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박태원 출생 1930년대에 광고 도표를 문장 속에 삽입하고, 콤마를 사용한 만연체 등의 독특한 문체를 시도했다. 주로 소시민의 생활을 소재로 한 심리소설과 세태소설을 썼다. 호는 구보(丘甫:또는 仇甫·九甫)·박태원(泊太苑). 약국을 경영하는 아버지 용환과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야기책을 좋아하고 글짓는 데 재주가 있었다. 11세 때인 1919년 경성사범보통학교에 들어가 4학년을 마치고, 1923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중퇴하고 집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는 등 불규칙한 생활을 해 건강과 시력이 나빠졌다. 한때 이광수를 스승으로 섬겼으나 그의 계몽주의 문학을 따르지는 않았다. 1933년 이태준·정지용·김기림 등으로 구성된 구인회에 이상(李箱)과 함께 가담했으며 특히 이태준과 친하게 지냈다. 중국 소설을 번역하면서 한때 작품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고, 해방 직후 이태준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참여해 소설부 위원을 지냈다. 6·25전쟁 중 월북해 평양문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시조 시인 조운과 함께 〈조선창극집〉(1953)을 펴냈다. 1956년 한때 남로당 계열로 몰려 작품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0년 작가로 복위, 1986년 고혈압으로 죽었다. 1965년 실명한데다 1975년 고혈압으로 전신불수가 되어서도 아내 권영희의 도움으로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문학세계 1920년대말부터 시〈누님〉(조선문단, 1926. 3)·〈떠나기 전〉(신민, 1926. 12) 등과 단편소설 〈최후의 모욕〉(동아일보, 1928. 12. 13)·〈해하(垓下)의 일야〉(동아일보, 1929. 12. 17~24)·〈수염〉(신생, 1930. 10) 등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초기에 발표한 단편 〈옆집 색시〉(신가정, 1933. 2)·〈사흘 굶은 봄 달〉(신동아, 1933. 4)·〈오월의 훈풍〉(조선문학, 1933. 8, 10)에서 지식인의 우울을 주제로 했으나, 이것은 당시의 유행을 따랐을 뿐 결정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작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표현기교에 관심을 갖고, 〈오월의 훈풍〉에서는 구절마다 다른 행으로 옮겨 쓴 간결체를 시도했다. 1934년 〈3월 창작평〉(조선중앙일보, 1934. 3. 26~31)에서 "문예감상은 문장의 감상"이라고 하면서, 이제까지의 월평은 이데올로기에 치중했다고 비판하고, '무엇'과 함께 '어떻게' 쓰는가도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창작여록-표현·묘사·기교〉(조선중앙일보, 1934. 12. 17~31)에서는 '어조'와 '문장부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교를 자유롭고 솜씨 있게 써야지 그 기교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단편 〈전말 顚末〉(조광, 1935. 12)·〈비량 悲凉〉(중앙, 1936. 3)·〈방란장주인〉(시와 소설, 1936. 3) 등에서 5행에 걸친 만연체를 썼고, 〈피로〉(여명, 1933. 5)·〈딱한 사람들〉(중앙, 1934. 9) 등에서는 신문광고문과 기호를 대담하게 삽입했다. 그러나 초기의 기법에 대한 관심은 차츰 소시민의 생활을 소재로 한 세태소설로 바뀌었다. 자전적 소설인 〈소설가 구보씨의 1일〉(조선중앙일보, 1934. 8. 1~9. 19)에서 전환의 징조를 보였고, 장편 〈천변풍경 川邊風景〉(조광, 1936. 8~1937. 9)과 단편 〈골목안〉(문장, 1939. 7)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세태소설로 자리잡았다. 첫 작품집인 〈소설가 구보씨의 1일〉(1938)은 미혼이며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소설가 구보씨가 서울 거리를 배회하면서 느끼는 내면세계의 방황과 세태풍속을 잘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 〈천변풍경〉은 짧은 이야기 50절로 이루어진 장편으로, 철저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따르고 있다.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나 뚜렷하게 내세우는 사상도 없이, 청계천변에 사는 서민층의 몰락과 가난을 시선에 잡히는 그대로 그려냈다. 해방 전까지 개인의 문제, 지식층의 문제, 현재의 문제에 치중했으나, 해방 후에는 집단의 문제, 민중의 문제, 과거의 문제에 치중해 〈춘보〉(신문학, 1940. 8) 등의 역사소설을 주로 썼다. 월북 후 북한에서 익산민란을 그린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1, 2부(1963~64)를 발표했고, 1977~86년 북한의 역사소설 가운데 최고걸작으로 손꼽는 〈갑오농민전쟁〉 전3권을 펴냈다.
