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몽양 여운형의 삶
태양 꿈을 꾸고 낳은 아이
여운형(呂運亨)은 1886년 5월 25일(음력 4월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꼴(妙谷)에서 아버지 여정현(呂鼎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李)씨가 치마폭에 태양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훗날 몽양(夢陽)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몸은 타고날 때부터 강건한 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위급할 때는 향리인 묘꼴에서 90리길이 되는 서울 광교까지 단숨에 달려왔다가 한약을 지어 당일로 되돌아올 정도였다. 대가 세서 무엇이든 남에게 머리 숙이는 일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러나 남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머리와 베푸는 너그러움이 있었다.
열네 살이 되던 해, 그는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영어선생을 하던 족숙 여병현(呂炳鉉)의 손에 이끌려 미션스쿨인 배재학당에 입학했으나 반 아이들과 남산에 놀러가느라고 주일 예배를 빠졌다가 담임선생이, “어제 예배당에 불참한 학생은 손들어 보라.”고 물어 정직하게 손을 들었더니 자기 혼자뿐이었다. 담임선생은 그를 야단치고 한 시간 동안 자습하라는 벌을 내렸다.
그러자 소년 여운형은,
“정직한 학생은 벌주고, 오히려 속인 놈들은 눈감아 주다니 이런 공평치 못한 학교는 다닐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고 그 달음으로 민영환이 세운 흥화(興化)학교로 전학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장차 직업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나라에서 운영하던 통신원 부설의 우무학당(郵務學堂)으로 전학했다.
나랏일에 눈뜨는 여운형
때는 명성황후의 외척정치가 끝나고, 엄비의 환관정치 시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나랏일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담장 높은 궁중 안에서 행해지는 정치의 실체에 대해서는 요령부득이었다.
“대궐엔 한다하는 대감들도 많을 터인데, 어떻게 내시들 세상이 되어 가는지 나는 그 점을 통 이해할 수 없네.” 여운형이 개탄하자 동급생 가운데 궁정에 출입하는 관리의 아들이 이렇게 대꾸했다.
“그건 내시들이 대감들을 눌렀기 때문이야. 정치란 밖에서 보면 복잡한 것 같아도 실상 내용을 알고 보면 힘겨루기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자 여운형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래? 정치란 힘겨루기인가? 그럼 내시들이 어떤 방법으로 힘을 갖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겠군.” “알지. 힘을 가지려면 말이야. 사람을 모아야 하네. 작당을 크게 하면 크게 할수록 힘이 생겨나는 거야.” 여운형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모아야 힘이 생긴다는 관리 아들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노방연설에 나선 여운형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 여운형은 열여덟 살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후 러시아의 남진야욕을 몹시 경계하는 일반 여론을 따라, 일본 같은 작은 나라가 러시아처럼 큰 나라와 붙게 되었으니 조선은 차제에 일본을 편 들어주고, 나중에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뜻을 상달하려고 어느 날 포덕문(布德門) 앞에 나아가 입궐하는 대신의 사륜교 채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우무학당에 다니는 여운형이란 학생입인데, 국사를 아뢸 일이 있으니 잠시 발길을 멈추어 주십시오.”
“국사를?”
“네. 아라사와 일본은 전쟁을 치르게 되었으니, 조선은 하루빨리 한일동맹을 맺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야 합니다. 국병을 전선에 파견하도록 주상께 상주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기회에 조선의 주권을 확보할 기초를 만드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때의 여운형은 러시아의 남진 야욕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일본의 흉심에 대해선 잘 몰랐다. 마침 여운형이 이날 사륜교를 멈춘 대신은 친일파였으므로 여운형을 칭찬한 뒤 궐 안으로 사라졌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조선을 보호해주겠다면서 을사조약을 맺었다. 이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한 흥화학교 교장 민영환이 자결했다. 여운형은 그가 남긴 유서를 전해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일본의 흉계와 을사조약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내가 이리 무서운 것만 알았지, 여우 무서운 것을 몰랐구나.”
자신이 국제정세에 너무 어두웠던 것을 자책하며 나라의 앞날을 번민하던 여운형은 마침내 졸업을 앞둔 우무학당을 그만 두고 향리의 각처를 순회하면서 민영환이 자결한 이유와 일본의 흉계를 폭로하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 제일의 웅변가라 일컬어지는 여운형의 사자후는 이때부터 그 기초를 쌓게 되는 것이다. 젊은 여운형은 노방연설을 하다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스스로의 격정에 못 이겨 눈물을 뿌렸고, 그러면 이를 경청하던 길가의 청중들이 다 감동하여 엉엉 따라 울었다고 한다. 하루는 말을 타고 지나던 양평군수 양모가 그의 연설을 듣고 나이를 물어본 뒤, “아, 훌륭한 젊은이로다. 내가 그대의 연설을 듣고 일진회(一進會)를 탈퇴할 생각이 들었다.” 하고 옷소매로 자신의 눈물을 훔치며 사라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을사조약후 조정에서 운영하던 통신원(通信院)이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자 여운형은 우무학당의 동창 20여명을 모았다. 사람을 모으니 과연 관리 아들의 말처럼 힘이 되었다. 여운형은 이들을 이끌고 통신원 이관 반대운동을 맹렬히 전개해 나가면서 동지를 모으는 데는 대의명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체득하게 되었다.
종들을 해방한 여운형
통감부가 설치된 후 조선은 날로 일본인의 세상이 되어갔다. 여운형은 배우기 시작한 담배를 끊었다. 일본에 대한 국채상환을 위해 금연운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 이듬해 아버지가 다시 유행성 열병으로 사망하자, 새 가주가 된 스무 살의 여운형은 이런 저런 독서를 통해 얻은 계몽지식을 받아들여, “나라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 따위 썩은 풍습과 미신이 다 무엇이냐.” 하고 가위로 자신의 상투를 잘라낸 다음,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신주 단지를 땅속에 파묻고, 광속에 가득 찬 터줏대감이니 성주대감이니 하는 울긋불긋한 솜 각시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불살랐다.
여운형은 큰일 났다며 수군거리는 남녀 노비들을 마당 한가운데 불러 모아,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사람은 타고날 때부터 모두가 평등한 것이니, 주종지의(主從之義)는 어제까지의 풍습이다. 오늘부터 그대들은 종이 아니라 나의 형제요 자매니, 모두 자유롭게 행동하라. 나는 여러분을 노비에서 해방하기로 결심하였다.” 하고 대청마루에서 큰소리로 선언한 다음 솜 각시가 타오르는 불길 속에 노비문서를 모조리 던져 넣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양평군 일대에 알려지자 대소가의 일가친척들과 인근 양반들이 우르르 몰려와, “자네는 조상도 모르는 패륜아인가. 자네 때문에 이제는 양반이 종을 부릴 수도 없게 되었다.” 하고 격렬히 항의하고 나무랐다.
그러나 여운형은 오히려 그들을 여러 가지로 설득하여 돌려보내는 한편, 선언한대로 집안의 노비들은 모두 내보내고, 갈 곳 없는 어린 노비는 혼처까지 구해주어 집밖으로 내보냈다. 천성으로 물욕이 없던 그는 빚 문서까지 다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국치일을 당하며
이렇게 집안을 정리하고 상경한 여운형은 경신(敬新)학교에 동생 여운홍을 집어넣고, 자신은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郭安蓮) 목사 집에 기거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동생의 학자금을 벌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지에 부모 잃은 고아가 되어버린 이 형제간의 우애는 남달랐다.
당시의 우국지사와 애국청년들 사이에는 저 눈꼴신 왜놈들을 대항하려면 아라사도 안 되고 청나라도 힘이 없으니, 이제 우리가 기댈 곳은 미국 밖에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여운형이 다니는 승동교회 등 당시 야소교에 모여든 인물들은 훗날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우국지사들이 많았는데, 이상재(李商在),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이회영(李會榮), 이승훈(李承勳), 주시경(周時經) 등등이 다 그런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미 나라는 기울대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운형 형제는 당시 풍습대로 방갓을 쓰고, 미국에서 돌아온 애국자 안창호(安昌浩)의 시국강연회 구경을 가게 되었다.
여운형은 이날 안창호가 만장한 청중들을 향해 행한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뒤 동생 여운홍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산 같은 애국자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더 해야 한다. 돈을 모으자. 그 돈으로 우선 네가 먼저 미국에 유학 가거라. 나도 뒤따라가겠다.”
그는 생활의 방편도 되고 하여 일단 강릉의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교편생활에 전념하고 있다가 한일합방을 맞았다.
예기하고 있던 일이기는 했으나, 막상 국치일(國恥日)을 당하고 보니 슬픔은 컸다. 청년들은 모두 엉엉 울었고, 울다가 가슴을 치고 벽을 치고 이를 갈고 술을 퍼먹고 울고, 또 깨어나면 다시 울었다. 양친을 잃고 다시 나라를 잃은 여운형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었다.
합방후 초당의숙이 당국에 의해 폐쇄 당한 뒤 다시 상경하자, 클라크 선교사는 여운형을 목사로 만들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나라 잃은 여운형의 마음은 다급해져 있었다. 한가히 목사 공부나 하고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그는 이시영 형제가 세운 신흥(新興)무관학교에 입학할 생각으로 우선 학교가 위치한 만주 유하현에 견학을 하러갔다. 이 여행의 결론은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의 한 책원지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독립군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훌륭한 운동가가 되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그는 당초 약속대로 동생과 함께 미국에 유학 갈 준비에 착수했다.
중국 유학을 떠나다 그 무렵 중국 쪽에서 손문의 신해혁명이 터져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여운형의 마음은 불길처럼 끓어올랐다. 중국을 혁명으로 이끌어 나라를 세운 당대의 영웅 손문은 서울에서도 그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중국으로 건너가 손문의 혁명을 배워야겠다.”
