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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병 기□
우선 이 글을 쓰게 된 목적은 간이식 이전부터 간이식 후 현재까지의 오랜 투병에 따른 가족의 끝없는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오래도록 초심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동안 메모해 온 수술 당시의 병상일지와 지금도 선명한 기억들을 쫒아 경험하고 느낀 그대로를 가감 없이 작성하였습니다. 글의 내용 중에 당시 수술 후 정신적 공황 상태(사이코시스)에서 일부 의료진을 불신하는 내용이 있으나, 이는 결코 의료진의 처치와 처방을 의심하거나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지금까지 투병기를 쓰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오히려 이 글을 통해 지난날의 고통스런 순간들이 재현되는 것이 싫었던 것과 그동안의 힘든 투병생활에 지친 심신으로 차일피일 미뤄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 아픈 기억마저도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추억과 아름다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알기에 용기를 내어 봅니다.
- 간 이식 전 4년 6개월여 동안 간경화와 힘들게 싸우다.
1990년 12월에 최초로 만성 B형간염 진단을 받은 후 온 나라가 월드컵 축구 열기로 들끓던 2002년 6월 30일(당시 터키와 3~4위전을 치루고 있던 시각), 갑작스런 두 차례의 토혈로 광주 북구에 있는 현대병원 응급실을 내원한 것을 시작으로 간경변과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현대병원에서의 1차 문진 등에 의해 간경화 합병증에 의한 식도 정맥류 출혈임이 의심된다며, 즉시 출혈 부위의 결찰술을 시행해야 하고 시술 후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관찰해야 한다는 말에 뒤믖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고 급히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전원하게 되었다.
도착 후 식도 출혈부위 여러 곳을 결찰한 것을 시작으로 그 해만 해도 동일한 합병증으로 2회나 더 응급상황에서 결찰술을 시행하게 되었으며, 이후 2006년 10월까지 일종의 간경변 합병증인 고열 증상으로 인해 10여 차례가 넘게 응급실을 통해 입원치료를 해야만 했다.
간경화 말기적 합병증의 일환인 비장비대로 인해 혈소판은 2만~4만, 백혈구는 1.8~2.6 정도의 수치가 말해 주듯 언제든지 출혈의 위험과 감염 확률이 매우 높은 상태였다.
그 후 이렇다 할 치료법이 없자 상당기간 민간요법에 의지하게 되었는데, 월 150만 원 정도의 큰 비용이 지출되는 등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이 있었다. 그러나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보았지만 병세가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살기위한 노력들이 모두 허사가 된 것을 두고 무척이나 하늘을 원망하였다. 그런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내며 뾰족한 방법이 없어 스스로 죽음에 대비해야 하는 자괴감에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3회의 결찰술 후 추가적인 출혈은 없었으나 이미 중증 간경변 상태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는 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기만 하였다.
급기야 2005년 초 부터는 적은 양의 복수가 관찰되기 시작했다.
이미 간이식을 위해 2004년 2월에 서울아산병원에서 검사를 통해 이식을 권유받은 상태에서 뇌사자 간이식 등록을 마친 상태였고, 이후 2005년 4월에는 삼성서울병원에도 간이식을 염두해 둔 기초적인 검사를 한 상태였다.
당시 아산병원 주치의는 당장 이식을 해야 할 정도이나 뇌사자 장기이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체 기증자를 물색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응급상황도 아니거니와 준비된 마땅한 기증자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삼성병원에서는 이식 가능한 기증자가 없는 상태에서 복수천자를 하면서라도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가족 중 혈액형이 동일한 사람은 어린 딸(중1)이 있을 뿐 형제 중에는 두 살 터울인 바로 위의 누이가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로서는 삼성서울병원 코디네이터의 의견을 따라 최대한 잘 관리하며 시간을 버는 수박에 다른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2006년 상반기부터는 복수양이 급속히 확대되기에 이르렀고 이뇨제로도 조절되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복부팽만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하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으며 수차례 고열증상으로 인해 입원할 때 마다 복수천자를 시행했지만 곧바로 복수가 차오르는 등 별다른 호전은 없었다. 이때 줄 곳 반복된 이뇨제 처방을 받았지만 이식을 염두 해 둔 터라 가급적 신장을 보호하기 위해 가끔 이뇨제 양을 스스로 조절하여 복용하곤 했다. 2006년 10월부터는 복수로 인한 힘든 투병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며 하루하루를 지옥과 같이 견딘 기억이 생생하다.
20~30m도 걷기 힘들 정도로 숨이 차오르고 더 이상 빠질 것도 없는 몰골은 그야말로 앙상한 겨울나무와 같았으며 그로인해 외출횟수도 급격히 줄었고 사람 만나는 것 자체를 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태에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간이식을 서둘러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임을 전해들은 작은 누이가 마침 기증하겠다고 나섰지만 그때까지도 한편으로는 과연 이식을 해야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도 없었으며 이식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받으면 고개를 끄덕이었지만 막상 이식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압박감으로 인해 회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과거에 나를 위해 희생했던 사랑스런 누이에게 또 다시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아 망설여진 것도 사실이다.
- 2006년 10월, 드디어 이식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인터넷을 통한 중국 이식 정보를 찾고 그에 따른 방법들을 체득하고 점검하는 등 본격적인 이식준비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국관련 이식 정보는 얼마 지나지나지 않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중국 쪽에서의 간이식이 2008년 북경올림픽과 관련하여 인권보호 차원에서 일체 중단되었다는 사실들이 확인되는 순간,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멘붕) 그 자체였다.
"아 ! 나는 이렇게도 천운이 없다는 말인가" 하는 탄식은 물론 원망과 심한 자괴감을 갖게 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이 고통, 남은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의식으로 인해 기증자 검사를 차치하고라도 일단 본격적인 수혜자검사를 받기로 하고 8일간의 입원을 통해 모든 검사를 해 두었다.
그 후 누이가 스스로 기증자 검사를 진행하였다는 사실을 들었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내 죄인지라 과거에 너무 큰 신세를 진 것도 모자라 또 목숨까지 신세를 져야 한다는 처지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과거 누이는 어려운 여건에서 대학 등록금 대신하는 등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그렇게 누이는 늘 나에게있어서 죽을 때까지 고마운 사람인데....
