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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누가복음 19:28-40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28-40 / [예루살렘 입성;마21:1-11,막11:1-17,요12:12-19]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제자들보다 앞장을 서서 걸어가셨다. 29)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동네까지 오셨을 때 제자 두 사람을 먼저 보내시며 30) 이렇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면 길가에 아직 아무도 탄 일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테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왜 풀어 가느냐고 묻거든 `주님이 쓰시겠답니다' 하여라.' 32) 그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귀를 발견하고 33) 그것을 풀고 있는데 주인이 와서 물었다. `왜 우리 나귀를 풀어 가는거요?' 34) 제자들은 다만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대답하고 35)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등에 얹고 예수를 그 위에 타시게 하였다. 36-37) 군중은 다투어서 그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다. 예수께서 감람산 비탈길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모든 이적에 대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노래하였다. 38) ㄱ)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시여! 온 하늘에 평화가 있으라!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이 있으라!' (ㄱ. 시 118:26) 39) 무리 가운데 섞여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저런 말을 하고 있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 4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그들이 잠잠하면 길에 있는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므나 비유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왕이신 것을 드러내시고 조롱과 멸시와 채찍 그리고 죽음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28-34) 예수님의 일행이 도착한 감람원은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감람 산을 가리킵니다. 감람 산 위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시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 산 기슭에 있는 동네로서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가까운 마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두 사람을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게 될 것이니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35-38) 지금까지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나 이제 예루살렘을 들어오실 때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여 자신의 왕 되심을 선포하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제자들은 새끼 나귀 위에 안장 대신 자기들의 겉옷을 걸쳐놓고 예수님을 그 나귀에 태웠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대부분의 무리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등과 같이 행하신 많은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기뻐하며 큰소리로 찬양했습니다. 당장에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신 메시야로서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원수같은 로마 나라를 물리치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39-40)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종교 권력과 존경 그리고 경제적 이득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든 뿌리까지 흔드는 대사건, 즉 수많은 백성의 환호 속에 메시야 왕의 대관식과 같은 퍼레이드와 환영 노래가 예루살렘에서 전개되자 당황하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만일 사람들이 찬송하기를 그치고 잠잠하면 눈앞에 보이는 돌들이 일어나 메시야를 찬양하고 소리 지를 것이라며 그들의 찬양을 정당하다고 강력하게 옹호했습니다.
적용: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때, 그 현장에 있었다면 당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왕으로 영접하며 찬양했을까요, 아니면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을까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역사 가운데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각자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출발점이 되는 우리는 오늘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될까요.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처]-국민일보
< 설 교 >
호크마 주석
=====19:28
이 말씀을 하시고...앞서서 가시더라 - 누가는 므나의 비유와 예루살렘 입성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고'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뒤이어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막 10:32에도 나온다. 이는 장군이 부대 앞에서 진두 지휘함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높이듯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걷는 장면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는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겪으시기에 앞서 맞이하신 마지막 한 주간의 생애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19: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벱바게와 베다니 - 감람원이라는 산은 '감람산' 또는 '올리브산'이라고 하는 에루살렘 교외의 동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 산은 남.북으로 약 4km의 길이가 되며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은 나즈막한 산이다. 이 산에 벱바게(* , 벧파게)라는 지명이 언급되는데 신.구약 성서 전체에 걸쳐 오직 이 이야기에만 나오는 지명이다(마 21:1;막 11:1). 탈무드에서는 이 곳이 감람산 서쪽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베다니(* , 베다니아)라는 지명과 함께 사용된 점으로 보아 베다니 근처, 혹은 인접한 곳에 위치한 마을 이름인 것같다(Lightfoot, Godet). 한편 사랑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5km, 그리고 여리고로부터 약 2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현재는 '엘 라자리'(El Azariyeh) 혹은 '라자리에'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듯하다(요 11:1-44).
제자 중 둘 - 본문에서 어느 제자를 보냈는지 알 길이 없으나 22:8에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점을 보아 역시 여기서도 베드로와 요한인 듯하다.
=====19:30
너희 맞은편 마을 - 29절의 언급 내용으로 보아 벱바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ruce).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 - 이같은 묘사는 슥 9:9의 예언의 성취라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기치 창검(旗幟槍劒)의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슥 9:10) 평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구하신 것은 제물에 바치는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종교적 의식법에 맞추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민 19:2;신 21:3;삼상 6:7).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종교적 신비감까지 느끼도록 함으로써 그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지시는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신 좋은 실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비적 예지의 표현은 한층더 예루살렘 입성의 진지함을 증폭시켜 준다.
=====19:31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예수 자신을 지칭하는지 또는 나귀의 본래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지 분명하게 밝힐 길이 없다. 그러나 33절에 나귀의 주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나귀의 주인은 아닌듯하다. 혹자는 미리 나귀 주인과 약속하여 나귀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나귀의 주인이 예수였다고 본다(Wycliffe). 그러나 그런 추측은 적절치 못하다. 현재 나귀를 사용할 사람이 예수라는 점에서 '주'를 예수 자신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무리가 없다. 따라서 단순히 나귀의 소유주라는 의미의 '주'보다는 신앙적 의미에서 '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눅 12:41 주제 강해 '주의 호칭과 예수' 참조). 이와 같은 이해는 30절에서 언급된 엄숙한 분위기와 잘 부합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종교적 신비감(神秘感)을 읽을 수 있다.
=====19:32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예수가 예견하신 대로 나귀가 묶여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나귀를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둔 것인지 또 멀리서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지시했던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 능력으로 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이중 예수의 신비적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이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묘사는 예지 능력 자체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 입성의 종교적 엄숙성 또는 예언 성취의 경이감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 21:4 주석 참조).
=====19:33
그 임자들이...푸느냐 - '임자들'이란 나귀 주인을 가리키는데 평행 본문 막 11:5에서는 '거기 섰던 사람 중 어떤 사람'이라고 다소 불명확하게 언급한다. 또한 그들이 묻는 물음도 누가는 남의 것을 왜 푸느냐는 식의 물음인데 반해 마가는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는가'하고 물음으로써 소유권에 대한 전제 없이 나귀새끼의 용도에 대해 묻고 잇는 점이 서로 다르다. 어쨌든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께서 예견하신대로 되어갔다. 그리고 본절의 물음은 무슨 권위로 남의 짐승을 가져가느냐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아직 새끼에 불과한 나귀를 끌고 가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19:34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고 - 이 말에 대해 나귀의 주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곧 주인들이 제자들의 말을 인정했다는 암시를 준다. 따라서 주인들이 이미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어쨌든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초능력적 예지(豫知) 능력 또는 철저한 예언 성취 등을 알게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예루살렘 입성이 신적인 섭리(providence)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19:35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 나귀 등에다 겉옷을 걸친 것은 안장 대신 사용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왕이나 귀인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존경의 표시로도 간주될 수 있다(왕하 9:13). 그리고 타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예수 스스로 나귀 위에 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태웠다고 묘사한다. 이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 또는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존경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왕상 1:33).
=====19:36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 겉옷을 나귀가 지나가는 길 위에 까는 행위는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이다(왕하 9:13). 여기서 '저희'는 제자들을 받는 말인데 마가와 마태는 많은 사람 또는 무리의 대부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 마가는 겉옷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도 길에 펼쳤다고 했고(마 21:8;막 11:8) 요한은 그것을 종려나무 가지라고 밝혔다(요 12:13). 또한 요한복음은 환영의 무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요 12:12,13,18) 공관복음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 무리들은 대체로 갈릴리에서 부터 따라온 순례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계신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환호(歡呼)했던 사람들 대다수는 예수를 정치적, 민족적 메시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19:37
이미 감람산에서...능한 일을 인하여 - 다른 복음서에 없는 자세한 장면 묘사이다. 이제 감람산 기슭까지 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 등장하는 군중들은 이미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동행해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리고에서부터 동행한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벱바게와 베다니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뭏든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며 찬양하는데 그 찬양은 예수의 모든 능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베다니를 오는 동안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요 12:17,18) 그외에도 예수의 허다한 권능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보고 들었음에 분명하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 이 구절 역시 누가의 독특한 묘사로서 깊은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즉 예수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그동안 행하셨던 치병 활동이나 모든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적인 활동 등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였다는 고백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묘사는 예수가 군중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공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9:38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이같은 구호는 시 118:26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왕이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를 왕으올 묘사하는 것은 이미 '므나의 비유'에서 예견되었거니와 여기서도 예수를 왕권적 권위를 지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편에서 사용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라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이지만, 메시야 예언과 관련된 경우에는 예수의 승리의 입성(入城)을 예표한 것이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 - 이 구절은 2:14에서 나오는 천사들의 합창과 흡사한데 여기서는 땅에서 평화가 아니라 하늘에서 평화라고 표현함으로써 어색한 느낌을 준다. 이 표현 역시 다른 복음서와 다른 독특한 표현이다. 즉 마태와 마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마 21:9;막 11:10) 누가는 호산나라는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본절의 뜻에 관해, 구원이 아직은 하늘에만 나타났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W.Forester) 또는 사람을 위해 예비한 하늘의 평화라고 말하기도 한다(Easton, Plummer). 또 사람들에게 줄 평화가 예수께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J.H.Davies), 예수께서 왕으로 높여짐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J.H.Marshall). 이중 마샬(Marshall)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충하면 탄생 때에 천사들이 땅위의 평화를 노래했던 것처럼 이제 예수가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가져다준 평화가 곧 하늘의 평화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39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 이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묘사이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사용한 '선생'(* , 디다스칼로스)이라는 호칭은 군중들이 외치는 '주'(* , 퀴리오스)와 대조되고 있다. 한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한 요청은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여기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7:36 ; 11:37 ; 13:31 ; 14:1). 즉 군중들의 환호는 흥분된 것이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고 이같은 메시야적 행진이 계속되었을 때 예수의 신변에 물리적 위협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흥분된 군중을 자제시켜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환호의 물결이 시위의 양상을 띰으로써 예루살렘에 주둔(駐屯)한 로마 군대와 부딪히게 될 상황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2)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이 호의적인 반응이라기 보다는 예수께 드린 찬양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찬양이 신성 모독의 소리로 들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전후 문맥상 (2)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나, 어쨌든 바리새인들이 신성한 하나님의 역사를 무지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막으려 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마 16:21-23 주석 참조).
