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보잉 767 민항기가 오늘 오전 11시40분쯤 김해공항 근처에서 추락했습니다.166명의 승객과 승무원 대부분이 사망한 듯 보입니다”
지난 15일 점심식사를 막 마친 직후였다.텔레비전에 뉴스 속보가 빠르게 튀어나오며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가 내 귀를 어지럽혔다.순간 저절로 눈이 감기며 나의 입에서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주여.여기에 어떤 하나님이 뜻이 있습니까.저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받아주옵소서”
나도 여러번 비행경험이 있지만 김해공항은 일반 비행장과 달리 착륙절차가 까다로워 상당한 조종술을 필요로 하는 곳인데 악천후에 조종미숙으로 일부 알려져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어떤 운송수단보다 가장 안전하다는 항공기.그러나 이 항공기가 사고를 내면 그 피해와 휴유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이런 비행기와 항공기를 나는 지난 60년부터 무려 41년간이나 조종했다.보통 조종사들이 2만시간을 비행하고 은퇴하는 것이 꿈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총 2만1200시간을 무사고 비행한 뒤 현재 일선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나로서는 이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선물로 여기기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한다.
조종석에서 보이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 확인하고 깨닫는 시간이다.비행하다 한참을 내려가도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간들.아무리 잘났다고 으시대보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간접적으로나마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다.이 사실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가진 분들은 꼭 내 간증을 끝까지 읽어주길 부탁한다.내 삶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와 인도,섭리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충북 제천 봉양면 장평리다.철도공무원인 아버님 밑에서 평범하게 자란 나는 농사꾼이 되기 위해 제천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사실 더 큰 야망이나 욕심을 가질 만한 주변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58년,내 인생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친구들과 냇가에서 수영을 하다 소나기가 내려 갑자기 비를 피한 곳이 교회 처마밑이었다.안에서 들리는 찬송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 고개를 빼고 기웃거렸더니 안에서 편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이 아닌가.우물쭈물하다 나도 모르게 들어가 앉았다.주로 나이든 할머니와 아주머니 10여명이 30대 전도사님이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예배가 끝나고 나를 소개하라고 하더니 박수를 쳐주었고 나는 엉겹결에 새 신자가 되고 말았다.그런데 교회 안에는 뭔지 모르는 포근함과 따뜻함이 가득했다.교회 밖을 나서니 기분도 상쾌하고 기뻤다.
토속종교와 미신을 섬기던 어머니를 속이고 이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빠른 속도로 예수님에 대해 접근해 들어갔다.교회생활이 즐거웠고 신났다.그러자 예수님을 위해 무엇인가 봉사하고픈 생각이 들었고 새벽예배를 알리는 종치기 봉사를 자청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교회로 가서 정확히 30분에 밧줄을 잡아당기며 종을 쳤다.투박한 밧줄을 한참 잡아당기면 손이 꽤 아팠다.평소 성실한 편인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종을 쳤더니 나중에 손바닥이 터져 피가 나왔다.6개월이 지나니 힘들다는 생각이 들며 그만두고 싶어졌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⑵] 어머니 몰래 가난한 전도사에 쌀 퍼다줘
교회 종치기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솟았으나 내가 종을 안 치면 마땅히 칠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이렇게 새벽예배 종치기를 계속한 것이 1년여가 되었다.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전도사님은 사모와 함께 하루 두끼만 간신히 식사했다.몇 안되는 성도들이 내는 헌금이라는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난 어머니 몰래 쌀을 적당히 퍼낸 뒤 수시로 전도사님께 가져다 드렸다.
언젠가는 사모가 출산을 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먹을 것이 여의치 않았다.이번엔 쌀을 좀 많이 퍼내 장에 내다팔아 미역을 사다드렸다.그러자 전도사님은 나를 붙들고 우시면서 “고등학생인 네가 이렇게 헌신적으로 도울 수 있느냐”시며 “어머니께 감사인사를 드리러 가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안된다며 극구만류했다.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늘 이상히 여기던 어머니에게 쌀 퍼내는 현장을 들키고 말았다.몽둥이를 들고 쫓아오시는 바람에 맨발로 도망을 쳤는데 겨울철이라 눈밭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생생하다.나중에 예수를 믿게 된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아시고 두고두고 내게 미안해 하셨다.
