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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누가복음 20:1-8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20:1-8 / [권위에 대한 질문 ; 마 21:23-27, 막 11:27-33]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복음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계시는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몰려와서 2) 무슨 권위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냈는지를 알아야겠다고 따졌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나도 한 가지 물어 보겠다. 4)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셨느냐? 아니면 단순히 그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활동하였느냐?' 5) 이 말씀을 듣고 그들 사이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만일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말을 꼬투리삼아 `그런데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따질 것이오. 6)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았다고 해보시오. 이번에는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오. 그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으니까 말이오.' 7) 그래서 결국 그들은 `우리는 모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도 너희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본문에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질문을 하지만 역으로 예수님이께서 질문으로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1-2)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셨을 때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이 무슨 권위로 백성을 가르치느냐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유대의 지도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조상 아론으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적 권위를 내세웠고, 서기관들은 랍비들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장로들은 사회적 문제들을 다룬 경험과 연륜을 내세웠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말씀 자체의 권위(눅 4:32),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눅 4:36), 죄를 사하시는 능력(눅 5:24)을 보이심으로써 그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것을 백성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질문에는 질문으로(3-4) 유대의 지도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역질문으로 대응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온 자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증언한 내용 또한 지극히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의 권위를 가지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알지 못하노라(5-8) 예수님의 질문이 유대의 지도자들을 딜레마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느냐고 백성으로부터 추궁을 받을 것이며, 만일 세례 요한의 권위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고 세례를 받은 백성으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의논한 후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적용: 유대의 지도자들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과 달리 당신은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입니까?
우리 인생은 험한 바다와 같습니다. 바람 하나 없이 잔잔한 평화로운 시기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도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불확실성 앞에 설 때마다 우리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룩한 꿈을 꾸고 믿음과 기도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출처]-국민일보
< 설 교 >
호크마 주석
=====20:1
하루는 - 이는 19:47의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그 '날마다' 중 어느 날 하루 일어났던 사건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처음 성전에서 가르치신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 이들은 유대의 종교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의 보전, 교수(teaching)및 종교 의식 집행, 성전 관리와 같은 모든 종교 문제와 관할권은 이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그곳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은 그들의 권위와 고유 권한을 침해한 행위로서 마땅히 그들로부터 이의를 제기받을 만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그들이 예수가 율법을 제정하신 입법자이자 성전의 실체인 메시야(히 9:11-28)이심을 바로 알았더라면 감히 그 같은 이의(異意)를 제기하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있던 이들 종교자들이 도리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대적하였으니 이는 그들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함께 멸망당하고 마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19:41-44;21:5-28).
=====20:2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두번째 질문은 그런 언행의 자격이 있다면 누가 그런 자격을 부여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 그 여부를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산헤드린에서 예수에게 공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공격하는 질문이다.
=====20:3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예수께서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하신다. 이는 '대답하기 이전에 나도 한 마디 묻겠다'(I'll ask a question before I answer, LB)는 뜻이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구절에서 한가지 조건을 덧붙이고 있다. 즉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어투를 볼 때 예수의 대응에서 만만치 않은 저항적 모습을 읽게 된다. 반면 누가는 조건적 제안이 아닌 단순한 질문만을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누가는 여기서 성전 숙정 작업 때 예수께서 의자를 뒤엎는 장면을 삭제한 것처럼 예수의 이미지에 거치른 면보다는 부드러운 면을 강조하려한 듯 하다.
=====20: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이 질문은 사실상 예수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처럼 대답 대신에 질문을 하신 의도는 단순히 그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2절)를 판단하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요한을 들어 질문한 것은 이미 세례 요한의 활동이 당시 민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고 이에 선지자로서 공인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자신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9:7에서 언급된 바처럼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을 보고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이해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요한의 활동을 긴밀하게 연관지어 이해했다. 따라서 예수는 세례 요한의 활동과 자신의 활동을 일치시켜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 권위를 되묻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 받았다는 자명한 여론을 갖고 있었기에 그 여론을 근거로 대적들의 판단에 맡기신 것이다. (2)대적들의 음흉한 계교를 역으로 공격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대적들이 예수께 권세의 출처를 물은 것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무자격성을 드러내어 배척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는 대답하기 힘든 본문과 같은 역질문을 통해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이 질문 속에는 주님의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비롯되었노라고 하는 강한 암시가 들어 있다.
=====20:5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 예수의 질문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은 뜻밖의 공격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이 구절은 산헤드린 대표들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의논하는 그들의 갈등을 묘사해주고 있다. 그들이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할 경우 자신들의 입장문제이다. 즉 세례 요한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온 권세인줄 알았다면 왜 자신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헤드린 대표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또 국가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불경건함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20:6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 그들은 자기들의 체면 때문에 요한의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그들의 고민은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은 민중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유대 지도자들이 민중들로부터 돌에 맞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민중들로부터 별로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침으로써 세례 요한이 백성들로부터 받았던 열렬한 지지를 동일하게 얻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와 산헤드린의 대표들은 여차할 경우에는 민중 봉기(民衆蜂起)의 위험가지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함부로 예수를 대할 수 없었고 요한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면 초가(四面楚架)의 위기를 느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은 유대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 살해 음모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20:7
알지 못하노라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서로 토론하여 얻어낸 결론은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의 권위를 하늘로부터 왔다고 인정해도 자신들의 불신앙이 문제가 되고 사람으로 부터 왔다고 해도 민중들의 분노가 문제가 되니 자신들의 현명치 못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끝내 예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악한 무리들이 참으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몰랐기 때문에 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면 그들은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있을 만한 자격이 없는 영적 무지자들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신 그들이 예수의 신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종교적 기존 권익을 고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탐욕자로 종교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사기꾼이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함으로써 예수와의 대결에서 완패를 시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20:8
나도...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세 복음서가 똑같이 이와 같은 대답을 전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경우 반문하기 전에 예수께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경우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대답못한 그들에게 예수께서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의 대표를 전면 무시하는 공격적 발언으로도 이해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말씀 속에는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더이상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의사 표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유의 말씀
눅 20장 8절 / 이수영목사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들려주신 비유말씀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잘 요약하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나라 건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이스라엘의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의 음모(눅19:47)를 예수님께서는 꿰뚫어보시며 당신께서 결국은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임을 또 다시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앞서서 대답하시기를 거부하셨던(눅20:8) 물음 즉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거기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시느냐는 질문(눅19:45-20:2)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말씀을 “백성에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9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포도원을 만든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복된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다고 했는데, 농부들은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지도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이루도록 사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결실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보낸 종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심을 통해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뜻과 부르심에 바른 신앙으로 응답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곤 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에게 포도원의 소출을 바쳐 보내지는 않고 오히려 몹시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따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주인은 다른 종들을 각각 두 번째, 세 번째 보냈다고 했습니다(11-12절). 이것은 당신의 백성에 대하여 인내하시며 거듭 그들의 회개와 바른 응답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농부들은 두 번째 종은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종은 그저 몹시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었는데 이번에는 능욕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 종의 경우는 그를 “상하게 하고 내쫓았다”고 합니다. 때리는 정도가 아주 심해졌고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방법이 더 거칠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이스라엘의 상태가 갈수록 더 악화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히1:1-2에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아들을 대한 농부들은 그를 존대하기는커녕 오히려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습니다(13-15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 나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을 가리키는 것임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삶을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 그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따라 바르게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법과 구원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변질시켜 만들어놓은 유대교적 전통을 따라 살기를 고집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비유말씀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결론적 문답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15-16절).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유대교신앙은 죽은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까지 말씀하시자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16절) 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 즉 이스라엘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적 지위가 사라지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새 이스라엘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시118:22의 말씀을 인용하여 되물으셨습니다: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17절) “성경에 이미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대로 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건축자들이란 하나님의 백성 나라를 세우도록 사명과 특권을 받았던 이스라엘과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그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버린 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시사하며 그의 죽음과 부활이 곧 새 이스라엘 곧 참된 하나님나라 백성의 초석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비유의 말씀을 마무리하시며 끝으로 당신께서는 하나님나라 실현의 주체가 되실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시는 마지막 심판의 주인도 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와 충돌하지 않으면 살 것이나 그를 알지 못하여 그와 맞서 부딪치거니 그를 걷어차거나 그에게 걸려 넘어지는 자들은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 강림하실 때 그를 부인하고 그를 모욕하며 그에게 대적하던 모든 자들과 이 세상의 온갖 세력, 종교, 사상, 이론, 주장, 문화, 풍조는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말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비유말씀은 우리를 위한 아주 분명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시고 참되신 구원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새 이스라엘 즉 참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게 하시는 초석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그를 믿고 영접하는 믿음 위에서 세워지는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으며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예비된 것은 멸망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의 교회를 욕되게 하며 그의 백성을 핍박하며 기독교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과 그 세력들, 이 세상의 온갖 반기독교적 사상이나, 이론, 주장, 문화, 풍조 따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에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공중에 흩어지고 말 헛된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세상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잃어버렸던 성경을 되찾고,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하며, 유대교적 오류에 빠져 실종되었던 복음의 진리를 회복하고, 희미해졌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분명하게 깨달음으로써 왜곡되었던 우리의 믿음을 바르게 세우려 한 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멀어졌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삶에서 우리의 삶을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사라졌던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고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온전히 돌리는 일입니다.