=====19:40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격언구 형태의 이 구절은 합 2:11에서 언급된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한 마디로 묵살하는 것인데 첫째, 예수를 메시야로 환호하는 저들의 찬양이 정당함을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 반드시 그렇게 찬양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 대한 메시야적 찬양은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제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하에 필히 이루어질 사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찬양은 계속 선포되어야 할 내용이므로 응당 찬양해야 할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곧 죄가 된다는 의미도 함축(含蓄)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메시야 찬양 때문에 물리적 위협이 닥쳐온다고 해도 계속 외쳐야 할 것이며 메시야의 행진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함으로써,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물리적 위협이나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주의 복음을 굽힘없이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눅 19장 28~40절 / 박한응목사
찬 양 : 141, 147, 148, 150, 151, 439.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종려주일을 ‘성지주일’ 혹은 ‘사죄주일’ 이라고도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앞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8)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말에 만세 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키가 약20여m나 되는데 관상수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구약 아가서 7:7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르쳐 종려나무 같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은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도시라고도 하고 가톨릭교에서는 종려나무를 성별 하여 성수(聖樹)라고도 합니다.
제가 월남 전쟁에 참전하였을 때 정글 속에 들어가면 이 종려나무가 우거져서 하늘을 가리기도 하고 또 주택가에도 심어서 경관을 아름답게 하거나 그늘을 지워 시원케 하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미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관한 기사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시곤 하였으나 이 날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유월절 절기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 보면 겟세마네 동산 건너편에 황금의 문(Golden Gate)이 있습니다. 아치형으로 된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이 문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실 때에 수천 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들도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10:40-41)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정죄 해 버린 세리와 창기들과 억눌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사도 같이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도둑놈을 영접하여 도둑놈과 같이 어울려 논다면 그 사람은 분명 도둑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배와 같이 어울려 놀게 되면 십중팔구는 분명 불량배가 될 것입니다.
사기꾼을 영접하면 사기꾼이 됩니다.
간첩을 영접하면 간첩이 됩니다. 노름꾼을 영접하면 노름꾼이 됩니다.
사탄 마귀를 영접하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1:11-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배척하는 자가 되지 않고 중심으로 뜨겁게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는 벌써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고 책잡으려는 무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그래도 뜨겁게 환영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든 많은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무리들 중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정성껏 기른 나귀를 예수님께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전쟁에서는 말을 타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말을 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의 농촌에서는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는 나귀가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 BC 520년경에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벳바게 맞은편 마을 베다니로 보내시면서 마을 어귀에 매인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마을로 내려가 보니 정말 나귀가 매여 있습니다. 그 매인 나귀를 풀자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느냐 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 라고 하자 이 나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선 듯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는 이 말에 선 듯 내어준 것을 보면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나귀의 주인은 고이 길러서 한 번도 타보지도 않고 부려보지도 않고 짐을 실어보지도 않은 나귀를 주님께 제공해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의 필요에 한 사람이 순응했다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소유권 문제나 다른 문제는 개의치 않고 바로 나귀를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아들을 바침으로 그의 신앙은 위대한 신앙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31절에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한 말씀 중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의 심령에 부딪쳐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5:13 절의 산상수훈의 말씀 중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주님이 쓰시겠다는 것과 쓸데가 없어 밖에 버리운 다는 말은 참으로 좋은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쓰임을 받는 것은 영광된 일이요 버림을 당하는 길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물건을 쓰다가 못쓰게 되어서 버린다는 것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 아무 쓸 곳이 없어서 버림을 받는 것처럼 큰 수치와 고통은 없습니다.
<예>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재래식 부엌에서 불을 때려면 부지깽이가 있어야 합니다. 부지깽이는 오래 쓰다 보면 점점 타들어 가서 나중에 조금 남으면 그냥 불타는 아궁이에 던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지게를 받치는 작대기는 부러질 때까지 씁니다.
그래서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이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그의 가치나 존재를 인정해 주지 못할 만큼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이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있습니까? 환영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새 옷과 새신, 그리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까지 하였습니다. 진정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다면 무엇이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 마음에, 내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입성하십니다. 주님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2. 겉옷을 벗어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 깔아 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만들어 예수님이 편히 앉으실 수 있도록 한 사람도 있고 겉옷을 길에 편 사람도 있습니다. 왜 겉옷을 벗어서 이와 같이 하였습니까?
(1)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존경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지금도 외국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는 공항에 붉은 카펫을 깔아서 영접을 합니다. 바로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자가 말 타고 올 때에 허리 굽혀서 절하는 것은 진정한 존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 겉옷을 펴는 것은 진정한 존경입니다. 억지로 동원된 무리도 아니고 강요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누가 권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겉옷을 벗어서 주님을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2)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정중한 예의를 표한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이와 같은 예의는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하다기보다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 온갖 예의를 다하여야 합니다.
(3) 또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최상의 것을 드리는 표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항상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도 최상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중한 예의로서 최상의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고 또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또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라는 뜻도 됩니다. 이 종려나무는 잘 시들거나 마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 군왕이 행차를 할 때에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주님을 환영하는 것이나 그 가지를 길에 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종려나무는 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주님을 환영하는데 쓰일 나무는 시들거나 마른 것은 안 됩니다. 생명의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도 새롭고 싱싱해야 합니다. 생명은 생명과 바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믿음도 푸른 종려나무와 같이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시92: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예> 봄이 되면 각종 과실나무에 접목을 합니다. 그런데 접목을 할 때 산 나무끼리 접목을 하여야 그 나무가 살게 됩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죽은 가지가 되면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손에는 항상 생명 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4.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시편 118:2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형통케 하옵소서” 라는 뜻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리를 질러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억압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 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을 하시자 ‘바로 이때다’ 생각을 한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쳤든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라고 부르짖을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 환란에서, 이 고통에서, 이 질병에서, 이 가난에서, 이 죄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구원의 요청이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은 외면하시지 않고 우리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아 멘>
막10:46-52절의 말씀에는 길가에서 구걸하던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음으로 가시던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그의 눈을 뜨게 하여 주셨습니다.
마15:21-28절 말씀에는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눅17:11-19절 말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열 명의 문둥이가 나와서 예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에 예수님은 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고 하셨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갈 때에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14:30-32절 말씀에는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가다가 그만 풍랑을 보고 두려워 할 때에 물에 빠졌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환란과 고통 중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우리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오늘도 여러분 중에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까? 주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사랑, 그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5. 주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있는 반면 주님의 입성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실 때에 환영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는 그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할 때에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는 일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햇빛이 밝으면 오히려 그림자는 더욱 선명하게 따라다닙니다. 그러므로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이 무리들의 축에는 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롯유다보고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26: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계획하는 무리가 있어도 주님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주님의 구령사업을 완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래서 약1:2절 말씀에는 고난당할 때 오히려 기뻐하라 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고 하였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만왕의 왕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부르면서 환영하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이 못 가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며 배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절대로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주님은 나와 여러분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쓴잔을 받으셨고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가슴에, 우리 교회에, 여러분의 가정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그리고 겉옷을 벗어서 주님 앞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는 마음으로 이 시간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눅 19장 28~40절 / 유은호목사
17세기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 작품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어느날 이런 생각했습니다. 명예를 드높이고 아울러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일로, 편력 기사가 되어 무장한 채 말을 타고 온 세상을 다니면서 정의를 실천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키호테는 증조할아버지 대의 칼과 창과 투구를 꺼내 깨끗이 손질했습니다. 그런데 투구에는 머리를 가리는 모자만 달려 있을 뿐 얼굴과 코를 가리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꺼운 판자로 얼굴 가리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말을 구하러 갔습니다. 말은 비록 피부병이 걸린데다가 값도 얼마 나가지 않으며, 온통 털과 뼈만 있는 흠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돈키호테의 눈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말 부세팔로나 엘 시드의 말 바비에카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보였습니다. 돈키호테는 그 말에게 ‘로시난테’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돈키호테는 7월 중 가장 더운 어느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단단히 무장을 하고 로시난테 위에 올라탔습니다. 엉성한 얼굴 가리개가 달린 투구를 쓰고 방패를 팔에 고정시킨 다음 창을 들고는 엄청난 만족과 기쁨을 느끼며 마당 뒷문을 나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섰습니다(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안영옥 옮김, 『돈키호테 1권』 (파주: 열린책들, 2014(초판), 6-70, 74).
돈키호테는 비록 제대로 갖추지도 않은 무장을 하고, 힘센 말도 아니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여윈 말을 타고 나갔지만 그의 마음에는 세상에 약한 자를 구원하려는 정의를 실천하려는 큰 꿈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해학적이고, 우스광스럽게 그린 것은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무섭게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라 편안하고 재미있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목수 일을 하시다가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서운 군인의 이미지로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그렇다고 엄격한 종교지도자 바리새인의 이미지로나 까다로운 서기관 같은 선생의 이미지로도 나타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친근한 이웃 친구같이 사람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친구같이 친근하게 다가오십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편안하고 친근한 친구같이 생각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3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5일을 남겨두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날 제자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려 맞이했다고 해서 이 주일은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실 때 옷도 멋지게 차려 입으시고, 말도 멋진 말을 타고 입성 하셨으면 좋았을텐데 예수님은 보통 평민의 옷을 입으시고, 큰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 하셨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우스광스럽게도 보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교수님 가운데 구약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교수님은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하고 같이 마을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같이 걸어 가시곤 하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그 교수님께 왜 차를 안타시고 이렇게 걸어서 다니시냐고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차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차를 구입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차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이 편하시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하고 걸어서 버스도 타고 전철도 타다 보니까 교수님이 친하게 느껴지고 좋았습니다.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30년 정도가 지났을 때 동기 목사들이 은사 교수님 가운데 한분을 모셔서 말씀을 듣자고 햇습니다. 모두 그 구약 교수님을 모시자고 했습니다. 그 교수님의 친근함과 겸손함이 우리 동기 목사님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것 같습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한 것을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말씀 했습니다. 스가랴서는 예수님은 왕으로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며, 특히,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권위를 가지고 크고 멋진 말을 타고 오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겸손한 모습으로 친근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친근하고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인생의 왕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라는 책에 보면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하신(河神)에게 여러 가지 주술을 행한 뒤 호감을 사려고 그곳의 토착민 소년 9명과 소녀 9명을 생매장을 했습니다. 사람을 생매장하는 것은 페르시아의 관습이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왕의 부인 아메스트리스 왕비도 늙었을 때 지하에 산다는 신에게 호감을 사려고 14명의 페르시아 명문가 자제들을 생매장 했습니다(헤로도토스/ 천병희 옮김, 『역사』 (경기도: 숲출판사, 2009(제1판), 689).
페르시아 왕과 왕비는 자기들을 위해 사람을 생매장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면서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칭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6절에도 “[예수님의]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왕들 가운데 최고의 왕이십니다. 이 정도 권위가 있는 왕이라면 예수님은 왕의 권위로 수많은 사람들을 생매장하여 죽일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만왕의 왕이신 분이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죄인들을 위해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참 왕은 자기를 위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죽이는 왕이 아닙니다. 참 왕은 예수님같이 사람들을 겸손하게 섬기며, 자기 목숨을 내어 주면서까지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 속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여러분 모두 여러분의 인생의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을 참 왕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39절과 40절을 읽겠습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왕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헤롯 왕이 있는데 예수님을 왕이라고 외치는 제자들은 잘못된 것이니까 예수님께서 책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소리치는 것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막으면 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소리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은 자신이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 하신 것입니다.
