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iYYnsZz3IM
교향시' 타피올라' Op.112
1925년 회갑을 맞아 핀란드 정부로부터 백장미 십자 훈장을 받은 시벨리우스는 그 이듬해 뉴욕 필의 청탁으로 이 작품을(1926) 완성했다. '타피올라'는 핀란드의 옛 신화 '칼레발라'에 나오는 숲의 신 타피오가 살고 있는 왕국을 말한다.
이 작품은 조국의 상징이기도 한 국토에 번성한 숲과 숲의 신 타피오를 장대하고 신비스럽게 그린 원숙한 만년의 걸작이며, "타피올라"는 이들 교향시 중에서 가장 쓸쓸하고 가장 차가운 작품이기도하다.
시벨리우스는 원래 가지고 있는 음악성에 기교를 불어넣은 한편 스스로 창조해낸 관현악 기법을 적극 활용하는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음악을 자향한 <타피올라>는 그의 완숙기의 대표작이다. 이 <타피올라>가 시벨리우스 예술성이 집약된 작품이라면, 혈기왕성한 나이에 작곡한 <핀란디아>는 세계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핀란드 민족의 대 서사시라고 할수 있다.
폰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니의, 도이치 그라모폰(84년) 이음반은, 싸늘하면서 회색빛이 감도는 음색으로 생생한 야성미를 살린(64년)에 비하면 치밀하면서도, 잘 다름어진 세련미가 돋보이는 음반이다.
칼레발라
이교시대(異敎時代)부터 그리스도교 시대에 걸쳐 핀란드 각지에 전승되는 전설 ·구비(口碑) ·가요 등을 집대성, 이를 선택하여 한편의 서사시로 만든 것이다. 칼레발라란 칼레바의 나라라는 의미인데 소재(所在)는 분명치 않다. 편자 엘리아스 뢴로트는 청년시절부터 전승문학에 흥미를 가지고 의학에 종사하면서 국내를 여행하여 그것을 수집, 한 편의 서사시로서 이를 재창조하였다.
1829∼1831년에 우선 《칸텔레》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 1835년에 《칼레발라》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그 결정판은 1849년에 완성되어 핀란드문학 최초의 일대 금자탑이 되었다. 《칼레발라》에는 일관된 줄거리는 없고, 약간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연작적 시편(連作的詩篇)이다. 주인공으로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하는 것은 음유시인(吟遊詩人) 베이네뫼이넨, 대장장이 일마리넨, 연애하는 청년 레민케이넨 등 3명인데, 이 3명이 사는 칼레발라에 대응하는 것이 포욜라의 땅으로, 이 양자의 대립이 시편의 큰 줄기가 된다. 여기에 더하여 이교 ·그리스도교 혼합인 갖가지 전설적 인물이 등장하나 농부와 포수 ·어부 등 고대 일반인의 일상생활을 구체적으로 또한 서정적으로 읊은 것도 다른 유럽의 고대서사시와 다른 점이다.
《칼레발라》의 전신인 《칸텔레》라는 이름은 핀란드 고유의 현악기의 이름이며 이 칸텔레를 창조한 것이 베이네뫼이넨이다. 풍부한 모음(母音)으로 새긴 시구(詩句)는 간결하고 힘차며, 두운(頭韻)과 각운(脚韻)의 고상한 가락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현대 핀란드의 대작곡가 시벨리우스는 《칼레발라》에서 영감을 받아 많은 작곡을 하였다. 또 미국의 롱펠로는 《칼레발라》의 시법(詩法)과 인물에서 암시를 받아 《하이어워서》(1855)를 썼다고 한다.
오랫동안 러시아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 핀란드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칼레발라》에서 찾아내어 독립의 길을 찾았다.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
깊은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나라 핀란드는 민족적으로는 동양인을 선조로 갖는 핀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국민적 작곡가라고 일컬어지는 시벨리우스는 92세의 고령으로 사망한 핀란드 최대의 작곡가이다. 핀란드에는 오랫동안 뛰어난 음악가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오랫동안에 걸친 이웃나라의 거듭되는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의 특징은 이와 같은 국정을 배경으로 하여 엄격한 북구의 풍토와 침략에 의한 불안한 생활에서 생겼다고 짐작된다. 음울한 민족의 감정 심리를 반영한 아름답고 슬픔을 지닌 음악으로 그안에는 남구적인 밝고 명랑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865년 12월 8일, 핀란드의 헤메인리나에서 태어난 시벨리우스는 고전 교육의 좋은 면을 받아 어릴때부터 예리한 음악적 재능의 싹을 나타내어 이론을 배우기 전부터 작곡을 했다고 한다. 9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5세때에는 바이올린에 열중하여, 그때부터 10년간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작정으로 맹렬한 연습을 했다. 가족들은 그를 헬싱키의 대학에 입학시켜 법률을 공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을 중단시킬 수 없어 헬싱키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면서 동시에 특별생으로서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우도록 했다. 그러나 음악에만 열중하고 법률을 공부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에는 음악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은 좌절되었으나 작곡에 전념한 결과, 많은 작곡을 하여 장학금을 받고 독일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다시 귀국하였고, 1890년부터 1891년까지는 빈에서 작곡법을 배우고 견문도 넓혔다. 귀국한 이듬해 핀란드 명문의 영애 아이노와 결혼했다. 1893년에는 28세로 모교의 작곡과 바이올린 교사가 되었으며 그 무렵 차례로 새로운 작품을 발표해 갔다.
