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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
연재 <고성한벌>14회 / 갯바람(3회 조영남/둔전리)
임진왜란 국난위기에 다시 빛나는 진도 명량대첩
1. 임진왜란의 배경
1) 국내 정세
개국초기부터 조선유학(성리학) 지배계급이 정치권력에만 집착하여 당파 당쟁 사화가 지속되고 국정은 뒷전이었다. 연산군을 폐하고 뒤를 이어 위에 오른 선조는 이이와 이황 등 인재들을 등용하였으나 조정은 여전히 당파당쟁에만 집착하여 이웃 일본 등 국제정세변화를 알지 못했다. 율곡 이이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을 주장하고 선조가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으나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과 김성일마저 당파에 휘말려 각각 다른 보고를 함으로써 국론을 더욱 혼란케 하고 침략에 대비하지 못했다.
2) 일본 정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세기 후반부터 100여 년 동안 지속된 내란을 평정하고 1590년 전국을 통일한 뒤, 불만 세력의 관심을 돌리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외국 정벌의 야망을 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벌을 이유로 조선에 길을 요구했고 거부하자 먼저 조선침략을 위해 조총의 사용법을 익히는 등 전쟁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2. 임진왜란의 개요
1차 침략(임진왜란) 경과
(1) 1592년 4월 14일 조선에 침입한 일본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무너뜨리고 서울을 향해 북진하였다.
(2) 신립이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패하자, 선조는 두 왕자를 각각 강원도와 함경도에 보
내 군사를 모집하게 하고 자신은 의주까지 피란을 떠났다.
(3) 부산 상륙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두 왕자를 포로로 잡고 상륙 60일 만에 개성과 평양을 함
락하였다.
(4) 반면 해상 싸움에서는 조선이 연일 승리를 거두었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은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에서도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
바 다의 해전은 진주 대첩, 행주 대첩 등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힐 정도로 큰 승리였다.
(5)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충청도의 조헌, 경상도의 곽재우, 전라도의
고경명, 함경도의 정문부 등이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이 밖에 휴정, 유정 등이 이끄는 승병도 활동하
였다.
(6) 원군을 요청하는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여 명나라는 4만 5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일본 정벌에 나
섰다. 조선의 김응서와 연합군을 결성하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조선과
일본의 강화 회담이 이루어졌다.
2차 침략(정유재란) 경과
(1) 서로 요구하는 바가 달라 강화 회담은 실패로 돌아가고 가토 기요마사 등이 1597년(선조 30년)에 14
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으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2) 국토는 다시 쑥밭이 되고 당파당쟁에 휘말리고 피해망상에 빠져 판단이 흐려진 선조는 왜군의 정치
적 전략이 끼어든 모함에 빠져 충무공 이순신을 투옥하고 만다.
(3) 충무공 이순신이 갇히자 해전에서 백전백패하던 왜군이 비로소 수군으로 서해를 거슬러 올라 한양성
을 직접 공격하기 위해 파죽지세로 밀고 오자 더 이상 길이 없던 선조가 다시 이순신을 풀어 삼군통
제사 로 명하여 나아가 싸우라 했다.
(4) 그로 백의종군한 충무공 이순신이 진도에 즉시 내려와 울돌목 명량해협에 진을 치고 400척의 왜병선
단을 울돌목으로 유인하여 13척의 배로써 진도주민들과 함께 인류전사에서 전무후무할 미증유의 명
량대 첩을 올림으로써 7년 전쟁 임진왜란을 승리로 마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로 도주하기에
바쁜 왜군을 추격하여 노량해전에서 적선 450여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고, 그 현장에서 충무공은
최후를 맞았다. 더불어 그 해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긴 전쟁은 끝이 났다.
3. 충무공과 진도의 명량대첩 승전고 북소리
첫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진도에 상륙하고 그로 인한 진도의 희생과 폐해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로 그 실상을 알 수 없으나 어떤 기록에서 읽은 바로는 오랜 과거 역사처럼 전 군민이 그들과 싸우면서 군수까지 전사하고, 엄청난 인명살상과 역사문화유산들이 모두 불타버리는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 그들이 상륙했다면 어느 누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후 정유년(1597년, 선조300년) 1~2월 14만 1,500여 대군으로 재침해 왔다.
