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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47
부조리한 권력을 앞세워 부당한 이익을 차지하는 사람보다 더 치졸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생각한다. 충분한 권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만큼 무식한 인간은 없다고.
“찾아계시옵니까, 황후마마.”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관복을 차려입은 다섯의 환관이 동궁으로 찾아왔다. 언젠가 고 환관이 데려와 은에게 충성을 맹세케 했던 고려 출신 환관들이었다. 아침 식사 전부터 차를 즐기고 있던 은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그들을 맞는다.
“오늘은 긴히 부탁이 있어 이른 시각부터 청하였습니다.”
“하교만 하소서. 마마.”
무슨 일이든 은을 위해 기꺼이 움직이겠다는 각오로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은은 흡족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하되, 다만 눈과 귀를 조금 더 열어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의 주시하고자 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고들 계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주로 왕래가 있는 인사들 가운데에는 누가 있는지, 서궁에는 얼마나 자주 들르는지, 무슨 일로 들르는지, 하물며 등청하고 퇴청하는 시각의 미세한 변화까지도 내게 고하도록 하세요.”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은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장의 서랍을 열어 그 귀퉁이에서 갖은 색실로 수놓인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툭, 하고 환관들의 앞에 내려놓아지는 주머니에서는 꽤나 묵직한 소리가 났다.
“앞으로는 나를 도울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만한 일들을 하자면 시간뿐만 아니라 다른 필요한 것들이 많을 테지요. 요긴하게 쓰도록 하세요. 부족함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시구요.”
“황공하옵니다, 황후마마. 그럼 저희는 이만.”
정중히 예를 갖추고 발소리마저 죽인 채 사라지는 환관들의 뒷모습은 은에게 커다란 신뢰감을 준다. 자리에 앉은 채 가벼운 한숨을 내려놓은 뒤에는 입가에 뜻 모를 미소마저 떠올랐다. 이제야 자신이 누릴 권력의 크기를 알아서일까, 은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서 잠시 안락을 취했다.
“마마, 장 상궁이옵니다.”
조용히 문을 여닫고 장 상궁이 들어섰다.
“어찌 혼자인가. 언주를 데려오라 하였거늘.”
“처소에 그 아이는 없었습니다, 마마.”
“없다니. 오늘은 비번이라고 하질 않았는가. 다닐만한 곳은 찾아보고 오는 겐가.”
“그것이, 처소 아이들의 말로는 서궁의 궁인이 무슨 말인가를 전하고 그 아일 데려갔다고들 하였습니다만-”
“서궁?”
즉각적으로 떠오른 것은 소홍의 얼굴이었지만, 그녀와 언주와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었다. 비번인 언주를 데려다 향유 심부름을 시켰을 리도 없고. 잠시 골몰하던 은은 무릎을 쳤다.
“진 대인이야.”
애초에 정전에서의 그의 말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은이었다. 그가 한낮 궁인에 불과한 언주를 감싸주고 나섰다면 분명 뭔가 모략이 있고 계획이 있어서였을 터. 분명 그가 서궁을 통해 언주를 불러낸 것임에 틀림없다는 쪽으로 확신이 기울었다. 어제 늦은 밤이라도 제가 먼저 언주를 불러 사정을 물었어야 했는데. 능구렁이 영감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어찌하오리까.”
“먼저 볼 일이 있으시다는 데 노인네에게 양보를 해야지, 별 수 있겠나.”
//貢女 奇皇后//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받아본 적 없는 존대와 환대에 언주는 쭈뼛쭈뼛했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대문 안 쪽에서 손을 내미는 집사의 미소에 언주는 꾸벅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이 몸담은 황성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게 웅장하고 거대한 저택은 마치 자신이 있을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듯 여겨져 절로 주눅이 들 정도였다. 일국의 좌승상이라 하면 으레 이런 대궐 같은 집에 살게 되는 걸까, 겨우 대문 문턱만을 넘은 언주는 넋을 놓은 채 저택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언주는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조금씩 몸을 돌려가며 입을 헤 벌리지 않고는 못 베길 아름다운 정경을 구경했다. 그리고 완전하게 한 바퀴를 다 돌았을 무렵, 눈앞에 이 거대한 저택의 주인이 나타나 언주를 맞았다.
“이 낡은 집이 썩 마음에 든 게로군.”
“...좌승상 어른!”
언주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다음 행동을 어찌 취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굳어진 언주를 향해 진 대인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짓는다.
“하하, 일어나지 않을 셈이더냐.”
“아, 저, ‘언주’라 하옵니다. 부르셨다는 전언을 듣고-”
“불렀다는 말은 어감이 좋지 않아. 아무튼 내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구나.”
진 대인은 ‘초대’라는 단어로 언주를 조금 더 설레게 만들었다. 그러나 언주는 그런 가운데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진 대인에 대해서 알면 알았지 결코 모르지 않는데다가, 그가 양파껍질처럼 까도 까도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 영감이라는 사실은 이미 만인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저를 정전에서의 곤욕으로부터 구해내 준 일 때문에 제가 여기 와 있게 되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므로. 황제나 은과 관련된 일이라서가 아니라 제게 직접적으로 당면한 일이기에 더더욱.
“따라오거라.”