종치기 교회생활 1년이 지날 무렵 꿈을 꾸었다.어떤 흰옷 입은 분이 나타나 “왜 너는 새벽마다 종을 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그래서 “하나님께 잘 보이고 복 주신다는 생각에 칩니다”고 대답했는데 잠을 깼다.그런데 며칠 후 다시 비슷한 꿈을 꾸었는데 “너는 앞으로 뭐가 되려느냐”고 흰옷 입은 분이 질문했다.난 농고에 다니니 당연히 농사꾼이 된다고 대답해야 했으나 갑자기 “하늘을 날고 싶습니다”고 예상치 않았던 대답을 했다.사실 시골에 있는 내가 비행기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은 있었지만 내가 하늘을 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어불성설이었다.꿈속에서도 ‘너같은 촌놈이 무슨 하늘을 날아’ 하는 비아냥거림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철도공무원이어서 우리집엔 서울이 집인 철도청 직원 2명이 하숙했다.그런데 하루는 한 직원이 서울집에 다녀오더니 당시 고3이던 내게 원서 한장을 내밀었다.
“일덕군,아주 착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국립항공학교에 한번 지원해보는 게 어때.이곳은 국립이니 학비가 전혀 안 든다네.일부러 가져온 것이니 잘 생각해 시험을 한번 쳐보게나”
대학갈 생각도 못했고 그럴 형편도 아닌 내게 그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그리고 며칠전 꿈에 내가 하늘을 날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나 묘한 기분을 갖게 했다.내가 그 직원에게 비행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의 실력있는 쟁쟁한 학생들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국립항공학교에 제천농고에 다니는 시골뜨기가 합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나는 성의는 고마웠지만 자신이 없었다.전도사님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했더니 대뜸 내 손을 잡고 기도해주셨다.
“하나님,신군은 1년이 넘게 교회종을 쳤고 여러 교회 봉사에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이제 하나님께서 신군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실 차례입니다.이제 국립항공학교에 시험을 치르고자 하오니 합격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전도사님은 망설이는 내게 시험을 칠 것을 권유했고 나도 원서를 제출했다.당시 입학생을 20명 뽑았는데 10명은 국비생,10명은 사비생이었다.예상대로 공부는 잘하나 집안형편이 어려운 전국의 학생들이 모였고 12대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실력으로 보면 나는 도저히 합격이 불가능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⑶] 항공학교 합격… 하늘 나는 꿈 이뤄
드디어 국립항공학교 입학시험을 쳤다.합격자 발표 명단에 ‘신일덕’이란 내 이름을 발견하곤 몇번이나 눈을 비벼 확인했다.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합격시켜주셨다’는 감동이 가슴속에서 벅차올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실력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었지만 엄격한 신체검사에서 내가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이었다.돌이켜보면 1년반동안 새벽에 일어나 종치기를 한 것이 누구보다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하나님이 이날을 준비시키신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온 동네가 야단법석이었다.내가 국립항공학교에 합격한 것이 마을 경사가 됐다.축하 인사받기 바빴다.나는 이 놀라운 ‘기적’을 통해 하나님 앞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사실 전도사님은 당시 내게 신학교에 갈 것을 권면했지만 집안 분위기나 여건상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1959년 서울에 올라와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국립항공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이듬해 60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하나님이 내 꿈을 드디어 이루어주신 것이다.이런 과정을 지켜보며 어머니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집안의 놀라운 사건이었다.그리고 이때부터 나를 위해 늘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해주셨다.이후의 삶은 어머니 기도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항공학교 졸업 직후 해병대 항공대에 장교로 입대했다.66년 중매로 결혼을 했고 68년에 중위로 월남전에 참전했다.당시 월남에 가서 사망하는 군인이 많았기 때문에 모두 참전을 꺼렸다.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는 내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에 가족의 만류를 무릅쓰고 자원했다.
