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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누가복음 19:41-48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눅 19:41-48 / [예루살렘의 불행] 그 행렬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도성을 바라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영원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네 앞에 있는데 너는 그 길에서 돌아서 버렸구나. 43) 네 원수들이 진을 치고 너를 에워싸서 사면으로 공격하여 44) 너와 네 자녀들을 멸망시킬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네 원수들은 돌 하나도 제자리에 얹어 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기회를 네가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45) [성전 청결; 마 21:12-17, 막 11:15-19, 요 2:13-2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46) 말씀하셨다. `성경에 ㄴ) `내 성전은 세계 만민이 다 와서 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ㄴ. 사 56:7, 렘 7:11) 47)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 예수께서 그후 날마다 성전에 나가 가르치시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일 궁리들을 하였다. 48) 그러나 백성이 모두 예수를 우러르고 있는데다 그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으므로 선뜻 좋은 방도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집이 본래의 자리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 예배의 집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신 예수님(41-44)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슬픔을 넘어 구원의 때를 놓친 인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아픔을 드러낸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한 백성에 대한 깊은 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 곧 자신을 통한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길이 숨겨졌고, 영적인 눈이 가려진 그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실제로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은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기회를 저버린 결과였습니다.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45-46)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을 정화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질서의 회복이 아닙니다. 본래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성전을 왜곡된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강도의 소굴이라 책망하시며 이사야 56장 7절과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시면서 예배의 본질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의를 강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47-48)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서기관, 지도자들은 그분의 영향력을 위협으로 여겨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와 진정성,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분노한 이유는 단지 정치적 위협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위선과 탐욕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낱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의 적대감은 자신들의 죄악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내면의 반발이었습니다.
적용: 성전의 변질은 형식주의와 이익 추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삶과 예배자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연약한 존재였던 야베스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은 에스라 시대에도 역사하시고 오늘에도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존재가 연약하고 유명하지 않으며, 완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계십니다. 내가 오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출처]–국민일보
< 설 교 >
예고된 불행을 예방하려면
누가복음 19:41~44 / 송기성목사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9:41~44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불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 속에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신 예수님께서 성을 보시고 울으셨습니다. 여기서 ‘울으셨다’(에클라우센)는 것은 비통하여 통곡하며 우신 것을 뜻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셨으며(요11:35),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신 적도 있으셨습니다(히5:7).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시고 우신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예루살렘 주민들의 불행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불행은 예고된 불행이었습니다. 그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예고된 불행은 그들의 영적인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영적인 무관심과 무지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예고된 불행을 은혜롭게 예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무지와 무관심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멸망과 불행을 결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그 영적인 무관심과 무지에서 깨어난다면 예고된 불행을 은혜롭게 예방하고 면할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1. 우리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누가복음 19:42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여기서 ‘평화에 관한 일’이란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what is needed for peace!)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예고된 불행을 예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라며 한탄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가까이 가실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찬양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7,38)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왕으로 고백하며 하늘에는 평화요 하나님께는 영광이라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19:39)라며 반발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예수님 찬양을 신성 모독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19:40)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호하는 사람들의 찬양이 정당하며 아무도 그 찬양을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의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찬양은 어떤 물리적인 위협과 시험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찬양을 거부하거나 마땅히 찬양해야 할 때에 침묵하는 것은 결코 하늘의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오늘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솔하게 믿음으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야 예고된 불행을 주님의 은혜로 예방할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미국 코넬대학의 앨런 블룸 교수는 그의 책「미국 정신의 종말」에서 세계 제1의 강대국이며 하나님의 복을 어느 민족보다 많이 받은 미국이 타락의 온상이 된 이유는 기독교적 삶의 가치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프랑스의 언론인 에릭 제무르도「프랑스의 자살」이라는 책에서 “지금 프랑스가 자살의 길을 걷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이슬람을 허용하고, 동성애를 용납한 것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영국 기독교법률센터 대표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변호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5년 내에 한국의 기독교가 문을 닫기 시작할 것이다.”라는 매우 충격적인 말을 하고 갔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지는 데서 찾았습니다. 그는 영국 교회가 낙태법 폐지와 동성애에 침묵함으로써 무너졌다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고 지적한 것입니다(이승희, 하나님을 알아 가는 행복).
대한민국의 몰락과 기독교의 쇠퇴에 대한 경고와 경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외국인들이 지적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북한 분단 체제 하에서의 이념 갈등과 전쟁 위협입니다. 1975년 10월 북한은 평화조약만이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공고한 평화상태로 넘어간다며 남북한 간의 평화협정을 제안하며, 그리하면 남조선에서 외국 군대가 머물러 있을 그 어떤 이유와 구실도 없게 된다며 사실상 미군 철수의 음모를 꾀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1990년 6월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북과 남은 조선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들자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에 부응하여 남한은 1992년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협정을 맺고 남한에 배치된 전술핵을 철거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때부터 핵개발을 시작하여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했습니다.
평화조약, 평화협정,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합니다. 베트남에서도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이 철수한지 2년 만에 공산화되었습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노라고 위협하며 핵무기를 개발한 북한과의 평화협정이 어찌 평화를 위한 길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고민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찬동하며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각계각층에 많이 포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던 예수님께서 오늘의 서울을 보시고 우시며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라며 한탄하실 것만 같아 민망하고 죄송할 뿐입니다.
요한복음 14:27에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는 사람은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 예고된 불행을 예방하고 약속된 평화를 향유하게 되시기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보살핌 받는 날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또 하나의 이유는 누가복음 19:43~44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 하신지라” 여기서 ‘보살핌 받는 날’이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the time when God came to save you.), 또는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러 오신 때’(the time when God came to judge you.)라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신 때는 심판하러 오신 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예고된 불행을 예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라며 한탄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시46:4)로써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윗 성’(삼하5:7)으로도 불리워지는 성으로써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강성한 성’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해진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삼하5:10).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들이 그 강성한 다윗 성을 사방으로 포위하여 그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땅에 메어치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도록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아무리 평화의 터전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이요 강성한 다윗 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하면 파괴와 멸망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곧 예루살렘의 불행은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예고된 불행은 예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시면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사56:7)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렘7:11)로 만들었도다 라며 경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회개하며 기도하기는커녕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하나님의 보살핌 받는 날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오늘 회개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예고된 불행을 주님의 은혜로 예방할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욘1:2)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가려다가 큰 폭풍을 만나 죽을 뻔하였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임하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그 이야기를 듣고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굶은 베 옷을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에 조서를 내려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욘3:7~9)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그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니느웨의 멸망, 그것은 예고된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살핌 받는 날을 알게 하시려고 선지자 요나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케 하셨습니다. 다행히 니느웨 사람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으며 회개하고 악할 길에서 돌이키고 떠났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보살핌 받는 날을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날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매우 싫어하고 성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히 하나님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 자기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했습니다(욘4: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4: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11~13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 대신에 평화를 주시고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보살핌 받는 날을 알아 예고된 불행을 예방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속에 희망하는 미래를 맞이하게 되시기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신 예수님
눅 19장 41~42절 / 김우영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년의 공생애 기간중 세 번 우셨습니다. 첫 번째는 분문에서, 두 번째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요11:35),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히5:7)입니다. 지금은 사순절(부활 주일 전 40일)입니다. 본문은 사순절 기간에 주어진 말씀이며,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우심은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사랑 경고를 무시, 거부함으로 인해 예루살렘이, 멸망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Ⅰ: 경고를 무시한 백성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42절)" ‘너'란 예루살렘을 인격화하여 호칭하심이며, 이는 예루살렘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신 말씀이요, 동시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기 전에 이미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회개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고 배척, 멸망의 길로 치달아 감에 애탄 하셨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13:34)" 부모가 자녀에 회초리를 댐은 몇 번의 경고 후입니다. 하나님께선 경고 없이 심판치 아니하십니다. 개인이나 민족이 매를 맞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크고 작은 사랑의 경고가 이미 여러번 주어졌었음입니다. 무지, 몽매, 불신앙, 강퍅... 주님의 사랑 경고를 무시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경고 무시병,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3·1절 83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 국민은 일제 36년 식민지 생활의 경고 6·25 동란의 경고를 잊고 있음은 물론, IMF 경제 환란의 경고를 벌써 잊고 있습니다. 역사의 경고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민족적 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사람, 민족은 징벌을 각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처절한 비통으로 끝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실낙원의 생활을 하게 됨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 거역한 결과입니다(창3장).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2∼3)" 예수님의 탄식이십니다. 유관순 열사가 어느 날 이화학당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통곡을 했답니다. 이를 본 스크랜턴(M.Scranton) 선교사가 우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 나라 조국을 보면서 울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대답입니다. 포수에게 쫓기던 사슴 한 마리가 포도원에 들어가 몸을 숨겼습니다. 이를 모르는 포수는 사슴이 숨은 포도원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러자 배가 고팠던 사슴은 포도 잎을 아삭아삭 뜯어 먹었지요. 이 소리를 듣고 포수가 되돌아와서 포도 잎을 먹고 있는 사슴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습니다. 사슴이 총에 맞아 죽어가며 한 말입니다. “나를 보호해 준 포도 잎을 뜯어먹었으니 죽어 마땅하지..."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비와 축복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경고에 귀를 막고, 거역한 자에게 와지는 것은 파멸뿐입니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잠10:13)"
Ⅱ : 숨겨진 멸망
예수님은 인간의 과거, 마음의 중심, 미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평화에 관해 알지 못하여 예루살렘이 처절하게, 완전히 파멸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44절)"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44절)", 이는 예루살렘이 완전 파멸됨의 원인으로 ‘권고 받는 날'이란 ‘하나님께서 방문하신 날', ‘하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건만 그들이 알지 못함을 말씀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선 그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호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도, 듣지도 아니했습니다. 해서 예루살렘에 멸망이 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평화를 모름은 평화의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함입니다. A.D 70년 유대민족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의 티투스(Titus)장군은 10군단 15만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완전 초토화 시켰습니다. 당시 죽은 자가 110만, 노예로 끌려 간 자가 9만 7천, 예루살렘성 밖에서 죽은 자가 42만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쟁기질을 하여 농사를 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1808~1814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시(The Peninsular War) 영국과 프랑스와의 접전중 프랑스의 한 포병 대위가 좌측 숲속에 있는 군대를 향해 정확히 포사격을 했습니다. 망원경을 가지고 포가 날아간 방향을 주시하던 공작이 한말입니다. “대위! 정통으로 명중시켰군. 그러나 그들은 아군 39연대 이네" 바로 알지 못함은 자기가 자기를 파멸케 하고, 타인도 망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멸망이 그들에게 숨겨짐의 까닭은 첫째, 모든 사람들이 다 멸망해도 자기들은 제외 된 줄 알고 있음이며, 둘째 지금까지 죄를 짓고 살았음에도 징벌이 신속하게 집행되지 아니했음이요, 셋째, 패역한 불신앙 사상의 팽배함이며, 넷째, 주님의 경고를 무시, 거절함이 큰 파멸의 원인되는 죄인줄 알지 못함입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을 감추도록 교사하고, 사람들을 망하게 하려고 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를 모른채 취해야 할 알맹이는 버리고 버려야할 껍질만 붙들고 있습니다. 죄 의식이 없는 한 용서도, 구원도 없습니다. 악은 자연발생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심고, 기른것입니다. 거두는 것은 파멸입니다. 완악한 자가 일시적으로 성공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세주의 사랑 경고를 거부하고, 구세주를 모르는 자는 오늘 평화로운 것 같아도 내일에 비참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허나 주님의 경고를 듣고 돌이키면 내일에 행복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은혜이며, 돌아온 탕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Ⅲ : 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으나 앞서 말한바와 같이 우심은 세 번 있으셨습니다. 최고의 언어는 눈물입니다. 눈물은 사랑의 진실이요, 아픔의 웅변이며,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토로요, 해석이 필요없는 해석입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우시다' 라는 헬라어 ‘에클라우센'은 단순히 우는 정도가 아니라 슬프고 비통하여 통곡함입니다. 예수님께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 경고를 듣지 못하는 완악에 우셨고, 그리스도들 알지 못하고 배척하는 무지에 우셨으며, 자신들이 미래에 닥칠 큰 비극을 모르고 사는 몽매함에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우심은 메시아적 통곡, 곧 하나님의 통곡이셨습니다. 주님의 우심은 미래가 암담한 인간들로 인한 슬픔이십니다. 주님의 슬픔은 주님의 사랑 깊이 만큼 깊으셨고, 사랑하신 만큼 아프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삶의 시작이 되고 삶의 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통곡의 대상인 무지 벗어나야 하고, 통곡의 대상에서 벗어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성령받으면 나 때문에 우시던 예수님께서 나로 인하여 기뻐하십니다. 무지는 타락의 깊이와 파괴의 괴력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으신 사랑이요, 개인적인 사랑이며, 참으시는 사랑이요, 용서하시는 사랑이며, 돌보시는 사랑이요, 베푸시는 사랑이며, 희생의 사랑입니다. 인간들이 이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아니하여 예수님께서 통곡하신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아니하면 재난을 당하고, 때가 이르렀음에도 행하지 아니하면 되려 재앙을 받는다' 이는 사기에 있는 말이며, “연약함 때문에 죄지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니 죄를 고집하는 자들은 용서하시지 않는다" 이는 헤릭(R. Herrick)의 말입니다. 사람은 의인의 눈물에 감동되어야 하고, 주님의 눈물에 회개해야 됩니다. “인자야...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 33:7)"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고 우신 주님께서 정치를 변혁코자 하셨으면 헤롯궁으로 가셔야 했고, 교육을 개혁하시려면 가말리엘 대학으로 가셔야 했으며, 경제 동향을 아시려면 예루살렘 시장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허나 예수님께선 여기도, 저기도 아닌 성전으로 가셔서 성전을 숙청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대상은 정치, 교육, 경제가 아니라 성전안에서 잘못되어 가는 신앙이셨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저쪽이기 전에 기독교요, 교회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요, 바리새인들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거룩한 눈물을 흘립시다
눅 19장 41~44절 / 안효관목사
예레미야 9:1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세상에 가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맨 처음 천사가 가지고 온 것은 다이야몬드였고, 두 번째 천사가 가지고 온 것은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美)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가지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후 세 번째 천사가 들어왔는데, 그가 가지고 온 것은 죄인들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매우 흡족하게 여기시며 "네가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 있습니다.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 흘리는 '아픔의 눈물'도 있습니다. 헤어진 이산가족을 만났을 때 흘리는 '반가움의 눈물'도 있고, 너무 기뻐서 흘리는 '환희의 눈물'도 있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통회하는 '참회의 눈물'도 있고, 괜한 누명을 쓰고서 속상해서 우는 '억울한 눈물'도 있습니다. 어떤 깊은 절망 속에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있는가 하면, 목적한 바를 이루었을 때 흘리는 '승리의 눈물'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하품을 하다가 흘리는 '생리적인 눈물'도 있습니다.
