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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앞에 선 하린은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자신의 부모님이기에 두말 않고 반겨줄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서 더 용기가 안나는 것이었다.
드디어 결심을 한 하린은 가만히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라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린은 차분하게 엄마를 불렀다.
급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린아!"
"엄마."
"그래 잘왔어. 어쩐 일이야. 그래 빨리 들어와라. 밥은 잘 먹고 다니니?"
"그동안 연락 잘 못드려서 죄송해요."
"아니다. 빨리 들어와라. 여보 하린이 왔어요."
엄마가 아빠를 부르자 아빠가 다급히 나오셨다.
"하린아!"
"아빠!"
아빠는 가만히 하린을 안아주셨다.
"잘왔어. 그래 일은 할만하고?"
"아. 일은 그만 뒀어요. 오빠가 그만 두라고 성화여서."
"그래. 좀 힘든 일이었어. 우선 앉고. 저녁 먹고 갈거지?"
"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 우선 앉자꾸나."
엄마 아빠와 나란히 앉은 하린은 책 두 권을 꺼내들었다.
"이거. 책이에요."
"웬 책이니?"
"제가 쓴거에요. 이번에 제가 쓴 책인데. 오빠가 책으로 내자고 해서 책으로 나왔어요. 오늘 배달와서. 엄마 아빠께 전해드리려고 왔어요. 그런데 이 책 읽고 속상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 이제 괜찮아요."
하린이 웃으며 말하자. 비로소 엄마와 아빠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린이 아주 밝게 웃었던 것이다. 드디어 자신들의 딸이 돌아왔다는 생각에 엄마는 눈물을 훔치셨고, 아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냥 하린의 책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래. 장하다. 엄마 아빠가 꼭 책 읽어볼게."
"네. 약속해요. 읽고 속상해하지 않기."
하린이 자꾸 속상해하지 말라고 해서 좀 이상했지만, 우선은 하린과 약속을 하는 부부였다.
"하린아 엄마가 밥 해줄게. 잠깐 앉아있어."
"네."
엄마가 부엌으로 자리를 뜨시고 아빠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하린아."
"네."
"고맙다."
고맙다고만 말씀하시는 아빠의 말에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있는 걸안 하린은 그저 웃어보였다. 지금은 눈물보단 웃어주는 게 아빠에겐 더 안심이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린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웃으면서 애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빠. 전 정말 괜찮아요. 제가 더 고맙죠. 아무말 않고 기다려 주셔서. 전 이제 정말 괜찮아요."
두 부녀는 비로소 마주보고 웃을 수 있었다.
"저녁 드세요."
엄마의 말에 두 부녀는 부엌으로 갔다. 하린이 밥을 먹는걸 지켜보고 있던 부부는, 하린이 정말 맛있게 밥을 먹자 그제서야 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하린은 기분좋게 가족들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집을 나오면서 엄마 아빠가 얼마나 서운해 하시던지, 종종 들르겠다고 말하고 하린은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 편하고 기분 좋은걸 하린은 그동안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다. 정말 종종 들러야지 생각한 하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혜윤과 자신이 살고있는 집으로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린아, 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데.
"무슨소리야?"
-네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라고 지금.
방금 하민과 통화한 하린은 믿을수가 없었다. 자신이 쓴 책이 베스트 셀러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 기분에 멍하니 있던 하린이었다. 그때 혜윤이가 방에서 큰소리를 내며 나오지 않았더라면 하린은 그상태로 쭉 있었을 것이다.
"하린아! 하린아!"
"응?"
겨우 정신을 차린 하린이 혜윤을 봤다. 혜윤은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이것봐봐. 이거 대한문고인데 여기 베스트 셀러에 네 책이 있어, 3위야 3위"
"어?"
"이것 좀 잘 보라구. 봐봐."
정말이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3이라는 숫자 옆에 자신의 책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서야 눈으로 확인한 하린은 어쩔 줄 몰라했다.
"이게 어떻게."
"오빠는 알아?"
"응 방금 전화해서 오빠가 말해주긴 했는데. 이렇게 눈으로 보니 이게 뭐."
"진정하고."
"응. 아 떨려."
하린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 기뻤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니, 너무 감격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했어. 네 글 좋다고 했잖아."
"아. 내 책을 많음 사람들이 읽어줬구나."
"기분이 어때?"
"모르겠어. 그냥 막 떨리고, 기쁘고, 아 모르겠어."
"기뻐하면 돼 하린아. 이럴 땐 정말 기뻐하면 되는거야. 이제 기뻐할 일만 남았어 하린아."
"응. 고마워."
"고맙긴. 네가 한 일인데."
"그래도. 오빠랑 네가 설득해 주지 않았다면 난 이런 생각 하지도 못했을 거야."
"네가. 참 자랑스러워 하린아."
"나도, 네가 참 좋아 혜윤아."
하린은 이런 행복한 기분을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자신에게는 행복이란 게 없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노력을 하니 다시 한번 자신에게 행복이라는 게 찾아왔다. 한편으론 다시 찾아온 행복이라는 감정에 걱정되기도 했지만 혜윤의 말대로 지금은 기뻐하기만 하자고 생각했다.