[1928년] 촘스키 (Avram) Noam Chomsky 출생 촘스키는 변형문법이라는 독창적인 언어분석체계를 세운 미국의 언어학자이며 작가·반전(反戰)운동가이다. 그의 이론은 언어학이 실제 발화의 밑바탕을 이루는 설명 원리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정신주의' 언어 이론에 속한다. 모든 언어는 각자 독특한 체계를 가진다는 개념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이전의 언어학 이론인 구조주의적 견해와 충돌을 일으켰다. 언어분석에 변형문법을 적용하는 것은 언어 내에 일정한 수의 형식적·실질적 보편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통사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의 발표 이래 그의 변형문법이론은 언어학과 관련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편 그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한데, 제국주의적인 미국의 대외정책을 고발하고 다양한 사회·경제 문제에 관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개진해온 실천적인 지식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23년] 박형규 목사 출생 1950년 부산대학교철학과를 중퇴하고 1950~58년 미육군에 근무하다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 1959년 일본 도쿄[東京]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1963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공덕교회·초동교회 부목사를 거쳐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다. 1968년 기독교서회 발행 〈기독교사상〉 주간, 1970년 기독교방송 상무이사를 지냈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92년 8월까지20년간 시무를 맡아오면서 1971~74년에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빈민선교운동에 힘썼다. 198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82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사장을 지냈고, 198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장을 지냈다.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강조하여 1973년 반유신체제 시위인 '남산부활절사건',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과 '기독교장로회 청년 전주시위사건' 등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해방의 길목에서〉(1975)·〈해방을 위한 순례〉(1984)가 있다.
[1941년] 일본, 진주만 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하와이 오아후 섬의 진주만에 있던 미국 해군기지에 공중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등은 미국 함대를 무력화시켜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열도, 남태평양을 손쉽게 거머쥘 요량이었다. 일요일이라 미군 병사들은 제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비행기들은 비행장에 얌전히 정렬해 있었다. 공격은 대성공이었으나 미국의 참전이라는 화근을 불러왔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했듯이 '불명예스러운 날로 기억될 그날'은 미국인들을 단합시키고 이전의 중립 지지 여론을 바꾸어 놓았다. 12월 8일 미국의회는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도 반대했던 몬태나의 지넷 랭킨 공화당 의원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태평양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확대되었다.
