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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비정기걷기는 '상전면 수몰길 걷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스물네 분이 참여해 주셨고, 재미없는 안내자(=최태영)의 재미없는 설명을 재미있게 들으시면서
유익한 하루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걷기행사 도중에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짧게짧게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책을 만들려고 작년 이맘 때 걷고 써 둔 글이 있기에 참고로 올립니다.
내용이 길고 난삽하고 글솜씨도 없어서 끝까지 읽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읽어
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 당시(작년)에 걸은 코스는 생태습지원에서 시작했었음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물에 잠긴 단밭, 상전(上田)
옛 상전면 소재지의 기억
‘언건이’(진안읍 운산리).
마을이름 뒤에 사람이름처럼 ‘이’를 붙이는 것이 우리고장 사람들의 말버릇이다. 나도 진안에 처음 와서 이런 언어습관을 만났을 땐 다소 놀랐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내 고향 경상북도 일부 지방에서도 ‘앞’, ‘위’, ‘아포’ 등 위치나 지명을 나타내는 명사에 쓸데없이 ‘에’를 붙여 말하지 않는가?
“앞에가 깔끔하고 뒤에는 지저분하다”,
“아포에는 내 외가 동네다” 등에서 모두 ‘에’(위치 조사)를 빼도 말이 되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와 ‘이(의)’는 발음관습상 서로 오가며 혼용된다. 즉, 경상도에서 ‘에’를 붙이는 것이나 전라도에서 ‘이’를 붙이는 것이나 같은 말버릇이라는 것. 전라도는 언어의 변화속도가 다소 느려 옛 습관이 그냥 살아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 같다. 시작도 하기 전에 말이 길었다.
각설하고,
운산리 언건이는 원래 상전면소재지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마을에는 꽤 큰 초등학교(폐교) 건물도 있고 면소재지다운 면모를 보이는 건물들의 흔적이 있다. 이를테면 솟을대문과 함께 일곱 칸 정도의 큰 기와 한옥이 있을 정도였다. 옛 관헌의 사택이거나 부농의 집이었을까? 몇 해 전에 후손이 그 집을 마을에 팔고 고택을 지키던 노모를 서울로 모시고 가버렸다는 소식에 아쉬워했다. 진안군에 몇 없는 썩 괜찮은 한옥 중 하나였던 그 댁의 후손은 서울에서 검사 노릇 하는 분이라고 들었다. 언건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헐고 그 자리에 현대식 마을회관을 지었다.
진안생태습지원(濕地園)
언건이 앞을 지나 안천-무주까지 연결되는 국도 30호선 건너편에 ‘진안생태습지원’이 있다. 답사팀의 첫 답사여행은 이 생태습지원에서 시작되었다. 습지원은 진안천을 타고 용담호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두 가닥으로 나누어 동쪽물길은 그냥 용담호로 흘러들어가게 놔두고, 서쪽물길을 잡아 못을 파서 물이 괴도록 만든 곳을 말한다.
늘 차 타고 휙 지나가기만 했지 실제로 내발로 걸어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다. 나무 데크를 빙 둘러 치고 물 가운데를 지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 그럭저럭 보기 좋다. 마침 이 습지원 조성을 직접 담당했던 공무원이 현장에 나와 있어서 그 수고로움을 치하도 할 겸 인사를 건넸다. 유속이 빠르지 않아 물이 좀 탁해 보였으나 그렇다고 독극물이 흘러들어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만약의 경우 상류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취입구 쪽에서 막아버리면 된다는 설명이다. 담당공무원은 이전에도 마이산 둘레 자전거산책길을 맡아 조성한 적이 있다. 이런 일을 하는 공무원은 참 좋겠다. 근무처가 이렇게 자연 속에 있는 곳이고, 자기 생각대로 미적 감각과 철학을 가미하여 여러 사람이 좋아할 시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업무이니 얼마나 기분 좋을까. 한 발 더 나아가 그분에게 부탁할 수 있다면, 하는 일을 블로그에 자꾸 올려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면 좋겠다.