이런 많은 눈물 가운데 가장 값진 눈물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실 모든 눈물은 그 자체로 값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 값지고, 어느 것이 값싼 것이라고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이 흘려야 할 거룩한 눈물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떤 눈물에 '거룩하다'는 말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이 흘려야 할 거룩한 눈물이 최소한 세 가지는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첫 번째가 '회개의 눈물'입니다. 3년 동안 수제자로 자처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자 이렇게 호언장담합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1-35)
여러분, 그러나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을 때에, 멀찍이에서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간 베드로는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않은 한 천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최후에는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자, 예수님 말씀처럼 닭이 울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26:75) "심히 통곡했다"는 말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왜 울었습니까? 왜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울어야 했습니까?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이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갈지라도 저는 절대로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자신이 미천한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키워왔던 자신의 믿음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과 함께, '내가 내 입으로 주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엄습한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말라서는 안됩니다. 죄악 덩어리인 세상 속에 살면서 '나는 전혀 죄와 상관없이 고결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몰라도, 여전히 인간적인 연약함과 죄의 유혹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솔직한 모습 아닙니까?
회개한다 하면서도 눈물 없이 메마른 입술로만 회개한다면 그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눈물 없는 회개는 가식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회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애통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해서 애통해 해야 합니다. 애통함에는 눈물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성군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이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하루는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어 음식을 잡수고 계셨습니다. 그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인이 무례함을 무릅쓰고 향유가 가득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눅 7:37-38)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여러분, 그 여인이 왜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겠습니까?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서니 자신의 죄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자신은 예수님의 발에 묻은 때만도 못한 존재라는 인식 때문에,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린 것 아니겠습니까? 눈물로 자기의 죄를 통회하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겨드린 그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능력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사라지고 있다면 우리는 점점 천국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메말라간다면 우리는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마르는 순간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한 자리에 올라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공급받는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십시다. 그게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신앙인이 흘려야 할 거룩한 눈물은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가족입니다.(요 11:5) 마르다의 형제들에게는 부모님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마르다의 남동생 나사로가 시름시름 앓더니만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 가족이 살고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된 후였습니다. 베다니 마르다의 집에 도착해보니 온 동네가 울음바다였습니다. 사랑하는 마리아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우는 모습을 보시고는, 또 주위에서 동네 사람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는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우셨겠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무덤 앞에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고,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 때문에 초상집이 되어버렸던 마르다와 베다니 동네에 기쁨을 되찾아 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분명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눈물은 동생 나사로를 무덤에 장사하고 슬픔에 젖어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공감한다는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이 죽었고, 그 동생을 자기들의 손으로 무덤에 장사해야 했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그 슬픈 마음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슬픔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한다고 위로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큰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라고 말 한마디하는 것보다, 말없이 손을 꼭 잡아주는 것, 가볍게 몸을 안아 주는 것, 그게 훨씬 더 큰 위로가 됩니다. 그것보다 더 큰 위로는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눈물은 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나눈다는 뜻이 됩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도 당사자로서 그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는 표현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이 바로 그런 의미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네 사람들이 "보라, 예수님께서 평소 나사로 얼마나 사랑하셨는가!"(요 11:36)라고 소근거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정말로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마음에 큰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고통, 그리고 슬픔을 함께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마르다의 가족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시고자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 4:15) - 이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에 동참하여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슬픔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우리가 힘들어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을 때에도 우리 대신 짐을 지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멀리서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고난을 우리를 대신해서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우리 대신 아파하시고, 우리 대신 슬퍼하시는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의 짐을 대신 져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의 고통과 슬픔의 짐을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우리가 마땅히 담당해야할 연약한 자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남몰래 흘리는 눈물입니다. 고통 가운데 절규하며 흘리는 눈물에 주님처럼 함께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자는 일생에 세 번 외에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라는 말입니다. '남자는 자고로 태어날 때 한 번 울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또 한 번 울고,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울고. 이 세 번 외에는 절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엄격한 유교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 가르침 탓인지, 오늘날 우리들에게 눈물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각박한 세상이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눈물이 없는 곳에는 못된 것들만 무성하게 자라기 마련입니다.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메말라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 시대는 메말라 있습니다. 마치 황폐한 사막과 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보고에 따르면, 눈물에는 놀라운 살균력(殺菌力)이 있답니다. 눈에 침투해 들어오는 많은 병균들을 죽이기도 하고 막아 주기도 하는 것이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눈물은 눈에 들어오는 병균만 막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병균도 막아줍니다. 원망, 불평, 이기심 등은 전염병균과 같아서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슴에 '독이 묻은 화살'을 박아 죽게 하는 악독한 병균입니다. 이 모든 병균들을 죽일 수 있는 게 눈물입니다. 동정의 눈물이 쏟아질 때 - 뜨거운 사랑의 눈물이 쏟아질 때, 남을 원망하는 것이나 시기, 불평, 이기적 행동들과 같은 모든 악한 마음의 병균들이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우리 안에, 그리고 내 이웃의 마음에 따스하고 온유하고 예쁜 새 마음을 만들어 줍니다. 마치 상처를 소독한 후에 새 살이 돋아 나오듯이, 눈물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고 영적인 새 마음을 갖게 해 줍니다.
여러분,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 눈물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내 이웃의 마음에 천국을 만들어줍니다. 슬픔을 나눔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능력이 되고, 고통을 나눔으로 영광을 회복하는 능력이 됩니다.
세 번째로 신앙인이 흘려야 할 거룩한 눈물은 '나라를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신앙인은 두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는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내가 속한 이 민족, 이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 6:33) 삶을 살아야 함과 동시에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을 위한 삶을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8월 15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기쁜 날입니다. 저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아서 체험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일제로부터 압제를 당하던 35년 동안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에는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양심을 따라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하겠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신앙적인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창씨개명이라는 것 때문에 부모님이 주신 이름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일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어놓으면 전쟁을 위한 군량미(軍糧米)로 다 빼앗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해방 후에는 6.25전쟁을 통해 나라를 공산주의에 빼앗길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서도 이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켜온 것이 이 민족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정치적인 모습이나 경제적인 모습이나 사회적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런 모습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얼마나 두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을 욕하기 이전에, 우리 민족에게 지난 몇 년 동안 경제적인 아픔을 안겨주었던 사람들을 탓하기 전에, 사회를 어둠 속으로 몰아가는 일부 못된 사람들을 나무라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 민족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민족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이 민족을 위해서 우리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신약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한 언덕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네가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구나! 얼마 후에는 적군이 쳐들어와서 이 온 성을 무너뜨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 텐데,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구나!"
지금 예수님은 그 예루살렘에 죽으러 들어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몇 일 후에는 그 예루살렘 성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혀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어가야 합니다. 자신을 죽일 성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그 성을 보시면서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정권과 자기들의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멸망의 순간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오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처럼 자기 민족, 자기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레미야도 눈물로 조국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파멸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권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멸망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조국의 내일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그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외쳐도, 바벨론에 항복하는 길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에 관심 두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조국을 사랑하기에 예레미야는 마지막 남은 눈물을 다 쏟아놓으면 민족을 살리는 길을 찾아 나섭니다. 민족을 생각하기만 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옵니다. 그게 예레미야의 신앙입니다.
모세는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기도했습니다.(출 32:31-32) 위대한 사도 바울도 자기 동족이 구원을 받는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롬 9:3)는 아름다운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자기의 인생과 자기 종족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 뿐 아니라, 생활을 영위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 조국, 내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사랑하신 우리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로 기도해 보셨습니까? 내 민족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신 마지막 사명이자 특권입니다.
시편 126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내 죄를 통회하면서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나, 내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이 거룩한 눈물에는 절대로 거저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린 만큼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 회개의 눈물에는 사죄의 은총과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 이웃을 위해 흘리는 눈물에는 성숙한 믿음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으로 채워주시고,
▷ 내 조국을 위해 흘린 눈물에는 삶의 평안과 풍성함으로 갚아주십니다.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가슴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닥까지 추락해본 사람은 눈물을 사랑합니다.
사람은 흘린 눈물만큼... 인생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눈물이 메마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한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참된 신앙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흘리는 거룩한 눈물의 양만큼 우리의 신앙과 사랑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지금 거룩한 눈물이 고여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신 이유
눅 19장 41~44절 / 김진호목사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다는 기록이 세 번 있습니다. 첫 번째 우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피우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에 가셔서 우신 동정과 사랑의 눈물이었으며, 두 번째 우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전날밤에 땀방울이 핏방울되도록 고통의 기도를 하실 때 자신의 아픔으로 우셨고, 세 번째 우신 것은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한 대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신 애국애족의 눈물이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은 없어도 이토록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이 있다고 해서 결코 예수님이 세상을 비관하신 염세적이고 비관주의자는 결코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우심은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그때마다 의미깊은 눈물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엔 기쁨을 강조하셨지만 의미 있는 눈물도 귀하게 여겨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성군 다윗은 자신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게 해달라고 까지 말씀하였고, 예수님의 팔복중 두 번째로 "애통하는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기도라도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국경은 없으나 기독교인에게 조국은 있다」. 그래서 한나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태의 문을 열어 주심으로 사무엘이 탄생되었고, 히스기야왕이 죽을 병에서 눈물로 기도함으로 기적적으로 나음을 얻은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눈물은 마음의 극한 표현입니다. 눈물의 기도는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눈물의 기도가 방황했던 자식이 성자로 변하는 역사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성 어거스틴)
(감리교회에 은퇴하신 한승호 목사님의 간증)
오늘은 3.1절 83주년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바로 알고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신 것은 자기민족인 유대나라에 대한 애국애족의 눈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민족과 자기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눈물을 흐리셨겠습니까? 어찌보면 눈물은 사랑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이 기쁠때도 눈물이나고 슬플때도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기쁜일이 있을때는 기쁘다고 울고, 자녀들에게 불행한 일이 있을때는 마음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것은 바로 그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그는 자기 조국을 사랑하고 그 조국을 사랑하기에 눈물도 흘리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유대민족만 사랑하신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결코 아니십니다. 그러나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계시기에 때로 눈물로 흘리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3.1절을 생각하는 기념주일로 지키면서 3.1운동은 당시에 우리 민족이 나라사랑하는 맘으로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해 일으킨 운동이 아닙니까? 바로 이 운동에 당시에 기독교의 지도자와 성도들이 앞장서서 애국운동을 일으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일본정부의 감시대상이 기독교인이요 교회였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 3.1절 기념주일을 한국교회가 지키는데 저는 이 주일을 전국교회가 나라사랑하는 애국주일로 지켰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과 민족을 모두 사랑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될 때에도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 생명록에서 제하여 질지라도 내 민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 궁중에서 호강하며 살 수 있는데도 자기 민족의 고통을 위해 궁중생활을 떠나서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애국자였습니다. 에스더는 어떠했습니까? 왕후가 되었지만 자기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임금에게 나가서 자기 민족을 구원해 내지 않았습니까? 신약의 사도바울은 자기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갈지라도 자기민족의 구원을 위해 안타깝게 부르짖은 사도가 된 것입니다. 17세의 유관순은 이화기숙사에서 밤새 통곡하였는데, 스크랜튼 선교사가 왜 우느냐고 묻자 이 나라 조국을 보면서 울지 않는다면 이 땅에 살 자격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들도 나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애족의 운동에도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나라를 사랑해서 우셨듯이 우리도 이 민족을 향해 눈물을 뿌리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을 바라모시며 우신 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우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픔 때문에 우는 애통의 눈물이셨습니다.
당시에 유대민족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고하면서도 교만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위선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책임의식은 다 저버리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바로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의 의식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위선과 교만으로 하나님의 아들 이시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마다 방해하고 극기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서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런 자기 민족의 죄악을 아시기에 너무 안타까워서 우시기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본문 19:45 이하에 보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요 가장 거룩해야될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시고 너무나 속상하시고 견딜 수 없으셔서 거룩한 분노로 그들에게 채찍을 들어 내어 쫓아내는 행동 까지 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앞에서 교만과 위선과 가증스러움과 불명의 죄까지 범하면서도 그들은 회개할 줄 모릅니다.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도리어 의인인체하고 거룩한 척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외모보다 속중심을 보시는 분인데 어찌 사랑하는 자기 민족의 죄를 보시면서 그냥 지내 실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워 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자꾸 삐뚤어져 나가고 이런 죄 저런 죄를 범하면서도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할 줄도 모르고 있다면 그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로써 어찌 괴롭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녀들의 범한 죄를 부모된 자신들의 잘못처럼 느끼면서 안타까운 맘으로 애통하며 눈물흘릴 수 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바로 예수님이 우신 것도 이스라엘 민족의 죄 때문에우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이 민족과 이 사회가 어찌되고 있습니까? 모든 면에 성한 것이 없습니다.