시벨리우스가 초기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던 음악은 실내악 연주에 참가하여 알게 되었던 빈의 고전 음악이다. 그리고 시벨리우스가 최초에 흡수, 동화된 것은 그리그이며 차이코프스키의 영향은 최초의 2개의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에 강하게 보이지만, 그 이후에는 시벨리우스의 음악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았다. 시벨리우스에게 있어서 깊고 오랜 동안 침투되었던 것은 빈의 고전음악이며, 특히 베토벤의 영향이 컸다. 또 시켈리우스는 빈과 베를린 시대에 브루크너 및 바그너와 접촉했다. 브루크너에게는 일평생 공감을 갖고 있었으나, 바그너에 관해서는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바그너의 스타일, 특히 금관악기의 서법에는 감탄하였으며, 사상에 영향을 받은 면이 많이 있었다.
시벨리우스가 젊었을때 썼던 초기의 실내악에 그의 개성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았다. 러시아 황제 지배하의 핀란드에서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듣는 기회가 거의 없고,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가 만들어야 했다. 초기의 실내악에서 시벨리우스의 실상을 엿볼 수는 없지만, 1890년대의 오케스트라 곡에 눈을 돌리면 거기에는 틀림없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룐로트에 의해서 핀 민족의 민족 전승 서사시 칼레발라가 편찬되어 핀란드에서는 민족 원점의 자각이나 독립에의 기운이 높아져 있었다. 이 칼레바라에 대한 시벨리우스의 격렬한 경도는 창작기에 걸쳐서 쓴 "클레르보"(1892년), "엔 시가(고담)"(1892~1893년), "포욜라의 딸"(1906년), "루온노타르"(1910년), "타피올라"(1926년) 까지의 일련의 교향시에 무엇보다도 스스로 연주의 배출구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칼레발라에 나오는 숲의 신 타피오가 사는 어슴푸레하고도 아름다운 영토를 의미하는 "타피올라"는 이들 교향시 중에서 가장 쓸쓸하고 가장 차가운 작품이라고 한다.1897년에 핀란드 국회로부터 200마르크의 연금이 증여되었다. 그것에 의해서 시벨리우스는 작곡에 주력을 기울일 수가 있고, 더욱더 창작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같은해 시벨리우스의 이름을 불멸하게 만든 교향시 "핀란디아"를 작곡했다. 그 곡은 러시아의 압박에 견디는 핀란드 국민의 애국 충정을 대변하기 위하여 작곡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가 35세인 1900년, 파리의 만국박람회의 회장에서 "필란디아"등의 자작자연을 행했다. 그것에 의해서 시벨리우스의 이름은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계속해서 교향곡 제1번을 만들고 1902년에는 교향곡 제2번 1903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 등의 우수한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교향곡은 젊은 시벨리우스가 민족적 선율을 받아들여, 자신이 넘치는 작품으로 되어있다.
교향곡 제3번 초연 무렵(1907년)부터 그는 목의 이상을 염려하기 시작했으나 다행이 악성은 아니었으며 1908년에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 종양에 의해서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고 조용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변화의 영감으로 이어져 그 형태를 이룬것이 교향곡 제4번이다. 교향곡 제5번은 50년 성탄 축하콘서트의 타이틀이 된 곡목이며, 전원적인 가락이 느긋한 곡의 취향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주의해서 들으며, 같은 전원적인 조라도 파퓰러한 교향곡 제2번보다도 훨씬 윤곽이 깊고, 배우의 심정이 상세하게 표정되어 있다. 교향곡 제6번은 친했던 칼페란 남작의 죽음의 슬픔이 무엇인가의 형태로 투영되어 있다고 전해지며 시벨리우스의 깊은 영혼의 목소리라고 한다.
1924년에 교향곡 제7번을 작곡하여 1926년 교향시 "타피올라"를 작곡한 후 65세부터 85세까지 장기간 그는 완전히 작곡을 앓고 있었다. 그 기간동안에는 교향곡 제8번(미완성)을 작곡해야겠다는 생각이 시벨리우스를 괴롭혀 마음에 안식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꽤 심각한 울병에 고통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65세 이후부터 완전히 작곡을 중단했던 것은 울병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핀란드 정부는 시벨리우스가 핀란드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고 하는 그 공적에 대해서 때때로 연금은 증액하여 50세부터 60세, 70세, 80세, 90세의 생일에 국민적인 존경과 사랑을 표시했다. 따라서 그가 1957년 9월 20일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생활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글: 하늘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