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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마지막회+외전)-
2년 후.
"은하, 왔어."
오랜만에 모인 셋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무덤덤한 목소리로 툭 던져 놓은 대화주제에 태하는 순간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태하는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잘라 먹으며 애써 신경 쓰지 않은 척 했다. 민서가 웬일로 식사하자고 전화를 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아챈 태하였다. 만약 이 자리가 ‘이은하’때문이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뭐? 너 어떻게 알아?"
"연락 왔어."
"뭐? 왜 이제야 얘기해! 난 연락해도 연락이 잘 안 되던데."
민서는 민재에게 알려줬다간 곧바로 태하녀석에게 이야기가 들어갈 게 뻔 하니, 은하에게 연락이 왔지만 알리지 않았다.
"네보단 내가 더 좋다는 거지."
"전화해봐야겠다."
"하지 마. 지금쯤 하늘에 있을 테니."
지금쯤 하늘에 있을 테니-
지금 이 한국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였다. 괜히 시계를 슬쩍 보는 태하를 보는 민서는 피식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궁금하고 보고 싶을 텐데도 잘 참고 있는 녀석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태하가 이러는 이유를 당연히 이해하지만 은하도 이해를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저번에 전화했었을 때는 반 년 더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우리 결혼한다고 했거든"
"뭐야, 결혼식... 아직.. 아, 그럼 다시 갈 수도 있다는 거네?"
민서가 눈치를 주자, 민재는 문득 옆에 앉은 태하를 살폈다. 태하는 민서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이은하’만으로도 복잡해보였다. 사실 은하는 우리의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은하에게 결혼식이야기를 했다면 당장 일을 그만 두지는 못하지만 잠깐 왔다가 다시 갈 수도 있었을 테고 민서도 은하가 예정대로 6개월 후에 온다면 6개월 뒤로 미룰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빨리 일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오길 원했다. 민서가 태하에게 은하가 우리의 결혼식 때문에 들어온다고 거짓말 한 이유는 태하가 여전히 은하를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글쎄. 그건 당사자가 물어봐야지."
당사자라는 말에 태하는 고개를 들어 민서와 마주쳤다.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이 순간 지나갔고 다시 박태하 특유의 냉정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나랑은 상관없어."
"누가 뭐라고 했나. 그렇다는 거지."
"나 먼저 일어선다."
태하는 입을 대충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은하가 온다.
잊으려고 했지만 잊히지 않은 그녀가 오고 있다.
물론 내게 오기 위한 게 아니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자신만을 보겠다고 했던 그녀였다. 그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미련하게도 여전히 가슴 언저리에서 미치도록 뛰는 심장이었다.
아직도 난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이젠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난 아무 것도 버리지 못했다. 흔하디흔한 이름조차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이렇게 미치는데, 이은하를 보고 흔들리지 않을 자신 있을까?
* * *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2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은 곳에는 먼지뿐만 아니라 그 동안의 추억과 아픈 기억들도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기에 당당히 그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은하는 불을 키기 위해서 익숙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그리고 스위치를 켰다. 어두컴컴해진 방 사이로 환한 빛이 밝혀지자, 은하는 웃기 시작했다.
'웰컴 투 한국! 이은하! 반갑다!'
라고 써져 있는 플랜카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은하의 웃음소리에 방에 있던 민재와 민서가 폭죽을 터트리며 나왔다. 반갑다며 민서가 은하를 안았고 뒤에 서 있던 민재는 은하의 짐을 얼른 받아 챙겨 거실로 끌어 놓았다.
"먼지는 대충 치우긴 했지만 대청소는 해야 할 듯하네."
"응. 그래야지. 아! 맞다! 결혼 축하해!!!!"
은하는 박수를 치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가장 큰 가방을 자기 앞으로 끌고 와 '어디 있더라'하며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민서는 안심을 했다. 2년 동안 확 바뀔 수는 없지만 은하는 많이 밝아져 있었다. 민재 또한 고등학교 때 보았던 은하의 모습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짠!"
손아래에 나무로 깎아 만들어진 투박한 인형이 손에 들려져 있었다. 투박하게 생긴 것이 예쁘지는 않지만 꽤 신비로웠다.
"이게 뭐야?"
"히히...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결혼 축하선물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들을 다 모아봤어! 이 인형은 어느 부족에서 얻은 건데, 두 사람의 행복을 의미한데. 여기 보이지? 가슴 안쪽에 이 무늬. 이게 행복을 의미한데. 그리고 이 인형의 옷은........"
은하는 신이 났는지 인형에 걸린 액세서리서부터 시작해서 모양까지 일일이 설명해줬다. 민재와 민서의 행복을 저렇게 나도 바라고 비는데 어떤 신이 안 들어줄 수 있을지, 아마도 이 둘이 행복하다면 은하의 이 수고스러움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은하야. 정말 잘 간직할게."