이사야 1장에서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성한곳이 없이 상처투성인 것을 보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안타까워 부르짖은 것처럼 지금 이 사회가 죄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때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관리못해서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아들이 교도소로 가는 부끄러운 사건이 있었는데도 현재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지금 이 정부도 김대중대통령의 일가친척들의 비리가 속속들이 또 다시 들어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가장 가깝게 믿고 일하고 있는 청와대의 측근들이 여전히 부정을 저질르고 있습니다. 이 사회 어느구석도 썩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실이 무너지고 있고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라일이 산적해 있는데도 국회는 여야의원들의 싸움으로 파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에 인터넷 싸이트에는 일반 시민들이 국회의원들의 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실망하고 분노한 나머지 국회의사당을 그 자리에 서민 아파트를 지으라고 하는 글이 수 없이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이 사회를 개탄하면서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됩니까? 그렇지 못하기에 부끄럽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교회마저도 자꾸 세상을 따라 갑니다.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교단을 위해 일하고자 감독후보로 나서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맘이 아프고 갈등도 생기고 분노마저 느낄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뜻 있는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을 만나서 격려도 받고 저의 소신에 대해 동의해 주시는 분도 있지만 어느땐 나의 바르게 하겠다는 생각을 하나의 이상주의로만 생각하고 현실성이 없다고 몰아칠땐 정말 속상할때도 종종있습니다. 도봉의 성도 여러분들이 더욱더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저를 격려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선지자중에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민족의 죄악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렸기에 예레미야를 가르켜서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시에 유대민족의 죄악을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워 우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과 이 민족의 죄를 애통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셔야 합니다. 3.1운동 당시도 많은 애국지사들은 당시에 일본인들의 만행에 대해 분노하고 애통하였습니다. 찬송가 256장 1절에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중에 곳곳마다 상한 심령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메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찌할꼬" 2절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중에 외치는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주님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할이 어디있나 믿는 자여 어찌할꼬"
셋째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신 것은 자기 민족의 어두운 미래를 아시기에 마음 아파하며 우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 43절 이하에 예수님은 현재의 이스라엘이 앞으로 지금보다 더 비참하게 망할 수 밖에 없음을 아셨습니다. 「날이 이를 찌라(망할 때가 오리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매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대로 주후 70년 경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침공을 받고 온 도성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군인과 민간인들 합쳐서 110만명이 죽음). 예수님이 염려하고 안타까워 하신 그대로 이뤄지고 만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미래가 올 것을 아셨기에 너무나 안타까우셔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나 자녀나 가까운 친구가 병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에 진단을 받고 보니 살 가망이 없고 얼마후에 죽게 된다고 한다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부모나 자녀가 어찌 가슴이 찢어지며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미래가 소망이 있고 밝을 때 오늘의 고통과 슬픔도 참고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과 밝은 미래가 없으면 참으로 실망되고 슬퍼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오늘의 현실을 볼 땐 그렇게 밝고 희망 찬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치나 경제가 희망이 밝습니까? 통일의 전망이 밝습니까? (이번 3월 호 월간조선▶김정일은 무력통일) 이제 우리는 3.1절을 기념하는 주일에 3.1운동이 애국운동이요 자유운동이요 독립운동이기에 우리 모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맘으로 눈물의 기도를 다시 흘려야합니다.
눈물의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당시에 3.1운동때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일에 행동으로 앞장 섰던 것처럼 한국교회는 이 시대에 맞는 애국운동을 다시 일으켜야 될 사명이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열리는 3개월 정도 남은 2002년 세계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친절운동, 청결운동, 자원 봉사운동에도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14년 전에 88올림픽으로 우리 민족이 한단계 도약했듯이 이번 계기로 선진국으로 가는 발판의 계기로 삼자)
우리가 이 민족 이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그치게 않는 한 하나님은 결단코 이 민족을 버리시기 않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안타까움과 애통하는 눈물인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사랑과 희망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끝으로 시편기자의 고백을 다시 묵상하고 싶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려서 남기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 아멘.
눈물을 잃어버린 시대
눅 19장 41~44절 / 홍문수목사
우리 눈에 분비되는 눈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항상 눈에 촉촉이 분비되는 ‘기초 눈물’입니다. 둘째는, 눈에 티 같은 게 들어가면 반사적으로 나오는 ‘반사성 눈물’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안구를 보호해 주는데 이게 마르면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공 눈물을 넣는 분들도 있죠. 그런데 또 한 가지 눈물이 있는데 곧 ‘감정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분비되는데, 참 신기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감정의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게 사람에게 좋다는 사실입니다. 한 연구 자료를 보니까 웃음도 사람에게 좋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그 이상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유익하다고 합니다. 대체로 여자가 남자보다 장수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눈물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대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잘 울지 않습니까?
그런데 ‘감정의 눈물’은 신앙생활하고도 연관성이 많습니다.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 차가 있지만 대개 신앙생활을 잘 할수록 눈물이 많아집니다. 유명한 스펄전 목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성경 인물들을 살펴보면 적잖은 사람들이 눈물이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리고, 죄를 통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충성을 다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 다윗 같은 사람은 대표적인 눈물의 사람입니다. 시편을 보면 밤새 침상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41절 보면, 분명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서 ‘운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클라이오(κλαιω)인데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데서 더 나아가 큰 소리로 통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신 게 이번만이 아닙니다. 이 외에도 두 군데나 더 있습니다. 그라니까 본문과 합치면 세 번임 셈이죠. 본문과 요11:35, 그리고 히5:7 에 나옵니다. 요11:35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히5:7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중)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우리는 보통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나약한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왠지 어색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은 순수한 감정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눈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마음속에 갖고 계신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 때문에 우신 게 아닙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그것은 나약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강렬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님처럼, 신앙의 선배들처럼 눈물을 많이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이 흘린 눈물 : 연민과 사랑의 눈물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이 지상 생애를 거의 마감하는 시기입니다. 즉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이제 며칠 후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게 됩니다. 아마 예수님이 보통 때보다 더욱 예민한 감정 상태였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때 마침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많은 군중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입성으로 온통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고 초대 왕으로 등극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고 영생을 주시고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동상이몽’입니다.
예루살렘은 그때 한껏 명절 분위기로 들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라의 독립에 대한 기대가 커져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흥청거리는 군중들도 흘러넘쳤습니다. 무지와 죄악에 절어있는 유대인들을 바라보시던 예수님은 마음이 무척 괴로우셨을 겁니다. 며칠 후면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해서 십자가에 못박게 할텐데 ... 그리고 구세주 예수님을 배척한 그들이 후일 하나님의 심판을 크게 당하게 될텐데 그런 사실은 새까맣게 모르는 채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정말 한심하고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슬며시 군중들로부터 빠져나와 감람산 산기슭 중턱에서 예루살렘 시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신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그 눈물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 42절, 44절(하) : 42절.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짓밟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악과 완악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기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방치하시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릴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평화의 기회가 상실된 겁니다. 44절(하).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구원자로 찾아오셨지만 어리석은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결국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눅13:34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 43절~44절(상) :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 ”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장차 멸망할 것을 내다보시고 예언하십니다. 그 날이 되면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할 것입니다. 그 와중에 그들 자신과 후손들이 모두 학살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A.D. 70년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침략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출입을 못하게 합니다. 그때가 마침 유월절이라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는데 약 100만 명이 전염병으로 혹은 굶어 죽고, 지어 먹을 것이 없어서 어미가 어린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아비규환이요 킬링필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이 장차 있을 것을 훤히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모르는 채 죄악 중에 희희낙락하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래서 통곡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입니까? 죄인들에 대한,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상에서도 그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그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그 눈물에 담긴 예수님의 사랑이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연민과 사랑으로 눈물을 흘려주십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잘못될세라, 멸망할세라 노심초사하십니다. 예수의 영인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고 계십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한시라도 예수님이 뜨거운 눈물을 잊지 맙시다. 그 사랑의 눈물을 기억합시다.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자식은 절대 곁길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의 눈물을 기억한다면 결코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죄악으로 나아가 한데 어울릴 수 없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결코 주님의 눈물을 저버리지 맙시다. 이제는 주님이 우리에 대해서는 눈물을 그치시도록 해드립시다. 오히려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흐뭇한 한 미소를 지으시도록 해드립시다. 이를 위해 아무쪼록 항상 주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가 흘려야 될 눈물 : 감사와 회개, 간구의 눈물
이제는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 우리 자신이 삽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물 때문에 우리 가정이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눈물 때문에 인류가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처럼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서는 안 되겠죠. 이스라엘 민족은 그렇게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보내서 회개를 촉구했건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직접 보내주셨건만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망하고 난 후에 후회와 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 눈물은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눈물입니다. 악에 받친 절규에 불과합니다.
지금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때 성전도 무너져 폐허가 됐습니다. 겨우 서쪽 벽 일부(폭 60m, 길이 18m)만 남아 있는데 그게 ‘통곡의 벽’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염없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미리 미리 눈물을 흘려야지 ...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기 전에 미리 미리 진솔한 신앙의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예수님은 연민과 사랑의 눈물을 흘리셨지만,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회개, 그리고 간구의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① 나 자신을 위한 눈물 : 참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늘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고, 십자가 지셨는데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자성하고 허물과 죄악을 눈물로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험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마리아의 눈물을 아시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으며 감사 감격의 눈물을 흘린 여인입니다. 그 눈물이 그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 살인 교사를 했던 다윗! 그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자 하나님은 그를 새롭게 하시고 성군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히스기야가 중년에 죽을 병에 걸렸지만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고 15년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눈물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② 내 가정을 위한 눈물 : 흔히 가정을 위해 운다면 무엇 때문에 웁니까? 대개 육신의 문제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갖고 있기에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울어야 할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업의 문제, 성적이나 진학 문제보다 ...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믿지만 아직도 신앙이 미성숙한 가족들이 성숙해지고 헌신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가족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십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자식 없어 눈물로 기도했더니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젖을 떼자마자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놓고 눈물로 기도했더니 어두운 사사시대에 샛별 같은 지도자로 자랐습니다. 재미교포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부부가 잘 살아보겠다고 이민을 갔는데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이 홀로 고생하면 외아들을 키우는데 자꾸 빗나갑니다. 나중에는 마약에 손을 댑니다. 인간적으로는 암담합니다. 살 소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하나님 앞에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변한 겁니다. 그 아들이 이제는 자기 같은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다니고 있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는 부모가 있는 한 그 자녀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③ 이웃의 영혼을 위한 눈물 : 우리가 매일 대하는 이웃들 ... 그들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 부러움의 대상, 무시의 대상, 혹은 무관심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보면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장차 임할 심판을 생각하면 그들의 영혼이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고 전도하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보면 아쉬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영혼들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자 달라졌습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눈물로 복음을 전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목회할 때 한번은 새벽종을 치다가 괜스레 울컥하며 눈물이 나더랍니다. 동내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하며 강퍅한 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도록 기도합니다. 그 순간 그 마음이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네 눈물이 아니라 네 속에서 흘리는 나의 눈물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 눈물이 영혼을 구원해 냅니다.
④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 : 우리 개개인은 나라와 민족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공동운명체입니다. 설사 이민을 간다하더라도 한국이 잘돼야 자기도 잘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내 문제 이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요즘 하도 어수선하니까 화만 나고, 욕이 나옵니다. 그러나 분을 삭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위정자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민족 복음화와 북한 복음화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면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근대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비극을 겪었습니까? 우리가 특별히 잘 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이라도 사라가는 겁니다. 그것은 밤이면 산등성이마다, 기도원에서 눈물로 기도한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방곡곡 새벽 제단에서 흘린 수많은 성도들이 눈물이 하나님의 보좌를 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기도 소리가 잦아들어갑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가 그립습니다. 바울의 기도(롬9장)와 모세의 기도(출32장)가 절실합니다. 눈물 흘리면 예루살렘 구석구석을 누비며 의인 한 사람을 위해 외쳤던 예레미야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대단한 일은 못해도 우는 것이야 못하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냥 웁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그냥 웁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다시 반듯하게 세워주시고 마지막 시대에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제사장 나라로 사용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눈물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육신적이 되고, 말초적이 되어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멸망을 향해 가면서도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눈물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흘리신 뜨거운 눈물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가정과 이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눈물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살고 이 민족이 살아나는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비가
눅 19장 41~44절 / 이종윤목사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말씀이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요11:35절). ②예수님의 패역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눅19:41절). ③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땀이 피가 나도록 통곡하셨습니다(히5:7절).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19:41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슬픔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슬픔과 눈물을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심을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Ⅰ. 우리 주님의 내면적 슬픔(Our Lord's inward grief).
우리 주님의 슬픔은 어떤 이유로도 억제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①우리 주님께서는 호산나 찬송을 부르는 이들 중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할 자가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즉 희망의 날이 고통의 때로 바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②아름답고 웅장한 예루살렘성의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시고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흰대리석으로, 지붕은 황금으로 덮힌 찬란한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강도의 소굴(눅19:45-46절)이 되었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눅21:6절)을 주님은 보셨던 것입니다. ③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우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배신할 백성을 위해 우셨습니다(눅23:28절). ④주님의 성품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즉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애정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⑤이 눈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합니다. ⑥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음성입니다. ⑦주님이 가르치시는 눈물입니다(렘31:9절).