베스트 셀러로 기뻐한지 몇일 후 하린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통을 받았다.
자신을 팬엔터테인먼트 이사라고 소개한 그 사람은 하린을 한번 만나보기를 원했다. 하린의 책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 그는 같이 드라마를 하자고 하린에게 제안을 하였다. 하린은 갑작스럽게 닥쳐온 일에 우선 생각해본다고 전한뒤 하민에게 연락을 했다.
-하민입니다~
"오빠 오늘 시간 있어?"
-응? 왜? 오늘 촬영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무슨일 있어?"
"아니, 의논할 게 좀 있어서. 촬영 끝나는 데로 전화좀 줘."
-응. 바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하린은 혜윤을 불러 아까 전화받은 내용을 전했다.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좋아한 혜윤은, 이내 곰곰히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윽고 혜윤이 입을 열었다.
"완전 좋은 제안 같은데? 네 책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거잖아. 게다가 같이 하자고 까지 했는데. 좋은 제안이지. 네가 대본을 쓰는거야."
"내가? 난 아직 대본 같은거 못쓰는데?"
"그쪽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그렇게 제안을 한거면. 난 네가 이 제안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난 아직 얼떨떨하고, 좀 자신이 없어서."
"배우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한 혜윤이었지만. 사실 책을 쓰는 것과 드라마 대본을 쓰는 게 다르다는 걸 아는 혜윤도 선뜻 확실하게 말을 해줄수가 없었다. 하민오빠가 와야 생각이 정리될 것 같은데, 적어도 하민 오빠는 드라마도 찍고 연예계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깐 자신들 보다는 더 많이 알 것이다. 그러면 괜찮은 건지 아니면 역시 책과 대본은 달라서 하린이 할 수 없는 것인지를 애기 해 줄것이다.
촬영을 끝낸 하민이 집에 들어서자 혜윤과 하린이 반겼다.
"응 왜?? 급한일이야? 무슨 일이야?"
"아. 그게."
"하린이가 드라마 제의를 받았데. 하린이 책으로. 그리고 하린이도 같이 하자고 그러더래."
하린이가 머뭇거리자 혜윤이 대신 말해준다.
"그래? 좋은 일 아니야? 어딘데?"
"아 그게. 팬엔터테인먼트라고."
"진짜? 거기 드라마 제작하는 엔터테인먼트로 유명한곳이야. 지금 우리 드라마도 거기 제작인데?"
"진짜?"
"어. 제작하는 드라마 마다 다 대박이야 기획력도 좋아."
"그렇게 좋은 회사가 왜."
"아니지. 그렇게 좋은 회사가 제안을 한 거니 네 글이 그만큼 좋았던 거지."
"그치만"
하린은 망설이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했어?"
하민이 상기된 얼굴로 물어본다.
"생각 해본다고 했어. 몇일 뒤 다시 연락 준다고."
"생각이 필요해??"
"오빠 난 자신이 없어. 글을 쓴다는 것하고 대본을 쓴다는 건 다른 거잖아."
"그렇기 한데...그럼 우선 다시 연락이 오면 만나. 만나서 자세하기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잖아."
"알겠어. 한 번 만나 보기는 할게."
"그래. 그럼 난 그렇게 알고 갈게."
하민이 가고 하린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혜윤은 뭐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 쪽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서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좋은 기회인건 하린도 안다. 하지만 그 좋은 기회를 망칠까 두려웠다. 이번 책의 성공으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볼까 생각 해 본 하린이었다. 그런 하린에게 엄청난 기회가 온 것이다. 좋은 엔터테인먼트의 드라마 제의, 게다가 자신이 참여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쓰는 대본, 하지만 혼자서 하기에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결국 몇일동안 생각이 다 정리가 되지 못한 하린이었다.
다시 전화가 왔다. 결정을 못 내린 하린은 하민의 말대로 우선 만나서 애기를 들어보자 생각했고, 곧 만날 약속을 잡았다. 흔쾌히 자신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겠다고 한 상대방이 고마웠다.
팬엔터테인먼트의 이사를 만나기로 한 날 혜윤이 더 안절부절이었다.
"만나서 잘 애기하고, 조금이라도 부당한 조건이라면 거절하고, 왜 그쪽에 좀 나쁜 사람들 많다잖아. 뭐 유명하다니깐 안심이긴 한데, 그래도 모르니깐, 잘 들어봐. 알겠지? 아 내가 왜이렇게 불안하냐. 그리고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 되면 한다고 해. 도와줄거야 그사람들도 네가 신인작가라는 걸 모르지는 않으니깐. 뭔가 생각이 있을거야. 그러니깐 그런것도 다 물어보고."
"알겠어. 혜윤아 진정해."
"왜이렇게 물가에 애 내놓는 심정인지 모르겠다. 네가 일적으로 이렇게 사람을 만나러 간다니깐. 뭔가 이상해."