"응! 잘 지내고 있었지?"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얼굴 까먹을 뻔했어."
"히히.. 그래서 왔잖아!"
"태하한테는 연락해봤어?"
민서와 이야기하는 도중, 민재가 말을 꺼냈다.
"아... 아직. 긴장돼서 연락을 할 수가 없어."
'이은하, 긴장되는 게 아니라 두근거린다고 표현해야 하는 거야.'
민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하라고 말했다. 태하가 은하가 떠난 뒤, 얼마나 힘이 들어 했는지 은하는 모를 것이다. 술에 취해 경찰서에 들어갔던 적도 있었으며, 밥도 먹지 못하고 일만 주구장창 한 나머지 쓰러지기까지 했었다. 여러 여자들을 만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일회성에 불과해보였다. 하지만 그 생활도 한 달 만에 종료되었다. 그리고 이은하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사람처럼 그는 더 냉정해졌고 무감각해졌다. 그렇게 그는 은하에 대한 감정을 꾹꾹 눌러 깊은 곳 어딘가에 숨겨 놓은 듯 해보였다.
"만나야지. 이젠 난 단단해졌으니깐."
"힘들지도 몰라. 꽤 무섭거든."
"각오했어! 당장 보고 싶어."
표현도 솔직해진 은하였다. 여전히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했지만 말이다.
"말은 그지 같이 해도 아마 지금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민재의 말에 은하는 벌떡 자리에 일어섰다. 그리고는 지금 보러 가야겠다며 문으로 향했다.
"화끈한데, 이은하?"
"박태하가 너무 모질게 그럼 나한테 말해! 엄청나게 패줄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하는 옷을 챙겨 태하의 집 앞으로 향했다. 딱 한 번, 떠나기 전에 태하를 보기 위해 찾아가봤던 집이었다.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지만 은하는 그 앞에서 태하가 나오길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결국 나오지 않아, 은하는 태하를 보지 못한 채, 떠나야했다. 이젠 시간이 많으니, 나오지 않아도 계속해서 기다릴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은하의 가슴은 조금씩 긴장하기 시작했다. 바짝 조여진 가슴이 미치도록 뛰고 조였다. 그리고 몇 분 후, 태하의 집에 도착했다.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그의 집은 10층에 위치해 있었다. 위로 올려다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은하는 태하의 집 앞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그냥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몇 분 후 지나자,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은하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제 볼 수 있어.'
보는 게 문제였기 때문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지도 못했는데, 막상 태하를 보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금방 사라졌다. 은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태하의 발걸음이 너무 느리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무작정 뛰어 태하 앞에 섰다.
"태하씨."
"누구?.....아."
술 냄새가 조금씩 풍겨 나왔다. 택시에 타자마자, 민재에게 태하가 자신이 오늘 돌아왔다는 걸 알고 있다고 문자가 왔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태하를 다시 한 번 불렀지만 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하씨. 잘 지냈어요?"
"......."
"난 그러니깐"
어떤 말도 준비해놓지 못한 상태이다 보니, 은하는 횡설수설 했고 갑자기 태하의 비틀거리는 움직임에 태하의 옷깃을 잡는 은하였다. 그리고 팔을 거세게 떼어 놓더니, 은하를 지나쳐 갔다.
"돌아왔어요."
터벅터벅 걷는 모습이 꽤 위험하다.
"잘 지냈어요? 난 잘 지냈어요.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먹었어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혹시 저 때문인가요? 아니....그러니깐"
은하는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며 이런 저런 말을 뱉어 내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깐.. 그런 게 아니고 그니깐 내 말은...."
"........."
"그니깐, 전요. 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위태롭게 걷던 발을 멈추는 태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섰고 은하를 바라보았다.
"..... 태하씨는 아니더라도 난 괜찮아요. 하지만 보고 싶어서 왔어요."
태하의 표정에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은하는 알아챈 것은 아니었으나, 태하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 위해 말했다.
"태하씨가 보고 싶어서 한국에 왔어요."
"나 때문에?"
"보고 싶었어요."
오늘 돌아온다는 말에 당장이라도 공항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얼마나 술을 들여 부었는지 속이 계속 좋지 않았다. 태하는 자신에게 전화가 오면 어떡할까? 자신을 혹시라도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술을 들이부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걱정해도 시간은 지나가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은하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밤은 너무 깊었다. 그리고 태하는 은하를 걱정하는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혹시’라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에 돌아가면서 태하는 생각했다. 자신은 여전히.
‘이은하를 사랑해.’
“박태하씨.”
‘여전히 사랑해.’
“이젠 제가 기다릴게요.”
