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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宣敎에 있어서 宗敎多元主義 문제에 關한 硏究
목 차(目次)
Ⅰ. 서 론(序論)
A. 문제 제기
B. 연구범위및 방법
Ⅱ. 선교의 개념 정의
A. 선교 개념의 일반적 고찰
1.선교의 어의
2.선교의 동기
B. 성서의 선교 개념
1. 구약의 선교
2. 신약의 선교
C. 선교 개념에 대한 相異한 견해
1. 복음주의의 선교 개념
2. W.C.C의 선교 개념
3. 새로운 선교 개념
Ⅲ. 선교적 측면에서의 Asia의 상황
A. 아시아 문화의 특성
1. 문화이해
2. 종교의 다양성
3. 빈곤
B. 아시아 종교의 상황
1. 아시아 종교인 수
2. 아시아의 문화적 지역 분류
3. 아시아 종교 분포도
C. 토착화론의 강한 대두
Ⅳ. 종교 다원주의의 개념
A.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의 배경
1. 다원주의의 개념
* 2. 종교 다원주의의 뿌리
3. 현대 종교 다원주의 발생의 배경
B. 종교 다원주의의 이론들
1. 신 중심적 접근 방법
a. 존 힉
b. 폴 니터
2. 그리스도 중심의 접근 방법
a. 칼 라너
b. 한스 큉
3. 대화를 통한 접근 방법
a. 스텐리 사마르타
b. 라이문도 파니카
Ⅴ.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A. W.C.C 의 종교간 대화(Dialogue-Program)
1. 발생 배경
2. 힌두교적 혼합주의
B. 아시아 종교의 범신론과 아시아 신학자들의 종교 다원주의
1. 범신론(汎神論)
2. 아시아 신학자들의 종교 다원주의
3. 한국에서의 종교 다원주의
C. 종교다원주의에 대항하는 선교 전략
1. 종교 다원주의가 선교에 미친 영향
2. 도전에 대한 응전 | 기독교의 절대성과 우위성
a.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
b.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
c.그리스도 밖의 구원의 문제
Ⅵ. 결 론(結論)
A. 요약
B. 제언
* 參考文獻
Ⅰ. 서 론(序論)
A.문제 제기
현대 사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야흐로 다원화시대에 돌입하였고, 이런 다원화된 사회는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른바 “종교다원주의”가 그것인데, 이는 한마디로 타종교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반드시 기독교를 믿어야하는 이유가 없고, 불교나 회교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 stian)"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통해 기독교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는 서양에서도 이미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은 물론 처음부터 종교다원화의 사회로서 유교, 불교, 샤머니즘이 공존하면서 어떤 것에서는 상호혼합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유진 나이다(Eugene Nida)가 지적한 것같이 유교는 사회적 규범을, 불교는 개인의 사후세계관에 대하여, 무속종교는 현세에서 행복추구에 대한 나름대로의 종교적 가치관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비단 한국뿐 아니고 - 기독교 전래 이전에 고등종교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 아시아 전역의 보편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배타적 성격 때문에 도전과 저항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왔다. 그러나 현대 신학은 오히려 종교다원주의를 원하면서 종교간의 대화와 공존을 말하였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논하는 것은 영적 교만이며 선교도 종교적 제국주의라고 정죄하는 형편이다. 즉 기독교 신학과 선교에 있어서 “엘렝틱스”(죄의 책망)보다는 “변명”(Apology)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 선교에 큰 도전이며 선교 가치관에 있어서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 소고에서는 먼저 종교다원주의와 종교간의 대화를 논하게 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고 여기에 대응하는 입장으로서의 선교전략을 모색하며, 대부분의 고등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아시아에 이러한 타종교들과 어떤 접촉점을 가지고 기독교가 접근할 수 있는지를 연구할 것이다. 아울러 종교 다원주의의 허상을 밝혀보고, 종교 다원주의에 대항하는 선교전략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B. 연구 범위 및 방법
Ⅱ장에서는 선교의 개념정의를 위해, 우선 성서가 말하는 선교관을 살펴보고, 에큐메니칼 신학이 말하는 선교관과 복음주의의 선교관을 비교하여 새로운 선교관을 모색하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선교적 측면에서의 아시아의 현실과 상황을 살펴보되 아시아 문화의 특성, 아시아의 종교상황, 토착화론의 대두와 문제점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Ⅳ장에서는 종교 다원주의의 개념을 살펴볼것이다.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우선, 종교 다원주의의 발생 배경을 연구하되, 먼저 종교 다원주의의 뿌리로서 고대 근동의 종교와 문화를 통해 살펴보고, 그후에 현대 종교다원주의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최근 종교 다원주의의 토대를 쌓은 신학자들의 이론을 고찰하므로 신학적 이해를 갖고자 한다.