명량해전의 배경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의 간계와 선조의 오판에 의해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은 그해 2월 26일에 한산도 통제영에서 압송된 후 3월 4일에 한성에 투옥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4월 1일에 출옥한 충무공은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였다. 한편 조선수군은 충무공의 후임으로 원균이 통제사직을 수행하던 중 1597년 7월 16일의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패하여 전선 180척 중 160여 척이 침몰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경상도 초계의 도원수진영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충무공은 조선수군의 패전소식을 7월 18일에 들었다. 충무공은 도원수 권율로부터 사태 수습 방안을 강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는 군사 15명을 거느리고 연해안 답사를 시작하였다. 충무공은 7월 19일에 삼가현을 떠나 21일에는 노량에 이르러 칠천량해전에서 생존한 부하들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들었다. 이후 진주 근처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의 집에서 연해안 답사계획을 구상하고 있던 중, 8월 3일에 삼도수군통제사의 재임명장을 받았다. 이후 남해-곡성-옥과-순천-낙안-보성-장흥을 거쳐 18일 회령포에 도착하여 부하들에게 교서에 숙배토록 하고 8월 20일에 진을 이진(梨津)으로 옮겼다가 24일에는 다시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겼다.
물론 이 시기 충무공을 따르려는 많은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수백 명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8월 19일에는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12척의 전선을 인수하였고, 안위‧소계남‧이몽구 등 그의 참모들과 유능한 부하들이 휘하에 몰려들었다.
한편 이 시기 조선 조정에서는 충무공에게 수군 재건을 맡겼지만 세력이 약해 해상에서 버틸 수 없으면 육지로 올라와 육전을 도와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지시를 8월 15일에 받은 충무공은 즉시 답신을 통해 ‘아직도 신에겐 전선이 12척이나 있으니 있는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고 하여 해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역설하였다.
이후 충무공은 8월 26일에는 신임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1척의 전선을 가지고 합류하여 조선함대는 총 13척의 판옥선을 확보하였다. 이때 어란포에서 임준영으로부터 일본 수군이 이진에 도착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받았다. 이틀 뒤 8월 28일 아침에 8척의 일본 군선이 불의에 어란포 진영으로 돌입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이 일본수군과의 첫 번째 접촉이었는데, 조선함대는 이들을 해남반도 남단의 갈두(葛頭)까지 추격했다가 중단하고 되돌아와 진영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29일 아침에는 다시 진영을 건너 편 진도 땅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기고, 이곳에서 명량해전 직전까지 머물렀다.
명량해전 직전까지 충무공이 확보한 세력은 전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이 숫자는 배설이 지휘했던 10척 정도의 전선에 각처의 장수들이 합류하면서 더해진 것이었는데, 이에 앞서 8월 15일경 조정에 보고할 때까지는 전선이 12척이었고 그 후 김억추의 1척이 더 증가한 것이다.
충무공이 벽파진에 머물러 있던 중, 9월 7일에는 탐망 군관으로부터 왜군함대 일부가 어란 앞 바다에 도착한 사실을 전달 받았고, 오후에는 왜군군선 12척이 벽파진에 접근하자 이들을 먼 바다까지 추격했다가 되돌아왔다. 충무공은 이날 밤에 야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실제로 왜군함대의 습격을 좌절시키는 통찰력을 발휘함으로써 장병의 지휘관에 대한 신뢰도를 높였다.
조선함대가 벽파진에 머물러 있던 9월 14일, 북풍이 크게 부는 가운데 임준영이 일본 함대 200여 척 중에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한 사실을 알려왔다. 충무공은 즉시 전령선을 보내 향후 전투구역으로 구상하고 있던 해남 우수영주변의 피난 선박들에게 육지로 대피하도록 명령하였다.
왜군수군 중 대부분의 세력이 어란포에 도착했다는 정보에 따라 충무공은 9월 15일에 진영을 벽파진에서 녹진(우수영 영역)으로 옮겼다. 그는 이날 제장을 소집하여 명량 해로를 막아 지키려한다는 이진 경위와 해전 전술을 설명한 후, 명령을 위반할 때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충무공은 오자병법상의 문구를 인용하여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훈시를 통해 장병들로 하여금 필사의 각오와 승전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명량해전의 경과
다음날인 9월 16일 역사적인 명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이날 이른 아침에 별망군(別望軍)으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왜군군선이 명량 해협을 통과해 우리 진영으로 바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지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공격해 온 왜병군선의 척수는 130여 척(다른 기록에는 133척)이었는데, 명량해협 밖에서 대기한 척수까지 합하면 일본 함대 전체의 척수는 300척이 넘었다.