말로 들어온 전쟁터와 체험하는 전쟁터는 정말 180도 다르고 비참했다.포화가 휩쓸고 간 자리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귀신잡는 해병대’로 소문이 나서인지 우리는 전투가 가장 치열하고 월남 정규군이 주둔한 투이호와와 호이얀 지역에 배치됐다.
68년 4월9일 첫 임무를 수행했다.낮게 날 수 있는 오원(O one) 골프기를 타고 적진을 정찰,월맹군의 탄약고와 무기고를 알아낸뒤 연막탄을 터뜨리면 그곳으로 전투기가 날아와 폭격하는 작전이었다.
나는 연막탄만 터뜨리고 잽싸게 강을 따라 숨어 퇴각해야 했다.그런데 첫 전투라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너무 높이 올라갔다.그러자 적군이 고사포를 일제히 쏘아대기 시작했고 이때 3발이 비행기에 맞았다.꼬리 부분에 2발을 맞고 1발은 무전기에 명중해 기능을 잃었다.
내 뒷좌석에는 미군 해병대 소령이 앉았는데 무전기에 붙은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즉시 하강해 강을 따라 비행했다.미군 소령은 낙하산으로 뛰어내리자고 했으나 2500피트 상공에서는 낙하산이 안 펴질 가능성도 많았다.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저를 좀 살려 주십시오.한평생 주님께 더욱 헌신하는 당신의 자녀가 되겠습니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때 마음이 편안해지며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들렸다.멀리 부대의 활주로가 보였고 양 날개를 흔들며 비상착륙에 성공했다.놀라운 것은 총탄 하나가 내가 앉은 시트를 뚫고 박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조금만 강도가 셌으면 이 총알은 내 척추를 관통할 자리였다.나는 모두에게 ‘기적적으로 살아온 군인’으로 인정받았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⑷] 해병사단에 어린이 주일학교 설립
월남전 첫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온 나는 그동안 군복 윗주머니 양쪽에 넣고 다니던 작은 성경책을 꺼냈다.혹시 총알이 정면으로 날아오다 이곳에 맞으면 방탄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번 전투로 인간의 생사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월남전에서 전쟁은 얼마나 처참한 비극인지를 배우며 믿음이 오히려 성장할 수 있었다.죽음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나약한지,죽음이 얼마나 허무한지 절실히 느꼈고 이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는 월남전 임기를 채우고 귀국했다 그러나 곧 다시 재지원해 근무했고 71년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모두 철수할 때 돌아왔다.계속 승진해 항공참모를 지냈고 대대장까지 해 중령까지 진급했다.군생활을 14년정도 하다보니 이제 새로운 세계에 받을 내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한편으론 지금까지 고생했는데 대령 진급에 이어 스타까지 돼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있었다.
어느 날 군생활을 오랫동안 했지만 내 신앙을 열심히 지킨 것 외에 군에서 주님을 위해 특별히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와 동시에 해병사단에 어린이주일학교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당시 군부대교회는 장병들만 출석하고 가족도 가끔 나왔지만 주일학교는 없었다.
나는 즉시 기도에 들어갔다.장병 중 신학교 출신을 교사로 뽑았고 주일아침에 버스를 사택으로 보내 어린이들을 태워 날랐다.이렇게 해서 해병대 최초로 군내에 어린이 주일학교가 설립돼 45명의 학생으로 예배를 드렸다.
