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소설을 새로운 HD TV 문학관에서 다룬 작품이다. 임실을 배경으로 한 황순원의 <소나기>에 이어 현대물로 만들어낸 <내가 살았던 집>은 나름대로 절제된 영상미와 사건전개의 스피드, 그리고 흔들리는 화면과 사실감 넘치는 연출효과가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분명 기본의 단막극과는 차별적인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서 보여주는 현실과의 차별없는 리얼리티가 소름이 끼치도록 우리네 삶의 단면을 날카롭게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또 다른 면에서는 소설적인 주제를 영상적인 것으로 바꿔내는 작업 면에서 영상적 면에서도 새로운 도전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서구영화에서 많이 본 장면을 한국적인 인물로 바꿔낸 모사에 그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네 정서를 담은 작품을 영상으로 옮긴다는 면에서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새로운 시대의 그릇에 담아내는 작품 시리지, 황순원의 <소나기와> 은희경의 <내가 살았던 집>, 그리고 김동리의 <역마>를 보면서, 우리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소설적인 작품의 원형을 보게 된다. 머리카락과 유행은 바뀌어도 인간의 내면적 진실은 그런 외형적인 것과 달리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상은 시간이 지나면 금새 촌스러워져, 다시금 새로운 시대의 안목으로 다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수없이 많은 작품들이 영상으로 옮겨졌음에도 여전히 원작은 살아 남아 다시금 새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면에서 언젠가 읽었던 은희경의 작품(아마 탁류 모임에서도 다루었던 기억이 있음)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영상과 소설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딸과 살고 있는 한 중년의 여자는 바쁜 직장 생활 중에 친구로부터 한 남자의 죽음 소식을 접한다. 다른 사람에게 표나지 않게 자중하는 듯 보이는 여자는 그 소식을 접한 후부터 걸신걸린 사람처럼 밥을 먹어대는가 하면, 이전에 먹지도 않고 썩어서 버렸던 사과를 먹기도 한다. 여자는 자신의 딸이 키우던 햄스터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 새끼를 잡아먹었던 일로 상심한 딸을 본다. 어떻게 제 새끼를 잡아 먹을 수가 있느냐면서 낙심해 있는 딸을 대신해 수족관집에 찾아가 항의를 한 후 돌아온다. 남자가 보이지 않는 직장여성인 여자는 일에 빠져서 생리가 시작된 딸에게도 신경을 쓰지 못한다. 이런 일로 자신은 버려진 아이란 생각을 하는 아이, 또 나이들어가면서 홀몬 주사를 맞고 다시 생리를 시작하는 어머니도 있다. 어머닌 자신이 늙어가는 처지로 집에 와서 살라는 말에 내가 아이들 뒷치닥거리 하라는 말이냐면서 신경질을 낸다.
여자는 떠올린다. 자신이 만났던 남자에 대해, 그 화면은 섬뜩할 정도로 바로 그 남자와 함께 갔던 장면이 마치 입체적으로 시공을 초월해 만나고 있는 것처럼 화면효과를 통해 재현된다. 그 남자가 사주었던 스탠드, 그리고 어느 날 엉뚱하게 들고와 놓고갔지만 썩어버리게 된 사과상자, 돈을 빌려달라고 해 거스름돈이라면서 주고 간 목걸이까지 온통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이 자신에게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다섯 살 연하였던 남자는 신문사 기자였고 또 부인이 잘나가는 방송국 구성작가였다. 여자는 자신이 그 남자가 결혼한 후에 그 집에 가서 그 남자와 함께 밤을 지샜던 일을 떠올린다. 낯선 여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 안에서 보냈던 날을 떠올리면서 여자는 자신의 딸에게 접근하려고 하지만 딸과의 사이엔 많은 거리가 놓여진 걸 보게 된다. 여자는 바쁜 일과 중에도 여자가 된 딸에게 접근해 평소 아이가 관심을 갖고 있던 걸로 말을 건다. 문득 어느 날 가게 된 바닷가에서도 여자는 그 남자와 함께 했던 순간을 떠올린다.그 사이 사리진 딸의 소식을 접한다.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 딸아이의 소식....
초상을 치르던 상주였던 그를 찾아갔을 때 그와 함께 했던 슬픔, 자신의 형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불연득 소개를 해 주었던 일하며, 온갖 슬픔과 기쁨을 함께 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다가올 때 여자는 자신에게 불연득 떠나버린 남자의 빈 자리를 보게 된다. 항시 자신에게 난데없이 찾아와 자신의 기분대로 왔다가 떠나버렸던 남자였지만 그 남자의 기억은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 너무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자신이 그 남자와 헤어지기로 작정을 하고 여행을 떠나던 날이었다. 그 남자는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그날 따라 왜 그 남자는 자신의 집이었던 잠실 쪽으로 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다 죽었느냐 하는 것이다.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왜 그 길로 왔던가를. 여자가 일본으로 떠나왔던 날, 자신이 본 그 교통사고 현장은 바로 자신을 만나고 가던 남자가 사고를 일으키고 죽은 곳이었다. 그녀는 바로 그곳을 차를 타고 돌아오다 자신 또한 그곳에서 사고가 난 채 머리를 박고 쓰러져 있다. 그녀는 희미한 정신으로 진동하는 핸드폰소리를 듣는다. 그곳은 교통사고 사망지역이었다.
언젠가 이 작품을 두고 탁류 모임에서도 열띤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났다. 교통사고 사망지역이란 것으로 너무 뻥튀기한 것 아니냐 하는 것하며, 여성 특유의 소설적 소재와 스피드한 작품전개가 돋보인다는 말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지만 본격적으로 그 아픔의 핵심이 딸의 이야기 얼개와 또 어머니 혹은 남자와의 사이에서 더 구체화되지 못한 면이 아쉽다는 생각도 했다. 미묘하게 흐르는 심리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회상이 지나치고, 또 현실적으로 딸과의 갈등 또한 구체화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다분히 감상적인 접근처럼 교통사고 사망지역에 대한 구도적 접근이 도식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다만 영상적으로 짧게 짧게 끊어진 숏컷들이 만들어내는 스피드한 장면전환효과는 소설에서 읽는 행간과 달리 또 다른 맛이 되어 살아았다. 영상이란 것이 즉물적으로 사람들에게 마치 그것이 보여지는 진실인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진실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글로 읽는 것과 달리 영상적인 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본래 작가가 의도한 것이었다고 해도 영상은 더 구체적으로 그것이 의도한 것들을 구체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연출이었다. 수 많은 스탭과 일행들이 그저 원작을 하나의 세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그 뼈대는 여지없이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좁혀버리는 우를 범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영상의 여백효과나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다양한 의미의 얼개를 어떤 식으로 짜내느냐 하는 건 작가의 몫이 여전히 연출자의 연출효과에 이월되는 것 같았다. 과연 그것이 제대로 살아났느냐 하는 면에서 이 드라마의 성과가 결정된다고 하겠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이전의 드라마와는 완연히 다른 연출효과에 낯설었다. 하지만 드라마의 연출효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품이 다루는 주제의 완성도는 그대로 영상에도 남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로 의도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들어오고 또한 의도한 것들이 많이 빠져나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하려고 하는 것들은 남아 있는 것 아닌가. 그건 혼돈인가 혹은 강력한 충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