왜군함선 130여 척이 통과한 명량해협은 진도와 해남군의 화원반도사이에 있는 수로로써 길이가 약 2㎞ 내외이고 가장 좁은 곳의 폭은 4-500m 정도이다. 조류는 하루 네 차례 6시간 간격으로 북서류(목포쪽)와 남동류(제주쪽)가 교차해서 흐른다. 이곳의 평균 수심은 20〜25미터정도이고, 조류의 속도는 남동류의 경우 최대 12노트로 매우 빠르다. 아울러 수십 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물이 울면서 돌아간다고 해서 ‘울돌목’이라 이름 할 정도로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항해하기 위험한 협수로이다.
해전 당일 명량해협의 조류는 오전 7시를 전후하여 잠시 멎는 정조가 되고, 이후 들물 북서류가 시작되어 왜군함대가 해협을 통과해 우수영 앞 바다로 진격하기 용이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따라서 왜군함대는 출전 준비를 서둘러 마치고 오전 7시 경에 해협 입구가까이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왜군의 동향은 탐망군에 의해 즉시 보고되어 조선수군은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후 조선함대는 오전 8시 경에 전투 준비를 마치고 녹진 앞 바다로 나와 작전대로 진형을 형성하여 왜군 함대를 기다렸다. 명량해전은 해협을 통과한 왜군함대가 녹진 앞 바다에 이르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시각은 오전 8시 전후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류가 이번에는 고조에서 13시 30분경 잠시 멈췄다가 썰물로 바뀌었다. 조선수군은 여전히 닻을 내린 채 일본군에게 집중 포화와 수마석 등을 퍼부으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함대는 마침 불어닥친 북서풍을 이용하여 화공전을 적극 수행하였다. 또한 일본의 유명한 해적출신 장수 마다시[來島通總]를 붙잡아 효시하여 일본 수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와 같이 조선함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31척의 군선을 잃은 왜군함대는 남동류에 편승하여 뿔뿔이 도주하였다. 도주하려던 왜군선단들이 길을 잘못 들어 해남 쪽과 진도 쪽 포만들의 갯벌에 걸리자 배에서 뛰어내려 뭍으로 기어올라 도망치는 왜군들을 아군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했다. 그날에 왜병들의 피로 물든 명량반도 명량리 쪽 뻘등을 그래서 “피뻘등”이라 한다.
명량해전의 이해와 전술전략
승리의 역사는 민중 속에 부풀려져 전설과 신화가 된다. 그리고 영웅중심 적이다. 인류전사에서 충무공 이순신 수군제독처럼 민족을 넘어 위대한 인류영웅이 없지만 정유재란의 명량대첩에 대한 이해와 평가 또한 모든 것이 그에게 집중되고 있다. 충무공 자신이 난중일기에 <약무호남시무국가>라고 몸소 적은 그 진실과 진의를 무시하고. 특히 당시 현장에서 싸우고 전사한 무수한 진도 수군 장병들의 비문에까지 쓰여 진 전술전략마저 세월이 지난 오늘의 시각에서 역사사실이 아닌 민간 속의 전설로 여긴다. 또한 정작 울돌목 명량해협의 지형 지리와 조류 자연형상의 정확한 실제와 군사전술전략의 기초도 모르는 시각에서 명량해전을 각자 제멋대로 바라보고 말한다.
