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협상의 기술: 요구가 아닌 욕구에 집중하라>
허브 코웬이란 작가는 “인생의 8할은 협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협상은 회사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 전반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와 어느 정도 협상을 하게 됩니다.
이 협상의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매일 싸우느냐, 사이좋게 지내느냐가 결정됩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천재적인 물리학자라 불리는 파인만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였지만 성격이 고약하여 그의 기행만 따로 모아놓은 책이 있을 정도랍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1965년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옵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니 상을 받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타면서 만나야 할 사람들, 일주일 동안 여행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끔찍하여 이렇게 응답합니다.
“됐어요.
상 받으려면 북유럽까지 오가느라 비행기를 10시간이나 타야하고 일주일이란 시간을 써야 하는데 ...
귀찮아요. 받지 않겠습니다.”
이에 놀란 노벨상 재단 측에서는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은 초등학교 우등상이 아닙니다.
받으시면 국가의 영광이 되는 상입니다.
그리고 교수님, 일주일씩 있을 필요는 없고요, 상만 받고 바로 가셔도 됩니다.
교수님이 이러시면 앞으로 다른 미국 노벨상 후보자들에게도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인만은 “됐습니다. 귀찮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들은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협상과 협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협박은 쌍방이 둘 다 기분 좋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이때 파인만의 아내가 나섭니다.
“여보,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그런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번에 당신이 상을 거부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발적으로 노벨상을 거부한 첫 인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누가 관심을 가질까요?
바로 기자들이겠죠.
그냥 며칠 고생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파인만은 아내의 말에 설득당해 노벨상을 수상하러 떠났습니다.
[참조: ‘거절할 수 없는 협상의 신이 되는 법’, 웅이사의 하루 공부, 유튜브]
이 이야기는 최철규 작가의 <협상의 신>이란 책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최철규 작가는 협상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요구에 집중하지 말고 욕구에 집중하라.’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파인만이 제시했던 요구는 오랜 시간 여행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만 듣고 날짜를 줄이려는 노력과 더 나아가 협박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는 남편의 욕구에 집중하였습니다.
남편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으면 기자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상대의 욕구에 집중해야 상대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도 즐겁게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도 통용됩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아들을 쓰시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참 주님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님 뜻에 맡기는데 주님께서 즐겁지 않으실까요?
아무래도 주님은 당신이 주님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 무언가를 청할 때 돈과 함께 청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인간에게 감사의 봉헌을 받는 것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님께 봉헌되어져야 했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기에 모든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에 그 죄가 사해졌습니다.
무엇을 얻어내려면 그 무언가를 주시려는 분의 욕구를 올바로 알고
그 욕구에 합당한 것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는 그것이 ‘봉헌’입니다.
어떤 아이가 땀을 흘리며 슈퍼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콜라 하나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는 콜라가 떨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콜라 없다고 가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아이는 콜라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구가 아니라 욕구를 볼 줄 아는 주인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콜라 몸에 안 좋아. 완전 설탕 덩어리야. 물이나 이온음료가 어떻겠니?”
상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것만 줄기차게 청해봐야 그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러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봉헌’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완벽한 인간 존재로서의 삶을 지향하고 추구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전혀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우리와 똑같이 마굿간 탄생을 통해 요셉 가문과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 키를 낮추셔서 우리와 시선을 맞추시고,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상류층 명망가들이나 고관대작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운명을 공유하셨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시기에 율법의 지배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율법 규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때로 너무 비이성적으로 몰상식할 정도로 세분화된 다양한 규정들을 정확하게 준수하셨습니다.
탄생 8일째 되던 날,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으셨다고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준수는 그분 일생에 있어서 기본 토대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순명하셨습니다.
순명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정신과 의미가 그분 안에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 세상에로의 완벽한 적응은 할례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탈출기 13장에는 맏아들과 맏배에 대한 봉헌 세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것을 모두 주님께 바쳐야 한다.
너희 가축이 처음 낳은 것으로 수컷은 모두 주님의 것이다.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
(탈출기 13장 12~13절)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우리 민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떄,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
그래서 나는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수컷을 모두 주님께 바친다.”
(탈출기 13장 15절)
가축의 맏배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 했지만,
사람의 맏아들은 그대신 속전(贖錢)이 치러져야만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결례 제물 등급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인 산 비둘기 한 쌍을 바쳤는데,
그 중 한 마리는 번제물이고, 다른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사와 제물의 주인이요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좌정하셔서 제물을 받으셔야 마땅한 일인데,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겸손하게도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제사상 앞에 서신 것입니다.
놀라운 겸손이요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순결하신 분이시고 정결 예식이 전혀 필요 없으신 분께서,
겸손하게도 죄투성이인 인간들이 제정해 놓은 정결예식에 기꺼이 참여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죄의 깊은 구렁 속으로 떨어지는 우리들입니다.
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언제나 정결 예식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럽지만 틈만 나면 정결 예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습니다.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통해서, 그것이 힘들다면 미사 앞부분의 ‘작은 고백 성사’라고 할 수 있는
참회예절을 통해서,
그 순간도 놓쳤다면, 또 다른 기회인‘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씻고 또 씻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습니다.
지속적으로 거룩한 상태를 유지할 것을 원하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기 19장 2절)
씻고 또 씻어 정결하게 된 우리 자신을 이제 감사의 정을 담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해야 겠습니다.
매일의 정결 예식, 매일의 봉헌,
그것이야말로 주님 앞에 늘 깨어있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 4,4-5)
바로 이날,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노인과
밤낮으로 단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과부가 구세주를 뵈었습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우리는 “주님봉헌축일”과 “봉헌생활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이란 <교회법> 573조 제1항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이는 여섯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봉헌생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봉헌생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
(제1항)
결국, 봉헌생활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도록 주어진 성령의 선물에 따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위의 문헌 <봉헌생활>에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제22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삶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력을 쏟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반포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 기원을 이끌어 온다.”
(제1항)
결국, 봉헌생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듯이,
봉헌의 삶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삶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의 축성은 세례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 완전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증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특수한 축성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세례의 축성으로 이루어진 근본적 봉헌을 더욱 완전히 실현시키고 있다.”
(제4항)
결국, 봉헌생활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생활을 예표 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제44항)과 <봉헌생활>(제26항)에서는
봉헌은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고, 천상적 영광을 예고해줍니다.
<여섯째>,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생활은 모든 것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일시적 충동에 따라 사는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인 선서로 평생토록 지속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봉헌생활>에서는 “가없는 헌신”(104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하늘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독수리는 시력이 5.0이라고 합니다.
“수도자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신비를 바라보는 그러한 눈을 가졌기에 독수리 복음사가라 불리어집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눈이 바로 그러한 눈일 것입니다.
그런 눈을 지녔기에, 독수리는 날개 짓을 하지 않고도 높은 하늘을 유유자적합니다.
바람을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헌생활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꿰찔러 바라보며, 바람을 타고 높은 하늘을 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유유자적하는 삶 말입니다.
오늘도 성령의 바람을 타고 흐르는 축복의 삶 되길 바랍니다.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