당시 대한항공에서는 2년마다 경력자를 조종사로 뽑았는데 경쟁이 치열했다.묘하게도 이 조종사 모집 시기와 대령진급을 위해 가야 하는 해군참모대학 입학과 맞물려 선택을 어렵게 만들었다.어느 것이 바른 선택인지 고민하며 기도했는데 갑자기 참모대학 발령이 취소되었고 대한항공에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77년 12월1일 첫 출근한 나는 기본훈련을 받은 뒤 F27기부터 조종간을 잡았다.이후 70년대 후반부터 중동특수가 일면서 새로 나온 점보기로 중동에 많은 화물과 인원을 날랐다.747 점보기는 4만1000피트 상공까지 솟아 비행한다.밖은 섭씨 영하 45도에 이르지만 조종석 안에서 내려다보는 창공은 아름다움과 신비감에 가슴이 벅찰 정도다.찬송가 ‘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
하나님이 막 내려오실 것 같은 코발트색 하늘과 백조의 깃털같은 구름을 내려다보면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잊게 된다.미국 보잉사에서 조종교육을 받을 때 만난 워싱턴의 존 매릭이란 크리스천 신문기자가 내게 한 말이 늘 기억에 남는다.
“미스터 신,당신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대화하고 기도할 수 있으니 당신의 기도야말로 하나님께 가장 먼저 상달되지 않겠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 말이 농담인 것을 알지만 나는 조종석 안에서도 비행기의 안전과 가족,교회,민족을 위해 자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이런 내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1981년 9월16일 대한항공 903편 부기장을 맡았다.서울 출발해 마닐라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란,지다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까지 가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⑸] 비행기 이륙도중 4번엔진서 화재
서울에서 마닐라까지 비행기를 조종했기 때문에 나는 마닐라에서 바레인을 향할 때에는 쉬는 것이 순서였다.잠을 자거나 휴식을 가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냥 조종석에 앉아있고 싶었다.
이륙하기 위해 비행기가 활주로로 서서히 미끄러졌다.날씨는 약간 흐렸지만 비행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새 기종인 보잉기에는 손님이 무려 290명이나 탔다.드디어 비행기 엔진은 폭음을 내며 솟아오를 준비를 했다.비행기는 이륙시 맥시멈 파워라고 엔진 출력을 최대한 높이게 된다.힘차게 활주로를 차고나가다 그 힘을 받아 솟아오르는 것이다.그런데 최대 출력을 올려 비행기가 속력을 막 내기 시작하는 순간 작은 소리지만 “펑” 하며 불꽃이 보였다.동시에 약간 기체가 흔들리며 이상이 느껴졌다.즉시 엔진을 체크하니 4번 엔진에 화재가 났다.
정신이 아찔했다.이미 비행기는 전속력으로 활주로를 달리고 있는데 빨리 급제동을 하든지, 그냥 이륙하든지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그러나 두 가지 모두 이미 위험한 상황이었다.정상대로 이륙하면 불이 붙은 엔진이 과열돼 공중에서 폭발할 가능성도 있었다.당시 비행기에는 양 날개에 무려 1100드럼의 항공유가 탑재돼 있었다.반대로 급제동을 해도 활주로 끝이 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돼 수십대의 자동차와 부딪치는 대형사고가 일어날 상황이었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하는 절망감과 “이 많은 승객에게 사고를 당하게 하다니”하는 승무원으로서의 자책감이 동시에 교차했다.순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는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떠올랐다.나는 절박한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승객들을 어떻게 합니까.살려주옵소서.이 위기를 넘기게 해주옵소서.저는 앞으로 주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아직 완결하지 못한 사업이 많은데 제 생애가 여기서 끝나면 안되지 않습니까.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내 생애에 이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었다.그 짧은 시간에 만감이 교차되며 가족과 교회 성도들,많은 모습들이 오버랩되었다.“주여 도우소서”란 기도를 계속하는 가운데 황금빛이 기내로 들어오는 환상이 보이며 불안했던 마음이 갑자기 평안해졌다.