라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 세상에는 세상의 도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의 도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두 도성은 이 세상에서는 경계가 애매하며, 최후의 심판으로 양편이 갈라지기까지는 서로 뒤섞여 있다.”(아우구스띠누스/ 성염 역주, 『신국론 제1-10권』 (왜관: 분도출판사, 2004(초판), 221).
지금 이 세상안에는 세상의 도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의 도성도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도성 속에서 신의 도성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신의 도성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 도성의 왕은 불안정합니다. 잘하면 좋지만 못하면 백성이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그러나 신의 도성의 왕이신 예수님은 완전하신 왕입니다. 인생은 완전하신 왕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서 여러분의 인생이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풀어 데려오라
눅 19장 28~40절 / 김상복목사
기독교는 고난을 통한 영광의 종교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부활을 체험하는 신앙입니다. 시련이 있어도 최후 승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사는 종교입니다. 오늘이 예수님의 고난 주일의 첫 날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 새벽시간을 통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당하신 고난의 발자취를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다들 오셔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희생의 작은 부분만이라도 체험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와 기쁨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인 이번 성금요일 저녁 7시 30분에는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한 주를 출발하는 첫 날입니다. 갈릴리를 출발하신 예수님은 어제 밤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1년 전부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사이에 예수님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을 보신 예수님은 대중을 피하시고 주로 제자 12명을 훈련하는 일에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다 된 것을 아신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어제 밤 베다니에 도착하셔서 두 가정이 베푼 만찬에 참석하셨습니다. 나환자 시몬의 가정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1년 만에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했습니다.
여러분이 시몬이라도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불치병인 문둥병은 일단 걸리면 가족과 마을과 도시를 떠나 성 밖에서 외롭게 살다가 온 몸이 썩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던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 일생일대의 사건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뛰어나가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외쳤던 것입니다. 자기가 나환자임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예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1년 만에 다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시몬은 얼마나 가슴 설레었을까요? 자기를 치유해주시고 다시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해주시고 새 삶과 소망을 주신 예수님을 자기 집에 꼭 모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죄의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들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울어도, 가슴을 쳐도 내 속에 있는 죄의 성품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문둥병으로 얼굴과 손가락이 문드러지는 것처럼 우리도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서 십자가의 은혜로 치유, 즉 구원을 받고 오늘 이 아침에 이렇게 나와 예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가족은 또 얼마나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싶었을까요? 나사로는 병들어 죽었던 사람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무덤 속에서 푹푹 썩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는 주저 없이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나사로가 천을 걸친 채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나사로는 다시 생명을 찾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었던 오빠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 이후로 그들은 “예수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돌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허물과 죄로 죽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만약 오늘 이 자리에 어느 한 분이라도 죄성과 과거의 죄로 어찌할 줄 모르는 분이 계시다면, 바로 오늘 이 아침이 여러분에게 치유의 시간, 영적 부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오십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일어나서 제자들과 함께 나섰습니다. 이 소문은 금새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친 사람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 나병환자 시몬의 치유된 모습을 보았던 동네 사람들, 나사로의 죽음 앞에 함께 슬퍼했다가 그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1년 만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전부 길거리에 몰려 나왔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할렐루야 교회로 오신다고 하면,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 죄와 허물로 죽었다가 믿음으로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열 일 제쳐놓고 달려올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우리도 지금 모인 것이 아닙니까?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벳바게라는 동네에 들어가면 사람이 한 번도 타보지 못하고 꽁꽁 묶여 있는 어린 나귀가 있는데 가서 풀어오라. 주인이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 하면 금방 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순종하여 가보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거기에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었습니다. 풀려고 하니까 주인이 다가와서 왜 푸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의 지시대로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라고 말하자 놀랍게도 주인은 아무 말 없이 나귀를 내어주었습니다.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일을 처음 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예수님이 과연 전지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신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 최대의 치욕을 당하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기 위하여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이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감히 옆에 접근하기도 힘듭니다. 그들이 당당하게 나타나면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경찰들이 막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호위병을 데리고, 까만 리무진을 타고, 경찰 기동대를 앞세워 오셨다면 우리는 옆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다가와도 마음이 편안한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를 차별하시거나 거부하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편안하고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신 주님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노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예수님께 찬송으로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돌리는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오늘 헌금시간에 바이올린 찬송이 참 좋았지요? 저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감격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참으로 멋지게 창조하셨습니다.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창의력을 주셨습니다. 나무를 깎아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또 그것을 잘 연습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모든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과 존귀를 올려 드리게 하셨으니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나타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메시아가 나귀를 탄 가난한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신다는 예언입니다. 이제 그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우리를 겁나게 하지만, 우리 주님은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을 찬양했습니까? 예수님이 지난 3년 동안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보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12:10). 나병환자 시몬이 어떻게 치유를 받아서 가족으로 돌아왔는지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미래가 보였습니다. 위대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것을 느꼈을 때 그 들은 찬송과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가치한 어린 나귀를 풀어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 나귀는 어린데다가 묶여 있었습니다. 그 나귀는 사람을 태워 본 일이 없었습니다. 가축으로서 사람에게 쓰임을 받지 못하고 그저 밤새도록 그 자리에 묶여 있었습니다. 풀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그 나귀 새끼를 풀어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나귀가 메시아를 태우고 메시아를 소개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묶여 있으면 아무 짝에도 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사람들에게 안내하신 적이 있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지 못합니까?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나귀도 힘은 있었지만 묶여 있었기 때문에 쓸모가 없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묶고 있는 끈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끊으십시오! 오래된 나쁜 습관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가 두렵거나 주저하고 있습니까? 모난 성격 때문에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과거의 죄나 나쁜 경험들 때문입니까? 혹시 영적 무관심이나 나태함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무엇이 지금 여러분을 묶고 있습니까? 제가 보니까 건강을 유지하느라고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주일 날 아침에 운동하러 가야 되니까요.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건강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은총을 주시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주님을 마음껏 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심으로 그 영광이 배가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재산이 겸손과 짝이 되고, 권력이 겸손과 짝이 되고, 지성이 겸손과 짝이 되면 그 영광이 배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좋은 것들이 많은데 왜 제대로 쓰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겸손하면 우리의 재산과 능력과 재능과 지위와 권력이 몇 배로 돋보이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각자 깊이 생각해 봅시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주저하게 하고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게 묶어놓고 있는가?”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풀어라. 해방을 받아라. 자유를 얻어라. 내가 쓰겠다.” 바로 지금 여러분을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끊어주시기 바랍니다.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나머지 생애에 마음껏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이 여러분의 해방의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 사역
눅 19장 28~40절 / 이필재목사
오늘부터 몇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성격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을 몇 가지 성격으로 보면서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내용의 성격들을 알면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무엇이 어떻게 된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우리 마음속에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의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첫째가 창조 사역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고 지금은 유에서 또 유를 계속 창조해 가시는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예배 첫 순서 가운데 신앙 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우주 안에 가득 찬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구원 사역 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이 죄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만물도 저주 아래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 구원이 필요해 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킬 것을 작정하시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심판 사역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마지막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것이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때가 되면 하나님이 정리를 하시는데 그 때가 언제인가? 예수의 재림시가 됩니다. 그것을 종말적 구원, 혹은 종말적 심판이라고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성격은 바로 창조와 구원, 심판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행하신 결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들을 보면 구제 사역도 많이 하시고 의료 사역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역을 세 가지를 보면서 우리가 예수님 사역의 성격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제일 먼저 예수님의 왕권으로서의 사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왕권이 주어져 있음을 성경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제도와 문명의 발달을 보면 다 하나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공동체를 만들어서 제도적, 구조적 사역을 가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 우주를 다스리는 왕이 있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 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가장 확실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문명은 인간의 창조적 생각에서부터 발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새를 보면서 우리 인간도 날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가졌습니다. 날개를 펴고 꼬리로 방향 조정을 하면서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을 보고 ‘저렇게 하면 인간도 날을 수 있겠다.’ 생각해서 만든 것이 오늘날의 비행기입니다. 그래서 이 비행기는 새의 모양으로 똑같이 뜨고 내리고, 또 날아갈 때도 똑같이 합니다. 또 사람이 물 속에 있는 고기를 볼 때 ‘저렇게 물 속을 다녔으면 좋겠다.’ 물고기가 꼬리를 치면 그 몸뚱이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저런 원리를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면 되겠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배입니다. 그래서 모든 배의 맨 뒷부분에는 프로펠러가 달려 있어 엔진으로 그것을 돌려주면 앞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원리는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창조물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의 선언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왕의 특징은 권세자입니다. 왕보다 더 권세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의 명령은 절대권이 있습니다. 권세자는 자기에게 부여된 권한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왕으로 표현한 내용을 찾아보면 탄생 때부터 나타납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와서 물을 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시작합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누가복음 1장 33절 보면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요한계시록에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우주의 왕이 되시는가? “그가 우주를 만든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요한의 증거 1장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가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장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이렇게 예수님이 만물의 왕 되심을 증거하고 있고, 바울 서신, 로마서 11장 36절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라고 증거했으며, 시편 24편 1절에 보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주 만물과 인간 창조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이 왕권을 가지신 만 왕의 왕 되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의 왕권의 선언은 사탄의 이기심 때문에 확실해 졌습니다. 로마서 5장에 “사람이 범죄하므로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령이 사람을 범죄케 하여 사람들 위에 왕같이 군림해 왔는데 예수께서 그 사탄의 권세를 이겼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인간 죄의 사함을 허락했고 부활로 인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버리셨다. 사망의 권세를 이겼다. 사탄의 권세를 이겼다. 그러므로 왕노릇하든 그 사탄의 권세를 꺾어 무너지게 하셨으므로 예수는 자연히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 되신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셨기 때문에 그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왕은 아니지만 왕 노릇을 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는 것을 사망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번만 죽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가 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이 이루어지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옵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으로, 음부의 세계에 들어가는 사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왕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왕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마치 왕이 된 것과 똑같은 권세를 부리면서 세상에서 삽니다. 그런데 왕도 죽습니다. 그가 죽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끝이 납니다. 요즘은 대통령도 4~5년 밖에 못하니까 대통령한테 아무리 잘 보여도 몇 년 지나면 끝이 나고 말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왕권은 세세토록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이 베푸는 은혜를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면서 하나님 자녀로서 사역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 백성들입니다.
