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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24 -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폭군 네로는 절말 로마 시내에 불을 질렀나?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5권 가운데 7권의 제목을 “악명높은 황제들” 이라고 붙이고는
티베리우스 황제 - 칼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 황제의 4부로 나누어 기술했습니다.
네로는 로마 제국의 5대 황제이자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마지막 황제로,
외종조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둘째 사위가 된뒤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서기 54년 클라우디우스가 죽자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세네카의 친위 쿠데타로 황제의 친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즉위합니다.
“정치는 고도의 속임수” 라고 할진대 원로원이 환영한건 클라우디우스시대 해방노예들의 비서진
정치가 폐지될 것이라는 기대였으며...... 또 노인네가 연설에 고사를 인용하며
강의하는듯한 설교에 지쳐서 젊고 영리해 보이는 17세 젊은이 네로 에게서 참신함을 느꼈습니다.
세네카가 초를 잡고 네로가 원로원에서 낭독한 새 횡제의 시정연설은.... 1.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돌아간다. 2.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한다. 3. 황제는 사법집행에 관여하지 않는다. 4. 도무스(사저)
와 레스 푸블리카(관저) 를 분리한다. 새 황제는매년 초에 새 집정관이 취임할 때 낭독하기로 약속한다.
네로 즉위후 5년간은 황금기라고 불린만큼 평도 좋았고 활달하고 발랄한 성격, 총명함과
유머 감각으로 황제의 인기가 상당했으니.... 이때 스승 세네카를 중용해 선정을
베풀고 명장 코르불로 장군을 기용해 동쪽 파르티아 전선을 안정시키는 업적을 남깁니다.
기원전 53년 3두 체제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참패해 전사했고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출발하기 전에 암살된후 기원 36년 안토니우스 장군의 파르티아원정 실패했으니...
그후 아우구스투스는 군사력으로 파르티아를 격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전쟁으로 굴복시킨후 맺은 동맹국을 “아미쿠스(친구)” 라고 불렀으니 우방이지만, 평화조약만
맺은 상대는 우방이 아닌지라 북쪽 아르메니아 서쪽 시리아및 남쪽 이집트 3방면에서
파르티아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이 포위망 중에 아킬레스건은 파르티아와 국경을 맞댄 아르메니아였습니다.
공화정 말기에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아르메니아와 싸워 매번 승리했으니 패한 아르메니아
“동맹” 관계를 맺어 친로마파를 국왕으로 앉혔는데, 아르메니아는 동북쪽에 치우친데다가 주민들의 언어와
풍습이며 사고방식도 파르티아를 맹주로 하는 페르시아 문명권에 속하니 아르메니아가 자기 땅이라 생각했습니다.
파르티아는 서기 34년 노쇠한 로마 황제가 카프리섬에서 은둔하니 로마군이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티베리우스는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장군을
급파해 동방의 로마군을 아르메니아로 집결시키고는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니 물러갔습니다.
20년이 지난 서기 54년 로마에 17살 어린 소년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에 저런 풋내기는 대응할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아르메니아를 또 침공하니, 세네카는 그나이우스 코르블로를 총사령관으로
발탁했는데 그는 8년간 저지 게르마니아 사력관으로 4만명을 이끌고 라인강 하류를 지켜온 장군입니다.
남프랑스 속주 출신인 코르블로 장군은 라인강 이쪽에 가만히 있는게 아니고 때때로
라인강을 건너 깊숙이 진격해 게르만족을 쳐부수고는 돌아오는 과감하고 적극적
인 전략을 하는 장군이었는데 세네카의 잘못은 그에게 전권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기 55년 봄 라인강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머나먼 길을 달려간 코르블로는 체면을 구기고 기분이 상한 시리아
속주 총독 콰드라투스의 영접을 받았는데, 파르티아와 전쟁에 돌입한 것은 아니라서 코르블로의
지위는 총사령관이 아니라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 속주 총독에 불과했으니 시리아 총독의 계급이 더 높았습니다.
콰드리투스가 받은 훈령은 4개 군단 중에 2개 군단을 코르블로에게 떼어주고 콰드리투스는 남쪽
에서 코르블로는 서쪽에서 파르티아를 공격하라는 것이었는데.... 군무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문인 세네카의 무지가 드러나는 훈령이었으니 군사의 요체는 지휘권의 일원화 입니다?
콰드라투스가 코르블로에게 보내준 2개 군단은 전투에 투입할 상태가 아니었으며 또 파르티아왕은
자기 동생 티라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힌후 군사행동을 중지했으니
적이 유르파테스강을 건넌 것도 아니라서 코르블로도 저 2개 군단을 훈련시킬 시간을 벌게 됩니다.
교묘히 술수를 부려 아들 네로를 황위에 앉히는데 성공한 태후 아그리파는 의기양양했는데, 원로원과
시민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독버슷 중독으로 죽었다는 공식 발표를 받아들였고, 유언장
확인도 하지 않은채 선황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양자인 네로가 황위에 오른 것을 승인합니다.
아그리피나는 태후가 된후 공식 석상에서 늘 네로 황제 옆에 자리를 잡았고, 원로원
회의도 포로 로마노 근처에 있는 의사당이 아니라 팔라티노언덕에 있는 황궁
에서 열게 했으니 아그리피나가 뒤쪽에 숨어서 의원들의 발언을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화폐는 액면가치와 실질가치를 일치시킴으로써 국제통화의 역할을 했는데, 태후 아그리피나는 황제와
자기가 마주보고 있는 화폐를 만들었으니, 여신의 옆 얼굴을 새긴적은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며
심지어 황제의 포고령에도 Augusta Mater augusti (황후이자 황태후) 라고 적을 정도 였으니 그럼 공동 통치(?)