(1) 명량대첩은 진도 아니면 이룰 수 없었던 승전고이다. 곧 진도의 참전용사들과 주민들이 충무공과 죽기로써 함께 하지 않았다면 결단코 불가능했던 자리이다. 충무공이 진도로 들어오자 자진해서 적극 참전한 진도 무사들은 아들 명신을 데리고 부자가 참전한 충무공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조응량 장군을 비롯하여 김수생, 박후령, 박인복 부자, 양응지와 양계원 숙질 간 등이요, 이들은 모두 명량해전에서 겨레와 나라에 목숨을 바쳤다. 또한 울돌목 둔전포 둔전리 아낙들을 중심으로 진도 아낙들이 강강술래 팀을 만들어 화포와 조총과 화살이 빗발치는 울돌목 해안 망금산정에서 강강술래를 돌았다. 삼한시대로부터 왜구들의 침입 앞에 해 왔고, 고려 오룡국 때 그러하고 또 첫 임진왜란 때도 엄청난 죽음들의 희생 속에서 해 왔던 그대로 전 군민 모두가 어떤 방법으로든 명량해전의 전사였다. 십여 년 전에야 도평리 산에서 발견된 수백기의 무명용사들의 집단묘역이 그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정작 그날에 찾지 못한 주검들은 또 얼마나 많았으랴. 임진왜란 때 호남전역의 군관민이 모두 그러했지만 특히 진도는 <약무호남시무국가>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2) 다음은 울돌목의 자연현상과 기본 전술전략을 모르는 자리에서 제기되는 의문들과 당시 해전을 말하는 자리들이 역사를 그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크고 먼저인 게 세찬 조류물길을 가로질러 그 물 밑에 긴 쇠고리를 공학적으로 설치할 수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조응량 장군의 비석에 엄연히 새겨지고 그 작전을 조응량 장군이 충무공에게 제안하고 채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벽파군진에서 녹진으로 군진을 옮긴 것도 그 점에 있을 뿐 아니라, 망금산성에 강강술래 아낙들을 동원한 작전도 비로소 성립된다.
더불어 아낙들의 강강술래를 모두가 군사가 많게 보이려는 위장전술로 보는 게 모두이거니와, 그보다 전술전략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유인전술이자, 왜군들의 혼을 빼놓고 아군병사들의 필사투혼을 고무하는 수준 높고 엉뚱한 심리전술이었다. 진도아낙들이기 때문에 그도 가능했던 자리이다.
또 실제 전투상황을 자료를 통해 분석하는 자리에서 한쪽은 현지의 실제를 알지 못한 채 기록에만 의지하고, 다른 쪽은 그 세차고 빠른 조류를 거슬러 진격할 수 없는 모순 때문에 전투가 이루어진 장소를 우수영과 양섬 쪽으로 바꾸어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 쪽으로 밀린 왜선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곳에서도 전투는 이루어졌겠지만 주전은 어디까지나 녹진 쪽 곧 가장 세찬 물목이다. 가장 좁은 목인 현 대교를 12노트 속으로 빠르게 조류가 치달려 그 목을 빠져나갈 때 비록 약간의 포만을 이루고 있을지라도 바로 그 뒷자리 녹진해안의 물 흐름은 역행한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당장 아는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시절 그 의문에 사로잡혀 울돌목을 수시로 찾아다니며 그 이치를 비로소 알았다. 즉 빠르고 세찬 들물 조류를 타고 몰려오는 왜군선단을 향해 역류를 타고 진격하여 먼저 정면공격- 다음 측면공격을 하고 방향을 중심조류 쪽으로 약간 틀어 그들을 뒤쫓으며 후면공격을 퍼부으며 뒤쫓다가, 원하는 자리에서 해안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돌아 거슬러 오르며 그 회전을 되풀이하며 세찬 물길 속에서 전투를 지속한 것이다. 그러한 현장 지형 지리와 조류자연이치에 이미 익숙한 진도무사들과 그를 전혀 모르는 왜군들의 전투 내용과 결과는 하늘과 땅 만큼 다를 수밖에 없다.