"나 잘 물어보고. 잘 결정 내리고 올게."
"그래. 이야기 다 끝나면 꼭 전화하고."
"응."
걱정스런 혜윤의 배웅을 받으며 하린은 약속 장소로 나갔다.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약속장소로 나가는 자신을 보며 하린은 옛날이 생각났다. 예전에는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젊었을 때 놀 수 있을 때 마음껏 놀자고 생각했었다. 영화도 자주 보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여러군데 놀러도 자주 나가고, 참 활기차고 재밌게 살았었었다 그때는. 이렇게 오랜만에 마트가 아닌 다른곳으로 향하며 걷고 있는 이 상황에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들뜨고, 엔돌핀이 도는 기분이었다.
약속장소에 도착을 하여 전화를 하니, 준수하게 생긴 남자가 전화를 받는게 보였다. 그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펜엔터테인먼트 이사님 이신가요?"
"아. 안녕하세요. 맞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전화를 끊고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은 서로 자기소개를 했다.
"소개 먼저 하겠습니다. 팬엔터테인먼트 이사 김현우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정하린이에요."
하린은 현우가 건네는 명함을 받으면 인사를 했다.
"우선 만남에 응해주신거 감사드리구요. 전화로 대충 말씀을 드렸었는데, 생각은 많이 해보셨습니까?"
"네. 생각은 많이 해봤는데, 아직 결정을..."
"아. 걱정되시는게 있으세요?"
"저한테는 너무 큰 도전이 아닌가 싶어서요. 들어보니깐 되게 유명한 엔터테인먼트라는데 지금 방영하고 있는 '내사랑 선생님'도 제작 하셨다면서요."
"아. 네. 많이 알고 계시네요. 저희가 보는 눈이 좀 높아요."
"아..."
"그 말은 즉 하린씨 글이 좋다는 말도 되겠죠?"
"아 너무 과찬이세요."
"제가. 빈말은 안하니깐 믿으셔도 되요.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드라마로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이건 저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회사 내부의 결정입니다."
"제가 신인인건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제가 그것도 알아보지 않고 제안을 했을까요."
"그래서 좀 걱정이 되요. 드라마가 잘 안되면 어쩌나 하구요. 그리고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대본이라는게 글을 쓰는거랑은 또 다른 것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대본을 써 본 적이 없어서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본 쓰는 것은 따로 경력 작가가 있으니깐요. 하린씨가 드라마를 다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그 경력작가와 대본을 함께 쓰는 거에요. 아무래도 이 글을 쓰신 건 하린씨니까. 하린씨가 필요할 것 같아서. 좀 도와줬으면 해서요. 저희도 대본작가만 두면 편하지만, 저는 이 글의 느낌이 좋거든요. 대본작가만 따로 두고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면 드라마의 내용이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하린씨가 필요해요. 조건은 원하는 대로 맞춰드릴게요."
"아. 그럼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제가 의논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아. 그러십니까?"
"네. 제가 연락드릴게요."
"네. 그러면 좋은쪽으로 생각하시고 꼭 연락주세요."
하린은 인사를 하고 약속장소를 나왔다.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그렇게 자신이 드라마를 하는데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부담이 되는 건 어쩔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쓴 글이 드라마로 나왔을때, 자신이 책을 썼을 때와 다르게 해석이 되어 나간다면 그것 또한 마음에 안 들 것 같았다.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한 하린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바로 하민에게 연락을 한 하린은 혜윤과 마주 앉았다.
"오빠 오면 자세하게 말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하린의 말에 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하민이 오길 바랬다.
하민이 도착하고 둘은 하린의 말을 빨리 듣고 싶다는 듯 하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린은 오늘 현우에게서 받은 명함을 꺼냈다.
"오늘 이 사람하고 만났는데. 경력 작가를 두고 같이 쓴느 거래. 아무래도 대본작가를 다른 사람을 맡기면 책을 쓴 의도와 다르게 흘러갈까봐 그런 것 같애."
"그럼 다행인 거 아니야? 너한테는 경험도 될 거고. 너도 네 글이 드라마로 나왔는데 네가 쓴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면 속상할 거 아니야."
자신의 마음을 콕 찝어내 주는 혜윤이 하린은 신기했다. 역시 내 친구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응. 나도 그 생각때문에 하고싶긴 한데."
"그럼 무슨 고민이 더 필요해. 오빠는 무조건 찬성. 그럼 하기로 결정한거지?"
하린의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다른 말이 나오지 않게 바로 말을 끊어 결정을 지어버리는 하민이다. 그런 하민에 하린과 혜윤은 웃어버렸다. 오빠이긴 하지만 어딘지 애같은 면이 있는 하민때문에 하린은 졌다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린이 고개 끄덕였어. 하기로 한거야. 오빠가 도움 많이 줄게."
"아니야. 오빠는 그냥 모른척 해줘. 괜히 오빠 동생인 걸 알게되면 오빠한테 안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그러지마. 이건 나 혼자 해볼게."