이때 로마 제일의 재주꾼인 세네카의 제자였던 네로는 영리하고 재기가 넘치는 17살 젊은이 였으니
아그리파나가 “네가 황제가 된건 엄마 덕분”이라는 공치사를 계속하자 거부감을 가지고
반항하기 시작했으니 첫번째는 어머니가 경멸할게 뻔한 여자인 아크테라는 여자 노예와 사랑합니다.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는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반항을 뒤에서 지지했으며 네로의 두번째 반항은 클라디우스
시대 해방노예 3인방중 한명인 경제 비서관 팔라스를 해임했는데, 그는 클라우디우스의 재혼상대로
아그리피나를 추천했던 사람이며 아그리피나가 네로를 황제로 만드는 음모를 꾸밀때도 적극적으로 도운 자라?
격분해서 아들 방으로 쳐들어간 태후 아그리피나는“네놈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고 내가 어떤 희생을 치루었는지
아느냐? 네가 누구 덕에 황제가 됐는데 나한테 이럴수가 있느냐? 불효막심한 놈!
배은망덕한 놈, 병신(왼팔 없는 부루스) 과 추방자(유배응 갔던 세네카) 보좌로 제국을 통치할수 있을성 싶으냐?”
“ 아헤노바르부스 씨족인 네놈이 황제가 될수 있었던건 어머니인 나에게 율리우스 씨족의 피를 물려받은 덕분이다.
차라리 14살 브리타니쿠스가 낫다. 그 아이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으로 갈 것이다. 근위병들도 게르마니쿠스의
딸이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일 것이다! 브리타니쿠스는 선황의 적자이니 양자인 네놈 보다 훨씬 황제에 어울린다!”
그러자 네로는 어머니가 실행에 옮길까 보아 두려움을 느꼈으니 칼리굴라도 선황 티베리우스
의 친손자 게멜루스를 죽인바 있으며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 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죽였듯..... 14살 브리타니쿠스는 지병인 천식발작으로 죽었다고 공표됩니다.
40세 아그리피나는 한쪽 팔을 잃은셈이라 분노했으나 포기하지 않았으니 먼저 자금을 모으는데 유산을 팔아 현금화
한뒤 라인강에 주둔중인 게르마니아군단에 뿌렸으니, 황후 시절 그녀는 고향인 쾰른에 로마군 퇴역병들을
이주시켜 만든 식민도시(콜로니아)에 자기 이름을 붙인적이 있었으니 저 7개 군단 4만 2천명을 포섭하려고 했습니다.
이그리피나는 황궁에 거주하면서 군단장들과 은밀히 연락을 시도했으며, 남편 네로에게 소박맞고 동생
브리타니쿠스 마저 세상을 떠나 슬픔에 빠진, 서민층에게 인기가 많았던 옥타비아를 위로
한다는 구실로 접근하니 네로도 태후 주변에서 경비병을 철수시켜버렸고 어머니를 황궁에서 쫓아냅니다.
이후 네로는 동년배 수행원들을 데리고 밤마다 로마시내로 몰려나가는데 황제나 원로원
아들이 아닌 평범한 젊은이들로 보이도록 서민복으로 갈아입었으며 멋대로 즐기며
너무나도 난폭하게 놀아나다가 주민신고로 출동한 야경꾼들과 치고 받는 패싸움까지 벌입니다.
로마 시민권은 집정관등 공직 선거권을 가진 “로마 시민권” 과 선거권이 없는 “라틴시민권”두 종류가 있었으며
조선은 한번 노비면 평생 노비이고 그 자식도 노비니 면천은 끔도 꿀수 없었지만, 로마는 해방노예들이 증가
하는데 자유를 얻은뒤 엣 주인과 인연을 끊고 독립하는 경우와 자유인 신분으로 주인집에서 계속 일하기도 합니다.
조선은 노비 숫자를 늘리기 위해 부모 중에 한쪽은 노비이고 다른쪽은 양민인 경우에도 무조건
노비로 간주해 양반들의 재산인 노비숫자를 늘렸으니, 퇴계 이황이 죽고 자식에게
물려준 노비는 그후 손주들에게 상속될 때 무려 367구(口) 에 달했으니 조선은 노에제 사회 입니다.
임진왜란때 온 명나라 장수로 칼을 쓰는 무예를 조선에 전수해 주는등 도운 낙상지는 대신들에게 중국에서 오래전
에 없어진 인륜에 벗어난 노비제도를 폐지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선은 사대부의 재산인 노비를 해방해줄
생각은 털끝 만큼도 없었으니 1894년 일본의 강요로 김홍집 친일파정권이 실시한 갑오개혁에서 비로소 없어집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노비 제도는 문명사회에 맞지않는 미개한 제도라며 반상의 차별철폐,
천민제도 폐지, 5백년간 강고히 내려온 과부재혼 금지제도 철폐와 함께 노비제도를 폐지
하도록 강권하기 전까지 조선 지배층은 큰 재산인 노비제도를 폐지할 수는 없었던 것인데
또 유럽은 다른 민족을 노예로 부리지만 조선은 동족을 노비로 부린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포로를 잡아 노예로 팔렸으니, 노예는 돈을 모아 주인에게 지불하거나 또는 주인이
동정심과 자비를 베풀어 해방시키면 로마는 심사를 거쳐 공식적으로 해방시키는데, 그
기준은 Libertus (자유) 라는 공공선을 공유하기에 어울리는 실적을 쌓았느냐 하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네로 황제가 참석한 원로원에서 자유를 공유하기에 적합한 인물인지 판단을 노예 개인별로 심사할 것이냐 아니면
법률화하여 일괄적으로 인정해줄 것이냐 여부를 표결에 붙였는데 후자가 선택되어 많은 노예들이 쉽게 자유를
찾았고, 클라우디우스 시절에 장관 3명이 모두 해방노예이었듯 이후 해방노예의 아들이 로마 황제가 되기도 합니다.