현재의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에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편에 앉았다는 말이 뭡니까? 임금님 우편에 앉은 사람은 그 다음에 임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자 책봉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곧 왕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로다.” “왕국 건설자가 되시리로다.” 그런 것입니다. 초림 예수는 고난의 종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재림 예수는 심판 주, 왕 중 왕으로 오시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악령의 역사가 성도들을 괴롭히게 하는 부분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인정합니다. 왜 마귀의 역사가 이렇게 인정되고 있는가? 그러한 마귀 역사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아니한 것을 안다고 그랬습니다. 사탄이 훼방하고 아무리 세상에서 극성을 부린다고 하여도 그 세력과 권세는 벌써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굴복한 권세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시편 46편을 기초로 해서 찬송가 한 편을 짓지 않았습니까? 그 찬송을 부르며 믿음의 승리를 가져왔는데 “♬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 왜 반드시 이긴다고 그랬습니까? 마귀의 권세는 이미 그에게 굴복 당한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 우리가 주 예수의 왕적 권세를 믿기 때문에 믿음의 선한 싸움의 승리를 믿으면서 싸워 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망의 권세까지도 이기시고 귀신들을 꼼짝 못하게 명령하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초월해서 무덤에 있는 자를 살려내신 예수 그리스도! 자연 과학을 인도하는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게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식량을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세의 확실한 약속을 믿으면서, 나도 어느 때인가는 그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할 진리의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소 마귀의 역사가 있다 하더라도 겁내지 아니하고 힘 있게 믿음의 승리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있다고 요한계시록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가대가 성탄 때 메시아 합장을 부릅니다. “♬ 찬송과 존귀 영광 지혜 능력 주님께 돌리세 보좌 위에 앉으신 주의 어린 양!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과 모든 것을 다 어린양 보좌에게서 돌리세 ♬!” 왜?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봅시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가시는데 “나귀 새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9장에 예언되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스가랴 예언자의 예언은 500년 후에 누가복음에서 완성된 말씀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를 보고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는 나사렛 예수를 보고 왜 사람들이 “왕이시여 왕이시여 호산나 호산나 하더라” 왜 그랬습니까? 이것은 예수에게 주어진 왕적 권세에 대한 인정입니다. “당신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왕이 되십니다.”
당시의 예수님을 부르는 대명사가 그 사회에 흔하게 있었던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질러 은혜를 입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윗 왕국의 영원한 왕이 되시는 자시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 불편이나 어려움이 뒤따른다 하여도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 되시는 날 심판주가 되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그 약속의 진리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선물이기 때문에 어떤 고생도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세를 고백하는 교회는 처음에는 약 1,500년 이상 국가의 정치적, 영적인 모든 것을 통치해 해왔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나라는 복음의 역사가 200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모르지만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가 행정 권한까지도 교회 명령에 따랐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해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래서 유럽의 웬만한 국가들은 영국을 비롯해서 국가 재산의 절반 이상이 다 교회 재산입니다. 왕도 최고 성직자들의 말을 따라서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왕이 잘못하면 주교단에서 “왕 좀 오라고 그래!” 소환해가지고 “거기 무릎 꿇고 앉아있어!” 거기서 결정합니다. “왜 이대로 안했어?” 막 따집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왕이 불려왔는데 겨울입니다. 눈이 내려서 “너 들어오지 말고 바깥에서 무릎 꿇고 있어!” 왕은 눈을 맞으면서 주교단에서 불러주기를 바랬습니다. 눈이 하도 많이 와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 왕이 그래도 겸손하고 기특하니 들어오라고 해라!” “너 왜 예수 그리스도의 왕정 통치 명령대로 하지 않고 네 맘대로 이런 통치를 하는 거야?” 야단맞고 “잘못했습니다.” 사과하고 가서 다시 하고, 옛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세를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 때문에 국가 통치, 교회 통치를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성직자들이 너무 권세를 부려서 타락하는 바람에 교회 본질성을 잃어버려 1,500년대에 종교 개혁을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본질성 회복을 가져온 것이 우리 개신교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흘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통치를 지금도 영향력 있게 행사하는 교회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리스정교회, 카톨릭 교회는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보십시오. 온 세상을 주관하는 교황이라는 인물 한명이 선출되었습니다. 한 분이 온 세계 교회를 통치하고 온 세계 교회가 교황의 말은 절대로 거역하지 않습니다. 하라는 대로 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왕권 통치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그러므로 이 세상도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통치해야 한다.”라는 신앙 고백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카톨릭 신자들은 금요일에는 고기 안 먹습니다. 그래서 서구 사회에서는 금요일에 고기 장사가 안 됩니다. 햄버거도 고기 들었다고 안 먹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먹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교황이 대한민국 사람 먹으라고 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대한민국 사람들은 먹으라고 했는가? 50년 전에는 우리나라가 가난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일 년에 고기 먹어볼 수 있는 기회가 하루, 이틀 옵니다. 이웃집 아들딸이 장가가고 시집가는 잔치 집에 가면 고기 한 점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금요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 “고기를 먹다니! 먹지 마라!” 이런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교황청에서 교황이 명령해서 온 세계 카톨릭 신자들이 고기를 안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너무 가난해서 어쩌다가 고기 한 점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금요일이기 때문에 못 먹는다.’ 이것이 교황청에 보고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특명을 내려서 “한국 사람은 먹어라!”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세계 어디를 가도 다 그렇습니다. 금요일에는 고기를 안 먹습니다. 만약 이 필재 목사가 아니고 신부가 갈보리 교회를 목회 합니다. 교황청에서 “이 필재 신부! 다음 달에 저 알라스카로 가!” 갈보리 교인들이 “안 됩니다. 우리 신부님 여기 계셔야 합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나 가기 싫습니다. 거기 안가겠습니다.” 못합니다. 왕권 통치입니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갈보리교회는 저기 거제도에 있는 아무개 신부가 와서 사역해!”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이게 어디서 온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통치를 인정하는 행정 제도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에서 신부님이 마음에 안 든다며 나가라 들어가라 싸우고 갈라지고 그러는 것을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기독교 신문에 보면 날마다 나오는 말 “목사 모집, 목사 청빙, 45세 이하” 이런 조건을 걸어서 목사를 모집합니다. 또 회사에 취직하는 것처럼 목사들이 이력서 써서 내밀고 심사위원이 심사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어떤 신문에서 “신부 모집” 보셨습니까? “개신교회들은 뭐하는 거냐? 성직자들을 모집하고 내보내고 싸우고 갈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왕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신하는 자도 이렇게 해서 왕권 통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지금 아직 재림하지 않으셔서 그렇지 “내가 올 때 심판주로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권능의 구름을 타고 올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많이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표현할 때 “세세토록”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데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때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 할 것이며” 이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고 그러는 것이지 왜 예수를 믿겠습니까? 뭐, 시간이 남아서 예배당에 나오고, 돈이 남아서 교회에 헌금하겠습니까? 아니면 생명이 아깝지 않아서 순교를 당하겠습니까? 이 약속의 진리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세력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왕권 사역이었던 것을 출생 때부터 마지막까지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예수를 믿는 것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권 통치자가 되는 진리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날마다 신앙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여 주셔서 내가 누구인가? 크리스천의 분명한 아이덴티티를 정립하고 마귀의 권세를 이기며 승리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이여
눅 19장 28~40절 / 이필재목사
눈이 많이 와서 교회 오시는데 좀 불편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이 올 때 와야지 눈이 와야 할 때 오지 않으면 생태학적으로 우리 주변에 더 어려운 일들이 생기기 때문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또 크리스마스가 되면 눈이 와서 화이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정서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오늘 하나님의 큰 축복이 이 땅에 내린 것으로 생각하면서 예배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평화의 왕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왕에 대한 상식이 있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고, 그의 말은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는 능력의 사람을 왕이라고 합니다. 또 한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왕입니다. 또 그렇게 좋은 것을 죽을 때까지 가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그 좋은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왕에 대한 일반적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왕과는 정 반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사셨는데 왜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는가? 낮고 천한 자리에서 탄생하셨고 천한 마을에서 천한 직업을 가지시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당해 죽으시는 이 세상의 왕과는 정 반대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왕이라고 부르는가? 오늘 말씀 중에도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와서 예수의 탄생 장소를 물을 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그래서 출생 때부터 예수에게는 왕 칭호가 붙어 다닙니다. 빌라도도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렇게 말했고,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누군가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고, 십자가 밑에 있는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말할 때에도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왕의 칭호는 출생 때부터 예수님 운명 당시까지 계속 따라온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왕권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왕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 상식의 영광과 행운을 누리셔야 하는데 정 반대의 삶을 사셨으니 그의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 왕의 개념에 있어서 왕은 왕이로되 세상 나라의 임금님 개념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 앞에 하나의 낱말이 더 붙습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이 앞에 붙은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로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예수님은 이 “평화”라는 말이 계속 따라다닙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이 평화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따를 사람도 없고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하는 사람도 없고 예수님보다도 이 평화를 더 누린 사람이 없는 “예수님이 왕이다. 왕 중의 왕이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왕으로서 행하신 평화의 사건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자유를 누리신 분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왕들이 누구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을 가리켜 “평화의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의 조금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당신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 여인이 자기의 두 아들에 대한 요청의 뜻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제 머지않아 이 유대의 왕이 되실 터인데 우리로 하여금 이 로마의 구속에서부터 해방시키고 독립된 건설 국가를 창립하시어 왕이 되실 그때에 나의 이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권력의 2인자와 3인자의 자리에 앉게 해주소서.” 하는 요청입니다. 이 여인은 그런 요청을 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이 여자는 자매간입니다. 부유했던 살로메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위해 3년 동안 돈을 제일 많이 쓴 사람입니다. 게다가 자기의 두 아들을 둘 다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기 까지 하였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니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자기 아들 요한을 제일 사랑하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계산해 보나 예수님 다음에 두 번째, 세 번째 자리는 내 아들의 것이다.’ 그래서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그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제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왜 화를 냈을까?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먼저 선수를 쳐서 자리 확보를 하니까 그게 화가 난 겁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이상해 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을 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직권자들은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권력을 가지고 사람을 마음대로 주관해 버립니다. 왕이 죽이라고 하면 죽입니다. 사람을 수백 명, 수만 명까지 죽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런 예는 역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큰 권력을 가지고 마음대로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 권력의 매력을 너희가 알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인데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종이 되어야 하리라.” 정 반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왕 개념으로 제자들 눈에 비쳤던가 봅니다. 그래서 그런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지금 너희는 내가 왕이 되면 2인자, 3인자가 되어서 직권자의 권력 부림의 매력을 생각하고 나에게 요청을 하는데 나는 이 세상 임금이 가는 길의 정반대의 길을 가야 하는 평화의 왕이다. 