[43년] 로마 정치가 키케로 처형 BC 43년 12월 7일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며 법률가인 키케로가 처형당했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그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여 독재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오히려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 연합하여 권력을 잡고 삼두정을 성립시켰다. 그들은 곧 키케로를 비롯해 삼두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투쟁에 승리한 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스스로 부여함으로써 황제가 되었고, 로마의 공화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키케로는 정치가로서보다도 뛰어난 법정 연설가로서 이후의 서양 웅변과 산문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라틴 문어(文語)를 완성시켰고 음의 장단을 기초로 한 산문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라틴 문학의 첫번째 전성기였는데 후일 문학사에서 키케로 시대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키케로는 철학 저술을 통해 그리스 사상을 후대에 전수했고, 그가 지인(知人)들과 주고받았던 900여 통의 편지들은 고대 로마에 대한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39년] 김주영 출생 경북 청송 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1년 소설 <휴면기>로 [월간문학사] 제8회 신인상 수상, 문단 데뷔. [글밭동인회] 동인, [안동문학] 주간, 한국문인협회 안동지부장 역임.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와 8ㆍ15광복, 6ㆍ25전쟁을 겪으면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1954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구농림고등학교 축산과에 입학하였으나, 이 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시를 쓰기도 하였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196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하였지만, 자신의 문학적 자질이 시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혼란을 겪었다. 이로 인해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안동의 엽연초생산조합에서 일하면서 한동안 문학과 상관없는 생활을 하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습작에 몰두하던 그는 1970년 <여름사냥>이라는 소설이 [월간문학]에 가작으로 뽑히고, 1971년 10월 <휴면기>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월간문학]을 비롯하여 [현대문학] [한국문학] [문학사상] [신동아]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한 소설들은 대부분 악동들의 세계를 그리거나 건강한 하층민들의 삶을 그렸다. 한편 40세 이후로는 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한 작품들을 많이 썼다. 1980년부터 [서울신문]에 역사소설 <객주>를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역사 인식의 틀을 제시하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1983년에는 구한말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활동했던 활빈당이라는 의적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활빈도>를 「중앙일보」에 연재하였고, 1988년에는 [한국일보]에 <화척>을 연재하는 등 주로 역사ㆍ대하소설을 집필하였다. 1989년 절필(絶筆) 선언을 하면서 잠시 활동을 쉬기도 하였으나 1년 뒤 문단에 복귀하면서 다시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1998년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83년 단편 <외촌장기행>으로 한국소설문학상, 1984년 <객주>로 제1회 유주현문학상, 199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96년 <화척>으로 제8회 이산문학상, 1998년 <홍어>로 제6회 대산문학상, 2001년 <아라리 난장>으로 제2회 이무영문학상, 2002년 <멸치>로 제5회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작품세계】 김주영 평범한 삶을 민족사의 비극과 관련시켜 보여 주고 있으며, 경험된 자기 세계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갖고 집착하는 작가이다. 소외된 인간을 니힐하게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생존 자체에 대한 회의와 비극을 제시하고 있다. 서사시적인 문장과 향토색 짙은 언어 구사, 토속적인 환경 설정, 의도적으로 동물을 등장시켜 인간세계와 동물의 세계를 비교 풍자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학인생】 '걸죽한 입담과 해박한 풍물묘사'가 돋보이는 장편 역사소설에서부터, '빛나는 감수성으로 눈이 시릴 정도의 박꽃 같은 순백한 사랑을 순정미학의 진수로 그려냈다'는 <홍어> 같은 중편, 그리고 '경쾌한 속도감, 재치의 반전으로 소설적 재미를 가속화시키는' 단편들에 이르기까지 소설가 김주영의 문학적 폭은 아주 넓다. 지독스레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탯줄을 끊고 난 그 순간부터'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부딪히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군청에 다녔지만 그 시절의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그 날의 잠자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김주영은 어릴 때부터 떠돌이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를 파하고 나면 대개 버스 정류장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떠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당시의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은 아버지요, 가장 미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시를 쓰고 싶다는 욕구 역시 그를 밖으로 내모는 원초적 동력이었다. 