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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대한 고찰 - 고영섭 교수 - 수정본 파일| 신라불교사특강
Ⅰ. 문제와 구상 불교 전통에서는 우리 인식의 기반을 흔히 심․의․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심의식은 각기 제8식인 아뢰야식(저장의식)과 제7식인 말나식(사량의식) 그리고 제6식인 요별경식(분별의식)으로 해명하고 있다. 그리고 구역 유식의 ‘인식’(認識)과 달리 신역 유식의 ‘전변’(轉變)을 기반으로 하는 성유식론에서는 이들을 각기 초능변과 제2능변과 제3능변으로 해명되고 있다. 이들 의식은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수행에 의거하여[轉識] 전5식, 제6식, 제7식, 제8식의 유루(有漏) 의식을 넘어서서 성소작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대원경지의 네 무루(無漏) 지혜로 탈바꿈한다[得智]. 특히 무루의 지혜는 자성청정심이자 법계체성지인 불심(佛心)과 불지(佛智)가 된다. 이러한 구도는 일심(一心)과 출전(出纏) 및 재전(在纏) 여래장(如來藏)과 아뢰야식(阿賴耶識)과 긴밀하게 상응하고 있으며 아뢰야식이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서 이해될 때는 다시 제9 아마라식(阿滅識)이 상정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미혹의 윤회를 벗어나 깨침의 증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심 즉 마음 개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요청된다. 이 글에서는 심 즉 마음 개념의 어원적 근거와 개념 풀이, 역사적 전개와 텍스트별 용례, 인접 개념과의 관계 및 현대적 의미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우리 인식의 근거에 대해 보다 심화된 이해를 도모해 보고자 한다.
1. 심의 어원적 근거
우리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심’(心)은 범어로 ‘찌따’(citta)와 ‘흐리드’(hṛd) 및 ‘흐리다야’(hṛdaya) 두 갈래의 어원이 있다. 앞의 찌따는 ‘포개어 쌓다’를 나타내는 √ci 혹은 ‘생각하다’를 나타내는 √cit를 어근으로 한다. 즉 떨어져 있는 대상을 사고(緣慮)하는 주체와 작용을 가리킨다. 찌따는 한자문화권에서 ‘심법’(心法) 혹은 ‘심사’(心事)로 번역되었고, ‘지다’(指多), ‘질다’(質多), ‘질다야’(質多耶), ‘질제’(質帝) 등으로 음역되었다. 여기서 찌따는 마음의 주체인 심왕(心王)과 마음의 작용인 심소법(心所法)의 총칭으로 물질(色法) 또는 신체(身)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작용은 심왕과 심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여 심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심소(心所, caitasika, caitta)는 바로 이 심(cetas)에 소속을 나타내는 접미사 ‘이까’(ika)를 덧붙인 것이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는 심법 1개로부터 이루어지는 심소의 갯수를 대지법(大地法, 10종)․대선지법(大善地法, 10종)․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6종)․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2종)․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10종)․부정지법(不定地法, 8종)의 46종으로 상정하고 있다. 호법(護法)계의 유식학통에서는 심법 8개로부터 이루어지는 심소의 갯수를 변행(遍行, 5종)․별경(別境, 5종)․선(善, 11종)․번뇌(煩惱, 6종)․수번뇌(隨煩惱地法, 20종)․부정(不定, 4종) 심소 51종으로 상정하고 있다. 앞의 찌따와 달리 뒤의 흐리다야는 신체의 심장(心臟)을 가리킨다. 이것은 한율타(汗栗馱), 간율대(肝栗大), 간율다(干栗多), 흘리다야(訖利多耶), 흘리타야(紇哩陀耶), 흘리나야(紇哩娜耶), 흘벌야(紇伐耶)로 음역되었고, 육단심(肉團心), 연려심(緣慮心), 진실심(眞實心), 견실심(堅實心) 등으로 번역되었다. 중성명사인 흐리다야의 원어는 구유심(具有心), 정신(精神), 심장(心臟)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마치 나무의 중심과 같이 모든 사물이 갖추고 있는 본질이자 중심에 처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동시에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진실심(眞實心)이자 여래장심(如來藏心)이며 사고 작용(緣慮)을 갖추지 않은 마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정신작용을 뜻하는 ‘찌따’와 신체의 심장을 뜻하는 ‘흐리다야’는 전혀 다른 의미 영역을 지닌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전자는 마음의 주체이자 심리작용의 주체로서 이 세계를 왕과 같이 지배 통솔하는 존재라고 해서 심왕법(心王法)이라고 일컫는다. 후자는 심장 혹은 염통과 같이 사고 작용을 갖추지 않은 마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의 의미 영역을 전혀 다른 두 언어로 표현하는 인도문화의 ‘정신적 경향’과 이들 모두를 ‘심’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중국문화의 ‘즉물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2. 심 개념의 풀이
인식의 주체이자 모든 것의 근거인 심왕법(心王)은 심(心, citta)과 의(意, manas)와 식(識, vijñāña, vijñapti)이라는 세 이름으로 불려진다. 이들은 모두 육식(六識)을 일컫고 있지만 ‘심’과 ‘의’와 ‘식’ 세 개념은 맥락에 따라 달리 사용되어 왔다. 근본불교시대에는 육식에 상응하는 심, 의, 식 세 개념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했다. 아함경에서는 단지 심과 의와 식은 이름은 다르지만 그 몸체(體)는 하나라는 정도로 표현했을 뿐이다. 즉 심을 표현할 때 어떤 때는 ‘심’(心)이라 했고, 어떤 때는 ‘의’(意) 또는 ‘식’(識)이라고 했다. 어떤 곳에서는 심과 의와 식을 하나의 정신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심과 의와 식의 셋을 구별하여 서로 달리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크게 보아 근본불교시대에는 이들 세 개념을 자세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했다. 하지만 아비달마불교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들 셋에 대하여 ‘이름은 다르지만 몸체는 같다’는 주장과 ‘이름도 다르고 몸체도 다르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나아가 대승 유식의 호법(護法) 계통에서는 심-의-식을 구별하여 팔식별체설(八識別體說)을 주장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찌따(citta)는 어원적으로 갖가지의 대상을 인식(認識)하는 것이자, 집기(集起)하는 것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육식(六識)을 가리킨 것이고, 후자의 경우 특히 유식학통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의미한다. 즉 과거의 경험을 모아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미래의 제법(諸法)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집기심(集起心)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마나스(manas)는 사려하는 작용으로 ‘사량심’(思量心)이라고도 불리어 진다. 유식학통에서는 말나식(末那識)을 가리킨다. 비즈냐나(vijñāña)와 비즈냡띠(vijñapti)는 ‘요별’(了別)이라고 번역되며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어진 작용을 가리킨다. 이것은 요별심(了別心), 연려심(緣慮心), 여지심(慮知心)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들 심은 모두 육식(六識)에 상응한다. 또 찌따는 색(色, 물질)과 신(身, 육체)에 상대하여 언급할 때 사용된다. 심왕인 찌따는 유위와 무위의 일체 제법을 색법, 심왕법, 심소유법,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무위법(無爲法) 다섯으로 나누어 보는 아비달마 존재론인 오위(五位) 중의 하나이다. 오위의 중심인 찌따는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중의 수온(受蘊, 감수, 감각작용), 상온(想蘊, 지각, 표상작용), 행온(行蘊, 형성, 의지작용), 식온(識薀, 분별, 인식작용)에 상당한다. 즉 통일된 심의 주체인 육식 혹은 팔식을 가리켜서 말한다. 심과 의와 식 셋에 대하여 소승의 설일체유부 등에서는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승의 유식학통에서는 제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심이라고 일컫는다. 찌따는 쌓고 모음(積集)의 뜻을 머금고 있으며 제법을 내오는 근본 몸체이므로 또한 집기심(集起心)이라고 일컫는다. 즉 아뢰야식이 종자를 축적하여 능히 현행(現行)의 뜻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육식은 ‘식’(識)이라고 부르며 요별하고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 제칠 말나식은 ‘의’(意)라고 부르며 사유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심의 주체와 종속 작용이 나누어질 때 전자를 심왕(心王)이라 하고 후자를 심소(心所)라고 한다. 육식 혹은 팔식은 심왕이 되고 이들을 따라서 생겨나는 미세한 정신작용이 곧 심소이다. 불교에서는 이 심(心)과 물(物)의 존재에 대하여 둘 사이의 상보(相補)와 상성(相成) 관계를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한 측면에서만 논하지 않는 불교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때문에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파악하는 불교는 유심론이 아니며 또한 유물론도 아니다. 일종의 공무자성론(空無自性論)에 관련되기에 색과 심은 둘이 아니다(色心不二)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천방법 상으로 볼 때 불교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심의 주체성이다. 때문에 불교는 늘 유심론이라고 간주되어져 왔다. 흐리다야(hṛdaya)는 본디부터 심장을 의미했다. 특히 대일경소 권4에서는 육단심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반야심경에서 설하는 ‘심’은 곧 ‘의’(意)이니 반야 개공(皆空)의 핵심 골수(心髓)이자 핵심 요체(精要)를 일컫는다. 밀교에서는 범부의 한율타를 관상하여 여덟 잎으로 된 연꽃[八葉蓮花, 心蓮]이라 했으며, 사람들을 가르쳐 자기의 불신(佛身)을 현현케 하므로 중생의 자성진실심(自性眞實心)을 일컬어 한율타라 했다. 여덟 꽃잎[瓣]의 육엽(肉葉)으로 되었다하여 육단심이라고도 번역하였다. 이것은 또 중심의 마음(中心), 심의 정수(心髓)의 뜻을 가리키기도 한다.반야심경에서 ‘심’은 ‘흐리다야’(hṛdaya)이며 여기에는 핵심, 심수(心髓)의 뜻이 있다. 또 인간 존재를 오온으로 볼 때 심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감정과 의지는 그 속의 수와 행에 상당하며 나아가 심소 속에서 분석되어 지고 있다. 심은 일반적으로 지성(知性), 감성(感性), 의지(意志) 등의 총칭으로서 사용되며 색법(色法)과 신체(身體)와 구별되어 왔다. 또 의식 아래에 있는 심층 심리라고 설해지고 있다. 특히 설일체유부에서는 심법과 색법을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였고, 또는 근(根, 감각기관)과 경(境, 인식대상)과 식(識, 인식주관)을 엄밀히 구별했다. 한편 대승의 유식학통은 색법도 식이 나타난 것으로서 심에 소속시키고 있다. 유식학통에서는 의식 아래에 있는 마음의 아뢰야식도 설하고 있다. 오늘의 과학적인 견해로서는 색법을 뇌의 소산으로 여기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불교에서는 색법이 심법을 낳는다는 견해는 없다. 다만 상키야 학파에서는 현실의 정신작용을 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Ⅱ. 역사적 전개와 텍스트별 용례
1. 심의 역사적 전개