내 검사결과는 이식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누이의 검사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지방간으로 인해 약 한 달 정도의 꾸준한 운동을 한 후 재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루하루 참기 힘든 고통의 나날 속에서....기약도 없는 누이의 지방간 조절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즈음, 그동안 곁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큰 아이(이제 고등학교 2학년 딸,17세)가 전면에 나섰다. 매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아빠를 보고 하루라도 빨리 고통 속에서 구원해야 한다며 자기가 한 번 검사를 받아보겠다고 엄마에게 떼를 쓰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아빠의 고통을 지켜보고 있기 힘들고 고모의 지방간이 언제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기다리는 것이 고모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안겨드리는 지 아느냐며 논리적이고 감성적인 설득을 되풀이 하였다. 이제 자신도 법적으로 기증이 가능하니 일단 검사를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나는 절대 불가하다고 잘라 말했다. 지금까지 공부도 잘 해 왔고 그 결실이 머지않은 딸아이의 장래를 못난 애비가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의 입장에서 어린 딸이 적극 나서는 것은 당연하나 아직 어란 여자아이 고 3학년이 내일 모래인 것이 염려되었지만 일단 아이의 검사를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저에게는 비밀로 하고 둘은 그렇게 검사를 하러 갔다. 검사를 다녀 온 후 아내는 혹여 누이의 지방간 조절이 쉽지 않아 원하는 싯점에서 이식할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이해시켰다. 아니의 신체적인 사이즈를 감안하여 볼 때, 불가 판정을 받게 되면 결국 누이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문제인지라 누이에게나 주변에 알리지 않고 딸의 검사는 그렇게 끝났다.
어느 누가 남편을 살리겠다고 어린 딸을 차가운 수술대에 올릴 상상을 했을까. 체격도 크지 않아 과연 수술이 가능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딸의 의지가 워낙 강해 일단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런 원죄를 안고 있는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을 원망하고 또 증오하였다.
이때처럼 나 자신이 무기력하고 볼품 어 보인적은 없었다.
아무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검사를 마친 딸의 모습을 정면에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며 지낸 며칠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비애에 젖은체 지내야 했던 기억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며칠 후 딸의 검사 결과를 전화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예상 밖으로 사이즈에 여유는 없지만 수술은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이 나왔다. 그런데 기뻐한 순간도 잠시 검사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의아했다. 왜냐하면 아이와 나와의 신체 사이즈를 비교해 볼 때 분명 무리가 있어 보였는데도 기증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사이즈가 여유는 없다고 해 놓고 수술은 가능하다니...이 무슨 괴변인가. 무리하게 수술을 진행하다가 아이는 물론 나 또한 온전할 것인가.
그러나 일단 검사 결과를 받아들여 수술 일정을 잡는다 해도 지방간 조절을 위해 그동안 노력했을 누이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이 생겼다.
검사 결과가 나온 후 아내는 마음을 바꿨다. 남산만한 나의 복수와 거친 숨소리, 그리고 식도 출혈이 언제 다시 반복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당장 딸의 간으로 수술날짜를 잡자는 것이다. 기증 가능한 가족이 있는데 누이한테 기증하라는 것은 지나친 이기심이거니와 하루가 급한 상황에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으로 일단 딸의 간으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아내의 설명에 마땅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곧 바로 수술 날짜를 전화로 잡았다.
누이는 이런 상황을 설명 받고 "어린 아이가 어떻게 수술을 하겠으며, 지금 열심히 운동하고 있으니 좀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어고민에 빠졌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가능한 자식이 있는 상태에서 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아이가 기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어느덧 수술날짜는 내게 성큼성큼 저승사자처럼 다가 왔다. 황량한 2007년 02월의 겨울은 그렇게 깊어갔지만 수술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온통 갖가지 두려움과 죄책감과 안타까움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의 죄업으로 어린 딸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몇 날 며칠을 눈물을 훔치고 또 훔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도 불현듯 이래서는 안 되겠다면 혹시 중국쪽 소식이 달라졌지 않을까하고 또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하기를 반복 하였다.
다음 달이면 고 3이 되어 치열한 입시 경쟁에 뛰어들 딸에게 이 무슨 행패란 말인가. 훗날 딸의 장래를 망친 추한 욕심쟁이로 남아서는 안 되는 것을...재 목숨하나 건지자고 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잃게 하는 것은 아닌지...그런 희생들을 통해 얻은 삶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가 있을까...무슨 영광이 있을까..
잡다한 잡념 속에서도 추운 칼바람을 맨몸으로 맞서 싸우는 기분에서도 속절없는 시간은 하루하루 또박또박 심장을 짓누르는 저승사자처럼 압박해 왔다.
정말 이 수술을 해야만 살 수 있는지... 정말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말인지... 정말 기사회생할 수는 없는 것인지... 너무나 무기력함과 한심함을 꾸짖으며 천근 쇳덩어리같이 무거운 시간과 싸워야 했다.
지금도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내 딸아, 이렇게 너에게 희생을 강요한 체 살아있는 나를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 마침내 2007. 2. 4 새로운 생환을 고대하며 서울로 향했다.
입원 수속이 끝나고 각각의 병실로 들어가 이틀 후 2007년 2월 6일 의료진의 지시대로 수술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었다.
병실에 혼자 남아 수술이 실패할 만약을 위한 정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집에 써둔 유언장을 기억하며 빠지고 보충할 내용은 다시 삽입하고, 연로하신 모친부터 형제자매 그리고 처부모와 처 형제자매 등에게 일일이 그동안의 아름다웠던 추억은 회상하고 아픈 기억은 용서하는 글을 남기느라 장장 몇 시간을 홀로 보냈다.
특히 다시 한 번 아내와 두 딸에게 남편과 아빠 없이 살아 갈 때,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 대비하는 방법을 당부하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다음 날, 오전에는 멀리서 장인어른이 오신 것을 필두로 오후에는 형제자매, 처가 식구들이 속속 도착하는 것은 즐겁지만은 않았다. 마침내 수술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생각에 여러 가지 혼란스러웠다. 그로인해 갑자기 여기서 모두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이런 삶의 끈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등 심란해지기도 했다.
점심부터 금식이 시작되었고 장을 비우기 위한 약물을 마시고 관장도 시작하였다.
두려움의 공포가 엄습 해오던 그날 밤은 곁에 잠드신 장인의 뒤척임과 코골이도 응급 실 엠블란스 소리에도 그저 적막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정말 길고 외로운 밤이었다. 밤 새 꼼짝도 하지 않고 거의 뜬 눈으로 보냈다.
