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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徐子平
-오대사람(당~송), 사척선생, 봉래수, 日, 태양, 24절기, 간지, 낙녹자삼명소식부주, 낙녹자부주, 옥조신응진경주, 명통부, 연해자평 계선편, 재관중시, 다양한 격국, 신살, 납음을 사용한다.
*, 일간 중심으로 월령용신과 격국을 도입, 근묘화실론, 18개의 격국, 생일을 주로 하고 생월을 용신으로 하여 음양오행의 중화, 태과, 불급으로 운명을 간명하다.
*, 中和를 강조한다. 절기의 심천, 재관의 향배, 격국의 순수, 등 이론중에서 중화가 핵심이다.
*, 正名論이다.
서자평은 고법 사주학의 이론을 거의 대부분 폐기하고 새로운관점에서 사주학을 정립하였다.출생 연월일시의 四柱干支(시는 별도)를 운명 추론에 이용한다는 공통점을 제외 한다면 고법 사주학과 신법 사주학은 별개의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자평 이후의 사주학 연구가들은 서자평을 진정한 의미의 사주학의 창시자라고 평가하고 있고 현실적으로 철학관의 운명상담에서 사용하고 있는 사주학 역시 서자평의 신법사주학(子平學)이며 고법 사주학을 사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1, 서자평은 누구인가?
1), 서자평이 五代때의 徐居易(자평)라고 보는 설이 있다.
明의 萬育吾(민영)는 그의 저서 <三命通會>제7권 '子平說辨'에서 “濯纓筆記(탁영필기)에 보면, 子平은 성이 徐, 이름이 居易이고, 子平은 그의 字이다. 東海人이고 別號는 沙滌先生인데 蓬萊叟라고도 하며, 太華의 서쪽 棠峰洞에 은거하였다. 子平法은 출생 연월일시로써 그 祿命을 추리하였는데 적중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연원은 전국시대 珞琭子로부터 나왔는데 세상에 있는 <元理消息賦> 한편이 낙록자의 저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을 보건대 후인의 僞撰이지 낙록자의 本眞은 아니다. 낙록자와 같은 시기에 鬼谷子가 있었고, 漢의 董仲舒, 司馬季主, 東方朔, 嚴君平, 三國時代의 管輅, 晋의 郭璞, 北齊의 魏寧, 唐의 袁天綱, 僧 一行, 李泌, 李虛中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 術의 祖이다. 일찍이 李泌은 管輅의 天陽訣과 一行의 銅鉢要旨를 얻어서 점을 쳤는데 사람의 길흉을 극히 잘 적중했었고, 이필은 이허중에게 이것을 전해서 발전시켰다. 낙록자는 年으로써, 이허중은 日로써 하니 그 법이 一變하였다. 五代에 麻衣道者 希夷先生, 子平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자평이 허중의 術을 損益하여 오로지 五行을 위주로 하고 納音을 위주로 하지 않았으니 그 법이 또 한번 변했다.
자평이 죽은 후에 宋 孝宗 淳熙 년간에 淮甸의 術士가 있었는데 그의 號가 虛子였고 이 術에 정통하여 세상에서 중요하게 인정받았다. 그 무렵 僧道洪이라는 자가 그 진전을 비밀리에 전수받은 후에 錢塘으로 들어가 그 학문을 傳布하였는데 세속에서는 그것의 유래를 알지 못하고 子平이라고 直言했을 뿐이었다. 후에 도홍은 그것을 徐大升에게 전했는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三命淵源>, <定眞論>등은 모두 서대승의 저술이다. 이로써 本書의 變易이 끝나게 된다. <五行精紀>, <蘭臺妙選>, <三車一覽>, <應天歌> 등의 책은 <淵源>, <淵海>와 내용이 다르다. 무릇 문장을 읽고 변화를 관찰하건대 治曆明時는 모두 시대를 따라서 개혁하므로 비록 백 년 동안에도 數術의 학설 역시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자평의 시대로부터 대승까지 간격이 삼백여년이 흘렀으니 그 법이 몇 번 변했는지 알 수가 없다. 혹자는 말하기를 대승이 자평의 眞傳을 얻었다고 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推命之術은 또 다시 元人이 子平과 大升의 二家의 법을 復推하여 演繹한 것이다. 오늘날 命을 논하는 사람들을 보면 子平이라고 통칭하면서 그 근원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子平 두 글자를 해석하여 자세하게 辯論하게 된 것이다.”
