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2일, 순종과 고종의 처소인 창덕궁과 경운궁 부근 2600여명의 일본군과 헌병들이 30m 간격으로 늘어서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시종원경 윤덕영은 순종에게 일본과 '병합' 준비가 끝났으며, 조약 체결을 위한 전권위원으로 총리대신 이완용을 임명하는 어전회의가 필요하다고 알렸다. 이완용과 데라우치(寺內正毅) 통감은 이미 8월 16일부터 병합 협상에 들어가 18일 내각회의에서 조약 내용과 절차를 확정 지었지만,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 직무상 황제를 측근에서 보위하는 민병석과 윤덕영에게조차 어전회의 당일 오전 10시에야 어전회의 안건을 통고했다. 순종은 "대세가 이미 정해진 이상 속히 실행하는 것이 좋다"면서 당일 오후 1시 어전회의를 개최하겠다는 칙명을 내렸다.
오후 1시, 칙명에 따라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시종무관장 이병무, 황실 대표 흥왕(興王) 이희(고종의 형),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이 입궐해 황제를 기다렸다. 순종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민병석과 윤덕영을 데리고 내전(內殿)에 출어(出御)했다. 8월 18일 내각회의에서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며 '병합'에 유일하게 반대했던 학부대신 이용직〈왼쪽 사진〉은 수해 위문을 명분으로 지방 시찰을 명령받았지만 이질에 걸렸다는 핑계로 지방에 내려가지도, 어전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채 가택에서 칩거했다.
순종은 통치권 양여(讓與)를 선언하고 조약체결 위임장에 서명하고 국새를 찍게 하여 이완용에게 건넸다. 이완용은 데라우치와 합의한 조약안을 한 조항씩 설명했다. 합의 과정에서 이완용의 주장이 반영된 것은 일본이 '병합' 이후 황제의 칭호를 '태공(太公)'이라 하려던 것을 '왕'으로 하기로 한 것뿐이었다. 데라우치의 보고서 '한국병합시말'에 의하면, 9명의 참석자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순종은 '흔쾌히' 조약을 재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종이 어전회의에 자신이 지정한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나타난 것을 보면 '흔쾌히' 재가했다는 데라우치의 보고는 믿기 어렵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시종원경 윤덕영이 국권을 양여하는 조칙을 만들어 황제에게 어새를 찍을 것을 요청하자, 황제는 흐느끼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황제가 침실로 들어간 틈에 몰래 어새를 찍어 이완용에게 건네주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문에 근거한 기록일 뿐 입증할 자료는 없다.
오후 4시 총리대신 이완용은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을 대동하고 통감관저에서 전권위임장을 보여준 다음 준비된 조약문에 서명했다. 조약의 공포일은 애초 8월 26일로 정했지만, 그 다음 날이 순종의 즉위기념일이었기 때문에 8월 29일로 확정되었다.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체결된 조약은 비준에 해당하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일본은 순종 황제가 통치권을 양여한다는 조칙문으로 비준을 갈음하려 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조칙문〈오른쪽 사진의 왼쪽 문서>(오른쪽 문서는 일왕의 조서)에는 어새는 찍혔지만 황제 서명이 빠져 있다. 조약 공포일까지 순종이 서명을 거부하자 데라우치는 어새만 찍은 채 조칙문을 공포한 것으로 보인다. 합방 조약은 형식적으로도 무효였던 것이다.
첫댓글 영화 한반도를 다시 봐야겠습니다. 국치를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