나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왕 개념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그 후광을 생각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세상 임금과는 정반대인 평화의 왕 개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골고다로 선언하셨을 때 제일 슬퍼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조금은 다른 제자보다 우월한 자리를 확보했다고 믿고. 예수님 다음의 영광이 내게 올 것이라는 자신만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베드로를 수제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까? 그게 다 무산될 지경에 이르니까 그렇게 슬퍼한 겁니다. 그런데 결코 미칠 수 없는 그 길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가지 못하는 그 길의 자유함을 자기가 누리신 그것이 평화의 왕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임금들이 가는 길과 정 반대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일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할 때 빌립보서는 “그는 본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으며 사람들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정반대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 아마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더 낮고 천한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셨을 것입니다. 식민지 백성, 나사렛 동네, 노동자, 마구간 그것보다 더 낮은 곳은 없어서 그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상 왕들과 정반대의 모습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평화의 왕’ 이 개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역사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면 독재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백성이 고통을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민중이 인간답게 살려는 삶을 포기하였는가 우리가 다 경험한 것입니다. 특별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는 모든 독재자들이 독재 정치를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최고 권력자인 그 왕의 자리에서 평민의 자리로 내려오기가 싫어서 반대하는 사람을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래 오래 이 자리를 누리고 싶어서 그것 때문에 그렇게 독재 정치를 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의 장소가 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을 복음화 시키고자 제자들과 함께 가시고 계시는데,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이 예루살렘은 수도 개념에 있어서 한 나라의 수도 개념이 아니라 다윗의 도성, 현실적 하나님 나라의 중심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지구상에 있는 어떤 도시보다도 가장 오래된 도시로서 3000년을 같은 자리에서 그 나라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점령하려던 수없이 많은 강대국들의 전쟁 역사가 그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바벨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 로마 등 근대사에도 수없이 많이 전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매력 때문에 누구든 한번쯤은 그곳을 점령해보려고 찾아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은 평화가 없었다는 겁니다. 수없이 상처를 입고 점령당하고 빼앗기는 역사가 나날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제외하고 신약의 역사만 보더라도 70년에 디도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130년에 하드리안에 의해서 다시 재건이 되었다가, 637년에 회교도 손에 다시 들어갔고, 1099년에는 십자군에 의해, 1517년에는 터키의 군대에 의해서, 1917년에 연합군의 손에, 1948년 이후는 다시 유대인의 손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끝없는 전쟁으로 평화가 없는 상처투성이의 몸뚱이가 되었고 숱한 전쟁역사를 통해 이 도시는 슬픔과 고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1979년 미국의 대통령 지미카터와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백악관에서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악수하면서 한마디씩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옛날 이사야가 보았던 평화의 꿈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 꿈의 실현을 위하여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지미카터는 “나는 어젯밤 12시가 넘도록 이사야 5장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함을 받으시리니 그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먹을 것이요 살찐 자의 황무한 밭의 소산은 유리하는 자들이 먹으리라. 이 말씀을 내가 밤새도록 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계 평화의 문제는 온 세상 누구나 다 똑같이 소원하고 있는 인류의 소망입니다. 지금 세계 200개가 넘는 나라의 어느 나라 대통령에게 물어보더라도 “당신은 전쟁을 원하십니까, 평화를 원하십니까?” 다 똑같이 100퍼센트가 “네, 평화를 원합니다.” 똑같이 대답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에게 물어봐도 “당신 국민은 평화를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전쟁을 원하십니까?” 100퍼센트 똑같은 대답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지금 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인류의 소망은 평화라고 모두들 말합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들에게 물어도 똑같습니다. 불교 지도자도 힌두교 지도자도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할 것 없이 “인류의 목표는 평화다. 인류의 소원은 영원히 평화다.”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모두 군대 갔다 오셨죠? 전쟁을 위해서 준비 하는 것도, 전쟁을 원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습니다. 다 평화를 원합니다. 비록 우리 주변의 불량배들일지라도 평화에 대한 소망은 다 똑같습니다. 이것은 온 세상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이렇게 온 세상이 다 원하는 것인데 왜 안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망가뜨리려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악령의 지배에 있는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의 평화가 깨지는 겁니다. 어디나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6·25 동란 일으킨 사람을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히틀러를 평화의 사도로 부르십니까? 이 세상은 악령의 지배에 있는 사람이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회도, 교회도, 나라도, 인류도 다 똑같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도하에서 아시안게임이 있었습니다. 이런 모임을 놓고 세계가 똑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의 제전”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게임에 참가하는 모든 국가들의 철학이 무엇입니까? 평화 사랑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올림픽 게임은 어느 나라가 1등, 2등 할지 미리 다 압니다. 우리나라도 기록 때문에 이번에도 우리가 2위가 목표였는데 2위를 달성하지 않았습니까? 마라톤 뛴 기록이 있고, 모든 것의 기록이 다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누가 금메달감인지 벌써 다 압니다. 그러면 거의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대로 다 결정되고 맙니다. 꼴찌할 나라들도 자기들이 꼴찌한다는 것을 다 알고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많은 경비를 들여서 기록상으로 봐서 도저히 꼴찌밖에 못할 텐데 왜 참가하겠습니까?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평화 사랑입니다. 평화의 제전이기 때문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철학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올림픽입니다. 온 세상이 다 똑같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6자 회담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이 6자 회담인지, 8자 회담인지 안 되면 말지 이제는 뉴스 듣기도 지루해졌습니다. 자, 보세요. 세계 4대 강국이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입니다. 이 4대 강국의 힘을 합치면 그것 하나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영 되질 않습니다. 저렇게 자존심 상해가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의 핵 문제는 주변 국가들 중 어느 나라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면 큰일입니다. 왜냐하면 50년 전에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의 그 후유증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50년 전 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 강대국들이 가지고 있는 핵의 성능은 그 때 떨어진 그 원자탄의 5000배의 성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첨단 과학이 인류에게 제공한 것은 위대한 창조력과 절대적 파괴력입니다. 1986년 4월 26일 온 세계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 원자탄 하나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관리 부족으로, 취급 부주의로 이것이 터져서 방사능이 지금 확산되어 바람에 날아가고 있다.” 온 세상이 “이거 큰일 났다. 인류의 재앙이다.” 저는 그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원자로의 터져 나오는 불을 끄기 위해 5분 이상 그곳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해서 2만 명의 젊은이들이 5분 교대로 투입되었는데 투입된 사람이 5분이라고 해도 살아남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그곳에 가면 가시철망을 쳐놓고 “이 이상은 땅도 밟지 마시오. 라고 써놓았습니다. 한 발짝도 더 가지 말라고 써놓았는데, 저는 그 지점까지 갔다 왔습니다. 당시 임신한 여인들은 방사능에 노출된 공기를 호흡함으로 인해서 태아에게 영향을 주어 기형 출산된 아기들이 지금까지 그 주변 국가들 다 합쳐서 40만 명입니다. 그 아이들은 도저히 그 나라나 그 주변 국가들이 기술이 부족하고 치료할 수가 없어서 미국 샌디에고 병원에 데려다가 무료로 치료시켜주고 있는데 저는 그 아이들 50명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우크라이나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온 일이 있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강의 물고기까지 다 기형이 되었으니 먹지 말라고 강에다 써 붙였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당시 세계의 평가가 확실하게 나왔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핵 관리 기술이 미숙하다. 이것 때문에 일어난 사고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이 TV에서 연설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 한 나라의 재앙이 아니라 인류의 재앙이다. 이 문제는 미국이 해결하겠다. 우리가 가서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시급하게 우리를 받아들여라.”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헬리콥터들이 그곳에 시멘트콘크리트를 산더미 같이 부어 불을 진압했습니다. 지금 그곳은 콘크리트 산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해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언젠가는 살아있는 핵이 그것을 뚫고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핵입니다. 그렇게 무섭습니다. 핵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핵은 콩 하나만한 부피를 가지고도 넉넉히 10만 명을 죽이고 남습니다. “북한이 핵을 2개 혹은 3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추측들이 미확인 보도 신문에 자꾸 나오고 있는데 강대국들은 수천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미국은 6000개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핵우산 속에 들어오라는 것은 미국이 많이 가지고 있으니 그거 몇 개 준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 세상은 절대적 재앙 일보직전에 있는데 여러분, 성경 요한계시록을 보면 ‘아! 이 재앙이 그 재앙인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지금 세상은 평화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게 위험해 졌습니다. 그런데 이 북한의 핵이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이 핵을 만들었어도 핵 관리 기술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와 같은 그런 사고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중국도 일본도 한국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똑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 아주 불 보듯 뻔하게 보이니까 어떻게든지 이 문제를 회담으로 그 핵을 없애는 작업을 하자고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조금 더 연장해서 읽어보면 42절에 예수님이 전쟁의 상처 때문에 날마다 고통당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평화가 없어지는 세상에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 평화의 왕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오래전에 저는 미국 대통령의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한 말이 이것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세계 평화에 공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대통령 된 다음에 세계 평화가 더 나빠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계 평화가 좋아질 것인가에 대해서 내 참모들이 이것은 오랜 역사의 종교 지도자와의 대화 없이는 도저히 세계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분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때 내가 초대받아서 갔을 때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개신교, 가톨릭, 동방교 할 것이 미국 안에 있는 모든 종교를 다 망라해서 부를 수 있는 사람 200명 정도를 불러서 대통령이 와서 “기구를 만들어서 여러분이 평화의 대화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모임에 제가 참석했고 그때부터 기구가 만들어져서 해마다 모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인류의 구원이 되는데 평화의 왕 선언의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이 세계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해결할 방법이 뭐가 있습니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아픔을 통해서 평화를 만들어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 되셨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서 평화를 완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 외에는 세계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본 목사를 한번 친하게 만난 적이 있는데 LA에서 스티브 야마구찌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같은 PCUSA 목사이기 때문에 서로 만나서 교제를 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터졌느냐 하면 일본에서 재일 동포들, 우리 조선 사람들 지문 날인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차별대우하려고 그런 것 아닙니까?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 야마구찌 목사는 자기가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자기 본국 일본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PCUSA의 후원을 받으면서 일본 전역을 돌면서 목이 터져라고 외쳤습니다. “일본이여! 세계 평화에 공헌하라! 과거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여기 와서 그 학대받고 고통스럽게 사는 조선 사람들의 지문 날인을 또 해서 차별 대우하려고 하느냐? 이것이 일본의 양심이냐? 이게 도대체 뭐하는 도깨비짓이냐?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일본이 뭐가 모자라서 마귀의 짓을 계속하고 있느냐? 이 악령의 존재들아!” 자기가 죽을 각오를 하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그 사람은 그 일 때문에 피해를 무척 입었습니다. 우선 자기가 목회하던 교회도 그 일을 하느라 사표를 냈습니다. 이 세상은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 때문에 이나마 세계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를 믿는 여러분! 성탄절을 우리가 맞이하게 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알아야 성탄이 기쁘지 않겠습니까? 오늘 아침에 우리들의 기도제목은 이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성취를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이 기독교 정신을 우리들이 잘 깨닫고 나는 어떤 평화의 도구가 될 것인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의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믿음 안에서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평화의 도구와 사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다함께 주의 일에 참여합시다
눅 19장 28~40절 / 김창인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9장 28절에서 4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다함께 주의 일에 참여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의 일에"라는 말은 "주의 고난에"로 바꾸어서 "다함께 주의 고난에 참여합시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길바닥에 종려나무를 깔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기도 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고 하고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주님의 고난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이 극치를 이루는 주님의 고난에 참여합시다 라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한가지 한가지 일로 모두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말씀을 따라 그들이 주님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한 것인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헌신으로 참여 (28-35)
