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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칠환 시인
1963년 충북 청주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2년 <동아 일보>신춘문예 당선
1999년 대산문화재단 시부문 창작지원 수혜
2002년 서라벌 문학상 수상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시와시학사 2001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시와시학사 2004
시선집 <누나야> 시와시학사 2003
장편동화 <하늘 궁전의 비밀>
가뭄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구두와 고양이
마실 나갔던 고양이가
콧등이 긁혀서 왔다
그냥 두었다
전날 밤 늦게 귀가한
내 구두코도 긁혀 있었다
정성껏 갈색 약을 발라 주었다
며칠 뒤,
고양이 콧등은 말끔히 나았다
내 구두코는 전혀 낫지 않았다
아무리 두꺼워도
죽은 가죽은 아물지 않는다
얇아도 산 가죽은 아문다
봄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물결
그랬구나! 가슴의 통증이 가시고 눈 앞이 환해진다
어리석고 아둔한 것 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굽은 어깨와 허리가
매화 등걸처럼 휘영청 내 걸리고 가슴마다 꽃이 핀다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끌마저 모두 꽃핀다
가장 아프고, 가장 못난 곳에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아 걸려 있다니
가슴에 박힌 대못은 상처인가 훈장인가?
언제나 벗어 던지고, 달아나고 싶은 통증과 치욕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으며
가슴 속 잉걸불에 묻어둔 뜨거운 열망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을 것인가?
봄날 새순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피며, 손가락 잘린 솔가지는 관솔이 되고
샘물은 바위의 상처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내 근심이 키우는 것이 진주였구나
네 통증이 피우는 것이 꽃잎이었구나
어떤 채용 통보
아무도 거들떠보도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 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 들고 가겠습니다
새해 첫 기적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있었다
목격
- 속도에 대한 명상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속도에 관한 명상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바퀴
- 속도에 대한 명상 5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 속도에 대한 명상 10
서울에서 부산까지
노란 실선을 긋는 것이 직업인 그 사내는
보았다
길 왼편의 암컷에게 가지 못하고
길 오른편에서 울부짖고 있는
오소리를, 개구리를, 도마뱀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중앙 분리대를 쌓으며 가던 그 사내는
보았다
생명을 싣고 달리는 바퀴들이
생명을 밟고 다니거나
생명을 내동댕이치기도 하는 것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아스콘을 새로 깔며 가던 그 사내는
들었다
수십 번의 봄이 지나갔으나
잎이 되지 못하고, 줄기가 되지 못하고
웅크려 앓고 있는 씨앗들의 음성을
그 사내 어느 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둘둘둘 아스팔트를 말며 간다
젖은 흙살 위로 쏟아지는 저 붉은 햇살!
사내는 다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무를 심으며 온다
발자욱마다 질경이 돋고
민들레 다시 핀다
꼭꼭 숨어 있던 동물과 곤충들
멸종 도감의 원색 화보를 밀치며
하나씩 둘씩 달려나온다
한 걸음
- 속도에 대한 명상 11
드물게 나무 아래 내려온 늘보가
땅이 꺼질세라 뒷발을 들어 앞으로 떼놓는다
나뭇잎에 앉아 있던 자벌레가 활처럼 굽은 허릴 펴
삐죽 앞으로 나앉는다
맹수에 쫓긴 토끼가 깡총 뛰어오른다
버섯조각을 입에 문 개미가 쏜살같이 내닫는다
첫돌 지난 아기가 뒤뚱거린다
보폭은 다르지만 모두 한 걸음이다
시간을 뒤적이다
시간을 뒤적이지 말걸 그랬다. 신학자가 시간을 뒤적이는 그 아까운 시간을 기도하는데 쓸걸 그랬다. 저 통계는 마치 느닷없이 들이닥친 손님 앞에 너절한 살림을 들킨 것처럼 당혹스럽다. 저 모든 시간을 더하니 66년1개월이다. 나머지 8년11개월은 개별적인 자유시간인가? 그 시간을 쪼개어 사랑을 하고, 싸움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웃음도 지었을 것이다. 우리는 저 평균치로부터 각각 얼마나 다른 자기만의 편차를 지니고 있는가? 시간의 다소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순간 달게 자고,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보고, 맛있게 먹고, 설레며 줄 섰다면 저 통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에게 기도한 시간이 5개월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반대로 74년 7개월을 신에게 기도해야만 하고 나머지 5개월 동안 저 모든 일을 해야 한다면 진심으로 신을 경배할 자신이 당신에게 있는가? 신은 당신보다 우리의 삶에 경배할 시간을 더 많이 배려해 놓았으니 얼마나 자비로운가?
