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언어를 보다
지송 김 영 신
평일 오후의 전철 안은 한가했다. 무심코 바깥 경치를 보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반복되는 소리는 깊은 동굴 안에서 새어 나오는 울림 같았다. 그 발원지는 바로 옆자리였다. 힐끗 보니 젊은 여자가 혼자서 실룩대며 웃기도 하고 열심히 손놀림하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셀프 카메라를 즐기는구나, 짐작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모습이 그리도 좋을까. 그 장면이 계속되는 걸 느끼며 내심 정상인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태연한 척했다.
무심코 앞좌석을 보니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손놀림하는 모습이 보였다. 피아노 연주자처럼 진지한 모습, 웃고 찡그리는 표정이 신기했다.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이란 걸 알아챈 건, 한참 뒤였다. 어느새 자리를 옮겼나 보다. 맞은편에 있으니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가끔씩 들린 소리는 웃음소리였다.
그녀가 든 휴대폰 화면에 젊은 남자가 얼핏 보였다. 밝은 표정과 손짓으로 마음을 전하는 그들은, 사랑하는 연인 같았다. 화장을 곱게 한 그녀는 긴 머리에 요즘 유행하는 모자를 썼다. 무릎이 드러난 청바지로 한껏 멋 부린 옷과 폰 케이스에 ‘미키마우스’ 캐릭터가 있었다. 눈빛과 미소로 사랑의 말귀를 전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 나눌 수 있는 수단이 ‘화상통화’란 걸 알게 되었다.
말귀는 말이 뜻하는 내용인데, ‘마음의 귀’라고 해석하고 싶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말의 뜻보다 마음을 읽지 못해서다. 많은 수식어로 꾸며진 우리의 언어는 화려하다. 그럼에도 상대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 아닐까.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기 위해서 귀가 두 개라고 한다. 입이 더 바쁘게 움직이는 건, 듣기보다 자신의 뜻만 전하고자 하는 일방통행이다.
관계에서 ‘소통’이 안 될 때 답답하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의 말을 차단할 때다. 진심을 전해도 귓전에서 흘리고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언성을 높이며 자신의 말만 내세울수록 전달을 교란시키며 상대의 귀를 막는다. 차라리 침묵이 더 나을 것이다. 말귀가 통했을 때는 금세 친해지게 된다.
의사 전달의 방법이 다양하고 활발해지는데 세대 간 소통은 고갈되고 갈등이 심화된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전하는 말에 거부감을 느낀다. 어른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른들은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젊은이들의 말귀를 외면할 때가 있다. 본인이 겪은 것만 용납하고 수용하니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진다.
MZ세대는 삼사십대의 밀레니얼세대와 십대의 Z세대를 아우르는 용어다. 특히 디지털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Z세대는 아날로그 세대를 이해할 리 없다. 그들만의 언어인 이모지(imoji)가 따로 존재한다니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서로를 외면하며 외계인처럼 여길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세대 간의 말귀를 이해하고 공존하려면, 서로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고 싶은 말만 믿으려 한다.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보다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니 의사전달이 어려운 것이다. 뒤늦게 알아채거나 동문서답 할 때 ‘사오정’이란 별명이 따른다. 자신의 귀를 닫아버린 듯, 다른 말로 받아들일 때 답답하지만 또 다른 매력을 느낀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어제 만난 듯 공감대가 형성되는 건, 동시대의 문화와 환경을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잘 알아서 무슨 말을 해도 말귀를 알아듣고 벽을 쉽게 허물 수 있다. 대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대화를 끊기 일쑤다.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투로. 자신의 말은 전하려 애쓰면서 상대의 말은 건성인 모습을 보며 서로 웃는다. 상대를 보며 자신을 볼 수 있으니 나름의 편한 소통법이다.
엄마들은 말 못 하는 아기들의 말귀를 정확히 알아듣는다. 눈을 마주 보며 사랑의 언어로 교감하기 때문이다. 미소와 울음소리만으로 아기의 말귀를 잘 알아들으니 기적의 언어다. 말은 입 밖으로 뱉은 순간 허공으로 흩어지니, 눈빛만으로도 진솔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서로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바라볼 때 가능한 일이다. 강한 자석의 힘을 느끼는 건 ‘사랑의 언어’를 나눌 때다.
