없으나 천차유로(千差有路) : 천 개의 다른 길이 있으니, 투득차관(透得此關) : 이 관문을 꿰뚫을 수 있다면 건곤독보(乾坤獨步) : 하늘과 땅을 홀로 걸으리. 여기서 ‘관(關)’은 빗장, 통하는 문, 그런 뜻인데, 원래 관문(關門)은 통과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결국 ‘관(關)’이라는 새로운 관문을 설치하고 봉쇄해버림이다. 문을 닫아걸고, ― 폐문정진(閉門精進)하는 무문관 수행법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달마(達磨) 대사의 면벽 9년이 시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의 토굴 수행 등이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문관’이 하나의 보통명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65년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에 무문관 선원이 개설되면서부터다. 1964년 제선(濟禪, 1912~?) 스님은 그의 도반이자 사제인 정영(瀞暎, 1923~2007) 스님과 도봉산 망월사(望月寺)에서 정진하다가 무문관 설립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야기를 들은 정영 스님은 ‘바로 이것이다’며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그로부터 주선은 오히려 정영 스님이 천축사 주지가 돼 추진을 하고, 1965년 하안거부터 부처님 설산고행을 따라서 제선 스님 혼자 6년 무문관 결사에 들어가자, 정영 스님도 동참했다. 따라서 제선, 정영, 이 두 분이 우리나라 무문관 수행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는 한국불교사 아니 세계 불교사에 일찍이 유래를 찾기 힘든 대역사였다. 1960년대 하루 한 끼 해결하기도 힘든 어려운 사찰 형편이었지만 이후 여러 스님들이 들어와서 불퇴전의 각오로 정진했다. 세간의 이목이 모두 천축사 무문관에 집중됐다. 종단도 어려움이 많고 정화 후 원성의 목소리도 높아갈 때였지만 무문관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환희에 찼다. 그만큼 무문관은 모두의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그 중심인물이 제선 스님이었다.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받아 6년 결제 2회 차를 마친 후 79년까지 100여명의 수좌들이 참여했지만 기한을 제대로 채운 스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너무나 규칙이 엄했기 때문에, 당대의 선지식들만이 이름을 남겼을 정도다. 당시 수행 참가자 가운데 알려진 스님은 관응(직지사 조실), 도천(태고사 주석), 구암(하남 광덕사 주석), 원공(천축사 주석), 범어사 금오선원과 강원에 주석했던 대강백 지효 스님 등이다. 조계종 명예 원로의원인 관응(觀應, 1910~2004) 스님은 천축사 6년 면벽수행을 마친 후 당대 최고의 강백이자 선승으로서 직지사 천불선원 조실로 후학들을 제접했다. 역시 조계종 원로의원인 도천(道川, 1910~2011) 스님은 대둔산 태고사에서 40년간 두문불출하며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백장청규를 몸소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남 광덕사의 구암(九巖) 스님은 66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후 제방 선원에서 참선만 한 절구통 수좌로서, 모든 소임을 마다하고 작은 절에서 수행에만 매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축사 무문관 마지막 수행자인 원공(圓空, 1945~) 스님은 23년간 1년의 절반 이상을 꼬박 만행(기별도 전하지 않은 채)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차를 타지 않고, 갈아입을 옷 두벌만을 지닌 채 끝없는 만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산에 도라지를 심는 사람들’과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도 했고, 북한동포 돕기 운동도 벌여왔다. 스님은 2002년 2월 28일부터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출발해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개최 도시 20곳을 걸어서 순례하는 ’환경과 평화를 위한 평화도보 대장정’을 회향했다. 무문관을 건립하여 6년 폐관 정진했던 제선 스님은 천축사를 내려간 뒤 부산에 들렀다가 종적을 감춰 지금껏 전설처럼 떠돈다. 부산 범어사의 지효(智曉, 1909~1989) 스님이 1960년대 후반 천축사에 들어와 당신이 직접 무문관에 입방하고 이를 운영했다. 지금 천축사에서는 일반인과 불자들을 대상으로 24시간 무문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일생을 오직 수행정진으로만 일관한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維那, 승려들의 규율 책임자) 영진 선사의 수행에 관한 법문 들어보자. 『불교수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참선수행의 꽃인 깨우침은 스승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경전이나 조사들의 전등록을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누가 쥐어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추측이나 예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만일’(IF) 이나 ‘상대적’이라는 전제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절대적인 경지라야 한다. 