다국적 똥
또 배탈이군. 한때 돌조차 삭이던 위장이었는데. 그렇지, 장모가 전라도 배추를 경상도 고춧가루로 버무린 탓일 거야. 아냐, 맥도널드 햄버거에 우리 밀빵을 함께 먹은 탓인지도 몰라. 아니, 방부제와 잔류 농약이 십이지장, 소장, 대장을 방제하는 날일까? 쯔쯧, 세계화 시대에 이렇게 편협한 국수주의자의 내장을 가지고서야. 신토불이? 우린 모두 지구촌 읍민이니 지구에서 나는 모든 음식이 신토불이인 거야. 저녁엔 다시 캘리포니아 쌀에 중국산 콩을 놔 먹어보자. 끄억 --. 미제트림에 중국산 방귀를 뀌어볼까나. 비록 제3세계의 셋방에살지만 오늘도 난 다국적 똥을 눈다.
한평생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면,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도 미뤄 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도 미뤄 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그 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호두나무
쭈글쭈글 탱글탱글
한 손에 두 개가 다 잡히네?
수줍은 새댁이 양볼에 불을 지핀다
호도과자는 정말 호도를 빼닮았다
호도나무 가로수 下 칠십년 기찻길
칙칙폭폭, 덜렁덜렁
호도과자 먹다보면 먼 길도 가까웁다
자벌레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정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흩트려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갖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간 것은 제가 이륙할 열 뼘 생애였는지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 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 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 한다
때 1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 걸 보았을 때
굽히며 경배하라는 것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때를 가리지 못함이 무릇 몇 번이던가
제주기행 1
― 주상절리*에서
주상절리 입구에서
소라와 해삼을 팔고 있는
해녀 할머니는
주상절리에서 나서
주상절리로 시집와서
이마에 주상절리가 새겨지도록
물질을 해왔다고
젊은 날 당신과 할아버지 두 섬 사이에도
만경창파가 일었지만
이제는 갈수록 잔잔해진다고
오남매 자식들 뭍으로 공부시키고
손주들 용돈 주려고
소라와 해삼을 판다고
팔다가 남으면 도로
바다에 넣었다가 건져온다고
불거진 손매듭이 뿔소라 같은
파도에 지문이 씻겨간 두 손을
꼬옥 잡아드리며 나, 중얼거렸네
오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왜 이리 많을까
* 柱狀節理 : 기둥모양의 절리. 절리는 암석에 외력이 가해져서 생긴 금을 일컫는 지질학상의 용어. 여기서는 서귀포시 대포동에 위치한 지삿개를 일컬음.
어머니 5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 다니던 산지기 아내
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 바라보신다
칠십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
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
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
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
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
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쌈질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 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지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웃음의 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장미와 찔레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 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은행나무 부부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확인 못한 이야기들
참외밭
누나, 누나, 여기 누가 참외 따갔네? 꼭지만 남았어.
아, 그거! 아마 고슴도치가 따갔나보다. 너, 고슴도치가 왜
밤송이처럼 가시가 돋쳤는지 모르지? 이빨로 참외꼭질 갉아서
똑 뗀 담에 등가시로 콕 찍어서 짊어지고 엉금엉금 기어간단다.
증말이야?
뒤란에 다람쥐
성, 니째 성, 나 다람쥐 한 마리만 잡아 주면 얽으미에 넣고 키우지.
임마, 다람쥐를 어뜨케 잡냐. 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다.
장독대 뒤에, 밤나무 밑에 다람쥐 많지? 다람쥐가 밤 줏어 먹느라
정신 없을 때 갑자기 바람 불면 알밤이 떨어져 가끔 다람쥐들이
뒤통수 맞고 기절한다더라. 알밤 맞은 다람쥐 보면
내 주워서 너 주지. 너도 바람 불 때 잘 봐라?
..............알았어!
꿩동산
꿔어꿔꿔 - 엉 -
아부지, 꿩괴기가 닭고기보다 맛있나?
그으럼, 열이 먹다 아홉이 죽어도 모른단다.
아부지 그러면 꿩 좀 잡아오지.
니가 좀 잡아서 아부지 꿩괴기 맛좀 보여주거라.
에이, 내가 어떻게 잡아.
꿩 잡는 건 어렵잖다. 장끼 두 마리가 싸우기 시작하면
한 놈이 죽어야 끝나거든. 넌 가만히 쌈 구경하고 있다가
죽은 놈 한 마리 줏어오면 아부지가 구워주지.
으응............ 근데 어디서 싸워?