명량해전의 결과 및 의의
명량해전은 13척의 배로 330척(일본기록엔 400척)을 물리친 미증유의 대승전이다. 직접 침몰수장 시킨 선박 수에 대한 기록은 각기 다르거니와 크게는 130여척까지 말하고 있다. 400척의 대 선단이 협소한 명량해협을 횡대로 일시에 진격할 수는 없는 일, 두어 열의 종대로 길게 이어질 때 선두가 이미 쇠고리 줄이 설치 된 현 대교 쪽에 도달할 때 후열 선단은 벽파진 쪽에 있었으리라. 그리고 선두가 세찬 조류를 타고 빠르게 진격하다 좌측 푸른 산정에서 흰 나비들처럼 너훌 너훌 춤추는 아낙들을 바라볼 때 과연 어떠하랴. 넋을 잃고 있을 때 갑자기 쿠당 배가 쇠줄에 걸려 좌우 앞뒤에서 전복 침몰하고, 돌아서려고 해변 쪽으로 방향을 틀어봐야 이미 빠르고 세찬 조류에 휩싸여 자신들 간에 선박이 충돌하고 뒤엉켜 이미 전열이 흐트러지고 만 세찬 조류 속의 오합지졸의 자리에서 어찌 할 줄 모르고 떠밀리다 아군의 포화공격을 받았으니, 직접 아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선박보다 스스로 전복 침몰된 선박이 훨씬 많았으리라. 그리고 용케도 쇠줄에 걸리지도 않고 무사히 녹진 쪽으로 그 목을 빠져나온 배들도 많았을 것이니, 그들을 쫓고 공격하는 과정에서 조류가 약해지고 바뀌는 시점에서 좀 더 넓 공간에서 비로소 서로 직접 맞붙는 전투가 벌어지고, 중과부적의 자리에서 아군도 많은 희생을 치룰 수밖엔 없었으리라. 그리고 왜군의 총사령선이 아무리 보아도 승리는커녕 전멸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남은 전함들을 이끌고 바뀐 조류를 타고 일제히 남해로 도주한 것이다.
한편, 때를 맞추어 명량해전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9월 7일) 직산 소사평 전투에서 일본군이 조명연합군에 패하였다. 그토록 수륙양면에서 패전한 왜군은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전쟁에서는 조명연합군이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곧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마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본국으로 도주하는 왜군을 계속 추격하여 노량해전에서 450척을 쳐부수는 최후 대승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수륙전 3대 대첩은 한산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이다. 그리고 해전 3대 대첩은 한산대첩, 명량대첩, 노량대첩이다. 전과가 보통 전과를 올린 적의 병력으로 평가되는 자리에서 한산대첩은 59척으로 왜군함대 73척과 싸워 적선 59척을 격침시켰다. 그리고 최후 노량해전에서 450척이나 되는 대 선단을 격침시킨 것은 이미 전의를 잃고 도망치기에 여념 없는 자리에서 조명연합군이 합세한 자리였다. 전쟁의 승패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표면적 수치의 전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한산해전에서 59척으로 73척과 싸워 59척을 격침시킨 것은 그보다 더한 대승대첩이 없다. 그러나 군사 수도 미미한 가운데 13척으로 300-400척과 싸워 설혹 50-60척을 침몰시켰다고 해도 스스로 퇴주하기에 여념 없도록 승리를 이끈 자리는 지금껏 세계 모든 전사의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전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역사가 임진왜란 3대 대첩에서 최후 승리의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그 놀라운 명량대첩을 제외시킨 근거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에 끼면 무얼 하고 아니 끼면 또 어떠랴만 명량대첩이 안고 있는 역사실체를 가볍게 여기는 데 그 이유기 있다.
일본 도고 제독과 충무공 이순신
1904년(광무2년) 러일전쟁의 승전기념식에서 일본 명치천황이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東鄕平八郞) 제독을 영국 넬슨 제독에 비유하며 세계 제일의 제독이라고 크게 극찬하며 추켜세웠다. 그러자 도고 제독이 당장 말하기를 신을 넬슨 제독과 견줄 수는 있아오나 세계 제일의 제독은 될 수 없습니다. 세계 제일의 제독은 바로 이웃 나라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 제독입니다. 페하와 온 국민의 전폭적인 신임과 지원 아래 우수한 전함, 용감한 군사, 풍부한 군수보급을 받고도 이기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너무 마땅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조선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왕의 의심과 모함에 빠져 투옥된 가운데 우리나라 대군을 막을 다른 길이 없자 비로소 나아가 싸우라는 왕의 명을 받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념으로 백의종군하였습니다. 그리고 패선 12척과 장졸과 보급품이 전무한 가운데 발틱함대의 몇 배나 되는 우리 일본 함대 400척을 전멸시켰으니 신이 어찌 감히 그에 견주기나 하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세계최강의 발틱함대를 격파하여 러일전쟁을 승리하고 동북아 패권을 장악한 일본에 세계열강들과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어 우르르 몰려든 승전기념식장에서 그런 도고 제독의 말이 터져 나오자 세계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선 충무공을 스스로 찾아 나섰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사관학교에서 군인정신을 가르치는 표본으로 이순신 제독의 충무정신이 일반화 되었다.