이렇게 결심한 여운형은 마침내 동생을 미국에 유학 보낸 다음해 자신보다 서너 살 아래인 조동호(趙東祜)를 데리고 만주행 열차에 올랐다. 도중 개성에서 하차하여 거기서 고려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평생 친구 이만규(李萬珪)의 집에 들렀다.
이만규는 중국에 가서 손문 같은 혁명가가 되어 돌아오고 싶다는 여운형의 포부를 듣고 다음과 같은 한시 한 편을 헌사했다.
桃園三傑 義不失於 風塵之際
竹林七賢 趣相深於 山水之間
(도원 3걸은 세상이 어지러워도 의를 잃지 않았건만
산간에 박힌 죽림칠현은 서로간 취미만 깊게 하더라)
그러자 여운형은 이렇게 화답했다.
誓海魚龍動 (바다에 서약하니 어룡이 움직이고)
盟山草木知 (산들에 맹서하니 초목이 이를 안다)
그 길로 중국으로 건너간 여운형은 남경 금릉(金陵)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당초 언더우드 박사의 추천장을 얻어 신학과에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금릉대학에는 신학과가 없어 영문과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해에서의 활동
1917년 대학을 졸업한 여운형은 상해로 내려가 잡지사 등을 전전하다가 미국인 연합회가 경영하는 협화서국(協和書局)에 일자리를 얻었다.
일종의 대형서점으로서 여운형은 위탁판매부 주임으로 일했다. 보수도 괜찮았고,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양서를 마음대로 읽을 수 있었다. 여운형은 운동, 독서 등 자기 향상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유유히 흐르는 황포강을 끼고 있는 드넓은 상해는 당시 동서양을 연결하는 정치의 중심지로서 모든 풍요로움과 모든 비참함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그리고 여러 나라 말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 망명자의 어머니였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이곳에 건너와 살고 있는 조선인들이 약 8백 명가량 있었다. 중국대학을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영어를 잘 하는 여운형은 협화서국의 근무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하고는 미국 등지로 유학을 하려는 교포 자제들의 도항절차와 수속을 도와주거나 조선인이 관계된 시비나 분규를 해결하는데 할애했다. 일이 성사되면 당사자들은 사례금 같은 것을 내놓았지만 물욕이 없는 여운형은 이를 받는 일이 없었다.
이런 소문이 상해 거주 교포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자 여운형은 어느새 교포들로부터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상해 거류민들이 조직한 교민단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단장에 선출되었다.
크레인 특사와의 면담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상해 천지는 물 끓듯 했으며, 시가지 여기저기서 난타되는 평화의 종소리가 귀를 얼얼하게 만드는 가운데 연 이틀에 걸친 대대적인 축하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여운형은 더 이상 무명청년이 아니었다. 카이젤 콧수염을 기른 그는 상해의 조선 거류민 단장 자격으로 이 퍼레이드를 주최한 영국 정청의 내빈석에 초대되어 열국 거류민 단장들과 환담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하고 있는 미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중국을 방문하자, 여운형은 회비를 내고 칼튼 호텔 연회장에 참석하여 크레인 특사의 강연을 들었다.
약 1천명의 청중이 참가한 이 연회에서 크레인 특사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놓은 14개조를 선전하면서 파리에서 열릴 평화회의에서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는 요지의 강연을 행했다.
집회가 끝난 후 여운형은 환영연회를 주최한 범태평양회의 왕정정(王正廷) 소개를 받아 크레인 특사를 직접 만나 이렇게 물어보았다.
“조선도 피압박민족이니까 민족 실정을 호소하는 조선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수 있습니까?”
크레인 특사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여운형은 조선이 금방 독립이나 되는 것 같은 감격을 억제하지 못하고 평소부터 유대관계를 맺어오던 조동호, 장덕수(張德秀), 한진교(韓鎭敎), 신석우(申錫雨), 김철(金澈), 선우혁(鮮于赫) 등의 지식청년들에 크레인 특사의 연설과 회견내용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청년동지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방해가 예상되므로 여운형과 청년 지식인들은 조선대표가 참가할 수 없는 경우를 상정하여 조선의 피압박 상황을 알리는 진정서를 영문으로 두통 작성하여, 하나는 크레인 특사를 통해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하고, 다른 하나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인 상해 평론잡지사 사장 밀러드에게 그 전달을 부탁하기로 했다. 곧 장덕수, 조동호, 신국권 세 사람이 영문 진정서를 작성하여 협화서국 사장 조지 피치 박사에게 보이고 영어문장을 수정받았다.
그러나 사정을 알아보니 진정서는 개인자격으론 보낼 수가 없고, 최소한 대표기관이나 단체명의로 보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망명 민족에게 대표기관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여기서 여운형은 평소 친교를 맺고 있던 상해의 터키청년단 을 문득 떠올리고 이걸 한번 흉내 내면 어떻겠느냐고 일동에게 제안했다. 곧 각 조계지에 흩어져 있던 40명의 조선청년이 남경로의 한 반점에 모여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 을 결성했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
여운형이 결성한 이 신한청년단이야말로 한국 근대사의 최초 정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한청년단의 총무간사에 피선된 여운형은 밀러드를 찾아가서 진정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은 강도적으로 조선을 합병한 뒤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 모든 면에서 탄압과 착취를 자행하므로 조선은 불가불 독립해야겠다.”는 요지였다. 진정서를 읽어본 밀러드는 이 서한을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여운형은 동지들에게 돌아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대표로 당시 장가구의 미국인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김규식(金奎植)을 추천했다. 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만한 인물이 별로 없다는데 모두 동의했다.
대표 파견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장덕수가 배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으며, 여운형은 교포들에게 이 문제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반응이 곧 나타났다.
교포들이 20원, 30원씩 돈을 내놓아 1천원의 성금이 걷혔다. 중류 사무직이 한 달에 20원 정도이던 때였으므로 큰돈이었다. 한편 부산으로 들어갔던 장덕수가 국내에서 2천원의 성금을 걷어가지고 돌아왔고, 김규식이 어디서 조달했는지 거금 4천여 원을 마련해 가지고 상해로 내려왔다.
해는 바뀌어 1919년이 되었고, 파리강화회의는 그해 1월28일부터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강화회의 때문에 프랑스로 가는 배표는 그해 3월분까지 매진되어 있었다. 조선대표를 파견하기로 한 동지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다시 활동적인 여운형이 나서 천지사방으로 수소문을 해보니 중국대표단 가운데 수행원의 한사람인 정육수(鄭毓秀)가 갑자기 부친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운형은 그녀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여 배표를 인계 받았다.
1919년 2월1일.
황포강변에 맞닿았던 여객선이 뱃고동을 울렸다. 중국대표단 일행에 섞여 배를 탄 김규식은 황포강변에 배웅 나온 동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거대한 선체를 꿈틀거리며 바다와 맞닿은 양자강 하구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여객선을 보면서 이 대표 파견의 조직자요 그 후원자인 여운형은 제방 위에서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3.1운동을 불씨를 제공한 장본인
반드 스트리트와 마주치는 남경로의 커세이 호텔(和平飯店) 1층 레스토랑에선 일군의 조선청년들이 자축연을 베풀었다. 훗날 주은래가 자주 들리곤 했다는 이 호텔은 당시도 상해 제일의 호텔로서 값이 무척 비쌌다. 그러나 김규식을 떠나보낸 청년들은 이날만은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 여운형도 이날만은 술을 마셨다.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턴 천지사방에 조선이 독립된다는 것을 알려야 하오. 설산(장덕수)은 국내를 다시 다녀오시오. 나는 북간도(만주)와 서간도(러시아)의 동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으니.”
여운형은 국내연락을 위해 장덕수가 인천으로 떠난 뒤 자신도 직장에 사정을 설명하고 곧 북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 형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장사꾼으로 변장한 그는 장춘, 하얼빈, 소왕령, 해삼위 등지를 돌면서 각 지역 독립 운동가들에게 방금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모두 상해로 와줄 것을 권고했다.
여운형은 이때 어떤 구체적인 개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권고는 자신도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여운형의 이 순방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이제까지의 북서간도 지방에서 상해지역으로 뒤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점은 그가 중심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조선대표로 파견한 사실이 장덕수를 통해 내외에 알려지면서 일본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 2.8 독립선언문이 반포되고, 다시 국내에서는 거족적인 3.1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상해로 몰려드는 명사들
서간도와 북간도를 돌고 상해에 다시 도착하여 기차역을 나오니 이미 남방풍물은 이미 봄기운이 완연했다.
거처로 돌아오니 기무라(木村謙二)라는 변명을 하고 인천으로 떠났던 장덕수가 항구에서 체포되어 전남 하의도로 유배되고 말았다는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나쁜 소식은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밀러드에게 맡겼던 진정서가 요코하마를 경유하는 도중에 분실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좋은 소식도 있었다.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공부하던 동생 여운홍이 조선을 경유하여 상해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이 북국에서 돌아온 지 열흘 동안에 상해에는 각처의 독립운동 인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항주에서 신규식이 왔고, 본국에서 신익희, 현순, 최창식, 선우혁, 김철 등이 왔으며, 일본에서 이광수, 최근우가, 서간도에서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무려 30여명의 명사들이 몰려왔다.
상해의 터줏대감처럼 되어있던 여운형은 이들을 성심껏 대접했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가 있는 하비로 부근의 보창로(寶昌路) 329번지에 독립임시사무실을 개설하고, 그들에게 들은 각처의 독립운동 현황을 각 신문사와 통신사에 알리느라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파리로 간 김규식으로부턴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 무렵 미국에 유학 갔던 동생이 조선을 경유하여 상해로 들어왔기 때문에 여운형은 실로 6년 만에 보는 아우를 껴안고 형제가 다시 재회하는 기쁨을 누렸다.
임시정부의 산파역
1919년 4월10일 오전 10시.
