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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
서동욱 교수의 현대 프랑스 철학 강의(2015 서강 철학 아카데미) |
1강. 현대철학이란 무엇인가?
1. 왜 현대 프랑스 철학인가?
‘왜 현대철학인가?’란 물음을 시작으로 강의에 들어가면서 서양철학을 고대 그리스 철학과 독일 관념론, 그리고 현대 프랑스 철학 이렇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눴다.
그리고 ‘어떤 프랑스 철학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시대정신의 표현이라고 하면서 프랑스 철학은 프랑스 국경 내에 묶여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프랑스 철학이 현대철학에서 비중이 크다고 했다. 현재 생존한 ‘알랭 바디우’를 언급하면서.
2. 우리는 현대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나?
이어 ‘현대’라는 말을 이해해 보자고 했다. ‘무엇이 현대인지?’, 공부거리를 현대로 제한한다고 했다. 더불어 ‘modern(현대, 근대), modernity(현대성, 근대성), post modern(탈현대, 현대 이후), modern philosophy(현대철학), contemporary(동시대의)’ 같은 어휘를 언급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현대와 다름없는 근대인가?’, ‘근대와 다른 현대인가?’라고 물었다. 분석 대상은 ‘modernity’라고 했다.
현대는 ‘중세-르네상스-17세기부터 지금까지’와 같은 연대기적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근대(modern)의 ‘近’은 ‘나’ 자신과 가깝다는 것이고, 현대(modern)는 ‘나 자신과 가까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이라고 말했다.
철학사에서 가장 난해한 책이라고 일컫는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푸코’에 대해 얘기했다. 푸코는 현대를 전통에 대한 결별의 마음가짐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물리적 역사적 시기가 아닌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처럼 자기가 자기를 이해하는 방식이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근대-근대인, 현대-현대인’의 특징이라는 것이었다. 즉 현대의 성격을 ‘과거와 결별하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세계상의 시대’에서 현대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나타냈다고 했다.
먼저 학문적 ‘합리성’을 들었다. 태도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근대기술 출현으로 삶이 윤택해졌다면서 기계·기술면을 들었다. 내가 갖고 있는 공간 안에 들어온 대상만 지식이라는 것이었다. 즉, 계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뉴튼 물리학’법칙에 대상이 종속됐다는 것이었다.
또한 예술의 ‘미학’화를 들었다. 감각적인 것을 통해 받아들이는 미학(Aesthetics)은 전형적인 현대학문이라고 했다. 생각하는 것(thinking, 다르다)이 진리의 척도라면 감각적인 것(크다, 작다)은 아름다움의 척도라고 했다. 즉, 내가 감각을 받아들이는 능력(감수성)이 미적능력(미학)인데 사람이 아름다움의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보통 현대철학 하면 ‘데카르트’를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더불어 현대의 특징은 인간의 행위를 문화로 파악한다는 것이었다. 현대는 인간행위를 세상의 흐름에 기록하고 역사에 남길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박물관에 보관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탈신성화를 들었다. 세상 안에 신은 사라졌다고 했다. 현대 자연은 정령과 공존하는 곳이 아닌 숲에서 목재를 생산하는 곳으로 인간이 주체라는 것이었다.
‘칸트’의 ‘우리는 대상(자연)에 대해 집어넣은 것만 알 수 있다’라는 말은 사람이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자연에 가설을 세워 자연이 응답하도록 달달 볶아(실험) 자연이 가설에 대해 응답하면 법칙이 된다고 했다. 그것이 물리학 지식이라고 했다. 이성이 묻고 자연이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 근대지식이라고 했다. 이성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사람은 이성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라인강의 목교 때문에 사람이 몰려들어 라인강이 드러났다고 했다. 그런데 라인강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강을 깎고 마을을 묻어버렸다고 했다. 수력발전소에 맞춰 라인강을 넓혔다는 것이었다. 현대는 이처럼 기술에 맞춰 자연을 바꾼다고 했다. 사람(이성)의 합리성에 맞춰 자연을 대상으로 바꿔버리는 것이 현대성이 특징이라고 했다.
3.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철학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23년에 설립된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 구성원의 명칭이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이들은 연구소 자체를 미국으로 이전했다고 했다. 1950년대 다시 독일로 돌아와 연구를 계속하면서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고 했다. ‘푸코 vs 하버마스’ 논쟁에 대해 잠깐 언급했다. 이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였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변증법’에서 이성이 세상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는 것이었다.
이성이 모든 것을 도구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이성은 사람이 자연을 효율성을 높이고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자연(들판)처럼 직장에서 인간(본성)도 통제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근대적(현대적)인 이성에 대해 비판한 것이 계몽변증법이라고 했다.
비판의 논점들은 이성에 대한 비판과 현대에 대한 반성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이성을 둘러싼 논쟁으로부터 현대철학이 출현했다는 것이었다.
Modern근대, Post Modern근대 이후, 현대? 번역도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근대적 이성을 둘러싸고 일어난 싸움을 살펴보자고 했다.
4. 이성을 문제시하는 프랑스 철학
‘현대’와 ‘프랑스’는 싸움의 관계라고 했다. 현대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현대 프랑스 철학’의 특징이라는 것이었다. 계몽변증법에서의 푸코와 하버마스 간 논쟁은 근대적 이성을 ‘유지할 만한 것’이냐 ‘던져버릴 것’이냐가 쟁점이었다고 했다.
하버마스는 비판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버릴 것이 아니라 이성에 규범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이성을 버리면 감정적 무질서 속으로 들어가 나치즘 같은 것이 나타난다고 말했다고 했다. 하버마스는 모더니티는 미완의 프로젝트로 근대적 합리성은 유지되고 가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하버마스 스승 아도르노는 이성이 실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데 이성을 잘 못됐다고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이성을 비판하면서 부정적으로 보면 수단이 목적으로 돼버린다고 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를 경유한 하버마스 비판에서 푸코는 이성이 싸움의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 했다. 근대인이 만들어놓은 일면으로 우리는 그것을 넘어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현대철학이라고 했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비판의 논점들은 ‘1) 합리성이 순수한 도구주의 사유방식으로 축소됐다. 2) 문화가 시장화됐다. 3) 경제 우선성 아래 모든 것이 경제 질서에 종속됐다.’는 것을 지적하고 서 교수는 Modern과 철학, 현대를 넘어서는 철학을 성찰하는 것이 ‘현대 프랑스 철학’의 내용이라고 했다.
