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에 나섰던 시절을 추억하다.
고향에 돌아가 내가 태를 묻은 고향 집에서 옛집을 회상했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이었다. 할머니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시절들은 기억 속에 아스라한 채 희미할 뿐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집이 사라지고 마을의 공터로 변한 그 곳에 그 때 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기울어져 가는 모정과 아랫집, 그리고 흘러가는 시냇물, 그래, 할머니는 새벽마다 저곳에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다가 청수 한 그릇 떠놓고 소원을 빌었지,
나를 살게 하고, 나를 꿈꾸게 했던 고향, 한 방울 한 방울 비가 내리는 고향에서 한국의 강을 한 발 한 발 걸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 하면 나는 주저치 않고 어린 시절 덕태산 자락의 가는골과 시앙골, 할머니가 밭을 매는 그 곁에서 가재를 잡으며 보낸 그 시절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강은 항상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를 부르곤 했고, 그런 추억들이 가끔씩 나를 불러내 강변을 걷게 만든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추억을 두고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하나의 사건이 우리들의 추억이 도기 위해서는 얼마나 먼 과거지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추억의 그리움이 다시 포착될 수 없을 만큼 되려면 얼마나 먼 과거지사가 되어야만 합니까? 대개의 사람들이 이점에 관해서는 하나의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적으로 너무 가까운 것도 회상할 수가 없고, 또 너무 먼 것도 회상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계를 모릅니다. 어제의 체험도 나는 천 년 전의 과거지사로 밀어버릴 수가 있고, 또 그것을 마치 어제의 체험같이 회상할 수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에 실린 글이다.
그런 잊히지 않고 되살아나는 추억 때문에 나는 9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 강 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섬진강을 필두로, 금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 동진강과 만경강, 한탄강을 셀 수도 없이 답사했다. 어떤 때는 강에 마음을 빼앗겨 오랜 시간을 걷기도 했지만, 갔다가 돌아오면 그뿐 글은 써지지 않았다. 경치가 좋은 곳이나, 역사적인 곳만 돌아다니다가 오니, 말 그대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이고 주차간산走車看山이었다.
강 답사가라는 이름이 내 앞에 붙으니, 여러 단체에서 의뢰가 들어왔고, 한겨레신문사 문화 센터에서도 정기적으로 강 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강의 실체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강을 제대로 보지? 그때 떠오른 것이 강을 발원지에서부터 하구까지 천천히 걷다가 보면 강의 속살을 다 볼 수 있을지 몰라, 하는 한 가닥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부터 한국의 10대강 도보답사 계획을 세웠다. 남한에서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을 걷고 북한으로 들어가,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예성강, 청천강을 한 발 한 발 걷고자 했다. 그 계획을 세우고 강을 답사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역사속의 기록을 들춰 보니, 우리나라 역사상, 강을 답사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백두산이나 묘향산, 지리산, 청량산 등을 답사한 유산록遊山록은 있으나, 유강록遊江錄은 눈 씻고 찾아도 없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더니, 산과 달리 강은 인간의 삶과 직결된 것이라서 강을 답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 태어나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로구나. 하고서 천천히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비는 끝냈지만 실행이 말 그대로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2000년 6월 어느 날이었다. 사단법인 하천사랑운동(금강사랑운동본부)의 김동수 사무국장을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만나게 되었다. 그가 다닌 고등학교 동문 모임이 금강 지키기운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문득 느낌이 와서 내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 모임에서 나와 함께 금강을 발원지에서부터 금강의 하구인 군산 하구둑까지 걸어보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망설이더니 단체에 말해보겠다고 했다.
그 뒤, 하천사랑 운동의 김재승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번 걸어보겠다고 했다. 그는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 대령으로 예편 했다. 그 뒤, 아시아나 항공에서 7년간 기장으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2000년 가을 금강 답사를 시작했다.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 뜸봉샘에서부터 시작한 한국의 강 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
그러나 산길이나 다른 길과는 달리 강은 길이 끊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 예를 든다면 부여 부근 ‘지천’의 하류에는 다리가 없기 때문에 금방이면 건널 수 있는 길을 두 시간이 넘게 돌아가기도 했었다.
<논어>에 “배우고 때로 익히면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불역열호不亦說乎”란 글이 나오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돌아가는 것,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를 셀 수 없이 반복하면서 수도 없이 돌아갔던 그 길이 꿈속에서처럼 아슴푸레하게 떠오르지만 힘들었던 만큼 즐거움 또한 많았던 것이 금강답사였다.“
그랬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5만 분의 1지도에 의지해서 한 발 한 발 걸었던 우리나라의 강 길이었다. 지치고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나는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중의 한 구절을 얼마나 여러 번 되뇌었던가.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나의 맨발이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먼저 감각이 앞서지 않은 지식知識은 그 어느 것도 나에게는 소용이 없다.”
앙드레 지드가 책 속에서 말한 이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고 시작한 강 따라 걷기를 힘에 겹다고, 갈 길이 너무 멀다고 멈출 수야 없지 않은가?
열 나흘 간에 걸쳐 금강을 무사히 걷고 그 다음해 봄에 <섬진강>을 아흐레 만에 걸었다. 4월부터 8월까지 <한강>을 <사람과 산>에 연재하며 열엿새 만에 걸었고, 그리고 <낙동강> 열엿새, <영산강>은 닷새 만에 혼자서 걸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짙은 안개 속같이 보이지 않던 글이 강의 발원지에서 하구까지 천천히 걷다가 보니 다 보였다. 그때 보고 듣고, 다시 공부를 하니, 대개 두 달 만에 각각의 독립 된 책이 써졌다. 천천히 걸으면서 전체를 본다는 것의 중요성을 나는 <한강> <낙동강><금강> <섬진강> <<영산강>을 걷고 책을 내면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