여운형은 이날 상쾌한 기분으로 동생과 함께 법계 하비로에 있는 한 외국인 가옥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주장해온 독립운동기관을 조직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각처의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일종의 사령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의에 참가한 인원은 여운형을 포함하여 모두 29명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의 발의로 임시정부 설립안이 통과되었다. 임정의 조각을 전후하여 상해엔 수많은 조선명사들이 밀려들었다.
이때 여운형은 임정의 외교위원에 피선되기는 했지만,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과 그의 보좌역으로 파견했던 동생 여운홍과 조소앙이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한 마당에는 차라리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외국에 알리는 것이 더 긴요하다는 판단하에 미국에서 온 황진남과 함께 외국인 기자나 인사들을 만나는 일에 더 주력했다.
영어에 자신이 있던 두 청년은 수많은 서양인들을 만나 조선 문제를 호소했다.
그해 8월, 여운형은 외국인 전용 피서지인 여산(廬山) 유원지를 찾아 그곳에 놀러온 각국 외교관 및 명사 1천여 명을 상대로 전단을 돌리고 조선독립에 대한 일대 연설을 행했다. 이것이 눈에 띄어 여운형의 활동은 각국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그의 대외 활동은 마침 3.1운동 후 조선문제로 고심하던 하라 다카시(原敬) 일본수상의 눈에 띄게 되었다. 거족적인 3.1운동에 대해 일본정부로서도 조선인을 달래는 정책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일본 조야의 분위기였다. 하라 수상은 척식국 장관 고가(古賀廉造)와 상의해 조선에 자치운동을 벌일만한 사람으로 여운형이라는 청년을 발탁하자고 제안했다.
고가 장관은 이 문제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水野鍊太郞)에게 문의했다. 조선 내외에 그만한 인물이 별로 없다는 대답이 왔다. 고가는 곧 여운형에 대한 접촉을 시작하라고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에 지시했다. 이 일이 임정에 알려지면서 안팎으로 분분한 물의가 일어 심지어는 “여운형이 동경에 간다면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극언까지 해대며 그의 동경행을 반대했다.
그러나 여운형과 가까운 이광수, 윤현진 등이 찬성했고, 특히 여운형이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던 안창호는 노자까지 마련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뭐, 괜티않아. 나라 팔아먹는다구 야단들이디만 팔아먹을 나라가 이시야 팔아먹디? 하하하.”
여운형은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전남 하의도에 유배중인 장덕수를 통역으로 해야겠으니 그를 석방해주는 조건이라면 가는 것을 승낙하겠다고 일본영사관에 통고했다.
좋다는 답이 왔다.
여운형은 평소부터 마음이 맞던 최근우와 승려 신상완을 대동하고 그해 11월 중순경 일본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바다 바람은 차가왔으나 적진으로 들어가는 그의 마음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적의 심장부로
이틀 후 여운형 일행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온 장덕수를 만났다. 거기서 감시역으로 파견 나온 일본 청년 2명과 합세하게 된 여운형은 6인1조가 되어 동경행 기차를 탔다.
동경역에 내리니 광장에는 수백 명의 조선 유학생들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도 여운형의 동경방문을 놓고 찬반논의가 분분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자신이 일본 지도층과 타협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그들을 안심시켰다. 여운형은 조선 대표라는 점을 의식하여 일부러 동경 제일의 데이코쿠(帝國)호텔에 투숙했다.
아침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보니,“여운형, 조선 자치운동 협의차 내일(來日)”이란 기사가 실려 있었다.
신문을 본 최근우와 장덕수가 대경실색하여 이를 알리자 욕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던 여운형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지시했다.
“여운형이가 대노해서 한 놈도 안 만나고 돌아간다더라고 당국에 전화하시오. 만일 놈들이 타협을 원하거든 오늘 조간신문 정정기사를 내주고, 내외기자들을 불러 내가 동경에 온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라고 하시오.”
최근우가 전화를 걸었고, 당황한 당국자는 여운형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겠다고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여운형은 고가 장관을 만났다. 고가는 동경제대 법학박사 출신이었다. 수인사가 끝나자 고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자신은 개인적으로 일한합병을 반대했던 사람이지만, 이미 합병이 된 이상 내 개인 의사는 소멸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독립을 논하기 전에 우선 국부(國富)와 민부(民富), 체강(體强)과 지강(知强)을 길러 실력을 쌓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 한 회사가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 있는 다른 회사에 합병하는 것이 쌍방의 이익이듯, 일한합병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최근우가 보니 여운형의 눈은 빛났고, 카이젤 콧수염이 쏘는 듯 움직였다. 그는 우선 독립운동을 하는 네 가지 이유를 조리정연하게 언급한 다음 이렇게 반박했다.
“대신은 지금 한일합방을 회사합병에 비유하나 이는 절대로 옳지 않소. 회사는 모리(謀利)를 위해 성립한 것이지만, 국가는 사회의 실체요, 역사의 장성(長成)이며, 도덕의 존재요, 사법의 실체이니 개인은 죽음이 있지만 국가는 영속하는 것인즉, 국가를 개량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내 조상과 자손에 대한 의무로 되어 있지 않소이까. 그러므로 애국이란 의(義)가 있는 것이니 이익을 논하기 전에 먼저 국가를 위해서 이익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 아니오이까. 이런 의미에서 한일합방은 벌써 크게 부정한 것이라 하겠소. 동양의 단결과 평화를 생각한다면 조선독립을 가장 긴요한 문제로 다루어야 할 것이오.”
물 흐르듯 쏟아져 나오는 여운형의 변설에 고가는 기가 질린 듯 기가 차다는 듯 숙고하고 있더니 이렇게 역설했다.
“도대체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자가 독립의 승인을 받는다 한들 어떻게 제3국의 침략을 막을 것인가. 조선인은 어리석게 영미의 도움을 바라는 경향이 있으나 영국이 인도에, 미국이 멕시코에 행한 일들을 돌아보라.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는 이미 성립된 일한합병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실력을 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일한이 일치단결하는 것만이 서양세력을 막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란 걸 모르는가?”
“대신은 지금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합방되었으니 실력을 길러 남이 넘볼 수 없게 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럼 합방 후에 조선은 과연 실력을 기를 수 있었는가, 합방 때문에 전보다 훨씬 쇠해지고 말았소이다. 일치단결을 말씀하시나 우리민족은 망국민이 된데 대한 원한이 크고, 비탄이 깊어 이제까지 부끄러움을 참고 10년을 은인하다가 거국일치하여 민족적 독립운동을 개시한 것이오. 금후로 두 민족의 쟁투는 날로 심해져 영일이란 없을 것이오.”
두 사람의 설전은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서로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린지 일주일쯤 되던 날, 여운형 일행이 다시 고가 관저를 방문하니 홀에는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 입은 게이샤가 58명이나 동원된 이날의 연회에는 85세난 고가의 어머니도 참석했다.
고가는 여운형에게 직접 술을 따라주며, “내가 조선에 태어났더라면 나도 그대처럼 했을 것이다. 그대를 회유해 보려던 나의 계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그대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싶은 거다.....하하하하.”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담력과 기지에 찬 담판
고가와의 연속회견이 끝난 후 여운형에게 다나카(田中義一) 육군장관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여운형이 일행과 함께 아카사카의 육군본부에 도착하니 회의실에 안에는 관동군, 청도군, 대만군 사령관을 비롯하여 조선총독부의 미즈노 정무총감, 노다(野田) 체신장관 등 정계와 군부의 실력자들이 열석해 있는데, 장탁 끝머리에 보니 자신과 며칠을 두고 입씨름했던 고가 척식장관도 와 있었다.
초청자인 다나카 육군장관이 거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일본은 지금 3백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조선은 우리와 한번 일전(一戰)해볼 용의가 있는가?”
여운형이 침묵하자 다나카는 언성을 높였다. “그런 용의가 없다면 조선은 자치를 하면서 일본과 제휴하는 게 제일 현명한 길이다. 한마디로 조선은 일본과 제휴하면 부귀를 누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자비한 강압이 있을 뿐이다. 만세 부르는 일 따위로 독립은 되지 않는다. 3백만 대군의 대일본제국이 그걸 허락하겠는가?”
마치 군도로 내리치는 것 같은 험악함이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는 늠름한 모습으로 다나카의 협박과 좌중의 압력을 지탱하면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 드리지요. 연전 대서양을 항해하던 화일스타라는 배가 물위에 나온 빙산덩이를 작다고 업수이 보며 그대로 돌진하다 침몰하고 말았소. 조선인이 부르짖는 독립만세는 물위에 나온 그 빙산의 일각이외다. 만일 무시했다간 일본은 세계 인류의 정의에 부딪혀 망하고 말 것이오.”
다나카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하며 대단히 심기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자신의 화를 극도로 억제하고 있었다. 이어 청도군 사령관이 다나카를 거들었으나 도도히 흐르는 여운형의 변설에 어이없이 압도당하고 말자 안 되겠다고 느낀 미즈노 정무총감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여운형은 이렇게 역습했다.
“아 참, 총감께선 일전 경성역에서 강우규의 폭탄 세례를 받으신 모양이던데 그때 얼마나 무서우셨소?”
당시 미즈노는 현장에서 폭탄세례를 맞고 그 자리에서 직사할 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갑작스레 허를 찔린 미즈노는 벌개진 얼굴로 물었다.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그대는 과연 조선을 독립시킬 자신이 있는가?”
“그럼 총감은 저처럼 거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폭탄이 터지는 조선을 과연 통치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이 질문에 미즈노는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노다 체신장관의 차례였다.