생각은 자유. 이왕 생각난 김에 상상의 나래를 더욱 펼친다. 모든 공무원이 자기 업무에 대해 블로그를 만들어 매일 있었던 일이나 애환을 올린다면? 행정이 보관하는 서류는 정식으로 결재 받아 처리한 일에 대한 것뿐인데, 만약 각 공무원이 이런 식의 블로그를 운영한다면 시민들은 관청의 일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테고, ‘숨은 야사’가 될 수도 있겠고… 그것 참 괜찮은 생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개인 홈페이지로 많은 국민과 소통했다. 대통령만 그러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블로그 행정, 체온과 호흡이 서로 통하는 행정... 이게 우리 진안에서 실시되기만 한다면 전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군청이 될 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중에 함께 취재 다닐 동료들이 도착했다.
“아홉시에 약속했으면서 열시가 다 되어 도착하는 건 고원길지기의 마땅한 태도가 아닙네, 어쩝네…” 가벼운 입씨름으로 동료애를 확인한다. 물위로 난 데크를 걸으며 습지원의 낭만을 잠깐 즐기기로 한다. 도시출신인 나(와 동료들)로서는 이름을 잘 모르는 물새 세 종류가 너른 날갯짓을 하며 유유히 날아오르거니 내려앉거니 하며 모처럼의 산책길에 나선 일행의 눈을 즐겁게 한다. 국도변의 습지원이다. 차량 왕래가 적지 않은 길옆인데도 물이 있고 물속 생태계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물새의 서식처가 되었다.
도시에 살 때, 한 아파트 단지가 재건축을 하려고 주민들이 모두 빠져나간 현장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난 다음의 아파트 단지는 새, 새, 새, 온통 새뿐이었다. 서울의 새들은 모두 모여든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새들의 천국이었다. 사람 독(毒)이 그렇게 지독했었더냐? 사람이여, 그냥 살고 있기만 해도 다른 생물들이 피해가는 이상한 생물이여.
습지원에는 붕어와 잉어 치어를 수십만 마리 풀었다고 한다. ‘보여줄 거리’로 뼘 이상 되는 큰 물고기도 꽤 넣었다고. 그래서인지 수시로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솟구치는 큰 물고기의 태질이 잦다. 일부러 고기를 풀어서까지 볼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너무 많이 넣어 버리면 그것이 이유가 된 생태계 교란도 있을 텐데.
습지원은 크고 작은 두 개의 못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못마다에 섬이 하나씩 있다. 섬에는 정자도 있다. 못 둑은 진안천 동쪽 갈래와 경계를 이루면서 마이산 자전거길의 연장인 자전거길로 조성되어 있다. 자전거길은 진안군의 역점사업이었던 듯한데, 시민들의 생각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졌다. 진안읍내 전체를 자전거나 도보로만 통행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자는 것이 시민들의 원래 의도였던 것인데 관광코스로 자전거길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일이기도 했지만, 자전거길에는 자전거를 타고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싸이클링 대회라든지 그런 행사를 위해 만드는 하드웨어 사업은 되도록 하지 말자는 것이, 88올림픽이나 그 후에 치러진 여러 국제 대회를 겪으면서 얻은 국민들의 지혜인데 아직 진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닌 것인가.
진안천의 동쪽 갈래를 내려다보며 걷기를 계속한다. 동쪽갈래는 습지원이 아닌데, 물이 비교적 맑다. 흐르는 물이어서 그렇다. 유속이 상당히 빠르다. 이 개울 역시 바닥을 긁어낸 흙을 양안으로 쌓았다. 그 전부터 심어져 있던 어린 가로수들이 더 깊이 묻어져버린 것이 그 증좌다. 하상(河床)을 긁어 올리는 것은 직전 정부의 가장 잘 못 한 일 중의 하나인데, 지방하천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결과일까? 개울 바닥에 암반이 그냥 남아있는 부분은 물이 맑고 흰 거품을 내며 여울 소리도 즐거운데, 긁어서 평평하게 깊어진 부분은 이미 녹조가 끼어 보기 싫다. 우선 개울의 모양부터가 시골개천다움을 잃고 직선, 직선, 직선이다. 인위적으로 쌓은 돌축대도 그렇다. 이렇게 해야만 ‘발전된’ 모습인 것일까?
생각하다보니 슬그머니 ‘꼬인’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생태습지원이라... 자연하천을그냥 놔두면 습지일 것을, 거창의 우포늪처럼말이다. 굳이 습지원이라 이름 붙인 곳을 일부러 만들어 보전한다? 한 옆은 하상을 긁어 올려 자연미를 없이 하고, 한 옆은 물을 일부러 막아 습지원 만들고... 마치 돈을 일부러 써야한다는 듯이. 둔덕에 풀이 새파랗고 누런 황소가 유유히 풀을 뜯는 그런 개울가는 이제 어디 가야 볼 수 있을까?