누나야
다섯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갔다가
땀뻘뻘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참대처럼 야무진,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
국민학교 때
'코스모스 꽃잎에 톱날 박혀 있네
톱질하시던 아버지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동시를 지어 백일장에 장원한 누나야
나이팅게일이 되겠다고, 백의 천사가 되겠다고
간호대학에 간 누나야
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마을
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
부임 첫날 다급한 소식 듣고 찾아간 곳 다름아닌
냄새 나는 축사, 난산의 돼지 몸 푸는 날이었다고
다섯 마린지 여섯 마린지 돼지 새끼 받아내느라
혼났다던 스물두 살 누나야
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머리 쓰다듬던 누나야
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친정 달려와
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
이제 곧 큰 길이 나고 사라진다는 고향마을 중고개에
아직도 나를 업고 가느라 깍지 낀 손에
파란 힘줄 돋는 누나야
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장어
수족관 장어들이 날렵하게 꿈틀거린다
평생 한 일 자 일획만 긋던 놈들이다
이제 일획도 너무 길어
탁, 탁, 탁
점으로 돌아가리라 한다
마침내 붓마저 버려야 얻는
절체절명의 도마필법을 얻으리라
저마다 설레어 웅성꿈틀거린다
저들이 써 온 일필휘지의 서첩은
고스란히 물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강물에 강물을 찍어서 썼다고 한다
새들이 허공에 허공을 찍어
온몸으로 일획을 남기고 가듯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월식
돼지 우리 삼은 큰 궤짝 걷어차며
이놈 팔아 나 중핵교나 보내주지
거듭 걷어차던 시째 성 집 나갔다
대처 나간 성들도 소식 없었다
사진틀 끌어안고 눈물짓던 엄마는
묵판 이고 나가다 빙판에 팔 부러졌다
말 없는 니째 성 더욱 말 없고
말 잘하는 누나도 말이 없었다
겨울 바람은 왜 쌀 떨어지고, 옷 떨어지고,
땔감 떨어진 집을 더 좋아하나
연기 솟는 방고래, 흙 쏟아지는 베름짝이
무에 문제냐고 하룻밤 묵어 가잰다
마실 갔다온 엄마가 말씀하신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마실 갈 땐 둥실하던 보름달이
슬슬 줄어들어 그믐처럼 깜깜터니
돌아올 때 그짓말처럼 환하지 않더냐
그게 월식인 줄 대처 나간 성들은 알고 있었을까
얼음보다 더 찬, 멍석보다 더 큰 그믐달이
슬슬 가려주던 우리 집 언젠가
그짓말처럼 환해질 줄 알고 있었을까
먹은 죄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주산지 왕버들
누군들 젖지 않은 생이 있으랴마는
150년 동안 무릎 밑이 말라본 적이 없습니다
피안은 발 몇 걸음 밖에서 손짓하는데
나는 평생을 건너도 내 슬픔을
다 건널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은 왜 낙타로 하여금
평생 마른 사막을 걷도록 하시고,
저로 하여금 물의 감옥에 들게 하신 걸까요
젊은 날, 분노는 나의 우듬지를 썩게 했고
절망은 발가락이 문드러지게 했지만,
이제 겨우 사막과 물이 둘이 아님을 압니다
이곳에도 봄이 오면 나는 꽃을 피우고
물새들이 내 어깨에 날아와 앉습니다
이제 피안을 지척에 두고도 오르지 않는 것은
나의 슬픔이 나의 꽃인 걸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1
풍으로 떨던 아버지, 나 하나도 슬프지 않았네
내 나이 다섯 살, 지팽이 짚은 아버지 허리춤 풀어주며
오줌 시중 들어도 나 하나도 가엾지 않았네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는 사람, 아버지는 그저 방 안에 있는 사람
이따금 콜록거리는 기침과 긴 한숨이 문턱을 넘어왔지만, 나 무시했네
나를 사로잡은 건 그보다 능구렁이나, 다람쥐 울음소리였다네
어느 날 아버지, 잠자리 꼬리 밀짚 꿰어 시집 보내던 나를 불렀네
막내야, 산내끼 좀 가져다 다오-
고무신 꿴 아버지 댓돌 아래 나오시네
아부니, 산내끼 여기
가까스로 헛간으로 오신 아버지, 새끼줄로 목을 매시네
나 말리지 않았네
발버둥 치던 아버지, 새끼줄이 끊어지자 청뜰에 떨어져 피투성이가 되었네
나, 그제서야 앙 하고 울었네
아버지는 그 후로 일 년을 더 사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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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시 올려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시인의 이름이 독특하여 이름을 서너번 읊조려 보니 반만 칠하다 내려 놓고 온 그림종이가 생각나고, 시를 읽고 한 점 한 점 그의 시를 읽고 나서 다시 읊조려 보니 회광반조廻光反照 ! 가슴에 사무치네. 감사히 정말 흥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종종 음미하러 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푹 빠졌다가 갑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시 읽고 또 읽어야할것 같슴다
어떤 시인의 30여편의 시를 한눈 팔지 않고 읽어 보긴 참 오랜만입니다. 매 편이 절창인 이 시편들을 아무 보답없이 읽을수 있다는게 미안하기도 황송하기도 합니다. 이날 이후로 반칠환시인의 왕팬이 되겠습니다. 더불어 다음 시집은 꼭 사서 보겠습니다
게으른 탓에 이런 시를 접하지 못했음이 마냥... 그래도 만났으니 감사! 시 올려주신 김재준님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