Ⅴ장에서는 선교에 큰 어려움을 주는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를 밀도있게 살피기로한다. 우선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것을 좀더 구체화 하여 WCC 에서 말하는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해서 알아본다. 그 후 아시아 종교의 범신론과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특별히 세계관과 신관,구원관과 종말관에 촛점을 맞추어 살펴본 후,아시아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과 한국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간략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Ⅵ장에서는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입장을 최종 정리하여 말하되, 성경의 立志를 바탕으로 선교의 측면에서 종교 다원주의의 과오를 지적하고, 바람직한 선교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선교의 개념 정의
A.선교 개념의 일반적 고찰
1. 선교의 어의
“선교”라는 용어는 라틴어 “mitto(보낸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것은 헬라어의 “아포스텔로(αποστελλω)”와 “펨포(πεμπω)”에 해당된다. 신약성경에 “αποστελλω”는 135회, “πεμπω”는 80회가 각각 사용되고 있는데, 전자는 위로부터 사명을 받아 보내어지는것, 후자는 단순히 보내어 지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둘은 “파송”이라는 공통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 “Missionary”는 13세기 천주교의 수도원에서 사용했는데, 그 의미는 ‘세상에서 사도의 사역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자’를 지칭 하였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에 와서는 천주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받은 자들에게 “선교사”란 명칭을 부여 받았고, 그 후 개신교도 이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독일 선교학자 구스타프 바르넥(G.Warnek)은 “선교란 비기독교 세계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복음전파다”라고 하였고, 맥가브란(Donald A Mcgvran)도 같은 견해로 말하길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충성을 바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문화권을 초월해 전하는 것이며 그들을 고무하여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Savoiur)와 주(Lord)로서 받아들이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인 교회의 책임적인 구성원이 되게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전도와 정의의 실천에 함께 사역하며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뜩이 성취된 것처럼 이 땅에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죤 스토트(John Stott)는 선교의 의미를 확장시켜 선교를 타문화권 전도로만 국한 시키지 않고, 전도와 사회 봉사를 포함 하는 넓은 의미의 선교관을 주장한다.
2. 선교의 동기
선교의 동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선교의 양상이 결정된다. 가장 폭넓고도 일반적으로 표현한 것은 죤 영(John Young)의 설명이다. 즉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사랑이 그 동기가 되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그 목적이 되었으며, 인간 편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선교의 동기요, 하나님께 영광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장중열 교수는 George F. Vicdom의 말을 인용하여, “교회와 선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구속의 뜻에 근거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부활과 재림의 중간기에 수행하는 사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교의 목표는 시대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다르게 나타났다. 즉 17세기 초에는 경건주의(Pietism)가 중심이 되어 개인 영혼 구원을 강조했고, 로마카톨릭의 선교신학과 초기 종교 개혁기에는 교회중심적이었다. 그 후 19세기에 선교의 새로운 자각으로 성공회의 헨리 벤(Henry Venn)과 미국 회중교회의 루프스 앤더슨(Rufus Anderson)을 중심으로 “삼자 선교 형태”즉 자치, 자급, 자력전도가 교회 성장의 하나의 목표가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에 이르러서는 라우센 부쉬에 의해 “사회복음(Social Gospel)”이 선교의 목표가 되었고,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가 강조 되었다. 1960년대에는 미국 풀러 신학교의 맥가브란(McGavran)을 중심으로한 교회 성장 운동이 강조되었는가 하면, 바르넥(G.Warneck) 같은 학자들에 의해 기독교 사회 형성에도 관심을 쏟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선교의 목표에 있어서 시대적 강조점이 다소 다르게 나타나기는 하나 그 궁극적 목표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그의 재림에 관한 멧세지의 선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B. 성서의 선교 개념
1. 구약의 선교
a.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선교 정신
구약성경은 선교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약성경 전체에 열국들의 구원에 대한 비상한 관심이 나타나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부분적인 어느 민족만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⑴만물이 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요 그의 보존아래 존재한다.
화란의 선교신학자 바빙크(J.H.Bavinck)는 “전 세계 인류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사실이 선교원리중 가장 심오한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인류를 한혈통으로 만드셨다는 사도행전의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행17:26).
채은수 교수는 “태초에 천지창조를 하나님께서 하셨고 모든 피조물은 인간을 위해 만드셨고, 인간 중심성을 남용하여 그의 본분을 잘 알지 못하여 범죄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아서 그리고 요나서와 이사야서를 통해 우주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구약성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창조선언으로 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므로 그것을 또한 소유하고 계신다(시 95:4-5). 또한 그는 세상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그것을 통제하고 보존하신다(사 40:28). 특히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며 오늘날 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며(시145:9),또한 그의 선하심은 피조물위에 차별없이 나타난다(마5:45).
시편 19편 4절(下)에 나오는 “그 소리가 온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는 말씀은 선교적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⑵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 이시며 재판관 이시다.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라고 했고,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시 33:13)라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을 버리시고 이스라엘만 보심이 아니라 이방의 모든 범죄와 행방을 모두 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재판관이 되신다.
⑶하나님은 이방나라의 왕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나라”란 말은 창세기 10장 20절에 처음 나오는데, 히브리어로는 “고임”(Goyyim)이라한다. 구약에서 이말은 이방과 같은 의미이다. 인류가 하나로 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의도였을 것이나, 홍수 이후의 인간들은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바벨탑을 쌓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땅에 흩으셨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 유독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때 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백성을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는 선교적 명령은 함축되어있지 않지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선교적 사명은 이방중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으로 사는 것이었다(Model of Presence).