로마는 조선과는 달리 한번 노예가 되었더라도 자유인 신분을 되찾을 기회를 열어주었으니 패자부활전
이니 건강한 사회로 대제국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다만 해방노예의 인권은 인정했지만
노예의 인권 까지는 인정하지 않았으니 노예가 주인을 죽이면 그 집에 노예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다 죽인다는 법률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사문화 되어 살인한 노예만 죽였습니다.
2개 군단을 인수한 코르블로 장군은 안티오키아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병사들을 전투를 할수있는 군인으로 단련
시키기 위해 지붕 밑에서 잠을 자지 못하도록 했으며, 천막생활을 강요했고 건강이 좋지 않거나
노병은 군무에서 제외해 후방에 배치했는데 로마군 복무연령은 17세부터 45세까지니 노병은 40대 초반이라는?
도나우강 모이시아속주병 1개군단과 동맹국 병사들이 도착하자 3만으로 대국 파르티아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
했지만 57년부터 58년초까지 험준한 산악지대로 데려가 훈련시킨후 58년 5월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했으며.... 파르티아군이 오기 전에 파르티아왕 아우로 아르메니아왕이 된 티리다테스에게 회견을 요청합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으니 코르블로는 3년간 허송세월한게 아니라 파르티아가 왜 아르메니아
왕위를 차지했는지 이유를 알아냈으니, 파르티아왕 볼로가세스는 첩의 자식인데 정실소생의 배다른 동생
티라다테스가 왕위를 양보하자 미안해진 왕은 동생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주어야 하니, 왕이어야 합니다.
코르블로는 파르티아가 궂이 로마와 전쟁할 마음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서신을 보내 “로마황제
네로에게 티라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해 달라고 부탁하는게 어떠냐?
패권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로마황제에게서 아르메니아왕위를 선물로 받는 것은
어떠냐?” 그런데 로마 황제로 부터 왕위를 하사받는다는 것은 오리엔트인에게는 종속을 의미합니다!
볼로가세스왕은 동생을 로마에 종속시킬수 없다는 파르티아인의 긍지가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가는 파르티아
에서 일어날 거부반응이 걱정돼 거절하자 코르블로는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를 향해 진군해 성채를 함락하고 수도를 멀리서 반원형으로 포위하자 아르메니아왕은 도주합니다.
로마군이 수도를 함락했다는 소식에 네로황제와 원로원 및 시민들은 기뻐날뜄고 로마군
최고 사령관인 네로에게 “임페라토르!” 라는 환호를 보냈는데.... 로마제국에서
승자의 영광에 빛나는 이는 전선의 사령관이 아니고 로마군 최고사령관인 황제인 것이라?
코르블로는 수도를 지키기에는 휘하 병력이 적은지라 59년 봄에 시가지에 불을 질러 파괴
함으로써 적이 당분간 사용을 못하도록 한후 철수해 제2의 수도로 티그리스강
상류에 자리한 티그라노케르타를 향해 진격하는데 현재 튀르키에 동부 끝 영토 입니다.
아르탁사타에서 남서쪽 400km 인 티그라노케르타로 진격하며 군량 확보에 고심하는데 로마군의 사기는 높았으니
도중의 도시들이 함락당하자 공포를 불러일으켜 아르메니아군이 도주하는 바람에 역시 무혈입성했으니,
네로는 로마가 고른 티그라네스 왕자를 왕위에 앉히는데 왕족이기는 했지만 로마에서 자란지라 연고는 없었습니다.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왕을 지키기 위해 네로 황제는 1천명의 로마군과 1천명의 보조병 그리고 500명
기병을 떼어주라고 코르블로에게 명하니.... 이런 정도로 아르메니아를 지킬수 있다고
생각한 네로가 아직 22살로 전쟁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군사적으로 무지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중 다행이 콰드라투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시리아 총독에 코를블로를 임명한 것인데, 네로의 초기
5년은 폭군이 되기 전으로 선정을 펼수있었던 것은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가 잘 보좌했기 때문이니
명나라 만력제가 초기에 명재상인 장거정과 환관 풍보의 보좌로 “만력중흥” 이라는 선정을 편 것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오현제의 하나인 트라야누스황제가 저리 말했다는 것에 의문을 품으니, 그보다는 전임자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남긴 조직과 인재가 건재했고 제국이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다가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지라 세네카로 부터도 벗어났으니 전임황제의 공에다가 네로 자신이 영민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20세 무렵 네로는 포파이아 사비나를 사랑했는데 그녀의 첫 남편은 기사계급에 속한 남자였는데, 아이를 둘 낳고
이혼한 것은 야심을 가진 포파이아가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자 네로황제의 놀이 친구인 오토와 결혼하기
위함이니 신분 상승을 꾀한 것인데 얼마후 네로 황제가 아우구스투스 처럼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 남자는 첩을 두고 두 살림을 차릴수 있었고 기생이나 관기와 잘수 있었으며 이혼한후 새장가를 들수도 있었지만
조선 여인은 재혼이 불가능했으니 아이가 없어도 청상과부로 수절해야 했고, 사주단자만 받고 결혼식도
올리지 못해 남자 얼굴 조차 몰라도 재혼은 할수 없었는데 비해 로마 부인들은 현대와 같은 인권을 가졌던 것입니다.
네로는 황태자 시절에 클라우디우스황제의 딸인 옥타비아와 결혼했지만 노예인 아크테와 사랑에
빠졌고 이제 재치있는 포파이아에게 빠진 것이니, 밤마다 황궁을 벗어나 시내에서 분탕치며
놀던 친구 오토를 멀리 루시타니아 (포르투칼) 속주 총독으로 쫓아버리고 포파이아를 차지합니다.