Ⅱ. 우리 주님의 표현된 슬픔(Our Lord's verbal lamentations).
①“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눅19:42절). 이 말씀은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을 알지 못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무지로 인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이들이 참된 진리와 거짓, 옳은 것과 틀린 것, 의와 불의를 분간 못함을 우리 주님께서는 슬퍼하고 계십니다. ②“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눅19:42절). 계속되는 이 말씀은 백성들이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시는 주님의 말씀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지만 백성들은 평화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평화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81:13-14절). 오늘 우리 성도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③주님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 때문에 우셨습니다. ④주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소경됨을 보셨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⑤이미 예견된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루어졌으므로 우리 주님의 슬픔도 끝이 났을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맺는말.
우리 주님의 슬픔은 어떤 슬픔일까? 그 슬픔은 감음하는 자, 살인자, 도적질한자, 거짓말한자, 미련한 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시며 변화시키려 했지만 그들 자신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슬퍼하신 것입니다. 즉 이 슬픔은 우리 주님의 사랑의 슬픔이며, 이악한 백성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우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두 번째 오실 때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새 예루살렘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시온성엔 영광의 주님이 계시고, 어린 양과 결혼한 신부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눈물을 헛되게 하지 않은 이들이 영원히 있을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여 사시는 우리 서울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메시야의 통곡
눅 19장 41~44절 / 홍문수목사
눈물은 생리적 작용이지만 분명 인간의 감정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런 눈물을 흔히 ‘감정 눈물’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대개 나약한 이미지로 비쳐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특히 남자아이가 울면 “뚝!” “뚝!” 하면서 눈물을 그치라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메시야인 그분이 눈물을 흘리다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눈물은 나약한 것만은 아닙니다. ‘사나이의 눈물’도 있지 않습니까? 남자들이 눈물을 잘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비장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오히려 강렬한 이미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물은 이상한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강렬한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눈물 : 메시야의 뜨거운 마음
① 눈물 젖은 공생애 :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신 것이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i)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요11:35)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자 사람들이 애통해 하며 울었습니다. 그 슬픔 광경을 보고 예수님도 비통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ii) 겟세마네 동산에서(히5:7)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 인간적으로 고통스런 그 순간 아버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iii) 41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외치며 환영합니다. 그런데 입성 행렬이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는 감람산 기슭에 당도하자 예수님이 갑자기 우신 겁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세 번이지만, 공생애 전체의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건대 예수님은 3년 내내 눈물을 흘리셨을 겁니다. 때로는 불쌍한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기도하면서 눈물짓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② 감람산 기슭의 통곡 :
그 중에 본문 사건이 가장 비통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본문 41절의 ‘울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클라이오’(κλαιω)인데, ‘흐느껴 울다’ ‘울부짖다’ ‘ 통곡하다’ 등 강한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NIV)에서는 ‘weep’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야가 ‘통곡’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지 예루살렘에 가면 이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당이 감람산 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그 이름이 ‘눈물 교회’(Dominus Flevit “주님이 우셨다”)입니다. 꼭 눈물 모양으로 세워져 예수님이 통곡하신 그 사건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③ 그 눈물의 의미 : 죄인에 대한 연민과 비통, 십자가 대속의 각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왜 그렇게 통곡하셨을까요? 예루살렘 입성을 하는 도중이었으므로 주변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으면 울다가도 그치는 법인데 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마음이 비통했음을 반증합니다.
감람산 기슭을 내려오면서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 성의 모습은 평화로운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그 위용을 자랑하며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을 겁니다. 게다가 마침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도 예루살렘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북적거렸을 겁니다.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백성들의 영적인 상황은 암울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가 가득하고, 그러면서도 마치 자기들이 의로운 척하고, 강퍅하고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메시야로 오셨지만, 전혀 엉뚱하게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영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지상의 나라를 세울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고 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전에도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며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눅13:34~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 ”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짓밟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악과 완악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기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그마저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4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탄식어린 애가(哀歌)가 나옵니다. 42절.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를 얻을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무지한 가운데 예수님을 오해하고 거부하니 안타깝다는 말씀입니다.
43절~44절.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날’은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죄 가운데 장차 멸망할 것을 내다보시고 예언하신 겁니다. 적군이 쳐들어와 토성(성을 공격하려고 쌓아올리는 흙무더기)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할 겁니다. 그 와중에 백성들이, 어린 아이들까지 대량 학살될 겁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A.D. 70년 티투스(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출입을 못하게 합니다. 때마침 유월절이라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는데, 약 110만 명이 전염병으로 혹은 굶어 죽거나 학살당했습니다. 심지어 먹을 게 없어서 어미가 어린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비규환입니다. 또 10만명이 로마 제국 각지로 끌려가 경기장에서 맹수 밥이 되고, 칼로 죽임을 당하는 노리개가 됩니다. 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당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자랑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파되고 말았습니다.
그 비극의 흔적이 지금 예루살렘 현지에 남아 있습니다. 성전이 세워졌던 그 자리에 이슬람 ‘황금 사원’(Dome of the Rock, Mosque of Omar)이 서 있습니다. 오직 성전의 서쪽 벽체 일부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군대가 웅장한 성전을 파괴할 정도로 강했다는 증거로 일부러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곧 ‘통곡의 벽’(The Western Wall, The Wailing Wall)입니다.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가서 성전의 회복을 위해 울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기슭을 내려오실 때 장차 있을 이 비극을 훤히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모르는 채 죄악 중에 희희낙락하고 메시야를 거부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래서 통곡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입니까? 죄인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연민과 비통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각오가 담긴 비장한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도 그 눈물을 흘리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그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결국 그 눈물이 인류를,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지만, 더 나아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모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닥쳐오는데도 새까맣게 모르는 채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그런 데만 온통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리고 그 심판이 얼마나 심각하고 비참한지 경고합니다. 계20:13~14 “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최후의 심판 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이 둘째 사망 즉 영원히 지옥의 불못에서 고통을 당하는 영원한 사망을 겪게 될 겁니다.
막9:47~4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범죄케 하는 눈을 빼버리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더 낫다고 표현합니다.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인해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 받는 곳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와 같은 지옥의 형벌을 면케 하시려고 불쌍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던 겁니다. 지금은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여전히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실 겁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건만 죄 가운데 아무 것도 모르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탄식하실 겁니다. 또한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 여전히 죄 중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실 겁니다.
[2] 우리가 흘릴 눈물 : 회개, 감사, 헌신의 눈물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눈물을 그치게 해드려야 합니다. 통곡 소리를 멈추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눈물을 흘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가 무지와 죄악 가운데 희희낙락하면 예수님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 예수님이 눈물을 그치고 기뻐하십니다.
① 회개의 눈물 :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통곡했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 제1성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막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천국은 죄인입장불가입니다. 오직 의인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립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죄 씻음 받은 자만이 의인이되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눅15:10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천국에서 천사들과 더불어 잔치가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후에는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 인해 실수하고 자주 넘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죄를 통회 자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깨끗해 해 주십니다.
욜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신앙 생활하면서 통회의 눈물이 중요합니다. 늘 부족하고 죄를 짓고 살지만 실컷 울고 나면 죄사함의 은총으로 영혼이 깨끗해집니다. 마치 비가 온 후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우리 영혼에 영롱한 무지개가 뜹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놀라운 회복과 치유, 그리고 축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인도의 한 청년의 간증입니다. 그는 신앙을 거부하던 불신 청년인데 눈병에 걸려 고생하다 병원에 입원합니다. 정밀 진찰을 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살인적인 병균에 감염되어 당장 다음 날 두 눈을 뽑지 않으면 생명까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 절망입니다. 막막한 가운데 있는데, 그리스도인 친구가 찾아와서 권면합니다.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라고 ... 그 청년은 염치가 없었지만 별 수 없이 그러마고 약속하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답답하고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러다가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문이 열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실컷 울고 또 울었습니다. 다음 날 수술 받는 순간이 닥쳤지만 마음이 평안합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못 보게 되었지만, 이제 영안이 열려 천국을 바라보니 감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수술 전에 다시 진찰하다 깜짝 놀랍니다. 전날까지 심하게 번졌던 독한 병균이 사라져버렸다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그의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구원하고 치유한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눈물은 이렇게 능력이 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회개의 눈물로 구원의 은총,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② 감사의 눈물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육신의 생명 주신 것도, 영혼을 구원해서 영생을 주신 것도, 넉넉하든 빠듯하든 의식주를 공급해주시는 것도, 험한 세상에서 보호해 주시는 것도, ... 그 하나하나가 다 은혜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할 뿐입니다. 그 감사가 깊어지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그리고 또 이렇게 찬송하게 됩니다. 사순절에 자주 부르는 찬송가 141장인데, 아이작 와츠(Isaac Watts)가 작사한 찬송입니다. (1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4절)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여러분, 감사의 눈물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십시오.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입니다. 아무쪼록 감사의 눈물로 더 큰 감사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③ 헌신의 눈물(예수님을 닮은 눈물) :
우리 인간이 흘릴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눈물은 예수님을 닮은 눈물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눈물이요, 더 나아가 민족과 세계 만민을 위한 눈물입니다. 이것이 곧 ‘헌신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과 세계 인류를 위해, 죄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남을 위한 눈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런 헌신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룩한 울보’였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울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멸망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 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애1: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 ” 애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 ” 애3:48 “ ...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바울 사도 역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주 강퍅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은혜를 체험한 후에 그는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넘어 헌신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 ” 바울은 죄악에 빠진 자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이런 헌신의 눈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 눈물이 있었기에 멸망할 백성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사실은 저와 여러분도 그 눈물의 열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이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까? 토머스 선교사(Robert Thomas, 1840~1866)를 아시죠. 그는 영국의 목사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24세에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 상해로 파송됩니다. 얼마 되지 않아 아내 캐롤라인 죽었습니다. 며칠간 타지로 출장 갔다 오니까 임신 중이었던 아내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숨져 있었고, 아이도 죽었습니다. 젊디젊은 선교사가 어떻게 그 극한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개인적인 슬픔의 눈물을 거두고 예수님의 눈물을 가지고 조선 땅으로 향합니다. 마침 제너럴 샤먼호가 조선으로 간다 하여 그 배를 타고 입국하려고 했지만 쇄국정책으로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어서 한문 성경을 전해주려고 배에서 내립니다. 결국 대동 강변에서 순교를 당합니다. 그때 나이가 만 26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눈물과 피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목을 친 포졸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고 예수 믿고 평양 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그 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수많은 선교사들의 눈물이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기철 목사님(朱基徹 1897~1944)도 아시죠. 일제 말기 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합니다. 버티다가 하나둘 굴복합니다. 당시 조선교회들도 차례로 신사참배를 결의합니다. 그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하다 5 차례에 걸쳐 5년 4개월간 옥고를 치릅니다. 결국 해방 1년 전 감옥에서 순교합니다. 그는 당시 범죄한 이 민족과 교회를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며 통곡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나와 함께 울자!” 여러분, 이런 눈물이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왔고, 이 민족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믿음의 선배들의 눈물이 나와 이 민족을 변화시켰듯이 오늘 나와 우리의 눈물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고, 눈물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이 땅을 고쳐주실 겁니다. 그리고 많은 눈물의 열매를 허락해 주실 겁니다. 여러분!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위해, 어지러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죄에 빠져 방황하며 멸망 길로 달려가는 영혼들에게 눈물로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눈물은 흘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 예수님의 눈물은 기쁨과 웃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사순절에 예수님의 통곡을 마음의 귀로 들으시고 과연 ‘내가 흘릴 눈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눅19장 41~44절 / 강문호목사