흩어진 백성 가운데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이스라엘 구별이 만민에 대한 관심을 위배한 것이 아
니다(창12:3).
나. 이방나라에 대한 구원의 씨앗이 되게하려 하심이다(창
22:18).
다. 일시적인 구원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상 필요한 것이
었다.
라. 하나님의 영광이 표본이 되게 하시려고
마. 한 민족의 정복과 동시에 이방의 우상신을 비하시키려
는 의도였다.
b. 예언서에 나타난 선교
⑴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접어들게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하나님은 만민의 하나님이다(사2:1 -4,민 4ㅣ1-4,렘3:17등).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범위가 세게적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도 전세계적이다(암1:3-2:3), 그리고 이런 일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구원의 빛으로 이끌려 오는 것이다.
⑵이런 구원약속 성취의 첫째 조건은 이스라엘 자체의진정한 회개다. 또한 이러한 회개는 장차올 메시야와 연관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예언들이 거듭 메기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메시야를 임마누엘 평강의 왕, 나무가지, 인자, 여호와의 종으로 지칭하고 있다.
⑶메시야와 연관하여 이방 열국들이 심판받을것을 언급하면서도 동시에 열국들의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열방 구원은 언제나 자발적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편에서의 선교활동이 전혀없을 것이라고 말한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영광을 바라보고, 열국이 이스라엘 속으로 물흐르듯 자발적으로 흘러들어올 것이 강조되었다. 이른바 할례와 개종을 통해 신앙공동체로 받아들이는 구심적 선교(Centrpetal Mission) 방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⑷마지막으로 이스라엘과 전세계에 이르게된 구원은 전 포괄적인 구원이 될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 사죄 및 무수한 다른 축복들을 포함하는 구원이다(사 25:6-8).
c. 요나서에 나타난 선교
구약의 선교론에서 미 해결의 이슈는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것이 “선교활동이냐,아니냐”하는 문제이다. 일부 구약학자들은 요나서의 역사성을 부정하면서도 세계주의(University)가 가장 뚜렸하게 나타난 곳이 요나서라고 하면서 선교 활동은 없으나 선교 사상은 있다고 동의한다. 남아연방의 선교학자 보쉬는 “요나는 선교 정신이 없는 사랑의 선교사”라고 했다.
화란의 선교신학자 베쿠일(J.Verkuyl)은 요나서가 이방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취급하는 신약의 선교적 명령에 대한 준비적 단계의 역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요나서에서 이방나라 특히 세계 최대의 도시에 관심을 두시는 하나님, 이방인의 심판과 구원을 의도하시는 선교적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현존(Presence)을 통하여 이방나라에 말씀하시던 하나님은 선지자을 니느웨로 파송하여 입으로 직접증거하게 한점에서 신약시대 이전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선교 활동이다.
2. 신약의 선교
a. 신약성서에 나타난 선교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향해 구체화 되어 오는 것이 구약의 선교개념이었다면, 신약의 선교는 이 지상명령을 수행해 나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뜻이 만민의 하나님이라는 보편성으로 계시되어있고, 신약에는 구약과 달리 모든 나라에가서 선교사업을 하라는 원심적 선교(Centrifgal)명령이 있다.
이러한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기에는 개종운동(Proselytizing Movement)을 통한 구심적 선교(Centripetal Mission)활동이 있었다. 특별히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지 못하고 지중해 연안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의 개종운동을 통해 선교가 수행되었다. 할례와 세례를 받음으로 공동의 신앙을 고백하고 율법을 지키게하는 생활애 들어가게 하는 이 운동은 일종의 타민족 동화운동 즉, 유대인화 운동이라 한다. 디아스포라들은 회당(Synagogue) 에 모여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인 70인역(LXX:Septuagint)에 의해 구약적 선교 활동을 수행하였다.
구약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개종운동과 활발하고 엄격한 신앙관으로 인기를 얻은 유대인들은 메시야 대망사상으로 그 막을 내린 다음 신약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은 계속성이 있다.
b. 복음서에 나타난 선교
복음서의 선교관을 보면, 우선 그들은 예수의위대한 구원이 당장에 이루어 질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임박한 죽으심과 부활이 있은 후에 그 나라가 완성될 수 있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이방인 선교를 반대하시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에만 제한 시켰음을 볼 수 있다(마15:24,막12:1,마10:6,마8:12,눅12: 32). 이스라엘에만 우선권을 두셨고 이방인에 대해거는 어둡게 묘사됨을 볼 수 있다(마6:7,마6:31,눅12:30,막10:33,눅21:24,4:27). 그러나 복음서 후반부에서 부터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전환점으로 세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⑴아들의 비유(마21:28-32)
⑵집주인의 비유(마21:33-45)
⑶혼인 잔치의 비유(마22:1-4)
이는 구원의 차서가 먼저 이스라엘에 나타내시고,그 후에 이방인에게 나타날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신 태도(요4:,눅9:51,10:25-37,17:11-19)에서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심판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 설것이라는 점과(마25:31) 그리고 이방인이 말세에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는 것을 알 수 있다(마8:11,22:41).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약속의 성취”라고주장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일관된 증언의 빛아래서 볼 때,역사의 종말이 이르기전에 하나님 나라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져야 한다는 예수의 선언(마 24: 14;막14:10)은 그 신빙성이 인정될 것이다. 또한 부활 후 주어진 세계 선교명령(마28:19-20)과 부합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생애에는 일관하여 흐르는 선교 정신이 있었다.