습지원이 끝나는 곳에 파크 골프장이 있다. 장애우들의 재활활동을 돕기 위한 곳이다. 정규골프장을 즐길 만한 체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한. 공중에 띄워 멀리 보내는 스윙을 하기에는 코스가 짧고 좁다. 처음 보는 파크골프여서 마침 경기하러 나와 있는 한 팀을 잠깐 서서 구경했다. 드라이버를 닮은 한 가지 클럽만을 사용하는데, 마지막에 공을 구멍에 넣을 때까지도 그 클럽만을 쓰는 모양이다. 게이트볼보다는 좀 더 다이나믹해 보인다.
습지원에서 진안읍 쪽으로 뒤돌아보면, ‘진안 8명당(明堂)’ 중 제1명당이라는 송대(松臺)마을이 보인다.
수몰의 삭막한 흔적
생태습지원을 돌아보는 시간이 꽤 길었다. 이제 드디어 수몰된 옛길을 따라 용담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언건대교 아래를 걸어 옛 국도 30호선을 따라 상전면 경계로 들어가는 셈이다. 새로 생긴 도로를 차에 탄 채 달려 지나가기만 하던 곳이다. 한 걸음 내려간 눈높이에서 사람들이 농사짓고 살았을 들판을 바라보니 참 들이 넓기는 했었다. 놓친 열차는 아름답고 잡을 번한 물고기는 몹시 컸듯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곳이어서 더 그럴까?
상전면의 이름은 상도(上道)면과 탄전(呑田)면이 합해져서 생겼다(1914년). 최근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진안읍에 운산리를 넘겨주고 대신 정천면에서 구룡리와 용평리를 넘겨받았다. 탄전면이라는 이름은 원래 ‘단밭’이라 부르던 지역의 한음이다. 논밭이 넓고 비옥하여 달고[甘] 또 고맙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좋은 땅이 용담댐 건설로 물속에 다 잠겼으니 문전옥답을 잃고 나앉게 된 사람들의 눈물이 저수지 물이 된 것이라는 넋두리도 이유 있는 이야기겠다.
용담호에 담수가 시작된 지도 벌써 14년째, 물이 가득찬 적도 몇 번인가 있었을 테니 길의 흔적이나 마을터, 집터들이 원래대로 있을 줄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을씨년스럽다. 툭툭 잘려져 나간 아스팔트 도로가 마치 지진 뒤의 재난지역을 연상케 한다.
처음 만나는 곳이 갈현리. 70년대에 만든 지도를 보면 원갈현마을이 꽤 큰 마을이었다. 원갈현과 진안천 건너 동편의 중기마을을 잇는 다리도 있었다. 건너가지 못하는 지금도 그 다리의 흔적은 보인다. 국도를 달리다가 도중도중 만나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들도 도로표지판을 세웠을 콩크리트 기초 덩이도 흔적은 남아있으되 이미 물에 침식되고 삭아 십수 년 세월을 느끼게 한다. 아쉬움에 일부러 마을터 자리를 찾아 들어가 보았다. 풀이 무릎까지 자란 폐허를 헤치며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우물이었다!
고인돌을 발견하다
우물터, 빨래터, 디딜방아 자리 같은 곳들을 특별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대단한 보물을 발견한 셈이다. 일행에게 ‘심봤다!’를 외치고, 무아몽중이 되어 사진을 찍었다. 원갈현마을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을 그 집에서 허드렛물로나 쓰기 위해 팠던 듯,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물이 말라버린 바닥에 내려서 보니 깊이도 가슴높이 정도다. 그런데 얼마나 튼튼하게 잘 쌓았는지 돌 하나도 빠지거나 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다. 빠질 듯 흔들리는 돌조차 없었다. 대단한 정성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앞 세대까지 우리네 삶의 흔적이었던 것을. 들어가 쪼그리고 앉은 내 모습을 일행이 재미있어 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다. 민중생활의 우물가 못브을 이리저리 이야기하고 상상하며 민속학자가 된 듯 잠시 시간여행을 즐긴다.
