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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성종(成宗, 961년~997년)
고려 왕조의 기반을 완성한 명군.
고려의 제6대 국왕. 묘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강위장헌광효헌명양정문의대왕(康威章憲廣孝獻明襄定文懿大王). 휘는 치(治), 자는 온고(溫古). 왕건의 손자로, 왕이 되기 전부터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아 주변의 선망을 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대대로 즉위한 이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쳐 왕권을 다지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등 많은 숱한 업적을 세운 명군이 되었다. 이 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고려는 지방관조차 없는 허수아비 호족 연합 국가에 불과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성종이 12목을 설치한 것도 후일 조선의 지방관 체계와 비교하면 바둑의 포석이라고 봐주기도 애매할만큼 조잡한 것이었고 그만큼 성종 때 까지도 호족들의 힘이 강성했음을 의미한다.
2. 생애와 업적
태조와 제4비인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아들인 왕욱(성종 즉위 후 대종으로 추존)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 동생으로는 선왕인 경종의 아내가 된 헌애왕후와 헌정왕후가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할머니인 황보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이미 어릴적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했다고 한다.
경종이 말년에 정사에 뜻을 잃고 향락에 빠져있던 중 병으로 쓰러졌는데,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개령군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을 염려한 경종은 자신의 사촌 동생이자, 누이(문덕왕후)의 남편으로서 아들의 외삼촌이 되는 성종에게 선위를 하고 승하했다. 사실 성종에겐 후에 효덕 태자라고 불리게 되는 친형이 있었으니, 아마 광종의 사위라는 점이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재위 후 학자 출신의 최승로를 등용, 그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대대적인 개혁에 힘썼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최승로의 주장을 크게 4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하 우대, 불교 약화, 중앙 집권, 신분제 강화. 즉 개혁이라기보다는 고려에 문벌귀족이 등장하게 되는 단초를 열게 된 셈이다. 단적으로 여기서 노비환천법이 등장해서 광종이 평민으로 풀어준 사람들이 다시 노비로 돌아가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다만 이걸 잘못라고 볼 수 없는 것이 광종 사후 경종도 호족과 적당히 화합했다. 그리고 성종은 직계로 된 것이 아니라 경종이 자식이 없어 주위 세력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성종은 바보가 아니라, 노비 환속의 제약을 두었는데 특히 40세 전후에는 노비환천법이 통하지 않게 했다. 광종이 법을 시행한 것이 956년이고, 노비환천법이 987년 즉 30년 넘는 세월이 있다. 다만 노비가 너무 날뛰지 못하게 옛 주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놈은 그냥 노비로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조선 왕조에 말끔히 정리한 향, 소, 부곡민 체제는 여전히 공고했으며 조선 왕조에서 깨끗히 정리한 장원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라 매우 경솔했던 판단이었다. 참고로 노비안검법으로 향, 소, 부곡민 체제까지 깨지기 직전까지 갔는데 노비환천법을 도입하면서 역으로 향, 소, 부곡민 체제를 공고히하고 대토지제인 장원제도 도입을 했던 상황이라 매우 근시안적이었다.
성종은 또한 고려 시대 왕 중에서 상대적으로 숭유억불적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다. 물론 조선시대처럼 본격적인 국가 주도 숭유 억불은 아니다. 교과 과정에서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 정도로 이해한다.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해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고,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변형한 2성 6부제를 도입하는 한편 12목(牧)을 설치해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종묘, 원구단, 사직, 방택 등 유교식 건물, 제단도 설치해 고려에 유교적 제사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 때에 왕건의 훈요 10조를 깔끔히 씹고(...) 즉위하자마자 과감하게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시켜 버렸다. 훈요 10조에서는 불교를 숭상하라는 조항이 있었다. 일단 성종 개인이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전국적으로 치르는 거대한 종교 행사인 만큼 한번 지낼때마다 엄청난 국비가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 행사보다는 일단 고려의 기틀을 잡는 것을 더욱 우선시했던 것. 다만 팔관회와 연등회는 성종 이후에 금방 다시 부활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한편, 재위 도중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평양 이북을 넘겨줄 뻔 했으나, 명신 서희의 정확한 판단과 재치있는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희의 개인 활약이 컸다. 서희를 제외한 조정의 대세는 할지론(땅을 떼어주자는 것)과 항복론 뿐이었다. 이 때를 거란의 제1차 침입으로 치며, 자세한 것은 여요전쟁과 서희 항목 참고.
상기했듯 12목을 설치함으로써 고려의 지방관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고려 왕조 내내 지방관이 파견된 곳보다 아닌 곳이 많았던 만큼 조선 시대의 지방관 체계만큼 정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둑에서 포석 깔듯 12구역에 걸쳐 임시로 체계를 다진 것에 불과하다. 성종의 치세에도 여전히 호족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으로 이 지방관들의 권한도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비교하기 난처할 정도로 약했다.
