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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48
근래에 종종 생긴 현기증 때문에 잠시 눕겠다고 했던 은이 깜빡 잠든 사이였다. 장 상궁이 살며시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은을 깨웠다.
“마마, 잠시 일어나보소서.”
“...하늘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이상 깨우지 말라 하질 않았는가.”
마치 잠투정을 하듯 은이 볼멘소리를 낸다. 장 상궁은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은을 채근한다.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까무룩 까무룩하던 은은 장 상궁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경험했다.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와 계십니다. 마마.”
“........!”
급히 이불을 채내며 몸을 일으키는 짧은 순간 안에 은은 장 상궁의 말이, 그가 이미 방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 아니길 바랐다. 그리고 동시에 눈으로는 이미 저 편 의자에 앉아 선물로 들어온 아이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나는 분명 깨우지 말라 일렀으니, 고집 센 장 상궁을 탓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오, 황후.”
그의 유연한 미소를 보고서야 은은 긴장을 놓았다.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옆자릴 권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기까지 느린 시간이 걸렸다. 아직 잠이 묻어있는 아이 같은 은의 얼굴을 보며 그가 안타까이 묻는다.
“이런이런. 잠든 척을 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어딘가 몸이 안 좋은 모양이군.”
“아닙니다, 폐하. 단순히 한질 정도겠지요.”
“태의는 다녀간게요.”
“그 정도는 아니니 전혀 괘념치 마세요. 그보다, 무슨 일이라도-”
그는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 다시 웃어보였다.
“황후를 기쁘게 해 줄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었는데.”
“무슨 소식이옵니까. 어서 말씀해보세요.”
“황후가 청했던 일, 태감과 의논해보았소. 앞으로는 공녀들의 처우가 많이 개선될 것이오. 출신에 대한 차별, 고려인이라든지 한족이라든지 하는 것들로 인한-”
“기억해주셨다니 기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요. 그렇지만,”
“........”
“그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천하게 여겨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으로는 공녀에 관한 한 모든 전권을 황후에게 맡기기로 하였소.”
“..예?”
“그들에 대해 황후만큼 잘 알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소.”
바라던 바였다. 그토록 자신을 옭아매던 고려인이라는 이름을 이제는 자신의 주력한 무기로 가질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더 많은 공녀들과 고려 출신 환관들이 자신을 추앙하고 따르게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다시 말해 은도 황성 안에서 하나의 권력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황제가 은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그런 부분까지를 염두에 두고 이 일을 추진했다는 것을 은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내게 말씀하시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하오나, 이 일을 서궁에서는 어찌 생각할는지가-”
“하하. 그런 것을 담아두고 꺼려할 사람은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소.”
마치 아주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말하듯 웃으며 장담하는 그의 모습이 잠시 낯설게 느껴졌지만 은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것을 서운해 할 겨를도 없이 바깥에서 우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차비가 다 되었습니다.”
은이 그에게 묻는다.
“다시 가셔야 하는 것입니까?”
“아마 소용의 장지(葬地, 묘를 만들 땅)가 결정되었을 것이오. 나는 다시 정전으로 가 봐야 하겠지만, 황후께서는 그 일로 아무것도 심려할 것 없으니 걱정 마시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가 말했다. 돌아서는 등을 향해 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신첩으로 인해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뵐 낯이 없습니다. 폐하.”
그는 마치 서운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런 말씀 마시오. 다음번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고 있겠소.”
//貢女 奇皇后//
“아니, 그런 소문이 있단 말이오?”
“대감. 진 대인에게 힘을 빌리고자 하신다면 이런 소문쯤은 이미 꿰고 계셨어야지요. 지금 진 대인이 양녀를 들여 새로 힘을 구축하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니까요.”
“아니 그럼 그게 누구란 말이오. 누굴 양녀로 들이겠다는 게요?”
“그걸 알면 이렇게들 조용하겠습니까?”
정전에서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 우겸은 그 문 밖에서 그러한 잡담들이 오가는 것을 들었다. 무슨 일이든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날 리는 없는 법이라고 했다. 그런 소문이 있다면 확실하게 확인을 해 두어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오랜만이구만, 그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우겸은 상대를 확신하며 뒤돌아섰지만, 확신했던 그 상대보다 더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곁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언주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금은 상기된 것 같은 얼굴색을 하고는, 언주는 진 대인에게 꾸벅 절을 하고 바쁜 걸음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다. 마치 우겸의 시선을 피하는 듯한 행동으로. 그 뒷모습을 눈동자로 계속 좇고 있는 우겸을 향해 진 대인이 입을 연다.
“뭘 그리 보는 겐가.”
“대인과 같은 분께서 궁인과 친분이 있으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요전번의 일로 좀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네. 하하. 왜, 셈이 나시는 겐가?”
진 대인의 말에 뼈가 들어있음을 알고 우겸은 표정을 고쳐 밝게 웃었다. 그리고 한 걸음 비켜서며 정전 쪽을 향해 그를 안내했다.
“정전으로 가시는 길이시라면 조금 늦으셨습니다. 폐하께선 벌써 들어계십니다만.”
“아닐세. 후궁의 장지를 정하는 일에 나 같은 노인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있으시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더 중요한 일? 뭐,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만. 그럼, 다음에 다시 봄세.”
진 대인의 수수께끼 같은 어투에서 우겸은 좀 전의 대화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타났던 언주의 모습이 맞물려, 생각지 못했던 실마리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먼저 돌아서는 진 대인을 뒤로하고 우겸은 언주의 족적을 따라 걸음을 뗐다. 언주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바삐 달려가는 우겸의 모습을 보며, 진 대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그럼. 그래야지.”