우리들의 몸은 귀합니다. 천하의 한아름 되는 금덩어리를 줄 테니 네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내놓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또 당신의 아내를 내놓으라 할 때에도 아내를 내놓을 사람도 없을 겁니다. 이만큼 나 자신의 몸이나 아내의 몸은 천하를 갖다 주어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귀한 몸을 가지고 주님께 헌신하고, 봉사하고, 고난에 동참하며 충성한다는 것은 굉장히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에서 35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여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헌신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은 두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려 하실 때 베다니와 벳바게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에 두 제자를 불러서 건너편 마을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는 이에 곧 주님의 명하심을 받고 가서 나귀를 끌어 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심부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올라갈 때에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기까지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예수님이 뽑으셨고 심부름을 시킨 것입니다. 심부름은 말로 하는 것도 아니요,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몸으로 직접 뛰는 것이 심부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신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로는 명한 대로 헌신했습니다. 두 제자는 주님이 명하신 대로 건너편 마을로 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매여있는 나귀새끼를 풀어서 끌고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시키지 않은 것 중에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은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라고 시키는 대로 헌신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이름 없이 헌신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쉬고 있을 때 두 제자를 불러서 심부름을 시켰으면 이름을 밝혀줄만 한데도 성경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봉사하고 섬길 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자신을 앞세우게 되면 그런 봉사는 차라리 아니함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자발적으로 헌신했습니다. 나귀를 주님 앞으로 끌고 온 후에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걸쳐놓았습니다. 그 겉옷 위에 앉으시라는 뜻입니다. 나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랐기에 소를 많이 타보았습니다. 그런데 소를 타고 10리만 가면 소에게서 땀이 나서 바지가 젖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소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바지에 때가 끼게 되고, 소에게서 나는 지독한 냄새가 바지에 배고, 소에게서 빠진 잔털이 바지에 붙습니다. 나중에는 옷이 정말 더러워집니다. 이렇듯 두 제자들은 주님이 아무 깔개 없이 나귀를 타면 바지가 더러워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나귀의 등에 걸쳐놓은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옷은 더러워져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입니까?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돈 받고 한 것입니까? 알아서 한 일입니다. 봉사는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사실상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까?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 앞에 우리도 이런 헌신으로 동참하고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이 한 주간은 절제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세계 제2차대전 때, 독일 어느 시골에 있는 교회가 폭격을 맞아서 예배당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뜰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이 쓰러져서 땅에 묻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피난 갔던 교인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와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땅에 묻힌 동상을 꺼냈는데 손목이 잘려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 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교인들이 의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전의 손과 똑같이 만들어 붙이자 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그 동상을 녹여서 새로 만들자 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세우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나중에는 그대로 세우자는 의견이 많아서 그대로 세웠는데 예수님의 손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동상의 밑에 글을 새겨 넣었는데 “주님, 주님의 손이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손이 누구의 손입니까? 바로 우리의 손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이 한 주간도 주님의 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즉 주님의 고난에 헌신으로 참여하자는 말입니다.
둘째, 가진 것으로 참여 (31-34)
우리들은 없다고 해도 가진 것이 많이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은 네게 있는 경우가 많듯이, 네게 없는 것이 내게 있는 것도 많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밀라노 한인장로교회 집회를 다녀왔는데 성가대에 대해서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성가대의 전원이 이태리 밀라노로 성악 유학을 온 유학생들이었습니다. 성악전공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얼마나 찬양을 잘하는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서울시립합창단, 안산시립합창단 또는 부천시립합창단들과 같이 노래 잘하는 전공자들에게 월급을 주고 뽑아서 이루어진 합창단의 노래는 많이 들어봤지만, 성악전공자로만 이루어진 교회의 성가대는 처음 봤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이 돈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들의 재능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자신의 달란트인 노래로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충성된 삶을 살고 있는데 그분들은 아주 복되고 귀하더라는 것입니다.
정신지체 장애아동을 교육하는 광성하늘빛학교의 선생님들을 보시면, 모두 특별한 재능을 가진 분들입니다. 일반학교 선생님들과는 다릅니다. 일반학교에서는 30~40명의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면 모두가 말을 잘 듣지만 하늘빛학교 학생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 반의 학생이 6명이지만 그 학생들을 관리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정신지체나 정서장애 아동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자원봉사 하는 분들이 매일마다 순서를 정하여 각 반에서 교사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이 얼마나 그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가르치는지 1년만 공부하고 나면 달라지곤 합니다. 우리 교회는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을 통합해서 교육을 시키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에나 이렇게 통합해서 교육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통합을 하면 어린이들이 함께 어울리지 못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이 모두 다같이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며 예배드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모두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광성하늘빛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를 정말 잘 가르치는 특수교육의 재능이 있습니다. 일반 초등학교의 교사들과는 그런 면이 다릅니다. 그래서 장애아동을 잘 보살펴서 비장애아들과 잘 어울리도록 합니다. 하늘빛학교의 특수교사들에게는 이런 특별한 재능과 소명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사들은 자기들의 가진 재능으로 주의 일에 봉사함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그 돈을 가지고 봉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가진 것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1절에서 34절을 보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말없이 내놓았습니다. 즉 나귀의 주인들은 말없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면서 건너편 마을에 가서 매어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만약에 임자가 나타나서 왜 푸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만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건너편 마을에 갔더니 정말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나귀를 풀 때 임자들이 왜 푸느냐고 합니다. 주인이 한 명이 아닙니다. 임자들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나귀가 비싸기 때문에 혼자 살 힘이 없는지라 여러 명이 함께 샀습니다. 그런데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아무 말 하지 않고 나귀를 보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봉사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니까 말없이 바쳤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조건 없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나귀는 사람을 태우기도 하고, 물건을 실어 나르기도 하고 연자맷돌을 돌리기도 하면서 사람이 일하는 것의 두배 세배를 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귀를 하루 빌려주면 그 나귀가 저녁때 돌아올 때에는 사람의 세배 품삯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아주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필요하니 하루만 쓰겠다는 의도였었습니다. 하루면 세 사람 몫의 품삯을 받을 수 있지만 임자들이 그것을 내놓으라고 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조건 없이 대가없이 주님께 내놓았고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끝까지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나귀 주인이 처음에는 멋모르고 빌려줬다가 오후가 되어도 되돌려 주지 않으니까 찾아가서 내놓으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쓰시고 싶은 대로 끝까지 쓰시도록 한 것입니다. 끝까지 봉사하고 끝까지 충성한 것입니다. 주께서 되돌려 줄 때까지입니다.
넷째는 함께 내놓았습니다. 나귀 임자는 혼자가 아닙니다. 두사람 이상이기에 한사람만 강력하게 반대를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임자들은 하나같이 주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는 이 주간에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주님께 내놓으며 봉사하고 충성하며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굉장한 부자 록펠러를 아실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돈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리고 앳된 젊은이였을 때까지만 해도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돈벌기 시작하자 돈독이 오르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50이 넘어서자 허탈감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면서 정신 이상증세가 오고 끼니를 거르며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것은 첫째 벌기가 힘들고, 둘째 모으기 힘들고, 마지막으로 잘 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재산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 씀씀이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패가 갈라집니다. 록펠러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부터 교육사업을 시작하는데 학교를 짓는 일에는 열심히 동참했습니다. 이 사람이 직접 세운 학교가 미국에 있는 시카고 대학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짓는데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도와주었고 이분이 직접 세운 교회가 미국 맨하탄에 있습니다. 또 병원을 짓고, 자선사업을 합니다. 나아가서는 선교사업을 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자기의 가진 것으로 주의 일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귀 임자들도 자기들의 주머니를 모두 털어 나귀 한 마리를 어울러 산 것이 아닙니까? 주가 쓰시겠다 하시니까 말없이, 조건 없이, 끝까지 내놓은 이런 봉사가 여러분들의 봉사요, 주의 일에 함께 하는 참여이기를 바랍니다.
셋째, 찬송으로 참여 (36-40)
본문의 36절에서 40절을 보면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며 찬송을 합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그 찬송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저희들이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찬송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능력으로 행하시는 행사를 체험하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험하고 부르는 찬송입니다. 병고침의 능력, 오천명을 먹이신 능력,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능력의 모든 것을 본 그들이 부르는 찬송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뻐하며”찬송했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지겨워하며 억지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찬송은 기쁨으로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찬송가를 부를 때 5절까지 있는 찬송 그것도 두 쪽에 걸쳐있는 긴 찬송을 부르자고 하면 인상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또 한번 더 부르자고 하면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그런 찬송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 없습니다. 찬송은 기쁨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즉 열정적이요, 최선을 다해 불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런 찬송으로 주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찬송소리를 듣기 싫어하며 불만을 토했습니다. 찬송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찬송을 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찬송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찬송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봉사하는, 충성하는, 신앙고백 적인 찬송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첫째로 헌신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가진 것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남이 갖지 못하는 것,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면 됩니다. 셋째로는 찬송으로 주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체험을 통해서 기뻐하며 큰소리로 찬송할 때 주님은 열납하십니다.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눅 19장 28~40절 / 임영수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기사입니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가 되어 그 준비를 하신 일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본문의 기사는 예수께서 여리고에서부터 오셔서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머물고 계신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필요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결의식에 관한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한 준비를 위해서 벳바게에 머물곤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역시 그곳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준비는 그가 타고 가실 어린 나귀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 그 일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병사들은 말을 탔지만, 가난한 이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타는 전형적인 가축은 나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그 나귀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타실 어린 나귀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계셨고, 나귀 주인이 그 나귀를 당신께 주도록 해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한 대로 나귀를 끌고 와 예수님을 그 위에 모셨습니다.