*, 참고
가), 고운성의 명리학역사 참조
나), 위 글에서 變易, 治曆明時라는 말은 하도(복희역)에서 낙서(문왕역)으로 변화는 易을 交易이라고 하며 낙서(문왕역)에서 후천의 정역으로 변하는 易을 變易이라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曆(책력, 曆數原理, 변화원리)에 의해 변한다는 뜻에서 治曆明時라고 하였다.
다), 六事는 六神을 말한다.
위의 글에서 만육오는 서자평이 활동한 년대와 성명과 字號에 대해서, 본명은 서거이, 자는 자평, 별호는 사척선생 또는 봉래수, 五代시대 인물이고 東海(지금의 江蘇省 東海縣) 사람이고 은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자평추명법이 傳承된 大要에 대해서, 멀리는 전국시대의 귀곡자와 낙록자를 계승하고 가깝게는 唐의 이허중이 그 術을 가감하였고 후에 宋의 충허자와 승려 도홍이 서 대승에게 전했으며 또 다시 元人이 자평과 대승의 법을 復推하여 당시의 추명술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추명 방법의 변천에 대해서는 낙록자는 年을 위주로 하고 이허중은 日을 위주로 하였으며 서자평은 연월일시를 모두 함께 보면서 납음을 위주로 하지 않고 오행을 위주로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 서자평은 宋末의 徐升(자평)이라는 설이 있다.
明代에 楊淙이 增校한 <淵海子平>의 추천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子平淵海의 이치는 唐의 大夫 虛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의 출생 연월 일시의 生剋旺相과 休囚制化로써 사람의 화복을 결정하는데 그 응험이 귀신과 같았다. (중략) 宋의 徐公升은 다시 사람의 生日을 위주로 하여 六事를 나누어 議論이 精微하였으며 <淵海>의 책을 지어 諸儒의 뜻을 모아 지금까지 傳布하므로, 모두의 祖宗이 되었다. 후에 여러 사람의 文集인 <淵源>이 있었지만 理義와 篇章이 부화뇌동하여 지금까지 수 백년이 되었고 版籍에 글자의 오류가 많아서 학자들이 그 뜻을 알기가 어려웠다. 오늘날 唐錦池군이 이 이치에 정통하여 이 두 권의 책을 합치고 口訣을 보태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 (중략) 인쇄해서 세상에 내놓으니 후학들이 이것을 익혀 고인의 遺範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책을 완성함에 당금지군이 나에게 부탁하기에 여기에 추천사를 쓰는 바이다. 崇禎7년 초겨울 吉日에 重梓를 하면서”
이 글을 읽고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허중이 연월일시를 추명의 기준점으로 삼았고, 후세의 자평술을 하는 사람들이 서승을 조종으로 추종하였고, 서승이 생일을 위주로 하여 六事(六親)로 논명하는 법을 창시했고, 徐升은 <삼명통회>에서 언급한 바 있는 徐大升(혹은 徐大昇, 徐彦昇)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는 점이다. 추천사에서 당의 이허중과 송의 서승 사이에 존재했던 徐居易의 존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그 책 3권 <五行原理消息賦>를 주석하면서 서승이 錢塘에 居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를 서자평이라고 불렀다고 말하고 있다. 서승이 곧 서자평이라는 것이다.
3), 서자평은 明代의 徐均이라는 설이 있다.