누구나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지만, 사실 겁이 많은 나로서는 수술 일정이 확정된 이후부터는 정말 마취와 수술생각만 하면 숨이 콱콱 막히는 기분이 들어 왔던 게 사실이다.
혹시 주무시는 장인을 깨우게 될까봐 함부로 뒤척이지도 못했지만 여지없이 그렇게 시간은 새벽으로 향했다.
오전 일찍부터 수술복이 도착하고.... 온 몸 구석구석 소독약으로 샤워를 마치고.... 주사바늘을 팔에 달고.... 계획된 수술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중에 딸이 먼저 수술장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부랴부랴 딸에게 가 보았더니 벌써 내려가고 없었다. 순간 망치로 둔부를 심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멍했다. 여러 생각이 교차헸다.
그 순간 가슴이 쿵하고 무너져 내린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전율과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그 어린 것이 차가운 수술장을 향하는데 애비라는 사람이 힘내라는 말 한마디 전하지 못했으니 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가 말이다.
형용할 수 없는 긴장과 공포가 엄습했을 텐데...내 소중한 꼬마아가씨는 그렇게 수술장으로 끌려가고 없었던 것이다.
숭고하고 은혜로운 딸의 눈동자와 작고 파리하게 떨고 있을 손과 정처 없이 서성일 어린 마음에게 적어도 미안함과 감사함의 짧은 눈인사라도 했어야 하는 것을.. 아니 무한의 신뢰와 용기를 주었어야 하는 것을...
이렇게 내 수술 준비에만 허겁지겁하고 있었다니 너무나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사실 나 또한 당시 무슨 여유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빠를 살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을 딸을 생각하면 난 너무 못났다. 지금도 그 때가 생애 가장 가슴 아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전 날 “힘든 수술이지만 자랑스러운 내 딸이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무슨 어려움이 있더라도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견디라고...그리고 마음속 깊이 자신을 의지하고 결코 지지 않을 용기를 가지라고 일러두었지만 그것으로 어찌 수술 당시 긴장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딸에게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아내는 참으로 위대했다.
그렇게 딸을 보내고 이내 얼마 후 내 차례가 되었다.
아내는 아이를 수술장으로 보내면서부터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으리라. 그 순간 얼마나 참담했을지...
연이어 내 침대를 붙잡고 따르던 아내는 외적으로는 초연해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심리적 공황상태였으리라.
그 짧은 순간 요동치는 아내의 심장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아내가 남편을 살리기 위해 어린 딸의 장기를 적출하는 일을 상상이나 했을까.
한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고 수술장 내에서 대기하던 아내는 침착하게 나에게 일러둔다.
“지금부터 깨어날 때까지 누가 가자고해도 단호하게 뿌리치라” “그 어떤 예쁜 여자라도 단호하게 뿌리치라”는 등 단단히 다짐해 둔다.
그렇게 침착하던 아내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리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수술실로 보내기 위해 침대에서 손을 떼야하는 상황에서 흐느끼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것이 수술 전 위대한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마치과장이 마취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을 한다.
방금 전에 아내가 일러준 말이 아직 귓가에 맴도는 데도 어찌나 마치과장이 미인이든지....그렇게 마취가 시작되었고 수술도 시작되었으리라.
- 수술 후 5일째, 나는 살았다.
기운을 차리고 살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 날은 이미 수술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물론 아내는 수술 후 하루에 두 차례씩 면회 올 때마다 의식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읺았고, 다만 5일째가 되어서야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맑은 의식을 찾은 것이다. 덕분에 수술 초기의 극심했을 통증은 오간데 없이 지나갔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이 수술한지 5일째이고..수술 시간은 12시간이 걸렸고..수술 중 복수를 9,900cc나 제거하였고.. 개복한 후 딸의 간이 30g이 더 적어 나에게 그만큼 덜 이식되어 회복하는데 시간이 덜릴 것이며...아이는 일반병실로 옮겨 잘 회복 중에 있다는 등... 간을 적게 받은 관계로 계속 수면치료를 해야 한다며 수술 후 갓 정신이 든 나에게 아내는 일사천리로 설명 해 나갔다.
이런 설명을 들었다 해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수술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증상들로 인해 성공적인 수술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간이 너무 적었는데도 의도적으로 무리하게 수술을 진행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고 발음도 부정확하고 발가락 하나 꼼지락 거릴 수가 없었기에 수술이 잘 못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발과 한 손을 묶어 둔 상태로 수면치료를 하면서 생긴 손목부위의 커다란 멍자욱은 물론 이곳저곳이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의식이 본격적으로 돌아온 후 부터는 기관지나 폐에 많은 가래가 있어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기침소리를 내게 했고 고무패킹으로 폐 부위를 두들겨 가래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수 없이 많이 했으나 기침소리 하나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진한 나로서는 그게 너무나 힘들었다.
가래를 제거하지 않으면 폐렴에 걸리거나 기타 감염에 노출될 수 있어 위험하다는 설명을 듣고 억지로 제거해 보려고 수 없이 많은 노력했지만 이미 수술 후 내 몸은 내가 의도하는 대로 되지 않는 등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부터 수술 후유증에 따른 약물 부작용으로 엄청난 사건들과 직면하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사이코시스라는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가래를 뱉어 내야하는 상황에서 가래 속에 약간의 출혈이 보이곤 하였는데 그것이 이식된 간의 혈관에서 출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수술을 해야 하는 데 의료진들이 이식된 제 간을 떼어내 당시 주치의 선생의 지인에게 다시 이식해 주려고, 재수술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가장 극적인 망상이다.
지금이야 터무니없는 억지라고 하지만 당시엔 얼마나 무섭고 엄청난 사실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오해하게 된 데에는 주치의 선생이 잘 알고 있는 이식할 대상자(나도 아는 분)가 내 다음 순 번으로 수술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 수술이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의료진들이 서로 나누는 다른 환자의 좋지 않은 얘기를 스스로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확대 재생산하는 일을 반복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마약을 너무나 많이 써서 내가 마약 중독이 되었다...수면제를 너무 과용해서 약물 중독이 되었다든지...마취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등... 지금도 나를 왜 재우려고만 하느냐는 등 등...