1) 근본불교에서 심의 전개 아함경에서는 일체 제법을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의 삼과(三科)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존재를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 다섯 가지로 분류한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을 보여주고 있다.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의 개별적 속성인 사대(四大)와 이들의 총화인 사대소조색(四大所造色)으로 이루어진 색온에 대응하는 수상행식온은 심에 상응하는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수 및 감각작용을 하는 수온, 지각 및 표상작용을 하는 상온, 형성 및 의지작용을 하는 행온, 분별 및 인식작용을 하는 식온은 근본불교의 심법(心法)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하여 잡아함경에서 연기된 제법(諸法)인 오온은 변화하고[無常]하고, 괴롭고[苦], 실체가 없으며[空],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非我]고 설하는 것에서 우리는 이후 전개되는 불교 인간관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일체를 구성하는 열 두 가지 장소(十二處)인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및 육식(六識)을 통섭한 십팔계(十八界)론은 불교의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이처에서 ‘처’는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의 생장처(生長處)이다. 즉 생장처란 마음과 마음작용을 발생시키고 성장시키는 곳이다. 그러니까 ‘아야따나’(āyatana)는 인식주체인 마음과 그것의 구체적인 활동인 마음작용이 일어나고 자라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육근인 형체와 색깔로 이루어진 색경(色境)을 지각하는 안근(眼根), 소리와 음악으로 이루어진 성경(聲境)을 지각하는 이근(耳根), 냄새와 향기로 이루어진 향경(香境)을 지각하는 비근(鼻根), 맛과 미감으로 이루어진 미경(味境)을 지각하는 설근(舌根), 대상과의 감촉으로 이루어진 촉경(觸境)을 지각하는 신근(身根), 감각대상과 비감각적 대상으로 이루어진 법경(法境)을 지각하는 의근(意根)은 심에 상응하는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섯 감각기관과 여섯 감각대상 사이에서 행위하고 활동하는 육식(六識)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은 심에 상응하는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삼과설 속에서 특히 오온 속의 수상행식온 사온과 십이처의 육근과 십팔계의 육식이 심에 상응하는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심은 번뇌와 업의 그릇이면서 동시에 대척점에서 논의되어 오기도 했다. 상응부경에서는 심에 대해 루(漏, āsrava), 결(結, saṁyojana), 박(縛, bandhabana), 수번뇌(隨煩惱, upakleśa), 취(取, upādāna), 개(蓋, nīrvaraṇa), 불선근(不善根, akuśalamula) 등의 여러 번뇌들과 관련하여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항상 자신의 심을 [다음과 같이] 관찰해야만 한다. ‘이 마음은 오랜 시간 탐냄[貪慾]에 의해, 성냄[瞋恚]에 의해, 우치[愚癡]에 의해 오염되었다.’ 비구들이여! 심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중생은 오염되었고, 심이 청정해졌기 때문에 중생은 청정하다.” “비구들이여! 이 심은 빛나고 있다. 또한 그것은 객진번뇌로부터 벗어나 있다.” “비구들이여! 이 심은 극히 빛나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 수번뇌(隨煩惱)에 의해 염오되어 있다. [법을] 듣지 못한 범부들은 이것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심을 수습하지 않는다고 나는 설한다. 비구들이여! 심은 극히 빛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수번뇌로부터 벗어나 있다. [법을] 들은 성제자들은 이것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심을 수습한다고 나는 설한다." 경문에서처럼 심은 모두 번뇌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심은 ‘더럽혀졌다’[漏, āsrava]는 것 즉 대홍수와 같은 윤회의 바다에 떠 있는 배 속으로 물이 유입해 들어오듯이 외부의 불순한 요소가 심으로 유입해 들어오는 ‘루’인 번뇌와 함께 거론되고 있다. 외부에서 신체에로 유입하는 것은 신구의를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때문에 심으로의 ‘유입’은 ‘윤회의 원인’ 혹은 ‘행위의 잠세력’인 번뇌와 업과 동일시되어 왔다. 이처럼 경문에서는 수행과 해탈에 장애가 되는 불선한 요소인 번뇌가 심에 유입되어 온다고 설한다. 이때 번뇌는 심과 상응하는 심리적 작용이기도 하다. 업 역시 사성제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리[samudaya-satya, 集諦]인 집성제에 포섭된다. 십이연기에서 번뇌의 범주는 ‘무명’(無明)과 ‘애’(愛와) ‘취’(取)가 해당되면 업의 범주는 ‘행’(行)과 ‘유’(有)가 속한다. 나머지 7지는 고통의 결과에 대한 진리[[duḥkha-satya]에 해당된다. 업이 재생의 직접적 조건과 그 형태로서 간주된다면, 번뇌는 중생을 윤회 자체로 이끄는 더 근원적인 원인 또는 일차적 동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번뇌’와 ‘업’에 대한 분석과 해석의 지속은 이해의 심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심의 본질에 대한 상이한 이해로부터 다양한 번뇌설이 제기되었고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수행체계가 정립되었다. 그리하여 번뇌의 대립항인 심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노력에 의해 불교 수행체계가 완비될 수 있었다.
2) 부파불교에서 심의 전개 부파불교 수행자들은 존재의 분석을 통해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은 석존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설에 위배된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윤회의 주체로서 상정한 존재를 끊임없이 쪼개고 나누어 갔다. 무아와 윤회의 양립을 해명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결국 유위와 무위 범주의 분리로 나타났다. 즉 인과법을 넘어서는 무위의 범주와 인과법으로 이루어진 유위의 일체 제법을 정치하게 분류하여 5위 75법이라는 체계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그들은 윤회의 주체를 각기 설정함으로써 무아설로 오해된 존재 이해에 대한 활로를 열고자 했다. 즉 나의 실체성은 부정하면서도(我空) 법의 존재성은 인정하려고[法有] 시도하였다. 다시 말해서 법의 존재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생사 윤회하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삼계를 나타내는 원인이 되는 식인 근본 상좌부의 유분식(有分識),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가 끊임없이 상속된다는 오온상속설(五蘊相續說) 혹은 지금 생을 끝내고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중유의 몸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다시 태어날 인연을 구한다는 유부의 중유설(中有說), 번뇌와 업의 인연으로 자주 여섯 갈래 길에 왕래하는 개인 존재인 독자부의 푸드갈라(補特伽羅, 非卽非離蘊), 동일한 본질로 연속해 작용하고 있는 미세한 의식인 경량부의 일미온(一味蘊, 根本蘊), 끝없는 생사를 다하여 금강이 견고하여 다른 것을 깨뜨리는 것과 같이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애는 금강유정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여섯 의식 이상의 미세한 의식인 화지부의 궁생사온(窮生死蘊), 모든 의식이 의지할 곳이 되는 아뢰야식인 대중부의 근본식(根本識) 등이다. 이처럼 부파의 이론가들은 무아론을 견지하면서도 어떠한 주체의 지속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담론들은 윤회론과 무아론이 충돌되지 않으면서 ‘영혼’을 대신할 수 있는 ‘원리’ 개념을 발견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아론을 견지하면서도 어떠한 주체의 지속이 가능함을 설명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노력은 다양한 작용을 지닌 심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크게 두 가지의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경량부에서는 하나의 마음(心王)이 갖가지로 작용한다(심소는 심왕과 따로 존재하지 않음)고 해명하였다. 이와 달리 설일체유부와 유식학통에서는 여러 가지로 존재하는 마음과 마음작용의 다양한 조합으로 생겨난 다양한 심리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후자는 그 속의 중심이 되는 것을 ‘심왕’이라고 부르며 그것과 함께 생겨나는 개개의 마음 작용을 ‘심소유법’(心所)이라고 하였다. 심왕은 식이고 심소는 반드시 심왕과 함께 생겨나며, 그것은 반드시 선한 것이며, 번뇌 등으로 분석되어져 있다고 했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 따르면 그 셈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설일체유부에서 심왕은 1종(六識 一體), 심소는 46종, 호법 계통의 유식학통에서 심왕은 8종, 심소는 51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러한 법수들은 현상으로는 마음이지만 그 본성은 현상적인 존재방식을 뛰어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파불교의 심에 대한 담론 역시 번뇌설과 함께 이루어졌다. 번뇌가 심을 오염시키는 심리적 요소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이 때부터였다. 번뇌는 ‘수면’(隨眠, anuśaya)의 개념으로서 심을 괴롭히거나 오염시키는 여러 심리적 요소 가운데에서 상위개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번뇌의 미세한 측면을 가리키는 수면과 번뇌는 유부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때문에 유부의 논서에서는 수면을 미세하게 잠재된 측면인 ‘미세’(微細, aṇu), 애기가 유모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 또는 모유가 아기를 크게 만드는 것과 같은 ‘수증’(隨增, anuśerate), 몸과 마음의 상속을 따라 생겨나는 것처럼 혹은 새가 물고기를 따라가는 것과 같은 ‘수박’(隨縛, anubadhanti), 기름이 호마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수축’(隨逐, anugata)의 의미로 풀이했다. 이들 수면의 여러 개념 가운데에서 유부가 취한 것은 집착적 성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집착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비로소 심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3) 대승불교에서 심의 전개 근본불교 이래 ‘심성청정설’(心性淸淨說)이 설해져 왔다. 이것은 심성의 청정이 곧 새로운 삶의 전형인 ‘붓다’에 도달하는 길로 보았기 때문이다. 중관학통과 유가학통에서 번뇌 즉 수면 개념에 대해 집중해 왔던 것 역시 심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함이었다. 중관학통은 아비달마의 실체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통해 고정된 관념을 해체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이미 지나간 결박은 결박이 아니고, 미래의 결박도 결박이 아니며, 현재의 결박도 머물지 않으므로 결박이라고 볼 수 없다고 보았다. 결박이 없으면 해탈도 성립할 수 없다. 윤회와 열반은 우리의 분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성과 무자성성과 공성의 입장에 서면 ‘번뇌 즉 보리’ 혹은 ‘생사 즉 열반’은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었다. 유가학통은 중관학통과 달리 아비달마의 전통을 이어 대승아비달마로 심화시켜 갔다. 요가수행자들은 근본 유부의 다르마 체계를 수용하면서도 중관학통의 공성 체험을 자신들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 위에서 그들은 유부의 다르마 체계를 수정해 나갔다. 그들은 우선 번뇌를 현실적 측면과 잠재적 측면으로 구분한 뒤에 번뇌설을 체계적이고 정합적으로 구축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심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심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노력은 여래장 사상으로 확장되었고 화엄사상과 접목될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의 지론종 남도파와 북도파는 심의 염정(染淨)에 대한 구분을 통해 자성의 청정함에 도달하려 했다. 남도파는 아려야식을 정식으로 간주하고 8식설을 취한 반면, 북도파는 아려야식을 진망화합식으로 간주하고 9식설을 취하였다. 남도파의 학설은 송역(宋譯) 4권 능가경의 학설과 같으며, 북도파는 위역(魏譯) 10권 능가경의 학설과 같은 것이다. 결국 제9 아마라식을 정식으로 간주하였던 진제의 섭론종이 일어나자 북도파는 섭론종과 통합되어 사라지고 남도파만이 번영하다가 이것도 법장의 화엄학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대승기신론 해석분에서는 심을 ‘중생의 자성청정심’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대승기신론 서분의 ‘법성 진여의 바다’에서 기술하는 진속 이제 방식으로 말하면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것이고, 그 외에 법성(法性) 혹은 진여(眞如)라고 불리는 것과 상응한다. 자성청정심은 끝까지 공성, 무자성성이며, 실체적인 영혼으로서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자성청정심이 외적인 무명 번뇌에 의해 덮여져 있는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여래장설을 창안했던 것이다. 자성청정심 즉 법성 혹은 진여의 불생불멸 때문에 심은 견고하고 진실한 마음(堅實心)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 경전이 성립될 초창기부터 이미 “미혹한 현실세계는 오직 마음의 소산일 뿐, 마음 바깥에는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사상이 설해졌다. 그러한 인식은 화엄경에서 ‘심’은 “솜씨 좋은 화가처럼 온갖 세계를 그려낸다”는 교설로 이어져 왔다.