‘사랑해.’
“기다려도 되나요?”
- 외 전 -
2012년 12월 25일.
모두들 좋아하는 크리스마스였다. 길거리에서는 연인들로 북적였고 캐럴이 온 거리를 울려 퍼졌다. 화려한 조명들이 온 세상을 뒤덮이고 있었고 곧 눈이 올 것처럼 날은 우중충했다. 갑자기 서서 하늘 위를 쳐다보다가 다시 걸었다. 삼촌에게 줄 책을 여러 권 사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삼촌의 당당하고 멋졌던 모습은 사라지고 한 명의 평범한 아저씨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진하는 이 모습이 더 인간답고 좋았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거냐?”
“당연하지. 참,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깐 1시간이나 면담 가능하데.”
“계집애처럼 1시간이나 나랑 수다 떨 생각이냐?”
“뭐야, 나도 이것만 던져주고 가려고 했거든?”
금방 간다던 진하는 1시간 모두를 다 쓸 예정인 듯 안수만에게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진하가 잠시 쉬는 틈에 말을 꺼냈다.
“이은하는 만나봤어?”
수사를 받기 시작할 때부터 자신에게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이제야 말을 꺼내는 수만이었다.
“아니.”
“그럼 만나서 이 편지를 전해주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편지를 진하에게 전했다.
“이게 뭐야?”
“읽어봐.”
은하야.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혼자서 스스로 이 세상과 싸우고 있겠구나. 이 아저씨를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 원망이 또 다시 너의 삶의 전부가 되지 않길 바란다면 이 아저씨의 욕심이 너무 클까? 아저씨와 함께 지낸지 10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너에게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지. 네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상관없는 널 그저 이용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저 넌 무엇이 되었든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랬으니깐. 평범하게 사람과 어울리며 살고 싶어 했던 널 그저 이용했단다. 그러니 이 일이 끝난 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말고 잊고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넌 그저 내 덫의 일부였다는 걸. 내 계획에 널 이용한 거니, 날 용서하지 말거라. 안수만이 왠지 스스로 내 덫에 걸리려 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과격한 방법을 쓸까 한다. 그래서 말인데... 이 일이 끝나고 네가 했던 부탁은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미안하구나. 은하야 항상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세상에 날개를 피길 바란다. - F. 김정태 - |
‘안수만이 왠지 스스로 내 덫에 걸리려 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과격한 방법을 쓸까 한다.’
‘덫에 걸리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이 말은 안수만이 김정태의 계획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이 편지가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충분한 죄 값을 치루고 싶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안수만의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수만은 그러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진하는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안수만은 진하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뻔히 다 안다는 듯, 진하가 물어볼 질문에 미리 대답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계속해서 죄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고.”
“언론을 믿는 거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김정태의 계획을 완벽하게 끝내는 방법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하가 꽤 놀랐는지 언성이 높아졌다.
“이 편지를 이은하에게 꼭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해다오.”
“....알겠으니깐! 빨리 말해요!”
“처음에는 정태의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피하려고 해도 그 덫은 날 물고는 놓아주지 않았고 그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인 지부터 알아야했다.”
“그래서 알았지만 지금 그 모든 일을 했다는 거예요?”
“어떤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태는 꽤 머리가 좋았던 녀석이었고 내가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의 완벽한 덫을 쳤지. 그리고 내가 알아챈 그 순간, 난 그것이 죄인지도 모른 채 그 덫에 걸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어.”
“말도 안 돼.”
“그 이후 난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 난 피하지 않았다고 하면 나를 위한 변명일까?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한도 끝도 없어서 내가 저 지른 죄를 덮으려 중간에 정태에게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기도 했었지. 흠.... 하지만 죄라는 건, 알면서도 행했기 때문에 죄인 거야.”
“하지만!!!!!!!!”
“.........”
“그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도 많잖아요. 이렇게 까지 크게 만들 필요는 없었잖아요! 왜 삼촌만 생각해요! 내 생각은? 우리 엄마 생각은 안했어요?”
수만은 한숨을 쉬더니, 한 참을 진하를 쳐다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를 죽인 건 실수였지만 사실이었으니깐.”
“그녀를?”
그 때를 회상하듯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태와 나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었다. 그 날 밤에 난 일이 너무 많았고 그 회포를 풀기 위해서 동료와 간단히 맥주 몇 잔을 먹었지. 하지만 몸도 정신도 피로한 상태였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리고 차를 몰았고 몇 분 후에 사고가 났다. 내 차에 치인 사람은 바로 병원에 갔지만 곧 죽었다. 그녀가 정태의 아내였다.”