<쿼바디스 도미네>는 유명한 명화입니다. 그 영화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폭군 네로가 신하 한 명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하여 울면서 말합니다. "눈물 단지를 가지고 와라. 내 눈물은 귀하다. 가족들에게 내 눈물을 갖다 주어라. 그리고 네로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말해라" 네로가 흘린 눈물은 눈물단지에 받아 보관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눈물은 너무나 값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오직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오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잡혀 십자가에서 죽을 운명을 안고 마지막 예루살렘을 입성하고 계셨습니다. 감람산으로 내려오면 그 밑이 기드론 계곡입니다. 그리고 반대편 언덕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내려다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던 자리에는 지금 눈물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탑을 마치 눈물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다가 산중턱에 앉아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눈물은 진실한 것입니다. 억지로 웃을 수 있습니다. 일부러 화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일부러 눈물을 낼 수는 없습니다. 눈물은 진실의 감정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1. 민족을 위하여 2. 교회를 위하여 3. 자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가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 민족을 위하여 예수님이 우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장차 원수들에게 짓밟힐 것을 미리 보셨습니다.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을 둘러 싸고 쳐들어 와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고 성전을 돌 하나에 돌 하나가 놓여지지 않을 정도로 가루로 만들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70년 7월 9일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장군 타이터스가 10개 군단 97,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110 만명을 죽였습니다. 10 만명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금과 은을 로마로 가지고 가려고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계신 예수님은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눈물의 사람이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에도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의인을 한 명 찾으려고 하여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멸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영을 받은 예레미야는 이런 사실을 알고 얼마나 울었는 데 눈이 눈물로 상하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9;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애2;4) 3.1운동 당시에 감추어진 비화가 하나 있습니다. 신 철이라는 사람은 일본 형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 형사였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일본 총독부에 생명 걸고 개처럼 충성하는 매국노였습니다. 그는 한국의 모든 독립 운동의 비밀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정보를 일본 경찰에 알리는 이였습니다. 악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3.1 운동이 비밀리에 진행될 때 벌써 신 철은 이런 움직임을 알았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 일이 탄로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최 린 선생이 거사 일주일 전 2월 24일 밤 중에 신 철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너는 조선인인가 일본인인가?" "저는 조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이 독립해야 되는가 일본의 속국이 되어야 되는가?" "독립 해야죠." 그 때 최 린 선생은 냉엄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너같은 자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자다. 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너 하나 죽을 생각이 없느냐? 네가 죽어야만 독립이 되겠다." 그리고 최 선생은 3.1운동의 거사를 그 형사에게 다 얘기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신철은 그 자리에서 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하고는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번민 끝에 결단을 내리고 일본을 배신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 총독부에 허위보고를 했습니다. 북만주에 독립단이 들어오니까 내가 그 곳으로 조사하러 간다는 허위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서울 장안의 이상한 공기를 눈치챈 일본의 경찰들은 신 철이 배신한 것을 알았습니다. 3.1 운동 거사를 보고하지 않고 숨어버린 신 철을 일본 경찰들은 신의주에 가서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를 기차에 압송해오는 중간에 청산가리를 마시고 그는 자살을 했습니다. 조국에 빚을 졌던 신 철, 그는 죽음으로 조국을 사랑하며 사나이답게 죽었습니다. 멋있게는 살지 못했으나 마지막 양심은 조국이었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민족을 위하여 우는 사람이 민족을 구하게 됩니다. 유 관순이 이화학당 기숙사에서 밤새도록 우는 것을 스크랜톤 선교사가 보고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밤 잠을 자지 않고 우느냐?" 유 관순이 대답하였습니다. "이 나라 이 조국을 보고 울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게 울다가 유 관순은 1920년 10월 20일 17세 나이로 6토막이 나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이 준 열사는 당시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 회담이 열리고 있는 것을 알고 그 곳으로 갔습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을 때였습니다. 이 곳에 가면 일본의 만행을 온 세계에 알리는 데 최고 적격이라고 여겼습니다. 이 준 열사는 상동 감리교회 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덕기 목사의 안수를 받았습니다. 전 목사님은 이렇게 안수하였습니다. "장렬하게 잘 죽게 하옵소서!" 안수기도하고 둘은 붙들고 펑펑 울었습니다. 마지막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준은 평화회담 장소에서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는 장렬하게 할복자살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울 수 있는 사람이 민족을 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민족을 향한 눈물이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와 집단 이기주의가 만연한 오늘의 현실을 보며 우리는 이 민족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2.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은 성전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될 것을 가슴 아파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돌 하나에 돌 하나가 놓여지지 않고 파괴될 것을 아시고 우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교회를 구하게 됩니다. 전남 무안군 청계면 고대리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마을 중앙에 돌로 지은 예쁜 성전이 있습니다.이 성전에 얽힌 은혜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마을에 예수님을 잘 믿는 몇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비닐 하우스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성도들이 늘어 났습니다. 교회를 건축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넉넉지 못 한 농촌 살림살이에 성전을 건축할 만한 물질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처녀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이런 때 제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던 그 처녀는 자기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아 건축헌금을 드렸습니다. 윤기나고 긴 아주 좋은 양질의 머리였습니다. 시집갈 때가 된 처녀가 머리를 잘랐으니 교인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은 삽시간에 온 마을에 퍼졌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서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집갈 처녀가 머리를 잘랐으니 어떻게 시집을 가겠냐?"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처녀가 말했습니다. "머리는 또 자랄 것입니다. 시집가는 것보다 성전을 짓는 것이 먼저이고 더 중요합니다" 교인들은 이런 일에 감동이 되어 모두 정성껏 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건축할 때 모두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마음에 성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황해도 재령읍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정 찬유 장로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속에 사업이 잘 되어서 주일성수도 잘 하시고 십일조도 정확하게 하시고 신앙생활에 모범이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자기 집을 2층 양옥으로 잘 짓고 있었습니다. 그 날 밤에 꿈을 꾸는 데 하나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내 집은 양철 집으로 두고 네 집만 이층 양옥으로 그렇게 잘 짓느냐?> 밤에 자다가 이 음성을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회개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서야 하나님의 집이 너무나 초라한 것을 알았습니다. 흠뻑 울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일부터 당장 하나님의 집부터 짓겠습니다> 이튿날 그는 설계사를 데려다가 성전부터 다시 설계하고 짓고 그리고 자기 집을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이 당시 한국 최고의 성전이었던 황해도 재령 동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교회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교회를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3. 자녀를 위하여 예수님의 눈물은 예루살렘 성안에 살고 있는 자녀를 위한 눈물입니다. 앞으로 적들이 쳐들어 와서 자식들을 땅에 메치고 돌 하나도 돌 하나 위에 남기지 않게 파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을 아시고 우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자녀들을 위하여 눈물이 있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믿음의 집 자녀들만이라고 믿음으로 잘 자라면 이 나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나라가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복음화뿐입니다. 요즈음 사회에서 돌아 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정일이는 우리 남한에 오지 못 한다. 남한에는 5가지가 많기에 무서워 못 올 것이다. 총알 택시, 대포집, 핵가족, 폭탄주 그리고 비행소년이 많다" 청소년들의 탈선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청소년들의 마약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자녀를 위하여 울며 믿음으로 잘 길러야 할 때입니다. 나는 한 할머니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어느날 밤에 한 할머니가 봇짐 하나를 들고 지하실로 들어왔습니다. 이런 사연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하소연하였습니다. 이북에서 월남하였습니다. 아들 안고 월남하여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열심히 길렀습니다. 다행스럽게 아들은 공부를 잘 해 주었습니다. 서울상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좋은 직장에 취집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고생을 면하는 가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서울 명문대를 나온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들이 출근하면 집안에는 이 할머니와 며느리 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아들이 출근만 하면 시어머니를 마구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시장 가는 것, 빨래, 청소 모두 식모처럼 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조금만 잘못하면 꼬집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때리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며느리한테 수 년을 맞고 지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학대가 더욱 심하여 갔습니다. 견디다 못 한 할머니가 개나리 봇짐 하나를 싸들고 가출한 것입니다. 갈 곳에 없으니까 지하실에 개척하는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목사님이 "아들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펑펑 울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아들과 며느리 사이는 금실이 좋아요.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그런데 아들이 이 사실을 알면 부부 사이에 금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한 마디도 안 했어요. 내가 입다물고 살면서 아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좋았어요. 더구나 손자까지 있어요" 이 할머니는 펑펑 울었습니다. 입을 열면 아들과 며느리 사이가 어떻게 될 것을 아는 할머니는 눈물을 혼자 흘리며 긴 세월을 산 것입니다. 정말 자녀들을 위하여 울며 길러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과부 어머니는 아들 3 형제를 모두 큰 목사로 길렀습니다. 3 명이 모두 1,000명 장년이 출석하는 대 교회 목사입니다. 비결이 있었습니다. 밤마다 세 아들이 자는 방에 들어가 붙들고 눈물로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어느 때는 자고 있는 아들이 기도가 귀찮아 그만 하라고 소리 지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의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모두 기도를 먹고 자랐습니다. 훌륭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우리 자녀들의 가장 큰 적은 인터넷입니다. 인터넷 방송 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음란 싸이트가 10만개라는 것입니다.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곳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륵 길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눈물의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1. 민족을 위하여 2. 교회를 위하여 3. 자녀를 위하여 울 때입니다. 주여! 눈물을 주옵소서! 펑펑 울 수 있는 눈물 샘이 터지게 하옵소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눅 19장 41~44절 / 강문호목사
6.25 52 주년을 상기하는 주일입니다. 죽을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는 저항시인 윤 동주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일본에게 우리나라를 빼앗겼을 때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을 북간도로 내쫓기 시작화였습니다. 그 때 고국을 등지고 수많은 우리 민족이 만주 북간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곳에서 나라를 생각하는 김 약연 선생님은 대성학교를 세웠습니다.1921년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민족의 얼을 넣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독립투사들을 길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 곳에서 태어난 이가 윤 동주입니다. 윤 동주는 대성하교에 다니면서 민족의 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를 써서 민족을 깨우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 대표적인 시가 바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이 시입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라는 말은 조국과 동포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야 겠다> 라는 말속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엿보게 합니다. 결국 윤 동주는 일본에 저항한다는 명목으로 붙잡혀 일본 후꾸오까 감옥에 갇혔습니다. 1945년 2월 16일 감옥에서 주사 한 대를 맞더니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생체 실험을 당한 것입니다. 시체를 찾아 가라는 통보를 받고 가족이 달려가 시신을 가져다가 만주 용정에 묻었습니다. 지금도 용정에는 윤 동주 무덤이 있습니다. 당시 이 시는 온 민족의 가슴에 항일운동에 불을 질렀던 유명한 시입니다. 대성 중학교 교정 앞에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애국자들의 눈물과 피가 있었음을 우리 역사는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라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우리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 대하여 고마움을 진하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작년 이스라엘 가서 한 달을 지내던 중에 미국 쌍둥이 폭파 사건이 오사마 빈 라덴에 의하여 일어났습니다. 그 때 한국 사람들이 400여명 이스라엘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전쟁 준비상태에 들어 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지내고 있었는 데 아침마다 대포소리가 들렸고, 테러 소식이 계속 들려 오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한국 대사관에서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전세 비행기로 한국인을 모두 한국으로 보낼 터이니 어느 곳으로 모이라는 통지가 계속 날라 오고 있었습니다. 조국에 대한 고마움을 진하게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조국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든든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을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꾸라, 기모노, 그리고 화산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중국하면 딱 떠오르는 말이 무엇입니까? 용, 무술, 한약 그리고 만만디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한국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의식조사를 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5가지 말이 떠올랐습니다. 1. 무궁화 2. 백의민족 3. 빨리빨리 4. 단일민족 5.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입니다. 이 5가지는 한국의 특징입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이 5가지 특징을 살려 나가야 합니다. 1. 무궁화 우리나라 꽃은 무궁화입니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상징입니다. 무궁화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끈기입니다. 한번 피기 시작하면 가을 내내 그리고 첫 서리가 오기까지 계속 피는 꽃이 무궁화입니다. 우리 민족의 특징은 끈기입니다. 인내입니다.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입니다. 천천이 되는 것같으나 반드시 이루고 마는 것이 무궁화의 정신입니다. 남 궁억 감리교 장로님은 홍천에서 살면서 무궁화 보급 운동에 전념하였던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홍천부터 서울까지 걸어 다니면서 민족 운동을 하였던 그 분의 정신은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보급하며 이 민족을 살리기에 혼신을 기우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선구자>라는 노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온 민족이 제일 많이 부르던 애창곡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던 노래입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혜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드레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룡문교에 달빛 고이 비춘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룡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 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인 데 처음에는 <용정의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구자>로 바꾸었습니다. 지금 일송정, 혜란강, 용드레 우물, 용주사 모두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 나도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이 노래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용정에 가면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던 일송정(一松亭)이 있습니다. 용정에서 3 키로미터 정도 서쪽에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 데 그 위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입니다. 비암산 기슭에 있는 나무입니다. 돌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것같다고 하여 1938년 일송정이라 불렀습니다. 이 곳으로 피란을 나온 우리 민족은 늘 이 소나무 밑에 모였습니다.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조국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1928년 우리 애국자들은 이 곳을 비밀 투쟁 장소로 지정하였습니다. 학교 소풍도 꼭 일부러 이 곳으로 갔습니다. 점점 이 일송정 소나무는 일본 사람들에게 가시처럼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소나무를 없앨가 궁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1930년 용정에 수해가 들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일송정 귀신탓이다> 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 사격장을 만들어 놓고 일부러 일송정에 사격을 가하여 총자국으로 난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소나무는 죽기는커녕 점점 푸르러만 갔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이 소나무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점점 더 푸르러만 가자 소나무 밑에 구멍을 파고 후추가루를 넣었습니다. 결국 이 소나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서 비슷한 소나무를 캐다 다시 심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자리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기어코 우리 민족은 독립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천천히 하는 것같지만 반드시 해내고 마는 무궁화 정신이 우리 민족 정신입니다. 기어코 우리 민족은 해내고 말 것입니다. 2. 백의민족 우리 민족의 상표는 백의 민족입니다. 흰 옷을 좋아 하였습니다. 흰색을 제일 좋아 하였습니다. 흰 색은 성결입니다. 순수함입니다. 그래서 중국을 가보면 우리 민족이 200만명이 살고 있습니다. 길림성은 우리 민족 자치지구입니다. 지금까지 한국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한국말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모든 간판도 한국말로 되어 있습니다. 화룡은 65%가 우리 민족입니다. 도문은 50%가, 연길은 무려 85%가 우리 민족이고, 용정도 60% 우리 조선족입니다. 중국에 우리 조선족이 200만 살고 있는 데 그 중 85만이 이 곳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지나다니며 보면 우리 나라 사람 집인지 중국 한 족 집인 지 금방 구별이 됩니다. 중국인 집은 빨간칠을 하였고 한국인 집은 흰 색을 칠하였습니다. 빨강은 귀신을 몰아 내는 색깔이라고 하여 그렇게 좋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빨강이 많이 쓰이기는 하였습니다. 동짓날 팥죽도 빨강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하얀 옷 백의를 입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흰색을 좋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양반들 도포나, 바지 저고리는 거의 다 흰 색이었습니다. 백의 민족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967 회 침범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단 한번도 남의 민족을 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민족은 백의 민족입니다. 