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개울물도 아껴 써라” / 청담 큰스님
“쓰레기통의 콩나물, 다시 삶아오너라”
옛날 큰스님들 가운데 근검절약을 실천하지 않은 분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 가운데서도 청담 스님은 유독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
“쓰레기통 콩나물 다시 삶아오라”
스님께서 서울 강북구 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이 무렵 모든 백성들의 삶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되던
형편이었으니, 절집 살림도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청담 스님은 도선사의 모든 수행자들은 아침에는
반드시 죽을 쑤어 먹도록 했다.
그리고 그 죽에도 조건이 따라 붙었다.
“자고로 옛 스님들은 아침에 죽을 쑤되 그 죽에는 하늘이
보여야 하고, 방안에서 들여다보면 그 죽에 천정이 그대로
다 들여다보일 정도가 돼야 한다.”
죽을 쑤되 그야말로 멀겋게 쑤라는 당부이셨다.
식량이 넉넉지 못한 세상이라 절약해서 살자는 뜻이
담겨있는 당부이셨지만, 그 보다는 ‘시주의 은혜’가
막중하니 쌀 한 톨이라도 소중히 여기라는 청담 스님의
가르침이 담겨있었다.
이토록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고 있던 청담
스님이 하루는 도선사 뒤뜰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콩나물
대가리를 발견했다.
청담 스님은 그 콩나물 대가리를 주워 들고 공양간으로 가서
행자생활을 하고 있던 혜자(지금의 도선사 주지)를 불러
세웠다.
“이것 보아라. 누가 버렸는지 모르겠다마는 이 콩나물
대가리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이 콩나물 대가리를 내 너에게 맡길 것이니 반드시 내일
아침 내 밥상에 반찬을 만들어 올리도록 해라.”
그때의 행자는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청담 스님의
그 근검절약정신을 잊지 못한 채 큰 교훈으로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다.
1960년대는 너나없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자동차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서울 인구도 500만명
안팎일 때라 그때만 해도 공해문제는 거론조차 된 일이 없었고
자연보호니 환경보호라는 말은 나온 일조차 없었다.
이 무렵만 해도 도선사 바로 아래 계곡에는 방금 손으로
퍼마셔도 될 섬섬옥수 같은 맑은 개울물이 사시사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도선사 스님들은 누구나 이 개울로 내려가서 몸도
씻고, 채소도 씻고, 빨래도 했다.
어느날 젊은 스님이 도선사 아래 개울로 내려가 시원한
개울물로 머리를 씻고 있었다.
비누질까지 신나게 하고 있는데 이 모습을 도선사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던 청담 스님이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셨다.
“얘 인석아, 너는 왜 그렇게 물을 함부로 쓰는게야? 엉?!”
머리를 씻던 젊은 스님이 몸을 들어 올려다보니
청담 스님께서 야단을 치고 계시는게 아닌가!
“이건…흘러가는 개울물 아닙니까요 스님?”
“흘러가는 개울물이라도 아껴 쓸 줄을 알아야지.
흘러가는 개울물이라고 해서 그렇게 함부로 쓰고
비누칠을 마구해도 괜찮다더냐?”
“아이 참 스님께서두…이 개울물은 저기 저 산에서 한없이
흘러 내려오지 않습니까요?”
“에이끼 이런 녀석아! 아무리 산에서 흘러내리더라도 그렇지.
저 아래 계곡에서 이 물로 마을 사람들이 채소도 씻고,
과일도 씻고, 들놀이 나온 서울 사람들은 이 물로 밥도 짓고,
국도 끓이는 걸 못봤단 말이냐?”
“그 그야, 그 그렇습니다만…”
“에잉 쯧쯧쯧! 어찌해서 너희들은 네 눈에 보이는 것만
안단 말이냐 그래. 정신 차리거라 인석아.
심청정 국토청정 (心靑淨 國土靑淨)이야!”
“중 밥상, 3찬이면 족하다”
‘자연보호’라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온 일이 없었던 1960년대에
청담 스님은 이미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꿰뚫어 보시고 흘러가는
개울물마저 아껴써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니,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면에서도 청담 스님은 한 세대 앞서간 선각자였고
몸소 자연보호를 실천한 보살이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1960년대의 스님들은 대부분
‘헐벗고 굶주리며’ 수행했다고 해도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가난해야 도(道)가 깊어지고 배부르면
마(魔)만 성한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여름에는 감자 몇알로 끼니를 때우고 겨울이면 도토리묵으로
하루 해를 넘기는 일이 산중에서는 다반사였다.
그만큼 스님들의 살림살이는 청빈하기 그지 없었다.
청담 스님이 정화 종단의 총무원장자리에 계시던
그때의 일이었다.
청담 스님의 속가 따님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는데
그 비구니 묘엄 스님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점심 무렵, 청담 스님을 안국동 선학원에서 뵙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묘엄 스님이 선학원으로 찾아뵈니, 아버지 청담 스님이
마침 정심 공양상을 받고 있었다.
“니 점심은 묵었나?”
“예 스님. 저는 먹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거기 좀 앉거라.”
청담 스님, 총무원장을 맡고 있는 청담 스님의
점심 밥상에는 밥 한 그릇, 시래기 국 한 그릇, 김치 한 접시
그리고 간장 종지 하나가 달랑 놓여 있었다.
밥 한 그릇을 빼고 나면 반찬은 간장까지 합해도 모두
세 가지 뿐이었다.
속가 따님인 묘엄 비구니의 가슴은 허전하기 그지 없었다.
“아이구 스님…공양상이 이래 허술해서…어쩝니까….”
“공양상? 이기 이래도 나한테는 한 가지가 더 있는기다.”
“무엇이 한 가지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오늘은 간장이 한 가지 더 올라 왔구먼.
중 밥상 3찬이면 족한기다.”
청담 스님은 반찬이 모자라자 밥에도 간장을 쳐서 맛있게
비우시며 흡족하게 웃으셨다.
“중 밥상 3찬이면 족한기다.”
시래기 국, 김치, 간장 세가지 반찬이면 족하다는
청담 스님의 그 날, 그 말씀은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노비구니 묘엄 스님의 가슴속에 한으로 남아
청담 스님의 매서운 가르침으로 살아있다.
윤청광〈논설위원〉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