Modern 철학을 계승할 것인가?
2강. 현상학과 실존주의 시대
1.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서동욱 교수는 “현상학은 학문의 부정이다. 의식은 실체가 아니라 지향적(intentional; 의식이 밖으로 나아가는) 활동이다.”라는 말과 함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현상학’이란 어원 분석을 시작으로 2강의 문을 열었다. 철학용어는 그리스인의 사고방식에서 내려온 것으로 그리스인의 쓰임새로 돌아가 보아야 어원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현상학(Phenomenology)의 그리스어 표현은 ‘레게인 타 파이노메나(현상을 말하다)’인데 여기서 ‘레게인’은 ‘아포파이네스타이(어떤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한다)’를 말한다고 했다. 즉, 현상학은 ‘아포파이네스타이 타 파이노메나(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드러나는 그대로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함)’을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현상학이란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연구의 형식적 의미라고 했다. 쉽게 말하면 현상학은 어떤 것을 위장하지 않은 채 그 자체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본유관념’을 본래 이성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고 실체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했다. 우리 마음을 고립된 섬처럼 생각하면서 그 마음 안에 세상의 질서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세 변으로 돼 있는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예를 들면서.
그런데 현상학에서 마음은 고립돼 있지 않고 마음 바깥 대상과의 관계 속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따라서 이 다양한 관계를 기술(description)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은 ‘세잔’을 그림 그리기에 있어서 현상학자로서 미술을 통해 설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잔의 그림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말을 인용했다.
퐁티는 ‘세잔의 의심’에서 “만일 계속되는 하나의 선으로 사과 형상의 윤곽을 그려 놓으면 그것은 그러한 형상을 지난 하나의 대상을 만들어 내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히려 윤곽이라는 것은 사과의 가장자리들이 깊이로 침잠해 들어가는 하나의 이상적 한계이다.”라고 했고 ‘눈과 마음’에서 “반면 데카르트에게서 색은 장식에 불과하며, 회화의 진짜 힘은 디자인에 있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서 교수는 사람을 그릴 때 ‘얼굴은 둥그렇고, 몸은 네모이며 팔다리는 길게’와 같이 미리 주어진 이런 것들을 끌어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조작된 얼굴을 만들어낸 것이지 진짜 얼굴이 아니라고 했다. 사과 그림에서 사과 형상 하나 만들어낸 것이지 진짜 사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현상학은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그 자체 마음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즉, 근대철학은 세계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방법(수학)’을 탐구했다고 했다. 반면에 현상학은 의식이 마주하는 다양한 사태 각각에 걸맞은 접근방식을 탐색했다는 것이었다. 각각의 사태에 걸맞은 접근방식의 모색을 ‘엄밀성’이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서 교수 설명에 의하면 현상학은 표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형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각 고유하게 기술돼야 한다고 했다. 사회현상은 사회학 시각으로, 미적 사태는 미학 시각으로 기술해야 한다고 했다 각각 고유한 모습과 기술방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드러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현상학의 학문 목적이라고 했다. 나타나는 방식이 다양하면 그만큼 접근방식도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2. 현상학자와 실존주의자 열전
서 교수는 먼저 철학자 열 분( 마르셀, 사르트르, 레비나스, 메를로퐁티, 말디네, 리쾨르, 앙리, 데리다, 낭시, 마리오)의 사진을 보여준 후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 발견’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열전을 나열했다.
후설은 현상학을 학문적 부정이라고 했다고 했다. 이 말은 ‘나타나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학문이란 선입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말한 ‘학문 안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들을 ‘이론’이나 ‘학문’이라고 존중하더라도 이야기(학문)는 눈을 가리기 때문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다운 현상을 못 본다고 했다. 결혼도 못한 연애박사(이론)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후설의 제자 ‘하이데거’는 ‘의식보다 앞선 존재’를 발견했다고 했다. 눈앞에 놓인 ‘붉은 사과’를 보고 ‘사과는 빨갛다’라고 말하는데 뭔가를 간과한 것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즉, 첫 번째 독립된 물체로 주어진 ‘사과’와 두 번째 ‘빨갛다’ 사이에 이 둘을 묶어 주는 것이 ‘is'인데 이 is는 주어지지(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과보다 ‘존재(being)’하는 것이 먼저라고 하면서.
하이데거는 ‘철학은 눈앞에 출현하는 것만 기술하는데 그치지 말고 존재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있음(존재 being)'은 머리, 팔, 다리 등이 있다는 것인데 ‘내’가 있는 방식(‘나는 누구인가?’)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다 기술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첫째 ‘불안’이란 느낌 속에서(내가 느끼는 기분을 통해서) 기술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모습은 느낌 속에서 드러나고 기술한 것으로 이런 것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서 교수는 1930년대 독일 현상학이 프랑스에 소개됐다고 하면서 소개자들로 ‘장 보프레(1907~1982)’와 ‘레비나스(1905~1995)’ 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레비나스 덕분에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던 ‘모리스 블랑쇼(1907~2003)’와 “사르트르는 생 미셀가에서 레비나스가 쓴 후설에 관한 책을 샀다. 그는 걸어가면서도 너무 서둘러서 알려고 아직 페이지조차 자르지 않은 책을 대충 넘겨보았다.”라고 말하면서 사르트르가 현상학을 진지하게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라고 증언했던 ‘보브와르(1908~1968)’의 사진을 보여줬다.
한편 서 교수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독일철학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들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들은 독일철학을 창조적 사유를 위해 이용했다고 했다.
더불어 ‘베르나르 앙리(1948~)’가 “사르트르는 1952년에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하이데거의 집으로 그를 방문한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아주 기분이 나쁜 채, 아마도 자존심이 상한 채 혹은 격분한 상태로 되돌아온다. 사르트르의 증언에 따르면 그 자신이 하이데거와 나눈 대화는 ‘귀머거리들의 대화’였으며 그는 ‘마의 산’에 나오는 늙은이를 닮은 ‘은퇴한 대령’의 모습이었고 나는 계속 그의 모자에 대고 말했다. 영양 사냥꾼의 모자에 대고 말이다.”라고 ‘레비의 증언’에서 말했다는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에서 현상학이 전개됐다고 했다.