도대체 당시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 없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몸무게는 날이 갈수록 왜 이렇게 빠지는지... (수술 전에 74kg 이던 체중은 48.5kg 까지 빠진 상태에서 좀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없던 혈당은 왜 생긴 것인지...왜 내게 앉을 수도 발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는 것인지..
이런 모든 증상들이 수술을 잘못해서 그런 거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그동안 알량한 병원생활로부터 얻은 의료지식과 얄팍한 영어실력으로 인해 더 정신적 고통이 가중된 요인이기도 하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의료진들의 다른 환자도 포한된 출처 불명한 짤막한 부작용이나 후유증에 대한 영어대화를 모두 내 것으로 수용하여 결국 스스로를 더 옭아 메는 자충수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 정도가 너무 과해 정신과 컨설던트를 받아야 했고, 정신과 의사는 “외과 의료진들이 환자를 살리려고 최선을 다 하는데 무슨 잘못된 문제가 있는지 말해보라” 물어 답하기를 “당신도 같은 병원 의사인데 (의료진의 과실)진실을 말하면 믿겠느냐, 내가 이의를 제기한다고 받아들여 줄 수 있겠느냐” 고 오히려 큰 소리로 야단쳐 내치고 말았다.
이윽고 병원에서 생체실험을 준비하고 있으니 나를 살리려면 병원을 옮겨야 한다고 아내와 누이에게 눈물어린 간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눈물어린 간청이 아니라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다.
서울대병원이나 아산병원으로 옮겨달라고 며칠을 눈물로 호소를 하였다. 당연히 그러한 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두 나를 죽게 할 작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아내는 나의 이런 극심한 정신분열증을 보다 못해 딸의 간호를 제쳐두고 24시간 내내 중환자실에서 간호하기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의료진을 불신하고 아무 말 없이 주사를 놓으면 마취시켜, 혹은 수면제로 재워서 죽이려한다고 하며 주사약의 이름을 묻곤 했다.
의료진들은 현 상태에서는 수면치료가 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나는 잠을 자면 죽게 된다고 생각에 계속되는 수면제 투입에도 불구하고 만 48시간을 단 한 숨도 자지 않고 버틴 적도 있다.
아내와 누이에게 병원을 옮겨달라고 눈물어린 호소를 하였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나는 마음속으로 죽음에 대한 최종 정리를 하기에 이른다.
“수면제에 의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으니 죽음이 확인되는 대로 시신을 전남대병원으로 옮겨 부검을 해라. 그러면 복부 내의 간이 뒤 바뀌어 있을 것이다”라고.
그래서 의료분쟁소송을 하여 승소하면 앞으로 자식들 교육에 잘 사용하라고 유지를 남겼다.
이후에도 여전히 수면치료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안자고 버티는 나를 보고 더 이상의 수면제 투여는 오히려 위험하다는 간호사의 펠로우 선생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들은 나는 견디다 못해 치료일지를 달라고간호사를 다그치기에 이르렀다.
또한 중환자실에서는 몇날며칠 혀를 꼬며 낼름거리며 치아를 끊임없이 갈아대기를 반복하여 아내뿐만 아니라 간호사들의 고통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육체적, 정신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가운데, 그동안 내 옆에는 3일 먼저 수술한 8개 월 된 여아가 준중환자실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외래에서 안면이 있던 나보다 일주일 늦게 수술한 새 환자가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왔다.
그 환자의 너무도 멀쩡하고 당당한 모습에 오히려 더욱 의료진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많은 의심 속에서 그 분에게 첫번째 질문한 내용이 혈액형이었다.
O형이라는 대답과 함께 스치듯 하게 된 생각은, “생체실험을 하는데 있어서 같은 O형인데 내 간만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아주 초보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험 대상자가 어쩌면 저 환자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하여 의료진에게 고분고분하게 굴었던 기억은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나 없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중한자실에 있는 동안 식사라곤 아예 하지 못했다.
먹은 거라고는 극히 소량의 전복죽과 과일 통조림 약간을 먹은 것 빼고는 아예 먹지 못했다.
비정상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환자를 간호하는 보호자의 심적 고통을 경험해보지 않는 어느 누가 이해한다고 할 것인가.
한동안 보고 싶은 얼굴들이 면회를 왔어도 철저한 감염관리 차원에서 단지 유리창 너머로 눈인사만으로 대신 해야 했다.
감정이 조절되지 읺은 나는 그들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로 인사를 했었다.
수술 후 딸은 감기기운이 있어 면회를 왔어도 창밖에서 손을 흔들며 미소 짖는 게 전부였다. 딸을 보는 순간에도 내내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울보가 되어 있었다. 딸을 희생시켜 얻은 생명이 이렇게 초라한 체 누어있으니... 참담한 내 모습에 얼마나 큰 실망을 하고 있을지...
아마도 죄책감에 눈을 맞출 자신이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며칠 후 감기기운이 완화되었는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는 기본적인 안부를 물은 후, 그렇게 강하던 아빠가 이렇게 허약할 줄 은 꿈에도 몰랐다고 토로한다. 그냥 던진 말이었다지만 나는 뼈 있는 핀잔쯤으로 들려 못내 가슴이 저려온다. 내 사정이나 심정을 이해하기나 하고 얘기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도 않다.
하여튼 딸의 그 말이 당시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강한 줄만 알았던 아빠가 이렇게 약한 모습이라니...”
나로서는 살면서 약하다거나 우유부단하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그 동안 평소 얼마나 엄하게 훈육하였기에 그런 말을 하는가 하여 가슴이 아파온다.
스테로이드 약물의 부작용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때는 도대체 무엇 하나 이해되는 게 없었다.
딸은 수술 후 너무 심한 통증에 고통 받고 있는데 아빠가 엄마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아빠가 미웠을까... 가히 짐작되는 대목이다.
- 드디어 11 일째, 준중환자실(일반병실)로 전원하다
어제부터 아내는 주치선생에게 심리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며 준중환자실로 옮겨서 치료하기를 간청을 했다.
아직 그런 단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매일같이 차도가 없는 나를 보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으리라.
주치의 선생은 경과를 지켜보더니 다름 날 운 좋게도 준중환자실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의료진도 그것이 차라리 정신적인 안정과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고 또한 새로운 환자가 중환자실로 들어와야 하는 이유도 또 있었을 것이다.
준중환자실에 올라 온 후 담당교수가 처음 회진하며 하는 말, 생체 실험한다는 소리를 모처럼 들으니 그것도 괜찮더라고 한바탕 웃으며 힘내라고 위로하였다.