조선 시대 지방관들은 해당 지역의 행정권, 사법권, 군령권을 모두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으나 고려의 지방관은 기껏 해야 외침이 있을 때 군령권 정도나 발휘하지 행정권이나 사법권은 여전히 지방 토호, 즉 호족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니 제대로 된 징세나 징병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후 고려가 전란을 겪으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징병이든 징세든 전국에 걸쳐 공정하게 골고루 시행하지 않고 되는 곳에서만 계속 뽑아먹은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지방 호족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지방관 제도의 기반이라도 다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성종은 이렇게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과로한 탓인지 아쉽게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승하하기 직전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사면을 내리자는 말에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그래 봤자 뭐하며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혜를 베풀 것이냐."며 거절하고 죽었다. 조선의 왕 성종과 사망한 나이가 같은데 우연치고는... 고려 초엔 정략 때문에 왕이 여러 부인을 맞아들였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성종은 조선의 성종에 비하면 여성 편력이 화려하지 않다.
아들은 없었고 딸만 있었다. 후에 성종의 딸들은 현종과 혼인했다. 성종의 제2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제1비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제3비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제2비 원화왕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선왕의 아들이자 성종의 조카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했다.
3. 평가
태조가 고려 왕조를 건국했고, 광종이 고려 왕조라는 나라 자체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했다면, 성종은 고려 왕조의 기반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성종 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고려 왕조 관료제의 기반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유교적인 사상과 정책을 바탕으로 한 체제 정비에 의해 중앙 집권 체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왕권이 향상되고 고려의 통치 체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초반 약했던 고려의 왕권이 광종 대에서 정점을 찍은 다음에 경종 대의 반동 정치를 거친 결과물이었다. 이 부분도 어떤 점에서는 세조 - 예종으로 이어지는 성종과 유사하다.
이로 인하여 신분 제도의 질서로 확립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면에서는 고려의 특징인 중앙 문벌 귀족 정치가 확립되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유교적 중앙 귀족의 의도가 강했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국가의 틀을 잡았다. 성종 정도 되는 인물은 이 시스템 속에서도 할 것 다했지만, 그렇지 못한 왕들은 귀족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여러모로 큰 업적을 남긴 왕.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동생들이 유교 사상에 위배되는 일을 저질러 처벌해야 했다. 여동생들 모두 선왕 경종의 아내였지만, 경종 사후에 둘 다 다른 남자들과 정을 통했기 때문. 헌애왕후의 경우는 그녀를 한동안 유폐시킴과 동시에 내연남인 김치양을 장형으로 다스린 뒤 유배보냈고, 헌정왕후의 경우는 사생아를 낳은 후 사망했기에 그녀와 사통한 왕건의 8번째 아들이자 자신의 숙부였던 왕욱을 유배보내는 걸로 그쳤다. 그래도 조카이기 때문인지 헌정왕후의 아들은 한동안 궁궐에서 성장했다.
세간에는 유교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여 불교를 탄압했다는 이미지도 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비록 백성들에게 유교적 사상을 권장하기는 하였으나 조선 시대 마냥 노골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는 것은 피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성종의 성향은 아버지와 태조의 제사를 지낼 때에 유교적인 제사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시켜 불공을 드리게 했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불교가 이미 수백년이 넘도록 백성들 사이에서 신봉되었기 때문이다. 유교 교리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에도 많은 백성들이 전통적인 불교와 민속 무교를 신봉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초기에는 조정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지 못했다.
위에서와 같이 조선 왕조에서는 평가가 가장 좋은 군주로 동국통감에선 고려 태조와 현종과 더불어 가장 최고 성군이 된다.
"성종(成宗)은 힘써 행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해서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적전(籍田)을 갈며, 학교를 설립하고 현재(賢才)를 권면하며, 절의를 숭상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휼하며, 모든 제도를 일신(一新)하였으니, 가히 수성(守成)의 좋은 임금이었습니다."
국역 동국통감 고려 공양왕기 내용으로 좋은 평가를 내리지만 고려 성종을 띄운다는게 노비환천법과 공신 우대책으로 이후 부곡민 문제와 음서 문제의 빌미를 주게된다. 알다시피 초기 공신은 과거제를 가장 반대하였고 관직을 후세에 물려주는 경향이 컸고 노비안검법은 부곡민 체제를 한바탕 흔들기 좋았으나 오히려 고려 성종기에는 이를 틀어막은 경향이 크기 때문에 결국 고려 말 부곡민 체제는 노비 안검의 영향을 받아 없어지고 양인이나 실질적으로 대접은 노비와 크게 다를게 없어 거주 이전을 금지 혹은 제한 당해 각종 역에 동원된 부곡민들을 양인의 계급으로 만들게 된다. 고려 문무 신료들 중에 유배지는 부곡으로 결국 이런 것을 만드는 빌미가 된 고려 시대에 존재한 일종의 특수한 장원인 장도 고려 성종이 만들었다.