그리고 현상학 너머 존재의 ‘신비’ 영역에 관심을 가졌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마르셀(1889~1973)'을 소개했다. 그는 신앙과 더불어 생각했다고 했다. 실존주의는 학문적 명칭이 아니라고도 했다. 언론에서 먼저 언급했던 것을 학자들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했다.
이에 반해 ‘사르트르(1905~1980)’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했다. 그는 현상학자 후설을 열광적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후설의 ‘의식은 지향적’이란 말은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어 경험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나’는 내 의식의 대상으로 내 의식 밖에 주어져 있어 의식 자체는 텅 비어 내용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즉, 내용은 의식 밖에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의식이 ‘본유관념’이었는데 비해.
여기서 사르트르의 ‘실존’ 개념이 나왔다고 했다. 본질 없이 있는 것을 실존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럴 때가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가 ‘인간은 하나님 모습을 따르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렇게 되면 ‘나’를 만들어 나아가는 나의 선택은 ‘무거운 자유’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사과 씨가 싹을 틔우고 사과나무로 생성돼 가는 과정을 예로 들면서.
이어서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이다’라고 말한 실존주의의 기원 ‘키르케고르(1813~1855)’ 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예기를 통해 ‘자유의지’에 대한 설명을 했다.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고 했다. ‘첫째, 나에게 나타난 것이 진짜 천사인가? 둘째, 천사 얘기를 내가 잘 못 알아들었는가?’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때 ‘누가 아브라함을 도울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아무도 도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아브라함 자신의 선택은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선택의 기로에 서서 내 운명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로 선택한다고 했다. 자유롭지 않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후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선택이란 어떤 법적, 도덕적 심금도 아니라 오로지 자유로운 의식에 달려 있으며 이 사실에 관한 정서가 ‘불안’이라고 말함으로써 키르케고르를 계승한다고 했다. 서 교수의 저서 ‘철학연습’ 44~45쪽에 실린 글에서.
‘사르트르의 조각가 자코메티’란 그림을 보여주고 ‘메를로퐁티(1908~1961)’에 대해 설명했다. 사르트르와 절친했던 그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 결별했다고 했다. 사르트르는 텅 빈 실존의 자유를 얘기했고 메를로퐁티는 ‘우리는 늘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신체는 ‘연장(extension)’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수학적, 물리학적 계산의 대상이라고 한 것에 반해 신체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는 신체는 우리의 의식이 활동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메를로퐁티는 신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신체는 과학 개념을 떠나야 본 모습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의식이 먼저가 아니고 신체를 바탕으로 의식이 활동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서 교수는 서양철학에서 신체는 의식에 비해 평가절하 됐다고 하면서 ‘뇌손상’의 경우와 ‘옷감’의 감촉을 예로 들었다. 뇌손상 환자 코 위에 파리가 앉아 있을 때 이성적, 수학적 계산능력은 파괴됐지만 신체적 반응으로 파리를 쫓아낸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했다. 옷감이 ‘부드럽다’라는 것은 ‘어떤 천이 부드럽다’라는 의식 이전에 시간을 갖고 움직여봐야 느낄 수 있는 속성이라고 했다.
타자의 철학자 ‘레비나스(1906~1995)’는 2차 세계대전 중 포로수용소에서 보내고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했다고 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기독교인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기독교가 주류인 서양이 그렇게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는가?’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우리 의식의 자발성에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고 했다. 그는 ‘수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인데 타인 앞에서는 얼굴이 붉어지지만 짐승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레비나스와 소스노의 움직이는 조각상(평방형 머리, 2002)’ 사진을 보여줬다. 얼굴에 눈, 코, 입 등이 없는 조각상이었다.
레비나스를 계승한 ‘마리옹(1946~현재)’은 ‘포화된 현상’을 말했다고 했다. 보이는 것 저 편에 비가시적인 것이 포화된 현상이라고 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리옹과 뒤러’라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보이지 않는 ‘골고다의 언덕’으로 사람을 인도한다고 했다. 의식은 보이는 곳에 멈췄지만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 교수는 ‘어떤 종교가 멈추는가? 어떤 종교가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가고 있는가?’라고 물으며 어떤 종교는 우리 의식은 멈췄지만 가시적인 것에 멈추지 않고 ‘성상’을 향해 간다고 했다. 어떤 현상(눈은 눈이다. 코는 코다) 너머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인도하는 것이 ‘포화된 현상’이라고 했다. 넘쳐나는 영역이 있으면 논쟁거리가 생긴다고 했다. 영화 ‘명량해전’에서 보이는 것 밖처럼.
프랑스에서의 현상학 경향은 ‘보인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로의 이동이라고 했다. “인간은 항상 이전의 사고,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상학과 다르게 해석학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선입견이 ‘편견’이 돼서는 안 된다. 편견을 극복하고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는 것이 해석학의 사명이다.”라는 ‘리쾨르(1913~2005)’의 말처럼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밖이 아니라 내면으로’를 말한 ‘미셸 앙리(1922~2005)’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의식의 지향성보다 더 심층적인 삶의 파토스를 드러냈다고 했다. 음식과 보석 중 무엇에 먼저 눈길이 가느냐고 물었고 마음 안에 있는 정념(파토스)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배가 고프면 음식에 먼저 눈길이 간다는 것이었다.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외부의 대상을 추상으로 표현한 좌, 우 그림 중 우측은 내면을 추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서 교수는 ‘말디네’에 이어 공동체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낭시(1940~현재)’에 대해 얘기했다. ‘고독’은 타인과 더불어 있는 가운데 ‘결여’ 때문에 생긴다고 했다. 그리고 ‘의식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 의식보다 앞서는 것’이 문자의 발견이라고 말한 ‘데리다(1930~2004)’ 때부터 현상학에서 해체주의로 넘어갔다고 했다. 이 ‘해체주의’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다루겠다고 했다.