진 대인은 특별한 손님을 맞을 때에만 가는 별채 안쪽의 후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쪽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 대신 돌고 돌아가는 가장 먼 길을 택했다. 그 길에서 마주치는 시종들의 숫자만 해도 황성의 궁 하나에 딸린 궁인들의 수와 맞먹을 정도여서 언주는 또 다시 감탄해야 했다. 그들은 진 대인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일어날 때 즈음엔 거의 모두 언주에게로 친절한 시선을 주었다. 그런 시선들에 언주 역시 일일이 고개를 숙여 화답하고는 있었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 앉거라.”
훌륭한 정원의 아름다운 정자였다. 미리 준비를 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 분의 다기와 예쁜 주전자 속에는 좋은 향기의 차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언주는 현실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에 눈이 가고 마음이 이끌렸지만 머리로는 조금씩 이 자리를 불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앉게 되자, 언주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취하려 노력하면서 곧 입을 열었다.
“저, 이제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째서 저를 부르셨는지-”
“초대한 것이라고 하질 않았느냐.”
“하오나, 대인 같은 분께서 인맥이 부족하여 저 같은 미천한 궁인을 초대하였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미천해? 그런 것은 누가 정하는 것이냐. 태어날 때부터? 네가 여자라서? 아니면 네가 아직 어려서?”
자신을 데리고 놀 심산인가 싶었다. 긴장을 해서인지 스스로가 하는 말 이외에는 진 대인의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실례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요컨대 천하고 귀하다는 것은 사람이 마음대로 정해버려선 안 된다는 것이겠지. 날 때부터 천하다거나 귀하다거나 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질 않겠느냐?”
처음으로 이해한 그의 말이었다. 천민의 딸로 태어나 날 때부터 천하다는 신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억울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 그것은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바가 아니었으니까. 예컨대 은만 보아도 귀한 가문의 영애로 이런 제국의 황성에서 궁인이 되었다가 황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질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언주는 약간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은 천민으로 궁인이 되어 살아갈 운명이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을 이리 살아야 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진 대인은 잠시도 그런 언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예?”
“네가 이 말을 동궁에 가서 일러바친대도 별 수 없겠지만, 동궁 마마 역시 고려에서 온 공녀에 지나지 않았던 때가 있지 않았느냐. 내 알기로 너 역시 공녀 출신이라 들었는데. 그렇다면 너와 그 분의 기본이 다를 것이 무엇이냐.”
“무슨-”
“같은 조건으로 시작한다면 너도 황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처, 천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언주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놀란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볼은 이미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늙은이가 이럴 속셈이었구나. 순진한 궁녀 하나를 꼬여내 욕심 가득한 요녀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내 말을 곡해하였구나. 아쉽게도 나는 너를 그렇게 만들어 줄 정도의 힘은 없단다.”
“허면 어째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래, 답해주마. 나는 네가 몹시 마음에 드는구나. 원한다면 네가 원망해왔을 그 운명을 바꾸어, 여기 이 저택에서의 삶을 누려줬으면 싶은데.”
“.......?!”
“어떻겠느냐, 나의 양녀(養女)가 되는 것이.”
언주는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 보다 놀랍고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언주는 맥 빠진 사람처럼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이 커다란 저택을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는 것. 승상의 딸이 되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운명으로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언주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흥분되게 만들었지만 머리를 지배한 이성이 그것들을 애써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 입니까.”
“그건 외려 내가 묻고 싶구나. 어찌하여 너처럼 명석하고 영특한 아이가 내 딸로 태어나지 않았느냐?”
그 질문에 진 대인은 언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이 어린 아이의 가슴 속은 저 떨리는 눈동자 이상으로 요동치고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있으리라.
“지금 당장 답을 달라고 하진 않으마.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다만 늙은이를 너무 오래 애태우는 짓은 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고 싶구나.”
“........”
“좌승상의 막내딸. 그리고 서궁 마마의 여동생. 난 아마 네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줄 수 있는 ‘아비’일게다.”
아무런 대답 없이, 이미 저 깊은 행복의 망각으로 빠져버린 언주를 진 대인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흥분한 채로 들떠있는 언주에게 어떤 말이 가장 확실한 극약이 될지, 진 대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네가 남부럽지 않을 모든 것들을 가지게 된다면 ‘지원’같은 훌륭한 청년에게로 시집을 보내는 것은 문제도 아니겠지.”
첫댓글 진대인이......머리가 참좋네요...
젬있게 보고가요.. 진대인.. 엄청 무서운분이시네요....
와...좋아하는 사람으로 꼬시네요...나같아도 저런 좋은집의 양녀...하고싶긴하겠어요
세상에 작가님! 분명히 요사이 장르방을 들어왔었는데 전 왜 46화를 이제야 본 것일까요. 슬슬 오실때가 된 것 같은데 싶었는데... 드디어 오셨네요ㅎㅎ 오랜만에 보는 은이의 모습에 기분이 좋네요. 다음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여전히 흥미진진한 스토리.. 앞으로도 쭈욱 이어주세요^^
진대인은 정말 언제봐도 소름이 끼쳐요;; 어쩜 저렇게 언주의 약한 부분만을 조목조목 짚어내는지...
진대인의 정확한의도를 모르니 긴장타야겠네요 ㅋㅋ 정말 사람의 심리를 무서우리만치 간파하고 있어요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