"그래. 알겠어. 그래도 힘들거나. 누가 주변해서 괴롭히면 말해."
"아이. 오빠는 이나이 되서 누가 괴롭히겠어. 내가 어린앤가 무슨."
"그래도. 이쪽일이 쉬운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 쉽지 않은 일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끌어들였단 말이야?"
"아니. 그건..."
하민이 당황하자 하린은 큰소리로 웃었다.
"장난이야. 장난. 나도 그쪽 사람들 냉정하고 그런거 다 알아. 뭐 그런쪽에서 일하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다 각오하고 있으니깐 걱정마세요."
하민은 하린의 말에도 놀랐지만. 더 놀란것은 하린이 농담도 하고 크게 웃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환하게 밝게 소리내어 하린이 웃는걸 하민은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많이 밝아져서 옛날의 하린으로 돌아온게 아닐까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더 감격스러운 하민이다. 하지만 티를 낸다면 하린이 다시 힘없는 하린으로 돌아갈까봐 아무런 티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마음으로 고마워하였다.
하린이 오늘 하루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피곤하다며 그만 씻고 잠을 자겠다고 들어가 버리고, 혜윤과 하민이 거실에 남았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둘은 어쩔 줄 몰라했다.
"아. 그만 나도 이제 집에 가봐야겠다."
아주 어색하게 나오는 하민의 말에 혜윤이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긴장을 해."
"응? 내...내가 언제 긴장을 했다고 그러냐?"
하민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 버렸다. 혜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하민은 혜윤과 단둘이 있으니 긴장을 하였다. 자신의 동생을 옆에서 챙겨주고 신경써주고, 아플때 간호해주는 모습을 보고 반했더랬다. 하지만 혜윤이 어떤 감정인지 몰라서 여태껏 곁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단 둘이서만 있게 되면 가슴이 뛰어서 진정이 안되는 것이다. 바보같은 모습을 보였단 생각에 자책하고 있는데 혜윤이 계속 말을 걸어온다.
"말도 더듬고, 내가 그렇게 어려워?"
"아니야!! 무슨. 그냥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진짜 가봐야겠다. 아 매니저 형이 너무 오래 기다렸을거야."
누가봐도 티나게 변명을 하며 서둘러 집을 나가는 하민의 모습에 혜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민은 정말 감추는 걸 못했다.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하민의 마음을 혜윤은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티가 나는데도 이런 바보같은 남자가 용기가 없는건지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아 하민은 답답할 뿐이다. 어디 언제까지 저러고 있나 보자 하고 혜윤은 생각했다. 그래도 웃음이 나는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바보같은 남자가 보여주는 모습이 귀여워서.
하린은 갑자기 모든 일이 잘 풀려가는 것에 기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그때 이후였다. 인생이 항상 행복하지 만은 않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엄청난 불행이 나에게도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살면서 큰 굴곡이 없었다. 그다지 크게 불행한 적도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불행이 처음 찾아왔을 때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 그 불행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이제 그 불행에서 나와 행복해지려 하고 있다. 나의 책이 생겼고, 그 책으로 인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막 하린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다른 인생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앞으로 하린은 불행이 없을거라고는 생각 안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한 번 겪어봤으니 이젠 그 불행에 마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것이란 건 알았다. 단단한 마음이 생긴 것이다.
결정을 하고 나니 말을 하기는 쉬웠다.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하니 팬엔터테인먼트의 이사는 정말 좋아했다. 당장 만날 약속을 잡은 이사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 애기를 하자고 했다.
처음 와본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에 하린은 얼떨떨 했다. 건물 안에 드라마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이 회사에서 제작한 드라마 들인가 보다. 아까 지나가다가 연예인도 봤다. 누군지는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얼핏 들으니 '혜주'라고 했던 것 같은데. cf에서 얼굴을 본 것 같기도 하다. 포스터들을 구경하며 지나가다 어느 한 포스터 앞에서 잠시 멈췄지만 이내 하린은 옅게 웃으며 지나쳐 갔다. 스캔들도 금새 떠버린 경준이 처음 했던 드라마였다. 인기도 많았고 경준을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한 그 드라마. 이제 하린은 경준의 얼굴을 봐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지나간 일이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사무실에 현우와 마주 앉은 하린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하린이 생각했던 데로 하린이 그렇게 크게 할 일은 없었다. 그저 책의 내용에 크게 벗어나지 않게 대본이 나오길 도와주는 것이었고, 주인공들의 감정에 대해서도 책과 틀어지지 않게 도움을 줘야했다. 곧 작가가 올거라고 말한 현우는 캐스팅은 절반이 되었다고 말했다. 하린은 벌써 캐스팅이 진행되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랬다. 하린이 놀란 것을 안 현우는 이 드라마를 하반기가 하반기에 방영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빠른것이 아닌가 하린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눈치 챘는지 현우가 그래서 빨리 서두르는 거라고 했다. 원래 방영되기로 했던 다른 드라마가 엎어졌는데 운좋게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했던 주연배우랑 접촉을 했는데 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찍어놨던 여배우도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서 생각보다 쉽게 일이 진행될 것 같다고 말한 현우는, 하린이 당장 작가와 작업을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작가가 지금 여기로 오기로 했으니 괜찮다면 오늘부터 작업을 해주면 좋겠다고 조곤조곤 말한 현우에 정신없이 듣고만 있던 하린은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문을 쳐다봤다.
