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과 영혼’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된다.
잊혀진 화면을 다시 보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그 영화를 처음 볼 때보다는 낯설지 않았다. 영화 밖에서 영화같은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중년의 한 여인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엄마의 서름을 잔뜩 받고 자랐다.
계모의 히스테리는 당할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물건을 다반사로 던지고 꼬집고 때리는 정도를 넘어서 심하면
이고가던 물동이를 던지기도 했다.
그 여인은 몸에 상처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계모는 어려운 살림을 꾸리다가 살기가 폭폭하면 스트레스를 여린 딸에게 쏟아내곤 하였다.
그 관계는 그들의 십자가였을 것이다.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어려운 관계 속에서도 여인은 덤빌 수 조차 없었다.
그래도 세월은 제 걸음으로 가고 그 여인은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세상으로 내보내졌다.
나이가 들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에 닥칠 때마다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께 도와달라는 청을 하였다.
늘 어머니만 살아계셨더라면 자신이 이렇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면서 신세한탄을 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삶이 하루아침에 햇살드는 양지로 바뀌지는 않았다.
늘 축축한 세월을 견디었는데 어느 날 꿈에 그 여인은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가 ‘UN표 팔각 성냥’을 주고 가더니 그 후로는 살림이 피면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기억 안에는 이사갈 때 선물로 사용한 성냥의 이미지가 들어있을 것이고
그 성냥의 의미는 재산이 불같이 일라고 주는 것이었다.
문제는 꿈에 어머니가 준 것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나는 그것의 궁굼증을 놓을 수가 없다.
‘전설따라 삼천리’의 프로그램에나 등장할만한 이야기를
우리는 현실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영화나 소설이 인간의 상상에서 만들어지며
그 상상은 어딘가 있었을 사실적 근거를 토대로 한다.
사람의 생활 안에 없는 것을 복합적으로 꾸며낼 수는 없는 일이다.
선한 마음은 선한 영의 도움을 받을 것이고 악한 마음은 악한 영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기에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을 것도 같다.
모든 영에도 등급이 있을 것이기에 절대등급을 종교적 대상으로 삼는다고 믿으면
이해는 충분히 가능해진다.
내게 UN표 성냥은 사각형 해표 성냥보다 좋은 것이라는 관념을 깨고
꿈에 UN표 성냥을 받으면 부자가 된다는 이해 하나가 더 깊이 들앉는다.
보고 듣는 것이 쌓이면 그것들끼리 복합구성을 하며
꿈으로, 소설로, 영화로 등장할 것이다.
아마 이 정도의 이해 안에서 내 꿈에 해표성냥이 등장한다면
썩 기분이 좋지 않을 것같다.
총기가 좋은 시절에 박힌 기억들이
우리 안에서 오후 4시경의 한강처럼 반짝인다.
무수히 많은 거울조각으로 반사하듯 반짝이며 들어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통통 튀어 나올 것같다.
그러나 웃지 못할 내용을 확인한 날도 있다.
남학생들의 고교 시절의 기억들 중 가장 특별한 내용은 음란물 보다가 들킨 백태였다.
이 또한 새롭게 이해해야할 국면에 접어들며 인간에 대한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할 것같다.
UN표 성냥에 대한 추가내용보다 남자고교시절의 추억에 대한 난이도 높은 이해목록이다.
많이 보면 각이 무뎌진다. 이해의 난이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미지에서 공통성을 찾게 된다.
그러나, 문화가 다양하게 교류되고 이해가 넓어진다고 살기가 수월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소화시켜가며 살 일이다.
아는 것은 힘이고, 모르는 것은 약이며 힘과 약은 정당량을 써야 좋은 게 될 것이다.
만약 내 꿈에 하얀손이 UN표 성냥을 내게 주었다면 ‘성냥’이란 단어에 강세가 붙지 않고
‘UN’이란 단어에 강세가 붙은 것으로 해석할 것이다.
‘복잡하던 일이 풀려 화평을 이룰지도 모른다’로 풀이할 것이며
하느님이 나를 도와주셨다고 나는 믿을 것이다.
내게 있어 하얀손은 사랑을 관장하는 최고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