저 난봉꾼 오토는 의외로 유능했으니 몇년후 네로가 자결한후 황제가 되는데, 예상외로 포파이아는 황제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훗날 엘리자베스 여왕을 낳게 되는 앤 불린이 영국왕 헨리 8세를
거부한 이유와 같으니 즉 현재 황후를 쫓아내고 자기를 정식 황후로 삼으면 잠자리에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옥타비아는 네로를 양자로 받아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이니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부인을 쫓아내려는 네로에게
반대하며 게르마니쿠스의 딸로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이라는걸 코에 걸고 살아온 아그리파나는 허락하지
않으니 그럼 오토의 부인 포파이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아내 옥타비아와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를 죽여줄 사람으로 해방노예 아나케토스를 선임하는데 네로의 체육교사로 미세노 해군기지 장관이었으니,
그는 자기를 중용하지 않은 일로 아그리피나에게 원한이 있었던지라 주원장의 부하 처럼 배 밑창의 일부를
떼어 내면 침몰해 버리는 배를 마련하는 동안 네로는 어머니와 화해하겠다며 떠벌리고 다니면서 바람을 잡습니다.
미네르바 (아테나) 여신의 축일 ( Idus Martiae 3월 20일) 나폴리 서쪽 바코리별장에서 네로가 잔치를
베풀고 어머니를 초대한 것은 그날이 미네르바 여신의 축일이라는 명분도 그럴싸했으니
22세 아들이 다정하고 공손하게 어머니를 모시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파도도 없는 바다라 한 밤중에 바닷가 별장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에게 네로는 소년 시절처럼 포옹했으며 배는
예정대로 침몰했는데.... 아그리피나는 계획대로라면 바다에 빠져 죽었어야 하는데, 그녀는 칼리굴라
황제 시절 벤토테네섬에 유배당했을 때 수영에 명수가 되었으니 바다를 헤엄쳐 낚씻배를 만나 살아났다는?
아니케토스는 아그리피나의 시종을 불러내 아그리파나의 명으로 황제를 죽이라고 했다고 질책해 미처 해명하기도
전에 채찍으로 쳐죽이고는 별장으로 쳐들어가니, 아그리피나는 자길 죽이려면 네로가 들어앉았던 자기
자궁을 찌르라고 명하니 온몸에 수많은 칼이 꽃혔으며 세네카는 아그리피나가 국가반역죄로 처형됐다고 발표합니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해인 60년에 로마에서 “루디 퀸테날리”올림픽을 열었으니 바로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
의 로마판이었는데 기원전 776년에 처음 열린 그리스 올림피아는 육상에다가 권투와 레슬링
이었으며 5년마다 열기로 한 로마 제전은 마지막날 네필의 말이 끄는 전차경주가 백미를 장식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에 전차경주에서 우승한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는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아테네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그의 정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고 티베리우스도 로도스섬에 은퇴해
있을때 전차 경주에 참가해 우승했으며 네로의 외조부 게르마니쿠스도 월게관의 영예를 안았다고 합니다.
네로는 체육외에 문예나 음악의 재능을 겨루면서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느껴야 로마가 문화
국가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로마제전이 일회성 행사로 끝나면 안되니
김나지움을 지었지만 청소년들만 이용할뿐 성인남자들이 오지않자 옆에 대 목욕장을 지었습니다.
61년에 브리타니아인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고 총궐기하니 로마는 진압에 어려움을 겪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인용해 “나쁜 짓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단숨에 해치워야 한다”고 말했으니 진압
(정복) 이 너무 오래 걸리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큰 희생을 입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피해국 국민들의
감정이 악화된다고 말했는데, 5천년 인류사는 침략의 역사(전쟁) 로“인간이 저지른 악행의 기록이 역사” 입니다.
로마인이 저지른 악행(침략전쟁)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니 그는 일부는
자비로 군단을 편성해 프랑스와 벨기에를 8년만에 제패했고, 라인강에 나무 다리를 건설해 게르마니아까지
제압했으며 이후 1년간 보복행위를 삼가고 현지 지배층의 지지를 얻으니 갈리아인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타니아를 침공한후 군사적 무지 때문인지 온건한 카이사르의 방식이
아닌 강압적인 지배체제를 만들었으니... 처음 4개 군단으로 시작해 2개로 줄어든 군단은 보조병을
합해 2만 정도였는데 병력이 적은 탓에 18년이 지났는데도 브리타니아 완전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관료처럼 2~3년만에 교체되는 사령관이 2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할수있는 일이라고는 조금씩 정복지
를 넓히고 정복지에는 퇴역병사들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만들고 종래의 도시는 지방자치단체로
만들어 속주 통치의“핵”으로 삼고 그 핵들을 로마식 가도로 연결하는지라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것입니다.
61년에 브리타니아인들의 총 궐기는 이미 제패한후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은 땅에서 일어났으니
브리타니아 통치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우두머리는 부디카 라는 여자로
우호부족장의 미망인이었으니 부디카의 두 딸이 로마군에게 강간당하자 추대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카이사르도 정복한 갈리아 여자와 관계를 했지만 비밀로 하지않고 여인의 부모와 가족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율리우스라는 성씨까지 쓸수있도록 해 보상했기 때문에 갈리아인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며
또 선진 로마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지배당하는게 불편하지 않은지라 독립 대신에 점차 "로마인화" 되었습니다.
둘째는 돈 문제니 10% 속주세율은 높지 않지만 빚을 내서 세금을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자가 높았으니 로마에서는
상한이 12% 로 제한되어 있지만 속주에서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한 금융업자들이 높게 받는지라 빚이 쌓이니
불만이 폭발한 것인데 공화정 말기 브루투스가 속주에서 48% 고리대를 받는걸 비난한 키케로의 편지가 전해집니다.