c. 선교의 대명령
복음서의 네 곳에 나타나있는 선교명령(마28:18-20,막16:15,눅24:44-49,요20:19-20)은 각기 강조점은 달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마태복음의 선교 명령을 희랍어 원문에 의해 분석해 보면 명령 동사는 “제자를 삼으라(μαθευσατε)” 하나 뿐임을 보여준다. 그 밖의 동사, “가서(πορευτεντεs)”,“세례를 주고(βαπτιξοντε)”,“가르쳐(διδακοντε)”는 모두 주동사에 소속된 분사동사(Participle)로 밝혀졌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표1>
선교목적 ⇒ 제자를 삼으라(μαθευσατε)
↗ ↑ ↖
선교방법⇒ 가면서 세례를주면서 가르치면서
(πορευτεντεs) (βαπτιξοντε) (διδακοντε)
여기서 “간다”는 것은 “출발한다(To Depat)”, “떠나다(To leave)”, “지경을 넘어가다(To Cross Boundary)”의 뜻이 있으며, 사회학적, 종족적, 문화적, 지리적 경계를 초월해서 간다는 의미이다.
“세례를 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메시야 왕국에 대항하는 죄, 죽음, 마귀의 권세를 묶어 버리는 의미가 있다.
“가르치는 것”은 단순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초보와 완전한 입문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에서 오히려 꼭 필요한 복음전도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를 삼는다”는 동사 형태는 신약에 네번 나타난다(마13:52, 27: 57,28:20,행14:21).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메시야 왕국에 함께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가서, 세례와 교육을 시키는 의의와 기능이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서 분리되거나 독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디까지나 제자를 삼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계하며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자삼는 일은 이스라엘에만 한정된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창조와(요1:3) 구속에 의하여(요3:17) 전 세계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 그 세계를 그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이 제자들의 의무가 된 것이다.
d.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
사도행전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선교 문서이다. 또한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지의 과정을 잘 알려주고 있으며, 선교 각분야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하다. 즉, 선교적 접근과 선교현장에서의 전파와 신생교회들의 조직등 여러 분야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예를들어 예루살렘교회의 시작, 유대전도, 이방선교의 시작, 이방 선교지의 설교들, 선교 전략과 신생교회의 조직들, 기타 많은 연구자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선교의 원동력인 성령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역동적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사도행전은 아래와 같은 개요로 구분할 수 있다.
⑴예루살렘에서 증거하는 성령(3장-7장)
⑵유다와 사마리아에서 증거하는 성령(8장-12장)
⑶땅끝까지 증거하는 성령(13장-28장)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은 행 1장 8절이다. 누가는 사도행전 전체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구절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했다. 곧 이는 기독교의 점진적인 확산을 다룬 것이다.
1장 8절의 중요한 두단어는 “능력”과 “증인”이다. 이 두단어는 사도행전 전체의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사건은 제자들을 증인으로 만들었고 그들이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바빙크(J.H Bavinck)는 사도행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선교의 근거를 다섯가지로 분류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첫째, 사도행전의 선교 역사는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의 역사로 묘사되어 있다.
둘째, 사도행전의 선교 활동은 종말론적인 사건들과 관련된 일종의 사건들 속에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
세째, 그리스도 자신이 선교의 주인이지, 교회가 선교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네째, 사도행전은 평신도 전파자들의 활동은 자주 언급하고 있다.
다섯째, 사도행전은 복음전파에 주요 역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교회생활 부분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정체되지 아니하고 이방인 세계로 급류하게 되었고, 구약과 예수의 말씀에서 암시된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을 활발하게 선전허게 된것이다.
C. 선교 개념에 대한 相異한 견해
개신교 선교가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 1815-1914)”를 경험 할 때만 해도, 이때까지 거의 모든 선교사들은 성경의 보수적인 해석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선교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부터 전통적인 선교 토착화 논쟁으로 부터 전통적인 선교 개념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하면서 피선교지의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는 토착화 논쟁으로 부터 시작하여 사회 관심으로 점차 발전하여 1960년대에는 인간화(Humanization)로, 1970년대에는 해방(Liberation)이 선교라는 정치화로 비약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선교 개념이 확대되고 변질되었으며 복음주의 입장과 에큐메니칼 입장이라는 양극화 현상이 가속화 되었다. 이 양자의 대립은 특정 집단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실 모든 교회, 모든 선교 협의회, 선교 단체들에 파급되어 있으며,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 개념에 대한 비교를 하고, 중재적 입장에서 새로운 선교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복음주의의 선교 개념
17세기 말에 일어났던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18세기 중엽에 영국의 복음주의 각성운동(Evangelical Awakening), 18세기 중엽 미국의 New England의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등의 복음주의 운동들은 19세기에도 그 여세를 몰아 곳곳에 복음주의적 각성운동과 선교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17세기 초 화란의 신학자인 보에티우스는 그의 저서 “Politica Ecclesiastica"에서 ① 이방인의 회심 ②교회의설립과 확장 ③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선교의 목적이라고 했는데, 현대의 선교 신학자 바빙크(J.H.Bavink)와 피터 베이어하우스(P. Beyerhaus)는 고전적 선교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보에티우스(G.Voe- tius)의 개념을 받아드여 선교신학을 수립하였다.