급제동이 걸린 비행기는 찢어질 듯한 굉음을 내며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누가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활주로 맨 끝자락에 걸치듯 정지했다.조금만 기체가 더 밀렸어도 엄청난 사고가 발생할 위치였다.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10여명이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지만 앰뷸런스와 소방차가 달려와 신속한 조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확신속에 “주여 감사합니다”란 기도를 연거푸 드렸다.문제 발생과 기도로 선택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7초.이 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기도를 할 수 있었는지 나 스스로도 놀랐다.
사람들은 나의 이 간증을 잘 믿지 않으려 했다.우연히 일어난 사고를 신속히 판단,응급처치를 잘한 것이지 하나님이 도와주시긴 무엇을 도와주셨느냐는 것이다.그런데 ‘그럴 수도 있는 사고’가 아니라 ‘분명 하나님이 도와주셨다”는 것을 함께 탄 승무원과 승객이 모두 느끼는 간증거리가 나중에 생겼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⑹] 아랍국가 공항 입국장서 성경 빼앗겨
84년 산업역군들을 중동의 S국에 실어나르느라 매우 바쁠 때였다.KE 837편으로 취항했는데 하루는 현지에 도착하니 새벽 5시30분이었다.세관원이 준비해서 우리와 승객들을 수속시켜 내보내야 하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당시 회교국들이 가장 중시하는 라마단 기간이어서 그런가 하고 좀 기다렸지만 전혀 움직임이 없어 “왜 문도 안열어 주고 수속준비도 안하느냐”고 항의했다.
알고보니 사연이 있었다.하루 전날 한국과 S국이 축구경기를 했는데 한국이 2대1로 이겼었다.그런데 판정에 불만이 좀 있었는지 이 사실을 분하게 여겨 우리를 골탕을 먹이는 것이었다.정말 어이가 없었다.다시 항의를 하자 이번에는 서서히 수속을 해주는데 가방검사를 아주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기장인 내 가방 내용물을 그대로 다 쏟아놓았는데 손때 묻은 가죽성경책이 나왔다.
“이것이 무엇이냐”
“한글로 된 성경책이다”
“넌 성경을 가져오면 처벌받는 우리나라의 국법을 아느냐”
“그동안 수십차례 이곳을 왔다갔다 했고 성경을 갖고 다녔지만 한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사실 회교국이니 성경 반입이 안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압수를 한다고 해서 성경은 내게 매우 소중한 것이니 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랬더니 나중에 출국할 때 가져가라는 것이었다.더 이상 실랑이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들어왔다.그런데 우리 승무원들에 대한 감시가 갑자기 심해지는 것 같았다.그래서 우리는 호텔에서 거의 나가지 않고 모여 있었다.
주일이 끼여 있어 승무원 중 기독교인들끼리 문을 잠그고 예배를 드렸다.그런데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렸다.느낌이 이상해 즉시 성경과 찬송가를 감추고 문을 열었더니 비밀경찰이 문앞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했다.비행을 앞두고 회의중이라고 말했으나 간담이 서늘했다.예배를 드리다 현장에서 잡혀가는 사례도 많았기 때문이다.우리는 위기를 넘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틀 후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나간 나는 성경책을 돌려달라고 했다.그랬더니 세관원이 ‘너 참 웃긴다’는 표정이었다.그 성경은 내가 10년간 읽어 중요한 부분은 줄을 쳤고 분신과 같다고 말하자 책임자에게 나를 데려가 상황을 설명했다.