4. 역사를 보는 눈과 오늘의 진도 울돌목
오늘 우리는 몽고침략(몽고), 임진왜란(왜), 병자호란(걸안, 청 전신 후금) 등 숱한 외침의 역사, 명량대첩과 충무공 이순신과 그날의 진도를 정작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스스로 묻지 않는 자에게 역사는 대답하지 아니한다. 또한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진다. 오늘에 있어 인류사회는 여전히 군사전쟁이 국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에 더하여 경제전쟁과 문화전쟁으로 발전하고, 이제는 역사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곧 칼을 감추고 환한 평화공존의 미소 가면의 시대이다. 일본식민시대 일제가 우리겨레 웅혼한 역사를 반도식민사관으로 날조하고, 자신의 역사를 거짓으로 날조한 것은 이미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사교과서 날조를 비롯하여 우리 한국은 물론 러시아, 중국, 대만 등과도 영토분쟁에 나서고 있다. 오늘의 독일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도 과연 그와 똑같이 해야만 하는가?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르고 앞뒤가 다른 이웃들 속에서 우리 자신은 무엇인가 좀 달라야 하리라. 오늘에 우리 모두가 역사를 바로 알고 충무정신을 바로 깨치기 위한 자리에서 전라남도와 진도군과 해남군은 합동으로 매년 울돌목에서 명량대첩제를 개최하여 그 날을 재현시키고 돌아본다. 이웃 일본을 증오하자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오늘의 신세대가 역사를 모르고 역사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진도는 이미 역사를 훨씬 앞서 달리고 있다. 우리 겨레국가 고려군과 조선군 -몽고군-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울돌목 전사현장을 진정한 인류평화공존의 역사현장으로 바꾸고 꽃피워 나가기 위해 <진도울돌목 세계평화축제>를 펼쳐나가고 있다. 관 주도로는 아직도 불가능한 역사현실에서 진도의 순수도민간주도로 실천하고 있거니와 이미 10년을 넘었다. 모든 젊음이 자신의 나라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영령들을 국적을 넘어 세찬 물굽이 속에서 모두 건져 내어 씻기고 함께 꽃상여에 태워 어깨에 메고 극락왕생 길로 보내는 자리이다. 일본사람들, 북해도 아이누족들, 옛 유구왕국의 후예 오끼나와 사람들과 민속팀들이 참여하여 진도 민속팀과 함께 한다. 몽고 민속팀은 여건이 허락지 않아 아직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주관하는 진도민간단체는 이 인류평화대축제를 한국전쟁 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16개국과 그를 넘어 세계 모든 국가들로 확대할 꿈과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침몰하여 죽은 헤아릴 수 없는 왜군 시체들이 조류 따라 오르내리다가 마로해협의 마산포로 떠밀리자 당시 내동 마산 주민들이 모두 건져 마을 뒷산에 고이 장사지냈다. 그로부터 마을 사람들이 후손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후손들은 그 산을 <왜덕산(倭德山)>이라 해 왔다. 울돌목평화제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그 묘역을 40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좋게 정비하자, 그의 후손들이 매년 대거 찾아와서 성묘하며 위령제를 올린다.
이와 같은 진도의 현실 앞에서 그들을 직접 만나면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들의 진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도 민간단체가 이렇게 나서고 있는 현실 앞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과연 분노하실까? 우리에게 피와 뼈를 주신 고려군과 조선군 영혼들께서 조상의 피와 울분을 몰라보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못난 후손들을 두었다고 탄식할까? 같은 날 같은 물목에서 전사한 조선군 무명용사들의 묘역에 엎드리고 다시 왜덕산 왜병들 무덤 앞에 엎드릴 때 이도 저도 아닌 회색분자들이요, 거짓 가면이라고 양쪽에서 다 내치고 말까?
진정한 진실과 용기는 역사 악순환의 고리를 자신으로부터 먼저 끊는 자리에 있다.
자신을 추켜세우는 자국의 황제 앞에서 적국의 적장을 흠모하는 진실과 용기처럼.
<다음 16회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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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