3. 하나의 특징: 이성 이전적인 정서의 발견
하나의 특징으로 서 교수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이성 이전적인 정서를 발견했다고 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염려’, 유피테르(주피터), 텔루스(대지) 간 다툼을 사투르누스(시간)를 통해 얼핏 보기에 정당한 판정을 내려줬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성을 정서적인 것으로 염려와 걱정이라고 했던 것이다. 즉, 인간(영혼+육체)은 세상에 태어나 염려로 일생을 보내다가 죽을 때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고 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존재는 어떤 간접적인 접근 방법, 가령 권태, 구역질 따위의 방법으로써 우리들 앞에 드러난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토’에서는 “바로 이것이, 눈부신 명백함이 ‘구토’란 말인가? 나는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던가! 그것에 대해 얼마나 많이 섰던가!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존재한다. 세계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뿐이다. 그러나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 라고 말했다고 했다. 여기서 존재의 실상에 접근할 때 이성이 아닌 정서가 앞서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우리의 존재는 텅 비어 있어 구토가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구의 주도적 입장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이성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성의 옆에서 타인이 접근할 때는 울음(정서)으로 접근하는 것이 근본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크리톤은 저보다 훨씬 먼저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 나가버렸습니다. 아폴로도로스는 그 전에도 눈물을 그치지 않고 있었지만 특히 그때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울부짖어서 함께 있던 사람들 중 가슴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크라테스 본인을 제외하고는요.”를 말하며 레비나스는 “아폴로도로스는 그 누구보다 운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데리다는 ‘장님의 기억’에서 “근본을 파헤쳐보자면 눈은 그 심증에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울기 위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버리는 순간 눈물은 눈의 고유한 모습을 드러낸다. 시력보다는 오히려 간청, 시선보다는 오히려 기도와 사랑과 기쁨과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성의 눈보다 바탕에는 눈물(간청, 슬픔, 기도, 사랑, 기쁨) 속에서 흘러내리는 감정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성적 질서의 배후에는 정서가 있다는 것이었다.
2강을 요약하면 첫째, 현상학이란 학문은 어떤 것인가? 둘째, 어떤 현상학자들이 있는가? 셋째, 현상학적 접근의 한 특성으로써 정서의 문제로 집약할 수 있다.
3강. 구조주의와 그 이후
3강의 목적은 구조주의를 거쳐서 펼쳐지는 후기구조주의(탈구조주의, 해체주의) 사상가들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했다. 구조주의가 1960년대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핵심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문화나 지식의 배후에 놓여 있는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구조’를 탐구하는 것도 함께.
구조주의 이후 사상 전개에 있어서 정치적·문화적 배경은 6·8혁명이라고 했다. 6·8혁명의 진보정신은 시대의 요구였다고 했다. 과거 보수주의를 넘어서려는 정신이었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철학 입장을 넘어서려는 진보운동은 예측 가능한 것으로 철학적 사유에 근거했다고 했다. 철학적 조류의 대립은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면서 ‘사르트르’와 ‘푸코’가 함께 시위하는 장면도 보여줬다.
철학적 배경을 ‘망치로 철학하기’로 표현했다. ‘들뢰즈’, ‘데리다’, 푸코 등은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니체’를 새롭게 해석했다고 했다. 기존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니체는 새로운 인식으로 새로운 사상에 도전했다고 했다.
서동욱 교수는 자신의 저서 ‘철학연습(서동욱, 2011, 반비)’ 54쪽 글을 인용했다.
“철학자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이때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는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며 해머가 된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다.”
대표적 사상가들인 들뢰즈(1925~1995), 데리다(1930~2004), 푸코(1926~1984) 흑백사진을 보여줬다. 더불어 “지식이 시대마다 조건이 달라진다면?”이라고 말하면서 그때그때 ‘구조주의’를 배격하고 구조주의 시대 아들이 나타났다고 했다. 들뢰즈는 ‘생각과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했고, 푸코는 ‘각각 시대마다 지식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며 데리다는 ‘문자가 왜 근본적인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 교수는 구조주의 이후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했다.
1. 기원의 신화 부정
서구인의 ‘기원’을 탐구하는 취향에 문제점이 있다고 했다. 이집트의 ‘프삼메티코스’ 왕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우월한 것(기원, 본질)과 열등한 것(복제된 것, 파생된 것)의 편차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위험하다고 봤다는 것이었다. 이방인들에 대한 멸시로 나타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원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탈구조주의자들의 정신이라고 했다.
이어서 ‘카프카(1884~1924)’의 사진과 함께 데리다의 문자론에 대해 설명했다. 카프카는 심리적으로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약혼과 파혼을 수없이 많이 반복했다고 했다. 여자를 직접 사랑하지 않고 연애편지만 썼다는 것이었다. “여자에 대한 사랑을 편지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라.”라는 카프카의 발언을 예로 들면서.
그리고 김수영(1921~1968) 시 ‘겨울의 사랑’에서 키워드는 ‘~대신’이라고 했다. 실물(원본) 대신 보자기, 속옷 같은 2차적(비본질적)인 것을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니가 너의 육체 대신 준 요ㅅ보 니가 너의 애무(愛撫) 대신 준 흰 속옷 (······)’
또한 ‘오니무사(鬼武者)2’의 ‘마츠다 유사쿠’를 예로 들었다. 그는 한국계 배우였는데 죽은 지 오래됐다고 했다. 디지털 기술로 복제해 출연시켰다는 것이었다. 복제물이 원본을 되돌려 나왔다고 했다.
즉, 원초적인(본질적인, 1차적인) 것은 ‘말’인데 ‘문자(2차적인 것)’가 ‘말’을 앞선다고 했다. 카프카와 김수영의 '사랑'에서 본질적인 것은 원본(실제 사람인 여자, 육체)이 아닌 복사본(편지, 요ㅅ보/속옷)이었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의 ‘사랑’은 사람을 만나는 것(원본, 육체적, 근원적, 1차원적)인데 카프카와 김수영 사랑의 본질은 원본의 복사물인 편지, 요ㅅ보/속옷(복사본, 부차적적, 2차원적)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분절(articulation)’에 대해 설명했다. ‘사과’라는 ‘관념’이나 ‘목소리’는 ‘사 + 과’라는 분절이 있어야 목소리도 말이 되고 의미가 생긴다고 했다. 즉, ‘사 +과’라는 음절의 분리가 있어야 문자라는 존재를 통해 사과를 의미로써 연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목소리를 내.