이렇게 중환자실에서 힘든 10일을 보내고 11일 째 오후부터 낯설지만 일반병동에서의 생활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준중환자실에서는 첫 날부터 정신적인 안정은 분명 있었다.
주사 갯수도 줄고 순서대로 목에 붙은 관들도 탈거되고 소변 줄도 빼는 등 획기적인 조치들이 뒤따랐다.
그렇게 점차 심리적인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중 다시 날벼락 같은 사건들은 시작되었다.
이곳에 온지 이튼 날부터 혈압이 70/40 정도로 떨어지는 저혈압과 동시에 저산소증이 시작되더니 급기야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심장 부정맥까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저혈압으로 인해 부정맥의 횟수가 더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저산소증으로 24시간 모니터링하며 의료진들을 부산하게 만들었다.
식사 중에도 의식을 잃고 대화중에도 의식을 놓아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도 흔들어 깨우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정신이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경구용으로 바뀐 면억억제제를 복용하는 데에도 기력이 쇠진하여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루 종일 약 먹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면역억제제, 캡슐은 목구멍에 달라붙어 넘어가지를 않았고, 주말에 먹는 새끼손가락 마디만큼 큰 유프린(항생제)은 정말 넘기기 힘들어 고통스러웠다.
무릎 밑에서 발끝까지가 감각이 거의 없고 찌릿찌릿하며 조금만 터치를 해도 너무 아프고 차갑고 시려워 온수찜질을 매일 몇 번이고 하였지만 돌아서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하지부의 감각상태를 검사하기 위해 신경과 협진도 있었고 갈수록 눈은 초점이 없고 흐리며 멍한 기운으로 인해 정신은 맑지 못했다.
미음정도를 조금씩 먹기 시작했는데 이곳에서는 그것조차도 오히려 먹기 힘들었고 혈당이 높은데도 식사 중에 나오는 과일 통조림 정도를 먹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 저혈압 치료차 도파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혈압을 높이려고 도파민을 얼마나 오래 동안 얼마나 많은 양을 처방했는지.... 그 주사약은 왜 그리 두통을 오게 하는지... 간호사에게 조금만 내려 달라고 얼마나 많은 읍소를 해야 했는지...부정맥으로 인해 24시간 모니터링으로 의료진은 늘 마음을 졸였으며 한밤중에도 주치의 선생을 호출하는 등 모두가 마음 졸이기를 반복하였다.
마침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치의 선생은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가야 한다는 오더를 내려고 하였다.
중환자실에서의 악몽은 다시는 재현하고 싶지 않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강하게 버텼다. 버틸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마는 식사량도 늘리고 정신도 추슬러 볼 테니 이곳에 그냥 있게 해달라고 간청과 읍소를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중환자실로 가게 되면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완강하게 버텼던 기억이 생생하게 난다.
그래도 준중환자실에서는 부정맥이 심해졌지만 심리적인 안정만큼은 다소 회복되어가는 중이었다.
수술한지가 한참 지났지만 아직도 발생하는 복수로 인해 배액관을 통한 복수조절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나 시행하였으며, 이러한 연유로 이식술 후부터 투여된 알부민 주사는 퇴원 3~4일 전까지 달고 살았다.
이곳 생활에서의 고통 중에 근육이 하나도 남지 않아 온 몸 마디마디가 결려 침상에 누워 있기가 힘들어(그렇다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컨디션도 아님) 푹신한 에어 매트를 깔았지만 도파민으로 인해 머리가 아픈데다가 에어 매트의 반복되는 공기 주입소리가 싫어 다시 푹신한 일반 매트로 교환을 하는 등 침상 위에 담요와 엉덩이 쿠션 등 할 것은 다 하고서야 간신히 누워 있을 정도였다. 앉을 수도 일어 날 수도 없고 늘 누어서 너무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아직도 24시간 모니터링을 해야 하는 대상이었지만, 새로 수술한 환자들이 이관되어 와야 때문에 병실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지 8일 만에 다시 다른 2인실로 전실해야 했다.
수술한지 25일 경이 되도록 리모컨을 통한 전동 침대를 움직이는 것 말고는 남들이 다 하는 병실을 회전하는 운동이나 휴게소에서 티브를 시청하는 등의 생활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스스로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상태인지라 아직 한 번도 침상을 떠나 본적이 없었다.
- 2인실(일반병실)로 옮겨 오다.
2인실로 온지 며칠 뒤부터(32일 경) 식사량이 확연히 늘어나더니 기운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기력이 점차 회복되면서 심리적인 안정도 뒤따라 나아지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힘든 회복과정으로 볼 때 입원기간이 장기간이 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스스로를 담금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1주일, 2주일씩이나 늦게 수술한 환자들이 퇴원을 준비하고 있어 더욱 이런 마음은 간절하였다.
이때부터 특유의 강단이 나오며 정신을 재무장하고 침상에 앉는 연습, 침상밖으로 내려오기 위한 시도 등 자활을 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된다.
딸을 희생으로 얻어낸 생명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방치해서야 되겠느냐며 스스로를 채근하며 건강하게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물론 의료진들은 상태가 좋지 않아 적어도 2개월 정도는 입원기간을 예상하고 회복경과를 지켜보자고 했지만 마음은 이미 바빠지기 시작했다.
침상에서 발가락을 움직이고 다리를 서서히 펴고 굽히기를 반복하기 시작 하며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려고 노력하며 급기야 식사량도 늘고 화장실을 스스로 가기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등 본격적인 자활을 시작했다.
간호진이나 보호자에게 의지하며 침상을 내려가 보조 변기에 앉아보기도 하는 등 하루하루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였고 비록 복수가 다소 남아 있었지만, 점차 몸무게(52~53 kg) 도 늘더니 이제는 부축을 받고 잠시라도 서 있을 수 있었고 벽을 붙잡고 스스로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 35일쯤 드디어 화려한 병실 밖 외출은 시작되었다.
아내와 워커를 동시에 의지하며 침상을 떠나 병실복도로 나가는 시도를 시작했다.
워커를 의지하며 바라본 병동 내 이곳저곳은 정말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나의 모습은 의료진의 격려로 더욱 더 큰 힘이 되었고 갓난아이가 하루하루 달라지듯 내 모습도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하루에 두 차례 10분 정도 걷고 서있는 운동은 나에게는 정말 힘든 고역이었다.