"아. 강작가님 오셨습니까?"
"네. 안녕하세요."
30대로 보이는 좋은 인상의 여자분이었다.
"인사 하시죠. 여기는 책 쓰신 정하린씨."
"아. 안녕하세요. 정하린입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하린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여자는 곧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강신이입니다."
"아."
멍하니 있던 하린이 다급히 손을 맞잡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생긴거랑 다르게 좀 맹하네?"
"네? 아 저."
"책은 읽어보고 왔어요. 글은 잘 쓰셨더라고요. 마치 경험담처럼."
"아..."
"연애는 해봤어요? 몇살이에요? 현우씨가 급하다고 하던데 바로 작업 들어갈 수 있겠어요?"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에 하린이 멍하게 서있자 현우가 웃으며 상황정리를 해준다.
"강작가님. 질문은 앉아서 해도 되지 않을까요? 잠깐 앉으세요. 여전히 강작가님은 급하셔."
"내 성격 알면서 매번 깨닫기는"
"하린씨가 지금 정신을 못차리잖아요. 하나씩 하나씩 물어봅시다. 강작가님 처음 만나면 사람들이 다 하린씨처럼 되는 거 모르죠? 하린씨 우선 앉으세요 강작가님이 좀 급하시고 빠르시고 그래요. 금방 익숙해지실 거에요."
"네."
하린은 자리에 앉았다.
"질문에 대답."
"네? 아. 연애는 몇번 해봤구요."
"마지막 연애는?"
"아. 3년 전이요."
"계속"
"아. 그리고 나이는 25입니다."
"어리네."
"작업은 시간을 묻는 거라면 시간적 여건은 됩니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나랑 같이 갈 수 있죠?"
"네? 어디를."
"작업실. 앞으로 작업실에서 먹고 자고 할거에요. 드라마 대본이 계속 나올 때까지. 현장에도 가봐야 하는 건 알죠? 아 이건 모르려나. 경험이 없다고 그랬죠. 아 내가 골치아프게 됬네. 그럼 하나씩 가르쳐야 되는데. 뭐 음식 가리는 건 없죠? 앞으로 몇개월간 같이 있어야 되니깐. 까다롭게 굴면 안되니깐. 난 겉으로 보긴 이래도 까다롭진 않아요. 그리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거나 내가 원하는 건 제때에 딱 해줘야 해요. 보조가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선은 하린씨랑 내가 마음이 맞아야 같이 글을 쓰는 거니까. 언제든지 내 대본의 방향이 아니다 싶으면 바로바로 애기해줬으면 해요. 그래야 빠르게 작업이 될테니깐. 그리고 나는 35이에요. 그러니깐 말은 놓아도 되죠? 존댓말 쓰면서 작업하는건 내 성격에 안맞아서."
"저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신이의 말에 하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응? 왜 무슨 할말있나?"
"아니. 저 너무 말이 빠르셔서. 정신이 없어가지구요. 우선 서로 일을 할때 잘 맞아야 한다는 건 저도 동의하는 것이니깐요. 일 하실때 안맞는 게 있으시면 그 때 말씀 해주셨으면, 우선은 맞는지 안맞는지 아직 일을 안해 본 상태니깐요. 먹을거는 가리지 않아요. 평소에는 느려도 일할때 느리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으니깐 괜찮으실 것 같구요. 까다로운 편은 아닙니다. 반말은 하셔도 되구요."
"그래도 핵심은 다 들었네. 말 잘하네. 맘에드네."
"아. 감사합니다."
하린의 말에 신이가 웃는다.
"재밌네. 정말."
"재밌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니야. 재밌어 자기."
"아. 감사하다고 말씀 드려야 하는 건가요?"
순식간에 멍해진 하린의 모습에 또 한번 웃음이 터진 신이다.
"작업하면서 심심하진 않을 것 같네. 그럼 서로 소개가 끝났고, 어느정도 파악도 한 것 같으니 같이 작업실로 갈까?"
"아. 작가님 작업실로 가는 거에요?"
하린이 묻자 현우가 말했다.
"아. 작업실은 저희측에서 준비했습니다. 같이 가시죠."
"강이사도 가려고?"
"제가 데려다 드려야죠."
"우리끼리 가도 되는데, 가서 간섭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우리끼리 갈게."
"아. 그럼 필요한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하린씨도 어려워하지 마시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네."
하린은 신이를 따라 회사를 나와 신이가 안내하는 차에 올라탔다.
"안절베트 메고."
"네."