만일 사람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마음이 모든 여래를 조성한다는 것을 관찰해야만 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마음으로 그리는 것처럼 모든 법성은 이와 같다. 마음도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능히 세간을 그리는 것과 같다. ··· ··· 만일 사람이 삼세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법계성의 일체는 오직 마음이 조성한다는 것을 관찰해야만 할 것이다.
화엄경(60권)에서 “마음이 여래를 조성한다는 것”은 아직 성불하기 이전의 수행과정임을 의미한다. 즉 더 이상의 번뇌는 없지만(無漏) 아직 인과를 벗어나지 못한(有爲) 경지에서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무루 유위는 청정한 마음이 청정한 업인(無漏因)과 청정한 과보(無漏果)를 조성하여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까지 해당된다. 하지만 성불한 뒤에는 조성의 의미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인과가 남아있는 유위가 아니라 인과를 뛰어넘은 무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또 화엄경(60권)은 “심(心)과 불(佛)과 중생(衆生)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萬法唯識)는 것과 ‘연기된 제법은 모두 식(마음)을 떠나지 않는다’(諸法皆不離識)고 주장하는 유식사상 역시 이러한 연장에서 전개된 것이다. 또 ‘욕계 색계 무색계의 현실세계는 허망한 것이며 오직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三界虛僞 唯心所作), ‘모든 것은 본래 마음일 뿐이다’(一切本來唯心), ‘오직 마음일 뿐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唯是一心故名眞如) 등의 표현에서처럼 불교의 ‘식’ 사상은 곧 ‘심’ 사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대승의 당체를 중생심이자 일심이라 하고 그 ‘일심’에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두 문을 시설하고 있다. 심생멸문에서는 심(심, 의, 식)이 그려낸 세계의 모습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 ‘일심’의 사상은 중국에서는 황벽 등의 선승에게 받아들여졌으며 실천적으로는 무심의 사상으로 깊어졌다.
4) 중국불교에서 심의 전개 인도불교의 중국 전래 이래 불교사상가들은 심 개념의 탐구에 몰입했다. 때문에 심 개념은 초기의 경전 번역에서부터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고역(古譯)의 대표자인 후한말의 안세고(安世高)는 안반수의경 등 초기 불교의 선관(禪觀) 경전을 통해 심의 탐구에 철저하였다. 지루가참 역시 반주삼매경 등의 대승불교 계통의 경전을 번역하면서 심 개념 탐구에 집중하였다. 격의불교의 터널을 벗어나기 시작한 중국인들은 주체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안반수의경 등의 선관 경전에 관심을 가지고 몇 종류의 주석을 남겼다. 진(晋)나라 사부(謝敷)가 쓴 경의 서문에는 “의(意)는 모든 고통을 낳은 근원이며 올바른 것과 대립하는 원천이다. 끝없이 미망에 빠지고 방탕하며 제멋대로 구는 것이 마치 비끄러매어 붙잡아 둘 도리가 없는 미친 자와 같다. 애욕과 증오가 심에 가득 차서 어지럽게 탐닉하여 절도가 없는 것이 오랑캐에게 군주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에서처럼 심에 대한 중국적 이해와 표현이 잘 드러나 있다. 출삼장기집과 홍명집 등 육조시대의 대표적 불교 전적에 보이는 심에 대한 논의는 그 사상과 표현에 있어서는장자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점차 불교가 토착화되기 시작하면서 근본불교와 부파불교의 선관 경전과 논서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명상의 계제 및 각각의 단계에 있어 심의 양상이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이는 윤회 및 인과응보의 문제와 더불어 한역불전은 이처럼 중국 사상계에 그 전래 초기부터 인간의 정신적 내면탐구의 필요성을 설했던 것이다. 구역(舊譯)의 출발을 알린 구마라집(鳩滅什)에 의해 신뢰할만한 경전이 번역되면서 심에 대한 논의는 탄력을 더해 갔다. 심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는십지경론과 섭대승론 등의 논서들이 한역되면서 이에 기초한 불교사상가들의 교학에 기초한 학통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종조와 교리와 교도를 갖춘 종파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져갔다. 이에 상응하여 삼론과 열반 및 천태와 화엄 그리고 정토와 선법에서 심은 다양한 개념으로 변주되었다. 반야경류에 기초한 삼론종은 심을 중도(中道) 이제(二諦)에서의 ‘중도’에 대응시켰다.법화경과 마하지관 등에 의거한 천태종은 선관(禪觀) 경전에 입각하여 선정에 들어가고자 했던 선수행자들의 실천과 이론을 집대성하여 심을 공가중(空假中) 삼제(三諦)에서 ‘중제’(中諦)에 상응하였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존재가 자기의 심이라는 장소에 현현한다고 보아 ‘자기의 심을 보는 것’(觀)을 불도 수행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하여 ‘자기의 심을 체관하는 것’을 ‘관심’(觀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이와 같은 심의 한 순간 안에 지옥에서 부처에 이르기까지의 일체 세계가 구족되어 있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을 관하는 것을 주요한 실천법으로 세웠다. 열반경에 기초한 열반종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에서 ‘불성’(佛性)을 심에 수반시켰고, 화엄경에 의거한 화엄종은 “삼계는 허망하며 다만 일심이 만들어낸다”는 구절에 집중하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 심을 ‘유심’ (唯心) 혹은 ‘일심’(一心)에 상응시켰다. 하지만 천태종에 견주어 실천성이 엷었던 화엄종은 관념적인 이론을 구축하였고, 일심을 현실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는 세계관에 포섭됨으로써 점차 그 위상이 사라져갔다. 정토삼부경을 소의로 하는 정토종은 심을 염불 삼매(念佛三昧)에서 삼매(三昧)에 상응시켰다. 이와 달리 심을 실천의 문제로 삼은 선종에서는 ‘진각본심’(眞覺本心) 혹은 ‘평상심’(平常心) 혹은 ‘즉심즉불’(卽心卽佛) 등에 상응시킴으로써 폭넓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인도의 명상법은 심을 일정한 대상과 결부시킴으로써 마음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몰아적인 명지(明知)를 얻는 수련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불교의 초기와 중기 수행자들은 이러한 인도의 명상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양나라 시대에 중국으로 건너온 보리달마(菩提達磨)를 시조로 하는 이른바 선종은 장자를 그 연원을 함께하는 지극히 중국적인 혹은 중국 특유의 종파를 이루었다. 그 사상적 특징은 한 순간에 갑자기 깨닫는 돈오(頓悟)를 중시하는 달관(達觀)주의에 있다. 중국의 선불교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을 중시하며 추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교리를 집대성한 인물이 없고 특정한 ‘심이론’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들은 전적으로 심의 집착에서 떠나는 것을 목표로 추구했기 때문에 심에 대한 집착 그 자체를 철저히 비판했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의식의 근저에 있는 심은 본래 맑고 깨끗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선종의 어록에서 보이는 무심(無心)은 심에 대한 망상과 집착을 부정하지만 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심을 가리켜 보이고 자기의 심성이 불성에 다름이 아님을 자각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과 이 심이 그대로 부처라는 마조의 ‘즉심시불’(卽心是佛)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선종이 내세우는 ‘삼처전심’(三處傳心)에서도 이미 확인되고 있다. 즉 “영산회상에서 설법을 하던 석존이 가섭에게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임으로써 마음을 전함”(靈山會上 拈花微笑)과 “다자탑 앞에서 설법을 하던 석존이 지각한 가섭에게 말없이 자리를 반 나누어 앉힘”(多子塔前 分半座), 그리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든 석존이 이웃 나라 전도를 하다가 돌아와 오른 쪽으로 세 바퀴를 돌고 한 켠에 물러나 앉아 관 밖으로 두 다리를 내어 보임”(裟羅雙樹下 槨示雙趺)에서처럼 ‘심’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소통의 기제로 자리하고 있다.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지는 의발(衣鉢)은 ‘심’의 징표였고 줄탁동시(口卒啄同時)는 전심(傳心)의 상징이었다. 달마가 혜가(慧可)에게 일깨워준 ‘안심(安心)법문’이나 육조가 기동(旗動)과 풍동(風動)을 주장하는 두 수행자에게 일깨워준 ‘심동’(心動)의 활로는 모두 석존의 중도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심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도는 있는 것(有)과 없는 것(無), 인 것(其)과 아닌 것(未), 하나(一)와 여럿(多), 같은 것(同)과 다른 것(異)이라는 이항 대립을 넘어서는 지혜의 활로였다. 중국불교 13종파 역시 이러한 중도의 활로 개척에 매진하였다. 달마의 여래선과 능가종의 청정선이 지향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역시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을 언표한 것이다. 