반기독교 세력들이 창궐하고 교회가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는 오늘날 우리는 먼저 우리의 신앙과 삶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개혁하고 쇄신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더욱 합치하게 만들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흔들림 없이 약속된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여러 가지로 심대한 위기에 처한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참된 행복과 번영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개혁하고 우리 교회를 개혁하며 우리 사회를 개혁하고 나라와 민족을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고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고난주간 - 화요일
눅 20장 1~8절 / 연제원목사
입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주님께서 저주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상징적인 메세지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성전에 들어가서 물건을 파는 자들과 돈을 바꾸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하시면서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왜 고난주간 첫날에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을까? 과연! 그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마지막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믿음의 환경 즉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여러분들 또한 믿음의 자리를 늘 청결하고 깨끗하게 하시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루는" 이라면서 시작을 합니다. 즉 이것은 새로운 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고난주간 둘째날은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말씀을 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신 날입니다. 또한 둘째날은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알고 있는 신앙적인 문제를 바로 일깨워주는 중요한 날입니다.
오늘 본문은 8절까지만 보았습니다만 그 뒤의 내용을 살펴보면
1) 예수님께서 유대지도자들과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실랑이를 벌이신 이후
2) 그리스도인들은 세금을 어떻게 바쳐야 하는지?(19-26절)
3)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과의 논쟁(27-40절)
4) 종말에 대한 경고(21장)
예수님은 둘째날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바르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분명하셨고 진지하셨는지 26절에 보시면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을 다시보면 대제사장 서기관들 장로들이 와서 어제 성전 안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예수님께 따지고 묻습니다.
‘당신이 도데체 누구길레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을 혼내시고 쫓아냈느냐? 어떤 권위로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후 예수님은 첫째날 성전에 들어오셔서 아무도 쉽게하지 못하던 장사치들을 다 내어 쫓았으니 바리새인 서기관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묻기를 ‘당신이 뭔데 이렇게 행하느냐?’고 물은것입니다.
그때 사악한 유대지도자들의 물음에 예수님은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토론하여 얻어낸 결론은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권위를 하늘로부터 왔다고 인정하면 자신들이 요한을 믿지 않기 때문에 불신앙이 문제가 되고 사람으로 부터 왔다고 대답을 해도 요한을 따르는 많은 백성들의 분노가 문제가 되니 자신들의 현명치 못한 부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고 당신도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생각에 그들에 말해줘도 그들은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주님앞에 복종치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이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엇던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9절이하에서 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해 유대지도자들의 사악함을 지적하시고 자신의 권위의 출처도 암시적으로 증거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오늘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만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주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늘 편협적인 생각과 내 중심적인 가치관 행동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이번 새벽특별집회를 통해 다시한번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선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늘 그곳에 집중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늘 주님의 권위속에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말씀이 우선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지는 않았읍니다만 둘째날 마지막 말씀이 종말에 관한 경고 말씀입니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가 싹을 피우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듯 종말도 징조를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종말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 어느 때에 주님이 오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고난주간 둘째날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모퉁이의 머릿돌
눅 20장 1~26절 / 허남길목사
◈ 서 론◈
성경에 복있는 사람은 돈이 많고, 배경이 있고, 지식있는 사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있다 하였다.
1. 복
1) 심령이 가난한자...(마5: 3-12)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 하였다.
이런 사람이 보는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니고, 마음의 눈으로 영적 사실을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자가 아니고는 영적 사실의 비밀들을 보고 발견하고 믿을수가 없다.
성경말씀에보면은 예수님은 영적 사실을 늘 말씀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육신적으로 자꾸 듣고 못 알아 듣는다. 때로는 제자들도 육신적으로 알아 들어 알아 듣는 것도 있고 어떤 말은 어렵다고 이해 못할 때도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자, 의에 주리고 예통하는자, 온유한자, 긍휼을 베푸는자, 이런 사람을 통해서 최고의 보화인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믿게 하는줄 믿는다.
당장 우리 삶속에서 사랑하면은 전부 다 예쁘게 보인다. 밥먹는 것도 이쁘게 보이고 잠자는 것도 이쁘게 보이고 걷는 것도 이쁘게 보이고 아이가 어릴 때 예쁘면 똥도 예쁘다. 사랑하니깐 이쁘게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밉게 보고 먹는 것도 밉게 보이고 책잡고 핍박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그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줄 모른다.
여러분은 사람을 대할 때에 자꾸 저사람의 잘못을 보지 말고 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까 하고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할 구석이 다 있다. 눈이 조그만 해도 그것이 굉장히 매력적이다. 몸이 튼튼하면 건강해보이는 것이 매력이다. 마른 사람도 날씬해 보이는 것이 매력이고 음식을 다 잘 먹는 사람은 다 맛이 있다.
그런데 제일 불쌍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자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잘못을 찾아볼까...하는 사람은 참 불쌍하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꾸 의심하는 사람도 불쌍한 사람이다. 부부간에도 제일 불쌍한 사람은 서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가난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믿고 살면 얼마나 복이있고 행복한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 복있는 사람은 배경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 하였다.
2) 구원,치유
구원얻고 치유 받은 사람의 공통적인 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 말씀을 믿을때 하나님이 이루시고 성취하셨다.
어떤 자매님이 작년에 성경공부하러 갔을때에 심장이 아팠었는데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모든 죄와 저주에서 해방을 받았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정말 함께 하시는 것을 아니깐 얼마나 기쁜지 그다음부터는 나았다는 것이다. 저번주 1년만에 중국 갔을 때 만나니 말씀을 듣는 중에 구원받은 후 심장이 나았다 하였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데 치유 하셨다.