뱉는 말과 관념의 사유는 음절을 가진 '문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생각(의식)되지 않는 것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분절(문자)이라고 했다. 관념(생각, 의식)은 그것을 표기하는 구성방식(언어, 문자)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이었다.
"진리는 지엽적인 것에 매여 있지 않아야 한다. 즉, 모든 조건에 벗어난 관념에 도달해야 함을 의미한다. 가변적인 것, 역사 속에서 국지적인 것을 넘어선 사유가 존재한다."라고 하는데.
2. 동일성보다 차이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상’, ‘모범’, ‘원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일성’이라고 했다. 이에 반해 변화과정에서 고정돼 있는 것에서 개별자들이 나눠 가지는 복제된 ‘닮음’이 ‘유사성’이라고 했다. 현대철학은 글 속에서 변치 않는 명사를 불러내 ‘차이’가 사물을 드러내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차이'가 근본적으로 사물을 만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모형 원형(이데아)으로부터 유사모형이 복제돼 번개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둠과 빛의 차이 때문에 번개가 출현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번개 사진을 보여주며 이데아의 동일성과 개별자들의 유사성을 설명했다.
눈밭의 예수 얼굴 그림을 보여줬다. 우연히 사진을 찍었는데 눈밭의 그림자가 예수의 얼굴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빛과 어둠의 차이가 얼굴을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원형적인 디자인으로서 이데아가 아니라고 했다.
서 교수는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Da'를 예로 들면서 이데아의 동일성과 개별자들의 유사성에 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천둥 의미의 기본이 ‘Da'라고 했을 때 차이가 작동해 듣는 사람 입장에서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자제하라)’ 등으로 나뉜다고 했다. 전통적 사유에서는 첫 번째 원형적인 것으로부터 두 번째 닮은 유사적인 것이 복제된 것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바탕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서 교수는 ‘의자’와 ‘손’을 사례로 설명했다. 생각이 깊어졌다.
‘손’이라는 개념 자체는 동일할지라도 그 손을 오른손과 왼손으로 구분하는 것은 감성에 따른 ‘차이’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또한, 의자라는 개념을 떠오르게 하는 하나의 표상이 존재할지라도 각각의 의자는 세부적으로 다를 것이다.
우리가 특정 ‘의자’의 표상을 보고 그것을 의자의 일반적 개념에 적용하는 것이 아닐까? 의자의 일반적 모형과 유사한 것들을 의자를 대표하는 표상과의 비교를 통해 의자(일반개념)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의자의 ‘이데아(대표되는 근본 모형)’를 먼저 인지한 다음, 그것의 유사성을 통해 다른 의자들 역시 의자로 인지하는 것이 아닐까? 사물의 표상을 보고 사물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이데아론이 좀 더 설득력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전에 ‘의자’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의자의 용도를 그 외적인 다른 사물들과의 차이를 통해 파악하지 않았을까? 즉, 의자와 다른 용도의 ‘책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자의 개념을 설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자와 다른 용도의 책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다른 것들과 구별해 의자로 개념화할 수 있을까?
3. 지식의 항구성 부정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면서 푸코는 지식은 연속성이 없이 전혀 다른 형태로 단절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불멸하는 영원한 지식은 거부됐다고 했다. 동일성 이데아가 거부됐다는 것이었다. 지식은 역사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르게 출현했다고 했다. 서구 지식의 역사에서 16세기 르네상스 시기는 ‘유사성’이 지식의 지위를 차지했다고 했다.
반면에 17세기 데카르트는 유사성이 오류의 원천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오늘날 유사성의 지위는 어떤지 물었다. 푸코는 플라톤의 영원불멸 이데아에는 지식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철학연습(171~172쪽)’ 에 실린 글을 인용했다.
‘새의 다리로 통하는 뼈는 우리의 발뒤꿈치에 해당한다. 우리의 발가락이 네 개이듯 새도 발가락이 넷인데, 그것들 중에서 뒤쪽의 발가락은 우리의 엄지발가락에 대응한다.’ - 16세기 생물학자 피에르 블롱
‘사람들은 종종 두 사물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심지어 그것들이 실제로 서로 다른 것일 경우에도 그 둘 중 하나에만 대해 참이라고 인정했던 것을 두 사물에 모두 적용하는 버릇이 있다.’ - 17세기의 데카르트
4. 변증법 대신 불연속성(푸코) 또는 반복(들뢰즈)
헤겔은 우리 정신의 본성에 속하는 것을 변증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대철학은 변증법에 제동을 걸었다고 했다.
헤겔은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에서 내가 원치 않는 거울 속 나에 맞서 ‘나’를 극복하고 우리 발전의 추동력(원동력)이 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더 높은 목표를 세워 우리 자신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해야 참다운 나의 과정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즉, 헤겔의 발전 과정은 1단계에서 A(theis, 기존의 나)와 A'(anti-thesis, 반대되는 나) 간 대립으로부터 2단계인 새로운 B(synthesis, 종합)로 발전,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증법은 역사가 특정방향으로 '진보'돼 나아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최근 철학자들은 이런 모델에 맞서 ‘역사는 변증법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변증법적 발전에 회의를 가졌다고 했다. 불균등, 차별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푸코는 지식은 시대마다 서로 달라 시간의 간극마다 불연속이 발생한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해 반대했다고 했다. 생각과 욕망의 해방철학이라고 하면서.
서 교수는 ‘프로이트의 엠마 사례(개인)’와 ‘프로이트의 모세 사례(집단) 연구’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사르트르의 ‘무의식의 허구성’을 평가절하하고 ‘무의식’을 복원했다는 것이었다.