전쟁경험이 없는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황제는 속주에서 이런 고리대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니, 세네카
가 막대한 재산을 모은게 브리타니아에서의 고리대금업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로마인들이
우리를 착취의 대상으로만 본다고 여기면 로마와 우호관계는 틀어지니 반란이 일어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수에토니우스는 로마군의 절반인 1만명을 데리고 모나섬(앵글시섬) 에서 인신공양을 하는
드루이드교 사제와 신도들을 소탕하고 있었는데, 궐기한 로마인들은 브리타니아 중부 콜체스터에 정착한
로마퇴역병을 습격했으니 원군으로 출동한 로마군 1개 군단까지 궤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어 기세등등해 집니다.
참패를 당해 당황한 로마군 군단장은 모나섬의 수에니토우스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도버
해협을 건너 갈리아로 도주하자, 그동안 로마인들과 우호관계를 맺었던 브리타니아인은 동족의
배신자라며 화를 당했으니 살해된 브리타니아인은 여자와 아이까지 무려 7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희생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브리타니아에서는 로마나 동방 처럼 포로들을 노예로 파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인
데.... 이제 수에토니우스의 병력은 1만에 불과했고 로마는 속주 갈리아에는 로마군단을 주둔시키지
않고 자치를 허용하고 있었으니 병사들은 게르만족과 대치중인 라인강의 로마군단에서 빼내 와야만 했습니다.
원군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던 수에토니우스는 기세등등한 10만 브리타니아 반군(독립군?) 을 평원에서 정면 대결을
벌이는 회전으로 치루기로 하는데, 브리타니아인들은 회전은 서툴지만 로마군으로서는 제갈공명의 진법처럼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으니..... 10분지 1에 불과한 로마군 1만은 브리타니아군 8만명을 죽이는 대승리를 거둡니다.
네로는 라인강 주둔군중 2천명의 군단병과 8개 대대의 보조병 및 1천기의 기병을 떼어내어 브리타니아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으니 1만 1천명 정도인데, 해방노예인 폴리클레토스를 사절로 파견하니
유능한 시찰관이었던지라 보고를 토대로 네로는 브리타니아 통치 체제를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바꿉니다.
우선 반란으로 콜체스터 식민도시의 로마군을 죽이고 부녀자와 이이까지 포함 7만명의 학살에 대한 보복조치는
일체 없었으니.... 모두 죽을줄 알았다가 살아난 브리타니아인들은 로마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꾸었으며,
네로는 수에토니우스를 소환하고 페트로니우스를 신임 총독으로 보내 로마의 통치 방식이 바뀌었음을 알립니다.
그후 400년간 프랑스의 갈리아인들 처럼 브리타니아인들도 로마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점차
로마에 동화되어 갔으니, 로마의 지배 체제가 편하고 견딜만 한지라 궂이 독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그 전에 필리핀 처럼 지방에 수많은
소왕국들만 있었을 뿐 자체적인 통일왕국이 없었으니 국가나 민족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브리타니아에는 현명하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한 네로지만 동쪽의 파르티아(페르시아) 에서는 대책이 서툴렀으니
로마가 낙화산으로 앉힌 아르메니아왕 티그라네스는 1년도 되기 전에 적임자가 못된다는게 드러납니다.
1. 로마가 군사력을 동원해 끝까지 왕위를 지켜준다. 2. 아르메니아의 2개 수도를 차지하고 있는 지금
왕국을 없애버리고 로마의 속주로 만든다. 3.시리아 총독 코르블로의 의견대로 파르티아왕제
티라다테스가 신하로 로마황제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조건으로 아르메니아 왕위를 주어 현재 왕을 바꾼다.
그런데 1번은 티그라네스의 능력이 시원찮으니 어렵겠고 2번은 아르메니아는 미개한 트라키아왕국과는
달리 선진국인 페르시아 문명권에 속하니, 로마는 문명도가 높은 지역을 속주로
할때는 높은 자치를 부여하는데 그럼 아르메니아 속주화는 유명무실해져 페르시아에 가까워 질 것입니다.
3번을 채택하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네로는 그런 용기를 낼수 없었으니.... 왜냐하면 이는
아우구스투스 의 정책을 180도 바꾸는 일이었고 또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이
로마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비난할 것이니 네로는 이런 비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의 귀족과 상층부는 친로마파와 친파르티아파가 있었는데 2개의 수도를 로마군이
점령한 지금 친 로마파가 우세하니 1번을 채택해 보고, 도저히 감당이 안되면 아르메니아
왕국을 없애고 속주화 한다는 2번 정책을 택하니 이제 파르티아와 정면 승부는 피할수 없게 됩니다.
아르메니아 당당 사령관에는 강경파 페투스가 임명되었고 라인강 주둔군 2개군단을 빼오고 1개 군단을
추가해 3개 군단으로 정해졌으니 보조병과 동맹국 부대를 포함하면 3만에 이르고, 코르블로는
3개 군단으로 시리아에 주둔하며 파르티아군이 유프라테스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방어에 전념하기로 합니다.
페투스는 3만명 로마군을 인솔해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는데 병력을 양분했으며 보급로를 확보하는데
소홀히 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연말에는 거의 평정한 듯 보였으니, 보고를 받은 네로는
경축하는 승전비를 세우라고 명령했는데..... 파르티아왕 볼로가세스응 양분된 로마군을 공격해옵니다.
1만 5천명 로마군은 불의의 일격을 받고 패배해 겨울 숙영지로 도망쳤는데 문제는 군량이 확보되지 못했으니
오래 버틸수 없는지라 시리아 총독 코르블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데, 원래 지휘권을 두명 장수에게
분리해 나누어 준 네로 황제(또는 키케로)의 정책 실패인 것으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게 지휘권의 통일입니다.