즉 조선 왕조가 없애버린 것을 만든게 고려 성종으로 이 장은 공음에도 영향을 끼친다. 초기 광종기에 없던 장이 고려 성종기 생긴 것이다. 결국 부곡민도 없고 공음보다 더 개혁적인 과전을 거쳐 직전이 시행되어 장이 없어진 조선 성종과 비교는 매우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고려 성종의 공신 우대는 과거제 출신이 아닌 공신과 그 후손 출신으로 이는 음서에 빌미가 된다.
일찍이 성종의 측근 최승로는 과거제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남북의 용인(庸人·어리석은 사람)이 다투듯이 몰려왔다. 지혜와 재능을 따지지 않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그런 까닭에 ‘후생(後生)’은 앞을 다투며 관리가 되었으나, ‘구덕(舊德·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층)’은 점차 쇠락하였다." 고려사 기록으로 사실상 고려에 통할 그 시대에 크게 통할 왕일뿐이다. 고려 광종의 경우는 무과의 설치와 토지 제도의 개혁을 못하였으나 과거제와 노비안검법만 봐도 호족들의 반발이 너무나 극심해 대목왕후까지 막을 지경이었으나 가까스로 통과시킬 정도다.
사실상 시대에 최선을 다한 왕일 뿐 이후 고려를 망친 공음, 음서의 빌미가 된 왕이다. 과거제는 훼손되어 이후 이자겸의 전횡을 시작으로 무신정권 때는 추천으로 사람을 더 뽑고 과거제 출신 문신들은 어용화되어간다.
사실상 조선 왕조가 고려 광종을 안좋게 평가하고 고려 성종을 더 띄운다는게 공신 후손 우대와 같은 음서나 부곡민 체제와 장원 제도를 긍정하는 것과 똑같다.
더 앞뒤가 안맞는건 조선 왕조에선 성종과 관련해선 "유독 당(唐)나라 태종 때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상소 가운데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으면서, 능히 삼대(三代) 이상의 명주(明主)들은 열거하지 않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 "성종(成宗)의 정치가 성종으로만 그치게 하였으니, 어찌 깊이 애석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가?” 라고 동국통감에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성종의 역사가 성종으로 끝나고 중국의 당태종기 역사만 봤다고 비판해도 정작 성종의 평가가 저리도 평가가 좋다.
사실 성종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유독 당(唐)나라 태종 때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상소 가운데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으면서, 능히 삼대(三代) 이상의 명주(明主)들은 열거하지 않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 "성종(成宗)의 정치가 성종으로만 그치게 하였으니, 어찌 깊이 애석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가?” 라는게 맞다.
당 태종기만 보는게 아나라 이전 수 문제기 이전 한 고조기와 광무제와 이후 당 태종 이후 측천무후기와 당 현종기 송 태조기 등등도 봐야 중국의 제도가 이전에는 어떻고 이후에는 어떻고를 사상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봐야 정상이고 당나라 태종기만 본 것도 고려가 고대 당나라도 아니고 당나라는 멸망했고 송나라가 들어선 와중에 당나라 태종 때 있던 제도나 사상만 찾는 것도 사실 웃기다.
앞뒤가 같지 않으니 성종에 대한 평가는 "유독 당(唐)나라 태종 때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상소 가운데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으면서, 능히 삼대(三代) 이상의 명주(明主)들은 열거하지 않은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 "성종(成宗)의 정치가 성종으로만 그치게 하였으니, 어찌 깊이 애석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가?” 라고 하는게 옳다.
4. 조선 성종과의 유사점
여러모로 조선의 성종과 흡사한 면이 있다.
우선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으며, 위에 형을 둔 상태로 왕위에 올랐고, 사후에 받은 묘호도 같고,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공통점도 있으며, 심지어는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같다 (38세).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가리켜 신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덤으로, 사후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앙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했다고 하지만, 그 기반이 된 것이 다름 아닌 북송의 시스템이었다.
때문에 문치주의가 극도로 강해졌고, 거란의 1차 침입에 할지론이 넘쳐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중앙 집권의 과정은 동시에 중앙 귀족의 경쟁 상대였던 지방 호족들을 향리로 굳혀버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는데 이를 상징하는 것이 향직 개정이었다. 여기에 노비 환천법과 공신 자손 우대 등으로 중앙 귀족을 강화했으니 왕권이 약해지면 바로 귀족 정치가 열리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조선 성종과 다른 것은 소위 장이라는 막장 대토지제인 공음을 가속화시켰고, 부곡민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노비 환천법을 실행에 옮겼다는 거다. 참고로, 고려 성종은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등 공신인 신진 사대부들에게 족쇄나 채우던 제도를 숱하게 남겼다. 고로 비교는 절대 불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