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 (2)
DAVID2
2024. 2. 20. 18:18
2. 신혼시절
지금와서 회상해보면 우리들의 신혼생활은 행복했지만 온 민족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독립투사의
국제결혼에는 남다른 어려움과 말 못할 사연이 많았다.
특히 결혼 직후 나를 가장 서글프게 했던 일은 하와이 동포들이 나의 남편에게 [혼자만 오시라]고 초청전보를
보내왔을 때였다. 그분을 보필했던 동지들이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두번씩이나 보내왔을때 나는 수심 가득한 친정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자기소신대로 행동하는 남편은 하와이 여행에 서양부인인 나를 동반해주었다. 남편은 하와이로 가는
배안에서 몹시 마음을 죄고있는 나에게 [이번에는 우리를 환영해 줄 동지가 아무도 없겠지만 다음 여행때는
달라질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이박사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동포구경꾼들이 부두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이박사가 데리고 온 서양부인에 대한 동포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당시 하와이에
있던 한국동포 1천명 이상이 모여 큰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 뜻밖의 모임에서 우리부부에 대한 동포들의 노여움이 다소 풀린 것 같았다. 우리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동포들은 자기집으로 우리를 초대하거나 맛있는 한국음식과 김치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김치와 고추장을 먹어보고 그 매운맛에 정말 혼났다. 김치도 매웠지만 고추장은 입안에서 폭탄이 터지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김치와 고추장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이기 때문에 만드는 법을 자세히 배워두었다가 집에
돌아오자 나는 곧 김치부터 담가보았다.
내가 담근 첫번째 김치맛은 남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성공작이었으나 고추장은 실패작이었다. 이후로도 내가
담근 김치는 남편은 물론 당시 장기영씨와 임병직씨를 위시한 한국손님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었다.
지금의 유학생들과는 달리 김치를 담가 먹기 힘들었던 한표욱씨 같은 동포 유학생들에게도 나는 김치를 담그면
가끔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신혼생활을 시작할 무렵 남편은 나에게 [한국의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친정에서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 부터 부엌일을 도움받아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 대견해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친정이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남편들은 미국 남자처럼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일을 도와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칭찬해서는 안된다고 그분은 여러번 나에게
일러주었다. 아뭏든 남에게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것이 현명한 아내의 도리라고 그
분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신혼초에 우리는 미국의 각지방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방문했다. 그때 윤치영씨 내외를 방문했었는데 윤치영씨
부인이 내게 예쁜 한복을 선사해서 입어보니 참으로 잘 어울렸다. 한복을 입은 내모습을 보고 남편은 무척 흐믓해
하였고 나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이후 내가 한복을 즐겨 입게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우리의 결혼식때 나에게 한복웨딩드레스를 지어입도록 부탁한 남편의 뜻을 따라 남궁엽씨
부인과 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하얀 천으로 한복을 만들다가 그만 실패해서 마음 아팠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다행히도 아들 인수가 결혼식을 올릴때 신부가 아름다운 한복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돌아가신 남편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한국의 아름다운 신부들이 서양식 웨딩드레스보다는 한복웨딩드레스를
입는다면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하고 생각해 본다.
신혼시절 남편과 내가 방문했던 미주의 우리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다 영양실조에 걸린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너무나 가슴 아파하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보내는 한국
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에 나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남편이 왜 3등열차나 3등
선실만을 골라서 타고 다니며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신혼살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했었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적게 먹고 재치
있는 여자로 생각되어 아내로 맞았다]고 농담을 했다. 잠시도 쉬지않는 부지런란 성격에다 건강하고 패기에 넘치는
59세의 신랑에 비해 34세밖에 안된 나는 신경성 위병에다 변비로 신혼초에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후 매일 새벽 남편이 권하는 냉수를 마시고 하나님께 모든것을 맡기는 신앙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고
보니 내병은 완쾌되고 건강도 좋아졌다. 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함께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생활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때나 대통령직에 있을때나 하와이 병실에서 돌아가실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보던 성경을 우리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가끔 읽어주곤한다.
우리가 결혼하자 남편의 비공식 여권을 내줄때마다 신경을 써야했던 미국무성의 미시즈 시플리는 지겨운 나머지
나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으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 그리하여 나는 남편의 조국독립에 대한 집념과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언제나 압도 당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됐지만 그분과 결혼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때도 나는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남다른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분이 끝까지 미국시민권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당한 무국적인 남편과 내가 이로
인해 겪은 고초는 그분이 대한민국 건국을 이룰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이 내건 30만달러의 현상금이 목에 걸린채 비공식 여권을 가지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하와이와 상해, 제네바,
모스크바등 오대양과 각대륙을 종횡무진 나그네 생활을 하였었다. 그리고 중국인 시체를 운반하는 배안에 누워서
태평양을 건넌 적도 있었다.
서른살에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30여년을 줄곧 독신생활을 해온 남편은 신혼시절 내가 마련한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남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그분이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남편이 가정의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엄수하게 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맨처음 내가 한국에 왔을때도 나는 남편이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고 이 일로 이해
남의 빈축도 샀고 남편으로부터 여러번 책망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남편은 늘 학생처럼 열심히 단어를 외우며 꾸준히 공부를 했다. 나와 결혼한
후 80이 넘을때까지도 남편은 계속 공부를 하며 틈나는대로 붓글씨를 연습하는 성실한 노력가였다, 남편이 붓글씨를
연습할때는 언제나 내가 곁에서 먹을 갈아드렸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함께 쉬지않고 노력하며 일하는 남편은 아프거나 늙을 틈도 없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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