신수와 혜능의 분기 역시 이 깨달음(心, 覺)을 얻기 위한 수행(修) 방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의 축이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축으로 옮겨간 뒤 다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축과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축으로 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축을 관통하는 것은 심에 대한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법장(法藏, 643~713)은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을 구별 혹은 능가하는 사상으로서 화엄교학의 우월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하여 일심(一心)과 여래장(如來藏)을 통합한 ‘일여래장심’(一如來藏心)이라는 조어를 통해 ‘리와 사가 융통하여 걸림 없는 교설’(理事融通無碍說)을 최고위에 두는 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을 건립하였다. 마조(馬祖, 709~788)는 짓고 만듦, 옳고 그름, 취함과 버림, 단견과 상견, 범부와 성인의 구분이 없는 평상심을 통해 도의 본령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대중들에게 보이며 일렀다: ‘도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러움에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더러움에 물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나고 죽는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별난 짓을 벌이는 것은 바로 더러움에 물든다는 것이다. 단번에 도를 이루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평소의 마음(平常心)이 바로 도이다. 평상심이란 짓고 만듦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으며, 취함과 버림이 없고, 단견과 상견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황벽(黃蘗, ?~850)은 선가의 심법(心法)에 관한 대의를 자세하게 서술한 전심법요(傳心法要)를 통해 자신의 가풍을 전하고 있다. 그의 가풍을 이은 임제(臨濟, ?~867) 역시 누구나가 갖추고 있는 각자의 근본 모습으로 그가 설하는 인간의 본래경이자 그의 철학적 종교적 기준이며 총체적 인간 존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무위진인(無位眞人)과 인간을 얽매고 속박하는 전통적 가치 체계 및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하는 무구(無求), 그리고 일상의 참모습을 알고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며 자적하면서 그 어디에도 걸림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대자유인의 삶인 활조(活祖)를 통해 임제선풍의 마음자리를 보여주었다. 이후 전개된 당대의 5가 칠종의 살림살이에서도 심에 대한 깊은 논의를 제시하였다.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 종고(大慧 宗杲, 1089~1163)와 묵조선을 제창한 굉지 정각(宏智 正覺, 1091~1157) 역시 선심(禪心)에 관한 논의를 통해 심에 대한 사유의 지평을 더 넓혔다. 이러한 논의들은 한국의 고려 이래 조선을 거쳐 대한불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5) 한국불교에서 심의 전개 저술이 현존하지 않은 승랑(僧朗, 5세기 중엽~6세기 초엽)의 마음 인식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는 이제(二諦)의 기호를 통해 중도를 재천명하는 새로운 논법을 제창하였다. 그에게서 이제를 통합하는 중도는 심에 상응하는 개념이며 그것은 실상반야의 다른 이름이었다. 몸체(體)와 몸짓(用)으로 나누어보는 그의 중도관은 실상(實相)반야와 관조(觀照)반야와 문자(文字)반야의 삼종 반야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야(慧) 중도로 수렴되었고 심(心)으로 귀결되었다. 무상(無相)유식과 유상(有相)유식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문아(圓測, 613~696)는 팔식설을 취하였다. 그는 여러 논서와 장소류의 설을 대비하면서 무구식(無垢識)은 제8식의 청정분(淸淨分)에 해당하므로 제9식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문아는 경험을 축적(集)하고 행위를 일으키기(起) 때문에 심(心)이라 하고,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헤아리기(思量) 때문에 의(意)라고 하며, 대상을 분별(了別)하기 때문에 식(識)이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심은 의와 식을 아우르는 것이면서도 심의 두 측면인 청정분과 염오분을 갈무리하는 것이다. 하여 문아는 제9 아마라식을 따로 세우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제 8식 안의 심청정분을 그것에 상응시켰다. 원효(元曉, 617~686)는 대승기신론의 일심(一心)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의 심론을 새롭게 입론했다. 특히 그는 대승기신론의 이문(二門) 일심(一心)의 구도를 원용하여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을 통섭하는 일심의 지형도를 더없이 넓게 그려내었다. 그는 열반종요에서 불성(佛性)과 열반(涅槃)의 이문을 일미(一味)의 기호로 통섭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일미는 일심에 대응하는 개념이며 원효에게 있어서 일미와 일심은 그의 모든 생각의 갈래들을 묶는 벼리이며 모든 것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원효의 사상적 벼리인 일심은 부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자 넓은 마음이다. 동시에 넉넉한 마음이며 따뜻한 마음이다. 원효는 갈라져있는 뭇 주장들을 한데 모아 일심으로 회통시켰다. 그 회통의 계기는 보살의 대비심(大悲心)이며 대비심의 구체적 표현이 곧 이 일심인 것이다.
일심(一心)이란 무엇인가?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고; 참됨과 거짓됨의 두 문은 다름이 없으므로 하나라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아닌 곳에서 모든 법은 가장 진실되어[中實] 허공과 같지 않으며, 그 성품은 스스로 신령스레 알아차리므로[神解] 마음이라 한다.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가 있으며; 하나도 있지 않거늘 무엇을 두고 마음이라 하겠는가. 이 도리는 언설을 떠나고 사려를 끊었으므로 무엇이라 지목할지 몰라 억지로 일심(一心)이라 부르는 것이다.
무릇 진리는 방향성과 고정성이 없기에 역동적이다. 마치 숨 쉬는 유기체와 같이 꿈틀대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진리는 더러움과 깨끗함, 참됨과 거짓됨의 이항을 넘나든다. 하여 이 이항들이 둘이 아닌 것처럼 진리 역시 어떠한 경계에 의해 그 외연이 결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생은 본래부터 깨달은[本覺] 존재이어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무명의 바람에 의해 잠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나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不覺]이 또한 중생이다. 때문에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무명의 바람만 가라앉히면 비로소 깨달음[始覺]이 확연히 드러난다. 따라서 진리는 어느 한 순간, 한 시점에서만 바라보면 왜곡된다.
하나인 마음 이외에 다시 별도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유와 무라는 이름으로 한 마음에 어두워 파도를 일으키고 여섯 갈래의 길에 흘러 다닌다. 비록 여섯 갈래의 길의 파도가 일어나더라도 한 마음의 바다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여섯 갈래의 길을 일으키므로 널리 제도의 원(願)을 일으킬 수가 있으며, 여섯 갈래의 길의 중생들은 한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능히 한 몸체의 큰 자비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중생들은 모든 것의 근거인 일심에서 분기되어진 개념과 분별에 의해 끊임없이 업을 짓고 보를 받으며 여섯 갈래의 길을 흘러 다닌다. 중생들이 윤회하는 까닭은 무명의 바람에 의해 일심을 가렸기 때문이다. 이 일심의 발견 혹은 회복 여부에 따라 중생들은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 일심은 중생으로 태어나는 원인이 되며 동시에 중생에서 벗어나는 활로가 된다. 나아가 일심은 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대승 보살은 한 마음으로 여섯 갈래의 길을 일으키는 원인과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하여 널리 제도의 원과 한 몸체의 큰 자비의 힘을 일으키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는 것이다.
합해서 말하면 생함[生]은 곧 적멸이나 멸함[滅]을 지키지는 않고; 멸함[滅]이 곧 생함[生]이 되나 생함[生]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생함[生]과 멸함[滅]은 둘이 아니고; 움직임[動]과 고요함[寂]에는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을 일심(一心)의 법(法)이라 한다. 비록 실제로는 둘이 아니나 하나를 지키지는 않고, 전체로 연(緣)을 따라 생겨나[生] 움직이며[動], 전체로 연(緣)을 따라 고요히[寂] 지멸하게[滅]하게 된다. 이와 같은 도리로 말미암아 생함[生]이 적멸이고 적멸이 생함[生]이며; 막힘도 없고 거리낌도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생동과 적멸의 근거인 일심은 연(緣)을 따라 생겨나 움직이며 연을 따라 고요히 지멸한다. 하여 생함이 적멸이지만 멸함에 머무르지 않고 멸함이 생함이지만 생함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고 생함과 멸함이 둘이 아니고 움직임[動]과 고요함이 다르지 않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일심이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효는 ‘생’과 ‘멸’, ‘동’과 ‘적’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주장들을 화쟁 회통하여 일심으로 회통하고 있다. 그는 그 주장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가리지 않고 상대적 편견을 아우르고 새로운 통합의 길을 제시한다. 화쟁은 바로 이 화회(和會)와 회통(會通)을 통한 모색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일심은 통틀어 일체의 물들고 깨끗한 모든 존재가 의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제법의 근본인 것이다.