이 세가지 목적들은 각기 분리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 도래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예수의 부활과 그의 재림으로 인한 하나님나라 도래 때까지 주의 은총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복음주의 선교 개념은 1966년 미국 일리노이주 휫튼 대학에서 모였던 세계 복음주의 선교 연합회(Evangelical Foreinn Mission Assoia- tion)에서 채택된 휫튼 선언문과 1969년 독일의 튜빙겐 대학 선교학 교수인 P.Beyerhaus를 중심으로 작성된 프랑크프르트(Frankfort)선언문에 명시 되었다.
이러한 선언문을 통해 복음주의자들의 선교 개념을 알아볼 수 있는데, 첫째 동기는 그리스도의 지상 위임령(마28:19-20)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의 권위가 이의없이 받아들여지는 한에서 이 동기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둘쩨 동기는 우리가 선교하지 않으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영원히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확신감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이 겪는 가장 심한 진통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고, 인간의 가장 큰 요구는 죄인됨에서 구원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며,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은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형벌이다. 죄는 그 정의에 의하여 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죄는 개인적 인격적인 성격의 것이다. 따라서 전도자의 시선은 항상 개인에 향하며 그의 인격적 희생을 일으키려고 집중한다 ......오로지 인간은 일대일로서 구원될 수 없다.
위에서 제시된 대로 복음주의의 선교 동기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동시에 개인 구원에 촛점을 맞추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측의 주장과는 달리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교회의 지접적인 참여문제에 이르러서는 소극적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구조적 변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전도의 결과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혁명보다는 점진적으로 인격 성숙이 곧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주의의 선교 개념에 있어서는 사회구원보다 개인구원과 개인 영혼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복음주의 선교 개념에서 더 강조할 것이 있다면 타종교에 대한 견해이다. 만일 타종교인이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이교도적인 자신의 과거를 단호히 떠나서 복음의 메세지를 조건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복음주의 선교 개념은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동일하게 주장하는 견해라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에큐메니칼 선교 개념과 대립된 독특한 복음주의의 선교 개념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이 복음주의의 선교 개념이 집약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1966년 베를린(Berlin)선교 대회와 1966년의 휫튼(Wheaton) 선언과 1970년 프랑크프르트(frankfort)선언, 1974년 로쟌(Lausanne) 선언, 1975년 서울선언의 내용이 근간을 이룬다.
결국, 복음주의 선교 개념의 핵심은 복음의 선포와 회심운동,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와 헌신에 있음을 알 수 있다.
2. W.C.C의 선교 개념
1910년 에딘버러(Edin Burgh)에서 열린 선교 대회에 이르러 전통적 선교 개념은 퇴색하기 시작했다. 이 대회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의 교리적 기초를 놓은 대회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모든 교파가 서로 화해하고 단합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나머지 분열의 원인중에 하나인 성서의 무오설과 절대성을 부인하게 되었으며, 사회 봉사 문제를 선교의 한 과제로 인정하게 되었다. 에딘버러 대회의 역사적 의의는 에큐메니칼적 입장과 복음주의적 입장이라는두가지의 상반되는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에큐메니칼 입장에서 보면 에딘버러 대회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본격화 되고 신학체제가 수립된 결과를 가져왔으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복음주의 신학에 커다란 위협을 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딘버러 대회의 결정으로 1921년에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조직되어 1928년 예루살렘에서 첫 회의를 가졌으며 이회의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영혼만을 위한 메세지만이 아니라 개인이 살고있는 사회조직과 경제관계, 세계을 위한 메세지도 포함한다.”고 하면서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분리시키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대회는 사회구원이 부각되므로 복음전파의 의무를 상당히 감축시킨 대회가 되었다. 이런 대회를 거치면서 세계교회협의회(W.C.C)는 공식적으로 1948년 암스텔담에서 전세계의 90개국으로 부터 220개 교파이상이 회원이 되었다.