그 자리를 떠나 답사길을 계속 걷는다. 그러면서 아까 본 우물에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얕은 우물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타원형을 하고 있다. 보통 우물은 정원(正圓)이기 쉬운데... 혹시 고인돌무덤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무릎이 탁 쳐진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옥개석(屋蓋石; 덮개돌)은 사람들이 가져다 쓰고 시신이 들어갈 현실(玄室)만 남은 바로 그 지석묘였던 것이다! 지체 높은 인물의 무덤은 부장품이 함께 들어갈 만큼 넓고 크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의 묘는 작았다.
용담댐 옆에 조성한 자연생태공원 안에 정천면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인돌유적들을 옮겨 재현해 놓은 지석묘공원이 있다. 그 공원을 나는 몇 번이나 가보았는데, 아주 작은 고인돌은 지름 40cm 정도의 것도 있어서 ‘혹시 전사(戰死)한 사람의 수급(首級)만을 수습한 곳이었을까?’ 라는 끔찍한(?) 상상도 했었다.
정천면 지역만 수몰 전 발굴조사를 했던 것이 안타깝다. 만약 모든 수몰예정지역을 다 발굴했다면 고창이나 강화도에 못지않은 고인돌 명소로 이름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안은 별로 이름나지 않은 오지로 조선 말기에 카톨릭이 상륙했을 무렵에 박해를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 때문에 겨우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아득한 옛날부터 고인돌로 장사지내던 조상들이 이미 살아온 고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인돌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근린생활시설이었다.
산정마을까지 가는 길은 황량하더라
잠시 앉아 점심을 먹었다.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들을 꺼내 놓고 거친 아스팔트길바닥에 주저앉아 먹는 점심. 햇볕 가려줄 나무 한 그루 없고, “어이, 이리와 같이 한 술 먹어봐!” 부르는 농사꾼 한 사람 구경할 수 없는 망해버린 옛 마을의 풍경. 때마침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흙먼지를 도시락 음식 위에 흩뿌리고 지나간다. 한 시간 쯤 그렇게 먹고 마시고 쉬었을까,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먹고 난 다음의 다리는 천근처럼 무겁다. 선하품이 자꾸 나면서 걷기 싫어진다. 이래서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점심 후에는 한 잠 달게 자고 나는 것이 낫다는 건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행 모두가 말이 없어졌다. 그냥 터벅터벅 걷는다.
마을이름 차차차, 구구각색 차차차
대곡마을과 산정마을을 합하여 ‘대산’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마을터를 지나간다. 두 마을을 합해 한 자씩 떼어다 붙인 마을이름도 참 한심한 작명법이다. 어떤 의미도 없는 이름이 돼버리지 않는가? 두 마을 사람들의 정서를 모두 반영한 이름짓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또한 행정편의적 처사이기도 하다. 진안읍내에 건원마을이라는 신생 마을이 있다. ‘건보식품’이라는 회사의 근로자 아파트 한 동과 ‘원전자’라는 회사의 근로자 아파트 한 동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단양리 새마을에서 독립하여 별도 이장을 선출하는 등 행정리 조정이 있을 때 건보식품의 ‘건’자와 원전자의 ‘원’자를 하나 씩 떼어 ‘건원마을’로 했다 하니 메마른 상상력도 이쯤 되면 기네스북 감이다.
산정마을터에 도착했다. 이 마을 이름에 들어간 ‘정’자는 해석이 구구하다. 길옆에 삿갓처럼 톡 튀어 올라온 언덕의 모양이 솥뚜껑(또는 솥다리) 같다 하여 부뚜막 정(鼎)을 쓴 문헌도 있고, 어떤 이가 정자를 지어 마을사람 모두가 함께 즐기며 이용하게 했다 하여 정자 정(亭)을 쓴 기록도 있다. 마을이나 고개(재) 이름이나 그 유래를 정확히 찾아내는 일은 참 까다롭고 어렵다. 현지 사람들이 예부터 부르던 이름이 당연히 옳을 것이로되, 현지사람들도 모두 제각각이다. 사투리나 발음습관에 따라서도 모두 다르고 기억이나 기록마저 일관되지 않으니 한 사람의 주장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의미가 통하지도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부르는 대로 다 옳다고 써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그 주장의 반대편에서 한마디 보탠다. 마을이름이 잘못 전해지는 연유에 몇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풍수에 따른 어려운 작명이 그것이고, 현지 출신이 아닌 행정관서 공무원이 잘못 표기하여 굳어져 버리는 것이 또 하나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고증을 해서라도 제 이름 제대로 찾기에 노력해야 한다.