시리아총독 코르블로는 병력 절반은 유프라테스강을 사수하라 하고 나무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넌후 요새를 지은
후에 명령만 내리면 파르티아 본국으로 쳐들어가라고 명한후 겨울철에 적지로 들어가는 것이라 충분한
군량을 준비했으니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 라는 말도 있는데 2차대전에서“미군은 병참으로 이긴다” 라?
코르블로는 군량을 낙타에 실은후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소아시아 동쪽을 북상해 아르메니아로 들어갔는데
그가 보낸 전령이 파르티아군에게 체포되면서 페투스는 우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너무 일찍 포기해 버리는데.... 그가 파르티아왕에게 항복한지 사흘만에 코르블로의 군대가 도착한 것입니다.
볼로가세스는 항복한 로마군에 무장해제도 요구하지 않는 인심을 부렸으며 로마군단의 장기인
토목공사 실력을 활용해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다리를 놓으라고
명하며 그후 아르메니아에서 완전히 철수하라는 관대한 명령이라 페투스는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남쪽으로 철수한 페투스의 군대와 북상한 코르블로의 군대는 유프라테스강 연안에서 얄궂게도 만났는데
코르블로의 병사들은 동정의 눈물을 흘리며 수치심으로 표정이 굳어진 페투스
병사들에게 달려가 끌어안고서 불행을 위로했지만 사령관들 끼리 대화는 짧았고 분위기도 냉랭했습니다.
아시아인인 우리 머리로는 페투스의 병사들이 토목공사를 중지하고 코르블로의 군대와 합세해 파르티아군과 전투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남자의 명예” 를 죽음 보다 소중히 하는 로마군은 그럴수 없으니
과거 에페이로스왕 피로스가 포로로 잡은 로마군 600명을 석방하자 로마는 강화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 합니다.
그러고는 로마까지 돌아와 살았다고 안도한 저 로마군 600명은 오와 열을 맞추어 피로스왕에게 되돌려 보내니
그들은 노예로 팔렸으며, 그후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5만으로 8만 5천의 로마군을 격파하고 승리한후
3만명 포로들 몸값을 요구하자 로마는 로마군답게 명예롭게 싸우지 못했다며 거절하니 모두 노예로 팔렸습니다.
페투스는 다리를 놓아준후 부하들을 이끌고 카파도키아로 떠났고 코르블로도 적 기병이 활동하기 좋은 들판이라
적은 병력으로 싸우기는 힘들다고 보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는데, 파르티아왕의 사절이
찾아왔으니 유프라테스강의 요새를 파괴하라고 하자 파르티아군이 먼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하라고 반박합니다.
유프라테스강 동쪽에 구축된 로마군 요새는 멀지않은 티그리스강에 자리한 수도 크테시폰을 노리는 목줄기를
겨냥한 단도와 같았으니, 첩의 아들로 약점이 있는 파르티아왕은 요구조건을 수용해 아르메니아에서 철수
하고 두 사람은 협상을 통해 왕은 네로에게 특사를 보냈는데..... 콘실리움 회의에서 거부하고 전쟁을 선택합니다.
페투스는 소환되었고 코르블로는 시리아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를 전담하는 ‘마그누스“
라는 명예로운 수식어가 붙는 사령관에 임명됐으니, 4개군단과 보조병에 동맹국 군대를 함쳐 5만명의
병력을 가지게 되니 게르마니쿠스가 동방에 파견되었을 때 티베리우스 황제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후 2번째 입니다.
따라서 코르블로는 로마의 황제에게서 승인을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권위로 최종결정을 내릴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이니 아르메니아 사태가 발생한지 8년만으로 5만 병력으로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는데
로마는 이때 까지 파르티아와 싸울때 마다 패배했으며 이제 최초의 승전 소식을 기다리는라 흥분합니다.
코르블로가 아르메니아로 진격해 요새를 불태우자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군을 총지휘하던 티리다테스와
그의 형으로 파르티아왕 볼로가세스는 사절을 보내 강화를 청했으니, 코르블로는 아르메니아를
초토화 할수 있다며 그전에 티리다테스를 로마에 보내 아르메니아를 선물로 받는게 좋을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이때 파르티아도 동쪽의 나라와 긴장상태에 있었으니 아르메니아에 추가 병력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고 평화가 무엇보다 절실한지라 받아들이니, 코르블로는 사위인 5군단장과
중신 2명을 사절(인질?) 로 보낸후 티리다테스와 회담장에 수하 20기 기병만 대동한채 만나게 됩니다.
며칠후 로미군 진영에 네로황제의 조상이 놓이고 제단이 마련됐으니 정장에 왕관을 쓴 티리다테스
왕은 네로의 조상에 절하고 왕관을 벗어 제단에 놓으니 즉위식 전반부가 끝난 것이고,
이후 티리다테스는 로마로 가서 네로 황제에게서 저 왕관을 받으면 즉위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네로는 어머니를 비롯 배다른 동생 황태자와 부인 옥타비아등 황실 친척들을 여럿 죽이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 상류층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로마인들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 도덕성,
청렴함과 고결한 미덕에 반대인 행동을 한 탓에 정신병자 수준의 광기를 갖춘 인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네로의 사후 로마 제국의 폭군중에 폭군인 콤모두스와 비교하면 업적이 있음에도,
기독교도 탄압과 어머니, 아내를 포함한 직계 친족 살해, 선황이자 양부
클라우디우스 능욕, 심각한 사치와 난잡한 사생활로 폭군의 대표 주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제정신 아닌 짓들을 많이 저지르기는 했으나 네로는 잔인하지도, 정국에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단지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데다가 몇 가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면서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고 보고 있습니다.
네로는 반기를 든 율리우스 빈덱스에 탄핵한 로마군과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에 3중 탄핵으로 몰락하는데....
네로가 "국고를 파탄내고, 어머니와 아내, 선황의 아들을 살해했으며, 국가의 법과 로마 시민권에서
보장한 타인의 권리까지 불법, 위법을 동원해 미덕까지 박살 낸 극악무도한 사람" 이었다는 판결이었습니다.
