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페리*를 입은 란제리의 밤
김도이
장미꽃 서늘한 눈빛이 한 번 스치는 순간 내 슬픔의 색들이 태어났다
빨강이 파랑에게 압도당한 게 보라라고 슈펭글러(Spengler, Ostwald)는 말했지만 빨강과 파랑 없이도 당신이 지나간 내 몸에는 보라색 꽃들이 잘도 피어났다 이마를 짚은 꽃들은 소리 없이 퍼지는 미열처럼 피고지고 피고 지고 바람과 햇빛과 물 없이도 한통속처럼 친숙하게 동거했다
울증이 심한 보라는 물들기 쉬운 얼굴을 가졌다 그늘에 숨어들어도 제 색을 입는 바이올렛, 달아날수록 살갗의 채도가 깊어졌다 우기를 묻혀온 꽃은 자신의 몸을 그리고 지나간 허공의 붓 자국
열정과 우울을 섞으면 귀족처럼 우아해지는 거라고 당신은 다독였지만 나는 스며들지 못하고 어둠 속에 숨고 싶었지
습할 땐 섞이는 거야 눈가가 촉촉해진 색이 말했다
당신에게 압도당한 나의 색은 이미 끝이 났지만 팬톤이 선정한 올 해의 오묘한 베리페리 란제리를 입고 오늘 밤 당신을 기다릴게 물들이지 않아도 살갗위에 돋아난 이 신비로운 보라를 보라 베리페리 베리페리 베리베리 베리 굿, 아름다운 나를 보라
* 팬톤에서 선정한 2022 컬러, 청보라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1월호 발표
김도이 시인
2014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얼룩의 시차』 (고요아침, 2017)와『장미를 수선해 주세요』(천년의 시작, 2022)가 있음. 2016년 홍완기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