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엔 배달맨, 낮엔 ‘나눔 실천하는 독서광’
| ▲ 오광봉 할아버지의 단칸방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 |
‘날다람쥐’, ‘신문 배달맨’, ‘독서광’, ‘부산 감천동 할아버지’….
이 모든 별명은 한 사람 것이다. 올해 여든넷의 오광봉(시몬, 84)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젊은이들도 하기 힘든 신문 배달을 매일 새벽마다 한다. 35년째다. 게다가 ‘날다람쥐 할아버지’란 별명까지 있다. 동네 주민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할아버지에게 붙여준 것이다. 실제로 오 할아버지는 잰걸음으로 가파른 언덕과 계단을 널뛰듯 오르내리며 달동네로 유명한 부산 감천동 일대 400가정에 신문을 배달한다. 할아버지는 바쁘고 힘든 일과 중에 어려운 이웃도 돕는다.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게 더 힘들지”라며 특유의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짓는 ‘자비를 실천하는 신문 배달맨’ 오광봉 할아버지를 부산 사하구 감천동 자택에서 만났다.
신문 배달 35년, 그리고 나눔
‘부산의 산토리니’로 불리는 감천동.
6ㆍ25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일군 이곳 일대는 이제 ‘감천동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다닥다닥 붙은 가옥들 인근에 자리한 오광봉 할아버지 집은 사람 한 명이 드나들기에도 비좁은 골목 안 3평 남짓한 곳이다.
“신문 배달은 속도가 생명이에요. 매일 밤 11시에 신문 보급소로 출근해서 새벽 6시까지 배달을 마치려면 부지런히 뛰어다녀야 하죠.”
남들은 모두 곤히 자는 시간이 할아버지에겐 가장 바쁜 시간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신문을 배달한다’는 진기한 사연에 2년 전엔 SBS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기도 했다. 젊은이들보다 달리기도 빠르고, 명패 없는 집에도 신문을 ‘착착’ 배달하는 오 할아버지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요. 6ㆍ25전쟁 일어나고 온 식구가 부산으로 내려왔지요. 가족과 오순도순 터전 잡고 지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소.”
할아버지는 이후 중앙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가난한 이들의 사제’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사목했던 송도성당에 다녔다.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가난한 이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낌없이 나눠 주고 함께해 주셨어요. 그게 아직 기억에 선해요.”
그래서일까. 오 할아버지는 6년 전부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홀몸 어르신 4가정에 격월로 쌀과 생필품, 생활비 등을 지원해 오고 있는 것. 할아버지 월급은 60만 원. 자신도 홀로 살면서 생활비를 겨우 버는 형편이지만, 틈나는 대로 폐지도 모으며 자선단체에 기부까지 하고 있다.
밥은 안 먹어도 되지만 책은 꼭 있어야 해
“정신이 가난한 사람이 되면 안 돼요. 책은 소모되지 않고 정신을 살찌우죠.”
할아버지는 ‘독서광’이다. 월급의 3분의 1을 책 구입에 쓰고, 돋보기 없이 하루 1권씩 책을 읽는다. 3평 남짓한 할아버지 방은 아늑한 서점을 방불케 한다. 할아버지는 “이 방에 책이 3000권쯤 된다”고 했다. 매일 성경도 30분씩 읽는다. “혼자 성경을 이해하기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다른 종교 서적들이 성경 내용의 뒷받침이 돼 준다”고 했다.
장자, 노자, 플라톤 전집 등 철학서적부터 자본주의, 경제학 서적을 넘어 한편에는 1600쪽에 달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등 교회 서적까지 없는 게 없다. 지학순 주교 강론집 「정의가 강물처럼」 등 오래된 서적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도 모두 정독했다. 할아버지는 “가난한 이들을 늘 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습과 글이 아름답다”고 했다. 신문에 나온 신간 소식을 갈무리해 뒀다가 대형 서점과 바오로딸 서원에 가는 게 할아버지 낙(樂)이다.
할아버지는 쉼 없이 구입하고 소화한 책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 준다. 몇 차례 TV 출연 후 생긴 팬 8명과도 늘 연락하며 지낸다. 모두 젊은 청년들인 이들은 할아버지가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매해 배송해 주고, 방문도 한다. 그들이 남기고 간 편지에는 “할아버지 책 선물 고맙습니다. 책을 많이 주신 만큼 제가 빨리 읽지 못해 오히려 죄송합니다”란 내용이 있다.
“지혜는 우릴 배부르게 합니다. 좋은 글을 읽으면 좋은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죠. 책을 나누는 건 좋은 생각과 감수성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잖아요.”
할아버지의 소원은
할아버지는 1990년께 이혼한 뒤 지금껏 홀로 살고 있다. 가족들과 연락도 사실상 끊긴 상태다. 젊은 시절 가내수공업을 하다 그만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 오른손은 엄지손가락뿐이다. 이후 일자리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식들 대학까지 다 보냈지만, 한때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 내 잘못”이라며 가족 이야기를 할 때엔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에겐 꿈이 두 가지 있다. 한 번이라도 가족을 만나는 것, 그리고 서원(書院)을 차리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담한 서원에서 사람들과 책을 함께 읽고, 토론도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내가 가진 건 지금까지 모은 책과 작은 지식입니다. 이걸 나눈다는 것은 제겐 큰 기쁨입니다. 좋은 것 있으면 혼자 누리기 아깝잖아요. 나중엔 교회에 다 기증할 겁니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취재 후기
오광봉 할아버지는 가족 없이 홀로 지내는 어르신이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홀몸 어르신을 돕고, 그들을 걱정한다. 젊은이들에겐 책을 선물하며 지혜를 쌓길 권한다. 작은 체구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노인과 젊은이들을 모두 돌보는 나눔을 베풀고 있다.
할아버지 지론은 책을 읽은 좋은 생각은 결국 남들에게도 선(善)이 된다는 것이다. ‘선의 선순환’을 위해 책을 읽고 권하는 것이다. 무턱대고 “책 좀 읽으라”하는 말보다 훨씬 와 닿는다. 어려운 가운데에도 나눔을 실천하도록 할아버지를 이끈 원동력도 책의 한 구절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가구당 책 소비량이 5년째 감소세라고 한다. ‘독서의 의미’부터 터득하는 게 급선무일 듯하다.
할아버지가 인터뷰 말미에 책 두 권을 추천했다.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바오로딸)와 「논어」(바이북스)이다. 할아버지는 책을 나눠줄 때 꼭 이렇게 써준다. “재물을 쌓지 말고, 지혜를 쌓아라.”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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