타키투스가 말했듯이 네로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군중들이 미워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 기독교도들에게
의도적이고 비열한 술책으로 죄를 덮어씌운 일을 벌인 탓에 더 큰 비난을 받았는데 훗날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된후, 하지않은 일도 하게된 일이 되어 로마 역사상 가장 추악한 폭군중 한명으로 평가받습니다.
오히려 그는 노래 부르며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음유 시인의 인생을 걷는 것, 오늘날로 치면 정치인이나
경영인 보다는 연예인이나 아이돌에 더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정을 털어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네로는 최후가 비참했던데다가 네로 사후 내전기를 거치며 자격 미달인 후대 황제들, 특히 비텔리우스의
행태에 질린 근위대와 시민들이 네로 탄핵을 후회했다고 하는데.... 덕분에 네로의 무덤에는
꽃이 끊이질 않았으니 대부분은 유모 아크테가 바친 것이지만, 시민들이 바친 것들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대화재는 64년 7월 18일에 일어나 19일 동안 로마를 불태웠는데,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러
대화재를 내서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면서 리라를 켜고 시를 읊었다는 소문은 말
그대로 루머일뿐,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비난은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화재가 났을때 네로는 로마 남쪽 50km 안치오에 있었는데 이튿날 소식을 듣자말자 두 필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아피아가도를 달려 로마로 돌아온후 화재진압 (불이 번지기 전 인근의
건물을 부수는 것) 을 지휘하면서 마르스 광장 주변 공공건물을 이재민 수요소로 하고
로마군단을 동원해 대규모 천막촌을 만들고 오스티아항에 비축된 밀을 긴급 이송해 이재민을 구호했습니다.
영화 “쿠오바디스”는 반 로마적인 기독교 입장에서 묘사한 것이라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으로....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인들에게 테베레강 서쪽 14구에 공동체를 설립
하도록 허락했는데 대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당시 이 지역엔 기독교도는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동족인 유대인에게 먼저 전도를 시작한지라 3대 칼리굴라와 4대 클라디우스시대에 기독교도
들은 유대인이니 저 테베레강 서쪽 14구에 거주했는데, 네로 시대가 되면 동족인 유대인들의 반발
을 피해 테베레강 동쪽으로 이주하였으며... 대화재때 2,3,10,11구는 전소되고 12구는 약간 불탔습니다.
로마인들은 다신교 사회라 기독교를 믿는다는 자체만으로는 박해하는 법은 전혀 없었는데, 유대교도들은
선민사상을 가진지라 다른 민족에게 유대교를 전파하는껄 극도로 꺼려 자기들만 선민
으로 남으려 한 탓에 로마 당국과 마찰이 거의 없었지만 기독교도는 다른 민족에게 까지 전도를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손꼽히는 지식인이자 네로황제의 측근인 페트로니우스를 찾아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라고 설득하니 그는“당신의 가르침은 옳을 것이지만 나는 죽지 않으면 안될 때는 스스로 독배를 마실
것이니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오” 그런데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기됵교 입니다! 해서 마찰이 발생한다는...
기독교도 입장에서는 그들이 믿는 신은 유일신이고 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눈을
뜨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라.... 하지만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참견” 이니 다신교도인 그들이 보기에는 기독교도들은 오만불손한 자들 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스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바울은 다신교도인 그리스인들이 세운 많은 신상들을 살펴
보다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 라는 신성을 발견하고는 “이것이야 말로 내가 말하는 유일신
이다” 라고 외쳤다가 성난 그리스인들에게 추방되는데, 저 표현은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않은 미지의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겸허한 심정의 표현이었으니 바울이 아전인수식으로 생각했다는?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와 백년을 싸워 정복후 건축 아치 만드는는 법부터 검투사 시합까지 배웠지만 저들의 인신공양
만은 절대로 흉내내지 않았으며, 카르타고를 정복한후 제사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저들을 경멸했고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정복후 켈트족 드루이드교도들을 추방한 것도 저들이 인신공양의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미사에서 제공되는 빵은 에수 그리스도의 살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는 기독교도들도 신에게 바친 제물인 소나 양을 신 앞에서 나누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로마인들은 소나 양을 먹지만 기독교도들은 제물로 바친 인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생각해 혐오했습니다.
하지만 네로시대에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 사회에 비해 규모도 작고 약체여서 박해로 궤멸시켜야할 정도 세력은
아니었으며, 또 유대 사회는 포파이아 황후라는 보호자가 있었지만 기독교도는 미약한 존재라 방화죄를
뒤집어 씌우기 알맞은 상대였는데, 어쨌든 분노하고 좌절한 로마민중들을 달랠 희생양은 필요햇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밝힌 몇사람을 잡아들여 고문해 다른 사람들을 고발케 하고 자백을 끌어낸뒤 재판에
회부하는데 대개는 사형이었으며, 재판도 하지않고 사형시키는 것은 로마법에 어긋난 것이고
또 사법기관은 고발을 받아야만 수사에 착수하며 자백이나 증거가 있어야만 비로소 판결을 내릴수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처형당한 수는 300명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네로는 처형을 바티칸에 있었던 경기장을
사용했으니, 일부는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 쓰고 들개 떼에 물려죽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로마의 일반적인
처형 방식이던 십자가 매달려 죽었고 나머지는 땅에 박은 말뚝에 한사람씩 묶은 다음에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재판에서 사형을 판결한 이유는 기독교를 믿기 때문은 아니고 저들이 불을 질렀다는 엉터리 혐의였는데, 네로는
로마 시민들이 혐오하는 기독교도들을 방화범으로 만들어 자신에 대한 시민들의 의혹을 풀려고
했지만 네로의 이런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으니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남게 되었습니다.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신 소유의 정원을 개방해 캠프를 짓고, 속주에 명령해 구호 물자
를 로마로 보내게 하고, 불에 잘 타는 소재로 집을 짓지 못하도록 법령까지 만든 것은
좋았다고 해도, 하필 화재로 소실된 자리에 황금 저택을 짓겠다고 했으니 가뜩이나
민감해져 있는 감정에 "저 자식 일부러 불 지른 거 아냐?" 라는 가짜 뉴스가 나돌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화재와 제위 찬탈 음모 사건 이후 네로 황제는 66년 가을 또 그리스 순회 공연을 떠났으니 올림피아, 코린토스,
델포이 등을 여행하며 가수이자 배우이며 전차경기 기수로 활동했는데, 이때 네로는 1,808개의 상과
우승 트로피를 독식했으며, 그리스인들의 환영회에 흡족해 하면서 67년 그리스 해방 조치를 선물로 하사합니다.