이 학설은 극소수의 학설이고 오로지 明代의 張楠(신봉)이 홀로 주장한 학설이다. 그의 저서 <神峰通考命理正宗>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明朝의 徐均이 子平書를 지었는데 오로지 日干을 위주로 하고 月令을 用神으로 삼고 年時로 輔佐하니 命書의 저작은 이에 이르러 끝났다.” 장남은 명대의 서균이 자평서를 지었으며 명리학의 중대한 발전을 이룩한 대표적 인물이며 일간을 위주로 하는 학설을 창시했다는 듯한 암시를 하고 있다.
*, 필자는 서자평은 서거이로서 자평학의 창시자이고, 서대승(서승)의 淵海+당금지의 淵原=연해자평으로 서대승(서승)과 당금지는 후대 사람으로서 서거이의 학설을 널리 발전시키고 퍼뜨린 후계자라고 생각한다. 혼란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거이와 서대승(서승)의 호가 모두 子平(물의 평평함=저울)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2, 서자평의 저서 및 학설 命理學史
서자평은 <珞琭子三命消息賦註>, <玉照神應眞經註>, <明通賦>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낙록자삼명소식부주>와 <옥조신응진경주>는 주석을 달면서 자기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고, <명통부>는 자기의 저술이라고 알려져 있다. 중국 문화의 전통에는 주석을 달면서 저술을 하지 않는 풍토(述而不作)가 있었는데 서자평 역시 그런 셈이다. <낙록자삼명소식부주>의 원저자는 珞琭子인데 낙록자가 누구인지는 논란이 많다. 周世子 晋이라는 설, 陶宏景이라는 설, 北宋人이라는 설이 <四庫全書>에 소개되어 있고, 東漢에서 唐初의 인물이라는 설 등이 있고, 서자평이 주석을 단 시기에 대해서 대만의 鄒文燿는 서기 1135년 이후라고 추정하고 있다. 낙록자는 빠르면 주나라까지 늦어도 북송시대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낙록자삼명소식부주>는 서자평의 주석을 통해서 신법 자평학이 진면목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사주학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四柱에 대하여
서자평은 사주를 本命(年柱), 生月, 生日, 生時라고 정의한다. 이것은<이허중명서>를 비롯한 고서에서 사주를 胎月日時라고 정의한 것과 다른 점이다. 고법에서는 태월일시의 사주에 년주를 합하여 五柱로 論命하였는데, 서자평이 사주란 年月日時라고 정의한 것이다. 고법에서 사용하던 태원이 사주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현재까지 사주학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2), 八字에 대하여
서자평은 연월일시의 천간 4자와 지지 4자를 합해서 八字라고 정의하였고, 이것이 현재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3), 三元에 대하여
서자평은 본명, 생월, 생일, 생시의 四柱마다 三元이 있다고 하는데, 삼원이란 天元, 地元, 人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원은 천간, 지원은 지지, 인원은 지지 속에 들어있는 천간 곧 支藏干이다. 고법에서는 년주의 천간을 祿, 년주의 지지를 命, 년주의 납음오행을 身이라고 하며, 이 祿, 命, 身을 三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서자평이 삼원의 개념을 변경시킨 것이고, 서 자평의 삼원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법에서는 년주를 중심으로 하여 삼원을 정하고 태월일시는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으나 서자평은 일간을 중심으로 놓고 사주 전체의 천간과 지지와 지장간을 골고루 사용한 것인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4), 納音에 대하여
서자평은 납음을 한번 언급했을 뿐이고 사주판단에 사용하지 않았다. 현대 사주학이 납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5), 大運과 小運에 대하여
고법에서는 대운, 소운, 氣運을 보았는데, 서자평은 대운과 소운을 보고 기운을 보지 않았다. 서자평은 대운을 정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현대 사주학 역시 서자평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6), 太歲에 대하여
서자평은 출생한 해의 태세와 매년 돌아오는 태세를 설명하고 있다. 매년 돌아오는 태세를 行年太歲, 逐年太歲, 流年歲命이라고 하였는 데, 이것은 현대에도 일년 운세를 볼 때 行年太歲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
7), 五行의 계절별 强弱에 대하여
서자평이 사주 간지의 오행이 계절에 따라서 일년 12월에 따라서 生死休旺하는 이치를 밝히면서, 음간과 양간이 12운성이 다르게 배치되지 않고, 甲乙木이 同生, 同死, 同休, 同旺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점은 현대명리학 중에서도<滴天髓>가 음간과 양간이 同生同死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고법<李虛中命書>에서는 陰生陽死를 주장했다.