출발하고 부터 하린은 도착할 때까지 안절벨트를 붙들고 그 자세 그대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신이는 운전을 너무 잘했다. 너무 잘하다 못해 과격했다. 빠르기도 빠른거였지만 너무 운전이 과격해서 하린은 사고가 나지 않을까 불안감에 떨어야했다. 도착하고 나서야 몸에 힘을 푼 하린은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운점이 좀 과격하지?"
"네."
"익숙해져, 앞으로 나랑 같이 움직여야 할 일이 많을테니깐."
"꼭 작가님이 운전하셔야 해요?"
"그럼 자기가 운전할래? 면허 있어?"
"아뇨. 면허 없어요."
"그러니깐 내가 운전해야지."
"네."
역시 말로는 이길수가 없다 이사람을. 하린은 어쩔수 없다 생각하고 앞으로 이 차를 타기전에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하나 생각했다.
"작가님!!"
"왜. 또"
"보험은 들어 놓으셨죠? 자동차 보험?"
작업실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불러서 하린이 하는말에 신이는 또 웃을수 밖에 없었다.
"걱정마. 보험은 들어 놓았고, 나 이래뵈도 무사고야."
"아. 놀랍네요. 무사고라니."
"내가 워낙에 운전을 잘해서."
"네."
대답을 하고 앞을 쳐다본 하린은 너무나 좋은 건물에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여기."
"응. 여기 아파트야. 우리 여기서 있으면서 계속 대본쓸거야. 드라마 대본이 빠르게 나와야 배우들도 그걸 보고 연기 할 방향을 잡지."
"네. 신기하네요."
"모든게 신기하지?"
"네. 이런 것도 얻어주시고, 와. 작업환경이 괜찮은가봐요."
"응. 좋아. 팬엔터테인먼트가 또 잘나가는 회사라서 이런 대우도 좋아. 행운인지 알라고 자기. 신인에 이정도 대우면 잘해주는 거야."
"아. 작가님을 대우해주시는 거죠."
"어머. 그거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야?"
"네? 아니에요. 저 거짓말은 안해요."
"그래. 그거 하난 맘에드네."
겉으로만 봐도 꽤 좋아보이는 아파트였다. 앞으로 몇개월간 여기서 지내야 한다니 설레기도 했지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럼 혜윤이랑 떨어져 있어야 되는데. 그제서야 혜윤이 생각이 난 하린은 혜윤이 없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갑자기 두려워지는 듯 했다. 그동안 혜윤이가 옆에서 돌봐주고 챙겨주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혼자 있어야 한다니 두려움이 앞선 것이다.
"뭐해 빨리 안오고."
"네!"
우선 작업을 시작하고, 이따가 혜윤이에게 따로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혜윤이가 보고싶어지는 하린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꽤 넓은 내부가 눈에 보였다. 필요한 것들은 다 구비되어 있었다. 감탄하고 있을때 신이가 방에서 말했다.
"내가 이방 쓸게. 하린씨도 방 골라서 써."
"네."
하린은 아무 방에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럼 대충 짐은 이따 가져오기로 하고, 노트북 안가져왔지?"
"네. 가지고 다니질 않아서."
"집에서 노트북 가지고 오고, 오늘은 그럼 책에 대해서 이야기나 해볼까?"
"아. 네."
"책 읽으면서 참 여자 주인공의 감정이 잘 묻어나왔다고 생각해. 그래서 내가 경험담이냐고 물었던 거야."
"아. 솔직히 말하면 경험담이에요."
"그래. 솔직히 처음 봤을때, 하린씨 눈빛이 슬퍼 보여서 책 속의 여자 주인공이 바로 생각났다고나 할까."
"아."
하린은 작가는 이렇게 사람 보는 눈도 좋은건가 싶었다. 내 눈만 보고 여자 주인공이 생각이 났다니.
"그런데 그렇게 제 애기가 다 들어있는 건 아니에요. 전체적인 부분만 제 경험에 맞춰 썼구요. 주인공들의 직업이나, 가족관계, 결말 등은 달라요. 제 경험은 해피앤딩이 아니거든요."
"응. 그럴 것 같았어. 책과 현실이 같았다면 하린씨 눈이 슬퍼보일리가 없잖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네."
"그 마지막에. '내 인생에 나와 함께 주인공이 되어줘'라는 말은 무슨뜻으로 쓴 거야?"
"아. 그건 드라마에 주인공들이 있잖아요. 여자와 이어지는 남자 배우가 주인공이잖아요. 그래서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인데, 나와 함께 주인공이 되어주는 거면 나의 사랑이 되어달란 뜻이에요. 내 인생의 남자주인공이 되어달란 애기요."
"그렇군. 사랑했던 사람이 배우였어?"
"네?"
"아니. 드라마와 주인공 이런생각을 하니깐. 혹시나 해서."
"아. 그건 말하기 곤란해서요."
"그래. 뭐 그애긴 그만하고. 늦어지기 전에 집에가서 짐을 가지고 오는 게 낫겠는데? 욕심 부리지 말고 중간중간 집에 갈 수 있으니깐. 필요한 것만 딱 챙겨와."