결국 열여섯에 대구로 떠나 풍찬노숙을 일삼으며 대구농림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친구집에 붙어살며 서라벌예대에 진학하게 된다. 모두 다 공부를 핑계 삼은 '탈출'이었다. 평론가 김화영은, 김주영 문학에 신발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나오는 것은 그의 떠돌이 의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의 떠돌이 생활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방에서는 자지 못하고, 찬바람 도는 거실에서만 잠이 온다는 김주영이다. 대학에 진학한 김주영은 박목월, 서정주 같은 대스승들을 만나 문학에의 열정을 불태운다. 당시에 박목월은 시인을 꿈꾸던 김주영에게 시보다는 소설을 권했다. 이후 10년간 안동의 엽연초생산조합에 근무하다가 끝내 회사를 그만 두고 글쓰기에 전념. 1971년 등단한다. 유년의 시골장터에서 목격한 봇짐장수들의 고달프고 강인한 삶을 그린 <객주>는 1979년부터 5년간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우리 역사소설의 빛나는 업적들인 <임꺽정>, <장길산>과 동등한 반열에 올랐다. 당시 김주영은 녹음기와 카메라를 든 채 장이 서는 곳마다 찾아다니면서 민초들의 언어를 채집했다. 그와 한평생 어울려 지낸 소설가 이문구는 김주영이 소설을 쓰기 위해 깨알같이 메모해둔 노트를 보고 '이것은 피다. 이것은 피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이라고 썼다. 1989년 김주영은 절필 선언을 했다. 한국일보와 7년간에 걸친 연재계약을 한 지 불과 1년만의 일이었다. 자신의 소설이 '동어반복'이 너무 심하고, 상업성에 침식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랜 글쓰기의 경험으로 독자를 교묘하게 속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나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원고료와 인세가 나의 생활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그의 이러한 선언은 타성적인 문학행위에 충격을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여러 편의 대하역사소설을 완성한 후 <홍어>라는 새로운 감각의 소설로 독자와 평단의 갈채를 함께 받았다.
【연보】 1962 -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1965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졸업 1971 - [월간문학]에〈휴면기> 당선, 문단 데뷔 1976 - [경향신문]에 장편소설<목마위의 여자>연재 1979 - [서울신문]에<객주>연재 1983 - [중앙일보]에<활빈도>연재. 단편 <외촌장기행>으로 한국소설문학상 1984 - <객주>로 제 1회 유주현문학상 수상 1988 - [한국일보]에<화척><중국기행>연재 1989 - 우경문화재단 상임이사 1991 - [동아일보]에<야정>연재 1993 -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분 수상 1995 - [서울신문]에<아프리카기행>연재 1996 - <화척>으로 제8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8 - <홍어>로 제6회 대산문학상 수상 1999 - [중앙일보]에 <아라리난장> 연재 2001 - <아라리 난장>으로 제2회 이무영문학상 수상 2004 - 열린우리당 공직후보자자격심사위원 【작품】 *<객주(客主)>(1981.창작과 비평사.1∼9권) <아들의 겨울>(1982.전예원) *<외촌장 기행>(1982) <겨울새>(1983.민음사) <활빈도(活貧徒)>(1987.전5권) <천둥소리>(1986.민음사) <새를 찾아서>(1987.도서출판 나남)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1988) <외설 춘향전>(1994) *<화척>(1995.문이당.1∼5권) <야정(野丁)>(1996.문학과지성사.1∼5권) *<홍어>(1998.문이당) <아라리 난장 1>(2000) <거울 속 여행>(2001) <멸치>(2002) <젖은 신발>(2003) <여자를 찾습니다> <목마 위의 여자> <도둑견습> <나를 아십니까> <위대한 악령> <바다와 우산> <즐거운 우리집> <가까스로 태어난 남자> <어린날의 초상>
【소설집】 <겨울새>(1983) <새를 찾아서>(1987)
[1817년] ‘바운티호’의 선장, 윌리엄 블라이 사망 타고난 항해사였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부족했던 윌리엄 블라이 거친 입과 악랄한 성격으로 비록 인기 없는 지휘관이었지만, 의심할 바 없는 용기와 항해가로서의 뛰어난 기술로 일등 항해사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윌리엄 블라이가 1817년 12월 7일 눈을 감았다. 그는 타고난 항해사였다. 7세 때 이미 선실 급사로서 선원이 되었고, 1770년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1787년, 새로운 항로 발견과 기타 과학적 탐사를 위한 영국 죠지 왕의 어명을 받잡고 215t급 ‘바운티호’의 함장으로 임명됐다. 특히, 이 배는 서인도 제도에 이식할 빵나무를 타히티에서 채집해 실어나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히티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1789년 4월 28일, 평소 사나운 입심으로 선원들을 다스리던 그의 태도에 불만에 품은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블라이와 그에게 충성하는 18명의 선원들은 배에 있던 대형 보트에 실려 쫓겨났다. 반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원주민 여자문제와 관련해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평소 귀족 선장으로서 망망대해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려 했던 그의 지휘방법에 선원들의 원망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놀라운 항해력은 여기에서도 십분 발휘돼, 약 5,800㎞를 헤맨 끝에 네덜란드 령 티모르에 도착한다. 결국, 미처 도망가지 못한 ‘바운티호’의 반란자들은 영국으로 압송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블라이는 1792년에 다시 타히티를 방문해 더 많은 빵나무를 서인도제도로 운반하는 데 성공하는 등 많은 항해 업적을 남겼지만, 이후 ‘디렉터호’의 선장으로 있던 1797년에 노어 반란에 가담한 부하 선원들에 의해 해변에 버려지는 수모를 당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자질은 부족했던 듯 싶다.