그는 당시 하라 내각 각료 가운데서 머리가 좋은 장관으로 정평이 나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보기를 이 자는 완곡한 수사학이나 논설로도 안 되고 이론으로도 안 되며 단순한 공갈 협박도 안 되니, 역으로 사실적인 것을 단순 명쾌하게 지적함으로서 기를 꺾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대가 이러쿵저러쿵 답변을 한다만 다 쓸데없는 짓이다. 조선을 합병한 것은 일본이 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의 생사가 달려있는 조선을 그냥 내놓을 수야 있겠는가. 그대들이 그렇듯 원한다면 실력으로 싸워서 독립을 찾아가란 말이다. 절대로 거저 주진 않겠다.”
장관쯤 되면 어느 정도 말에 여운과 여백을 두는 법인데 이것은 거의 폭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노골적으로 까뒤집음으로서 여운형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 “그런즉 조선은 자치하는 수밖에 없다. 자네가 자치운동을 한번 일으켜보면 어떤가?”하고 권유해볼 심산이었다.
그러자 여운형은 아주 정중한 태도를 취하더니,
“사실은 내가 동경에 온 이래로 오늘까지 낙심천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볼만한 것이 없어서 공연한 헛걸음을 했다고 마음으로 잔뜩 불만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인물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군요. 제겐 커다란 소득입니다. 대신은 과연 인물이십니다. 일본인 가운데 오직 대신만이 인간적이고 양심적이며 거짓 없는 참말을 해 주셨소. 내 마음이 아주 상쾌합니다.”
하고 엉뚱한 배포로 노다를 돌려쳤다. 이 말을 들은 노다는 기가 막혔던지, “내가 밑졌다.”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처럼 회유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정부는 당초 일정에 넣었던 여운형의 총리 회견 및 천황 알현의 계획을 모두 중단하고 말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사자후
며칠 후 여운형은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홀에 가득 찬 내외 기자 및 각계인사 5백여 명을 상대로 두 시간 동안에 걸쳐 조선이 왜 독립해야만 하는지 그 까닭을 역설한 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다 울 때를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 우는 것이지, 남이 운다고 따라 우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한국의 독립운동 또한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결코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에 도취되어 일어난 게 아니올시다. 한민족은 이제 열화 같은 애국심이 폭발했습니다. 붉은 피와 생명으로서 조국 독립에 이바지 하겠다는 것을 과연 그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장덕수의 명 통역을 통해 불을 뿜는 듯한 그의 사자후 연설이 끝나자 만좌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회견이 끝난 뒤 태양잡지사 사장은, “조선독립에 대한 이론이 참 명쾌했소. 잡지에 실고 싶으니 글로 써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의 이 같은 동경 행적은 각 신문에 보도되어 일본 조야에 일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동경제대 교수 요시노(吉野作造) 같은 이가 “여씨의 주장 가운데는 확실히 하나의 침범하기 어려운 정의의 섬광이 엿보인다.”고 격찬하는 가운데, 일본 국회는 하라 수상 이하 관련 장관들을 소환하여,“탄주지어(呑舟之魚:여운형)를 그대로 놓아준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이 문제를 격렬히 추궁했다.
임정의 내분
여운형은 그해 12월 중순경 개선장군처럼 상해에 돌아왔다. 그의 동경 행적은 신문을 통해서 상해에도 조선에도 이미 상세히 알려져 있었다. 배에서 내리니 각국 기자들의 플래쉬가 요란히 터진다. 중국 정객들이 다투어 그에게 접근했다.
뛰어난 풍채, 일본정계를 태풍 속으로 휘몰아 넣은 담력과 기지, 탁월한 영어실력은 이 30대 중반의 젊은이를 일약 국제적 명사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가 동경에서 돌아온 다음해 2월경 임정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미국의 위임 통치국으로 해 달라.”고 청원하여 내외의 물의를 빚었고, 신채호가 주동이 된 이승만 반대운동이 임정 안팎에서 격렬히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 동지회를 이끌고 있던 이승만은 국민회를 이끌고 있던 안창호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곧 임정 내에도 이승만계와 안창호계가 생겨나면서 이 대립은 각 인맥을 타고 격렬한 암투로 발전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자신의 출신지로 보면 의당 이승만의 기호파에 속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안창호의 서북파로 분류되었다. 안창호와 가깝다는 사정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임정 태동시부터 임정의 권역을 벗어나 동경행이다 뭐다 하여 “개인적 명성을 올리고 다니는” 여운형에 대한 임정 주류파의 질시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초 상해 임정이 조직되는 과정에서 초기에 모든 뒷바라지를 한 것은 사실상 신한청년단의 여운형이었다. 임정이 설립된 후 여운형은 신한청년단에서 쓰던 모든 시설과 집기물까지 다 임정에 바쳤다. 당시 상해임정수립에 참여했던 소설가 이광수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임정과 임시의정원을 조직하는 회장과 사무를 마련하고, 각지로서 모여온 지도자를 여러 번 초청하여 시국수습을 요청하는 인사를 한 뒤 신한청년단은 자진소멸했는데 이것은 아마 운동사상 희한한 전례일 것이다.”
임정내의 소장파에 속했던 여운형은 실권도 없는 임정내의 감투자리를 놓고 이전투구 하는 노소장간의 지방색이나 파벌을 특히 싫어했다.
레닌을 두 번 만난 여운형
1921년 봄, 파벌투쟁이 벌어지는 임정에서 한발 멀리 한 그는 손문과 같은 중국의 지도자들과 교유하고 있었으며, 그해 1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서 김규식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어 레닌을 두 번이나 만나 조선독립을 상의했다.
이때 레닌은 여운형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선은 농업국인만큼 현 단계에서는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여운형의 활약이 주효하여 레닌은 임정에 대해 60만 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동휘가 레닌에게서 받아오기로 이 독립운동 자금을 둘러싸고 잡음이 생기자, 여운형은 이 돈이 원래 임정에게 갈 돈인데 이동휘 중심의 상해파 공산당에 만 쓰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임정을 두둔하여 그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레닌이 준 나머지 돈을 받아오던 이동휘의 심복 김립이 임정 측에 암살당한 후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문을 닫았고, 임정도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여운형은 이 무렵 병력 1만 명의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야심찬 계획 하에 자신의 신한청년단과 임정 합작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고, 재정 궁핍에 빠진 임정을 돕기 위해 임정 경제후원회를 조직해보기도 했으나, 3.1운동 후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내외의 독립 열기가 식어가면서 이런 계획들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여운형은 신문사의 통신원, 상해 동방(東方)대학 영어강사, 복단(復旦)대학 명예교수 같은 일들을 보면서 한편으론 국민당의 장개석,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 양쪽과 교우한다는 그 특유의 묘한 위치를 확보해가면서 일종의 중국 객원 혁명가로서 수년간 활동했다.
1927년 여운형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장개석으로부터 영자신문 발간교섭을 받기도 했다. 1928년 여름 그는 복단대학 축구단을 이끌고 남양 원정길에 올라 싱가포르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를 맹렬히 비난해 일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중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상해의 명사였고,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가운데 가정적으로도 단란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이여성 등 훗날의 정치적 동지들이 그를 찾아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상해 인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하던 그는 휴일이면 야구장에 놀러가기도 하고 첫아들 봉구(鳳九)를 데리고 다니면서 영조계의 홍구공원 앞을 지나갈라치면,
“저기 봐라, 뭐라 써있는 줄 아니? 중국인과 개는 못 들어간다고 쓰여 있다. 조선인도 일본인에게 저 비슷한 대접을 받고 있단다. 우린 나라를 되찾아야 해!” 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상해에서 압송되다
1929년 7월 8일. 그는 영조계의 상해 요동경기장 스탠드에 앉아 운동경기를 구경하던 여운형은 갑자기 자신의 두 팔을 붙드는 일본 형사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상대는 주먹으로 그의 귀를 가격해왔다. 아령과 각종 스포츠로 단련한 여운형은 얼얼해진 한쪽 귀를 감싸며 재빨리 스탠드 계단을 뛰어올라가 매표구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에서 일본 형사들이 추격하며, “라바(강도야)! 라바!” 하고 고함지르는 소리에 주위를 순찰하던 건장한 영국 경관들이 여운형의 길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해서 여운형은 일단 강도혐의로 영국경찰서에 구류되었다가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로 넘겨졌다. 두 시간 가까이 발로 차고 따귀를 때리며 협박을 했으나 여운형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 형사는 취조를 포기하고 여운형을 일본 영사에게 넘겼다.
“저 구리키라는 형사가 당신을 취조하지 못하겠다는데 왜 취조에 응하지 않습니까?”
일본 영사의 질문에 여운형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혁명가요.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고 할 뿐이오. 그런데 저 형사가 처음부터 나를 고문하겠다고 협박했소. 듣자니 일본경찰은 고문을 가해 없는 일도 만들어낸다고 들었기에 그럼 어디 마음대로 만들어보라고 기다렸을 뿐이오.” 영사는 여운형이 거물 독립운동가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섣불리 다룰 일이 아니었다.
“당신의 뜻을 존중하겠으니 인적사항만 응답하시오.” 하고 기초적인 것만 묻고 그대로 나가사키로 가는 배에 태워 보냈다.
이목을 집중시킨 재판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부두에는 여운형을 취재하려는 일본 및 조선 신문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압송하던 경찰들도 놀라 취재하러 달려드는 기자들과 심한 몸싸움을 벌여야 할 정도였다. 이미 여운형이 서울로 압송되어올 때쯤 국내 신문엔 여운형의 사진과 기사가 연일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압송과 그 후의 공판은 잊혀져가던 여운형의 이름 석 자를 국내에 널리 홍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공판은 일대사건이었다. 1929년 말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그의 1차 공판에는 헌팅캡과 중절모를 쓴 방청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기 위해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루었으나 민심소요의 우려로 입장은 하락되지 않았다.
이 날의 재판정엔 그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나온 변호사만 무려 10여인이나 되었다. 사상검사 이토오(伊藤憲郞)가 원적과 주소를 묻자 여운형은, “내 원적은 상해요, 주소는 현저동 101번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현저동 101번지는 서대문형무소의 주소였던 것이다.