수만은 채워져 있는 수갑의 둥근 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가 느낀 그 좌절과 고통은 내가 어떻게든 보상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저 난 ‘실수’였고 그 실수로 인해 누군가 그렇게 괴로워할지 몰랐다. 그는 그 괴로움이 너무 컸는지 술로 인한 과대망상도 오던 것 같았지. 정신과 치료도 받았던 적이 있었고 자살시도도 여러 번 했던 것 같았어.”
“....과대망상? 자살?....”
“웹툰 내용은 이렇지 않았어요! 김○○ 부인은 ‘살해’당했고 그 살해 장면은....”
수만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이후로 수만이 정태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러 갔을 때에는 소문으로 들었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고 했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시점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눈에는 독기가 여전히 있었지만 입만은 웃고 있었다고 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수만은 말했다. 또한 자신이 기억하는 사건은 여기까지라고 말했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의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가벼울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버릴 만큼 크게 다가올 수 있다.”
“...........”
“미안하구나.”
“............”
진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난 끝까지 죗값을 치루고 나갈 거다. 정태가 느낀 고통의 값이니깐. 진하야, 힘이 들어도 어떤 순간도,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놓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피하지 말고 용서하고 용서 받으며 살아라.”
그래야 살아가면서 후회정도는 안 하지 않겠냐?
* * *
은하가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뒤에 은하는 진하를 만나 편지를 받았다. 그 동안 은하는 피하고 있었던 정태가 있는 곳에 갔었다. 편지를 꼭 손에 쥔 그녀는 웃고 있었다.
“죽으러 가는 마당에 제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어요?”
- 이 일이 끝나고 네가 했던 부탁은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편지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피며 은하는 그 날을 회상했다.
“아저씨. 이 일이 끝나고 부탁이 있어요.”
자장면을 후루룩 먹으며 눈은 은하를 향하는 정태였다. 거의 부탁한 번 한 적 없던 녀석이 뜬금없이 부탁이 있다는 말에 꽤 놀란 눈치였다.
“뭐야?”
“이 일이 끝나면....”
정태는 먹던 젓가락을 자장면 속에 숨겨 두고는 은하의 말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은하는 희미하게 웃으며 쑥스러운 듯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돼 주세요.”
“뭐?”
“잘해드릴게요.”
“싫다.”
다시 자장면을 후루룩 먹으며 말하는 정태에게 섭섭해 하는 은하의 모습을 보며 정태는 피식 웃으며 집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난 착한 딸은 싫거든. 떼쓰는 딸이라면 몰라도.”
어떤 삶을 살았던 자신의 인생의 반을 함께 해왔던 사람이었다. 추억이 될 만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자신을 이용했다고 하지만 정태는 자신을 가장 많이 걱정해준 사람 중이 하나였고 지켜주기도 했었다.
"잘 지내고 계시죠? 전 2년 정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냈어요. 여러 사람들을 만났어요. 모두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전 그 이유를 찾길 바랐어요. 사실 전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몰라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더라고요. 날 도와주고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고 그리고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걸요.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것보다도 더 필요한 게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더 행복해진다는 건, 지금 행복하다는 거니깐."
은하는 정태의 사진을 매만졌다.
“떼쓰는 딸 자신 있는데....”
‘아빠’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은하는 정태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빠’를 외치며 하늘에 있는 정태에게 들리도록 크게 소리치며 불렀다.
납골당에서 나온 은하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잠시 일이 있어 나왔어요. 왜요?”
“이은하씨?”
납골당에서 일하는 직원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은하에게 간단히 묻는 질문에 대답하고는 다시 귀에 핸드폰을 데었다.
“미안해요. 급한 일이 있어서.”
[당장 이리 와.]
“무슨 일 있어요?”
[싫어?]
“반겨주지도 않으면서...”
[..........]
“제가 가면 반겨 줄 거예요?”
[아니.]
납골당 언덕을 내려가며 은하는 ‘쳇’하며 가지 않겠다고 말하려는데 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
“반겨줄 거냐고요?”
[...... 안아 줄 거야.]
“네?”
[당장 와]
“.........”
[안 올 건가?]
“히히... 아니요! 가요!!!! 가요!!!!”
길어버린 은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르며 은하는 환하게 웃으며 빠르게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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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편이 너무 늦었죠....
아 끝내고 싶지 않았나봐요.
너무 힘들게 썼네요.
일주일 지나서 완결편으로 보낼 예정이에요.
여기에 있는 글들은 지울까 합니다. ^^
그 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다들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BIYA -
첫댓글 오래 기다렸어요 은하가 밝아진 모습보니깐 흐뭇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완결방에서 다시 읽을려구요 수고하셨습니다~~~!!
은하가...다시 태하옆으르ㅡㅎㅎ 참이쁜애들이예요^^
은하가 씩씩하고 밝은 모습으로 치유가 되어서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