일심(一心)은 갈라진 모든 물결들의 시원지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지처이다. 원효는 갈라진 모든 물결들을 제법의 근본이자 염오분과 청정분 이문의 의지처인 일심으로 귀결시켜 나간다. 그에게 있어 심진여문은 심생멸문에 포용되며 심생멸문은 동시에 심진여문에 포용된다. 그는 인민의 삶이나 귀족의 삶을 중생심(衆生心)으로 묶어 세운다. 그리고 이 중생심은 곧 일심이며, 일심은 대승(大乘)의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생명성이다. 원효는 이 생명성을 일심(一心)에서 찾고 있다.
여래가 설한 바 일체의 교법은 일각(一覺)의 맛에 들지 않음이 없다. 일체 중생이 본래 일각(一覺)이었지만 다만 무명으로 말미암아 꿈 따라 유전하다가 모두 여래의 일미(一味)의 말씀에 따라 일심의 원천으로 마침내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논리를 빌어 중생들의 본각(本覺)을 드러내려고[始覺] 한다. 본래 드러낼 것이 없지만 중생들은 제 어리석음을 스스로 비춰보지 못한다[不覺]. 따라서 중생들은 어떠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필요하다. 원효는 일심을 통해 중생 스스로가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고자 한다. 그 과정이 바로 보살의 대비심의 실천과정이며 중생의 수행과정이다. ‘마치 가난한 아들이 자기 본래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듯이’ 일심의 본래 면목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보살의 실천과정이자 대비심의 표현인 바라밀행이다. 여래성기와 법계연기 및 횡진 법계와 수진 법계의 긴장과 탄력을 통해 이기 일승학을 입론한 의상(義湘, 625~702) 역시 심에 대한 깊은 논구를 보여주었다. 성기와 연기의 이기를 화엄 일승학의 구도 속에서 통섭하는 의상의 이사(理事) 무애법계 내지 이이(理理) 무애법계는 심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태현 역시 우리의 인식대상의 성질을 주관과 다른 종자에서 생겨 주관의 성질의 선악에 좌우되지 않고 존재영역을 달리하여 다섯 감각기관에 비치어 오는 것을 다섯 의식이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성경(性境), 별도의 객관적 존재가 없이 주관이 단독으로 드러난 환영처럼 눈병 난 사람의 앞에 보이는 토끼뿔 혹은 거북털과 같은 독영경(獨影境), 삼줄을 뱀으로 잘못 아는 것과 같이 본질은 있으나 그대로 영사되지 않은 경계인 대질경(帶質境) 셋으로 나눠 본 삼류경설(三類境說)을 통해 심의 구조를 해명하고 있다. 지눌(知訥, 1158~1210)은 지금 당장 우리가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좋은 씨앗을 심어두어야만 언젠가는 훌륭한 인연을 만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러한 통찰을 전제로 부지런히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온갖 고통을 여의고 언젠가는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오늘 여기에서의 자기 마음의 전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눌은 반조(返照)의 논리를 전개하면서 규봉 종밀의 ‘영지’(靈知)와 하택 신회의 ‘지’(知)의 개념을 원용하고 있다. 신회의 ‘뭇 묘함의 문’[衆妙之門]인 지(知)에 대해 “어두울 때에도 또한 알되 앎(知)은 본디 어둡지 않고, 생각이 일어날 때에도 또한 알되 앎(知)은 본래 생각이 없어서 슬픔[哀]․즐거움[樂]․기쁨[喜]․노함[怒]․좋아함[愛]․싫어함[惡]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모두 알되 앎(知)은 본래 비고 고요하여서 공적하면서 아는 것이다”고 말한다. 종밀의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에 대해서는 “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레 아는 마음[空寂靈知心]은 자신의 본래 면목이며, 삼세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과 천하 선지식이 비밀스럽게 전한 진리의 인장”이라고 한다. 아울러 “모든 존재가 모두 공한 곳에선 신령스런 앎이 어둡지 않아 무정(無情)과 달리 자성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안다. 이것이 그대의 공적한 영지이고 맑고 깨끗한 마음의 본체다. 이 맑고 깨끗한 공적의 마음이 삼세 모든 부처님의 수승하고 깨끗한 밝은 마음이요 또 이 중생의 근원적인 깨달음의 성품[本源覺性]이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눌은 “마음을 닦는 수행자는 먼저 조사의 도로써 자기 마음[自心]의 본래 묘함[本妙]을 알아서 문자(文字)에 구애되지 말 것이요, 다음으로 논문(論文)으로써 마음의 몸체[體]와 몸짓[用]을 변별할 것이다”면서 “세존이 입으로 설한 것이 교법[敎]이 되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이 곧 선법[禪]이 되니 부처님과 조사의 마음과 입이 서로 어긋날 리가 없다. 어찌 근원을 다하지 않고 각기 익힌 바를 편안히 하고 망녕되이 쟁론을 일으켜 세월을 헛되이 쓸 것인가”하며 ‘논쟁의 쓸모없음’을 통해 선교(禪敎)의 일원성(一元性)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지눌 당시 선종과 교종의 갈등과 대립을 반조의 논리를 통해서 화회시켜가려는 수순으로 읽혀진다. 당시 교단의 ‘치선’과 ‘광혜’의 대립을 해결하려는 맥락 속에서 종밀의 ‘영지’(靈知)나 신회의 ‘지’(知)도 이끌어 온 것으로 보인다. 지눌은 반조의 논리를 통해 ‘치선’과 ‘광혜’의 전환을 꾀함으로써 ‘진심’(眞心) 혹은 ‘영지’(靈知)를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고, ‘자기 성품이 곧 진리의 성품’임을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 일깨움에 원용된 반조 논리의 입각지는 마음자리[心地], 즉 자기 마음의 바탕이었다. “분별이 겨우 생겨나자 일어남과 사라짐[起滅]을 이루는 것 같지만 일어남과 사라짐의 전변(轉變)은 자기 마음[自心]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니 돌이켜 자기 마음을 써서 한 쪽만을 돌이켜 살핌[返觀一遍]에 거듭하지 않아도 둥그런 빛[圓光]을 이마에 이고 신령스런 불꽃이 번득여 마음과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고 했다. 지눌은 자기 마음의 근본적 지혜에 기저를 두고 부처와 중생을 일체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오늘 마음을 관하는 수행자는 무명으로부터 이루어진 과지(果智)가 곧 리불(理佛)이며 곧 사불(事佛)이며 곧 자불(自佛)이며 곧 타불(他佛)이며 곧 인불(因佛)이며 곧 과불(果佛)임을 깨닫게 된다”고 역설하기에 이르른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마음을 관(觀)하는 것’, 다시 말해서 반조(返照)의 계기가 전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눌은 현실적 인간의 “자기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근본적 지혜의 큰 쓰임에서 볼 때 부처의 보광명지와 중생의 무명심이 바로 둘이 아닌 것”이라 했다. 이처럼 부처와 중생을 같은 몸체[同體]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그의 전 저작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융회가 가능했던 것은 선정(定, 頓漸)과 지혜(慧, 理事)의 긴장과 탄력 위에서 지눌의 이문 진심(二門 眞心)사상을 드러내려는 반조(返照)의 논리에 의해서였다. 태고(太古, 1301~1384) 역시 원효의 일심一心, 지눌의 진심(眞心), 혜심의 무심(無心) 등에 상응하는 자심(自心)이라는 기호를 통해 자신의 사유 체계를 확보하려고 했다. 태고는 어록에서 ‘자심’의 기호를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마음’이라 하는 것은 범부들이 망령되게 분별하는 마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當人)의 고요하여(寂然) 움직이지 않는 그 마음입니다. 곧 이런 자기 마음(自心)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모르는 결에 허망하게 움직여서 순간순간(忽忽)마다 경계의 바람(境風)에 어지러이 흔들리고(動亂) 여섯 티끌(六塵) 속에 파묻혀서 자주 일어나고 자주 멸하면서 허망하게도 끝없이 나고 죽는 업과 고통(業苦)을 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조사님 같은 성인들이 일찍이 세운 원력願力으로 세상에 출현하시어 큰 자비심으로 ‘사람의 마음(人心)이 본래 부처(本來是佛)’임을 바로 가리켜(直指)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다만 (자기) 마음의 부처를 깨닫게 하여 주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태고가 말하는 마음은 자심이며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그 마음이다. 붓다와 조사들은 일찍이 그들이 세운 원력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자비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다만 마음의 부처를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태고의 이 ‘자심’은 지눌의 ‘진심’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태고의 자심은 지눌의 진심과 상당히 유사하나 전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 태고의 자심은 지눌의 진심이 지닌 몸체와 몸짓의 균형적 시선과 달리 몸체 쪽으로 더욱 더 경사되어 있다. 이 점은 이들 두 사상가가 지향하는 불교 사상적 맥락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옹(1320~1376) 초목 영과의 대화에서 ‘무심’(無心)이라는 기호를 통해 자신의 살림살이를 보여주었다. 이미 지공의 가풍이기도 했던 ‘무심’의 기호를 전수 받았던 나옹이었기에 고목(枯木) 영(榮)과의 대화에서 그는 ‘무심가용’(無心可用)을 통해 자신의 가풍을 드러내었다.
고목 영 선사를 찾아가서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더니 고목이 물었다. “수좌는 좌선할 때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 “쓸 마음이 없소.”(無心可用) “쓸 마음이 없다면(無心可用) 평소에 무엇이 그대를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가?” 나옹이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니 고목선사가 말하였다. “그것은 부모가 낳아준 그 눈이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무엇으로 보는가?” 나옹은 ‘악!’하고 할(喝)을 한 번 하고는 “어떤 것을 낳아준 뒤 다 낳아주기 전이다 하는가?” 하니 고목선사는 곧 나옹의 손을 잡고, “고려가 바다 건너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하였다. 나옹은 소매를 떨치고 나와 버렸다.