책임자는 나를 어떤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그 방은 성경책을 작두로 난도질해놓은 장소였다.내 성경책도 맨 위쪽에 이미 걸레가 되어있었다.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고 나중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애지중지하던 성경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분노와 이렇게 무지막지한 행동을 하는 이들의 영혼에 대한 불쌍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신 화가 났느냐”고 물었다.생각같아선 “그래 무척 화났다”고 하고 싶었으나 현지 우리 항공사 책임자가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화났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한 것이 기억났다.나는 끝까지 아니라고 했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나중에 알고보니 생각없이 ‘화났다’고 이야기 하면 국법에 반항을 한 것으로 간주,바로 구금이 된다고 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된다.대신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장으로 언제나 이곳에 올 때는 짐검사를 철저히 받아야 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⑺] 두달간의 새벽기도… 선교사명 체험
신앙생활은 어떤 계기나 문제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한다.기장으로 각 나라를 다니다보면 주일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아 주일성수를 못하는 경우도 있어 항상 안타까웠다.물론 현지 도착지의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교회가 없을 경우 호텔에서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예전에는 승무원들의 여권을 기장이 모두 갖고 있어 예수를 안 믿는 승무원들도 나로 인해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선교의 비전과 열정을 갖도록 나를 인도하셨다.1990년초였다.처제(임영란 집사)가 “형부,우리 교회에서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데 참석해보지 않겠어요”라고 권유했다.
목동 아파트촌에 있는 ‘지구촌교회’로 조봉희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었다.당시는 임대교회로 아주 작았다.2개월간 이 교회의 새벽예배를 통해 나는 선교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온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고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교의 비전’을 확인해 교회를 옮긴 나는 모든 면에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믿음생활과 전도,실천에 대한 책임감을 갖도록 항상 기도했고 주님 안에서 더욱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앞부분 간증에서 마닐라공항에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극적으로 비행기가 활주로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멈췄던 이야기를 했다.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기장이나 그런 사고는 날 수 있고 또 그런 상황도 발생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비행기가 가까스로 활주로 끝에 멈춘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한번 놀라운 기적을 만드셨다.그래서 함께 탑승했던 예수를 믿지 않던 승무원들도 이번엔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됐기 때문이다.
1990년 11월16일 KE725편 기장을 맡았다.서울에서 사이판을 비행하는 것인데 주말이라 신혼부부 61쌍을 비롯해 모두 165명이 탔다.승무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8명이었다.출발하는 서울 김포공항은 하늘이 높고 푸른,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여주었다.나는 기장생활 5년만에 보잉727 기장을 맡았는데 비행하는 곳마다 승객이 가득차 흐뭇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일이 있으면 꿈속에서 황금빛 비행기를 받거나 강한 은혜를 받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 전날도 예외는 아니었다.그 무렵 성령의 은혜가 넘치는 믿음생활을 했고 하루하루가 기쁘고 감사했다.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 나는 신혼부부들에게 인생 선배로 행복하게 잘 살라는 축하멘트를 방송해주었다.괌과 사이판은 미국령이기에 하와이 관제탑으로부터 기상정보를 제공받는다.그런데 사이판 기상이 나빠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원래 아열대기후는 예측하기 어려워 비가 오다가 금방 개기도 해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그리고 날씨가 안 좋아도 그동안 비행경험에 비추어 착륙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착 15분전이었다.서서히 강하하기 시작하는데 기관사가 “기장님,착륙바퀴 유압이 이상합니다”고 보고하는 것이 아닌가.비행기는 하이드로릭이란 유압으로 비행기 바퀴가 나오도록 하는데 이 압력이 상실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⑻] “동체 착륙 직전 하나님의 음성이…”
유압 이상으로 비행기 바퀴가 빠지지 않으면 수동으로 바퀴를 꺼내는 방법이 있었다.이 방법은 비행교육시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으로 해보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다소 불안해 하는 승무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걱정들 말게나.수동으로 바퀴를 내리면 되지 않는가.직접 실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더 좋다”고 말했다.
아주 여유있게 말했으나 나 역시 내심 불안했다.우리는 수동장치를 열고 바퀴가 기체 밖으로 펼쳐질 수 있도록 핸들을 돌리려 했다.몇번 힘을 주던 기관장이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기장님,큰일났어요.수동장치가 안 돌아가요”
나 역시 몹시 놀랐으나 태연한 자세를 취하며 “차분히 다시 잘 해보라”고 말했다.그러나 나를 포함해 모든 승무원들이 돌아가며 힘을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기운만 빠질 뿐 전혀 움직이지 않자 바짝 긴장이 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 비행기 바퀴가 나오지 않으면 동체 착륙을 해야 하고 이때 지면과의 엄청난 마찰로 상상하기 힘든 불행한 사태가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이 사실을 파악한 사이판관제탑은 활주로를 이용하지 말고 잔디밭인 비상착륙장을 이용하라고 권했다.놀란 나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요청했다.의기양양하던 내가 한순간에 불안과 초조,극심한 고통에 직면했다.