엠마는 프로이트가 진찰한 환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엠마는 아브라포비아(대인공포증)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병의 원인을 12세 때 경험으로부터 찾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열두 살 때 옷가게 점원이 그녀의 옷을 보고 조소했고, 그때 충격으로 대인공포증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 다른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고 했다. 그녀가 8세 때 사탕가게 주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여덟 살 때는 성적 분별력이 생기지 않은 시기였고, 당시에는 낯선 일로 받아들여져 잊힌 것이었다고 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정신적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보상’과 ‘전가’라는 방법을 써야 하는데 이 두 방법 모두 자신이 겪은 일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엠마의 경우 12살 때 8살 때와 동일한 상황(가게, 옷, 점원, 웃음)이 연출되자 잠재돼 있던 기억(기억하지 못했던 일)이 표상으로 나타나 트라우마로 작용했기 때문에 병에 시달리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의식하지 못하는) 시간의 반복성은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프로이트는 유대교, 기독교 성립 과정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인류학적 고증자료를 바탕으로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했으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유대인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
성경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모세는 과격한 성격(십계명을 깨버림)이었고, 형 아론을 항상 대동(대변인)한 것을 보면 직접 소통이 힘든 인물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우상을 넘어선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황금송아지 일화). 이렇게 유대인이 믿고 싶은 신과 모세가 얘기하는 신이 달라 모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원초적 아버지(구세주)를 살해했다는 죄의식은 모든 유대인들의 내면에 자리해 트라우마로 분출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어떤 청년(예수)이 모세와 똑같이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등장했으나 모세와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버지 살해에 대한 트라우마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회개하라’라는 종교 형태로 분출됐다고 했다. 유대인은 아버지 하나님을 죽였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한민족 유대인의 모세와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살해한 죄의식에서 출현한 종교라고 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시간의 흐름(지남)에 따라 되풀이(반복) 될 뿐이라고 했다. 무의식을 경유해 반복되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할 뿐(또는 다르거나 변화했다고 인지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역사(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현대철학의 특징이라고 했다.
5. 예술이라는 탈출구
푸코는 지식은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을 주장했다고 했다. 각 시대마다 지식을 구성하는 구조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시대의 사고방식(지식)이 그 시대의 배경·구조를 뛰어넘을 수 없지만.
카프카는 “문학은 시대를 앞서가는 바랑개비다.”라고 했고,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횔덜린에서 말라르메, 앙토냉 아르토까지 문학은 자율적으로 존재했으며 일종의 ‘대항담론’을 형성했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은 문학을 존중했다고 했다.
‘평등의 무대화’에서 “나뭇잎들이 서로 같지 않듯이 인간들은 서로 형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서로를 괴롭힌다.”라고 했던 ‘랑시에르(1940~현재)’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성찰한 철학자라고 했다. 그는 미학과 정치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불화’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기존의 분할된 것을 다시 분할하는 것, 즉 지금의 질서를 반성적으로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치는 시간(예, 주5일 수업)과 공간(예, 강의실 배분)을 새롭게 분할하는 것을 논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간과 공간을 분할하는 법은 더불어 사는데 가장 중요한 정치적 주제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주제를 다시 고찰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예술, 문학은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즉, 새로운 시간, 공간을 분할하고 꾸며볼 수 있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라는 것이었다.
로댕의 조각품 ‘지옥의 문’은 우리 신체에서 유기체적인 것을 각각 부분으로 떼어내 각각에 자율성을 부여했다고 했다. 새로운 방식의 분할을 보여준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라고 했다. 기존의 잡혀있는 질서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조각품이 아니라고 했다. 다른 방식으로 분할을 시도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래서 수준 높은 예술이라는 것이었다.
실제 로댕은 ‘지옥의 문’을 만들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각각의 장면들을 스케치했으나 결국 모두 폐기하였다고 했다. 기존 질서(소설) 속에서 새로운 방식을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신곡을 외면하고 그 속의 질서를 넘어서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현재 질서 속에 예술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분할한다고 했다. 이처럼 지금 질서 너머 새로운 세상을 전망할 수 있는 것이 프랑스 철학의 일반적 특징이라는 것이었다.
4강. 충돌의 불꽃과 창조의 여정, 프랑스 사상(프랑스 철학과 문학, 영화, 음악)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된 4강은 서동욱 교수가 사회자로 나섰다. 서 교수는 ‘문학·영화·음악이 철학과 마주쳤을 때’를 언급하며 프랑스 철학은 우리 삶과 밀착한 예술 작품 속에 들어있다고 했다. ‘시간, 돈, 차이’ 안에 철학이 들어가면 외로움도 덜어준다고 하면서.
1부에서는 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 이솔 외 두 명(석사과정)이 강연을 했다. 도중에 김경주 시인(서강대 철학과 졸, POETIC JUSTICE 멤버)의 시낭송도 들어갔다. 2부에서는 음악평론가 김봉현 씨의 힙합과 랩에 대한 설명에 이어 MC 메타(가리온)가 ‘돈과 차이’를 랩으로 노래했다. POETIC JUSTICE 멤버는 시인(김경주), 음악평론가(김봉현), 가수(MC 메타, 이재현) 이렇게 3명으로 구성됐다.
먼저 박사과정 이솔 씨가 ‘프랑스 철학과 문학’에 대해 강연을 시작했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을 바탕으로 ‘시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책의 출판을 거절했던 ‘앙드레 지드(1869~1951)’의 후회와 사죄의 글(“나는 아마도 아주 멍청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 신사가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30쪽이나 사용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출판을 거절한 것은 NRF 최대의 과오로 남을 것이며 또한 나도 그에 책임이 있으므로 이는 내 생애 가장 뼈아픈 후회, 가장 큰 양심의 가책으로 남을 것입니다. 내가 이 책에 대해 또한 당신에게 느끼는 것은 일종의 독특한 애정과 찬탄의 마음과 편애입니다.”)을 읽으면서.