1958년 독일에서 출판된 게오르그 F.휘체돔(George F.Vicedom)의 저서인 “Missio Dei”(신의 선교)는 1965년 이후 미국 신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휘체돔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활동의 유일한 근거라고 하면서, 이전 까지의 교회론적 선교의 개념을 삼위일체론적 선교 개념을 바꾸었다. 이는 선교는 교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근거한다는 주장이다. 더나아가서 그는 “선교와 교회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안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교와 교회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뉴델리 대회(1961)문서와 웁살라 대회(Uppsala Draft p.33)에 나타난, W.C.C의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 개념은 바이스돔(휘체돔)의 원래 의도에서 벗어난듯 보인다. 특히 1967년 W.C.C산하 서구 및 북미 실행위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Church for Other)라는 의제하에 ‘회중의 선교적 구조’(Missionary Structure of Congregition)라는 보고서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사회적 조화의 의미인 ‘샬롬’( :히브리어로 평화의 뜻)을 건설하는 것이며, 이 샬롬은 인종의 해방, 노사관계에서의 인간화, 농촌지역의 개발, 직업윤리의 탐색, 정직과 성실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선교의 근거를 세상에서 찾겠다는 것으로 우선권(Priority)이 뒤바뀌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결국 “교회는 선교의 한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는 그가 받은 “샬롬”을 세상에 나누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기능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서 세상적인 세상적인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이기에 교회가 이런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쓸모가 없어지고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은 교회를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로 보게된다.
W.C.C의 선교 개념은 1968년 스웨덴 웁살라(Uppsala)에서 개최된 제 4차 총회에서 가장 분명하게 신학체제를 수립하였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의 주제로 열린 이 대회는 선교의 목교를 인간화(Humani- zation)로 간주하여 “새 인간성(New Humanity)”의 성취를 강조하였다.
또한 Wilingen에서 언급한 “Missio Dei”의 개념을 구체화 시키게 되었고, “증거” 보다는 “봉사”를 강조했으며, 종교적인 복합세계(Plusa- listic World)에서는 “공존” 보다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적극성을 보임을로써 Maxism과 대화를 하게되는 사회 정치적인 선교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웁살라 대회의 영향은 1973년 방콕대회에 그대로 반영 되어 나타난다. 즉, 방콕 대회에서 등장한 주제인 오늘의 구원(Slavation Today)은 “선교의 목표로서의 인간화”(웁살라)의 재 천명이었다.
이 대회의 주제에는 우선적인 네가지 관심사가 있는데, 첫째는 맑스주의자와 인본주의자,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세속사회의 역사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해하시는지의 여부이고, 셋째는 구주로서으 그리스도의 본질과 신실성에 대한 토의이며, 넷째로는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복음선포의 목적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인 것이다.
이 대회의 제 2분과 위원회의 보고서는 주제에 명시된 “구원”이란 개념이 사회적인 관심이란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⑴착취로부터 경제 정의로
⑵압제로 부터 인간의 존엄성으로
⑶소원(疎遠)으로 부터 결속(結束)으로
⑷절망으로 부터 소망으로
결국, 방콕 대회는 해방의 신학을 외침으로 W.C.C가 독재정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오늘의 구원”은 사회, 정치적인 행동에 의해 성취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죄악의 문제 해결과 하나님과의 화해의 역사가 선행되지 않고, 사회구조악의 제거와 “뉴 휴메니티”의 구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미래적 종말론의 긴박감과 약동하는 신생의 감격과 헌신을 볼 수 없다.
3. 새로운 선교 개념
선교의 목표로서의 ‘인간화’와 ‘복음화’의 깊은 차이를 좁히기 위한 노력으로 복음주의에서 새로운 선교의 개념을 모색하게 되었다. 새로운 선교의 개념은 복음적 명령(Evangelistic Mandate)과 함께 문화적 명령(Cultual Mandate)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해야 한다는 아더 글라서 교수에 의하여 주창 되었다.
그는 선교 개념의 양극화 현상을 우선, 있는 그대로 수렴하고 성서의 빛 아래서 연구했다. 그는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을 문화적 명령으로 받아들였으며, 선지자들의 계속적인 사회적 책임에 대한 메세지와, 예수의 설교와 교훈과 봉사 속에서 그 중요성이 입증되었고, 사도들의 생애와 교훈에서도 뒷받침 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복음전도 명령은 예수의 최후 명령으로서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세계내에서 죄악으로 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이라고 했다. 기독자들은 문화적 명령과 복음전도 명령을 예수의 왕권이 전세계에 미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성서적 명령(Biblical Mandate)으로 받아들여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라서의 주장은 양극화 현상을 보여준 기존의 주장들이 모두 재점검 받아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 즉, ‘인간화’와 ‘복음화’를 모두 중요하며 이것을 기독자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밝힌것이다.
죤 스탓트(John R.W.Stott)교수도 선교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선교를 복음선포와 사회봉사로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독일 복음주의 신학자 바이엘하우스는 이 제안에 대해, 사회변혁이라는 기독자의 활동은 구원의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자들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바이엘하우스는 1970년 프랑크프르트선언(Frankfort Declaration)을 통해 복음적 의무의 우위성을 신학적으로 강조하면서 선교의 본질이 사회적 또는 정치적 요인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인간화’가 선교의 목적이 아니라 복음화운동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이 선언문의 핵심은 타종교에 있는 Cosmic Christ이론을 공격하며 만인구원론을 반대하고 미래의 종말론의 해소를 논박하고 있다.
수평적 임무를 좀 더 보완하여 새로운 선교 개념을 정립한 대회가 바로 1974년 로쟌(Lausanne) 대회이다. 이 대회는 현대 복음주의전도 협의회 중 가장 괄목할 만한 회의로서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에 커다란 도전이 된 대회였다.