[1894년] 한정동 출생 동요/ <고향생각> 등으로 유명한 한국의 시인·아동문학가 1894(고종 31). 12. 7 평남 강서~1976. 호는 서학산인(棲學山人)·성수(星壽)·백민(白民). 1918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할 무럽에 평양시청 서기로 잠시 근무했다. 1936~3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진남포 지국장을 지냈고, 1939년 이후 진남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5년 진남포 영정국민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50년 공산치하를 피하여 월남했다. 1951~52년 〈국제신문〉 기자, 1954~61년 서울덕성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한국아동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요 〈따오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초기에 발표한 동요 〈고향생각〉·〈갈닢 피리〉·〈봄나비〉 등과 동화 〈제비와 복남〉·〈촛불〉 등은 민족적인 슬픔을 향토적인 정서로 읊은 것들이다. 이러한 성격은 1950년 이후에 발표한 동요 〈반딧불〉·〈수양버들〉과 동화 〈새동무〉·〈혹과 나〉 등에 이르러 천진스런 동심세계로 변하게 되었다. 저서로 동요·동화 등을 모은 〈갈닢 피리〉(1957)가 있다. 1968년에 받은 '고마우신 선생님상'의 상금과 개인 돈을 내어 1969년 한정동아동문학상을 제정했다.
[1870년] 이상설[李相卨] 출생 헤이그에 파견된 3명의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870. 12. 7 충북 진천~1917. 3. 2. 연해주 니콜리스크.
개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외교권이 없는 나라의 대표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후 각국에서 외교운동을 벌였다(→ 헤이그 밀사사건).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등에 있는 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관직생활 및 국권회복운동 아버지는 행우(行雨)이나, 1876년 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에 제수되고 다음해 비서감비서랑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해 법부협판·의정부참찬을 지냈다. 이무렵부터 여준(呂準)·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범세(李範世) 등과 외국 서적을 들여다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연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으나, 12월 체직(遞職)되어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4일자에 〈독이참찬소 讀李參贊疏〉라는 제목으로 '순사지의(殉社之義)로써 임금에게 고한 대충대의(大忠大義)의 사람은 오직 이참찬뿐'이라고 게재했다. 민영환(閔泳煥)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망명과 헤이그 특사 1906년 이동녕·정순만(鄭淳萬)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上海]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煙秋)로 가서 이범윤(李範允)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준·왕창동(王昌東)·박무림(朴茂林) 등과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았다. 1907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5월 차고려(車高麗)의 안내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한일협약은 각국 정부가 승인했으므로 외교권이 없는 대한제국 대표의 참석과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고 거절 당해,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협상의 장이었던 회의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 控告詞〉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내었고, 7월에는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문제를 부각시켰다. 회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자 7월 14일 저녁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여 그곳 아이큰다우의 공원묘지에 매장하고, 이후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위칭(僞稱)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선위(禪位)라는 미명으로 고종을 강제퇴위시켰다.