‘시간’을 탐구한 두 철학자 ‘베르그송(1859~1941)’과 ‘들뢰즈(1925~1995)’를 소개했다. 들뢰즈는 이 소설의 문체가 아름답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설은 ‘마르셀’이란 1인칭 주인공이 시간과 기억의 문제에 관한 답을 찾아주는 과정을 묘사한 방대한 파노라마라고 했다(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列)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오밤중에 눈뜰 때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첫 순간 내가 누군지 조차 아리송할 때가 있다. (······) 그러나 이러한 때 추억이 하늘의 구원처럼 이 몸에 하강하여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이 몸을 건져준다. 나는 삽시간에 문명의 몇 세기를 뛰어넘는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끊임없는 시간에 대한 상실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고 ‘기억으로부터’라고 답했다. 지나가 버렸으나 시간의 흔적들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기억’이라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물음에 대한 답을 기억이 제공한다고도 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이런 기억이 정체성 대해 말해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씨는 현재는 ‘기억에 의해 마련된 지평’이라고 했다. 현재의 경험은 과거의 조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과거는 현재의 경험 아래에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었다(“밤에 잠이 깨어 콩브레 시절을 회상할 때면 내 기억 속의 콩브레는 언제나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나는 그저 한 조각 벽면처럼 떠오를 따름이었다. 이를테면 나에게 있어서 콩브레는 가느다란 계단으로 이어진 두 층의 기억만으로 남아있고, 거기에는 저녁 7시라는 시간만 있었다. 콩브레에 다른 일이나 다른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나에겐 죽은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영원히 죽어버렸단 말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지나가 버린 우리들의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우리가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감미로운 행복감이 나를 엄습해와 어찌 된 영문인지 나를 고립시켜버렸다. 도대체 이 극도의 희열감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 지금 내 안에 있는 과자 때문에 되살아난 이미지, 시각적 기억이 이 맛의 뒤를 따라 내 자아에까지 이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 갑자기 내 눈앞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 일본 사람들의 놀이처럼 물을 담은 도자기 찻잔에 작은 종잇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되지 않던 그 종이가 물에 약간 닿은 것만으로도 곧 펴지고, 꼬부라지고, 물이 들고, 각기 형태가 달라져서 꽃이나 집이나 사람 등 쉽게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집 뜰에 있는 모든 꽃들, 스완씨의 집뜰에 있는 꽃, 성당과 콩브레 전체와 그 근교, 이 모든 것들이 형태를 이루면서 나의 한 잔의 홍차 속에서 나왔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현재의 경험 아래에 은폐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과거’, ‘현재의 경험을 통해 되찾게 되는 잃어버린 시간으로서의 과거’를 설명하면서 김경주 시인의 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에서 발췌한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보는 일’이란 문장을 소개했다. 그리고 김 시인의 시낭송이 있었다.
이어서 ‘어떻게 우리는 끊임없는 시간의 상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고 ‘기억’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갔다.
이 씨는 기억과 망각은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했다. 망각은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에 대해 얘기했다. 망각의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마르셀의 ‘마들렌 에피소드’의 핵심, 기억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쌓이는 것이지만, 또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거스를 수 있게‘ 하는 것’, ‘잃어버린 시간인 과거를 단지 ‘지나간 것’이 아닌 ‘현재’로서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고 했다. 즉, 기억으로부터 시간의 상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두 번째로 석사과정 강선형 씨가 ‘프랑스 철학과 영화’에 대해 강연했다.
강 씨는 ‘과거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과거의 본성에 대해 얘기했다. 과거의 본성을 ‘현재의 경험 아래 은폐되어 있는 과거’, ‘그 배후에서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지평’이라고 했다.
먼저 ‘알프레드 히치콕(1899~1980)’ 감독 영화 ‘현기증(1958)’을 맛보기로 보여줬다. 여기서 ‘비자발적 기억’은 ‘과거에 떠돌아다니는 기억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방식’이라고 했고, ‘우리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과거란 무엇인가에 대해 들뢰즈의 ‘시네마 Ⅱ 시간-이미지’에 있는 글을 인용해 설명했다(“마치 기독교인이 자신과 예수가 동시대에 속해 있다고 느낀 것처럼 우리였던 아이와 우리가 동시대인으로서 머물러 있는 곳은 ······ 순수한 회상 속에서이다”). 현재는 과거에 침범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스 야스지로(1903~1963)’ 감독 영화 ‘꽁치의 맛(1962)’에서는 공간을 시간화한 것, 즉 공간에 누적돼 있는 수많은 시간을 가시화한 것과 현재의 배후에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과거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변화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얘기하며 들뢰즈 말을 인용했다(“우리는 비스콘티(1906~1976)와 프루스트를 한데 묶는 주제들의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이다. 즉 귀족들의 세계와 그 내적인 해체, 그리고 비스듬히 보인 역사(드레퓌스 사건, 1914년의 전쟁), 잃어버린 시간의 너무 늦음과 시간을 되찾게 하는 너무 늦음 ······ 등”).
또한,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 영화 ‘레오파드(1963)’에서 ‘살리나’ 공작이 “우리는 사자와 표범(leopard)이었다. 이제 지칼과 하이에나가 우리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말을 끌어들였다. 비스콘티의 영화에서는 ‘깨달음은 결핍에 대한 앎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것과 ‘<너무 늦게(trop tard)>는 위대한 깨달음의 존재양식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강 씨는 ‘과거의 본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과거, 비자발적으로만 기억될 수 있는 과거, ‘너무 늦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도래하는 과거로.
1부 마지막 순서로 석사과정 이태균 씨가 ‘프랑스 철학과 음악’에 대해 강연했다.
이 씨는 현대적 사유의 모형을 ‘다르게 생각하기’와 ‘비자발성’ 두 가지로 제시했다. 전자는 ‘임의의 전제들로부터 벗어나 <무전제로>부터 새롭게 출발’로, 후자는 ‘우리의 사유는 <시간적>이고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라고 규정했다. 더불어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기존의 질서를 와해시킨다고 했다.
시간예술로서의 음악(Music)은 소리를 재료로 해서 인간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예술 장르라고 했다. 그리고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시간적’이라고 했다. 음악을 구성하는 모든 형식적 요소들이 시간적이라는 것이었다. 즉, 리듬(Rhythm), 박자(Time/ metric), 빠르기(Tempo), 멜로디(Melody).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음악적 시간성(Temporality)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음악적 ‘시간’의 체험은 ‘기억’과 상관적이라고 했다. 또한, 음악을 매개로 느닷없이 저절로 떠오르는 다양한 ‘기억들’을 ‘비자발적 기억’이라고 하면서 클로드 드뷔시(1862~1918)의 말을 인용했다(“바다의 소리, 지평선의 곡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새의 지저귐 등이 우리에게 많은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느닷없이 우리가 원하지도 않을 때 이 기억 중 하나가 우리에게 쏟아져 나와 음악 언어로써 표현된다. (······) 나는 나의 내부 풍경을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꾸밈없이 노래하고 싶다”).
이러한 음악을 매개로 한 ‘비자발적 기억’을 네 가지로 설명했다.