신혼 2개월의 부기장은 “기장님,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라며 울먹였다.그는 신참에다 불교신자였고 기관장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나는 마지막까지 응급조치를 취하기로 했지만 승객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야 했다.
“승객 여러분,죄송합니다.기체 바퀴에 이상이 있어 동체착륙을 해야할지 모릅니다.일단 본인들의 소지품을 모두 앞의자 주머니에 넣어주시고 고개를 좌석밑까지 숙여 최대한 자세를 낮춰주십시오.그리고 사무장의 지시에 잘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우리는 모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기내는 금방 웅성거림과 함께 신혼부부들이 서로 울고 난리가 났다.나는 조종간을 부기장에게 맡기고 기관장과 함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기도가 아니라 울부짖음이었고 절규였다.더구나 승객들은 이제 막 결혼해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이들이 아닌가.
땀을 비오듯 쏟으며 간절히 기도드리는 내 마음속에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부드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나는 ‘할렐루야’‘아멘’을 큰소리로 연발했는데 부기장은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으로 판단,“기장님,정신을 차리세요”라고 흔들었다.나는 성령충만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수동장치를 돌려보게.이번에도 안되면 동체착륙을 하겠다고 관제탑에 알리게”
수동장치를 돌리는 순간 조금전까지 그렇게 돌려도 움직이지 않던 그 장치가 한손으로도 술술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마치 기름을 친 것처럼 바퀴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나는 조종실에서 큰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그리고 역사하십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⑼]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비행기 수동장치 착륙 사건은 현장에 있던 모든 승무원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고히 보여준 사건이었다.나는 이때 모든 승객에게 감격에 떨며 이렇게 방송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큰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는 이 놀라운 은혜를 승객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기내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오고 난리가 났다.내 눈물은 비행기가 착륙해 계류장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나는 이때부터 11월14일을 ‘기적의 날’로 부른다.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역사하심을 분명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때를 계기로 나의 신앙은 더 새롭게 바뀌었다.1992년 목동 지구촌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임명받았다.직분을 받고 보니 매사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96년에는 장로 안수를 받았다.
“하나님 이제 당신의 쓰는 작은 종이 되길 원합니다.늘 은혜와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90년대 초반 러시아 사할린에 우리 동포들을 수송하기 위해 자주 갔다.이곳은 눈이 너무 많아 조종사들이 꺼리는 곳인데 내가 기꺼이 자원한 것은 빈 비행기로 갈 때 선교사가 교회를 건축할 자재와 성경 등을 가져다 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소련선교회가 파송한 김봉석 선교사의 교회 입당예배에 참석할 수 있어 참 감격스러웠다.
지하상가로 시작한 지구촌교회는 조봉희 목사의 열정적인 목회와 세계선교 방침에 따라 러시아 중국 인도네시아 등 복음이 못 미치는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당시 우리 교회는 우리가 지향하는 선교의 꿈을 앞당길 세계선교센터 건립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그래서 97년 이 건물을 지을 땅 272평을 19억원에 계약했다.당시 70만원이 교회 재정의 전부였는데 누가 보아도 놀라운 믿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당회에서 결정했지만 장로인 나로서도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었기에 계속 기도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정년퇴직한 후에 가려고 대전에 35평 아파트를 따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그런데 어느날 기도 드리는데 “하나님의 전을 세우지 못해 가실 곳이 없는데 네 육신의 장막이 두 곳이나 되느냐”는 질책이 들리는 것 같았다.즉시 대전 아파트를 팔아 드리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당시 동료들은 내가 돌았다고 야단이었지만 나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주신 것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왜냐 하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하나님께 그 이상의 것을 얻고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꾸 복이라고 말하면 물질적인 것만 생각하는데 ‘건강의 복’‘자식의 복’‘평안의 복’도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지구촌선교센터는 지하 4층,지상 11층,연면적 2030평 규모로 98년 9월 착공했다.건축비 130억원이 350여명의 성도에 의해 마련된 것은 누가 보아도 기적이 아닌가 생각된다.비전을 갖고 중보기도하면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분명 하나님이시다.이 선교센터는 지금까지 120여 교회에서 1500여명 이상이 탐방했다.