저번에 어떤 사모님 아들 나은 이야기를 했는데 병이 의술적으로는 났지 않는데 어떤 집사님이 아들의 건강을 물어보셨는데 대답하시기를 너무너무 건강해 졌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팠는데 옛날 살던집이 조그만 오르막이였는데 그런데 아이가 그걸 못 올라가서 젎은 아이가 쉬면서 올라가야 되니깐 어른들 볼 때 부끄러우니깐 그것을 어떻게 대처했냐면은 운동화끈 맨다고 해서 구부려서 가다가 좀가다가 다시 그렇게 하고 해서 올라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꺼번에 올라갔었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언제 치유되었냐 하면은 교회에서 성찬식을 하는데 그 성찬을 거행하면서 정말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내가 믿음으로 내 병이 이미 치유되었고, 내가 사단에게 속고 있구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구나를 믿는 순간 내 병이 나은거구나라는 믿음으로 치유되었다.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은 때로는 숨이 가쁘고 병원에서는 병명도 없었다. 그분은 중국의 심장병 나은 소녀 이야기를 들으시고 저 상황이 나랑 같구나 그럼 내가 진짜 예수님을 영접해야겠다는 순간에 마음이 평안하고 건강해지고 병이 나았다 하였다.
우리가 가난한 심령, 애통하는 심령, 낮아지는 심령이어야만 예수님을 주로 그리스도로 믿게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병 낫는다는 말도 맞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그런 말은 아니고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영적 중요한 근본 변화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말씀 드리는고 하니 그 영적 변화가 일어난 결과다 라는 말이다. 막16:17-18, 믿는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이게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 분을 믿을 때에 이런일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어떤 자에게 나사렛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어지고 그 능력과 권세와 풍성이 믿어진다.
3) 하나님, 사람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그리스도, 메시야 이시다. 그는 죄가 없으신줄 믿으시길 바란다.
어린아이 같이 순박한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죄에 의한 죽음이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 인류에게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 모든 인류가 죽음과 사망에서 이길수 없는데 사망을 이기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롬8:2) 우리는 사망에서 해방받았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너를 해방하였음니라... 그 분이 그리스도 이시다. 나사렛 예수 목수하던 분이신데 그리스도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표적과 기사와 하시는 일을 보고 아..이 분이 그리스도구나 하고 믿어야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1-2절
성전을 청결케 하는 권세가 당신은 무엇이냐... 병을 낫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성경을 가르치는 권세가 무엇이냐... 이게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다. 행3장에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니 왜 일으켰느냐 자꾸 물어본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면 선한 일인데 그 사람이 구원 받는 일은 좋은 일인데 종교적 지도자들 정치자들은 그것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인기가 떨어져서 싫어하며 그렇게 물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복없고 불쌍한 자인가하면은 진리를 믿어야 되는데 이 진리를 정치적으로 보는 것이다.
2. 진리
1)정치적 - 진리를 정치적으로 보았다.
2)이익- 자신의 이익의 대상으로 본다.
3)시험- 시험 할려고 본다.
◑이런 사람은 복이 없고 불쌍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표적을 베푸시고 증거를 하시고 하면은 그것을 보고 아...이분이 메시야구나 이렇게 가난한 심령으로 믿어야 하는데 자꾸만 인기가 떨어지고 자기 이익이 없어지니깐 누구 권세로 일으켰느냐.. 제사장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고 아버지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 전하면은 회개 해야 된다. 아..그렇구나..우리가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성전을 우리가 이익으로 삼았구나 회개하고 통회하고 정말 저분은 메시야 구나 해야하는데 누가 이런 권세를 줬느냐 했다. 저와 여러분이 누군가 잘못을 말할 때 감사함으로 받으들이면 되는데 니보고 누가 이러라고 했는냐.. 그러는 이유가 교만해서 나오는 것이다.
** 3-7절
(3∼4절)- 만약 하나님께로서 왔다면 문제가 있다. 왜냐면은 세례요한이 누구를 증거했는고 하니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증거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례요한이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은 예수를 믿어야 된다. 사람에게서 왔다면은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라도 보니깐 그래서 사람에게서 났다고 말을 못하니깐 대답이 모르겠다 였다. 정치인들의 대답이다. 불리하면은 모르겠다고 한다. 우리들도 이런 경우가 많다. 바로 정치인이 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나도 이러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모르겠다가 아니고 나도 이렇지 않겠다. 왜냐면은 너희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주로 믿을려고 하는 중심이 없다 진주를 돼지에게 건지지 말라...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사람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복음을 홰손하는 사람에게는 전할 필요가 없다.
복음은 가장 귀한 보화인줄 믿는다. 받아 들릴 사람에게 전해야지 행13:48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했다. 저와 여러분은 생각할 때 참 못됐지 않은가. 교만하고 불신앙 하고.은헤받았는데도 넘어지고 또 불신앙 하고... 그런데 주님께서 보실때는 가난한 심령이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잘 봐주시는지.. 우리는 막 미워할 때가 많은데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자로 , 화평케 하는 자, 의에 주리고 애통하는 자로, 의의를 위해서 핍박 받기를 좋아하는 자로, 우리를 복된자로 부르신줄 믿는다. 하나님의 평가와 우리의 평가는 다르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우리를 못나고 가치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줄 믿는다. 죄가 사랑이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믿을 생각을 안한다. 자꾸 시기하고 죽일려고 한다.
** 9-12절
포도원을 비유로 하시며 얘기하셨는데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며 포도원주인은 하나님, 농부는 바리새인, 사두개인이며 종은 선지자이다.
** 13절
오히려 그 상족자를 죽이자고 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 16절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는데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니깐 하나님께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서 전파되게 하셨다. 받아 들이지 않으니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전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교회를 택하시고 또 전하실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를하나님이 세우셔서 땅끝까지 복음전하라고 하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땅끝까지 안가고 유대인에게만 하니깐 안디옥 교회를 세우셨다. 그래서 전세례에 복음 전하게 하셨다. 교회의 진정한 목적은 복음을 분명히 알고 믿으며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신걸 신앙고백이 되어져야할 것이다. 교회에서는 복음전할 일꾼를 양육해야할 것이다. 이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도록 전하는 일에 드려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는 경제를 위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언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는데 있는줄 믿는다.
** 17절
유대인들이 버린 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셔서 전세계 구원얻게 하시는줄 믿는다. 예수그리스도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줄 믿는다.
예수님 아니면 구원 받을 사람 한명도 없다.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고 생명이구나..
심야 기도때 일어나 빛을 발하라라(사60:1-3)는 말씀을 하였다. 빛이 없는곳에는 어둠이 들어와 있고 저주가 임하고 흑암의 권세가 있다.
이 어둠에는 한가지 빛만 필요하다. 요1장 예수님은 빛이라 하였다. 복음이 증거되는 가정마다 생명의 역사가 있고 가정에도 기쁨이 있고 치유가 일어나고 하나님 함께 하는 행복이 있고 빛이 비치는 나라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줄 믿는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전세계 복음 전파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18절
초림 예수.. 돌이 떨어지면 다 부숴지리라.. 주님이 오시면 재림주, 심판주로 오실줄 믿는다. 그 앞에서는 왕도, 회장, 장군도 아무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심판대 위에 서게될줄 믿는다.