앞선 주장의 근거로서 주천면 운봉리의 안정마을(연애골)을 예로 들었다. 풍수지리상 연화(蓮花)의 형국을 하고 있대서 연화골로 불렸는데, 이곳 사람들의 발음습관으로 ‘ㅣ모음 역행동화(逆行同化)’와 함께 ‘ㅎ소리 약화’, ‘복모음의 단모음화’ 현상이 겹쳐 연화골→연홰골→연왜골→연애골로 끔찍한 전와(轉訛)가 이루어져 버렸다. 두 번째 주장은 정천면 봉학리에 있는 옥녀폭포를 설명한 안내표지판의 실수이다. 관청이 관광명소마다에 세웠을 이 표지판에는 폭포의 소재지를 정천면 ‘봉황리’라고 표기했다. 사정을 모르는 관광객이 단순히 이 표지판에만 의존하여 자신의 여행기나 블로그를 쓴다면 당연히 ‘봉황리’라고 그대로 옮겨 쓸 수밖에 없겠는데 이런 단순한 실수가 인터넷 등을 통해 파급되어 버리면 봉학리가 이유도 모르고 봉황리로 바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두 물이 합해지는 곳, 산정마을
산정마을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여 물이 차지 않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웬일인지 모두 소개시켰다. 높은 지역인 덕분에 사람 살던 흔적이 꽤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80년대 중반에 만들어 세웠을 마을표지석이 뽑혀 땅에 쓰러져 있고, 농수로와 수문이 있던 곳, 누군가의 산소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 잘 쌓은 돌축대 등이 비교적 그대로 남아있다. 인근에는 수몰선 위로 집을 짓고 농사를 계속하고 있는 농가도 보였다. 이번 답사길에 만나는 유일한 주민인데도 굳이 말을 걸어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와서 옛일을 물어보며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게 할 일이 없겠기에.
산정마을의 이름이 유래하는 그 산(언덕?)의 꼭대기로 올라가 본다. 아까 그 농가가 농사짓는 곳인 듯 밭이 잘 갈아져 있고, 그 밭을 가로질러 올라간 꼭대기에 어떤 이의 부부묘가 있다. 묏등에 올라가 잠시 쉬기로 하였다. 비로소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저 아래 물속에 그 많은 사람들의 생활터전이던 논밭과 집들이 잠겨버렸단 말이지... 지금까지 따라온 진안천은 여기서 그 이름을 내려놓고, 건너편 수동리의 죽도대교 아래를 흘러내려온 구량천 물과 합쳐져 용담저수지로 흘러들어간다. 이를테면 진안의 양수리-두물머리라고나 할까. 수도권에서 살 때 가끔 양수리를 나가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그 자리를 항상 신기해하며 감명 깊게 바라보곤 했다. 이미 중-하류에 도달하여 폭이 넓고 도도한 큰 강 두 줄기가 합쳐지는 곳이니 유유하고 망망했다. 금강 상류와 작은 지방하천이 만난 두물머리이니 그 정도의 망망함과는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진안, 반역의 땅?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도 진안군을 지나고, 백운면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물도 진안군을 지난다. 남한 3, 4위의 큰 강 두 줄기가 모두 진안군을 지난다는 것은 비록 지리적 현상이지만 참으로 의미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진안의 향토사학자 한 분은 “금강과 섬진강이 남북으로 이루는 태극문양의 곡선이 진안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어 진안의 유별난 정기를 의미한다 하여 고려 때부터 중앙 정부의 견제를 받아 왔다”는 독특한 설을 가지고 있다. 또, 마이산의 신비로움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도 한다. 마이산의 많은 별칭 중 하나인 속금산은, 민간에서 소끔(솟음)산이라 부르던 것을 반란역모의 기운(쇠金 즉 화살)을 이름으로라도 진압하려는 의도에서 ‘묶어 꼼짝 못하게(묶을 束)’ 한다는 뜻의 속금산이라는 한자이름으로 굳이 바꿔 붙였다고도 한다. 역시 풍수지리에 의하면 진안의 기운이 화살을 북쪽(임금 곧 중앙정부)으로 향하여 겨눈 반역의 형국이라 하니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중앙정부라면 두려워 할 만도 했겠다. 오죽하면 견훤 등 후백제 세력 때문에 고려를 개국하는 데 엄청나게 곤경을 겪은 태조 왕건이 전라도 사람을 조심하라는 칙령(훈요십조)을 내리면서까지 견제했을까. 또, 고려 말기에, 이번에는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켜서라도 왕권을 잡으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는 곳이 바로 진안의 마이산 아래라 한다. 꿈에 금척(金尺, 왕권의 상징)을 받았다는 것으로서 그 꿈 하나를 믿고 일으킨 거사가 성공한 셈이다. (쿠데타로 잡은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의 계시가 있었다’는 꾸민 이야기를 퍼뜨린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를 기념한 금척무(舞)는 조선 건국 이래 궁중무의 하나로 만들어져 진안의 춤예술로 전승되고 있다.