여운형이 중국혁명에 개입한 이유에 대해 답변할 때 재판장이, “피고는 아마도 지나(支那) 애국자인 모양이로군.” 하고 슬쩍 비꼬자 여운형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비장한 음성으로 이렇게 답했다.
“나의 반생의 전성시대를 조국에서 쫓겨나가 중국에서 보냈다. 학업이나 사업이나 다 중국에서 겪었고, 친구가 거기 많고, 강산이 익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양자강 흐르는 물결이 내 눈에 선하다. 내 어찌 중국을 잊을 수 있으랴. 나는 조선을 사랑하고 다음으로는 중국을 사랑하노라.”
여운형의 전기를 쓴 이만규에 따르면, “이 말을 할 때 그 어조가 어찌도 비장하고 감개에 차 있었던지 방청객들이 모두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운형을 담당했던 이토오 검사는 이런 후일담을 남겼다.
“여운형은 묻는 말의 의미를 먼저 해석하여 질문의 요지가 어디 있다는 것을 파악한 후가 아니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계적 정세를 잘 이해하고 조선이 장차 어떻게 진전되리라는 것까지를 예견하여 모든 답변을 정치적으로 두뇌 있게 철저히 대답했다. 조선의 독립 운동가 중에 실로 거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운형은 이 공판에서 3년형을 받았다.
간수도 놀란 여운형의 인품 그러나 여운형은 이 재판 과정을 통해 역으로 국내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의 당당한 풍모와 탁월한 언변, 확고한 독립의지는 뜻있는 젊은이들을 감격시켰다. 국내 언론도 이러저러한 계기를 마련하여 그의 동정을 빠짐없이 전해주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 그는 격투 중에 파괴된 한쪽 고막 때문에 고생했다.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 이빨이 부러지는가 하면, 치질수술을 네 번이나 받고, 신경통과 소화불량으로 수감 6개월 만에 머리가 다 세는 불운이 잇달았다. 그리고 독방에 격리된 외로움.
여운형은 대전감옥에서 이런 한시를 한 편 남겼다.
고개 들어 보자니 달빛이 교교하고 (擧頭望月色皎皎)
벽에 기대 듣자니 벌레소리 낭랑타 (側倚聽蟲聲朗朗)
철창에 의지하여 울기를 토했더니 (依鐵窓吐口鬱氣)
온몸에 끓는 피가 천길을 솟는구나 (滿腔血沸騰千丈)
그러나 여운형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나쁜 국면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수감생활을 자신의 의지와 인격 함양의 기간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하루는 가와코시라는 간수가 물었다.
“내가 7년 동안 수많은 정치범을 보아왔지만 당신 같은 죄수는 처음 보았소. 모두가 분노와 번뇌와 불평으로 지내는데 당신만은 항상 명랑 화평한 기운으로 지나니 그 비결이 무엇이오?” 그러자 여운형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내가 한일은 양심적이고 자각적인 것이므로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나를 후회하지 않는다. 스스로 기쁠 뿐이니 불평할 까닭이 있겠는가?”
조선중앙일보 사장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여운형은 형기만료 4개월을 남긴 1932년 7월에 출감했다.
1914년 고국을 떠난 이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압송되어 3년형을 살고 나온 그에게는 국내에 거처할 집도 가진 돈도 없었다. 이런 약점을 알고 있던 총독부의 경무국장(池田淸)은 그에게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지원해주면 “충청도에 있는 4백석의 국유지와 백석의 개간지를 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나는 본래 배일자로 형을 산 사람인데, 이제 와 어찌 그런 것을 받아 매수자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여운형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던 조동호 등 그의 정치적 동지들은 당시 민간 신문으로서는 3대지에 속했으나, 경영난을 겪고 있던 <중외일보>를 당시 충청 지주 윤희중의 자금지원을 받아 30만엥에 인수한 뒤 제호를 <중앙일보>로 바꾸고, 1933년 2월 여운형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여운형은 사장에 취임하면서 이 신문의 이름을 <조선중앙일보>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중국에도 <중앙일보>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중앙일보>라는 의미에서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꾼 것이다. 조선중앙일보의 주주들은 거처가 없던 여운형에게 휘문중학 뒷담과 맞닿아 있던 계동집을 사옥으로 제공했다. 이로부터 수년간 여운형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장 안정되고 보람찬 시기를 보냈으며, 신문사 사장의 신분으로서 수많은 국내인사들과 사귀고 친분관계를 맺었다.
신문사 사장이 된 다음해인 1934년 여운형은 조선체육회 회장에 추대되어 1937년 해산될 때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사세면에서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기사와 논조는 단연 민족주의적인 면이 두드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장기 말소사건
사장 재임시에 한 일들 가운데 특이할 만한 것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단장 사업이 있다. 역사적 인물 가운데 여운형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의 하나가 이순신 장군이었다고 한다. 그는 1934년 11월 어느 날 충청남도 아산의 어라산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묘소를 찾아갔다가 황폐한 모습을 발견하고 다음해 봄이 되자 허물어진 묘를 손질하여 둥글게 만드는 등 토역작업을 말끔히 끝내고 주변에 나무를 심었으며, 서예가인 이각경에게 부탁하여 이순신 장군을 칭송하는 공덕비를 세웠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은 이순신 장군의 조국애와 멸사봉공의 위업을 기리고 그 후손들을 위로했지만, 이를 통해 민족정기를 바로 하자는 속뜻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후 여운형이 세운 공덕비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가 묘소를 단장했던 사실까지 잊혀지고 말았다.
한편 여운형은 신문사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은밀히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그래서 1935년에는 조동하와 양하석을 해외로 탈출시키려다 신의주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취조를 받기도 했다. 또 상해 임정 김구 주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그 아들 김인, 김신의 상해탈출을 은밀히 도와주기도 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일대 쾌거가 일어났다.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서는 손기정 선수의 우승사진이 실린 주간지 <아사히스포츠>를 입수하자 일장기를 지운 채 8월 13일자로 그 사진을 내보냈다.
그런데 12일이 지난 8월 25일 <동아일보>에서도 똑같은 일을 행했다. 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두 신문은 정간되었으나 <조선중앙일보> 측은 “맨날 코오군 반자이(皇軍萬歲) 기사나 쓸 바에야 차제에 폐간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 모아져 다음해 자진폐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여운형도 신문사 사장 자리를 놓게 되었다.
해방을 준비하는 여운형
이 무렵 정국은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일제는 1936년 11월 독일과 반공협정을 맺고, 다음해 12월에는 이탈리아가 합세하여 독이일의 추축국 체제를 형성하고 훗날 연합국과의 대결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던 여운형은 1939년 이상백을 통해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제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영미와의 태평양 전쟁이 불가피해진 일제는 중국전선에 투입되어 있던 병력을 돌리기 위해 중국과의 강화조약을 맺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중국 지도자들과 교우관계가 있던 여운형에게 그 화평공작을 종용했다. 그가 거절하자 일본정부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여운형을 동경으로 불러들였다. 이 일과 관련하여 여운형은 조선총독, 일본군 수뇌부, 오오하시 외무차관, 고노에 수상, 그리고 일본 천황까지 만났다.
그러나 여운형은 화평공작에 임할듯 말듯한 위장전술을 취하면서 오히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1942년에는 이전교수 이정구에게 장차 조선이 해방될 때를 대비하여 국민이 먹어야 할 식량조사와 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고, 장권에게는 해방시의 혼란을 막기 위해 치안대를 조직할 상세한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는 말이 흘러나가면서 여운형은 1942년 12월 경성헌병대에 연행되어 제2차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독립을 확신하고 있던 그는 오히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해방에 대비한 정치 결사체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 7월 2일 가출옥되자 입원한 경성요양원으로 조동호, 이상도, 이상백, 최흥국, 구소현, 전사옥 등의 동지들을 불러들여 비밀리에 <조선민족해방연맹>의 조직을 결의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을 건설하는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이때 여운형이 동지들에게 내건 것은 동지획득, 자기완성, 조직준비의 3대 슬로건이었다.
한편 신병 요양을 핑계로 양주군 봉안으로 낙향하여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그곳의 청년들을 지도하면서 훗날에 대비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대중에의 영향력이 큰 여운형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가출옥 상태이기 때문에 여운형을 보호 관찰하던 조선인 판사 백윤화는 자신이 작성한 전향문을 총독부에 제출했으며, 뒤이어 이름을 도용당한 여운형의 학병권유 담화문이 <경성일보>에 발표되기도 했다.
이런 흔적들 때문에 해방후 정적들로부터 친일파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기도 했으나, 이 무렵 여운형은 조국이 독립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시 자주권을 확보하려면 무장투쟁이 필요하다 판단하고, 지난날 자신이 만주군으로 보냈던 박승환을 봉안으로 은밀히 불러들여 군사조직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으며, 한편으로는 염윤구, 이혁기 등을 지도하여 학병이나 징병 거부자들을 용문산 등지에 집결시켜 군사훈련과 무장투쟁을 준비시켰다.
건국동맹의 결성
그리고 독립에 대비한 비밀결사체를 조직하기 위하여 자신의 환갑잔치를 연다는 핑계로 정치적 동지들을 봉안으로 불러들여 그 예비모임을 가졌다.
마침내 1944년 8월 10일, 여운형은 정치적 동지들과 함께 서울 경운동의 삼광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현우현의 한의원을 결성장소로 택한 것은 손님을 가장하여 그곳에 모이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달 뒤에는 조선건국동맹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결성했다. 해방후 정적들은 <건국동맹>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역선전했지만, 나라를 세운다(건국)는 뜻의 결사체 이름만 보아도 그것이 보통 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름만 덩그러니 있는 그런 단체가 아니라 건국동맹은 남북한 13개도지부의 책임자와 조직원을 갖춘 전국 규모의 단체였다.