** 22-26절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땅에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권세를 세워서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고하게 하고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서 세금을 받치도록 한 것이다. 백성이 그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시편 118:23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사람들 눈에 기이하다. 메시야란 말이다. 인간 최고의 발견이 정말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 보내신 메시야 구나를 발견하는 눈이며 이것은 복된 눈이다. 롬10:15에서는 복음이 증거되는 그 발이 아름답도다 하였다. 인간의 궁국적인 목적은 구원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죄와 저주에서 해방받는 것이 최고의 복인줄 믿는다.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데 예수님을 발견하는 눈은 가난한 심령이어야 한다. 정말로 의의에 대해서 애통하는 자여야 한다. 사랑하고 긍율을 베푸는 자여야 발견되는 눈이다. 때로는 내가 핍박받는다 할지라도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의의를 위하여 핍박받기를 원하는 자여야 한다. 우리가 조그만한 이익 때문에 부패되고 조그만한 명예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거짓을 한다면 그리스도는 발견되고 믿어지지 않는다.
사두개인, 바리새인은 권력과 권세와 이익과 시험을 하는 눈으로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얘기를 하고 같이 있지만은 그를 예수님을 주라고 볼수 없었다.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아..정말 진리구나 성경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정말 복된 길이구나 구원 얻는 길이구나 생명의 길이구나 이땅을 승리하는 길이구나 알수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이런 복된 자가 되시길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읽고 들을때나 사람을 대할 때 자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시기하는 마음과 눈으로 보지 말고 비판하는 눈으로 보지 말고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마음으로 듣고 읽어야 복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줄 믿는다.
우리가 성도를 볼때도 저사람을 어떻게 사랑할까 보고 불신자를 볼때도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주의 사랑을 알릴까..라고 바라보아야지 저 사람은 저주 받았구나.. 이렇게 보면 안된다.
사단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꾸 다른 눈을 갖게 만든다. 높아지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든다.
사두개인, 바리새인처럼 눈이 높고 시험드는자 되지 마시고 예수님을 정말 발견하며 복음을 위해 일평생 살 수밖에 없는 자가 되는줄 믿는다.
사람이 바른 마음과 관점과 생각을 가진 게 얼마나 복이 되는 일인줄 믿는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의 복임을 믿는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눅 20:1-18 / 안양준목사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3일 전 화요일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하고 묻는데 이 질문의 배경은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과 또한 1절에 있는 것처럼 성전 안에서 백성들을 가르친 까닭입니다.
원래 구약 율법에는 성전을 정화하는 것은 선지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성전 안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도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유대교의 랍비들은 성전 안에서 백성을 가르치지 못하고 성전 밖에 있는 마을의 회당에서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시고 또한 성전 안에서 가르치셨다고 하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선지자나 제사장처럼 행하는 것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예수님의 권세의 출처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 속에는 또 하나의 의도 즉 예수님의 신적인 권세를 어떻게든 부인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막 3:22을 보면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저가 바알세블을 지폈다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하면서 예수님의 권세를 하늘로서 온 참된 권세로 인정하지 않고 사탄의 것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도 그 죄명은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끝까지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출처를 묻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도 자신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그들을 향해서 자신의 권세의 출처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시 백성들로부터 의로운 선지자라 추앙을 받던 세례 요한의 세례의 기원에 대해 반문함으로써 사실 간접적인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4절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으로서냐”라는 질문 속에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면 요한이 증거하던 예수님의 권세도 하늘로서 온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대답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 1:19-28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바로 메시야라고 선언했고 자신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존재 임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입니다. 또 막 1:7-11에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반문에 예수의 권세의 출처에 대한 질문을 던지므로써 예수님을 옭아 보려 했던 유대 지도자들이 도리어 묶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세례를 하늘로부터 온 권위로 인정하면 그를 믿지 않은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날 것이고 그렇다고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면 당시 모든 사람들이 선지자로 믿고 있으니 자신들이 돌에 맞을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반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그들의 질문을 잘라 버립니다. 이것이 진리를 부인하는 정직하지 못한 자들에게 최상의 대답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부정직해서 복음의 진리를 알면서도 애써 거부하고 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순수하지 못한 그들의 심령의 상태를 예수님은 ‘포도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속에는 자신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풍자합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소작인 농부는 유대인, 주인의 종은 여러 선지자들,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을 과거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였던 선조 유대인들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내용은 읽은 대로 한 포도원을 가진 사람이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오랜 시간이 지나 포도 열매가 열릴 때에 종들을 시켜서 열매의 얼마를 세로 바치게 명하였습니다.
10절에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때가 이르매 얼마를 원하는 것이 주인의 심정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극상품의 포도를 심은 것이 좋은 포도열매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그토록 많은 은혜를 베푸신 것도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이 ‘때가 이르매’ 즉 완전히 성장한 후에 포도열매를 구하듯이 당신의 백성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을 때 열매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를 다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악한 농부들은 어떻게 합니까? 심부름을 온 종들을 오는 대로 때리고 내어 쫓습니다. 그런데도 사람 좋은 포도원 주인은 생각하기를 ‘그래도 내 아들이 가면 내 얼굴을 봐서라도 공경할게다’하고 아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을 우리가 상속받을 수 있을 거라며 아들을 쫓아내고 죽여’버립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주인은 결국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린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들이 그 은혜를 져버리고 선지자를 학대하면서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는 죄악까지 저지르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패역한 유대인들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며, 하나님의 축복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질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짧게 세 가지만 생각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 주인의 탄식을 볼 수가 있습니다.
13절에 ‘어찌할꼬’하는 주인의 탄식은 자신의 소유인 포도원의 소출을 얻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탄식은 바로 자신의 밑에 두었던 소작인들의 배신에 있는 것입니다. 물질의 손해에 대해 섭섭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잃은데 대해 슬퍼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도 선악과 몇 개를 잃은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천국에서 잔치를 열고 기뻐한다”고 하신 말씀은 반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을 떠나갈 때 하나님이 입으시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져버리고 믿음에서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만큼은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시는 포도원 주인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끝까지 상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의 포도원 주인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주인이 계속해서 종들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는 과정에서도 농부들에 대해 화를 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끝없이 배반하는 농부들에게 그래도 남아있을 마지막 양심에 기대를 거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하나님을 출 34:6에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구약 사건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의 부패를 외쳤던 미가 선지자는 감옥에 갇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 달갑지 않은 예언을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결국 톱으로 몸이 잘려 죽었으며 예언자 아모스는 대제사장의 판결에 의해서 예루살렘에서 쫓겨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셋째, 마지막 날에 죄인에게 임할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기회를 주시며 사랑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농부들은 그 아들까지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하고 포도원 밖으로 내어 쫓아 죽였습니다. 15절에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하는 질문을 더집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이 “주인이 직접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 24:45-47의 말씀을 보면 선한 청지기에게는 칭찬과 함께 다른 큰 일을 맡기며 또한 상급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악한 청지기에게는 저주와 직무의 박탈이 주어집니다.
권위를 인정받는 길
눅 20장 1-8절 / 이한규목사
< 약속한 것보다 더 지키라 >
복된 인물이 되려면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성실한 땀으로 사람들의 인정도 받아야 한다. 특히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기본이다. 말씀과 약속을 지키면 권위도 지켜지고 말씀과 약속을 깨면 권위도 깨진다. 약속한 것보다 더 지키면 팔로워는 더 신뢰받고 리더는 권위를 더 인정받는다. 반면에 약속한 것보다 덜 지키면 팔로워는 덜 신뢰받고 리더는 권위를 덜 인정받는다. 복된 인물이 되려면 약속은 신중히 하되 늘 약속보다 더 지키려고 하라.
