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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영국의 영적 지도자 존 웨슬리(J. Wesley)
1). 서언: 근대 세계의 비참한 정황에서 많은 인간들은 존재의 의미도, 삶의 가치도 찾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 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느새 절망감이나 이기심이 인간성 잔체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선각자들은 사회를 바꾸어 인간을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또 다른 일부는 인간을 바꾸어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변화를 통해 더 귀해진다고."고 가르친 인물이 바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신앙 개혁자로서 감리교회를 창시하였습니다.
2). 근대 영국의 영적 지도자 존 웨슬리(J. Wesley): 1688년 선포된 영국의종교 자유법은 각 교파에 관용을 주었으나, 이후 불신앙의 자유까지 보장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영국민들은 교회에서 멀어졌고 출석률은 급감하여 져서, 많은 교회는 점차 상류층의 친목단체와 유사해지는 분위기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정황일때에, 1703년 3월 28일 존 웨슬리는 영국 중부 엡위쓰(Epworth)에서 사무엘 웨슬리 목사와 수산나 사이에서 19명의 자녀 중 15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1) 웨슬리 어린 시절: 이들 중 불과 10명만 살아남아 성년이었습니다. 웨슬리가 5세일 때, 집에 의문의 화제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주민들에게 점술이나 마법을 멀리하라고 권하였는데, 아마도 사무엘 목사를 미워한 점쟁이들이 화재에 연루된 듯하였습니다.불이 난 직후 모든 가족이 다 빠져 나왔으나 이층 다락에 있던 어린 웨슬리만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어깨사다리를 만들어 그를 구출해 내었습니다. 이후 어머니 수사나는 성경 구절(스가랴 3:2)응 인용해 존 웨슬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앞으로 네 별명은 '불에서 꺼낸 나무토막'이다." 웨슬리는 이때의 구출 경험을 늘 회상하며 자신의 삶에 신적인 보호와 섭리가 있음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2살 때까지 어머니에게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머니 수산나의 철저한 가정교육은 존 웨슬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는 훗날 감리교도들의 교육열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에, 그리고 동생 찰스(Charles)는 금요일에 배워 훗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목요일의 아들과 금요일의 아들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1726년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그는 귀족 학생들의 보조를 하며 생활비를 보충하였고, 학업 후 국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대학에서 동생 찰스 웨슬리와 친구 조지 휫필드(G. Whitfield)등과 함께 신앙 동아리 <홀리 클럽(Holy Club)>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신앙 성장의 '방법(Method)'을 목록으로 작성해 실행하였습니다.
즉 두 시간의 기도, 두 시간의 성경, 두 시간의 선행을 기본으로 한 규칙들을 정하고 이를 철저히 적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방법"을 가지고 신앙적으로 실행하는 이들을 "방법주의자", 즉 "메소디스트(Methodists)"라고 놀렸고, 이것이 감리 교회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이 종파는 한문으로는 실필 '감(監)'자와 다스릴 '리(理)'를 사용해 방법으로써 자신을 "살피고 다스리는" 웨슬리의 정신을 표현하였습니다.
(2) 웨슬리 젊은 시절: 1732년 '제임스 오글도피' 장군은 북미 대륙에 사반나(Savannah)를 중심으로 미국 13개 주들 중 마지막인 조지아를 설립하였습니다. 죄수들과 채무자들에게 경쟁의 기회를 주기 위해 시작한 조지아로 빈천한 이민자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초대 주지사인 제임스 오글토피 장군은 정착민들의 신앙 증진과 인디언 선교를 위해 정착촌의 목회자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주지사는 옥스퍼드를 졸업한 웨슬리 형제를 소개받고 조지아로 초청하였습니다.1735년 이 두 형제는 고상한 목표를 갖고 신대륙행의 배에 승선하였습니다. 그 배는 대서양에서 험한 폭풍우로 무려 5번이나 위기에 처했던 배였습니다. 어느 날 폭풍우가 일자 바다가 출렁거리었고 돛대가 부서졌습니다. 배에는 공포에 질린 비명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 그릅의 외국인들은 조용히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놀란 웨슬리는 그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두렵지 않습니까?" "안 두렵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두려움 속의 자신과는 달리 선상에서 평온한 태도로 일관한 이 외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 <친첸도르프> 백작이 '헤른후트' 공동체에서 미국으로 파송한 모리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존 웨슬리 형제는 마침내 4개월의 긴 여정 끝에 조지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목회자로, 동생 찰스는 오글토피 주 지사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약 1,000명의 이르는 큰 교구를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로서 인디언들과 외국인들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가 방문해야 할 영역은 300Km를 넘는 광대한 땅이었습니다. 거친 정착촌에서 점잖은 대학졸업자 웨슬리는 적용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의 자세도, 관점도 현지와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웨슬리는 곤란케 하는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났습니다.