한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선적(禪的) 깨우침을 단박에 낚아채야 하는 절묘한 타이밍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스승의 지도나 조사들의 가르침이 필요 없다 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스승과 제자가 팽팽한 긴장감 속에 혹독한 계행을 전제로 하는 수행과 탁마의 상호관계를 유지하되, 속박이나 구속이 있어서도 안 된다. 등대 불빛을 보고 야간 항해를 하지만 목적지 도착은 전적으로 선장의 능력과 책임에 달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푸른 물위에 떠있는 백조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지만, 그게 전부일까? 아니다. 그 물밑에서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 물갈퀴와 눈동자는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간화선도 겉으로 들어나 보이지 않는 혹독한 수행을 전제로 한다. ‘줄탁동기(啐啄同機)’란 말이 있듯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알 속의 새끼와 어미닭이 안과 밖에서 동시에 서로 쪼아서 껍질을 깨트려야 한다. 선수행도 스승의 열정적 지도와 편달에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제자의 혹독한 자기수양이 계합 할 때라야 가능하다. 알 속의 새끼가 보내는 미약한 신호는 어미만이 감지할 수 있으며, 어미가 알아채지 못하면 세상에 나올 수 없듯이, 성미 급한 어미 혼자 껍질을 쪼아댄다고 생명이 태어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무문관 수행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여기 실제 체험을 한 어느 신문기자의 글을 소개한다. 체험수기와 같아 실감나게 읽을 수 있다. 스님들이 행하는 ‘무문관 수행’과는 질적으로 다르지만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글이다. 『쉼도 정진도 오로지 자신 의지에 달려 ‘철커덕’ 걸어 잠근 문처럼 온갖 바깥세상으로 열린 마음 또한 일순간 정리가 됐다. 좁은 1.5평의 공간, 하얀 벽 사이로 뚫린 작은 창문만이 세상과 통하는 길이다. 항상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도, 하루 종일 빠져 있던 인터넷도 없다. 심지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조차 없다. 간간히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과 찌르레기 소리만이 동무가 되는 곳이 바로 무문관이었다. 바깥의 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의 문을 여는 ‘무문관’(無門關), 무문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뜨겁다. 선방 수좌 스님들이 용맹 정진하는 수행처라는 기존의 의미에서 최근에는 재가자들도 동참 가능한 개인 수행처로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제방 선원의 전통적인 무문관이 있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무문관, 혹은 개인 수행처가 다양하게 생겨나고 있다. 매일 매일 쳇바퀴처럼 일상에 매진하던 대중들에게 무문관은 수행을 하는 곳을 넘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을 통해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곳으로 각광 받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을 위한 무문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사단법인 행복공장이 운영하는 행복공장 홍천수련원이다. 행복공장 홍천수련원은 ‘내 안의 감옥’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행복공장 홍천수련원은 약 2550여 평의 부지 위에 관리동과 강당동, 체험동의 3개 건물로 구성돼있다. 이 중 체험동에는 32개 독방을 갖추고 있다. 일단 독방에 들어가면 밖에서 문이 잠긴다. 바깥과 연결된 유일한 곳은 숲이 보이는 창문과 작은 음식 반입구가 전부다. 프로그램은 가장 대표적인 ‘독방 24시간’을 비롯해 ‘금강 스님의 무문관’, ‘프리존 스테이’, ‘노지향의 유쾌한 감옥’, ‘황 신부의 내안의 감옥’ 등 다양하다. 48시간과 24시간, 7박 8일과 4박 5일 등 다양하지만 대부분이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교도소와 흡사한 건물 구조 행복공장 홍천수련원을 찾은 첫 인상은 마치 연수원 건물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적인 건물이 주는 인상이 뇌리에 남아있던 시간은 잠시 뿐이었다. 이른바 수감복인 푸른색 수행복을 입고 수감번호를 부여받고 운영실장의 뒤를 따라 체험동으로 향하자 조금은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철문으로 된 건물입구부터 가운데로 난 계단과 마주보게 된 각 방의 구조 등 체험동은 영락없는 교도소였다. 각방의 문에는 작은 배식구가 나 있었고 문고리 마다 자물쇠가 보였다. 교도소와 같은 구조여서일까. 건물 내부는 적막했다. 인기척이 없었으나 모두 각자의 방에서 수행 중이란 말을 들었다. 기자에게 배정된 곳은 207호였다. 행복공장의 내부시설은 단출했다. 방문 아래에는 밥이 들어오는 배식구가 있고, 문 옆에는 커튼으로 가려진 작은 화장실이 있다. 그 뒤로는 요가매트와 거울이 없는 세면대가 있으며, 작은 협탁 위에 차를 마실 수 있는 포트와 다기,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메모장과 펜이 전부였다. 