불과 퇴원 5일 전부터 간신히 일어서고 걷고를 반복한 후 황달과 간 기능이 아직 정상수치는 아니었으나 퇴원명령을 받을 수 있었다.
- 드디어 2007. 3. 14일 39일 만에 퇴원을 하다.
이 얼마나 감사함인가.
이곳을.. 이 엄청난 고통을...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 내가 살아서 나간다니... 그동안의 중환자실, 준중환자실, 그리고 2인실에서의 고통과 긴장과 좌절과 절망은 오간데 없었다.
그 순간 이제 희망과 용기와 승리만이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퇴원이라고 해도 휠체어를 의지한 체 로비 앞에서 승용차로 광주까지 한 차례도 내리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 아! 그리운 내 고향, 정든 나의 집
집 근처에 들어서자 어머니와 둘째, 그리고 큰 누이가 미리 연락을 받고 대문 밖까지 마중을 나와 계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된 채로 그저 눈물로 인사를 대신한다.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그동안 수많은 세월동안 나의 친구였던 화초와 분재들... 그리고 겨우 내 삭막했던 수련들과 감나무 등이 봄을 치장하느라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를 반겨주었다.
살아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주인 없는 동안 너무나 외로웠을 그들에게도 눈맛춤을 하였다.
마침내 죽음을 무릅쓴 전쟁에서 당당히 살아 돌아 왔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퇴원 후에서도 대변을 제외한 일체의 거동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침상에 누워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퇴원은 하였다지만 여전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고 병실생활 보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밤마다 잦은 소변 때문에 일어나기를 반복한 것은 물론 거종이 불편하여 주간에도 소변기를 늘 곁에 두어야 했으며 이런 소변통을 비우러 다니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아내의 도움이 대부분 이었지만 그래도 가급적 아내를 깨우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래도 교육받은 대로 철저한 음식섭취 덕택에 혈당은 퇴원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정상수치로 되돌아와 인슐린을 쉽게 중단하게 되었다.
딸은 그동안 잦은 병치레를 하면서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여 주요대학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부모의 바람대로 매사에 충실하고 모범적이어 나무랄 대가 없다.
퇴원 후에도 여전히 아내의 나에 대한 위생관리는 철저했다.
의료진의 권고 보다 항상 더 타이트한 관리를 하였기에 때론 투정을 부리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이 만큼 회복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또 다른 합병증이 서서히 목을 조여 왔다.
그동안 몇 번의 외래를 다니며 점차 안정되어 가던 중, 2007. 4월 말부터 온몸이 조금씩 따갑고 가려운 증상이 반복되어 가까운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해 보았더니 간 기능이 50~70 정도이고 황달이 2.2 정도로 퇴원 시 보다 다소 상승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담도 협착이나 거부반응을 예상하고 서둘러 외래 날짜를 앞당겨 검사를 했다. 그 rif과 AST/ALT 50~70, 황달 2.4 로 로컬에서 보다 더 상승하였기에 응급으로 담도협착과 거부반응 검사(초음파 검사)를 하였으나 별 이상이 없어 가벼운 거부반응일 가능성이 있다며 면역억제제를 증량하고 다시 귀가했다. 당시 담도협착이 힘든 합병증이라는 사실을 여러 매체를 통해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기에 미리 겁을 잔뜩 먹었던 것이 사실이다.
벌써 담도협착이라니... 아니겠지... 절대 그럴리가 없을 것이라고... 천우신조로 담도합병증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검사결과와 의사의 소견을 믿고 내려왔던 것인데, 귀가 후 3일이 지나도 가려움증은 줄지 않았고 눈동자에 황달증상이 약간씩 나타나기 시작하기에 즉시 재입원하게 되었다.
입원 후 디시다(핵의학) 검사 결과 담즙흐름이 대체적으로 원활하다는 결과가 나온 때만 해도 가벼운 거부반응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부반응 진단을 위한 조직 검사를 하였으나 그 결과는 거부반응도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진도 당분간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담도협착만은 제발 아닐 거라고.. 아니 절대 아니 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또 기원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틀간 황달수치는 3 ~ 4를 오르내리더니 3일째 되던 날에는 5까지 상승하고 말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판단되어 직접 담도 확장치료를 해보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콧구멍을 통해 시술하는 ENBD와 췌담도 내시경술(ERCP/ERBD)의 장단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심사숙고한 끝에 ERCP로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내시경 기구가 식도 끝의 괄약근을 넘어가는 단계에서 출혈이 발생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혈을 마친 후 병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무사함을 바라고 바랐지만 1차 확장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간경화 때부터 발목을 잡고 있던 낮은 혈소판 수치와 이식 후 면역억제제로 인해 약해진 내부 장기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제 남은 방법으로 경피적 담즙배액술(PTBD)을 할 수 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런 와중에 황달 수치는 7. 8. 9까지 상승하더니 급기야 15까지 급상승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빌리루빈 수치의 급상승은 담도협착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행이 도관을 협착부위까지 삽입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담즙의 정체로 인한 협착부위의 부종으로 협착부위를 통과시키지 PTBD 시술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다음 날 혈액검사에서 황달 수치가 5점대로 급강하 하였다.
이제 원인은 명백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며칠 후 재 시술을 통해 무사히 도관을 십이지장까지 통과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담도확장술(사이즈 8.5fr)은 그래도 성공리에 끝낼 수 있었다.
시술 후 3일째 되던 날 황달 수치가 3점대로 떨어져 퇴원을 하게 되었고 이 후 2개월 후 7월에 재 확장술(사이즈 10.2fr)을 하였다.
그러던 중 6월에는 우측 팔부위에 좁쌀 같은 두드러기가 띠처럼 생기고 근육과 골격에 통증을 느꼈다. 스스로 대상포진으로 판단되어 전남대병원에서 경구용 약제를 처방받아 완치하기도 하였다.
이런 나를 보고 아내는 남이 하는 것은 하나도 안 빠뜨리고 다 한다고 핀잔을 주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 후 면역억제제 용량도 다시 줄기 시작했고 몇 가지 보조 약물도 중단되었으며 PD도 줄고 끊고 하는 가운데, 8월부터 9월 사이에 담도염으로 판단되는 고열로 인해 3차례 응급실행을 하는 등 담도확장을 진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의 입원 생활은 거듭되었다.