7시에 약속했는데 6시 50분에 오는 사람은 약속보다 더 지키는 사람이고 7시 10분에 오는 사람은 약속보다 덜 지키는 사람이다. 부모님께 한 달에 한번 찾아뵙겠다고 소박하게 약속했다가 한 달에 한 번 이상 찾아뵈는 사람은 약속보다 더 지키는 사람으로서 신뢰를 더 받지만 부모님께 한 달에 두 번 이상 찾아뵙겠다고 화려하게 약속했다가 한 달에 한 번 이하로 찾아뵙는 사람은 약속보다 덜 지키는 사람으로서 신뢰를 덜 받는다.
약속보다 더 지키면 신뢰를 얻고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어디서든지 우선순위 계승자가 된다. 충성하겠다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약속보다 더 지키려는 것이 충성이다. 리더는 소중한 동역자나 자기 유업을 계승시킬 제자로서 약속보다 더 지키는 사람을 간절히 찾는다. 어디에 가든지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약속보다 조금 더 지키라. 특히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한 약속은 더욱 힘써 지키라. 그러면 권위가 저절로 생기고 점차 생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축복과 보상이 주어진다.
< 권위를 인정받는 길 >
공동체가 복되게 되려면 그 공동체에 권위가 바르게 세워져 있어야 한다. 참된 권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 나타난다. 그처럼 권위를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 안에 있으라
어느 날 유대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지 그리고 권위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라고 했다(1-2절).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나 에세네파의 어떤 교파에도 속하지 않고 공인된 직함이 없는 하찮은 존재였기에 권위의 원천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교단이나 교파나 체제나 제도가 없어져야 할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속해야 할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때문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승리라고 하면 삶 자체가 하나님의 지켜주시는 은혜로 인한 승리의 표식이다.
식물학자들은 사과나무에서 한알의 사과 열매를 맺는 데 50개의 잎사귀만 있어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한 사과나무에 10만 개 이상의 잎사귀가 달려 있게 하셨는가? 병균과 벌레로 상할 것, 비바람으로 떨어질 것, 가뭄으로 말라 죽을 것등을 고려해서 풍성한 잎을 예비하신 것이다. 결국 한 알의 사과조차 무수한 시련을 거쳐 살아남은 은혜의 표식이다. 나의 현재의 삶 자체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녹아든 표식임을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말라.
사람들은 위기에 닥치면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이 시련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면 더 이상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그런 진실한 회개의 눈물을 앞세우면 하나님이 위기를 벗어나게 하신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어느 정도 살만 하고 편안한 삶이 계속되면 위기 때 하나님 앞에서 했던 선한 결심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것이 진짜 인생의 위기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한 감격이 날마다 내 삶에 넘치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넘치게 되면서 영적인 권위도 잃지 않을 것이다.
2. 상황에 잘 대처하라
교권주의자들의 권위의 원천에 대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도 공격 빌미가 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침착하게 역으로 그들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셨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4절).” 그 질문에 그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로 의논하며 말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5-6절).” 그러면서 그들은 심히 당황해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곤란한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가? 배움도 필요하고 침착함도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순간적인 짤막한 기도다. “하나님! 지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려주소서. 혹시 잘 대처하지 못해도 문제가 커지지 않게 도와주시고 지켜주소서.” 살다 보면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순간들이 무수히 생긴다. 그때마다 간절히 기도하면 불안을 이기는 힘과 침착한 행동이 생기면서 신기하게 피할 길도 열린다.
왜 체험이 중요한가? 체험을 훈장처럼 달고 자랑하는 소재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험을 삶의 지혜로 승화시키면 상황 대처 능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왜 운전 보험을 들 때 25세 이하는 보험료를 많이 내는데 40세 이상은 보험료를 적게 내는가? 운전 능력과 순발력은 25세 이하 청년이 40세 이상의 중년보다 더 탁월해서 사고가 적게 생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젊은이들의 운전 미숙으로 인한 사고 확률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력 이상으로 경험이 중요하다는 암시다.
일을 이루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상황 대처 능력은 더 중요하다. 성공할 때 잘 대처하면 또 다른 성공을 낳을 수 있고 실패할 때 잘 대처하면 또 다른 실패를 막을 수 있다. 특히 실패의 순간에 잘 대처하라. 과거의 실패와 패배와 고난의 경험을 잘 승화시키면 미래의 큰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실패의 경험도 소중히 여기고 그 실패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내서 위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점차 권위를 인정받는다.
3. 겸손하게 나를 낮추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느냐는 예수님의 역 질문에 교권주의자들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요한의 세례를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불신앙 문제가 생기고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무리들이 분노할 것이기에 차라리 자신들의 무지를 나타내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8절).”
상대가 나의 말을 받아들일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자세한 설명으로 기필코 설득하겠다고 나서지 말라. 특히 상대가 곤란한 질문으로 나를 논쟁에 끌어들이면 지혜롭게 말 수를 줄이거나 화제를 돌리라. 더 나아가 상대가 심하게 공격적으로 말하면 대화를 끊고 침묵하라. 그리고 잘 모르는 질문을 받을 때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라.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지식에서 권위가 생기지만 서투른 지식을 자랑하거나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하면 오히려 권위가 떨어진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내가 몸담은 분야에서 끊임없이 배워 더 많은 지식을 쌓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때 권위가 높아진다. 즉 많이 아는 척 하지 않으면서 많이 아는 것이 권위를 인정받는 길이다.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권위가 높아지기에 하나님은 권위 인정 과정을 두어 성도를 훈련하고 지혜로운 리더도 그 훈련 과정을 통해 사람을 일꾼으로 세운다.
어디서든지 참된 권위가 살아있어야 축복과 평화도 넘치게 된다. 특히 평범한 교인으로 지낼 사람이 아닌 교회 중직 역할을 할 사람에게는 그런 권위 인정 과정의 시험이 꼭 필요하다. 리더에게 순종할 때 권위를 인정받고 자신도 순종하는 팔로워를 얻는다. 권위를 존중하는 삶은 윗사람을 높여주는 것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위치와 자리를 힘써 존중해 주는 것도 권위를 존중하는 삶이다.
< 권위 인정 과정에 합격하라 >
어느 날 한 사람이 경기장에 갔다. 그는 그곳에 갈 때마다 자신이 즐겨 앉는 좌석으로 가는데 그날따라 안내자가 다른 길로 안내했다. 안내자의 지시대로 자신이 즐겨 앉는 좌석으로 가려면 경기장을 한 바퀴 죽 돌아야 했다. 그때 슬쩍 안내자의 눈을 피해 그 자리로 가려는데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얘야, 나는 네가 성도의 명예를 지키길 원한다. 너의 명예로운 태도가 나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다.”