나옹이 말한 ‘무심가용’의 표현처럼 ‘무심’은 조사선 내지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흔히 ‘돈오무심’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깨달으면 일체의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다. 진심(眞心)으로도 표현되는 ‘무심’은 안다와 모른다, 있다와 없다, 쓴다와 쓰지 않는다 등등의 이항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운 지평이다. 모든 분별을 넘어선 마음이며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다. 이러한 무심은 인도에서 온 지공의 가풍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휴정(休靜, 1520~1604)의 선심(禪心)은 선(禪)하는 마음이자 무심의 다른 표현이다. 무심은 분별이 남아있는 유심과 달리 분별이 없는 무분별심을 말한다. 이 자리는 주관과 객관, 나와 대상의 이분이 완전히 사라진 본래 자리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선심은 일물(一物)이라고도 표현된다. 일물은 바로 선심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육조대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나에게 한 물건(一物)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 없다. 그대들은 알겠는가?” 신회(神會)선사가 곧 답하기를 “모든 부처들의 본래 근원이요 신회의 부처 성품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으로부터 와서 뵙자 육조가 묻기를 “무슨 물건(物)이 이렇게 왔는고?” 할 때에 회양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8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가령 한 물건(一物)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까닭이다.
선심은 바로 이름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 없는 일물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 일물의 인식 여하에 따라 천양지차로 벌어진다. 이처럼 육조의 적자가 된 연유와 서자가 된 연유는 종이 한 장의 차이처럼 미미하다. 휴정은 바로 혜능의 일물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자기화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한 물건(一物)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디 밝고 신령스럽디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하지도 않았고 일찍이 멸하지도 않았으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휴정은 일물에 대해 ‘본래부터 밝디 밝고 신령스럽디 신령스우며’, ‘일찍이 생하지도 않았고 일찍이 멸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일물에 이어 나오는 ‘종본이래’(從本以來)는 그 끝없고(無限), 가없는(無際) 시간성을 가리킨 것이고, ‘소소령령’(昭昭靈靈)은 그 성품의 묘용(妙用)을 보인 것이며, ‘부증생 부증멸’과 ‘명부득 상부득’은 그 공간적(空間的) 자재(自在)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가귀감의 서두 첫 문장은 휴정의 선교관 뿐만 아니라 그의 시공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부증생과 부증멸은 불교의 무시무종의 시간관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의 시간관은 불교의 시간 인식이 마음의 시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일찍부터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을 언어적 존재이자 의식 내적 존재이며 마음의 시간이라고 갈파해 왔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관은 내가 마음먹는 순간이 시작이 된다. 그 이전은 과거가 되고 그 이후는 미래가 된다. 따라서 시간을 가르는 과현미는 내 마음 이전에 어떠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마음을 내는 순간이 곧 현재가 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과거와 미래가 설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의 탈색(脫色)과 성장(成長)과 공간적 이동(移動)을 통해 변화하는 시간을 인식하는 것처럼, 공간은 사물의 점유(占有) 내지 차지(遮止)의 확인을 통해 인식되어진다. ‘명부득’과 ‘상부득’은 불교의 공간관 내지 자연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름과 모양은 개념과 형체이지만 이는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타자에게 거리낌을 주는 존재의 본래적 속성을 언표하는 것이다. 만일 이름 붙일 수 있고 모양 그릴 수 있다면 이는 시공 속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불변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만물은 인연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실체가 없다. 다만 실체가 없는 공(空)들이 모여(空聚)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이름’을 가지고 ‘모양’을 가진 것은 가명(假名)이자 가유(假有)로서 존재할 뿐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가귀감의 서두에 나오는 이 구절은 휴정의 시공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시공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휴정은 ‘종본이래’와 ‘부증생 부증멸’을 통해 무시무종의 시간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명부득 상부득’을 통해 걸림없는 공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주어 내지 주체인 일물을 형용하고 하고 있는 술부 내지는 술어이다. 즉 주부인 일물은 시간적으로는 본래부터 밝디 밝고 신령스럽디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하지도 않았고 일찍이 멸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 일물은 공간적으로는 신령스럽디 신령스러워 이름을 얻을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선심 일물의 지혜가 발현되는 것이다. 경허(鏡虛, 1846~1912) 역시 이들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사상의 개념을 입론했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안다’(照了心源) 내지 ‘마음의 근원을 돌이키어 비춘다’(返照心源)에서 도출할 수 있는 그의 사상적 키워드는 ‘조심’(照心)이라 할 수 있다. 조심(照心)은 ‘비추는 마음’이기도 하고, ‘마음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마음을 비춘다’ 함은 마음의 실상을 비춘다는 것이고, ‘비추는 마음’이란 실상을 비추어 보는 마음이다. 마음은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는 것이기에 무엇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조심은 이러한 마음을 비춘다 해도 되고, 비추는 마음이라 해도 된다. 조심은 안과 나와 낮은 곳을 향해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남이 아닌 나, 밖이 아닌 안, 높은 곳이 아닌 낮은 곳을 비추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경허 스스로가 이 마음을 조심이라 명명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시종일관 역설하는 ‘조료심원’ 혹은 ‘반조심원’에서 우리는 ‘조심’이라는 개념을 적출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조심의 개념에 기초하여 그의 조료의 논리와 전정의 방식으로 이(류중)행 해 가는 구도를 읽어낼 수 있다. 용성(龍城, 1864~1940)은 대각(大覺)의 기호를 통해 본각(本覺)과 시각(始覺)과 구경각(究竟覺)을 통섭하였다. 그는 시각과 본각의 합일(合一)과 자각(自覺)과 각타(覺他)의 불이(不二)로서 구경각을 대각으로 해석해 내었다. 이는 대각의 근본정신은 자신의 깨달음이 중생의 구제를 떠나 존재하지 않으며 중생의 구제 또한 자신의 깨달음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완결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서 깨달음은 심에 상응하는 기호이며 이 심은 깨달음에 상응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만해(萬海, 1879~1944)는 유심(惟心)의 기호를 통해 불교의 유신(維新)과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그의 유심은 건설과 파괴, 유신과 해체 등의 기호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는 이 기호를 통해 대한 불교의 유신과 나라의 독립 및 대한 민족의 자각을 촉구했다. 그가 창안한 독특한 개념인 그리운 것으로서의 ‘님’과 심우도에서의 ‘소’ 역시 심에 상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철(性徹, 1912~1993)은 “삼세육추(三細六麤)의 일체망념(一切妄念)이 돈연(頓然) 소멸(消滅)되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진여본성(眞如本性)을 활연증득(豁然證得)하니, 이것이 곧 망멸증진(妄滅證眞)한 구경무심(究境無心)인 견성(見性)이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견성’(見性)을 “미세망념이 ‘몰록(頓然) 사라지고(消滅)’, 망념을 없애 진여를 증득한 ‘구경 무심’(究境 無心)”이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 ‘돈연’(頓然)과 ‘무심’(無心)을 더욱 밀핵화(密核化)하여 원효의 일심(一心), 지눌의 진심(眞心), 휴정의 선심(禪心), 경허의 조심(照心)에 상응하는 ‘돈심’(頓心)이란 용어를 적출해 낼 수 있다. 하여 유수한 불교사상가의 사상적 키워드에 대응하는 ‘돈심’(頓心)은 성철사상의 두 축인 ‘돈오’(頓悟)와 ‘견성’(見性)을 통섭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유수한 불교사상가들은 ‘심’을 자기화하여 촘촘한 사상적 지형도를 그려내었다. 이들 기호는 불교 전적 속에서 확인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평을 담은 지형도로 숙성 발효시켜 이들만의 기호로 거듭나게 하였다.