조종남박사는 이 대회의 의의를 말하면서,는 성서에 입각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천명하였다는 점과 선교에 진취적 태도를 보이면서 세계복음화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 역사적 모임이라고 역설했다.
로쟌 대회이후로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분명해졌다. 즉 과거에 무책임하고 편협하게 사회문제에 등한시 했던 것을 반성하고, 복음전도와 아울러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갖으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가 중요한 만큼, 이웃과의 올바른 수평적 관계도 깊이 인식되어야함을 강조하였다하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하게 된다.
새로운 선교 개념이란 로쟌Ⅰ,Ⅱ에서 천명한것 처럼 복음전도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도 문화적 명령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것을 말한다. 이 양자가 균형있게 발전할 때, 온전한 선교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Ⅲ. 선교적 측면에서의 아시아의 상황
A. 아시아 문화의 특성
1. 문화 이해
문화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한마디의 정의로 문화의 실체를 규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1952년 A 크로버와 C 크락혼은 문화에대해 내려진 175개의 정의를 검토하고 새로운 정의를 내렸으나 그것도 또 하나의 추가적 정의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문화의 실체를 쉽게 규명할 수 없다고 해도 그 주요 성격을 몇가지로 들어 설명할 수는 있다. 먼저 문화는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생활과 직결되는 것으로써 언제나 “사회적 성격”을 띄게 된다. 개인이 그 문화를 자기네 방식 대로 쓸 수 있고 그 문화의 어떤 요소를 바꿀수도 있으나 그들이 사용하건 바꾸건 간에 그 문화 자체는 사회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이 수용하고 또 전달하는 사회적 유산이다.
문화와 사회적 실제는 늘 공존한다. 나아가서 문화는 또한 인간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성취로써의 문화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것이다. 문화는 곧 “가치의 세계”이다.
문화의 또 다른 특성은 “어느 문화에나 공존하는 다양성”이다. 한 문화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들은 어느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가치가 다양한 것은 인간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합성 속에서 문화는 항상 평화와 번영, 정의와 질서, 자유와 복지, 진리와 미, 도덕적인 선을 수반하는 과학적 진리, 실용가치가 있는 기계문명등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선을 엮을 수 있는 보다 큰 선이나 절대선이 없다면 문화는 악순환을 거듭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절대선의 대상으로써의 종교와 신앙이 중요한 역활을 해온 것이다.
2. 종교의 다양성
문화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고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다”라고 말했듯이, 사실 종교와 문화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폴 니터(Paul Knitter)도 신학안에서의 문화의 중요성을 “그리스도교가 역사적 문화에 적응하지 않거나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는 무의미한 추상적 세계속으로 점점 더 깊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제 2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문화관을 문화에로의 적응(adaptio)에서 문화에로의 육화(incarnatio)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복음은 단지 피상적으로 문화에 적응하는 것에서 더욱 깊이 들어가 문화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육화의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의 문화적 상황은 매우 다양하지만 문화적 특성은 아시아의 다양한 종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다른 대륙들도 나름대로의 민속종교와 토착신앙을 가지고 있다 아시아에 있어서 종교성은 다른 대륙 보다 월등히 높다. W.뵐만도 “아시아는 가장 종교적인 대륙이다. 모든 세계 대종교 들은 아시아에 그들의 요람을 가지고 있다. 3일신교(유다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는 서아시아에서 발생하였고 주기적 윤회와 재생(부활)의 교리를 갖는 도덕 종교들(힌두교,불교,유교)은 동아시아에서 발생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일 뿐아니라 또한 오늘날의 경험으로도 사실이다.”라고 말함으로서 아시아의 탁월한 종교성을 확인해 준다.
아시아 종교중에서 불교는 아시아 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나 있다. 박문선은 J.M 기타가와의 말을 인용하여, “불교는 범아시아 종교로 발전,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동화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극동지방에서 아시아 문화의 또 하나의 주류는 유교이다. C.S송은 공자의 문화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文) 혹은 문화는 진리의 본원(本元)으로 주나라로 부터 공자의 시대에 이르기 까지 중국의 문화를 창조하고 유지시켜 왔다. 덕과 마찬가지로 문(文)도 하늘, 상제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문은 하늘의 의지이며 방법이며, 명령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시아 문화 특히 종교와 연관된 문화들은 아시아에서 역사오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교 문화는 아시아 문화의 독특한 특성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3. 빈곤
오늘날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빈곤, 불의, 착취의 삶을 선고 받고 있다. 서구 식민주의의 착취와 억압의 영향이 정치제도,사회적 인습, 문화적 관례 등에 남아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아시아인의 빈곤은 자연적인 재난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인간 행위의 결과이고 사회적, 경제적 불이 때문이다.
아시아가 속해있는 제3 세계의 가난은 ‘다국적 기업’과 소위 ‘종속이론’에 의해 그 구조적 원인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 제3세계 경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아시아에 살고있는 20억 인구의 70%내지 80%가 가난한 농민들이다. 또한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로인해 사회적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른바 구조적 모순을 극복해보려고 애쓰고 있다.