그때 그는 슬쩍 자기가 즐겨 앉는 자리로 가려는 마음을 접고 안내자의 지시를 따라 경기장 한 바퀴를 죽 돌아 그 자리로 갔다. 그때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려는 마음과 함께 안내자를 존중하려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자가 윗사람은 아니지만 안내자의 인도를 따라야 할 때는 그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의 인도를 따르라. 그렇게 남의 권위를 존중할 때 나도 존중받고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 주시며 평안과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권위를 존중하는 시험에 합격하면 인생 승진의 역사가 있지만 편법을 즐겨하면서 쉬운 길만 찾으면 점차 축복의 길이 좁아진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는 훈련이 체질화된 겸손으로 권위 인정 과정에 합격하라. 모든 것이 잘 풀릴 때는 나를 한 번 더 낮추려는 결단을 새롭게 하라. 리더가 잘해 줄 때 책임을 권리로 여기는 본능을 잘 극복하고 변함없이 권리를 책임으로 여기는 섬김의 자세를 가짐으로 점차 권위를 인정받는 자리로 올라서라.
무슨 권위로?
눅 20:1~8 / 조정의
오늘부터 우리는 누가복음 20장에 기록된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간의 논쟁을 살펴보려 합니다. 총 3번의 논쟁 가운데 오늘은 그 첫번째 논쟁인 예수님의 권위 논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마음 속 오만하고 무지한 생각을 살펴보고 그것을 거울 삼아 우리 마음을 비춰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 속에 담겨있는 그분의 놀라운 신적 권위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1. 질문(1-2)
1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말하여 이르되
예수님이 질문을 받은 날짜는 화요일입니다. 누가는 “하루”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19장 47절에 기록한대로 예수님은 일요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나서부터 잡히시는 날인 목요일까지 낮에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눅 21:37).
월요일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내쫓으시고 날이 저물어 성 밖으로 나가 감람원으로 가서 제자들과 쉬신 후(21:37) 다음날인 화요일 아침 다시 성전에 들어와(막 11:20) 가르치고 계실 때 이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참고로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이 날을 “거룩한 화요일”(Holy Tuesday)이라 부르며 기념합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받은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사가 드려진 성전 안 뜰이 아니라 성전 밖에 있는 뜰, 광장(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대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이 며칠 앞에 있었기 때문에 전국 그리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었을 것이고, 광장에서 몇몇 랍비가 군중을 대상으로 가르치면 그 가르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누가의 기록대로 “백성이 다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눅 19:48).
논쟁이 있던 화요일 낮에도 예수님은 가르치시며(디다스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후앙겔리조). 하나님의 도를(눅 20:21)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눅 19:10).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제자들에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눅 4:43). 이것이 잡히시던 날까지 예수님이 하셨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온 대상은 바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복수). 각각 하는 일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유대교의 특권 계급에 속한 자들입니다. 유대인의 최고 회의 기관, 통치 단체인 산헤드린의 구성원입니다(대제사장+70명). 오늘날 국회의원, 대법원장과 같은 사람들이지요.
당시 정복 국가인 로마는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이 산헤드린에게 통치권을 양도했습니다. 예를 들면 산헤드린은 성전 안 뜰로 들어온 이방인에게 즉각적 처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오스본, 721). 종교적인 이유로 사람을 처형할 수 있는 권리까지 이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장로 중 의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을 나시라고 불렀는데, 그는 율법을 제정하고 공식적인 유대교 의식 일정을 정하며,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성전을 관리합니다. 대제사장과 협조하여 중요한 재판을 위한 위원회에서 논의할 의제를 정하는 사람입니다. 이 당시 “나시”는 다소 사람 사울의 스승이었던 유명하고 존경받는 가말리엘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자기들 권위로 관리되는 성전에 들어와 아무것도 아닌 30세 랍비가 성전을 이렇게 사용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면서 자기들이 허가하여 장사하는 사람을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칩니다.
‘도대체 니가 뭔데,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하느냐?’ 이렇게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권리로 그들이 통치하고 있는 유대교를 위협하는 이 예수를 처형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환호합니다.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예수님을 잡아다 심문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눅 19:47-8). 그래서 이들이 모여 만든 한 가지 꾀를 가지고 드디어 예수님 가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회심의 일격을 가합니다. 2절에 나오는 이 질문으로 말입니다.
2…“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 너에게 무슨 권위가 있느냐?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행할 권위를 주었느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은 그냥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꾀를 내어 이 질문을 던진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전의 최고 권위자인데 너는 허가받지도 않은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런 비난과 책망의 태도가 묻어있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의도가 다분한 질문입니다. 그들은 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누구라고 하는지, 누구의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쫓아낼 때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성전에서 가르치고 행하셨다는 것을 이들이 모를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그 말을 직접 듣기 원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주머니 속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①예수님이 만일 “나에게 권위를 준 분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으로서 이렇게 할 권위가 있다”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붙잡아 심문하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인 주제에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기 때문이죠.
②하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나는 뛰어난 선생으로 내 권위는 나를 따르는 많은 사람에게서 온다”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그들에게 크게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는 왜 하나님이 세우신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이렇게 독단적으로 행하느냐?”고 책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권위가 사람에게 났다면 너는 이렇게 행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그만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시든 그들은 예수님을 무너뜨릴 완벽한 계획을 짜고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가 누구인지잘 몰랐습니다. 그들이 상대했던 분은 이미 12살에 성전에서 가르치던 많은 선생을 놀라게 했던 충만한 지혜의 소유자였습니다(눅 2:46-7).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은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2. 반문(3-4)
3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예수님의 화법이 직설적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말하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했는데, 정확히 그 반대로 예수님은 “내게 말하라”고 반격을 가하셨습니다.
너희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하는 질문에 먼저 답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논쟁이었다면, 저쪽에서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라고 따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교묘하게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질문에 답하진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우리를 참으로 놀라게 합니다. 그분의 반문에는 그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있고 그 답을 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반문을 살펴봅시다.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권위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예수님은 뜬금없이 세례 요한의 이름을 언급하셨습니다. 요한이 하늘 곧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례를 베푼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이 그를 좇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한 것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이 이 논쟁을 하실 때 세례 요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선지자와 같이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외치는 소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부르짖고 그들이 요단 강으로 나오면 회개의 의미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백하고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막 1:5). 요한은 당시 헤롯의 죄를 직접적으로 책망하면서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의 꾀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 사람이니 요한은 진정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웅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은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권위를 받은 선지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기적을 베푸실 때 그 소문이 헤롯왕에게 들렸고 헤롯은 “내가 죽인 세례 요한의 능력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막 6:14). 세례 요한과 예수님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사람으로, 그 권위를 하늘에서 받은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권위로 침례를 준 요한은 자기 뒤에 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했습니다(요 1:34).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는 분은 성령과 불로 줄 것이라 말했습니다(눅 4:16).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을 때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권세를 분명히 확증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
그러므로 예수님이 요한이 하늘의 권세를 받아 침례를 준 선지자라면, 그가 그리스도라 일컫고 그 신발끈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했던 분이라면,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라 말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일 요한이 단지 사람이 세운 선생 중 하나였다면, 그 권위 가 사람에게서 왔다면, 예수님의 권위도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중요한건 수많은 백성이 대부분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왔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요한을 인정하면 나를 인정해야 하고, 요한을 부정하면 그가 하늘에서 왔다고 믿고 따르는 수많은 백성과 맞서야 할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이제 대답은 종교지도자들 쪽에서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타임아웃입니다.
3. 대답(5-8)
5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만일 사람으로부터라’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것이라” 하고
5-6절은 종교지도자들이 타임아웃 시간에 나눈 말입니다. 예수님의 반문을 듣고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두 가지 대답을 자기들이 선택해서 말해야 하는 상황인데, 둘 다 선뜻 고를 수가 없습니다.