또 건국동맹은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추는(暗夜行燈) 것처럼 뜻깊은 것이라 평가되던 경성콤그룹이 1940년 검거된 이후에 활동했던 국내유일의 독립운동체였다는 점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해방직후 생명의 담보가 없는 해외의 독립운동은 평가하고, 정작 목숨을 담보로 한 국내의 독립운동은 평가절하 하는 이상한 풍조가 지금까지 답습되어온 경향이 있었으나 이는 시정되어야 한다. 삼엄하고 살벌한 일제말기의 항일운동, 그것도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건국동맹 같은 조직은 그 대담성과 목표 면에서 여운형이 아니면 그 무게를 감당할 수조차 없던 독립운동이었다.
이후 여운형은 건국동맹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1944년 10월 8일 용문산에서 경기도 북부지방의 농민동맹을 결성했으며, 그해 말에는 노동자와 부녀자와 사무원의 조직을 준비케 했고, 다시 학병과 징병과 징용 거부자들의 조직인 보광당,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산악대 등의 여러 조직과 직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건국동맹의 외연을 넓혀나갔다.
또 연합군과 협력하여 무장투쟁을 해야만 조국의 자주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1945년 3월에는 건국동맹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본군의 후방교란을 위해 노농군을 편성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 노농군에 필요한 무기조달을 위해 여운형은 경기도 주안 조병창에 복무중이던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하여 유사시에 무기 공급을 받기로 했다.
이와 함께 해외의 독립운동세력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여운형은 이 무렵 최근우를 북경에 파견해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게 하고, 이영선을 시켜 김명시를 만나 연안의 독립동맹과 구체적인 연계를 수립하도록 했다.
한편 조선 독립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1945년 4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담에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연안에 연락을 취했다. 이처럼 여운형은 삼엄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에 대비한 정치조직(건국동맹)과 무장투쟁에 대비한 군사적 준비, 그리고 조선독립의 국제적 승인에 대한 준비 작업까지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극비 정보
이런 와중에 건국동맹의 이걸소, 황운, 이석구, 조동호 등 중앙간부들이 1945년 8월 4일 일경에 검거되면서 맹원들은 일시 건국동맹 자체가 와해되는 것이 아닌가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이 무렵 여운형에게는 해방을 확신할 만한 정보채널이 열려 있었다. 그것은 단파라디오 수신기를 직접 제작한 경기중학생 손치웅이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여 포츠담선언 이후의 정세를 시시각각 여운형에게 전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정보 루트로는 도메이(同盟)통신의 조선인 기자 김진기가 AP통신 등의 외국전문을 해독하여 극비리에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여운형에게 전달한 것이고, 또 다른 루트는 아사히신문의 총독부 출입기자 정국은이 패망을 앞둔 총독부가 패전 조인식에서 입을 고위관리들의 서양 예복 모닝코트를 중국 상해에 단체 주문했다는 소식을 은밀히 들려준 것이다.
한편 조선인 경제부처 출입 기자 가운데는 미쓰비시 등 일본의 굴지 재벌들의 경성지사가 일본 본토로 귀환하기 위한 이삿짐을 싸고 있다는 뉴스를 여운형에게 전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모두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의 엄청난 피해상황에 따라 일본 중앙정부가 전의를 상실하게 됨에 따라 생긴 여파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빈자리가 생긴 건국동맹 중앙간부 자리에 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새로 선출하고 해방에 대비하고 있었다.
치안권을 이양 받은 여운형
1945년 8월 14일. 여운형의 계동집에는 두 명의 일제 밀사가 왔다. 낮 무렵 총독부에서 파견한 사람은 만주국 영사를 지낸 외교관 박석윤이었고, 저녁 무렵 용산에 본부를 둔 제17방면군에서 파견한 사람은 정훈 중좌였다. 이 무렵 총독부와 제17방면군은 합동회의를 갖고, 패망후의 혼란을 막기 위해 조선 대중에게 영향력이 큰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이양하기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아침.
여운형의 계동집 골목은 수백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이미 일제의 패망소식을 간접으로 전해들은 사람들은 이날 오전 9시 정무총감 관저에서 엔도오(遠藤柳作) 정무총감과 만나기로 된 여운형의 모습을 보기 위해 달려왔던 것이다.
여운형은 출발에 앞서 골목 아래에 있는 경성방송국 조선어과장 심우섭의 집에 들러 일장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는 심우섭의 장인인 사학자 최남선도 참석해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정무총감 원등이를 만나러 가는데, 오늘의 이 만남은 불민한 이 사람이 민족을 대표해서 저들의 대표를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나는 이 자리에서 첫째 수감자들을 즉시 석방할 것, 둘째 우리 주민이 앞으로 추수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양곡을 확보해 줄 것, 셋째 지금부터 총독부는 나의 행동을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말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들이밀 예정이오.” 여운형은 이날 엔도오 정무총감과의 회동에서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치안권을 넘겨받았다. 이날 12시에는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왔다.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은 홍증식에게 매일신보를 접수한 뒤 해방을 알리는 호외발행의 임무를 맡기고, 동생 여운홍에게는 경성방송국을 접수해서 조선 독립의 사실을 방송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한편 건국동맹들을 소집해 장권에게는 치안대를 조직하고, 이정구에게는 식량대책위원회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또 운니동 송규환의 집에는 기획처를 설치하고, 안재홍 등과 함께 계동입구의 임용상 집에 실행부를 설치하여 그곳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했다. 여운형은 건준 위원장에 취임했다.
8월 16일 여운형은 서대문형무소와 조선헌병사령부를 방문하여 각기 이곳에 수감되어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석방시켰다. 이들이 풀려나오는 것을 보고나서야 민중들은 비로소 해방이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실제 천황의 항복방송이 나온 8월 15일 당일에는 여운형의 정치적 동지나 그 연루인사들을 제하고서는 아직 해방이 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해 서울의 시가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아직 총칼을 가진 일본 경찰과 군부가 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미군이 진주하는 9월 8일까지 약 20여 일간 조선 천하는 여운형과 건준의 손에 들어간 것 같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이양했던 총독부, 더 정확히는 총독부의 수사기관과 일본 군부의 일부가 이 결정에 반발하여 건준 활동에 방해공작을 적극 시도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들면 첫째 매일신보를 접수하러 갔던 홍증식, 최익환, 이여성 등이 총칼을 들고 일경에 쫓겨났다는 사실이고, 둘째 경성방송국을 접수하러 갔던 건준위원들도 역시 같은 꼴을 당했다는 점이다.
한편 독립 운동가들의 출옥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시민들의 환호에 놀란 총독부 치안당국과 일본 군부는 불안감을 느끼고 8월 17일에는 장갑차로 변조한 트럭 수십 대를 중무장시킨 채 광화문 거리를 시위 운전케 하여 시민들을 위협했다는 사실 등이 있다.
이후 미군이 진주하는 9월 8일까지 일제의 위협을 받은 서울 시민들은 다시 조심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흔히 상영되는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뛰어다니는 서울 시민들의 기록영화는 8월 15일 당일의 것이 아니라 9월 8일 미군이 진후한 뒤에 촬영한 사진들이다.
테러를 당하는 여운형
해방을 맞은 지 사흘 만에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한다. 이것은 건준의 조직구성을 좌파일색으로 하자는 좌파의 주장에 여운형이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좌도 실체가 있고, 우도 실체가 있으니, 새 나라 건설은 좌우가 공히 참가하는 정부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발한 좌파 측에서 여운형이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테러를 감행한 것이었다. 불행한 것은 여운형이 그토록 여러 채널로 합작을 시도한 우파 측에서는 여운형의 제안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운형은 해방직후 우파의 중심인 송진우 등에게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건준 참가를 권유했고, 자신이 직접 송진우를 찾아가 합작을 권유해보기도 했으나 협상은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처럼 국내 우파가 합작을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여운형의 건준 조직과 뒤에 결성된 인공은 그 실제 구성에 있어 사실상 좌파가 세력을 잠식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인공 설립안을 반대했으나 보수파가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대세에 떠밀려 좌파 주도의 인공 설립을 수락하고 말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 사령관과의 만남
한편 패망한 일제, 그 가운데서도 총독부와 제17방면군은 한끝이라도 유리한 협상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아직 수송편 때문에 오키나와에서 진주하지 못하고 있던 하지 사령관의 미 제24군단과 교신을 주고받으면서 북한은 공산화되었고, 남한은 인공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이 발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자신들이 한때 치안권을 이양했던 여운형을 인공을 세운 좌익으로 몰았다.
이렇게 되자 미 제24군단은 한국에 진주하기 전부터도 여운형을 좋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미 본국으로부터 한국을 통치할 책임자로 내정된 하지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인공 정부가 남한에 세워진 것을 좋아할 리 없었다.
물론 여운형 측에서는 영어를 잘 하는 동생 여운홍과 보선전문 영어교수를 역임한 백상규, 그리고 조한용 등을 건준 대표로 인천에 파견하여 선상에서 환영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미군 측은 냉담했다.
9월 8일 한국에 들어온 24군단 정보참모부(G-2)는 대민접촉을 시작했다. 당시 영어 잘 하는 인사들은 건준 측에도 없었던 것이 아니나, 미국 유학 등을 다녀와 연전이나 이전 교수 등을 역임하고 있던 구미 유학파의 상당수는 역시 한민당의 우파 인사들과 깊은 연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 역시 한민당의 정적인 여운형을 좌파로 몰았고, 다시 그를 총독부로부터 엄청난 돈을 먹은 친일파라는 누명을 씌웠다. 이 때문에 하지 사령관은 민족의 최고 지도자급인 여운형을 한국 진주 한 달이 되어가던 그해 10월 5일이 되어서야 처음 만난다.