B. 아시아 종교의 상황
1. 아시아 종교인 수
1989년 현재 세계인구에 비례해본 아시아의 중요 종교와 백분율을 보면,아시아 인구가 2,915,692,390명으로 세계인구 5,071,883,320명의 75.7%를 차지하고 있으나 반면에 개신교의 비율은 0,8%에 불과하여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계인구에 대한 기독교인 전체의 비율과 비교할 때 아시아인이 약 1/7의 약세를 보이고 있으며, 개신교만은 1/6에 지나지 않는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아직까지도 아시아는 이슬람교,불교,힌두교의 장이라고 해도 광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선교의 시급성이 있다.
2. 아시아의 문화적 지역 분류
“아세아를 통상적으로 극동,동남,근동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이것은 거수 위주의 개념이며 오늘날은 넓은 의미에서 아시아를 다음과 같이 4개의 문화권으로 분류하여야 할 것이다.
⑴서부아시아 - 유대와 아랍문화권
⑵동남아시아 - 혼합문화권(남아시아 포함)
⑶동북아시아 - 비서구 문화권
⑷남태평양 연안 - 서구 문화권
a. 서부아시아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예멘,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등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인구가 1억 7천만 정도이며 강력한 반 기독교 지역으로 이슬람교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b. 동남 아시아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실론, 부탄, 버마, 태국, 라오스, 크메르, 월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등의 지역으로 18세기 부터 시작된 서구의 식민지 정책으로 문화적인 혼합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심각한 서구 문화에 대한 반발이 고질화되고 있으며, 기독교를 식민지 정책의 선발대로 생각하는 사조가 뿌리를 박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는 이지역에서 토착 종교로 큰 세력을 얻고 있으며, 부탄과 같은 나라는 기독교 선교를 완전히 금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태국, 인도네시아는 급격한 기독교의 증가를 보여주고 있어서, 기독교 선교의 희망적인 면도 엿볼 수 있다.
c. 동북아시아
중국, 몽고, 한국, 북한, 일본, 대만, 홍콩의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비서구 문화권을 가진 자체문화의 특성이 뚜렷하며 언어에 있어서는 국가마다 단일한 언어를 가진 지역이다.
인구만 해도 9억 2천만 정도로 세계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는 단일 지역으로서는 세계 최대의 선교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넓은 선교지역이었던 중국은 오늘날 봉쇄상태에서 정치적 해빙기를 소나마 맞음과 동시에 기독교의 접근 가능성이 생겼고, 차후 선교의 주된 관심지가 되고 있다.
d. 태평양 연안
호주, 뉴우질랜드, 솔로몬군도, 피지, 동아군도, 브르나니, 키프러스등의 지역을 말한다. 거리의 단축이 교통,통신의 발달로 이루어지자 아세아권 속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움직임이 이들 가운데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이 이들 속으로 진출하는 작업이 기술협력으로 먼저 나타났는데, 괌, 브르나이를 비롯한 여러곳에 눈에 띌만한 진출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은 대개 기독교로 개종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곳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보다는 그들이 지접적으로 아세아 선교의 일익을 담당하도록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3. 아시아 종교 분포도
<표2> 아세아 각국 종교 분포도
C. 토착화론의 강한 대두
토착화(indigenization)란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편에서 기존의 문화에 적절히 적응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복음의 문화적 전위(轉位)의 역사이다. 복음이 어느 문화권에 선포되든지 복음이 그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의 수용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이런 복음과 문화의 만남에는 현상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여러가지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 박근원 교수는 “복음과 문화의 만남으로 창조적인 에비지가 형성되어 그 문화가 생기를 되찾고 복음도 그 문화 토양에서 꽂을 피워야 한다”고 말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도 아시아 신학자들이 서구 사람(European)이나 바르트주의자가 되지말고 아시아 상황에 뿌리내린 아시아 신학자들이 되라고 격려한다.
이 같은 움직임 속에 최근의 일부 아시아 신학자들은 서구신학에서의 탈피를 위해 신학적 전위를 시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힌두 문화권에서 나타난 인도신학자 토마스(M.M. Thomas), 사마르타(Stanley J. Samartha), 파니카(Raimondo Panikkar)와 소승불교권에서 태어난 스리랑카의 실바(Lynn A. de Silva), 버마신학자 킨마웅(Khin Maung Din), 일본 출신 태국 선교사 고슈케 고야마(Kosuke Koyama), 필리핀 원시종교인 애니미즘 문화권에서 나타난 나시필(Emerito P. Nacpil), 대승불교권이 낳은 대만신학자 송천성(C.S.Song)과 일본신학자 기다모리가조(北森臧),야기 세이찌(八本誠一)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자 서남동등이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희석시키, 아시아 선교에 있어서 전통적인 선교에 심각한 도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토착화라는 것은, 복음의 본질이 회손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빙크도 “토착화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복음이라는 낯설 수 밖에 없는 관습이나 의식에의 적응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한 적응은 거의 모두가 결코 본질적인 통일성을 이룰수 없는 관습들의 혼합체로 이루어진다.” 고 지적하였듯이, 토착화를 이룬다는 미명하에 기독교 혼합주의를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