베다니로부터 감람산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정경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화려하게 빛나는 그 도시와 성전을 보고 매우 격앙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많은 수의 제자들이 더욱 열정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외쳤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 경의를 표한 군중 가운데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앞에서 그들은 예수께 헤롯을 조심하라고 경고 하였는데, 이제 그들은 또 다른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들의 경고에는 정치적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보고, 로마의 점령군들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라는 염려와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제자들에게 그 외침을 자제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침묵의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제안에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는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외침을 자신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드린다는 신앙고백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외침을 중단시킬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외침을 강압적으로 중단시키면, 돌들이라도 외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해한 왕으로서 메시아는 본래의 메시아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자료들 중에 사 복음서에 다같이 기록되어 있는 기사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기사만은 사 복음서에 다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이 기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예루살렘 입성 기사 내용은 복음서 기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며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관심은 이 왕이 그 당시 얼마나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백성의 지지도가 높았는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이 왕이 어떤 왕인가를 알리는 데 있었습니다.
먼저 누가는 이 왕이 이미 오래 전 예언자 스가랴에 의해 예언되어 있었던 왕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왕의 입성이 준비된 장소와 그가 탄 나귀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머무신 장소와 그가 타신 어린 나귀에 관련된 내용이 구약 스가랴서 14장과 9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슥 14:4)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슥 9:9)
누가는 마태와 요한과는 달리 이 왕을 증거하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 명절에 왔던 순례객들이나,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기적을 본 무리들이 아닌, 그를 오실 메시아로 믿고 있는 제자들에 의해서 증거되고 영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해 증거되고 영접받은 왕은 다른 복음서에서와 같이 다윗의 계통에서 나와, 그의 왕위를 계승한 왕으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이 왕은 평화의 왕입니다. 이 왕은 제자들에 의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는 축복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이 영접의 인사는 시편(118:26)에 있는 메시야 찬송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왕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에게 온 갖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에게 복을 내려주셨고, 그 분을 왕으로 환영하며 맞아들인 사람들은 그 분에게 인사하고 그 분을 예루살렘으로 모시면서 한껏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 고백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 제자들도 전에 장차 이 왕이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드디어 죽임을 당한 후 다시 부활 하셔서 세상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해한 왕으로서 메시아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만을 위해 오셔서 이스라엘 만을 회복시키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메시아 이해는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메시아 이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거기에 동참하여 그 분을 영접하였던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께 발생한 고난의 사건이 걸림돌이 되어 그를 믿고 고백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비록 그들 가운데 그들의 입장이 불리하게 됨을 알고 마음을 돌이켜 그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배신 행위를 한 사람들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 가운데는 자기들이 상상했던 왕이 아니고, 고난 당하고 죽임 당하는 왕을 보고 실망하여, 그를 왕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이 세상에서는 로마의 시저와 같은 정치적인 왕, 헤롯과 같은 음흉한 왕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형식주의 종교인들에 의해 참 평화의 왕에 대한 증거는 억압받고 거부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거짓된 증인들의 거부와 억압으로도 막을 수 없는 왕에 대한 참된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입니다.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실패하므로, 그 이후부터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이 죄의 힘에 묶여 있게 되었습니다. 죄에 묶여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하고 찬양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창이 닫혀져 있어서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감사하지도 못하고 찬양하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인간이 희망을 거는 대상은 권력, 돈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찬양하고, 거기에 희망을 둡니다. 또 왜곡되고 부패한 권력은 강압적으로 사람을 동원해서 그들을 환영하고, 찬양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 군왕들과는 달리 종의 모습으로 오신 이 평화의 왕은, 총, 칼이 아닌, "복종과 섬김"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을 통해서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를 자신의 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왕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 왕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증거되어 오고 있고, 계속 앞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 때 그 왕이 온전히 영광스럽게 될 때에는 모든 피조물들이 죄의 억압에서 풀려 나서 그 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시간을 내다보면서 이 사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권력의 한 자리를 얻기 위해 지지와 환호, 아부의 찬사를 보내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외침이 아닌, 진정 참 왕의 권세에 의해 죄의 억압과 사슬에서 풀려 난 피조물들이 당신의 나라와 권세, 영광이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라고 기뻐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아니어도 이 왕이 태어날 때 이미 천사들의 찬양이 있었고, 이 왕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할 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는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는 일에 실패하고 돌아섰지만 실제로 다른 피조물들이 이 분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보내신 바로 그 분임을 증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이 온유한 왕의 사건이 우리들에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왜? 우리는 종려 주일이 될 때마다 이 기사를 읽고 묵상하며 이 왕을 찬양해야 합니까?
이 분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 우주에 있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평화의 왕은 총과 칼로 이 세상을 정복하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꺾으셨고 영원한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 분의 통치는 그의 영광의 그 날, 모든 피조물들이 그를 찬양하게 될 그 날을 향해 진행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왕에게 일시적인 세상 권세, 명예, 재물, 성공에 대한 기대를 갖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 영광의 한 날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드리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영광의 그 한 날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분을 신뢰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영광의 날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현재 누구를 왕으로, 나의 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미래 희망으로 삼고 있는 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의 창을 통해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이 평화의 왕을 바라봅시다. 흐려지지 않은 영혼의 창을 통해 이 왕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기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시는 왕
눅 19장 28~44절 / 김상복목사
최근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가 전 세계의 화제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다녀온 요르단과 이라크는 벌써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더군요. 모슬렘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데,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꼭 보십시오. 저도 보았습니다. 온 교회가 함께 보았으면 해서 영화사에 알아보았더니 교회에서 상영하기는 기계의 문제도 있고 해서 어렵다고 하더군요. 제가 이 교회에 와서 영화를 보러가라고 권한 것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 1부 예배를 마치니까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제게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번 주 동안에 가족과 함께 그 영화를 보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고난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 새벽기도에 모두 오셔서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발자취를 함께 거닐며 그 뜻을 묵상하며 기도시간을 가집시다. 이번 성금요일은 예수님이 아침 9시부터 정오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으니, 여러분은 해가 있는 동안 한 두 끼 금식하시고 밤에는 온 가족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성찬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그날 성가대는 하이든 곡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합창할 것입니다. 이번 한 주는 노는 것을 자제하며 거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부활주일 아침에는 모두 함께 모여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오후에는 성남 실내체육관에 모여 성남지역 교회 연합 부활절 기념예배에 참석하십시다.
어제 밤에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주무셨습니다. 베다니에는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두 가족이 있었는데,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가족과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시몬의 가족입니다. 그들이 함께 예수님께 저녁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서 주무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난의 첫걸음을 내디디신 것으로 보입니다.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는 2km 정도 거리인데 그 중간에 벳바게라는 동네에 도착하셨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하셨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자들은 그 동네에서 매여 있던 나귀새끼를 보았고, 풀어가려니까 주인이 왜 그러냐고 물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했더니 허락하여 제자들이 당당하게 그 나귀를 끌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우리는 벽을 투시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셨어도 거기에 나귀가 있다는 것과, 또 주인에게 뭐라고 말하면 보내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미래를 아시고 영의 세계도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지 보통 사람이 우리를 위해 죽는다고 하면 아마 “당신이 뭔데?” 할 것입니다. 한 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전세를 무슨 돈으로 낼까요?” 했더니 예수님께서 “요 밑에서 그물을 던지면 고기가 잡힐 것인데 그 입을 열면 동전이 들어있을 것이니 그 동전으로 세금을 내자” 하셨습니다.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이 참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그분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보통 정복자들은 말을 타고 칼을 차고 입성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대로 섬기러 오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나귀를 타려니까 사람들이 몰려와서 자기의 옷을 벗어 나귀등에 깔고 예수님이 앉으시도록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무슨 옷을 골라 입을까 고민하지만 그 때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옷을 벗어서 예수님의 나귀안장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이 아침에 우리에게 오신다면 우리도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을 앉혀드리는 사랑과 헌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원합니다.
예루살렘에 다 오면 마지막에 언덕이 있습니다. 그 언덕에 서면 예루살렘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그 꼭대기에 오르시자 예루살렘의 순박한 대중들과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며 마음껏 환영했습니다.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37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인간이 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고 병자를 고치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고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기적들을 통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대속하여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께 환호를 보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환영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가시는 길을 격려해드리며 “호산나”와 “영광”을 외칩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다 나오는데, 성경에 따르면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가까이서 섬기며 동행한 사람들이 어찌 그리 이해를 못했을까요? 너무 바빠서, 너무 급해서, 너무 일에만 열심이다 보니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지는 않습니까? 제가 보아온 바로는 교회에서 일을 하는 것은 주심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나오지만 우리는 매일 나오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가까이 있다가 영적인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원도 교회에 매일 출근하니까 그만 거룩한 것이 거룩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로서 장로로서 안수집사로서 권사로서 위원장으로서 선교회 회장으로서 너무 바쁘게 일하다가 영적인 은혜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혹시 그랬다면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님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도록 날마다 도전하여주시옵소서. 늘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또 한 그룹은 이렇게 중요한 시간에 예수님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화를 내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좀 야단치세요”(눅19:39) 하고 나무랐습니다. 이에 오히려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을 냈습니다(마21:15). 이에 예수님은 “아이들과 젖먹이들에게서 찬양을 완성했다는 성경말씀을 읽지 못했는가?”반문하셨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인 우리들에게 영원히 “Yes!"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No!”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죄 사함과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새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모르고 거부하는 가족, 친척, 동료, 이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혀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문학의 이름으로 복음을 거부합니다. 제 후배 한 사람이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썼더군요. 이런 분들이 아직도 세상에 많이 있어요. 혹시 여러분 주위에도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지난주에 세례 받으신 남자 성도 중에 제가 참 오랫동안 기도하고 기다려 왔던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만난 지 십 몇 년 만에 그분이 세례 받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제 마음이 기뻤는지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주저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저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Yes!" 하셨는데 우리가 뭔데 "No!" 합니까? 모두 마음 문을 열고 하늘에서 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모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그분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하나님과 그 뜻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미래를 보시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지요.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23:37-38). 또한 예수님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2-43) 탄식하셨습니다. 영적 무지가 세상을 휘두르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만연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나와 나 자신이 영원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음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이 복음을 전해서 다른 분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를 통해 깨닫게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때가 A.D. 30년 쯤 되었는데 40년 뒤인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포위당했습니다. 이 기간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성 안에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항복을 하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애국자들은 죽어도 항복하지 못한다고 주장해서 결국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파되었고 많은 사람이 잡혀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어린 아기들을 내동댕이쳐서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한 도시의 멸망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거부한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은 일제 36년도 원통하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서 소위 'Diaspora Jew'가 되어 남의 나라에서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회복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오늘까지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멜 깁슨 감독이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를 만들자 유대인들이 “이것은 반 유대 운동이다”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 그가 무죄함을 세 번이나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살인자 바나바를 내어 놓으면서까지 예수를 구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바나바를 선택했지요.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 죽였습니다. 그들만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아닙니다. 온 인류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죄 때문에! 온 인류라고 하니까 내가 안 끼어있는 것 같습니까? 피너츠(Peanuts)라는 만화에 보니 챨리 브라운이란 개가 “I love humanity. But I hate people”(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증오한다)라고 하더군요. 나 또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 죄 때문에,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내 생명을 아무도 나에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0:18).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것이 또 있습니다. 자기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몰라본 것입니다. 44절에 보면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 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늘의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땅의 사람들이 하늘에 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건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면 이제는 2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 하나님과 영원히 등지고 어둠의 세계로 떨어진다는 것은 2천년 전 예루살렘의 멸망과 비교할 수도 없는 비극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 인간의 죄 사함과 구원과 천국을 위하여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다. 그 옛날 순진하게 예수님을 맞이하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우리도 오늘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합시다.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바로 나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깊은 영적 깨달음의 은혜가 있어 영혼이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성아! 평화를 알라
눅 19장 28~44절 / 민경설목사
전 세계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만큼 중요한 도시는 없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회교, 유대교 모두 각각 자기 종교의 성지로 삼고 있는 거룩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룩한 땅이요, 신비의 땅이며 축복의 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평화의 땅, 평화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평화, 신의 가호가 있는 땅이라는 뜻이 예루살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만큼 전쟁과 파괴와 피의 역사로 점철된 도시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의 역사는 약 B.C. 400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6000년의 역사 속에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이 그렇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불안과 공포와 싸움의 도시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을 오늘 주님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19:41-42)
주님이 우시기까지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은 평화에 대한 길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니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이제 평화의 왕이 우리 삶 속에 오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주님을 모실 나귀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맞은 편 마을 벳베게와 베다니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가서 나귀를 끌고 오리고 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눅19:30-31)
(1)정말로 주님이 쓰신다고 하면 아무 이유없이 내 주는 이름없는 나귀 주인이 나옵니다. 나귀는 유대나라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재산 목록입니다. 농사도 짓고 물건도 나르고 사람도 타는 최고의 운송수단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사막같은 중동 지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농부는 주님이 쓰신다고 할 때 물어보지 않고 선뜻 내놓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귀합니다.