2. 심의 텍스트별 용례 불교 텍스트 안에서 심에 대한 용례는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근본불교에서부터 부파를 거쳐 대승 및 중국과 한국 등에 이르기까지 심은 언제나 주요 개념으로 변주되어 왔다. 법구경과 증일아함경에서 석존은 “마음은 진리의 근본이다”고 하였다. 또 석존은 잡아함경에서 “오랫동안 마음은 탐욕에 물들게 되고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었기 때문에 이 마음을 관찰하여 바르게 사유하여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또 “마음이 괴로우므로 중생이 괴롭고, 마음이 깨끗하므로 중생이 깨끗하다”고 했다. 나아가 “연기를 보는 이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이는 연기를 본다”고 했다. 여기서 법은 바로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 즉 모든 존재는 뭇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다(衆緣和合所生)는 연기의 진리는 바로 마음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연기와 법과 마음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인 것이다. 인도 철학자인 야즈냐발캬 역시 부처라는 존재가 마음 밖에 어떤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가 곧 부처임을 제시함으로써 우파니샤드의 아뜨만을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는 붇다로 환원시켜 주었다. 기본적으로 아함경에서는 심(心)과 의(意)와 식(識)이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하지만 부파불교의 텍스트에는 이들 각기를 구분하여 언급하고 있다. 심은 ‘자성 제일의(自性第一義)의 마음’ 또는 육단심(心臟)을 가리킨다. 또 심은 의(意)를 가리키며 반야 개공의 마음의 정수(心髓)와 정밀한 요체(精要)를 일컫는다. 밀교에서는 범부의 간율타(肉團心)를 관상하여 여덟 잎사귀(八葉) 연꽃으로 삼고(卽心蓮) 사람을 교화하여 자기의 불신으로 개현하기 때문에 중생의 자성청정심을 한율타(汗栗馱)라고 일컫는다. 각종 마음의 형태로부터 이루어진 관련된 마음의 분류로는 진심(眞心, 本來淸淨心, 즉 自性淸淨心)과 망심(妄心, 번뇌에 오염된 마음), 상응심(相應心, 번뇌와 상응하는 마음)과 불상응심(不相應行心, 번뇌와 상응하지 않는 마음), 정심(定心, 망녕된 생각과 잡스런 생각을 고요히 그쳐 하나로 통섭한 마음과 선정을 닦아 선한 마음)과 산심(散心, 어지러이 흩어지는 마음, 흩어짐을 닦은 선한 마음) 등의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혹은 탐(貪), 진(瞋), 치(癡) 등의 세 가지 마음과 탐심, 진심, 치심, 등심(等心, 삼독심과 함께 일어남) 등의 네 가지 마음 및 육단심(心臟), 대상을 취하여 사고를 더하는 마음인 연려심(緣慮心, 모두 8식에 통한다), 집기심(阿賴耶識), 견실심(堅實心) 등의 네 가지 마음, 혹은 처음으로 외경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인 솔이심(率爾心), 알고자 하는 마음인 심구심(尋求心, 알고자 하는 마음), 결단의 마음인 결정심(決定心), 염오와 청정을 일으키는 마음인 염정심(染淨),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서 앞뒤 차이가 없도록 지속시키는 마음인 등류심(等流心) 등의 다섯 가지 마음이니 이들은 곧 의식이 바깥의 대상을 접촉할 때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다섯 가지 마음들이다. 이외에도 이른바 선심을 차례대로 성숙시켜가는 과정의 여덟 가지 마음이 있다. 즉 종자심(種子心), 아종심(芽種心), 포종심(疱種心), 엽종심(葉種心), 부화심(敷和心), 성과심(成果心), 수용종자심(受用種子心)과 영동심(嬰童心) 등이다. 화엄경에서는 “삼계는 허망하며 다만 일시에 만들어낸 것일 뿐이니 십이 연기분은 모두 마음에 의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마음은 모든 것의 근거이자 진실한 본래성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는 모두 진실한 모습이 아님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하여 십이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의 삶은 모두 이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화엄경에서는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갖가지 오음을 그려내지만 일체의 세계 속에서 존재도 없고 지음도 없는 것과 같이, 마음과 부처 또한 그와 같고 부처와 중생도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에는 차별이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마음과 부처와 중생을 셋으로 분별하는 오염을 제거시켜 주고 있다. 이들 모두가 실체가 없음을 성품으로 하고 있기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같을 수 있는 것이다. 대일경 「주심품」(住心品)에는 유가행자의 마음의 차별상(相可分成)을 육십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즉 탐(貪), 무탐(無貪), 진(瞋), 자(慈), 치(癡), 지(智), 결정(決定), 의(疑), 암(暗), 명(明), 적취(積聚), 투(鬪), 쟁(諍), 무쟁(無諍), 천(天), 아수라(阿修羅), 용(龍), 인(人), 여(女), 자재(自在), 상인(商人), 농부(農夫), 하(河), 파지(波池), 정(井), 수호(守護), 간(慳), 구(狗), 이(貍), 가루라(迦樓羅), 서(鼠), 가영(歌詠), 무(舞), 격고(擊鼓), 실택(室宅), 사자(師子), 휴류(鵂鶹), 조(鳥), 라찰(羅刹), 자(刺), 굴(窟), 풍(風), 수(水), 화(火), 이(泥), 현색(顯色), 판(板), 미(迷), 독약(毒藥), 견색(羂索), 계(戒), 운(雲), 용(用), 염(鹽), 체도(剃刀), 수미등(須彌等), 해등(海等), 혈등(穴等), 수행(修行), 원후(猿猴) 등의 마음이다. 대일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의 차별상을 이렇게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은 심의 역동성과 운동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러한 분류는 심이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 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근본불교 이래 부파 및 대승 불교와 중국과 한국 불교 텍스트에서는 심에 대한 다양한 용례를 보여주고 있다.
Ⅲ. 인접 개념과의 관계 및 현대적 논의
1. 심과 인접 개념과의 관계
심은 중국철학사에서 오랫동안 가장 주요한 개념으로 변주되어 왔다. 불도유 삼교가 길항하거나 교섭하면서 그리고 다른 개념들과 상응하거나 수반하면서 심 개념은 끊임없이 그 의미를 확장해 왔다. 그리하여 심은 심장, 이성, 정신, 영혼, 감성, 의지, 욕망까지를 일컫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신체까지 총괄하는 개념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이처럼 심과 관련된 논의들은 불교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유교의 성리학과 양명학을 비롯하여 노장학을 아우른 도교에서도 있어 왔다. 맹자 이래 인간의 심은 생득적으로 선을 지향(性善)하는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맹자는 인간의 심을 네 방면으로 살펴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으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온 덕성을 완성할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 혹은 마음씨라 할 수 있다. 하여 맹자는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羞惡之心), 물러나고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을 토대로 성선설(性善說)을 세워냈다. 그런데 양심으로 불리는 이 심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품부 받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한다면 하늘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심의 본질은 인의이고 이것은 인성에 고유한 것이며 사람과 금수를 구별하는 주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심은 사유의 기능을 갖기 때문에 인의를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맹자는 심을 윤리적, 이성적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순자는 생득적으로 인간의 심에는 선을 지향하는 성격이 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본성의 선함은 본래 악한 심을 작위적으로 교정하여[僞] 얻어낸 것으로 파악했다. 때문에 심은 명징한 인식 능력, 즉 이목 등 감각기관이 제공한 인상을 헤아려 아는 특수능력인 징지(徵知)를 지니고 있기에 천도(天道), 인도(人道), 사물(事物)을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하여 가르침을 통해 이런 능력을 길러주게 되면 누구나 선(善)을 추구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선진시대에 살았던 맹자와 순자의 심 이해였다 이러한 이해는 불교의 수용과 도교의 정비 이후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되기 시작했다. 주로 수당 이전 시대의 불교와 도교에서 본격화되어온 심을 둘러싼 여러 문제는 송대 사대부들에게는 특히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깊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심과 관련된 언설과 실천으로서 송대 이래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선종이었다. 즉 마조 이래 선종의 주요 가풍이었던 ‘마음 그것이 바로 부처’(卽心卽佛)와 ‘평상심이 곧 도이다’(平常心是道) 그리고 ‘작용이 곧 불성’(作用卽性)의 명제는 송대 사대부들에게 깊은 울림을 줌으로써 선법에 빠져들게 하였다. 그런데 마조의 “자네의 마음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卽汝心是)는 명제는 상대방의 마음 그 자체를 직지(直指)하여 이를 거침없는 말투로 선연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과 달리 경덕전등록의 “마음이 그것이 바로 부처”(卽心卽佛)는 지상 명제적으로 테제화되어 있는 느낌이어서 안타깝게도 그 개성적인 생생한 여운을 결하고 있다. 일단 테제화 되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패턴으로 정착되어 경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조도 후에 ‘비심비불’(非心非佛)로 역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마조의 표현은 어디까지나 풍부한 표현에 있었다. 이 점은 그가 ‘무심’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마조의 ‘평상심시도’는 심의 활동에 있어 부처로서의 본심이 엄연히 존재하며 또한 생생하게 살아 기능하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또한 그것은 특별히 현묘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모든 행위 그 자체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이런 본심을 붙잡기만 하면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은 채 모든 곳에서 주인이 되어 궁극적인 주체성과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관념되었다. 이런 가르침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갈등을 안고 살았던 사대부들에게 크게 어필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선문을 두드렸다. 선종의 심론을 유불도 삼교의 논제로 확장시킨 인물은 당나라 규봉 종밀(圭峰 宗密, 780~841)이라고 할 수 있다. 하택종을 이은 선사이면서 화엄의 5조였던 그는 세계 전체를 심식으로 환원시키고 불교의 존재론을 확장시켜 선종과 교종을 일치시키려 했다. 이러한 종밀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심론에 대한 사대부들의 논리적 근거를 확보시켜 주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유교의 가치관에 의거하여 유교의 재구축을 꾀한 사대부 사상가들은 종밀의 선관과 교관에 대항하기 위해 인간 심의 측면에 대한 새로운 심성론과 수양론을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았던 송나라의 대혜 종고는 종래의 선법을 재구성 하여 사대부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우리들의 지적, 언어적 영위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본심에서 떠나 미혹에 빠지게 만드는 원흉이라고 보았다. 해서 그런 활동을 일체 정지시키기 위해 옛사람의 공안(公案)의 일 구절에 철저히 몰두하게 함으로써 어느 순간 마음이 곧 부처임(卽心卽佛)임을 깨닫고 마음 본체의 종횡무진하고 활연관통하는 활동을 획득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법거량을 통해 깨달음의 활로를 열어주었던 경덕전등록속 1,701개의 공안을 대중화시켰다. 그래서 기의 이합집산에 입각한 세계관을 전제로 하여 인간의 마음이 뛰어나고 영묘한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관점, 또한 마음은 천지 우주에 충만한 생명력의 현현이며, 생명을 채우고 확장시켜 나가고자 하는 천지만물의 생의(生意)와 본래적으로 상통한다고 보는 관점, 혹은 마음이란 허령한 존재이며 지각을 본질로 하고 주재의 기능을 가진다고 보는 관점 등이 공통의 전제가 되어 있었다. 