//貢女 奇皇后//
복잡한 머릿속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털어놓고 고민할 누군가가 있지도 않았거니와, 함부로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진 대인에게서의 달콤한 제안.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늘 꿈꿔오던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되는 일인데, 무엇 때문에 이리 마음이 쓰이고 고민해야 하는지 찬찬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었다. 고민하는 사이, 언주 자신도 모르게 도착해 있는 곳은 동궁 앞이었다.
...
“...하여 소용의 장지가 그곳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할 정보입니까.”
은은 고 환관을 향해 불편하다는 듯이 말한다. 고 환관은 여유를 부리며 답했다.
“물론 그리하셔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만, 장례일에라도 한번 들러주신다면 마마에 관한 의혹은 물론이거니와 쏟아지게 될 찬사는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순전히 신의 생각이오니 한번 고려해보소서.”
“알았습니다.”
“하옵고, 폐하께서 공녀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셨다는 것에 대해 크게 감축 드리는 바입니다.”
“그 일이야말로 태감의 공이 컸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별 말씀을. 아직은 잘 모르시겠지만 원 황실에는 황후의 직속기관이 따로 있습니다. ‘휘정원’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그런 것이 있다고들 하더군요.”
“휘정원은 폐하께서도 손 댈 수 없는 마마 만의 권력 기관인 셈입니다. 그만한 힘을 가지셨으니 어서 사용하셔야지요. 휘정원의 인재들을 모두 마마의 사람들로만 바꾸시는 겁니다. 원하시는 대로 개편하십시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에 은이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그야말로 이제는 지겹다 할 정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으니 제 마음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일만 남았다. 동시에 은은 다짐했다. 그 권력으로 온갖 악한 것들을 다 쳐부수고 역사에 길이 남을 황후가 되리라.
“하옵고,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이 황후궁에 새로운 이름을 내리셨습니다.”
“세상에. 새로운 이름이라니요.”
“언제까지 ‘동궁’이라는 의미 없는 이름을 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흥성궁’. 그것이 마마께서 가지신 궁의 이름입니다.”
은은 금세 흥미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허면 서궁에도 다른 이름이 내려졌겠군요.”
“서궁은 ‘장헌궁’이 되었습니다만. 폐하께서 ‘흥성궁’이라는 이름을 위해 사흘 밤낮을 고민하셨다면 조금 더 기쁘시겠습니까.”
은은 마지못해 웃는다는 듯이 입 꼬리를 올리며 그를 향해 수고 많았다는 인사를 건넸다. 요 근래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은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고 환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후마마, 궁인 언주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언제쯤 제 스스로 찾아오겠지,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일 것이라 생각지 못했기에 은은 조금 주춤했다. 요전번, 정전에서 진 대인이 언주를 감싸주었던 일로 내내 궁금해 하고 있던 차였다. 분위기 파악의 고수인 고 환관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흥성궁을 빠져 나왔고, 언주는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은을 마주했다. 은은 마주앉은 언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우겸과 관련한 장 상궁의 귀띔을 떠올렸지만 일단은 지우려고 애쓰며 과장된, 그리고 전과 같은 평상적인 어투로 그녀를 맞았다.
“너무 격조했어요.”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밖에서 대강 들었어. 축하해, 여러 가지 일들. 오늘은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할 말이라뇨.”
“전에, 궁금해 했었지. 내가 마음에 두고 있다는 분.”
뭘까.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 두근거리는 심장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의 긴장감. 은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지는 우겸의 모습을 애써 부정하고 부정했지만, 그럴수록 마음만 허공에 뜨는 기분이었다. 찬찬히 벌어지는 언주의 입술을 보고만 있었다.
“지원 나으리야.”
언주는 비장하리만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스스로는 여태껏 은에게 감춰왔던 일들을 하나씩 털어놓을 생각으로 말했던 것이었는데 긴장했던 맘에 지나치게 경직된 탓이었다. 은은 언주의 말을 듣고도 잠시 동안은 얼어버린 사람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가슴은 뜻 모르게 요동치고 그것을 감추려 애써 웃는 얼굴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양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분은 내게 씌워진 굴레들에 상관없이 ‘나’ 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신 분이야.”
대답 없는 은을 대신에 언주는 왜인지 스스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마치 변명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어떻게 생각해?”
언주의 조심스런 물음에 은은 눈을 칩떴다.
“언니. 난 언니보다 그 분을 10년은 더 오래 알아왔어요. 그 분은 설령 저잣거리의 철부지 어린아이가 구정물을 뿌리고 지나간대도 웃어주실 그런 분이에요. 그 분에게 친절은 습관이라구요.”
“....뭐?”
“언닌 그 분이 누구에게나 베풀법한 그런 친절들 가운데 어쩌다 받게 된 몇 번의 배려에 그냥 이끌렸던 것뿐이에요. 값싼 동정 따위에 흔들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구요.”
착각이었을까. 그 분의 선량한 눈동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말 할 수 없을 ‘값싼 동정’이라는 천박한 어구를 사용하는 은의 얼굴이 순간 요부처럼 보였던 것은.
첫댓글 젬있게 보고가요...
음...뭐랄까 은이 약간 낯설게 느껴지네요; 그나저나 은이 정말로 회임한건 아닌지?^^ 나른한 은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은이가 질투하나요;;;;ㅋㅋㅋㅋㅋ 좀............왠지 안좋게 될 거같네요
흠냐 안돼는데 은아 너는 황제 외의 사람에 대해서 애정의마음을 가지고 질투하면 안되는것이야 ㅜㅜ//담에 또 뵈요!ㅎㅎ
은이가 권력의 맛을 보아서 그런것일까요..? 왠지 은이가 변한 것 같아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