[나의 길 나의 신앙―신일덕 (10·끝)] 위기의 순간 홀연히 들려온 ‘주님의 음성’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된 나의 교회생활은 올해로 45년째를 맞는다.그동안 여러 연단을 거치긴 했어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활기차고 의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더구나 목동 지구촌교회에서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을 크게 받고 이를 위해 일조하고 있음을 가슴 뿌듯하게 여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 가장 인정받는 길은 전도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그동안 내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복음을 전한 사람은 4400명 정도가 된다.이중 분명히 예수를 믿겠다고 확인하고 교회로 인도한 사람이 127명이다.나는 생명이 다할 때까지 1만명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길 기도하고 있고 이를 지킬 것이라고 다짐한다.
1997년 1월은 내게 의미깊은 달이다.비행 2만시간을 돌파했기 때문이다.그런데 2만시간을 돌파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새로운 선교적 의미를 부여해주셨다.당시 비행 목적지인 사할린에 도착했을 때가 1만9998시간20분으로 1시간40분만 채우면 영광스런 2만시간 돌파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다.사할린을 출발,김포공항으로 돌아오는 가운데 2만시간을 채우게 돼 가슴이 벅찼고 동료들도 축하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할린은 당시 눈이 120㎝나 와서 활주로 중앙을 정확히 달리지 않으면 얼음으로 변한 거대한 눈덩이에 부딪치게 된다.비행기가 이륙하는데 이사야서 43장 1∼3절 말씀이 가슴으로 다가왔다.내가 조종할 화물기는 군수물자를 320t이나 실어 엄청나게 무거웠고 그만큼 위험도도 높았다.그런데 비행기 출력을 높이는 순간 1번 엔진이 꺼지며 왼쪽으로 기체가 기울어지면서 눈덩이속으로 막 빠지려는 것이 아닌가.“주여”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데 갑자기 “스티어링을 잡아라”란 큰소리가 들렸다.앞바퀴를 조작하는 이 핸들을 잡아 응급처치를 한 순간 거대한 비행기가 간신히 센터라인에 멈추었다.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 소리는 도데체 어디서 난 것일까.
나는 이 사건으로 인간이 높은 가치로 잡아놓은 2만시간 비행돌파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확고히 깨닫게 되었다.아무리 인간이 잘났고 엄청난 문명의 이기인 비행기를 만들어 비행해도 모두 주의 손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내게 들린그 음성이 분명 주님의 음성이란 것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한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99년 만 60세로 비행생활을 종료한 나는 이제 후진들을 지도하고 있다.그동안 조봉희 목사님의 권유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항공선교학과를 졸업했다.아울러 지구촌교회내에 항공선교회를 설립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현재 기장 5명과 여승무원 등 10여명이 회원이지만 곧 작은 항공기 1대를 도입,도서지역 및 미자립교회를 찾아나설 계획이다.요즘은 북한선교학을 공부중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통해 두 아들을 신앙 안에서 잘 양육시켜 주셨고 모든 것을 은혜 가운데 이뤄지게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아들들도 모두 해병대에서 군생활을 했고 온 가족이 신앙 안에서 화평과 은혜를 누리고 있다.나 역시 이 나이로 후진들을 지도하며 여러 분야에서 봉사하고 일하게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그동안 연재된 부족한 간증을 읽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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