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동식물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
부르는 게 값 코끼리 가죽,화려한 유혹 비단뱀 가죽
인간은 동물의 가죽을 둘러 더위와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가죽과 함께 의복사(史)가 시작한 셈이다.쉽게 길들일 수 있었던 포유류, 특히 소·돼지·양의 가죽이 널리 쓰였다. 이 가죽들은 쉽게 구할 수 있고 동물의 연령이나 가공 방식에 따라 독특한 질감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실용성도 높다. 하지만 값지고 희귀해서 아무나 지닐 수 없는 가죽들이 있다. 이국적인 분위기마저 풍겨 미적으로도 뛰어난 가치를 가졌다.
타조 Ostrich
타조 가죽은 악어 가죽 못지않게 최고급으로 인정받는다.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 규제를 받지는 않지만 보통 농장에서 사육된 타조의 가죽이 사용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50개국 이상에서 타조를 사육하고 있다. 최고로 치는 건 원산지인 남아프리카산이다. 지금은 깃털이 뽑혀나간 가죽이 대접받지만, 먼저 각광받은 것은 깃털이다. 19세기 서양에서 상류층 여성들의 모자엔 타조 깃털이 장식으로 쓰이곤 했다. 악어 사냥이 금지되고 악어 가죽에 관한 규제가 늘어난 1980년대, 타조 가죽은 고급 가죽시장의 대체재로 떠올랐다. 타조 가죽의 매력은 표면의 올록볼록한 무늬다.
희귀한 가죽의 세계
깃털 자국(quill marks)이라 불리는 깃털 뽑아낸 자리의 돌기가 독특한 입체감과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최고급 브랜드들은 주로 엉덩이 부위의 가죽을 사용한다. 털 구멍의 크기가 가장 균일하기 때문이다. 과 몸통이 만나는 부위의 가죽도 부드럽고 견고해 선호된다. 타조 가죽은 튼튼하고 탄력이 좋다. 내구성이 소가죽의 다섯 배 이상이다. 통풍도 잘된다. 또 염색도 용이한 편이라 핸드백지갑벨트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다리의 가죽도 사용하는데, 돌기가 없고 파충류 가죽과 비슷한 질감을 가졌다.
파이톤 Python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의 활에 맞아 죽은 거대한 구렁이가 파이톤이다. 땅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로 산자락을 덮을 만큼 엄청나게 컸는데, 성질이 포악해 사람과 가축을 잡아먹다가 죽임을 당했다. 유혹의 상징인 뱀은, 가죽마저도 관능적이다. 흔히 비단뱀 가죽을 일컫는 파이톤은 올해 가을·겨울 시즌
의 대세다. 올봄 패션쇼 무대에서는 프라다·구찌·베르사체·미소니 등이 화려한 색깔을 입은 파이톤을 사용해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구두·핸드백은 물론 발끝까지 닿는 가죽 롱코트도 런웨이에 올랐다.파이톤은 가죽을 덮은 비늘의 독특한 무늬와 결 따라 변하는 색감이 어느 가죽보다 화려하다. 질기고 탄력도 좋다.
비늘도 피부의 일부이기 때문에 쉽게 떨어지지 않고, 시간이 흘러도 가죽의 고급스러움이 잘 유지된다. 배를 중심으로 갈라 등가죽을 살린 프런트 컷(front cut), 등을 중심으로 갈라 배의 무늬를 살린 백 컷(back cut)으로 나뉜다. 품질에는 차이가 없지만 명품업체에서는 주로 백 컷을 선호한다. 파이톤은 무늬를 잘 맞춰야 하고 가죽이 접히는 부분의 비늘이 뜰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숙련된 장인의 손을 거쳐야 한다. 아프리카·동남아·호주 등 열대 지역에 서식하는데 CITES 2종 동물로 지정돼 허가를 받아야 거래할 수 있고, 따라서 가치도 높다.
도마뱀 Lizard 특유의 오밀조밀한 무늬와 고급스러운 광택을 갖는 도마뱀 가죽도 파충류 가죽 중에서 인기가 높고 귀한 대접을 받는다. 도마뱀 가죽은 종류가 많고 무늬도 다양하다. 최고로 치는 건 동남아산인 링도마뱀이다. 등 부분에 찍힌 동그란 무늬가 특징이다. 나일 코모도 왕도마뱀도 크기가 큰 편이어서 가치가 높은데, 독특한 무늬가 없다. 도마뱀 가죽은 다른 파충류 가죽만큼 질기지는 않지만 소가죽보다는 튼튼하다. 가죽의 두께가 얇은 편이라 부드럽고 유연성이 좋지만 강도는 약한 편. 도마뱀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가죽은 주로 지갑·벨트 등 소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에르메스에선 도마뱀 가죽으로 만든 25㎝ 버킨백이 나온다.
코끼리 Elephant 코끼리 하면 상아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코끼리 가죽은 모든 가죽을 통틀어 가장 희귀하다. 코끼리 가죽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살처분(culling)’을 허가할 때만 얻을 수 있다. 코끼리는 CITES 등록 동물이다. 하지만 수가 급증해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사례가 늘면 아프리카 국가들은 인위적인 개체수 조절에 나선다. 이때 코끼리 가죽을 얻을 수 있다. 가죽 수입업체에 따르면 넓이당 단가는 악어 가죽이 더 비싸지만 코끼리 가죽은 워낙 귀해서 때로 ‘부르는 게 값’이 되기도 한다. 코끼리 가죽은 엄청나게 질기고 튼튼해서 100년은 너끈하다. 잔물결처럼 주름진 무늬가 아름답다. 가방이나 신발을 만드는 데 쓰이고, 럭셔리카의 가죽 시트용으로도 사용된다. 몸통만 아니라 귀, 코 가죽도 사용하는데 얇고 부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