성결을 사랑하고 깨끗하게 지낸 민족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백의민족으로 순수함과 정결함으로 살아 가는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침략하기보다는 침략을 당하며, 받기 보다는 주며, 공격하기 보다는 공격을 당하며 사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나는 다음에 천국 문앞에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제일 먼저 맞을 것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천국에서 입는 옷이 백의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또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 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8,13) 천국의 옷은 백의인 데 우리 민족의 옷과 천국 옷이 같기 때문입니다. 노란색을 좋아 하는 사람은 노란 샤스 입은 그 사나이가 어쩐지 마음에 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흰 옷을 좋아 하시는 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옷을 입은 우리 민족을 제일 먼저 보실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 마음에 드는 성결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3. 빨리빨리 우리 민족의 세 번째 특징은 빨리 빨리입니다. 성격이 급한 민족입니다. 이것은 단점이자 큰 장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 한 빨리 빨리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대강하지 않는 한 빨리 빨리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적당히 하지 않는 빨리 빨리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빨리빨리 한다는 말은 성취력이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판단력이 빠르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예민하게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세계에서 인테넷 인구가 가장 급속도로 발단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컴퓨터, 인터넷의 심성이 우리 민족성과 맞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합중국입니다. 세계 온 나라 사람들이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생활력이 강한 민족이 중국민족입니다. 그런데 중국민족을 유태인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우리 민족이 이기고 있습니다. 뉴욕에 가서 본 일입니다. 중국인이 하는 생선가게와 유대인이 경영하는 생선가게가 나란히 있었습니다. 다른 가게는 내일 팔 물건을 오늘 준비하여 놓으면 내일 장사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생선가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날 팔 물건을 새벽 일찍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싱싱하고 살아 있는 생선을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중국 생선 가게가 5시에 생선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4시에 가서 받아 왔습니다. 일찍 일어난 사람들이 자연히 유대인 가게를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한국인이 생선가게를 열었습니다. 한국인은 3시 반에 일어나서 물건을 받아 놓았습니다. 4시 경에 생선이 필요한 사람부터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인 생선가게만 남고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지독한 한국인입니다. 경쟁에서지지 않는 한국인입니다. 무엇인가 성취력이 강한 민족입니다. 한다면 하는 민족입니다. 중국도 우리나라에 100배가 큰 나라입니다. 65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사는 소수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어디 가든지 무시를 당하지 않습니다. 빨리 빨리 한다는 말은 먼저 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앞서 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경부 고속 도로를 3년에 완성하였다고 할 때 세계가 놀랐습니다. 경제성장, 교회 성장 모두 단 시일에 세계 수준으로 올려 놓은 민족입니다. 모든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우리 민족의 장점을 살려 빨리 빨리 이루어야 합니다. 이 장점을 살려야 합니다. 4. 단일민족 우리 민족의 4번째 특징은 단일 민족입니다. 피부가 같습니다. 언어가 끝에서 끝까지 다 통합니다. 문화가 같고 음식이 같습니다. 이런 민족은 세계에 우리 나라 하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이것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대만은 정말 조그만 섬나라입니다. 그러나 언어가 14개입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금방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남북한이 50년 갈라져 살았어도 이제라도 통일되면 언제 갈라졌었느냐는 듯이 금방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는 절실히 느낀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얼마전에 대구에서 성막 쎄미나를 하였습니다. 200여명 목사님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쏘련에서 선교사 한 분이 쏘련 신학교에도 성막을 심어야 겠다면서 18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동시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6명이 조선족입니다. 우리 민족이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어 갈 때 끌려 갔던 우리 민족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한국말을 모릅니다. 한국 음식을 먹어 본 적도 없습니다. 한국에 와본적이 없다가 처음 와본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것은 된장국을 끓였는 데 순수한 쏘련인은 된장국이 안 맞는다고 못 먹는 데, 우리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6명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맛있다고 다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습니다. 우리끼리, 남북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합치고 적이 나타나면 우리는 금방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개만 기르는 산골에 가끔 개속에 늑대를 넣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개들은 자기들끼리 피나게 싸우다가도 늑대만 나타나면 금방 하나가 되어 늑대와 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커다란 장점이 있습니다. 통일만 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무엇에든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북 사람이 경영하는 두만강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보다는 한 식구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 주었습니다. <환영합니다>라는 노래를 직접 육성으로 불러 주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라는 놀라운 특성이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차이나 타운이 성공하지 못 한 나라가 하나 있는 데 바로 중국입니다. 인도네시야, 싱가폴, 필리핀을 비롯하여 동남아 모든 나라들이 중국인들이 들어가서 상권을 잡았습니다. 차이나 타운을 이루어 그 나라 돈을 움켜 쥐고 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에 가면 중국인 묘지가 있습니다. 무덤에 죽은 조상들이 더울가봐 에어컨 시설까지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만은 중국인들이 발을 붙이지 못 하였습니다. 단일 민족성을 깨지 못 하였습니다. 놀라운 장점입니다. 3.1운동 당시에 감추어진 비화가 하나 있습니다. 신 철이라는 사람은 일본 형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 형사였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일본 총독부에 생명 걸고 개처럼 충성하는 매국노였습니다. 그는 한국의 모든 독립 운동의 비밀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정보를 일본 경찰에 알리는 이였습니다. 악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3.1 운동이 비밀리에 진행될 때 벌써 신 철은 이런 움직임을 알았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 일이 탄로날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최 린 선생이 거사 일주일 전 2월 24일 밤 중에 신 철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너는 조선인인가 일본인인가?” “저는 조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이 독립해야 되는가 일본의 속국이 되어야 되는가?” “독립 해야죠.” 그 때 최 린 선생은 냉엄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너같은 자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자다. 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너 하나 죽을 생각이 없느냐? 네가 죽어야만 독립이 되겠다.” 그리고 최 선생은 3.1운동의 거사를 그 형사에게 다 얘기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신철은 그 자리에서 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하고는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번민 끝에 결단을 내리고 일본을 배신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 총독부에 허위보고를 했습니다. 북만주에 독립단이 들어오니까 내가 그 곳으로 조사하러 간다는 허위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떠났습니다. 서울 장안의 이상한 공기를 눈치챈 일본의 경찰들은 신 철이 배신한 것을 알았습니다. 3.1 운동 거사를 보고하지 않고 숨어버린 신 철을 일본 경찰들은 신의주에 가서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를 기차에 압송해오는 중간에 청산가리를 마시고 그는 자살을 했습니다. 조국에 빚을 졌던 신 철, 그는 죽음으로 조국을 사랑하며 사나이답게 죽었습니다. 멋있게는 살지 못했으나 마지막 양심은 조국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기에 금방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5. 애국가 그 나라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호하사>라는 말이 들어간 애국가는 우리나라 애국가 꼭 하나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국가라 할지라도 이 말을 넣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나라가 설립될 때부터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중들도 절에서도 애국가를 부를 때는 <부처님이 보호하사>라고 하지 못 합니다. 중들도 모여서 부를 때는 <하나님이 보호하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 승만은 철저히 하나님께 나라를 맡겼던 대통령이었습니다. 군목제도를 제일 먼저 도입하여 군대도 하나님이 지켜야 한다면서 군목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6.25로 나라가 부산만 남았을 때 부산에 피난온 목사님들을 모두 모아 하나님께서 나라를 지켜 주시도록 통성기도회를 열은 대통령입니다. 앞으로도 이 나라를 하나님이 지키시도록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부인이 지금 스페인 팔마 섬에 살고 있습니다. 스페인과 축구경기때 기자가 찾아가서 어느 나라를 응원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물론 한국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스페인이 한국에 졌습니다. 그 후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한국이 이겨서 기뻐요. 그리고 스페인이 패하여 슬퍼요” 그의 속에는 한국이 애국가를 통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이 윤재 골키퍼가는 골대를 향하여 날라오는 공을 막으며 말했습니다. “거미 손뒤에는 기도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쥐고 계신 것을 느낍니다” 안 정환이도 헤딩으로 골을 넣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머리위에 공을 얹어 주셨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됩니다. 한 마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5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놀라운 장점입니다. 1. 끈기 있는 무궁화 2. 성결한 백의민족 3. 성취력있는 빨리빨리 4. 하가 되는 단일민족 5.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하는 애국가
눈물의 힘
눅 19장 41~44절 / 양인순목사
(The Power of Tears)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울음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로 배우는 것이 웃음입니다.
“우르르 까꿍” 하면 천사의 미소를 띱니다.
아기의 미소는 부모는 물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배우는 것이 말입니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아기는 모든 의사소통을 울음으로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엄마는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무엇을 요구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소중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우는 것을 절제시킵니다.
특히 남자들이 눈물짓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울면 ‘남자가 창피하게 울고 그래’ 나무랍니다.
유교에서는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합니다.
태어나는 순간 한번 울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울고, 그리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만 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울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리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눈물 분비샘이 크기 때문에 눈물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답니다.
자기감정을 지나치게 억제하면 슬픔과 한이 쌓여서 몸을 해치는 독소가 됩니다.
암 전문의 이병욱 박사는 “가장 정직하게 눈물을 흘리는 시간은 꼭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토해 내듯이 우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울어야 삽니다> 라는 책에서 가슴 속에 맺힌 분노, 화, 미움, 슬픔과 한을 눈물에 담아 펑펑 쏟아내야 몸 안의 독소를 뽑아내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독소들을 해소하지 못하면, 마음의 병과 함께 육신의 병, ‘암’이라는 종양 덩어리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과 육신의 병을 고치는 최고의 방법은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고 한바탕 눈물로 씻어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웃음보다 더 효과적인 약이 바로 눈물이라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 면역 글로불린G 같은 항체가 2배 이상 증가되어 암세포를 억제하거나 감소하게 합니다.
글로불린G 항체는 독소를 중화시키고, 병원균이 인체 세포에 접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시키며, 소화기계도 원활하게 움직여서 소화력이 좋게 합니다.
목 놓아 울게 되면 복근과 장이 운동을 시작하여 그 기능이 좋아집니다.
이 외에도 눈물로 인한 혈액 순환이 활발해져 피부 피용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서는 여성들의 눈물치료가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감정의 바다에서, 웃음을 ‘파도’에 비유한다면 눈물은 ‘해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거나 감춰 둔 상처들을 완전히 끌어올린 한 번의 눈물은 영혼까지 정화시키고 감정을 순화시킵니다.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실컷 울고 나면 카타르시스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울고 싶을 때 참지 말고, 우는 것은 건강에 매우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울어야 할까요?
기왕 울려면 오래, 세게, 길게, 그리고 크게 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횡경막이 떨릴 정도로 감정을 다 실어서 제대로 울어야 효과가 좋답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눈물을 모르는 눈으로는 진리를 보지 못하며, 아픔을 겪지 아니한 마음으로는 사람을 모른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픔을 겪지 못하고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눈물이 메마른 가슴으로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날 때 처음부터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충만하셨나요?
대부분은 반대의 경험을 하신 줄로 압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겁고, 더러운 것인가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나요?
날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담당하시고, 처절하게 부르짖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 가슴 찡한 눈물이 흐르지 않으셨나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은 눈물을 통해서 전달되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가슴이 메마르고, 우리의 눈에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 흘린 기억이 언제인지요?
주님 앞에서 나의 더러운 죄를 바라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지요?
주님이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 앞에서 기쁨으로 찬양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가요?
내 눈에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그만큼 내 영성의 샘이 메말랐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눈물이 메마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십니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2)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메마르고, 강퍅한 세대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바로 눈물입니다.
그 눈물은 바로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천박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눈물이 아닌 주님의 눈물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3년간의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예수님은 3번 우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보고 울고 있는 마리아와 가족들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으로 우셨습니다.(요11:33-35)
예수님의 눈물은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별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가장 큰 슬픔이요 아픔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큰 고통입니다.
오직 주님의 눈물만이 아픈 가슴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만 위로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주님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녀의 일로, 직장의 일로, 사업의 일로,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며, 눈물짓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적인 가족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4:15)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믿음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종종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고 배 아파 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 심정을 가지고서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그 일의 당사자인 것처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슬픔 당한 자가 있다면 그 슬픔이 나의 아픔처럼 느껴지고 다가와야 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공감하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라비를 잃어버린 마리아를 위로하시면서 눈물 흘리신 주님, 그 주님의 눈물이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도 흘러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울 때, 그 눈물이 우리의 상처난 가슴을 싸매어 주고, 치유하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셨습니다.(눅19:41)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42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수님의 눈물은 평화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향한 탄식의 눈물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눈에 비추어진 예루살렘은 더 이상 평화의 성이 아닙니다.
불의 한 자들의 횡포와 폭력이 난무하는 악한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무서운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 성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무너질 것을 보셨습니다.
실제로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의 지휘아래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평화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비통함의 눈물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과 대한민국을 보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힘을 가진 자들이 횡포를 부리고,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습니다.
10만명의 목회자에 비해 6배가 많은 60만명의 무속인들이 활보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운세가 유력 일간지마다 게재되고 있고, 유명 무속인들의 광고가 실립니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서로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혼전 순결은 이미 구 시대적인 발상으로 치부하고, 간통죄를 개인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요소가 있다고 헌법소원이 진행 중입니다.
전국적으로 음란의 열풍이 불어대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패역한 도시,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잃어버린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작년에 Again 1907년-평양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여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이 땅에 다시 한번 대부흥의 역사를 일으켜보자고 대형집회와 많은 행사들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는 오히려 더 혼란하고,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 유일한 희망의 등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명서나 발표하고,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 대해서 반박하기 이전에 겸허하게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이 시대의 아픔이 바로 나의 죄요, 나의 가증함이요, 나의 패역함의 결과임을 인정하며 참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흑암 같은 어둠의 시대에 보배로운 사람들을 통해 진리의 빛을 밝히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악할 때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인정받는 노아를 택하셔서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를 준비시켰습니다.
