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3주일 설교 2024년 4월 14일
증인으로 산다는 것
루가 24:36-48. 사도 3:12-20. 1요한 3:1-7.
오늘도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그분을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갈릴래아 호수 한 가운데에서 폭풍을 뚫고 걸어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죽음의 공포, 큰 고통 가운데 다가오는 주님을 그들은 유령이라고 착각합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허상을 보게 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자기 안에 그 무엇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기에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평소에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살거나 오히려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은 이들이 정작 어려움을 맞닥뜨리는 순간 돌변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감추어진 본성과 실체는 결정적인 순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두려움이 극한에 처하면 이렇게 헛것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을 묵상하며, 눈에 보이는 명쾌함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번거롭고 힘들고 더디 가는 길이라도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신앙의 여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를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굳센 것 같던 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지는 것도 보았고, 나약한 것 같던 이들이 오히려 굳세게 어려움을 이기는 경우도 허다하게 봅니다.
두려움은 ‘나’를 못 보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생각이 나를 지배합니다.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지만 정작 제자들은 자신이 만든 두려움의 틀에 갇혀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유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식사하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찬례(성찬의 전례)를 떠올립니다.
우리가 정성껏 드리는 이 성찬례는 주님과 함께하는 부활의 식사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확신으로 나아가게 하는 고백입니다.
한 빵을 나누어 먹고 한 몸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주님과의 식사이고 나눔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성서에서 전하는 하느님의 계획하심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고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찬례에서 말씀의 전례임을 알게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누며 그 은총 가운데 사는 이들이 제자 된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귀한 축복이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법적으로 증인이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첨삭이 없이 그대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라도 허투루 말해서는 안 됩니다.
증인이 자신이 체험한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말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사명이 ‘증인’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주어지는 말씀만을 듣고 성찬례에 의례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증인으로서 주님의 말과 행동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무한한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1독서에서 베드로는 자신들을 예수님이 당하신 일을 생생히 본 목격자라고 칭합니다.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박해를 견뎌냈던 것은 예수님을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충격적인 체험이 그들을 고난의 가시밭길로 인도했고 거기서 견뎌냈으며,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 수 있을 정도의 결기를 요구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영광과 축복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성실히 살며 그분이 가르쳐 주신 것을 항상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이 그들을 괴롭혀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수동적인 신자의 삶에서 증인 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제자로 나아갈 때입니다. 두려움을 이긴 담대함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시다.
방법이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통해 닫힌 마음을 여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열리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모름에서 벗어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모름에서 시작됩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맹목적인 확신을 경계하며 우리는 조금씩 모름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단순하면 됩니다. 복잡한 경우의 수를 생각 속에서만 머물게 하면 두려움이 커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고, ‘증인’이 되라 하십니다.
증인이 너무 머리를 굴리고 생각이 많아지면 증언이 헛나갈 수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보고 듣고 깨달은 대로, 모르면 더 배우려는 단순한 마음으로, 눈앞에 보이는 불편함은 희망으로, 앞으로 있을 어려움은 굳센 확신과 서로에 대한 신뢰로 이겨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이들의 사명이 굳건해질수록 하느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루어 가며 굳건한 공동체로 설 수 있음을 함께 기억합니다.
2독서에서 요한은 아무에게도 속지 말고 올바른 일을 하면 그리스도처럼 올바른 사람이 된다고 격려합니다. 깊이 새길 권면입니다. 이에 더하여 오늘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얻고 소명을 찾아갑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증인으로 산다는 것
루가 24:36-48. 사도 3:12-20. 1요한 3:1-7.
오늘도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그분을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갈릴래아 호수 한 가운데에서 폭풍을 뚫고 걸어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죽음의 공포, 큰 고통 가운데 다가오는 주님을 그들은 유령이라고 착각합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허상을 보게 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자기 안에 그 무엇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기에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평소에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살거나 오히려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은 이들이 정작 어려움을 맞닥뜨리는 순간 돌변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감추어진 본성과 실체는 결정적인 순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두려움이 극한에 처하면 이렇게 헛것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을 묵상하며, 눈에 보이는 명쾌함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번거롭고 힘들고 더디 가는 길이라도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신앙의 여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를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굳센 것 같던 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지는 것도 보았고, 나약한 것 같던 이들이 오히려 굳세게 어려움을 이기는 경우도 허다하게 봅니다.
두려움은 ‘나’를 못 보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생각이 나를 지배합니다.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지만 정작 제자들은 자신이 만든 두려움의 틀에 갇혀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유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식사하시는 장면에서 우리는 성찬례(성찬의 전례)를 떠올립니다.
우리가 정성껏 드리는 이 성찬례는 주님과 함께하는 부활의 식사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확신으로 나아가게 하는 고백입니다.
한 빵을 나누어 먹고 한 몸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주님과의 식사이고 나눔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성서에서 전하는 하느님의 계획하심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고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찬례에서 말씀의 전례임을 알게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누며 그 은총 가운데 사는 이들이 제자 된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귀한 축복이고 우리의 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법적으로 증인이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첨삭이 없이 그대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라도 허투루 말해서는 안 됩니다.
증인이 자신이 체험한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말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사명이 ‘증인’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주어지는 말씀만을 듣고 성찬례에 의례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증인으로서 주님의 말과 행동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무한한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1독서에서 베드로는 자신들을 예수님이 당하신 일을 생생히 본 목격자라고 칭합니다.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박해를 견뎌냈던 것은 예수님을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충격적인 체험이 그들을 고난의 가시밭길로 인도했고 거기서 견뎌냈으며,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 수 있을 정도의 결기를 요구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영광과 축복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성실히 살며 그분이 가르쳐 주신 것을 항상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이 그들을 괴롭혀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수동적인 신자의 삶에서 증인 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제자로 나아갈 때입니다. 두려움을 이긴 담대함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시다.
방법이 있습니다. 성서의 말씀을 통해 닫힌 마음을 여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열리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모름에서 벗어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모름에서 시작됩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맹목적인 확신을 경계하며 우리는 조금씩 모름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중입니다.
단순하면 됩니다. 복잡한 경우의 수를 생각 속에서만 머물게 하면 두려움이 커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고, ‘증인’이 되라 하십니다.
증인이 너무 머리를 굴리고 생각이 많아지면 증언이 헛나갈 수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보고 듣고 깨달은 대로, 모르면 더 배우려는 단순한 마음으로, 눈앞에 보이는 불편함은 희망으로, 앞으로 있을 어려움은 굳센 확신과 서로에 대한 신뢰로 이겨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이들의 사명이 굳건해질수록 하느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루어 가며 굳건한 공동체로 설 수 있음을 함께 기억합니다.
2독서에서 요한은 아무에게도 속지 말고 올바른 일을 하면 그리스도처럼 올바른 사람이 된다고 격려합니다. 깊이 새길 권면입니다. 이에 더하여 오늘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얻고 소명을 찾아갑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