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공 / 임창아
셔틀콕은 위에서 노는 버릇이 있다 자고로
위에서만 노는 것들은 꼭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
실은 그게 아니라
셔틀콕은 그저 선하나 긋기 위해 분주했을 뿐, 본래
하나였던 이쪽저쪽 네트가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선 하나 위해 팔매질 수십 번 했고
공 앞에 수없이 무릎을 꿇었다 또
허공은 얼마나 아팠겠으며
바닥 치는 공은 얼마나 민망했겠는가
죽어가는 공으로 곡선은 그을 수 있지만
게임에서 이기려면 곡선으로는 약하다
독 오른 꽃뱀처럼 아가리 벌려 날아오는 공
살아있는 상태로 때려잡으려면
바닥을 차고 올라 예각으로 내려쳐야 한다 하지만
승리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쪽과 저쪽 이은 공이 선을 이루고
그 선이 나와 만나 면을 이룰 때,
비로소 땀도 맘 놓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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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시가 나를 배반할지라도
임창아
1965년 경남 남해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2004년 <아동문예>문학상 동시 부문 당선
매 순간 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시인세계와 부끄러운
내 시를 손잡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시를 붙들고 있었지만 시는 좀체 나와 놀아주지 않았습니다.
나 보란 듯, 피 보다 먼저 내 몸을 한 바퀴 돌고는 어둠속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럴 때 마다 더욱 희미해지는 시력, 두려웠습니다.
이 세상 한 구석에서 젖은 발을 모으고, 오도카니 떨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구절 때문에 자주 덜커덕거려야했습니다.
솔직히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와 이미 죽은 시의 경계에서
그저 방황하기만 했을 뿐, 내 아픈 시늉은 아무 것도 돌려놓지
못했습니다.
시는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하였고, 그 불편함은 내 시 속
삐딱하게 들어앉아 걸핏하면 새벽잠을 불러들이곤 하였지요.
나와 놀아 주는 그 불편함 때문에 나는 시를 쓰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살맛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소리는 없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 사람들이 놓쳐 버린 것을 곁눈으로 줍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나도 모르는 것을 나도 모르게 발견하는
기쁨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시를 써야하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이런 불편함을 잘 숙성시켜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일, 그 속으로 세상이 버린 은유들을
불러들여 못살게 구는 일. 비록 시가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그 일에게 새끼손가락을 걸겠습니다.
끝으로 내 몸과 생각에 함부로 힘이 들어 갈 때, 힘을 빼라고
타일러 주신 이성복 선생님 장옥관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 잊지 않겠습니다.
굳세게 시 우물을 파고 있는 계명대 문창과 식구들과
내 가족들, 이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여성시의 또 다른 시각 / 김종해
유례없이 많은 211명의 응모작 가운데 예심을 통과한 14명의
작품이 최종심에 남았다. 마지막까지 5명의 예비시인이
경합했는데 임현의 <판도라 상자>(외 9편), 한요의 <달려라
덩굴>(외 10편), 박혜정의 <여섯 개의 시선>(외 9편),
임창아의 <살아 있는 공>(외 9편). 하얀의 <도시이력기초문법>
(외 9편)이 그들이다.
한 편의 뛰어난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 것이 아니라 다섯 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 규정 때문에 한두 작품의 역량과
가능성을 인정받은 임현, 박혜정, 한요 세 사람이 먼저 탈락
하였다. 하얀의 작품과 임창아의 작품이 끝까지 경합했는데,
하얀의 <도시이력기초문법>은 시로서의 자유분방한 개성과
상상력은 살 만했지만 시의 유기적인 연결이 거칠었다.
당선작으로 뽑힌 임창아의 시 <살아 있는 공>을 비롯한 4편의
작품은 화자가 체득한 독특한 자기경험이 시편마다 이야기의
궤를 달리하며 시화되어 있다.
이 시인이 진술하는 자기경험의 이면에는 나름대로의 삶의
문리와 지혜가 터득되어 있고, 시로서의 공감대를 획득한다.
성을 금기시하지 않고 자기고백을 통해 시원스럽게 드러내
보여 주는 시 <어떤 일의 순서>가 있는가 하면, <살아 있는 공>
에서는 셔틀콕을 헛손질하는 화자가 "허공은 얼마나 아팠겠으며
/바닥 치는 공은 얼마나 민망했겠는가"라는, 누구도 전혀
생각해 봄직하지 않은 엉뚱한 진술을 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미소가 떠오르게 만든다.
더구나 시 <어떤 일의 순서>에서는 여성성의 시각에서 본
수소와 암컷의 교미를 동물적 성애로서보다
'수컷의 신사적 마무리'와 '순서'를 생각하며 "저 말없음의
예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격조를 높인 여성성의
자기주장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날카로운 직관이 찾아내는
여성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한다.
삶의 체험을 새롭게 인식 / 정호승
시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물과 현상이 내포하고 있는 시적세계를 예리하게 칼로
도려낸 듯하다. <살아 있는 공>의 경우, 공과 선과 바닥의
관계를 통해 너와 나와 우리라는 인간관계의 비밀을
성찰하게 만든다.
특히 수소를 교미시킨 대가로 받는 돈과 시적화자의 삶이
자연스럽게 연결된 <어떤 일의 순서>는 전체적으로
지극히 산문적으로 형성돼 있으나 '일의 순서'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은유의 획득에 성공하고 있다.
삶의 체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의
근원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인은 신인 아닌 신인이다.
보기드문 '걸출한 신인' / 정끝별
임창아의 <살아 있는 공>외 9편을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의견이 일치했다.
능청과 정곡, 치밀과 분방, 집중과 방출, 통찰과 유머가 버무려진
맛깔스런 시편들은 신인답지 않을 정도로(?) 녹록치 않은
시의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셔특콕의 움직임을 좇는 집요한 관찰력과 거기서 삶의 비의를
묘파해내는 <살아 있는 공>의 시적 통찰은 날렵하고, 성과
성과 삶을 굴비처럼 줄줄이 한 쾌로 엮어내는 <어떤 일의 순서>
의 천연덕스러운 시적 절제는 깔끔하다.
시쓰기의 자기반여성을 보여주는<선택된 시>의 언어적 자의식은
유연하고< 서사적 욕망에 기대 풀어 내는 <주름잡던 시절>의
시적 방출은 활달하다. 보기 드문 '걸출한 신임' 임에 틀림없다.
막힘없는, 시인의 새날을 기대하며......
[출처] 살아있는 공 / 임창아|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