이때 하지 사령관이 여운형에게 내뱉은 첫마디가 “그대는 잽(Jap)으로부터 얼마를 받아먹었느냐?”는 물음이었다고 암살되기 직전에 쓴 영어 서한에서 여운형은 회고하고 있다. 이러니 남한의 실질적 통치자인 하지와 인공의 수장인 여운형의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에의 노력
외적으로는 이런 상황인데다가 내적으로는 우파 배제를 주장하던 인공 내의 좌파로부터 여운형은 연속적인 테러에 시달리게 된다.
이렇게 안팎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여운형은 새 나라의 건설에는 민족 모두가 참여하는 형태가 되지 않으면 민족분열의 비극이 온다 보고,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위한 ‘각정당 수뇌간담회’에 참가하여 정치단체의 대동단결과 초당적 자주독립촉진기관의 설립문제를 논의하는 등 좌우합작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중순경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찾아가 인공 주석에 취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적극 참가했지만, 한민당 세력에 둘러싸인 이승만은 사실상 여운형과 좌파를 배제하는 정책으로 일관한다.
당시 해방 정국에서 각 정파는 우파의 핵심인 이승만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 세력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통일노선을 내세웠는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각 정치 세력의 통일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이승만은 모든 정파가 자신의 휘하로 들어오는 것을 통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극좌파에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의 정치구호를 ‘덮어놓고 뭉치자.’는 통일론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또 우파의 중심인 한민당은 좌파배제의 통일론을 부르짖었고, 좌파의 핵심인 박헌영은 친일파(우파) 배제의 통일론을 부르짖었다.
한편 중도파 지도자의 한 사람인 안재홍은 우파 주도의 통일을 부르짖었고, 역시 중도파 지도자의 한 사람인 허헌은 좌파주도의 통일론을 부르짖었다.
이 가운데서 여운형이 추구한 통일론은 “좌도 실체가 있고, 우도 실체가 있으니 누가 누구를 배제하고 누가 주도하는 것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다. 따라서 좌우합작은 좌우의 공통점을 확대하고 상이점을 축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중은 여운형 노선을 가장 많이 지지했다. 해방직후 객관적인 잡지사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여운형의 인기가 가장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견제와 우파의 질시, 그리고 극좌파의 견제 등으로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은 정치적 곤경에 처해 있었다. 마침내 여운형은 그해 11월 극좌파와 결별하여 인공을 탈퇴하고 지난날 건국동맹의 동지들을 중심으로 한 중도좌파의 조선인민당을 창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다시 정당간의 합작을 모색하고, 이승만, 김구와의 합작도 시도한다.
통일노선을 고수한 여운형
이처럼 여운형이 초지일관되게 통일노선을 추구한 것은 해방 당시에는 아직도 누구나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북이 갈린 오늘의 시점에서는 그것이 무모한 노선이 아니었느냐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해방후 정국은 다음의 수순을 밟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미소 양군의 진주에 의한 1945년의 남북분할은 단지 지리적 분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해 말 신탁통치 안이 나오면서 이를 지지하는 친탁세력과 반탁세력으로 나뉘면서 1946년 사회적 분단으로 발전했고, 다시 남북 양쪽에 정부가 들어서는 1948년에 정치적 분단으로 발전했으며, 마침내 1950년 6.25의 열전에 의해 민족분단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분단이 아직 진화되지 않았던 해방직후에는 누구나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하지 사령관은 장차 정권을 이양할 모태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민주의원을 창설했다. 그러나 진보적인 미 국무성은 좌익이 포함되지 않은 우익만의 민주의원은 대표성이 없다 하여 이를 무산시키라고 지령했고, 이에 따라 미군정은 극우파와 극좌파를 배제한 가운데 중도좌파의 여운형과 중도우파의 김규식을 좌우합작의 대표로 발탁하게 된다.
오락가락하는 미국의 대한정책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해방직후 미국의 대한정책은 일관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미 국무성과 현지 주둔군을 휘하에 둔 펜타곤(국방성)의 생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뉴딜 정책을 추진한 루즈벨트 대통령 휘하의 미 국무성엔 진보적인 관리들이 많았다는 점이 있다. 우리가 상기해야 할 점은 적어도 2차대전 기간 동안에는 이념이 서로 다른 미소가 연합국이었다는 사실이고, 따라서 국제무대에서 서로 협조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이 상황은 적어도 국무성 레벨에서는 바뀌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략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펜타곤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다. 그들은 공동의 적이었던 추축국(독일-이태리-일본)이 사라진 이후 소련은 미국의 가상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후의 세계에서 미소는 협력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나아갈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2차대전 중 이승만의 손길이 닿아 있던 곳은 미 국무성이 아니라 펜타곤이었다. 종전 직후 이승만은 즉시 귀국을 원했으나 미 국무성에서는 이승만의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았다. 당시 하와이 소재 <동지회>의 회보를 보면 이승만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미 국무성을 원망하는 편지를 싣고 있다.
미 국무성이 이처럼 이승만의 귀국을 방해한 배경은 1943년경 미국 내의 교포 1만여 명의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이승만은 결코 한국 주민 전체를 대표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당시 미국에는 이승만의 동지회와 안창호 계열의 국민회, 그리고 김용중, 김호 등의 진보세력으로 3등분 되어 있었다.
여기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이승만에게 동경까지 가는 군용기편을 제공한 것은 펜타곤이었다. 2차대전 중 창설되었던 OSS에는 작전국장 굿펠로우가 있었다. 1942년 이승만은 미국 내에서 <일본의 안과 밖(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일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당시 미국의 상황에서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특히 작전국장 굿펠로우의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굿펠로우 는 이승만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일본 본토에 투입할 특공대원으로 생긴 것도 비슷하고 일본말도 잘 하는 한국 청년들을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작전국장 굿펠로우는 이승만의 제안을 채택하여 한국인 특공대원 1백 명을 양성하기로 하고, 이 계획이 추진되어 중국 내에서 한국인 OSS 요원들을 양성하게 된다. 이때 중국에서 OSS 요원으로 양성된 사람들 가운데 장준하, 김준엽 등이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양성된 OSS요원들은 미국의 원폭투하로 그 필요성이 없어져 결국 일본 본토에 투입되지는 않았으나, 아무튼 이런 일을 추진하면서 이승만은 펜타곤과 깊은 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이승만은 사실상 굿펠로우의 소개로 미 군용기를 타고 동경으로 날아가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게 되었던 것인데, 이때 맥아더 사령관은 한국 책임자였던 하지 사령관을 동경으로 불러들여 3자회동을 가졌다. 이승만의 참모였던 T.S. 올리버의 회고록을 보면 이 자리에서 3인은 일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공산세력의 남진을 한반도에서 막아야 한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는 미국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군부 또는 현지 사령관들의 생각이었다. 이 무렵까지도 미 국무성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1945년 말의 신탁통치 안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현지 사령관이지만 남한 책임자이기도 했으므로 미 국무성의 지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속마음은 반공노선이더라도 일단은 국무성의 지령에 따라 중도노선의 지도자를 찾아야만 했다.
여기서 중도노선의 지도자로 여운형-김규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당시 미 국무성과 G-2의 자료를 보면 이것은 미 국무성의 지령이기도 했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미 국무성의 지령에 따라 중도노선의 인물을 앞세우려는 하지 사령관의 태도에 이승만 은 배신감을 느끼게 되며, 그 결과 상당한 정도까지 하지와 이승만의 불화가 진척된다.
그러나 미 국무성의 대소협력 방침은 소련이 동구와 남구 지역으로 전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1947년 중반부터 철회된다. 이 무렵 미국 정가에서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졌고, 뒤이어 매카시즘 선풍이 불면서 미 국무성 안에 있던 진보적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사태를 빚으면서 미국의 대한정책도 반공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여기서 중도 노선의 핵심인물이던 여운형 선생을 암살하려는 우파의 자신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나침판
좌우합작의 추진 과정에서 여운형은 극우파로부터 그리고 극좌파로부터 끊임없는 방해와 견제와 질시를 당했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여운형에게 “미국 놈에게 놀아나지 말라.”는 모욕을 주었고, 극우파는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었으며, 일부 사람들은 “좌도 우도 아닌 회색분자.”라고 매도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왕년 필리핀에 갈 때 여객선 항해실에 들어가 나침반을 구경한 일이 있는데, 그때 보니 북쪽을 가리키고 있어야 할 바늘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전후좌우로 움직인 것은 배인데, 나침반은 북쪽을 고수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더러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고 손가락질하는 모양이나, 만일 배가 요동치는데 나침반이 계속 한 곳에 멈춰 있다면 그 바늘은 고장 난 것이다. 지금 파도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나는 좌우합작의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내외 공격에 시달려 1946년 말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여운형이 다시 근민당을 창건하고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것은 제 2차 미소공위의 개최를 2개월 앞둔 1947년 4월부터였다.
이 무렵 좌우합작의 성공 가능성은 높아 보였다. 마침내 그해 개최된 미소공위의 협의 규정에 따라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합동회의에 참석했다. 여운형은 김규식, 홍명희, 김창숙 등과 만나 통일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다시금 세간의 이목이 여운형에게로 쏠렸다.
암살 경고서한
이 무렵 극우파는 박헌영의 극좌파와 함께 좌우합작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서 이승만과 하지의 불화는 극에 달했고, 마침내 하지는 이승만을 대신할 우파 보강책의 하나로 서재필을 미국서 불러들였다.
1947년 7월 1일, 여운형과 김규식은 서재필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마중 나갔다. 이때 서울로 올라오는 승용차 뒷좌석에는 서재필, 여운형, 김규식 세 사람이 동승했다. 신문에 보도된 이 한 장의 사진은 앞으로의 정국 추이가 어디로 향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기도 했다.