외교운동과 망명정부 수립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을 규합해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싱카이 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蜜山) 부근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유인석·이범윤·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 도총재에 유인석을 선임하고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다. 이해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족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러시아·중국 등에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왔다. 김학만·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권업신문 勸業新聞〉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를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동지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과 러시아가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의 정치·사회 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채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했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 등이 신한혁명단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었다.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1년 보제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崇慕碑)를 건립하고,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했다.
그밖에 2000년 2차대전때부터 작전에 참가했던 미국 전함 USS위스콘신호 퇴역 2000년 2000년 일본군 성 노예전범 국제법정, 일본에서 개막 1999년 초기백제 유일한 문자기록 풍납토성 토기에서 발굴 1999년 묘지법 개정안 통과-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국회 법사위 통과 1999년 국내서 에이즈 치료 백신 개발 성공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정-재계 간담회서 5대 재벌 구조조정 합의 1995년 수도권신공항고속도로 착공 1995년 갈릴레오호, 최초로 목성탐사 성공 1994년 정부,삼성그룹의 승용차산업 신규진출을 허용키로 발표 1994년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1991년 미국NBC, 소련 러시아방송국(RTR)과 방송협정 체결 1990년 소콜로프, 초대 한국주재대사로 부임 1989년 라디슬라브 아다메치 체코슬로바키아 총리 사임 1988년 아르메니아 스피타크 대지진으로 2만5천명 사망 1987년 고르바초프, 1973년이래 소련 지도자로선 첫 미국 공식방문 1984년 여성산악인 김영자, 안나푸르나봉(해발 8,091m) 정복 1983년 스페인서 두 여객기 충돌. 104명 사망 23명 중상 1982년 미국 하원 MX미사일 생산계획 부결 1980년 미국-중국간 민간항로 31년 만에 재개 1978년 사상 최초로 남빙양에 어로 출항 1978년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수상에 당선 1976년 작곡가 정율성 작고 1975년 포드 미국대통령 신태평양독트린 발표 1971년 파키스탄 인도와 단교 1970년 서독-폴란드, 바르샤바 조약 조인 1970년 청와대에 특별보좌관실 신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폴란드에 사죄 1968년 정부,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연례자동상정을 재량상정으로 변경 1965년 로마교황과 그리스정교회 총주교 911년만에 화해 1964년 한-독 경제협정 체결 1964년 박정희대통령 서독 방문 1963년 최고회의, 새 정부기구를 확정 (1원13부3처5청, 부총리제 신설) 1961년 10개 사범학교 교육대학으로 승격 1956년 유엔총회 한국재건원조 결의안 채택 1954년 볼리비아 대표 유엔총회서 남북한연방제 구성 제의 1953년 유엔총회 강제노동폐지에 관한 결의안 가결 1950년 유엔 정치위, 한국서 중국군철수 결의안 가결 1949년 자유중국 수도를 성도로부터 대만의 대북으로 이전 1949년 세계자유노동조합연맹 발족 1948년 소련, 북한서 완천철수 발표 1928년 조선공산당 해체 1917년 러시아 체카(KGB 전신) 설립 1894년 데이비스 출생/상업 및 광고미술을 차용한 1960년대 팝 아트의 등장을 예고한 미국의 추상화가 1889년 마르셀 출생/ 최초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극작가·비평가 1884년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선생 출생 1872년 호이징가 출생/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중세의 가을 Herfsttij der middeleeuwen>(1919)를 쓴 네덜란드의 역사가 1842년 영국 소년 이글리, 크리스마스카드 창안 1830년 크레모나 출생 / 이탈리아의 수학자이며 도표 정역학의 창시자 1810년 슈반 출생 / 세포가 동물구조의 기본단위라고 정의하여 현대의 조직학을 정립한 독일의 생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