① 만일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라고 말하면, ‘너희는 왜 그를 믿지 않냐?”는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이 침례를 베풀 때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한 앞에 나아갔다가 “독사의 자식”이란 책망을 들었습니다(마 3:7).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꾸짖음을 받았으나 그들은 요한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요한의 권위가 하늘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말한다면, 왜 그의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았냐고 예수님께 책망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권세가 하늘로부터라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소개한 나의 권세는 어디로부터 났겠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 입에서 듣고 싶었던 대답을 그들 입으로 해야 합니다. “당신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왔겠군요”라고요. 그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을 것입니다.
② 그러면 반대로 요한의 권위가 “사람에게서 났다”고 말하면 온 백성이 요한을 하늘에서 권위를 준 선지자로 알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돌에 맞을까 염려합니다. 참된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로 여기는 것에 대한 형벌로 백성이 그들을 돌로 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정도로 백성들이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요한이 인정하고 소개한 그리스도의 권위 역시 함께 인정하고 기대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꺾였을 때 민심이 완전히 거꾸로 돌아섰지만, 지금까지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로 그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국가의 유공자들이나 위대한 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을 멸시하는 발언을 하면 사람들의 뭇매를 맞습니다(댓글). 이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멸시하면 댓글이 아니라 진짜 돌로 맞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심각한 논의 끝에 그들이 낸 결정은 7절입니다.
7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유대교 최고 특권 계급, 학자 중의 학자들이 고심하여 낸 대답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그들의 무지함 그리고 완고함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세례 요한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권위는 죽어도 인정 못하겠고, 사람들이 두려워 그들이 진짜 생각하는 대로 두 사람이 그저 사람의 권세를 받아 일하는 존재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무지한 대답에 예수님이 이렇게 응수하셨습니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하시니라
예수님이 한 질문에 그들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그들이 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르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잘 모르겠다고 하니 나도 너희에게 알려줄 의무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문 속에서 우리는 그분 대답을 확실히 들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 메시아를 증언했던 선지자였고,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가르치고 행하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논쟁을 마치시고 곧 이어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속에서 더 분명하게 지금 그들이 누구를 거절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책망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주에 살펴볼 “포도원 농부 비유”입니다(눅 20:9-18).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의 권위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온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단지 유대땅에 태어나 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물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거나,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나 둘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겉으로 속일 수 있어도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 둘 중 하나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예수님은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친구, 가족, 자녀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천지 만물이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여러분 안에 살아있는 양심은 누가 그 속에 집어 넣은 것입니까? 수천년 동안 기록된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낸 소설입니까?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 속에 살아 있는 능력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모든 증거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완고하고 무지한 마음을 겸손히 내려놓고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분들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정말 하나님이십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십니까?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분을 따르고 섬기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 성경이 여러분에게 말할 때, “무슨 권위로 내게 요구하는가?” 질문하지 마십시오. 주님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권위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십시오. 용서하라고 하면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고, 주님을 믿고 신뢰하라고 하면 믿고 신뢰하고, 선하고 덕이 되는 말을 하라고 하면 그렇게 말하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 도둑질 하지 말고, 모이기에 힘쓰라 하면 모여서 서로 돌아보는 일에 힘쓰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면 자라기 위해 노력하고. 온갖 더러운 것은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하면 거룩을 추구하고…
“내 삶의 권위는 내게 있는데 당신이 무슨 권위로?”라는 질문을 던지지 마십시오. 피조물인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하겠습니까? 그것도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랑의 하나님께 우리는 감히 대들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피조물이 아닙니까? 그분의 보혈로 죽음에서 건짐받은 은혜입은 자가 아닙니까? 무슨 권위로 그분의 말씀에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내 삶의 영역에서 이부분만큼은 당신이 건드릴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
권위를 준 자가 누구냐?(1,2,8)
누가복음 20:1-8 / (작성: 김대인)
우리나라는 유교적 문화 현상의 영향으로 권(權)의 개념과 그 발현 현상에 대해 매우 민감한 편입니다. 사회통념이던 우리나라의 유교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인간 세상의 질서를 바르게 담당하기 위해 하늘의 도를 따라야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진 권(權)에 높고 존엄한 하늘이 내리는 힘을 위(威)라 하여 오늘날의 권위(權威)가 된 것입니다. 권위자에게 필요한 것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위한 균형이 필요했고, 균형을 이루는 기준을 도(道)라고 불렀습니다. 권위의 개념에는 하늘과 땅의 이치, 그리고 질서와 균형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권위의 개념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사회문제 중에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권위는 문화 의식이 되어, 우리의 말과 사고방식, 행동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나이와 직급, 성별에 따른 상하 관계를 구성하여 또 다른 계급사회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2007년 한 사회정신건강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인의 정체성이 매우 혼미한 단계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체성 혼미단계의 사람들은 주어진 일에는 비교적 성실하게 노력하는 경향이 있으나 새로운 일을 탐색하거나 도전하는 일에는 부족합니다. 사회구조에 경직성을 보이며, 민주적 절차보다는 강력한 리더를 선호하고 사회저항보다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권위주의가 생성된다고 합니다.
물론 조사 이후로 우리나라에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지만, 이 결과대로 오늘날 듣고 있는 소식들에는 이른바 ‘갑질’ 논란이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하청 업체에 강요와 물품 밀어 넣기를 하고, 입주민이 아파트 경비원을 대상으로 폭행하며, 사장님이 직원이나 운전기사에게 막말하는 등의 이야기들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비무장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경찰이 체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무릎으로 플로이드의 목을 누르는 영상은 인종차별이라는 이유로 온 세계에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권위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생각나는 성경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모든 시간을 억눌린 삶으로 살았습니다. 왕을 세우기 위한 사무엘과의 만남에 일곱 명의 형제들은 모두 모였으나 다윗은 양을 치느라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가 있는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찾아갔으나, 형들은 다윗이 교만하고 완악하다며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가져가는 다윗을 질투하여 사울 왕은 끊임없이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 사울의 권위를 인정하며 죽일 기회를 얻고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권위는 인정받지 못하여도 스스로 누군가의 권위를 무너뜨리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세우신 하나님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오늘 본문도 ‘권위’가 주제입니다. 권위를 기준으로 세상 사람들을 구분한다면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권위를 중심으로 그 권위에 환호하는 민중들이 있는 반면에, 적개심을 드러내는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의 결론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찾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은 유대인들의 의회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집단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총 71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성전과 관련된 다양한 직책과 역할들을 나누어 맡았습니다.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부터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시는 것이 불편했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는 일은 자신들이 가진 성전관할권을 침해하는 상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이렇게 하도록 만든 배후세력을 말하라며 예수님을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우리말 ‘가까이 와서’로 번역된 헬라어 ‘엡히스테미’는 ‘위에 서다, 습격하다, 공격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태도가 매우 공격적이고 무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위적이던 그들이 자신들의 권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다른 이들의 권위에는 민감하지 못했습니다. 인정받지 못함을 견디지 못하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권위는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일이란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것은 무사안일(無事安逸)과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메시아였습니다. 비록 현실은 로마의 압제 아래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민족을 잊지 않으셨고 모든 억눌림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사 진정한 평화와 샬롬을 허락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복음이 울려 퍼지는 역사의 현장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선언하시는 복된 때에, 성전을 담당한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힘의 구조와 논리가 아닐진대, 지도자들은 성전을 가까이하면서도 성전의 참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돌아갈 대답은 어느 것도 없었습니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의 세례(3~7)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행하느냐는 지도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역질문하십니다. 그 질문의 주제는 세례요한입니다. 당시 요한의 사역과 그가 베푼 세례는 많은 이들이 회자하던 때였습니다.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로서 그의 신앙과 경건에 흠잡을 데가 없는 선지자였습니다. 