초기에 원인을 제거한 담도협착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좋은 간기능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 결과 점차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할 수 있어서 삶의 질이 이식 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얼마 후 2008. 12월초에는 담도확장관도 영원히 제거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이 행복감은 천사 같은 딸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죽는 날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투병생활은 이식 전의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훨씬 나아진 삶의 질에 얼마나 만족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도 살아간다.
소중한 내 딸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가.
다시 한 번 지금의 이 행복이 천사 같은 딸의 희생을 통해 얻은 결과이기에 앞으로도 결코 내 마음대로 소홀이 할 수도 없고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 본다.
오늘도 간이식인의 정보의 장이라 할 수 있는 리버가이드와 삼성병원 두사랑회 온라인 카페에서 동병상련에 처한 분들과 정보를 공유하곤 한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아내의 조그만 사업에 참여하며 적극적인 제 2의 삶을 준비하고 꿈꾸고 있다.
이제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보상 받으며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게 되었다.
- 진정 그들은 프로였다.
수술 후부터 지금까지 서울삼성병원 의료진들의 의료 수준과 서비스 전반은 매우 신뢰감을 갖을 수 있었으며, 그 분들에 노력에 의해 소생한 생명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 오래도록 건강을 잘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지면을 통해 집도의 이신 조재원 교수님, 이석구 교수님, 그리고 당시 주치의 김민국 선생님을 비롯한 권준혁 교수님, 최규성 교수님, 박재범 교수님, 그리고 중환자실 간호진, 이식병동 간호진의 애정 어린 치료와 간호에 고마움과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간이식인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한국 간이식인협회가 하루 빨리 사단법인으로 인가. 등록되어, 회원 상호간의 공용된 정보공유를 통해 더욱 체계적이고 세밀한 권익이 증진되기를 기대해 본다.
모두의 역량을 함께 모아 그 날을 앞당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오늘을 있게 해준 어머니와 아내, 둘째 민희, 그리고 무엇 보다 한없는 큰 사랑을 준 맏이 민지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간이식인의 삶이 오늘 보다 내일이 더 행복해지길 바라고 확신하면서 이만 맺습니다.
형식이나 절차도 없는 장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글을 다 마치고 보니 A4 용지로 17매가 넘어 순간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떨어지더라도 리얼리티를 배가 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그대로 올립니다.
2008. 10. 22
첫댓글 너무나 힘든 과정을 지나오셨네요. 지금까지의 과정을 너무나 실감나게 표현하셨군요. 가족의 깊은 사랑과 함께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저도 앞으로 한달 보름뒤면 첫돌이 됩니다. 그 때쯤 간이식투병기를 써올릴까 하고 생각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간이식인 모두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적인 투병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소중'''한 생명...따님의 갸륵한 마음.......잘이겨내셨습니다.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이것이 우리 이식인아내들의 한결같은 마음입니다...,3년6개월전 제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현재 가려움증이 한달 반정도 계속되고 있어 담도 문제가 아닌가하고 걱정하며 다음주 화욜 검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긴글이라 더더욱 생생하게 격으신일을 실감할수 있었습니다. 지난기억 되살리기 싫어 망설이고 있는 제게 부끄러운 맘이 들게 하는군요.남편의 상태가 호전되는대로 님처럼 용기내어 간병기를 올려 보겠습니다. 님의글을 읽고 많은분들이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엇으리라 생각됨니다. 오래도록 건강 유지 하셔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담도문제 잘 되시길 빕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시간에 투병기도 읽고 싶습니다.
읽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ㅜ.ㅜ 훌륭한 따님 두셨네요.. 정말 고생하셨어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예, 감사합니다. 기증자는 생사를 떠나 누구나 존귀하다는 생각입니다.
다들 어렵게 이식을 하게 되죠 .....가정에 늘 건강과 웃음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님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의 저도..딸을 가슴에 품은지 3년이 되었답니다.이젠 4년차..순간순간을 떠올리면 가슴 아프고 아이에게 미안함이 많지만..자식으로 인해 새생명을 누리는 만큼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그 어느것이 귀하지 않겠어요..허지만 자식에게 받은 사람 들은 더 철저 하게 하시는것 같아요..많이 아프신 만큼.. 다른 환우님들께도 좋은 말씀과 희망을 나누어주셔서 감사 합니다..건강 하시고 행복하세요*^^*
왕비님도 따님에게서 받으셨군요. 역시 흉터걱정이 크실테지요. 따님에게 잘 해드리세요.
님의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내자신을 보게 되네요,이렇게 힘든 과정 겪으셨는데 앞으로 뭐가 힘들겠어요.님의 글을 읽고 또 다른 우리 환우들이 용기와 희망을 가질수 있겟네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예, 모두들 본인의 수술 당시를 회상하셨을 겁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읽으면서도 자꾸 눈물이 나는 이유는?.. 저도 딸이 이제 고1년인데 이식준비한다고 밤마다 운동중인데요 오래오래 건강잘 챙기시고.. 딸이 커서 결혼도 하고 손주,손녀도 볼때까지.. 참고로 우리 딸은 아빠한테 특급 사랑이라네요 전 1번째구요~~
남군께서 이제 이식준비 중이시군요. 따님이 고1이라니 너무 가슴시려집니다. 부디 수술 잘되시길 빌어드릴께요. 힘네세요. 그리고 슬퍼하지도 마세요.
그동안 좋은 조언에 늘 감사하였는데, 역시 투병생활도 만만치 않았군요. 님의 투병기를 보니 내 경우와 매우 흡사하여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표현이 적절치 않아 일부 정제된 듯한 문장은 뭔가 찐한 사연도 있는듯. . .나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네요. 내게 새생명을 준 둘째녀석도 이번에 대학진학 준비를 합니다. 아무튼 남보다 긴 중환자실 생활, 그리고 담도협착으로 힘든 투병, 등 남의 일로 보이지 않습니다. 따님과 가족과 더불어 행복한 미래를 열어 가시기 바랍니다. ^.~
님께서도 고생을 많이하셨다니... 동질감을 느낍니다. 건강 잘 지키시고 좋은 소식 늘 기다릴께요.
다시한번 건강의 소중함을 느낌입니다.
다들 그러실 거에요. 늘 건강하시길 바라께요.