하여 북송의 정이는 “성인은 하늘에 입각하고 석씨는 마음에 입각한다”(釋氏遺書 권21)고 하였다. 이것은 암암리에 불교의 즉심즉불을 단순한 자기만족이라고 절하하면서 그것이 유학의 천=리의 입장과 비교하여 뒤떨어진다는 주장을 머금고 있었다. 이때부터 성리학자들은 리로서의 천(天)을 심의 본질(性)로 하면서 불교를 넘어서는 심성론을 구축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남송의 주희(朱熹)는 북송의 장재(張載)가 “심은 성정을 통괄한다”(心統性情,張載集․性理拾遺)는 명제를 고요할 때(靜時)의 존양(存養)과 움직일 때(動時)의 성찰이라는 수양론의 확립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면서 심에 관해 집중적인 논의를 전개하였다. 그는 심은 성과 정의 체용이라는 양 측면을 포괄하고 총괄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명나라 말까지의 사상사의 전개에서 계속 쟁점이 되었던 것은 오히려 그의 심(=지각)과 성의 관계를 둘러싼 규정이었다. 주희는 심의 주요한 기능으로서 따뜻한 것과 찬 것 등을 아는 감각적 지각과 리의 인식기능을 포함하는 지각은 성=(특히 지의 리와) 기의 공동작용에 의해 성립한다고 했다. 일반인들의 기에는 맑고 탁함 혹은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으므로 지각이 그대로 리가 될 수는 없고 거기에는 무언가 비틀림을 내포한 심의 지각을 그대로 지극한 선이라고 인정하게 되고 또한 사물의 리도 무시하고 폭주하게 된다. 때문에 심과 성은 엄밀하게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인간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의식적으로 수행해서 성=리에 의해 심에 대한 통제를 확보해야만 한다고 했다. 또한 도통(道統)의 주장과 관련하여 서경․대우모(書經․大禹謨)에 입각하여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각각 지각의 리에서 발하는 것과 기에서 발하는 것이라고 구별하여 규정지으면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것이 청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심을 둘러싼 수양의 체계를 심학(心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주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육구연(陸九淵)은 리로 가득 차 있는 우주전체가 자기의 심과 일체이며, 나아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만인의 심과 동일하다는 직접적 헤험에 입각하여 이 우주의 리와 일체를 이루는 활연관통의 본심(心卽理)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함양하기를 주장했다. 하여 육구연은 북송의 장횡거의 “심은 성정을 통괄한다”는 명제와 정이의 “성이 리이다”는 등에서 힌트를 얻어 성=리=체와 정=기=용을 통괄하는 모형에 기초한 주희식의 심 구별 및 공부론의 복잡 번쇄함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심을 심, 성, 정으로 대상화시켜 분별하는 주희와 달리 성과 심을 나누지 않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의 제자인 양간(楊簡)은 심의 맑고 청명한 마음에로의 침잠에 기울어져 거기서 천지만물을 포섭하는 허명무체(虛明無體)한 것으로서의 심의 지선성(至善性)을 강조했다. 명대 중기의 왕수인(王守仁)은 인간의 심에는 올바른 리의 판단력(良知)이 항상 존재하고 기능하며, 때문에 만사에 리를 실현할 수 있고, 인간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양지가 곧바로 성=리이며 심의 본체이므로 심은 곧 성이고 양자 사이에 구별이 필요 없다고 했다. 나아가 양지는 곧 완전한 것이므로 주희의 주장에서처럼 먼저 경서를 읽는 데서 시작하여 사물의 리를 궁구할 필요가 없고(心卽理) 오히려 구체적인 사상(事象)과 마주하면서 양지를 연마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은 우주에 가득 찬 천지의 심(生生) 안에 있어 천지만물을 성립시키고 생명력 있게 만드는 중심점이라고 보는 강한 체험적 자각을 통해, 천지만물과의 일체적 공감을 본질로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만물일체의 仁) 이처럼 양명 계열의 후계자들은 양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지속시키고 있다. 특히 ‘갓난아기의 마음’(童心)을 통해 인간의 진심을 표현하여 서민에게까지 양지설을 널리 펴려 했던 양명의 후계자들은 지속적으로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나여방(羅汝芳), 이지(李贄), 왕기(王畿), 당학징(唐鶴徵), 유종주(劉宗周), 황종희(黃宗羲) 등은 양명의 대표적인 후계자들로서 양명 이래 심즉리에 기초한 심론을 크게 넓혔다. 그 이후 아편전쟁으로 심각한 국가적 사회적 위기를 맞이했던 청나라 말기의 유자들 및 불교 거사들은 쇠퇴한 중국을 하나의 유기체에 비유하면서 심력의 격려와 증진을 통해 나라를 소생시키려 하였다(康有爲). 아울러 사회 전체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근본적 동인으로서 에테르(以太) 혹은 번개(電)의 연원으로서의 심력을 제시하기도 했다(譚嗣同). 이러한 노력은 송대 이래 불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주체성의 확립을 위해 헌신했던 사대부들의 아이덴티티 회복을 위한 갈구일 뿐만 아니라 심의 본래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의 노력을 통해 심 개념의 내포는 보다 더 단단해질 수 있었고 심 개념의 외연은 더욱 더 넓어질 수 있었다.
2) 심의 현대적 논의 현대의 여러 학문 분야에서도 ‘심’(마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추상적인 마음을 구체적인 무엇으로 정의내리는 것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부분적인 인식의 손으로는 잡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마음은 가슴에 있는가 아니면 뇌에 있는가? 그리고 마음은 뇌를 일컫는 것인가 혹은 뇌의 작용을 일컫는 것인가?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마음을 “정보를 수집 처리 보관하는 뇌의 고등기능”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수용하기 쉽지 않지만 부정하기도 만만치 않다. 최근의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마음은 뇌의 어떤 활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며 뇌가 없으면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컴퓨터는 반도체라는 돌에 전기를 통하게 한 것이다. 즉 실리콘이라는 돌에 전기가 통하면 컴퓨터에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단백질에 전기가 통하는 것이 뇌이며, 실리콘이라는 반도체 대신에 단백질을 쓰고 전기적 에너지를 쓰게 만들어주는 것이 뇌의 활동이다. 따라서 뇌에 있는 단백질에 전기를 가하여, 그 작용으로 나온 것이 마음인 것이다. 알파파, 베타파, 세타파 등의 뇌파는 뇌의 전기 활동, 곧 뇌에 흐르는 전기의 이동인 전이를 그래프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뇌는 뉴런(neuron)이라는 신경세포와 이 신경세포 말단에 있는 시냅스(synapse)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뇌의 활동이라고 할 때, 마음은 이 뉴런과 시냅스 작용의 결과라고 정의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신경세포들의 조화로운 상호간의 신호 전달에 의한 것이고, 이 신호전달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시냅스라는 구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결국 마음이란 것은 신경세포들이 회로를 구성할 때 회로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이 신호를 주고받는 시냅스 간의 상호작용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 과학의 힘으로 마음의 정의와 특징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마음이란 여전히 물리적인 실험을 통해 도출된 결과로서만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과학과 의료 기술로 설명될 때라야만 비로소 믿어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물리적인 존재성으로서만 드러내는 마음이란 현상은 여전히 심리적인 존재성을 지닌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되기 어려운 것이다. 마음은 과학적 기호나 수학적 수식만으로는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학적 노력은 심장으로 규정되는 ‘흐리다야’(hṛdaya)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나 ‘찌따’(citta)에 대한 정의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Ⅳ. 정리와 맺음 심은 일반적으로 지성(知性), 감성(感性), 의지(意志) 등을 일컫는다. 때문에 색법(色法)과 신체(身體)와 구별되어 왔다. 또 심은 의식 아래에 있는 심층 심리라고 설해지고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심법과 색법을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였고, 근(根, 감각기관)과 경(境, 인식대상)과 식(識, 인식주관)을 엄밀히 구별했다. 우리 인식의 기반이자 입각지인 ‘심’(心)은 범어로 ‘찌따’(citta)와 ‘흐리드’(hṛd) 및 ‘흐리다야’(hṛdaya) 두 갈래의 어원이 있다. 앞의 찌따는 떨어져 있는 대상을 사고(緣慮)하는 주체와 작용을 가리킨다. 즉 찌따는 마음의 주체인 심왕(心王)과 마음의 작용인 심소법(心所法)의 총칭으로 물질(色法) 또는 신체(身)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이에 대응하는 흐리다야는 중성 명사로서 신체의 심장(心臟)을 가리킨다. 즉 나무의 중심과 같이 모든 사물이 갖추고 있는 본질이자 중심에 처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동시에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진실심(眞實心)이자 여래장심(如來藏心)이며 사고 작용(緣慮)을 갖추지 않은 마음을 가리킨다. 한편 대승의 유식학통은 색법도 식이 나타난 것으로서 심에 소속시키고 있다. 유식학통에서는 의식 아래에 있는 마음의 아뢰야식도 설하고 있다. 오늘의 과학적인 견해로서는 색법을 뇌의 소산으로 여기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불교에서는 색법이 심법을 낳는다는 견해는 없다. 다만 상키야 학파에서는 현실의 정신작용을 물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심은 뇌의 어떤 활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며 뇌가 없으면 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컴퓨터는 반도체라는 돌에 전기를 통하게 한 것이다. 즉 실리콘이라는 돌에 전기가 통하면 컴퓨터에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단백질에 전기가 통하는 것이 뇌이며, 실리콘이라는 반도체 대신에 단백질을 쓰고 전기적 에너지를 쓰게 만들어주는 것이 뇌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뇌에 있는 단백질에 전기를 가하여, 그 작용으로 나온 것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알파파, 베타파, 세타파 등의 뇌파는 뇌의 전기 활동, 곧 뇌에 흐르는 전기의 이동인 전이를 그래프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마음이란 것은 신경세포들이 회로를 구성할 때 회로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이 신호를 주고받는 시냅스 간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설명만으로 심 즉 마음에 대한 고찰이 마무리되기는 지극히 어렵다. 마음은 과학적 기호나 수학적 수식만으로는 온전히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 즉 마음에 대해 고찰하려는 과학적 노력에 의해 심장으로 규정되는 ‘흐리다야’(hṛdaya)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나 아직은 ‘찌따’(citta)에 대한 정의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심 즉 마음에 대한 고찰은 여전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 부분을 통해 나머지 부분을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출전근거와 참고문헌
출전근거 Saṁyutta Nikāya. Aṅguttara Nikāya. 法句經 1. 雜阿含經 2(大正藏 제2책). 增壹阿含經 51(大正藏 제2책). 四卷楞伽經 권1. 瑜伽師地論 권1. 60권華嚴經(大正藏 제9책). 60권華嚴經(大正藏 제9책). 大日經 권1. 大日經疏 권4. 華嚴經 「十地品」 권29((대정장제10책). 元曉, 金剛三昧經論 卷상(韓佛全 제1책). 元曉, 大乘起信論疏(韓佛全 제1책). 馬祖, 馬祖語錄. 知訥, 修心訣(韓佛全 제4책). 知訥, 華嚴論節要 권1(韓佛全 제4책). 知訥,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韓佛全 제4책). 知訥, 圓頓成佛論(韓佛全 제4책). 太古, 「玄陵請心要」, 太古和尙語錄 권상(韓佛全 제6책). 覺璉 錄, 懶翁禪師語錄(韓佛全 제6책). 休靜, 禪家龜鑑(韓佛全」 제7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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