"네."
신이 앞에 있으면 모든 걸 다 들킬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을 다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하린은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면서 혜윤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게 무슨 일이냐며 자신도 같이 가야한다며 난리를 치더니, 결국에는 알겠다며 짐정리 먼저 하고 있겠다고 했다. 혜윤도 혜윤이지만 하린은 자신이 제일 걱정이었다. 3년만에 혜윤이와 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엄마같은 혜윤이 자신에 곁에 없을때 자신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이다. 혜윤도 역시 그게 제일 걱정인지 집에 들어서자 마자 잔소리를 했다.
"밥 제때제때 챙겨먹고, 귀찮다고 안먹지 말고, 너 그 드라마 끝났을 때 살 빠져 있기만 해봐."
밥 잘 안챙겨 먹는게 제일 걱정인가보다. 평소에서 혜윤이가 챙겨주지 않으면 가끔씩 밥 먹는 걸 까먹었었다. 살 빠지지 않게 잘 먹어야 겠다. 걱정끼치는 건 싫으니깐. 이젠 자신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린은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혜윤을 보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혜윤이 눈치채고 안아왔다.
"왜 울어."
"안울어."
"거짓말 마. 내 눈을 속일수는 없어. 우리가 뭐 계속 떨어져 있을 것도 아니고, 겨우 3개월 정도인데 뭘. 잘 지내고. 그리고 가끔 안올것도 아니잖아. 일이 잘 안되거나 속상한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만나러 갈게."
"응. 혜윤아. 넌 진짜 나에겐 가족이야. 알지?"
"나도 너 가족이라고 생각해. 잘 하고. 드라마 보면서 작가 옆에 너의 이름이 있길 바랄게. 너의 이름을 본다면 정말 기쁠거야."
"응. 열심히 할게. 네가 재밌게 그 드라마 볼 수 있도록."
짐을 챙겨 작업실로 돌아오니, 신이가 먼저 와있었다.
"오래 걸렸네."
"아. 네. 친구랑 좀 작별인사 좀 하느라."
"작별은 무슨 3개월 정도일 뿐인데."
"지난 3년간 떨어져서 지내 본 적이 없는 친구라서요."
"각별하나 보네."
"네. 많이요."
사실 작업실까지 데려다 준 혜윤과 또 작별인사를 하느라 아래에서 오랜 시간 실랑이를 했었다. 서로 먼저 가라고 그러고, 한애기 또 하고 누가보면 연인이 어디 떠나는 줄 아는 것 처럼 요란하게 헤어진 하린과 혜린이었다.
"자. 그럼 뭐부터 시작해볼까. 우선 첫장면을 뭐로 할지 생각한 번 해볼까?"
한참을 서로 토론을 하며 이야기를 하다보니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잠시 쉴 겸 밥을 먹자고 말하며 전화기를 드는 신이에게 하린은 아무거나 괜찮다고 말하며 방으로 들어가 풀썩 누웠다.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본 것도 어떤 것을 하려고 생각을 많이 해본 것도 오랜만이라서 지치는 기분이었다. 체력적인 일 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도 체력소모가 엄청나다.
첫날 부터 이렇게 힘들다니. 앞으로의 일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제 고생길이 열렸다고 생각한 하린이 마저 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신이가 부르는 소리에 나가야 했다.
"벌써 음식이 왔어요?"
"응. 여기 좀 빨라."
나가니 거실에 초밥이 한 상 차려져 있었다.
"이런것도 배달이 되요?"
"응 해주는 데만."
"아. 그렇구나. 잘먹겠습니다."
평소보다 더 배고픔을 느낀 하린이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어디서 시켰는지는 몰라도 정말 맛있었다.
"진짜 맛있네요."
"입에 있는 건 다 삼키고 말하지."
"아. 너무 맛있어서."
"한가득이야 한가득."
건네주는 물을 받으며 하린은 웃었다.
"힘들지?"
"네. 생각하고 말하는 일이 이렇게 체력소모가 심한 건지 이제 알았어요. 몸쓰는 것보다 더 한 것 같아요. 아주 미치겠어요."
"미치지는 말고, 가끔 생각이 막힌다거나 너무 힘들다거나 그럼 바람 쐬고 와. 우리 그정도는 쉬자고."
"네. 작가님 되게 좋은 것 같으세요."
"어? 그런소린 또 처음 듣네."
"되게 말도 직설적인 것 같으면서 불필요한 말은 안하시고 이렇게 무심한 것 같으시면서 잘 챙겨주시잖아요."
"내가?"
"네. 모르셨어요?"
사실 신이는 누구를 챙긴다거나 그러지 않았다. 항상 독하고 솔직해서 사람들이 오히려 무서워하거나 어려워했다. 하지만 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챙겨주고 있었다. 웬지 모르게 손이 가고 챙겨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애같은 면도 있고, 가끔씩 나오는 어리숙함이 자신을 웃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정이 가고 챙겨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본지 얼마안된 사람에게서 이런소릴 듣다니 자신이 나이를 먹어서 많이 너그러워졌나 하고 생각하는 신이였다. 그래도 하린이 하는 말이 나쁘지는 않게 들리는 걸 보니 칭찬은 역시 좋은가보다.