음표와 악상기호 어디에서도 우리가 떠올리는 인상과 기억들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우리의 기억과 음악의 구성요소들 자체는 서로 ‘무관계’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음악을 통한 비자발적 기억은 감각적 자극에 대한 ‘해석’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의 ‘현재적 기억’은 과거의 조명을 받아 새롭게 ‘갱신’된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체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간, 즉 다양한 계열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간적 질서와 현대음악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갔다.
현대음악(Contemporary Music)은 반(反) 형식주의, 반(反) 화성주의, 반(反) 주제주의(Anti- Thematicism) 음악이라고 했다. 임의적으로 부가된 규칙과 전제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고 했다. 즉, 음악의 ‘본래성’ 또는 ‘원초적 본질’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고전음악의 시간적 특징은 규칙성(Regularity)이라고 했다. 기존 서양음악에서 출현하는 시간성의 특징은 단선적(singular), 계량적(metered), 기계적(machinic)이라는 것이었다. 즉, 수리적 객관적으로 파악된 시간으로 음악 ‘외재적’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이 씨는 ‘계량적인 시간적 질서는 음악적 시간성의 본질을 잘 구현하는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불규칙성(irregularity)이 현대음악의 특성이라고 했다. 현대 음악가들이 파악하는 음악적 시간성의 본질은 연속적(continuous)이고, 계량 불가능한(uncounted) 생생한 현재적 흐름(Flux)을 나타내는 지속성(Duration)으로서의 시간이라고 했다. 순수시간은 지속성으로서의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이렇듯 가장 본질적인 음악적 시간에 대한 체험은 순수시간에 대한 체험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대적 사유의 모험은 어떻게 음악 안으로 들어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들뢰즈의 ‘주사위 놀이와 세계의 무목적성 그리고 우연성’을 인용했다(“언젠가 내가 신들과 더불어 대지라는 신성한 탁자 위에서 주사위 놀이를 했을 때 대지가 요동하고 갈라지고 화염의 강을 뱉어냈다면 그 이유는 대지가 창조적인 새로운 말들과 신성한 주사위 소리에 의해서 흔들리는 신성한 탁자라는 점에서이다. 오, 내 위에 있는 하늘, 순수하고도 고귀한 하늘! 지금 내게 있어서 바로 너의 순수성은 영원한 거미도 이성의 거미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신성한 우연들이 춤추는 마룻바닥이며 너는 주사위들과 놀이하는 신들을 위한 신성한 탁자니라······ (······) 우주는 목적이 없다는 것, 즉 인식할 원인이 없듯이 소원할 목적이 없다는 것이 바로 제대로 놀이를 하기 위한 확신이다.” - ‘니체와 철학’
“존재론, 그것은 주사위 놀이-코스모스가 발생하는 카오스모스-다.” - ‘차이와 반복’).
‘어떻게 기존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순수시간(pure time)을 구현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현대음악의 시간성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새로운 음악적 시간성은 ‘불규칙성’이라고 했다. 현대음악에서 출현하는 시간성의 특징은 다층적(Multiple), 비계량적(Unmetered), 복합적(Complex), 애매모호함(Ambiguous)으로 음악 ‘내재적’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시간적 흐름(Duration)과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 그리고 우연성(Contingency)에 대한 강조였다.
음악가들은 현대음악의 시간성을 구성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고 했다.
서로 다른 빠르기를 가진 악구(Phrase)들을 동시적으로 진행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리듬을 연속적, 병렬적으로 제시하였다고 했다. 또한, 모호한 주제를 제시하고 끊임없이 변주했다고 하였다. 더불어 불협화음과 무(無)조성 작곡법을 적극 활용하였다고 했다. 이렇게 애매성, 지속성, 우연성 강조를 통한 ‘순수시간’의 구현을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현대음악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음악적 시간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순수시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순수시간은 지속성(duration)으로서의 연속적 시간이라고 했다. 또한, 현대음악은 애매성, 지속성, 우연성을 강조하는 반형식주의, 반화성주의, 반주제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서동욱 교수는 ‘돈의 존재론(돈은 타자를 환대하는가? 지배하는가?)’과 ‘차별, 차이, 환대(차이는 환대를 불러올 수가 있는가?)’를 언급하면서 POETIC JUSTICE 멤버들을 소개했다. 2부 순서에 들어가기에 앞서.
POETIC JUSTICE 멤버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는 김봉현 씨는 시와 랩은 한 뿌리에서 나왔고 둘은 배다른 형제라고 했다. ‘시인은 피를 토한다?, 래퍼는 불량배다?’라는 반어법을 사용해 일반인들이 잘 못 인식하고 있는 랩과 래퍼에 대해 설명했다. 시와 랩의 연결고리로서 시적 선언을 했다.
‘돈의 존재론(돈은 타자를 환대하는가? 지배하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힙합 속의 ‘돈’의 의미로. 존재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음악이 힙합이라고 했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더불어 사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차별’로부터 발생한 것이 힙합이라고 했다. 힙합을 ‘환대’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했다. ‘삶의 사운드트랙’이 힙합이라고 했다.
POETIC JUSTICE 멤버로 가수인 MC 메타(가리온)가 연단에 올라와 랩을 열창했다. ‘돈이란 무엇인가?’, ‘차별에서 차이로’를. 그리고 POETIC JUSTICE 멤버 김경주 시인이 ‘립파이 립파이’란 시를 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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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강연을 모두 마칩니다.’라는 파워포인트 화면(철학은 별세계의 사유가 아니다. 운동을 쉬는 근육이 쉽게 잠들듯 생각 역시 잠에 빠지는데, 철학은 이 생각의 잠을 깨우려고 한다. 생각이 잠들 때 관습, 소문, 편견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철학은 프로메테우스의 가르침에 따라 늘 불이다. 그것은 백열전구처럼 우리 정신을 성가시게 하며 잠들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철학과 더불어 삶으로 들어섰을 때 우리의 정신은 빛을 가둔 유리병처럼 밝아진다. - 서동욱, ‘철학연습’에서)이 나타났다.
동시에 이날 연단에 섰던 6명 모두가 함께한 가운데 서동욱 교수의 마무리 발언을 끝으로 ‘2015 서강 철학 아카데미’, ‘서동욱의 현대 프랑스 철학 강의’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