이때 66년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헤롯 왕이 죽은 뒤 유대 속주는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지만,
헤롯왕의 손자인 아그리파 1세의 친로마 노선으로 서기 41년에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의
통치를 맡게 되었지만 아그리파 1세가 44년에 병사하자 다시 유대 속주는 로마의 직할지인 속주가 됩니다.
로마 제국은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존중했지만 유대인들은 다신교가 아닌 일신교를 이유로 동화를 거부하며 로마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으며, 유대 속주의 원주민 세리들이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폭리가 취해진데다가
이교도 로마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의(제사)를 주관하는 대제사장을 지명하자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불만은 39년경에는 칼리굴라 황제 자신이 스스로 신(神)을 자청하며 제국 전역에 자신의
조각상을 성전에 세우게 한 사건을 계기로 터지는데..... “야훼 외에는 신이 없다” 고
여기는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를 우상화하는 종교 정책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했습니다.
로마 행정관인 게시우스 플로루스와 로마제국이 임명한 제사장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비리도 극단적인
무력항쟁을 벌이던 열심당의 세력이 커져가게 했으니, 존 도미니크 크로산에 의하면 유대독립전쟁
당시 열심당원들은 대제사장들을 집단 학살하고, 성전세로 민중들을 수탈한 죄의 증거인
채무 문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예루살렘 성전의 착취와 배후 로마제국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전쟁의 발발은 66년 카이사레아 시나고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그리스인
들과 다툼에서 시작되었다는데, 로마군이 중재를 하지 않았고 분노한 대제사장의 아들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에게 기도하는 것과 희생을 바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이어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을 급습하였습니다.
유대속주의 장관 플로루스가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하자 일어난
폭동으로 66년 6월에 로마 세력을 유대에서 몰아냈으니, 로마 수비대는 왕궁으로 달아났고,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말에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으며 유대 온건파의 중심이었던 대제사장도 동생과 함께 살해됩니다.
유대 북부를 다스리던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로 퍼져, 카이사레아를 비롯 유대 항구도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유대에 감정이 좋지 않던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자 군단장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진압을 위해 안티오키아에 주둔하던 제12군단과 북부 유대왕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해 반란자 편에 선 도시를 공략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신전
언덕을 공략하는데 실패하고 11월 겨울이라 케스티우스는 안티오키아 총독 관저로 돌아왔고 직후 병으로 죽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갈루스의 후임으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보내 유대 속주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는데,
당시 3개 군단에 6만여명으로 이루어져 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 구성원을 보면....
제 5군단 : 도나우강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로 대부분은 발칸 반도 출신.
제10군단 : 시리아 주둔군으로 소아시아와 그리스 출신의 보조병이 대다수.
제15군단 : 제5군단과 같은 구성. 여기에 유대 북동부의 로마 동맹세력인 아그리파
2세 휘하 유대인 병사를 비롯해 나바테아와 아라비아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유대 반군과는 달리,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할 로마군
은 각지에서 이동해 오는 군단과 동맹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사령관에 임명되고도 반년이 지난 67년 5월에야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유대 전역을 융단폭격하듯 공략하면서 북쪽 해안가에서부터 남쪽 예루살렘으로
접근하며 반란을 진압해 들어갔는데, 47일에 걸친 공방 끝에 7월 20일, 갈릴리의 요타파타
요새가 함락되었는데 (사망자는 4만명에 포로는 1,200명) 베스파시아누스의 투항
권고에도 불구하고 유대 장로와 병사들은 로마군에 포로로 잡히기 보다는 자결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훗날 “유대 전쟁사”를 집필하게 되는 요세푸스를 포함한 두명만이 자발적으로 로마군에게 나와 항복했는데, 갈릴리
지역을 진압한 로마군은 유대 중앙부로 전선을 옮겨 68년까지는 모든 북부 유대지방의 반란이 진압되고,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포위했지만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유대 전쟁은 1년 반 동안 중단됩니다.
유대 반란이 일어난후 네로는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와 게르마니아 장군 2명을 의심해 죽인 탓에 군단병들의
원한을 사게 되니, 68년에 갈리아 총독 가이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키니 로마
군단병으로 부터 혐오를 당해 모두 떠나자 네로는 수하에게 칼로 자기 목을 찔러 달라고 부탁해 자결합니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당시 근위대장이 2명 있었는데 네로가 믿었던 티겔리누스는 도망쳐 버렸으니 1만명
근위대를 더 이상 의지할수 없게 된 것으로 다른 근위대장 니피다우스는 재빨리 갈바쪽으로
돌아섰으니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치는 쥐들 처럼 호위병은 물론 심부름을 하는 노예들까지 달아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으니.... 공식적으로 ‘제 1인자’인 로마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승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정당한 통치권을 얻는 것이니, 이제 근위대장
니피다우스 한사람의 지휘를 받게된 근위대는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하니 모든게 끝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