전철 안에서 본 소리 없는 언어들, 손짓과 미소는 신선한 충격을 주며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부정을 나타내는 표현도 있겠지만, 불필요한 단어는 생략되고 감정을 단순하게 전할 것이다. 손짓과 미소로 마음을 전한 그들은 누구보다 건강한 정상인이었다. 정상이 아니라고 여긴 내가 비정상이란 생각이 들면서. 그들의 행복한 대화, 그녀의 순수한 미소를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수필 2022년 2월호 게재>
첫댓글 대인은 경청하는 일에, 소인은 말하는 일에 전념하지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성공할 확율이 낮다는 말도 있지요. 평소 신이 인간에게 입은 하나, 귀는 두 개 준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실천해야겠지요.
진솔한 대화는 생활의 큰 활력소지요~특히 부모와 자식간에 가식없는 소통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의외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지요!~아름다운 대화가 그리운 시절이니, 찾아나설 시간인가 봅니다!
志松님 께서 언어의 소통과 교감,공감대에 관하여 세밀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의 글을 써주셨네요.
저는 이기주 기자의 '언어의 온도'를 읽고 놀란 일이 있는데,그때의 感興이 느껴지네요.
언어에의 목소리 톤과 표정과 손과 눈의 동작을 보면 나를 위해주는 언어인지 자신의 말에 도취되어 표출되는 언어인지 알수가 있지요.
그 언어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하지요.참 좋은 언어가 있고,나쁜 언어가 있어요.
언어의 순수성과 그 느낌으로 인한 행복감이 인간의 희.노.애락을 결정 짓는 다고 볼 때,고희.종심이 지난 우리의 언어는 잘 정제되고 향기를 주는 언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좋은 글,감사히 잘 읽었어요.
스마트폰과 와이파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우리 삶의 방식을 참으로 많이도 바꿔놓는 것 같습니다. 특히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마주보며 소통할 수 있는 경이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지요.
두 가지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1988년 호주의 캔버라에 머물던 시절 전화국에 직접 가서 간단한 국제 통화를 한 뒤에 짤깍하고 전화의 연결음이 끊기면서 느껴지던 공허함과 아쉬움, 편지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함과 잔잔한 여운 같은 것과는 너무나 달랐던 쇳소리의 차가움과 아쉬움...
2013년 초 미얀마의 네피토란 곳을 여행할 때였어요. 국제통화료는 너무나 비싸 엄두를 못내지만, 호텔에 때마침 들어온 wifi 덕분에 100일쯤이 된 쌍둥이 손녀들의 모습을 보며 영상통화를 할 수가 있었죠. 현대 문명의 경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인터넷 카페를 통한 소통과 공유 또한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이젠 우리의 일상이 된 요즘의 소통 모습을 '소리 없는 언어'라는 문학적 표현의 글로 섬세하게 묘사해 주셨네요. 마음이 아주 따뜻하고 훈훈해졌습니다~
상대와 의사소통의 90%이상은 손짓과 미소등 비언어수단이랍
니다.
어제 장남이 나와 4년을 동거후 구리로 이사갔는데 저녁늦게 손녀
와 영상통화를 했는데 할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손녀의 눈물은 내 영혼
을 사로잡았습니다.
손녀의 진한 눈물은 영원토록 남을
겁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지송님의 글, '귀는 열고 입은 닫아라'는 말이 들리는군요. 제가 생각하기로 나보다 못한 자들 앞에서는 말이 많아지고 나보다 잘난 자들 앞에는 말이 적어지는 나를 보며 새삼 부끄러워지네요. 요새 자식들 앞에서 훈육의 말보다 덕담위주로 말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입이 간지러워질 때가 많아 자제하느라 노력중입니다.
소 귀에 경 읽는 시대가 디지털 덕분에 다시 돌아온 듯 하네요. 옛날엔 선비와 중인 간에 지식 습득에 따라 의사소통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젠 첨단 과학의 발달에 따라 세대 간의 의사소통이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하철 승객의 모습을 작가의 눈으로 보셨군요.
문제 의식을 제기해주신 지송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