8), 支藏干에 대하여
서자평은 “지지 속에 인원이 있다.”, “지지 속에 천원이 들어있다.”라고 하였는데, 서자평은 천간과 지지의 관계를 천간끼리의 관계로 환산하였다. 그것은 지지를 천간으로 환원하는 지장간 이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六神을 배정할 수가 있었다. 이 지장간 학설은 당연히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9), 六神에 대하여
서자평은 육신을 命星이라고 부르고 있다. 육신은 현대 사주학에서도 필수불가결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육신에 六親을 배정하는 원리 역시 설명하고 있는데, 관성을 남편으로, 재성을 처와 부친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현대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0), 六親의 위치 배정에 대하여
서자평은 육친을 사주의 연월일시 위치에 배정하고 있다. 년은 조상궁, 월은 부모궁, 일은 자기와 배우자궁, 시는 자식궁으로 배정하였다. 이 이론 역시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1), 强弱에 대하여
서자평은 간지 오행의 강약을 12월에 배정하여 논하면서 지장간에 通根했는가를 겸해서 보고 있다. 節氣의 深淺에 따라서 오행의 强弱이 변하는 학설은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특히 일간의 강약을 따지는 것은 抑扶用神을 정하는 핵심 요건이 되고 있다.
12), 부귀, 빈천, 길흉, 질병, 운세, 품성 등에 대해서
서자평은 그런 항목을 판단하는 원리 역시 설명하고 있는데, 대부분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3), 實例사주에 대하여
서자평은 자평학의 이론을 실제 사주의 풀이에 응용하고 있다. 실례를 든 사주는 10개이다. 예를 들면 胡茂老의 사주는 壬子년 壬子월 丙申일, 辛卯시이다.
이상에서 <낙록자삼명소식부주>가 신법 자평학의 초석이 되고 있고, 그곳에 수록된 학설이 현대 사주학에 그대로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자평이 주석을 단 또 하나의 저술은 <옥조신응진경>이다. 간지기년법이 漢代에 확립되기 전에는 每年의 干支(年柱)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할 때, 東晋의 郭璞이 저술했다고 알려진 <옥조신응진경>이 四柱라는 명칭이 기록된 최초의 저술이 되는데, <옥조신응진경>은 <古今圖書集成>의 星命部에 들어있다.
“郭璞正文, 徐子平註”라고 되어 있으며, 서자평이 주석을 단 것으로 되어 있다. <옥조신응진경>은 곽박이 六壬의 원리를 주로 사용하면서 서술한 것을 서자평이 주석을 달고 있는데, 서자평의 주석은 <낙록자삼명소식부주>와 대동소이하다. 육임의 원리는 원래 日干을 중심으로 보는 것인데, 일간 위주의 육임 이론이 서자평에 이르러 일간 위주의 사주학으로 정립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것이며, 여기에 <옥조신응진경>의 곽박의 원문이 교량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明通賦>는 서자평의 저술이라고 <三命通會>에 기록되어 있다. <삼명통회>는 明代萬曆6년(1578년)에 출판된 책이다. 또한 四庫全書 子部 術數類에 수록된 책이기도 하다. <삼명통회>속에는 <명통부>전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東海徐子平撰, 易水萬育吾解”라고 되어 있다. 서자평이 원문을 쓴 것을 만육오가 주석을 단 것이다. 내용은<낙록자삼명소식부주>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며, 四柱, 八字, 日干, 간지 오행의 生死休旺, 命星, 强弱, 不見之形, 吉凶, 六親, 歲運, 格局등의 설명이 있다. 이 역시 현대까지 이론이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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