어두울수록 빛이 더욱 환하게 비추듯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어야 할 때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향한 눈물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다시 열방을 향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애타는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기도하며 우셨습니다.(눅22:42-44/히5:7)
예수님은 세 번째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눈물로 기도하며 우십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이미 알고 계신 주님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의사인 누가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더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 주님의 기도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언제나 눈물과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사랑은 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뭉클한 감동이 오고, 눈물이 흐릅니다.
최고의 사랑은 바로 아가페의 사랑,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 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가장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시고, 내가 너희를 이만큼 사랑하노라고 데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나 값을 지불하지 않았지만 오직 믿음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마땅히 주님의 사랑에 반응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시면서 심히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셨다면 우리도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몸부림쳐야 하지 않을까요?
최고의 사랑, 최고의 섬김은 바로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도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훈련을 받는 것도, 봉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생명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이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도행전의 비전은 바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원 플러스 운동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요, 생명을 살리자는 생명운동입니다.
금번 부활주일에는 ‘아름다운 동행’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에 등록을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는 잃은 양들이 있습니다.
양들은 자신을 보호할 능력도 없고, 스스로 집을 찾아올 능력이 없습니다.
멀리 볼 수도 없기에 방치하면 언제 낭떠러지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더 늦기 전에 잃은 양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배의 자리로, 진리의 말씀 앞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을 부활절 후에 진행되는 알파코스 9기에 초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눈물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눈물로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거두하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눈물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성경에 쓰임 받는 위대한 종들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며 눈물로 주님을 만난 자들입니다.
다윗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라고 눈물로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기도하는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심히 통곡하며 눈물로 간구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해 그림자를 10도 물러가게 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시고 생명을 연장시킵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눈물입니다.
마음이 힘들고 곤고하십니까?
삶이 힘들고 지쳐있습니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 속에 직면해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눈물로 아뢰십시오.
진정한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을 가져오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내가 기도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눈물로 간구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메말라 버린 눈물로 인해 여전히 주님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집을 나간 탕자와 같은 우리를 향해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눈물로 기도하시며 이렇게 사랑을 속삭여 주십니다.
“너는 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도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하리니
너는 혼자 있다 외로워하여도 나는 너를 영원히 지키리라
너는 아무것도 없다 슬퍼하나 나는 항상 너에게 있고
너는 나를 모르나 나는 너를 아노니 내가 너를 기쁘게 하리라
너는 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도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하리라
너는 혼자 있다 외로워하여도 나는 너를 영원히 지키리라.”
(복음송 : 내가 너를 기뻐하리라 // http://blog.daum.net/jhnsong/10934862)
하나님은 오늘도 나에게 다가오셔서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 주십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항상 너에게 있고,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하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지켜 주리라.”
이 놀라운 사랑을 덧입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시며 우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는 자와 함께 울어주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셨듯이 우리들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하며,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앞에 두고, 통곡하며 기도하셨듯이, 우리들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눈물로 기도하는 생명의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세 가지 액체입니다.
땀은 노동이요, 피는 생명이라면, 눈물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눈물은 가슴 아픈 자를 위로하며, 병든 자를 치료하며, 절망 가운데 소망을 주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눈물의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눈물
본문: 누가복음 19장 41절 ~44절
설교자: 조정의
감람산 꼭대기에서 예루살렘 향하여 곧게 뻗어난 내리막 길을 따라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힘찬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제자의 온 무리가 크게 기뻐하며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능력의 왕 예수께서 그 강하신 손으로 이방인에게 억눌려 있던 예루살렘에 참된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왕에 대한 기대와 소망에 부푼 제자들은 왕과 함께 성을 따라 들어가며, 성안에서 있던 백성들은 밖으로 나와 왕을 맞이하며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편 118편 26절 노랫말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 축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요 12:13) 호산나!(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왕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시 48:1-2)이 정오의 빛을 받아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왕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비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자기 아들 요한이 증언할 메시야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8-9)
바로 지금 그 예언대로 참빛이신 예수께서 평화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귀 새끼를 타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기 백성들을 향해 나아오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기쁘고 즐겁고 영광스럽고 흥분되는 순간을 망친 이들이 있으니 39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무리 중에 있다가 잔칫집같던 분위기를 초상집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엄청난 기대로 왕을 환영하며 소리치는 인파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계란을 투척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이런 찬양을 받기에 부적절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찬양하는 것은 신성모독 행위입니다. “당장 그치게 하라”고 예수님을 비난하며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사람이 침묵하더라도 입이 없는 피조물인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아무리 너희가 나를 거절한다 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만물에게 찬송을 받기 합당한 만물의 창조주요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다’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지 그런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난 설교 시간에 이것이 심판의 메시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너희가 거절해도 만물은 나를 찬송할것이다’라는 표현자체가 그들의 거절에 대한 책망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표현이 구약 선지자 하박국의 표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분열왕국 시대에 타락한 유다를 왜 가만히 두고 있냐고 하나님께 물었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갈대아인(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악하고 부패한 갈대아인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그때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갈대아인을 사용하시지만, 갈대아인의 추악한 범죄도 가만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물으실 것이라고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합 2:11). 담을 이루는 각각의 돌들, 집에 있는 돌들이 갈대아인의 포악한 행위에 대하여 정의를 부르짖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하박국에게 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그대로 바리새인에게 사용하셨습니다. “너희의 죄악, 너희의 교만에 대하여 이 돌들이 정의를 부르짖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1.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을 태운 나귀 새끼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왔고 이 때 예수님은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41절).
참 이상한 광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서 나뭇가지와 옷을 예수님 발 앞에 펼쳐두고 시와 찬미로 노래를 부르며 기대감에 충만해있는데, 정작 예수님은 성 가까이 오시면서 통곡하셨습니다. 그냥 눈물을 주르륵 흘린 것이 아니라 원어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은 격하게 흐느끼셨습니다. 울부짖으셨습니다. 왜 우셨을까요? 왜 그렇게 슬피 흐느끼며 울부짖으셨을까요?
42절에서 44절까지 예수님이 울부짖으며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무지함때문에 우셨습니다(42절)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2절에서 예수님이 통곡하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무지함때문에 통곡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오늘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화의 소식을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어떤 평화에 관한 소식입니까? 그들은 이방국가와의 평화를 원했고 자유를 원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평화,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피를 통해 죄인과 평화협정을 맺겠다는 엄청난 소식을 공포하셨습니다. 죄의 종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하시겠다는 복되고 좋은 소식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평화의 소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그 소식을 듣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시온을 향하여 평화를 공포하러 산을 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발을 알아보지 못합니다(사 52:7). 이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예수님은 흐느껴 우셨습니다.
가끔 길에 보면 “아이를 찾습니다”라고 붙여 놓은 전단지를 봅니다. 잃어버린 지 십수년이 된 어린아이의 사진이 있고, 현재는 20살이 넘었을 것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부모가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얼마나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밤잠을 자지 못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언제가 아이를 되찾을 날을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기적적으로 십수년만에 아이를 찾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에게 이보다 더 기쁜일이 있을까요? 정말 뛸듯이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부모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부모를 거절하며 함께 하기를 싫어한다면 자식을 찾은 기쁨은 금세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런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낳으시고 기르셨는지 설명하는 책입니다(육아일기). 그런데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을 떠나 이방 민족에게 팔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서를 통하여 이들을 찾기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어떤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올 것인지 상세히 알려 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에 나셔서 나사렛 사람으로 자라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이 계신 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은 화목제물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죽었던 수많은 희생양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화목제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것을 못알아 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아본 소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24)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지만,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은 눈이 가리워져 보지 못하고,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여 예수님은 흐느끼며 통곡하셨습니다.
구약의 유대 백성을 보며 슬퍼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으로 예수님은 우셨을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3-4)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함을 보고 우셨습니다. 그들이 자기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에게 임한 평화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며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이 받을 심판을 아셨기 때문에 울부짖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때문에 우셨습니다(43-4절).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43-44절까지 예수님은 계속해서 미래형 동사를 사용하십니다.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일을 미리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날’이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토둔(토성, 공격축대)을 쌓고 이스라엘 백성을 사면에서 포위할 것입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임을 당할 것인데, 그 참혹함에 대하여 ‘너와 자식들을 땅에 메어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과거 독일 나치군이 유대인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벽에 메어쳐 죽였는데, 예수님은 그런 끔찍한 방식으로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벽은 모두 무너지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폐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이 끔찍한 미래를 내다보셨습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 심판의 날에 참혹한 일이 그들 가운데 일어날 것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평화의 소식을 거절한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1세기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AD66년 유대인이 로마에게 반역을 시도했을 때 그 결과로 로마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70년에는 로마 황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약탈하기 위해 방벽과 참호를 만들고 예루살렘 성을 사면에서 둘러 싸며, 일부 탑과 성벽은 주둔하는 군대를 위해 남겨두지만, 나머지는 여기에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AD135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의 지역명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로 바꾸고 유대인을 말살하여 역사에서 그들의 흔적을 영원히 지워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가까운 20세기에도 유대인은 나치에 의해 6백만 가량이 학살되었고, 어린 아이만 약 백만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예수님이 지금 그것을 경고하고 있음에도 며칠 후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면서 끝끝내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
그들은 임박한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당할 고통과 슬픔을 미리 아시고 애통히 여기셨습니다. 통쾌하고 시원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격정적으로 흐느끼며 괴로워할정도로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기 원하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매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마치 많이 맞아서 멍이 들고 붓고 눈물이 나도 끝까지 악을 쓰며 고집을 피우는 아이를 때리는 부모의 마음처럼,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개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두려워해서라도 제발 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발 끝까지 부모가 내미는 사랑의 손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우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우셨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두 번 정도 등장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눈물은 참으로 이타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울지 않으셨습니다. 울어야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억울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예수님만큼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부지중에 저지른 죄때문에라도 당하는 고통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죄를 알지도 못하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신 예수님은 왜 많은 사람들의 죄때문에 목숨이 끊어질정도로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분하고 억울하게 여긴다면 통곡할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때 울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괴로울 때 눈물이 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찢기시고 상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친밀했던 관계가 끊어지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성경은 예수님이 우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신 장면, 그것도 울부짖으셨던 장면은 죄인이 평화의 왕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그리고 그 결과 받을 심판을 보셨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깝게 여기셔서 우셨던 바로 이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딤전 2:4). 그분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가 돌이켜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일 기뻐하십니다(겔 18:23).
수많은 군중의 환호와 기대, 즐거운 찬송 소리와 어색하게 섞여 울려 퍼지는 예수님의 흐느끼는 울부짖음 소리에서 우리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 사랑의 주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거절하여 당할 영원하고 무서운 심판을 피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흐느껴 우실 정도로 당신이 그 길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눈물은 한 가지 큰 교훈을 줍니다.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합니다. 죄인이 망하게 되었을 때, 죄인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무감각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되돌아 봅니다.
죄인을 향한 우리의 눈이 냉정하고 차가울때마다 그들 앞에서 슬피 우셨던 주님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아버지 옆에서 무감각하고 관심도 없는 매정한 형제, 자매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직장동료, 친구,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시는 예수님
눅 19:41-44절 / 밴쿠버 영광교회 윤성은 목사 / 크리스천신문
오늘 함께 읽은 말씀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기록은 복음서에서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비롯하여서, 요한복음 11장에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또 한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칭해주실 정도로 참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가 아프고 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11장 33절을 보니까, 예수님은 그곳에서 울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시며, 그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리고 35절에,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눈물은 연약하여 질병앞에 고통당할 수밖에 없고, 죽음앞에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그 아픔에 공감하시는 눈물이셨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계시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고통과 아픔속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예수님도 함께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아픔도 불통도, 언젠가는 주님의 능력으로 다 해결이 되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듯, 우리도 예수안에서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될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고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주님은 우리의 지금 당하는 이 고통과 눈물을 전혀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 고통에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나약함을 보시고 마냥 타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공감해주시고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4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그래서 실수하고 넘어진다 하여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때를 따라 도와 주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서에는 바로 요한복음의 이 말씀과 함께 두 번 예수님께서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서신서의 말씀까지 확대해서 보면, 예수님은 한 번 더 통곡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음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묘사해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로 44절을 보면,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나사로의 죽음의 상황에서 흘리는 눈물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 하는 눈물이라면,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는 통곡과 눈물은, 내가 나의 상황을 두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임을 알기에,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또한 이길을 걸어간 후에는 부활의 기쁨이 주어질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내 앞에 주어진 십자가의 고통, 아픔이 달가울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할수만 있으면 이길을 피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일 거라 생각이 됩니다. 크고 좋은 것이 예비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얻기까지 통과해야할 고난이 너무나도 엄청나다고 하면, 고난 없이 지금 이대로 평안하게 그대로 갔으면 하는 바램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요즘 새벽기도회 시간에 욥기서를 읽어가고 있는데, 욥기 마지막장에는 욥이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이렇게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갑절의 복, 괜찮아요. 지금 이 상태로 너무 큰 어려움 없이 그냥 쭉 가고 싶어요.’ 여러분도 그런 생각해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예수님은 바로 그 고뇌속에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바로 그 간구. 그렇게 간구하고, 또한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더 큰 고통과 아픔과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데, 왜 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통곡과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그 길을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내 뜻을 잠재우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는 그 길을 같이 가자 하십니다. 곧 주님의 두 번째 눈물은,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기를 결단하는 눈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미 보신 것처럼,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 보니까,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약의 기록을 보면, 총 세 번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눈물은 모두 감람산 근처에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실 즈음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굳이 차이를 이야기해본다면, 나사로의 죽음앞에서는 그냥 눈물만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통곡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는 얼마만큼의 아픔으로 우셨을까요?