서로 의지했던 동생 찰스가 주지사와 갈등을 일으켜 6개월 만에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형 웨슬리도 사반나의 행정관 '토마스 코스톤'이 웨슬리 자신을 무척 괴롭히던 차에, 행정관이 정착민을 착취하며 부정 행위를 알고 넘길 수가 없어서 웨슬리는 행정관을 고발하여,면직케 했습니다. 이로 보건데, 형제가 다 성격이 올곧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설상가상으로, 웨슬리는 소피아 흡키(Sophia Hopkey)라는 아가씨와 친밀히 교제하다가, 스캔들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가 고민 끝에 소피아와의 결혼을 포기하자, 그녀는 상처를 받고 갑자기 '윌리엄'이라는 남성과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한 때 애정을 품었던 웨슬리는 그녀의 돌발적인 혼인으로 충격을 받았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개월 동안 교회에 결석한 소피아가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출석하여 성찬식에 참여하자, 웨슬리는 그녀에게 성찬 베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국교회의 규정은 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미리 신청한 자들만 성찬 받도록 되어 있어서, 웨슬리는 그 규정을 감정적으로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소피아와 남편 윌리엄은 큰 모욕감을 느끼고 웨슬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심지어 남편은 개인 결투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소피아는 일전에 웨슬리의 고발로 인해 관직에서 쫓겨난 토마스 코스톤의 조카이었습니다. 이들 가족들은 웨슬리를 모략하고 모욕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결국 아직 1,000명에 불과한 사반나의 작은 정착촌에서 웨슬리는 목회자로서 사랑이 결여된 올곧았던 성격으로 실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1737년 2년 만에 웨슬리는 불명예와 좌절감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사반나를 떠나기 전 '쉬팡겐버그'라는 독일 경건주의자는 웨슬리를 만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웨슬리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분은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쉬팡겐버그는 다시 질문하기를, "세상을 구한 그 분은 당신을 구원했습니까?"
웨슬리는 그의 질문에 즉시 대답할 수 없었지만,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나는 조지아 정착민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미국에 갔으나, 그들은 커녕 정작 내 자신의 영혼도 구원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의 이 때의 실패는 많은 교훈을 주게 되었습니다. 내적인 영적 체험과 성경적 진리가 더 깊어져야 함을 깨달았고,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자존심과 성직자로서의 체면도 버리고, 빈자들과 서민들의 곁으로 다가가는 품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개인보다는 체계적인 조직과 협력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고 합니다.
(3) 변화된 웨슬리(성숙한 웨슬리): 영국 귀국 5개월 후인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런던 알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에서 열린 모라비아교도들의 경건주의 모임에 나가 보았습니다. 이날 그는 루터의 서문을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Warmed Heart)" 체험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려 직접 일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저녁에 나는 매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알더스케이트 거리의 모음에 갔는데 한 참석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내 심령 안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들었을 때, 갑자기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확신이 주어졌다. 나는 진실로 그리스도만이 죄와 율법에서 나를 구원하신 유일한 분임을 믿게 되었다."
이를 웨슬리의 "회심"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웨슬리는 진정한 신앙이란 제도나 예식이 아니라, 거룩함과 사랑의 완전(Perfection)을 은혜를 통해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사상은 교리가 아닌 체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의 경험론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또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점에서 경건주의 운동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는 살아 있는 은혜의 거룩케 하는 기능을 확신한 데서 초대 교회의 신앙을 계승하였다고 하겠습니다. <1>. 길거리 야외에서 신앙을 전파(옥스퍼드 대학 친구이며, 미국 대각성 운동의 주인공이었던 <조지 휫필드>권유): 그래서 웨슬리는 모든 인간이 구원의 대상임을 주장한 <아르미니우스>사상을 가지고 탄광촌부터 가난한 수천의 광부들에게 복음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동안 25만 마일을 다니면서 설교하였습니다. 그와 만난 수 많은 이들은 음주, 도박, 싸움, 범죄에서 벗어나 변화된 삶을 결단하였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감리교 신도가 되어서 18C. 말에 13만을 넘었으며, 순회하는 제자 설교자들도 5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2>.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아름다운 찬송 시들을 많이썼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C. Wesley, 1741.)라는 찬송가(통, 338장) 가사 였습니다.
<3>. 웨슬리 운동은 내적으로는 영국과 미국인들의 도덕성을 고양시킨 것이었고, 영적으로는 신앙 부흥을 일으켰으며, 외적으로는 정부가 못하던 수많은 자선 사업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생애 말년 노예제 폐지를 위해 힘썼으며, 사회개혁자들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이었습니다. <4>. 결국 웨슬리 신앙 운동은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 그리고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더불어 1700년대에 발생한 세계적인 "3대 영적 운동"이었습니다.
3). 결언: 첫 사랑에 상처를 입었던 웨슬리는 오래 동안 홀로 지내다가 48세에 한 과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5년이 지나도 자녀는 없었고 또 세계를 돌아다니는 웨슬리를 아내는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2000년대 초의 BBC. 설문 조사에서 영국인들은 존 웨슬리를 영국사 1,000년에서 가장 위대한 50인 중 한 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1791년 웨슬리는 87세를 일기로 두 손을 높이 들고 다음과 같이 2번 고백한 후 영원한 세계로 갔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끝.
2024년 1월 29일
山下연구소: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