참고로, 은척(銀尺)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신령스러움의 표상이다. ‘은척’을 지명으로 가진 곳은 경북 상주시에 유일한데, 상주시 은척면은 내 어릴 적 살던 고향이기도 하다.
두 물이 합해지는 곳을 내려다보려니 이런 쓸데없는 곳에 생각이 미쳐 쓸데없는 소리 좀 했다.
상전면 소재지 원수동마을 터
처음 진안에 왔을 때 원수동마을의 표지판을 보고는 정말 놀랐다. 동네이름이 ‘원수의 동네’라니? (웃자고 한 말이니 원수동마을 주민 여러분은 섭섭히 생각지 마시기 부탁드린다.) 이 고장 마을이름짓기의 특징으로 ‘원(元)’자를 붙여 리, 동의 이름의 원천이 여기였음을 강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많이 쓴다는 것 또한 나중에 알았다. 즉, “‘수동리’라는 이명(里名)이 붙은 연유는 우리 ‘원’수동마을 이름에서 온 것이다”라는 자기존재감의 강한 표현이라는 것. 비슷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연장리에 원연장마을, 물곡리에 원물곡, 단양리에 원단양, 가림리에 원가림...
면소재지였던 터인 만큼 넓고 평평하다. 70년대 지도에 많은 민가가 표시되어 있을 정도로 집터가 많고 집들이 촘촘히 붙었을 것이 상상되는 좁은 골목길의 흔적들이 번영했던 한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공공시설이 있었던 흔적도 여러 군데 보인다. 버스정류소, 농협이나 주유소였을 법한 반듯반듯한 기초의 흔적들, 갖가지 표지판이 서있던 쇠기둥들, 상전초등학교가 있던 자리, 수문관리 사무실과 그 사무실에 가까운 수문, 마을로 흘러들어오는 실개천과 그 위에 걸린 네 개의 작은 다리들. 마을보다 낮은 곳에 있었을 전답으로 통하는 포장된 농로는 완만한 경사를 따라 저수지 물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상전초등학교는 1999년 진안읍내의 중앙초등학교로 흡수통합, 폐교되었다. 이로써 상전면은 진안군에서는 학교가 하나도 없는 유일한 면이 된 것이다.
폼페이가 불속으로 사라진 도시라면 상전면은 아틀란티스처럼 물속으로 사라진 도시다.
폼페이나 아틀란티스가 지구의 생명활동이나 하늘의 뜻으로 그렇게 된 것에 비하면 용담저수지는 다른 사람의 생존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의 욕심’에서 저질러진 범죄라고 볼 수 있다. 1964년에 12만 명이던 인구를 정점으로, 용담댐 건설을 계기로 6만 명 이상이 줄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한다.
마을터를 살짝 벗어난 외곽에 번영했을 당시 의미 있었을 큰 나무가 서있는 언덕이 있다. 올라가는 길목에 아직도 남아있는 돌계단이나 실개천을 관리한 흔적 따위가 당산나무에 제지내거나 세시절기 때 공동체활동이 이루어지던 곳이었음을 알게 한다.
수몰길 기행의 마지막 장소로서 이 언덕 옆에 새로 지은 정자에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정자 옆에는 수몰 당시에 옮겨 조성했을 듯싶은 산소들이 많았다. 수몰보상금을 받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조상의 묘와 사당을 옮기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사람들. 조상이 물려준 땅은 그만큼 내 생명과도 같이 존엄했던 것이다. 수 십 대를 내려오며 지켜온 그 땅과 수 십 대를 물려받아 해 온 일-농사를 잃고 나서는 무얼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을 그들. 그들이 흘린 눈물과 피땀은 지금도 물이 되어 용담댐을 한 방울씩 채우고 있다.
(201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