400년간 지속하던 영적 암흑기를 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언한 그에게 이스라엘의 많은 기대는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생일잔치에 헤로디아의 계략으로 인해 너무나 우발적이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질문을 남겨두었습니다. 주님은 그 질문을 하심으로 자신의 대답을 대신하십니다.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요한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을까? 그렇다면 저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면, 요한은 자기 멋대로 세례를 베푼 거짓 선지자였는가? 그러나 그의 영적인 권위는 어떻게 봐야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하기엔 어떤 것도 흡족할 만한 답이 되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질문에 제자들이 한 답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세례요한은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깊은 각인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막 8: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주님의 역질문에 지도자들이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본문에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라 한다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요, 사람으로부터라고 한다면 요한을 선지자로 인지한 백성들의 돌에 맞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놓으려던 덫에 주님의 역질문으로 오히려 자신들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지도자들이 할 수 있는 답변은 없었습니다.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정치적, 신앙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지도자들은 궁색하게도 알지 못한다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권위를 중시하던 그들이건만, 지금의 모습은 권위 없는 모습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초라한 것을 붙들고 있었는지 주님의 질문에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거짓이요 껍질뿐이던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참 권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자신들이 세우려 했던 권위, 그것을 위해 성전을 기반 삼아 제도를 만들었고, 로마를 등에 업었으며, 두려움없이 하나님의 말씀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운 권위는 모래성과 같아서 한 번 지나가는 파도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자신들이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광야로 가며, 갈릴리 빈민촌에 머물렀습니다. 제도나 조직, 지역을 근거로 힘을 삼지 않았고, 민중을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과 영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주변의 인정을 받으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세워가는 것을 더 큰 목적으로 삼으며 살아갔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참 권위가 찾아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참 도(道)를 기준으로 하늘과 땅의 질서를 바르게 세워나갔고, 하나님께서 권위로 옷 입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참 권위는 지위나 자리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권위적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느라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은 물론 아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권위적인 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는 포도원 농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막 12:1-9)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권위욕은 내 눈을 가리는 우상입니다. 그 우상이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계획을 가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해 정죄하게 하며, 사람과 영혼이 아니라 조직과 제도, 직함과 명분, 실리만을 좇게 함으로 결국은 본문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권위욕에 매몰되어 인생의 후반전을 망칠 것이 아니라, 나의 권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참 권위자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백성다운 삶으로 헌신할 때,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빈 깡통 꾹 찌그러져 아무 모퉁이에나 버려진 인생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되는듯 텃세를 부리고 약자를 뭉개며 비루한 권위로 옷 입고, 기득권을 방패 삼았음이 수치스럽습니다. 화살 같던 말, 휘둘렀던 폭력, 인정하지 않던 태도 모두 거룩한 주님 앞에 온전히 무릎 꿇게 하시고, 내 힘을 채우기보다 참 권위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순전함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참 권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권위의 선과 악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다윗이 사울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3.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권위가 제도나 직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보면서 참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4. 갑질은 있고 권위가 사라지는 이 시대에 세례요한과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로 옷 입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묵상해봅시다.
그리스도의 권위
눅 20:1-8 / 작성자 하늘기쁨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신 이야기입니다.
1. 무슨 권위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예루살렘 산헤드린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눅 20:1) '하루는'는 고난주간의 화요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시간 힘을 다하여 천국에 대해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대체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라고 말씀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전직과 현직 대제사장을 함께 말하기 때문에 복수입니다. 대제사장들까지 예수님께 직접 온 것을 보면 매우 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식으로 산헤드린을 대표하여 예수님께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 무슨 일로 산헤드린의 최고직 사람들이 예수라는 별볼일 없는 사람 앞에 온 것일까요?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눅 20:2)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제(고난 주간 월요일) 있었던 예수님의 성전청결 사건을 보고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멀리서 지켜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황당하고 놀랄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가르치는 권위를 누가 주었는지 물었습니다. 당시 랍비는 오늘날 목사 안수식과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어떤 랍비로부터 안수를 받았느냐'고 묻는 것이기도 합니다. 랍비로 세워지지도 않았으면서 가르치고 있으면 그것은 자격미달입니다. 함량미달인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랍비 안수도 받지 않은 사람이 가르친다고 비난하는 것 이면에는 전날 있었던 성전 청결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입니다. 사실 성전청결 사건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청결 사건은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비난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는 숨기고 랍비 자격 문제로 걸고 있는 것입니다.
랍비 자격은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랍비에게 먼저 배워야 하고 성경에 대한 지식을 익혀야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랍비에게 배우고 안수를 받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 나라 대통령을 선거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이 어느 누군가를 지지하며 주장하는 것을 보면 틀린 말도 있지만 나름대로 맞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사실 정직하게 진리를 따라 선택한다고 생각한다면 여당 후보이든 야당 후보이든 어떤 누구를 선택하든 옳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참으로 진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면서 선택하였는지가 중요합니다.
산헤드린 사람들이 보아야 하는 것은 랍비 안수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물론 랍비 안수는 진리를 지켜가는 중요한 과정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랍비 안수식도 결국은 진리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청결 사건은 그들의 입맛에는 안 맞지만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하고 그들 마음에는 그 사건이 가득할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작은 문제로 진리를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격 문제를 떠나 진리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이런 저런 다른 이유가 있어도 무엇이 진리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늘 진리를 따라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권위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묻는 산헤드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눅 20:4) 세례 요한의 자격은 무엇인지 물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렇게 세례를 주며 회개를 가르친 것은 하늘(하나님)로 부터 주어진 권위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안수식과 같은) 온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본래 제사장 집안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일찍 광야로 나갔기 때문에 제사장으로 안수 받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제사장으로 세우는 위임식도 없었는데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자격은 전혀 없는 것인가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산헤드린 사람들은 대답할 말을 곰곰히 생각하며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눅 20:5–6) 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의 결과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것을 대답하여도 결과가 안 좋다는 것을 알고 대답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산헤드린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목적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산헤드린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경우를 잘 이해하면 예수님께 질문한 것에 대해서도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국민과 사제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시몬을 영구적인 영도자, 대사제로 삼는다.” (1마카 14:41) 그들이 잘 알고 있었던 마카비전서에 보면 '진정한 예언자'를 기다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이 세우는 왕이나 대제사장이라는 큰 직책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선지자가 있을 때 그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선지자가 힘도 없고 화려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그러합니다. 그를 선지자로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대중들조차도 그를 선지자로 여깁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였습니다. 메시아는 그들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분입니다. 메시아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사람들이 주는 안수를 받지 않았다고 권위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메시아는 당연히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람이 세우는 권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탐욕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믿음인데 자신들의 위치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믿음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주간의 화요일에 사람들에게 천국과 복음을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인 예루살렘 산헤드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공작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진리를 던져버리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라 열심히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믿음에 온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뻔한 진리조차도 자신의 이익과 편견에 눈멀어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이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든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늘 믿음이 더 먼저이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