여기서 극도로 분개한 것이 판에 끼지 못한 극우파였다. 그들은 여운형의 암살을 계획했다. 여운형과 함께 합작운동에 나선 김규식은 인품이 훌륭하지만, 대중성에서는 여운형에 필적하지 못했다. 따라서 극우파의 생각은 여운형을 제거하면 여운형-김규식 주도의 좌우합작 운동은 깨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 위에서 언급한 미국의 대한정책 변경이 첨가된다. 1947년에 들어서면 이미 미국은 동구와 남구지역에서 남진정책을 강행하는 소련과의 협력무드가 깨지고, 뒤이어 매카시즘의 분위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해 5월, 이 같은 미국 정가의 분위기를 극우파에게 전달하러온 미국 특사가 있었다. 그는 당시 덕수궁에서 진행 중인 제2차 미소공위도 결렬될 것이라는 정보를 귀띰해 주었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극우파는 미군정하의 한국인 경찰세력과 연계하여 여운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 이러한 극우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하지는 그해 6월28일자로 극우파의 수장에게 여운형을 암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서한을 보냈고, 격분한 극우파의 수장은 그 답장을 도하 신문에 공개적으로 게재하면서, “암살을 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얘기다. 누가 그런 정보를 주었는지 3자대면을 시키라.”고 하지에게 반박했다.
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잦은 테러를 당해온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
하고 여운형은 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극우파는 여운형의 암살에 자신들의 사활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하지사령관의 경고서한이 발송된 지 17일 뒤인 그해 7월 17일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이 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승용차 뒷자리에 동석해 있던 고경흠이 “선생님, 선생님!”하고 어깨를 흔드니 여운형은, “조국...조선.” 두 마디 말을 입에 올렸으나 종내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아직 심장이 뛰고 있었으므로 일행은 급히 서울대학 병원으로 옮겼으나 맥박을 만져본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사건을 담당한 검찰은 여운형을 암살한 자가 북한에서 넘어온 21세의 중도좌파 한지근의 돌출행동이었다고 발표했으나, 이를 믿었던 사람은 별로 없고, 지금까지도 그 진상은 파헤쳐진 것이 없다.
그의 장례식에는 죽음을 슬퍼하는 서울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노제가 진행되는 광화문에서 동대문 운동장까지 인파는 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장례식이 진행된 동대문 운동장은 수십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운구차에 뒤이어 40여대의 차량이 뒤 따른 가운데 북한산 기슭 태봉 푸른 숲속에 구슬픈 봉도가가 울려 퍼졌다.
아! 우리의 몽양선생
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땅 위에 떨어진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 있나니
고이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를 갚으오리다
고인의 유해는 부인 진씨의 손으로 취토(取土)가 뿌려지는 가운데 대지의 품에 안겼다.
향년 62세.
한 시인은 여운형의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하루 낮의 꿈 같은 님의 소식을
젊디젊은 나더러 믿으란 말가
은하수 서천으로 흘러가는데
뻐꾹새 뒷산에서 울지 않던가
이강산 골짜기의 골짜기마다
불행한 형제들의 서러운 눈이
님을 믿어 헤메며 찾지 않는가
무엇이랴 이 땅에 님이 없다고
별빛이 스러지듯 아주 가신 것
다시는 뵈올 길이 다시 없다고
믿으랴 안 믿으랴 믿어야 하나
아니로다 님께선 여기 계시다
피에 젖은 깃발을 나부끼면서
울부짖는 형제들 노호 속에서
님께선 우리들과 함께 가시네
저어기 앞장서서 나아가시네
여운형에 대한 평가
장례식장에서 당시 미국총영사 윌리엄 랭던은 여운형을 이렇게 평가했다.
“여운형 선생은 혁명가로서 정치적 식견이 탁월하며 개인적 교제에 있어서도 남을 중상함을 모르는 모범적인 신사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외교가로서도 어느 나라 외교관에 못지않은 힘을 가졌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들의 감시가 심해서 그다지 만나지도 못했지만 해방 후에는 개인적 교제도 많았는데, 여 선생은 다른 미국 요인들과도 깊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비명에 숨졌을 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모든 말과 행동을 종합하고 분석함으로써 내가 도달한 결론은, 여 선생은 개인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소련보다는 미국과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들 양국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소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 현대사의 권위인 전 펜실바니아대학 교수 이정식은 금년 초 동아일보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몽양 여운형이 여태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몽양을 빼고 독립운동사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기 때문에 몽양의 발자취를 너무나 잘 안다. 그는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해 조선민족의 독립 염원을 세계에 선포하게 하고, 장덕수를 조선과 일본에 보내 그 소식을 전함으로써 3·1운동의 계기를 만들고, 임시정부 외무위원장을 맡아 대외선전의 주역이 되고, 1919년 말 일본 도쿄에 가 기자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는 또 1921년엔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을 논의하고, 상하이에 있는 동안 안창호와 거의 매주 연락을 취해 임시정부사업을 돕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쑨원(孫文)을 포함한 중국지도층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등 자랑스러운 일을 많이 해냈다.”
“물론 그는 공산당에 협조하기도 했고 공산당으로부터 이용도 당했다. 1921년에는 고려공산당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운동가였다. 레닌은 그에게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民度)가 낮기 때문에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는데 몽양은 이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이를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착취가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도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도왔지만 기독교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폭력 혁명에도 반대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7년간 전도사로 시무했던 경험과 신앙이 그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중단된 공식 추모제
그러나 이 같은 평가들에도 불구하고 그 뒤 정권을 장악한 정적들은 여운형을 ‘빨갱이’로 몰아 공식 추모식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여운형의 추모식이 열린 것은 아직 남한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1948년 한 해뿐이었다.
여운형의 공식적인 추모식이 다시 재개된 것은 그로부터 17년 뒤인 1965년이었다. 이해 7월 19일 준비위원장에는 이갑성, 고문으로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 전 대통령 윤보선 등 24명이 선정되었고, 다시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359명이 위원으로 위촉되어 시민회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그러나 정국이 경직되면서 여운형의 공식 추모식은 다시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정국이 완화된 6공에 들어서서 몽양선생의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다시 1991년 7월 30일 현 <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의 전신인 <추모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이후 해마다 사업회에 의해 공식 추모제가 열렸다.
그리고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 장이 수여되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당초 북한산에 안장되었던 여운형의 묘소는 현재 수유리 묘소로 이장되어 있다.
어떤 독후감
현재 여운형에 대한 전기는 1946년에 출간된 이만규의 <여운형투쟁사>, 1960년대에 출간된 여운홍의 <몽양 여운형>, 1984년에 출간된 이기형의 <몽양 여운형>, 1991년에 출간된 <여운형전집>, 1995년에 출간된 정병준의 <몽양 여운형 평전>, 2005년에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일본어) 등 6종류가 나왔고,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해방전후사를 그린 강준식의 <적과 동지>(전7권)가 1993년에 출간되었으며, 이 밖에 수많은 학술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 여운형의 전기를 읽은 김용범은 다음과 같은 소감을 최근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남겼는데, 공감할 부분이 많아 이를 부분적으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역사의 현실에 남길 수 있었던 흔적이 적었다 하더라도, 여운형 선생은 현실에 남길 수 있었던 흔적 이상의 이상적 지표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위대성을 무시 할 수 없는 인물이다. 자주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론 현실과의 타협도 숙고하는 그 모습은 현재의 뭇 정치가들이 되새겨야 할 귀감이다. 그리고 친화적이면서도 인위적이지 않은, 정적들마저 탄복했던 완벽에 가까운 인간적 매력도 단순히 정치가나 운동가를 떠난 한 인간으로서의 매력이야말로 후세인의 귀감이다.”
“보통은 자의 또는 타의로 이데올로기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그 정치적 삶을 마쳤던 게 해방 정국의 노정객들이 보인 모습이지만, 고려대 최창집 교수의 말처럼 좌우 모두 최대강령적 이념과 실천이 지배적이었던 해방정국에서 몽양 선생은 최소강령적 실천으로 열린 민족주의를 견지하고 관용을 정신으로 하는 지도자 상을 보여 주었다.”
“이상주의자는 이상에 취해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여 운형 선생은 현실을 잊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어두운 눈길을 꿋꿋이 걸어 나갈 수 있었던 미스터 코리아였다. 그 찬연함이 백주 대낮의 두발의 총성으로 영영 꺾이고 말았다는 점이 조국을 위해 너무나 아쉬운 일이지만, 여운형 선생을 죽인 음모가들도 남북분단정부의 수립과 6.25라는 비극이 닥쳤을 때 어쩌면 좌우합작으로 일관했던 여운형 선생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큰 인물은 사라지고 난 뒤라야 그 빈자리를 알 수 있듯, 여운형 선생 같은 거대한 인물이 스러지고 나서야 그들은 남은 현실이 너무나 차갑다는 것, 그리고 민족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이 원고는 2005년 12월 양평문화원/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소책자에 실렸던 내용을 옮겨온 것이지만 원집필자는 <혈농어수-몽양여운형 일대기>의 저자(강준식)입니다. 사무처)
첫댓글 자주독립을 위해 자신과 가족까지 희생하면서 서거하신
선열들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식민지 침일매국노와 숭미
주의자들의 발호로 국사에서 까지 지워지고 왜곡되는
현실에 가슴이 저미워지는군요...
김구 여운형 이봉창 안중근 서재필 등 선열들을 다시 되돌아봅니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회복되고 남북이
하나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읍니다.
우리나라에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났습니다.몽양 여운형 선생도 그 중에 한 분이시죠.
누가 쓴 글인지 몽양을 내세워 진실한 역사를 교묘히 왜곡한 글 같다. 이미 양키놈들이 겨들어오면서 분단과 조미전쟁은 예고된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마치 양키놈들이 당초엔 큰 목적 의식없이 들어온 것처럼, 뭔 국무성과 군부의 갈등 운운은 큰 물줄기를 .. 두서 없지만 하여간 뭔가 개같은 뜻을 밑바탕에 깐 듯이 보여 심히 불쾌하다. 이 글 작자의 당시 시대인식의 저열성인지 의도적이었는진 모르겠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