결코 쉽지않은 수술과 그 후 회복되어가는 과정!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그리고 다가오는 12월엔 정말 담도 문제에서 영원히 해방되실 겁니다. 제가 보기엔 현재까지 고생하신 것은 앞으로의 삶을 완전하게 하려고 그랬나봅니다. 정말 앞으로 평생 건강하실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천사인 따님도 앞으로 항상 건강과 행복과 평화와 즐거움과 밝음과 사랑만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조그마한 사업 앞으로 더욱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예, 이번 달 초에 담도관을 제거 할 수 있었으나 제가 스스로 2개월 연장을 한 셈입니다. 자주 뵙고있어 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경을 딛고 생환하심을 축하합니다.저도 수술 당시의 상황이 주마등처럼 지나 같읍니다.잘 읽었구요.저도 이식후 3년 경과되었읍니다.일주전에는 12시간동안 설악산 대청봉 무박산행도 하였구요.늘 건강하시길 .....
너무 건강 하시군요. 넘 부럽습니다. 그래도 자주는 욕심을 내지는 마십시오. 평생을 주의해야 하잖아요.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특히 따님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어른스른 모습,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등은 한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어떻하여야 하는 지를 다시한번 느끼게 하여 주셨습니다. 더욱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예, 어느 가족이나 최선을 다 한 결과로 이곳에서 모두가 삶을 확인하고 있는 거겠지요.
고생많으셨습니다....지금은 많이 건강해지시고 행복하신 것 같아 제가 다 마음이 흐뭇합니다^^ 저는 수술한 환자가 아니고 저희 언니가 수술을 했지요...조카의 기증을 받아서 말입니다...넉달을 조금 넘겼지만 지금까지도 마음은 놓질 못합니다...정말 리얼하게 세세하게 적어주신 글들이 가슴을 울립니다.......항상 건강하시고..가족 모두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언니의 건강을 위해 자주 카페에 들르시는 군요. 자매간의 온정이 느껴지내요.언니의 건강을 빌겠습니다.
그때의 생각이 주마등 처럼 지나갑니다. 고 3 이던 제 딸아이가 아빠 내가 해 줄께 걱정마 하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엉엉 울었습니다. 결국 군대가 있던 제 아들 내미가 첫휴가를 나와서 자기 간을 제게 이식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살자고 아이들 배를 가르나 라는 그때 생각만 하면 목이 메입니다. 어려운 과정 잘 극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세요..
예, 감사합니다. 건강하시지요? 기억력의 문제로 고민하지 마세요. 운동 하시고 무엇이든 읽고 스트레스 줄이시고.. 하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너무도 힘든 상황을 극복 하셧내요. 저두 어린아들 (대학 1년) 19세 된 아들을 수술장에 보내고 가슴으로 통곡하여 아빠를 살리구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수술경과가 기대이상으로 좋아 새롭게 새생명을 얻은 남편과 예쁜딸 아빠를 살렷던 미남 아들과 하루 하루 너무 감사하게 살아가고 잇습니다. 모든 이식인 가족들이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낄겁니다, 가슴이 찡하고 마치 그때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네요. 이뿐 자식들에게 얻은 생명 잘 관리 하셔서 모두 모두 건강한 삶이 지속되길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해피투게더님두 앞으로좋은일만 가득할거라 믿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려요 .
예, 투병기를 통해 다시금 당시의 수술 과정을 회상하시고 가족간, 인척간의 고마움이나 사랑 ,우애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해피투게더님의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저도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네요. 어렵게 이루신 새로운 삶 하루하루 즐겁게 생활하시고 천수를 누리시기를 기원드립니다. ()()()
예, 심상님. 건강한 모습 카페 활동을 통해 자주 확인하고 있습니다.
힘든 투병기를 읽고 나니 06년2월 저도 그 때가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네 딸아이와 아내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남동생이 먼저 들어간 40여분 뒤 수술실로 마지막 내 시야에 들어온 초록가운들의 여러 사람들, 차가운 금속덩이들의 중압감, 양손을 대자로 벌리고 "시작합니다" 였나요,, 40일간의 투병기가 주마등 같습니다. 투게더님 저도 02년 2월 현대병원에서 간경화 진단 및 토혈로 식도정맥류 결찰술 후 30일 입원 했었습니다. 그래서 작일 내장산모임에서 안면이 있다고 하셨나 봅니다. 앞으로 좋은 소식으로 오래 행복했으면 합니다.
또 뵙네요. 광주 지역 모임에 적극 참석하시어 좋은 정보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님의 글을 읽고 그러했듯 저 역시가슴 저립니다. 올해 4월 둘째아이를 출산하고 청천벽력같이 8월에 들려온 간암소식에 매일매일 눈물바람으로 지냈던 시간들이 바로 얼마전임에도 꿈만 같습니다. 부부중 한사람이라도 건강해야 어린아이들을 부양할수 있을거라며 반대했던 이식수술을 하면서 수술당일까지 젖을 짜내야 했던상황상황이 돌이켜볼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아직도 아이들을 여기저기에 맡겨놓고 있는 현실이 가슴시리지만 님의 투병해나가는 모습이 참으로 힘이 됩니다. 앞으로 저희 남편도 님처럼 꿋꿋이 잘 이겨내고 건강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늘 조심하시고 행복하십시요
부군께서 이식하신지가 얼마되지 않으셨군요. 앞으로도 관리잘하세요. 남자분들은 아내의 간호 매우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여성분이 수술하신 분들은 대부분 홀로서기를 하셔야 하구요.
훌륭하세여..님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가족을 위한..그리고 님을 위한 최선이라고 생ㅇㅇ각되네여..건ㄴ강하세여..
아직도 님의 아이디가 생생합니다. 횡경막에 물이차신 것은 좋아지셨지요? 아마 이 후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건강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 뵐께요.
저도 만3년전(왕비님과 하루 차이)에 어린 아들(만16세)의 간을 받고 아주 건강하게 생활을 잘하고 있답니다.투게더님의 투병기를 읽고 나니 감회가 새롭네요!!거의 누구나 그런 "생체 실험"하는 "인간 마루타" 같은 생각을 한편으론 하나 봅니다.아무튼 투게더님에 비하면 저는 아주 빠른 회복(수술후 26일만에 퇴원)을 한셈 이네요!!!그리고 아무런 사고없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음에 감사를 해야 겠네요!!
예, 참 고생들 많이 하고 있지요. 이곳에서 고인돌님의 글 자주보고 있다는 것은 건강하시다는 반증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