메모장과 펜을 가져다 놓은 것은 떠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기록해 보라는 의미 같았다. 신기함도 잠시, 무문관에 들어서자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성인 남성 기준으로 가로 세 걸음, 세로 여섯 걸음 정도의 방에 갇힌 것이다. 평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기에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용하고 심심한 시간이 계속되자 이내 무료함이 몰려왔다. 이런 무료함을 달래고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앞서 수행현장에서 배운 다양한 수행법을 참조해 호흡부터 가다듬었다. 조금씩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지속되고 머릿속은 깨끗해졌다. 문제는 자세, 반나절 가량 앉아 있자 다리에서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이 저릿한 감각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내 몸의 감각에 집중이 됐다. 집중 속에서 다른 것들을 잊게 되는 순간,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작은 1.5평의 공간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 아닌 나를 해방하는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적막 속에서 진행되는 정진 방에 앉아 좌선에 빠진지 얼마나 지났을까. 오전 10시를 알리는 괘종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천장으로 나있는 스피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금강 스님의 법문이었다. 기자가 찾은 날은 금강 스님과 함께하는 무문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금강 스님은 행복공장 창립 초기부터 지도법사로 대중들을 이끌고 있었다. 현재는 연 2회 7박 8일 일정으로 폐관 수행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금강 스님의 무문관 프로그램은 매일 아침 108배와 법문, 개인 수행과 신청에 따라 개별수행면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스님은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여의고 현재 앉아있는 상태에서 소소영령한 자기 자신이 더 없이 소중한 존재임을 느끼고, 그 자신에게 집중해보라”고 강조했다.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을 토대로 1시간가량 진행된 금강 스님의 법문은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있어요. 생활 속에서 이러한 무의식들이 발현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과거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현재의 행동 속에 조금씩 무의식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죠, 이런 무의식을 벗겨보세요. 구름을 뚫고 올라서 환한 빛으로 비추듯이 화두를 들다보면 훤하게 모든 것이 내려다보입니다.” 스님은 홀로 앉아 수행하는 동안 일상생활에서 바깥으로 향했던 일종의 에너지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다며 평소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썼던 그 힘을 전환하는 것을 강조했다. 스님은 담담한 어조로 또 다른 화두를 건넸다. 죽비 소리와 함께 좌선은 이어졌고, 수련원 체험동은 다시 적막감이 감돌았다. 좌선 후에는 점심공양이 이어졌다. 점심공양은 각 방에 도시락으로 제공됐다. 창문으로 난 숲속의 산새가 동무여서 그럴까. 공양 배식동안 잠깐이나마 접하는 사람냄새가 반가웠다. 채식으로 이뤄진 간소한 식사 후 공양그릇을 내놓는 것으로 오전 일과는 마무리 된다. 이후 3시까지는 자율 정진으로 구성돼 있다. 무문관에서의 하루는 휴식과 정진 모두 수행자의 선택이다. 일정기간 푹 쉬면서 심신을 회복하고 본격적으로 가행 정진하는 경우도 많다. 무문관 수행만이 7박 이상의 기간으로 잡혀 있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서울시 공무원들부터 변호사 등 참가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행복공장 운영진은 업무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종에서 주로 찾는다고 귀띔했다. 무문관 프로그램이지만 불자들의 비중은 60% 수준이며,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일반인 비중이 보다 높다고 했다. 이런 대중화된 무문관 프로그램의 장점은 무엇일까. 미황사 ‘참사람의 향기’를 경험했던 김oo씨는 “조석으로 108배와 초심자를 위한 참선 강의 등이 함께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무문관에서 진행되는 개인 수행의 장점과 보통 진행되는 단체 수행의 장점이 모두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다만 본인의 수행의지가 높아야 한다. 단순히 쉼이란 측면에서 무문관을 찾는다면 오히려 호텔 등을 찾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무문관은 자기성찰과 수행을 위한 공간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덕환 기자 ------------------------------------------------------------------------------------ 성불하십시오. 아미산(이덕호) [출처] 무문관(無門關) 수행이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