하린은 자신이 실수한건 아닌지 눈치를 봤지만 신이가 별 반응이 없자 안심하며 이내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린을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 하린을 좋아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어린아이 같은 면들이 사람들을 웃게하고 친근감이 들게하고 하린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하린은 솔직하고 착했다. 사람들은 그런 하린의 면을 좋아했고, 하린과 친해지길 원했다. 자신은 모르지만 하린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런 하린의 면에 신이도 자신도 모르게 잘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밥도 먹었겠다. 충분히 쉬었지?"
"아. 작가님."
"왜. 우리 빨리 해야 대본이 빨리 나오지. 우리 하나도 못 썼어. 첫장면에 어떻게 해야할지 토론밖에 안했지."
"저. 근데 그 보조라는 분은 언제 오세요?"
"아. 내일부터 출근할거야. 그사람도 여기서 먹고자고 하면서 우릴 보조해 줄테니깐. 그렇게 알고."
"네."
다시 토론에 들어간 둘은 새벽이 다 가도록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새벽 3시가 되어 겨우 잠에 든 하린은 아침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밖에서 요란하게 사람이 들어와서 떠들어 대지 않았다면 그대로 쭉 잘 기세였다.
"누구세요?"
눈도 제대로 못뜨고 밖으로 나온 하린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자신을 오늘부터 같이 일할 보조라고 소개하는 젊은 사람은 하린보다는 어렸다. 대학생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국문과에 재학중인데 나중에 대본작가가 되고 싶어서 일을 미리 배우려고 신이 믿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이름은 강현주라고 했다. 하린은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이 아는 어떤 사람과 이름이 비슷하다 잠깐 생각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아 반가워요. 정하린이라고 해요."
"아. 책 쓰신 작가님?"
"아. 쑥쓰럽네요 작가님이라고 불리는게,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편하게 불러도 되요?"
"그럼요."
참 말하는게 밝고 요란했다.
"무슨 소란이야."
신이가 시끄러워서 밖에 나왔다.
"아 보조분이라고."
"그래 시끌시끌한게 니가 온 줄 알았다.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하고. 그만 짐정리나 해."
"네."
신이의 말에 밝고 우렁차게 대답한 현주가 방으로 들어갔다.
"쟤가 좀 시끄러워. 그래도 일하나는 잘하니깐 걱정마."
"네. 많이 피곤하시죠?"
"뭐. 나는 늘 하던 일이니깐. 그나저나 컨디션은 어때?"
"저는 별로에요."
하린이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씻고 바로 작업 시작하자고."
"네."
벌써부터 피곤했다. 이대로 계속 3개월동안. 이를 닦으며 생각을 하던 하린은 헉 했다. 아. 정말 힘든 일이구나.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다고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가서는 잠도 못잘수도 있다는 생각에 헉소리가 절로 나는 하린이었다. 자신도 이렇게 힘든데 작가님은 얼마나 힘들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도와야겠다 생각한 하린은 이내 세수까지 다 마쳤다.
"자 그럼 첫화는 이미 연인이 되어 있는 두 사람으로 시작하는걸로 하고. 그게 낫지? 책은 헤어지는 것 부터 나왔지만 드라마가 너무 그렇게 처음부터 가면 이상하니깐 그냥 첫화는 연인으로써 행복함을 보여주고 첫화 마지막 쯤에 헤어지는 장면을 넣으면 되지. 그렇지? 그래야 뭔가 더 여자 주인공의 슬픔이 부각 되니깐. 그럼 어디 한번 대본을 써볼까."
어제 내내 애기 했던 첫화였다. 첫화의 내용이 어느정도 윤곽이 잡히고, 작가님과 의견을 조율해가며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당장 한달뒤에 촬영이 들어가는데 다른 드라마처럼 쪽대본은 되지 말자는게 이 제작사측의 지론이라서, 미리 이렇게 작업을 어느정도 해놓고 배우들이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준다고 했다. 하린은 그건 마음에 들었다. 항상 어느 드라마는 아침에 촬영해서 밤에 그 촬영분이 나가고, 대본도 쪽대본으로 그날그날 나오면 얼마나 배우들도 연기하기 힘들것이며 촬영도 힘들것인가. 하린은 생각만으로도 힘든 것 같았다.
대본은 쓰기 시작했고, 하린은 캐스팅이 누가 될까에 대한 궁금증이 컸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핀잔만 당할까봐 그냥 조용히 있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배우섭외에 작가의 힘이 들어가는 걸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드라마에도 작가님이 원하는 배우가 캐스팅이 됐는지 궁금했다. 어차피 대본리딩을 하게 되거나 옆에 이렇게 계속 같이 작업을 하고 있으면 자연히 들리게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궁금한건 궁금한 거였다. 하지만 지금 딴생각을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하린은 이내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