오늘 41절 말씀에서는 우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의 말씀으로 보니, ‘에클라우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감정을 삭이며 소리죽여 우는 조용한 내적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그 슬픈 감정을 격렬한 비통으로 표출하여 애곡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격렬한 괴로움을 영혼의 부르짖음 같은 통곡으로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표현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가장 먼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겪게 될 민족의 비극을 보셨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43절과 44절을 보면, 장차 이스라엘이 당하게 될 비극적 장면을 이처럼 예견하고 계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견하신 때를 AD 30년경으로 본다고 하면, 정확하게 40년 후에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최정예 군대에 의해 완전 파괴가 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완전 포위가 되었고, 로마군대는 성 주위에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결국 정말 성을 쌓은 돌위에 돌 하나도 남겨지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았고, 백만명이 넘는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찾아보니까, ‘로마군에겐 더 이상 죽이거나 약탈할 사람들이 없었는데, 이들의 분노의 대상이 될만한 것들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예루살렘의 땅도 파헤치면서 누구도 어디가 어디였는지 알아볼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완전, 정말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흩어져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은 통곡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택한 민족,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던 내 민족이 사라지게 될 거라는 것을 내다보신 예수님은 그 슬픔, 그 아픔을 주체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사실은 어쩌면 이것보다 주님의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를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길이 있는데, 기회가 있는데,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42절에 이렇게 기록한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하였는데, 네가 지금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탄식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평화에 관한 일이라는 게 뭘까요?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평화의 왕으로 이땅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었습니다. 그 답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거의 대부분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종처럼 부릴 수 있는 왕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내 꿈을 이루어줄, 마치 알라딘 램프에 나오는 지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감람산 중턱에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는 주님을 그려보는데, 그 장면과 오버랩이 되면서,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교회를 가만히 바라보시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흡족한 미소를 보여주실까? 아니면 2천년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시듯, 울고 계시는 건 아닐까?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웃어주실거 같은가요? 아니면 눈물을 흘리실까요?
2천년전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나 같이만 신앙생활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어디서고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믿어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고, 열심을 다해 말씀을 보고 기도했고, 충성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게 될 것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문제가 뭐였나요? 예루살렘 성안의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였지만, 정작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왕으로 모시지를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우리의 교회에 과연 예수님이 계신가? 예수님이 왕이신가? 예수님이 주인이신가?’를 묻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평생 예수를 믿었습니다. 내가 평생 교회를 지켜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우리들을 향해 묻고 계십니다. ‘지금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
혹시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주인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오랜 전통이 주인되어 있지는 않는지.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이 주인되어 있지는 않는지. 주님이 묻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44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은, ‘…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보살핌 받는 날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방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러한 보살핌을 받는 날은 곧 우리에게 주신 기회의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속에 있는 오늘이라는 날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더욱 더 예수님 잘 믿으라고 주신 기회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내가 잘 믿고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착각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 주님은 나를 구원의 자리에 세워주실까를 점검하면서, 나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정결하게 겸손하게 살아가라고 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중심에 계신가?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주인삼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예수님께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시간으로 삼으라고 주신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성령충만하다고 이야기하고,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신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제발 너희 자신을 좀 시험해보고, 너희가 믿음이 있는지, 예수님이 지금 너희 안에 계신지 점검해 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날을 보살핌 받는 날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믿음도 없으면서, 제대로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도 못하면서, 내가 왕노릇하면서도, 오늘을 믿음있는척 착각하고 있다고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서 심히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오늘 주님 오실 때, 주님 흡족해 하실지, 눈물을 흘리실지.
오늘 여러분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가요? 예수님이 주인되어 계시나요? 우리의 교회는 예수님이 이끌어가고 계시나요?
오늘 내가 늘 믿음안에 있는가 점검하고 회개하며 살고 계시나요? 옛날에, 왕년에 만났던 예수님 말고, 오늘 지금 현재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계시나요?
오늘은 기회의 날입니다. 회개하는 날입니다. 은혜받는 날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에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은 회개하기 좋은 날입니다. 오늘은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하시되,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 삼은 것들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을 주인삼고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회개하고, 그래서 주님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 교회를 바라보실 때, 흡족해 하시는, 바로 그 웃음을 안겨드리는 복된 성도,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누가복음 19:41-44
무너지고 실패한 곳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평화
앞으로 5주간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일을 기준으로 40일 전부터 지키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순절이 다섯 주간이 되고, 그 뒤에 고난 주간을 거쳐 부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앞으로 사순절 5주와 종려주일, 부활주일을 포함하여 총 7주간 동안 누가복음의 말씀, 특히 예루살렘 입성에서 시작하여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를 함께 보려고 합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기간 동안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누가복음의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는 복음서의 내용들을 모두 혼합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각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읽지 못할 때도 있고, 성경의 의미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말씀을 드리면서 누가복음의 말씀을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는 하겠지만, 의미 자체는 누가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만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래서 제자 둘을 보내 나귀를 끌고 오도록 명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그냥 길에서 나귀를 만나서 타셨다고 기록하지만(요12:14-15),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께서 일부러 나귀를 타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서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에 대해 이런 설명을 합니다. 당시 유월절 기간이 되면 수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로마는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폭동을 막기 위해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 통치 기간에 수많은 반란을 일으켜왔습니다.
로마의 군대는 폭동이 일어났을 때 막기 위해 파견된 것도 있지만,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처음부터 압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장군은 당연히 멋진 말에 훌륭한 무구를 갖추고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재현한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로마의 힘에 반대하며, 폭력과 힘에 의한 평화를 반대한다는 의도를 명확히 보이시기 위해 명마와 비교되는 나귀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가실 때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와서 호산나를 외쳤다고 알고 계시지만, 그것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요12:12-13).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들어가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그런 행동을 보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런 모습에 당황하고 놀랐다는 말도 첨가되어 있습니다(마21:10-11).
그 와중에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선포했던 말을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외칩니다. 38절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며 외쳤다고 말합니다.
이때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 좀 자제시켜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추종하는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바리새인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사람들을 침묵하게 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인한 평화의 선포, 이미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에 천사들이 선포했던 그 선포가 이 순간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평화가 시작되리라는 말씀입니다.
파괴된 예루살렘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새로운 장면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십니다. 성경에 몇 장면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눈물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내용도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 때문입니다.
오클라호마 폭탄테러 사건 추모 공원 부근의 성요셉교회 세워진 우시는 예수 상. ⓒ위키피디아
오클라호마 폭탄테러 사건 추모 공원 부근의 성요셉교회 세워진 우시는 예수 상. ⓒ위키피디아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붕괴됩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됩니다. 복음서들은 가장 빨리 기록된 마가복음이라 할지라도 주후 70년 전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즉 누가복음을 기록한 저자 혹은 그 집단은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았고,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눈물은 예수님만의 눈물이 아니라 실제로 파괴되어버린 예루살렘을 바라보았던 초대 교인들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붕괴되어버린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초대교인들의 눈물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시리즈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누가복음은 분명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교회는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되어서 유대-로마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하게 되면서 외부 지역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시리즈가 예루살렘을 중요시 생각하는 점은 사도행전에 더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도 단적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명령이 나타나는 누가복음 24장 47절을 보면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이 “갈릴리로 가라”라고 말하고 있는 점과는 사뭇 다릅니다(마16:7).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에 모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힘쓰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교회의 중심지로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을 선교의 중심지, 모든 교회의 중심지,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평화의 중심지라고 여기는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62장 1-3절 말씀입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구원의 시작점은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작되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모든 구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평화가 시작되는 곳,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될 평화를 선포했던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역사 속에서 평화의 시작점이 아니라 참혹한 폐허가 되어버린 곳, 그곳이 예루살렘입니다.
눈물과 평화의 선포
오늘 예수님께서는 폐허가 되어버릴 예루살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십니다. 43절과 44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예언적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만, 초대교회의 생생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원수들, 로마 군병들이 흙벽을 쌓고 예루살렘의 사방을 둘러싸고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 쳐서 쓰러뜨리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는 그 생생한 현장의 모습입니다.
이 본문이 생생한 기록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주후 70년경에 있었던 유대-로마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유대인 수가 대략 11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본래 예루살렘은 벼랑 위에 서 있는 천연의 요지이기 때문에 함락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로마 군인들은 몇 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안에서부터 말려 죽이는 작전을 사용합니다. 로마의 손에 완전히 떨어지기 전 예루살렘은 먹을 것이 없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지옥과 같은 광경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절벽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에서 일어난 전투에서는, 유대인 포로로 하여금 절벽을 오를 수 있는 흙벽과 흙길을 쌓게 했다고 합니다. 마사다에 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향해 흙벽을 쌓고 있는 동포들을 죽일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가 싸울 수도 없어 결국 마사다에 고립되었고, 결국 집단 자살이라는 방식을 택하게 됩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이 주후 70년의 유대-로마전쟁 시기에 이루어졌고,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과 이 시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끔찍함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런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평화의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보며 우시고는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다 파괴되고 망하게 될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말이 어울리겠습니까?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도 이미 다 망해버린 예루살렘 앞에서 평화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평화를 선포하셨고 누가복음도 예루살렘을 향해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인 44절 후반부에 있습니다.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보살핌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피스코페’입니다. ‘에피스코페’는 본래 ‘찾아옴’, ‘와서 무언가 지도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감찰한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고, 목회서신들에 보면 이 단어가 ‘감독’이라는 직분을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라는 의미로 ‘보살핌’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개역개정 성경의 각주에 보면 ‘심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두 가지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도우시기 위함이고 하나는 심판을 위함입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예레미야에 나타난 심판을 ‘에피스코페’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에피스코페’의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담고 이 말을 사용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은 지금 심판 받을 날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될 예루살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위해 우십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42절에서 평화가 지금은 예루살렘의 눈에 숨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겉으로 드러나게 될 ‘에피스코페’는 분명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여지겠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보살핌을 뜻하는 ‘에피스코페’가 숨겨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실패도 경험하고 좌절도 경험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상태와 같이 완전히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쌓은 모든 것이 0이 되어버리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단순히 세상의 악에 의해서 악한 누군가에 의해서, 세상의 폭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실패한 나, 망해버린 나, 재기할 수 없는 나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은 그저 무너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무너짐은 다시 일어서기 위한 무너짐이고, 지금의 실패는 더욱 큰 평안을 위한 실패입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습니다. 폐허가 폐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실패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좌절이 좌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함을 위한 쓰러짐입니다.
맺는 말
더욱 큰 평안을 위한 좌절, 아픔, 쓰라림, 실패, 어쩌면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 불만과 분노를 느끼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지금의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를 외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 흘리시는 분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또한 그 분의 눈물은 그저 동정의 눈물, 나의 아픔을 동조하는 눈물일 뿐 아니라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눈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눈에는 평화가, 평안이, 복이, 은혜가 안보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평화의 때, 보살핌의 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옵니다. 그 때는 분명 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다 무너져버린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좌절과 절망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는 평화를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
옥한흠 목사 / 눅 19장 41~44절
41절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절 -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절 -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절 -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지금 예수님은 아름다운 예루살렘 시가지와 성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감람산 기슭에 도착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아이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그를 향해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예수님의 얼굴에는 비통함이 서려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우셨다」고 매우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원래 이 단어의 의미를 살린다면 훨씬 더 강한 어조를 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간장이 끊어지듯 흐느끼며 눈물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갑자기 우셨을까요?
1.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42절).
"평화에 관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 즉 우리가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과의 원수된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의 관계로 들어갑니다. 그를 통한 평화의 길은 칼이 아니라 사랑으로 성취됩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환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제시한 평화의 길인 예수님을 배척한 사망의 도성이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완고함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자초하고 말 것을 주님은 내다보시고 눈물 흘리셨던 것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나라에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나라가 참으로 평화를 구가하는 나라가 되려면 먼저 지도자로부터 온 국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경배하는 평화의 왕으로 모시지 아니하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추구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의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회개와 믿음과 사랑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볼 때 우리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기회를 완전히 놓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네 눈에 숨기웠다」(42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절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제 받을 희망이 없어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또 44절의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했다」라는 것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 성이 몹시 매혹스럽게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기회를 놓쳐버린 그 성이 너무나 처량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기회란 정치적인 문제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나 국가 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을 소중히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분명히 이 나라를 복음화 시킬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이웃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눈물로써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예수 믿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선지자적인 사명인 동시에 제사장적인 의무입니다.
3. 예루살렘에 임할 가공할 만한 멸망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안은 유월절을 맞아 원근각처에서 몰려든 인파로 마치 죽었던 도시가 다시 살아난 듯 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정신 차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43절/"날이 이를지라").
예수님이 하신 예언은 정확하게 40년 후에 사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주후 70년, 로마황제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토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당시 그의 통역관이었던 요세푸스의 기록이 이를 역사에 입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 우리나라를 놓고 예언된 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종말의 두 사건을 동일하게 다루셨다는 점입니다. 다른 표현을 빌자면, 마치 멀리서 보면 하나로 겹쳐있는 산봉우리도 가까이 가보면 그 둘 사이에 예상할 수 없는 전경이 놓이는 경우와 같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주후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사건과 2천 여년이 지나면서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는 세계 종말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비록 그 사이에 수 천년이라는 시간의 골짜기가 가로 놓여있다 하더라고 부인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은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이 액면 그대로 성취되었다면 남아 있는 큰 사건, 즉 세계종말도 확실하게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울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제를 위해, 이웃을 위해,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로써 기도하는 우리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