(2)여기서 주님을 모시는 나귀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나귀가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착각하면 안됩니다. 자기가 잘나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축복받고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등에 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도 쫓겨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을 모시고 사는 나귀의 위치를 잘 지켜야 평화의 축복을 받습니다.
두 번째, 우리의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모시려면 겸손히 겉옷을 깔아야 합니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눅19:35-36)
여기서 겉옷은 우리의 명예요, 우리의 자존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님 오시는 길에 깔을 수 있을 때 평화의 왕은 오실 수 있습니다. 참 이것이 어렵지만 이것이 온전히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최고 영성 목회자로 알려진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스스로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쓰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어떤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자는 오직 스스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자를 불러서 하나님이 쓸모있게 쓰시어 영광 돌리게 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지금 여기서 구원하신다는 호산나 찬양 하는 자 속에 오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은 지금 여기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입니다.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고 미래에만 역사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지금 역사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고백하는 자 속에 역사하고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을 평화의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주님께서 교회에 바라시는 것
눅 19장 37~46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초기에 있었던 일 세 가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감람산 벳바게 마을에서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외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러자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제자들을 책망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니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그렇게 외치지 못하게 하라고 요구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 부르는 것은 유대교의 신앙에 심각한 도전이 되는 잘못된 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이 로마황제가 세운 헤롯왕이 아닌 스스로의 왕을 세우고 찬양하다가는 로마군대의 가차 없는 탄압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요12:12-13에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막11:9-10에 따르면 예수님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기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치고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말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란과 독립을 선동하는 구호로 들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에 따를지 모르는 로마 총독의 보복조치를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고 참 평화의 주시라는 것과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이루실 구원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나는 일은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만천하에 알려질 그 일에 대해 침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침묵한다고 해서 감추어질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온 나라와 백성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영접하며 그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두 번째 일은 예수님께서 곧 들어가실 예루살렘 성을 눈앞에 내려다보시며 애통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을 보시고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함이라" 탄식하시며 우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탄식 속에는 예루살렘 성의 완전한 파괴와 그에 따르는 비극에 대한 생생한 예언이 들어있습니다: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 그런데도 그 가까운 장래에 닥칠 일을 알지 못하고 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또한 이 탄식 속에 서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본문 38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며 외친 일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평화의 주로 오신 이이심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평화가 이루어지며 우리 인간들 사이의 평화가 또한 이루어지는 진리를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평화를 이루시는 일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에게도 평화가 이루어지며 하늘 아래 있는 온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짐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것을 바로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평화 대신 예루살렘 성의 완전한 파괴를 초래하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신 것입니다.
본문이 전하는 세 번째 일은 드디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사를 위하여 제물로 드릴 짐승들을 파는 사람들과 제물을 사기 위해 돈을 바꾸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환전상을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사꾼들은 정상적인 가격보다 비싸게 팔곤 했습니다. 거의 날강도같이 폭리를 취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마치 강도의 소굴처럼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기 위하여 있어야 할 성전이 더러운 재물욕에 사로잡힌 자들의 장터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기도소리보다는 짐승들 우는 소리와 장사꾼들의 떠드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막11:15-16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셨는지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성전의 참 주인이심을 만인 앞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참된 신앙을 회복시켜주시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당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참 평화의 왕으로 영접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메시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와 함께 인간들 사이의 평화를 이루실 참 메시야로서 믿고 따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위풍당당한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참 평화에 관한 일을 바로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심정으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깨끗한 성전에서 바른 기도와 신앙이 자리 잡은 도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탐욕스런 장사꾼들로 말미암아 어지럽혀진 하나님의 집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이 바른 신앙을 되찾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바라심에 대해 예루살렘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며 가르치신 모든 진리의 말씀과 그가 행하신 온갖 놀라운 이적기사들을 잊어버리고 그를 잡아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손에 넘기고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압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려고 하신 참 평화의 복음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파괴와 멸망을 초래했습니다.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을 가졌었지만 그 하나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예루살렘 성의 지나간 옛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깊은 영적, 실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시에 예루살렘을 향해 가지셨던 그 바람을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갖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울은 지금 이 지구상의 새 예루살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서울에 다 모여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이 민족을 21세기의 제사장나라로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나라의 경제력과 국민의 수를 고려할 때 대한민국은 세계 최대의 기독교선교국가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현대의 예루살렘이라 할 수 있는 한국교회가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을 배반하고 세상 권력의 손에 넘기며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냉철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진정한 왕이시고 참되고 유일한 평화의 길임을 잊어버리고 딴 길을 가려하고 있지 않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려다보시며 탄식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한국교회는 아닌지 냉엄하게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창립기념주일입니다. 우리 새문안교회는 내년이면 창립 120주년을 맞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그 역사성 때문에 싫든 좋든 한국교회를 대표하며 상징하도록 요청을 받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한국교회에 바라시는 모든 것을 이 교회에게는 더욱 간절히 바라실지 모릅니다. 지난 119년 동안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행하신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시고 참 평화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영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압박과 방해가 있더라도 그를 증언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참된 승리에 대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외쳐야 할 말들을 돌들이 외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 의한, 그를 위한 평화를 추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소리보다 온갖 이익을 탐하는 자들의 소리가 더 큰 교회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 살아 숨 쉬는 교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하시며 친히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창립 119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눅 19장 38절 / 이원근목사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한 사건을 들라고 하면 단연 예루살렘 입성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방문과는 다른 아주 매우 특별한 것이었으며, 인류와 세계의 역사를 바꿔 놓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과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었을 것이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특권과 축복은 하나의 요원한 계획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우리의 신분을 바꿔 소망을 가져다주는 관문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지만, 스가랴가 증거한 것처럼 성도들의 왕이요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평범한 한 소시민으로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위대한 왕으로서 환호를 받으신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심는 왕이십니다(요 14:27).
예수님께서 타신 동물이 전쟁 시에 타는 말이 아니라 평화 시에 타는 동물인 나귀인 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심을 잘 가르쳐 줍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실 수 있으며, 그것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요, 둘째는 이웃과의 평화, 즉 세계의 평화이며, 셋째는 마음의 평화, 영혼의 평화입니다. 지금 인류는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 여러 기구들을 만들고 많은 자원들을 투자하면서 노력하고 있는데,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소외하고서는 이러한 모든 노력들이 열매를 기대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실천하는 왕이십니다(막 10:45)
주께서는 섬김을 받는 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셔서 이에 대한 모본을 보이심으로 섬김의 중요성을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대립과 압력, 갈등이 끊이지 않으며 반목과 불화가 계속되는 것은 섬기려는 사람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몸의 각 지체들이 섬김에 충실함으로 건강한 몸이 가능하게 되듯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될 때에 우리 사회는 놀라운 변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자기를 희생하는 왕이십니다(마 20:28)
주는 죄인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멸망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냈습니다. 그분의 이와 같은 회생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도록 일깨워 줍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거룩한 마음이요, 성도가 가져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명심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평화의 왕이 되십니다. 겸손과 희생의 왕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평화의 왕,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원하는 일들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통틀어서 단 한번도 임의로 행하신 적이 없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충실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교훈 받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성취된다는 것입니다(잠 19:2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나 약속하신 것,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전혀 현실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게도 주의 말씀을 불신하거나 주의 뜻을 거역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많은 일을 계획할지라도 주의 뜻을 완전히 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삼상 15:22).
주님은 아들이시라도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온전히 순종하는 법을 배우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나 제물보다도 순종을 더욱 기뻐하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형통하게 되지만, 불순종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주께서 명하신 모든 것은 이성과 상의하지 말고 순종하도록 힘쓰십시오.
3) 성도의 선택은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마 7:21).
주의 이름을 부르다는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 들어가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성도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도무지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위에 두는 사람이 인생 경주에서 마지막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나귀 타고 오신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할 존귀한 분이십니다.
1) 그분은 모든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으셨습니다(마 28:18)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는 물론 심판하는 권세까지도 아버지께서 모두 그에게 위임하셨으므로 아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고 맙니다.
2) 그분은 모둔 사람의 죄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고후 5:21)
우리는 그분이 죄가 있어서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으므로 이것을 지고 영문밖으로 나아가셨습니다.
3) 그분은 지금도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십니다(히 9:15)
하나님 보좌 우펴에서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의 중보가 있으므로 연약한 우리가 정죄를 당치 않습니다.
결론
왕으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며, 우리가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평화를 심는 일꾼이 되고, 섬김과 희생을 실천토록 힘쓰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중히 여겨 이에 충성하며,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본을 따라 최선을 다 할 때 비로소 인정받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