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들의 활약

1976년 연예인교회가 창립한 이후 시작된 연예인들의 간증 찬양집회는 80년대에도 계속됐습니다. 이들 중에는 신학을 공부하는 연애인들이 생겼는가 하면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간증찬양 전도 집회 전체를 인도하는 연애인과 교회와 기도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찬양가수라는 가스펠 전문 가수들까지 등장합니다.(최귀라, 민희라)

하지만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부흥회나 기도원집회였고 음악적인 스타일은 대체로 전통가요(당시 가요계의 주류는 트로트였다)와 비슷해서 은혜롭지 못하다는 저항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시작된 CBS의 간증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를 통해 청취자들도 그런 노래가 익숙해지면서 중장년층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여 은혜찬양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사회는 대중문화 자체가 정식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을 때였고 대중음악이나 대중적 기독교 음악은 목회자나 신학자의 연구 대상도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복음성가는 체계적인 바탕이 없이 나름대로 제각각 뿌리를 내렸고 주로 외곡곡을 번안하거나 기존 가요 스타일에서 가사만 대치하는 성격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1980년 김민식씨는 ‘저 어둠 속이면 어때’를 내면서 우리 손으로 작곡된 우리 스타일의 80년대 한국 복음성가 시대를 열어 갔습니다.

김석균도 80년대 초부터 복음성가를 작곡하고 꾸준한 작곡발표회를 통해 곡을 써냅니다.(‘사랑의 종소리’ ‘예수 믿으세요’ ‘주를 처음 만난 날’)

1981년 주숙일씨에 의해서 온전한 창작곡과 녹음이 담긴 앨범이 나오는데 주숙일씨는 ‘주님 곁으로(1집)’ 이후 작곡집을 여러장 내면서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80년대 초 CBS 선교 합창단에서 활동하던 전용대는 83년 ‘주여 이 죄인이’를 발표해서 엄청난 반응을 얻었습니다. 전용대의 노래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테이프는 백만 단위의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85년부터 최용덕이 작곡한 곡들 역시 한국 교회에서 널리 불리게 됩니다(‘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가서 제자 삼으라’ ‘나의 등 뒤에서’)

1987년 다윗과 요나단은 어른들도 따라 부를 수 있는 친숙한 곡들로 첫 앨범을 냈고, 성악을 전공한 박종호는 컨템퍼러리한 음악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기성세대들과 젊은 세대 간의 가교가 되었으며 역시 성악을 전공한 송정미의 축복송도 CCM계의 가장 큰 히트곡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노래는 창작곡이 그리 많지 않던 시기에 곧바로 널리 알려졌고 한국인의 정서와 맞물려 80년대 대표적인 복음성가들로 자리 잡았고 1987년에는 한국 복음성가 협회가 창립되어 70년대말 80년대 초 활동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복음성가 문화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한편 가스펠에 대한 관심 점점 커져 가면서 1981년에는 극동방송이 주최하는 ‘전국 복음성가 경연대회’가 시작되어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981년 12월 열린 복음성가 경연대회는 첫 회임에도 불구하고 1차 예선에서 140 팀이 넘게 참가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최덕신 집사(복음성가 경연대회 5회 작곡상 6회 대상곡 작곡)는 그의 형인 최유신과 같은 교회 선후배 10여명과 함께 1981년 주찬양선교단(복음성가 경연대회 1회 금상)이라는 팀을 결성활동을 시작합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앓던 송명희 시인의 시 중에서 ‘너의 쓴잔을’ 이라는 곡을 작곡을 한 최덕신은 서울대를 졸업한 후 1987년 ‘주 찬양 1집’ 인 ‘그 이름’을 출반하였는데 이 앨범이 30만장 판매의 대 히트를 기록 한국 CCM계의 문을 크게 열었습니다.

이후 최덕신은 본격적으로 박종호(1집/6회 대상) 최인혁(1집) 송정미(1,2집 /8회 대상)의 첫 앨범을 편곡 제작함으로써 이들의 음악적 방향에도 영향을 줍니다.

예수전도단의 화요 모임은 매주 수천명의 젊은이들을 불러 모았으며 80년대 중반에 들어서 고형원 최인혁이 활동을 합니다.

1987년 2월, 예수전도단에서 찬양리더로 활약했던 하용인이 영국 유학중에 경험한 프레이즈& 워십을 한국교회에 접목시키고자 대한 생명 노래선교단 두란노 서원 연극팀 할렐루야 축구단 온누리교회 대학부 등이 참여한 모임을 시작합니다.

점차 많은 이들이 모이면서 단순한 싱어롱 시간이 아닌 예배로 경배와 찬양으로 발전합니다. 이듬해에는 이화 여대 강당을 가득 메우게 되고 지역집회를 가지면서 경배와 찬양이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찬양들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불었던 워크맨이나 마이마이 같은 휴대용 카세트의 열풍으로 빠르게 젊은 세대에게 전파 됩니다.

1987년 3월 대구 CCC회관에서 월요 정기 찬양집회로 출발한 찬미 찬양집회는 최용덕의 인도로 진행되었고 1987년 10월 충신교회에서도 다드림 선교단의 박정관 전도사가 인도하는 목요찬양이 시작됩니다. 이어 많은 교회들이 전국 각지에서 경배찬양과 찬양 모임을 열게 됩니다.

1987년 시작된 경배와 찬양은 부정적인 비판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성도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경배와 찬양 형식에 맞추어 악기를 구입하고 리더와 함께 싱어들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당시 찬양사역은 주로 개인위주의 사역과(박종호, 최인혁, 송정미, 소리엘, 좋은 씨앗), 훈련된 팀에 의한 팀 사역(주찬양선교단, 찬양하는 사람들, 옹기장이 선교단, 임마누엘 선교단, 한국 컨티넨탈 싱어즈) 그리고 예배사역(두란노 경배와 찬양 한국 예수전도단) 이 세 가지 사역으로 크게 분류됩니다.

1989년에는 8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한 젊은 크리스천 음악인들이 찬양 사역자 연합모임을 만들어 찬양과 경배사역을 하는 예배사역자 전문적인 음악인 음악관련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모임이 확대되면서 이후 찬양사역자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